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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에스티안 (16/18)

외전 2. 에스티안

“아델린 메이스프릴과 에란티아 블라머프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전하는 말 한마디만 이 앞에서 한다면, 고통스럽지 않고 치욕스럽지 않은 죽음을 맞게는 해 주겠다.”

“…….”

“…….”

“할 말 없나?”

“저, 저는 사실 자살하려던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그, 그냥 델이 내가 죽으려는 걸 보게 하려고, 그리고 걔라면 내가 죽지 않게 도울 거라고도 생각해서……. 그, 그냥 겁만 주려고 했는데 나를 따라서 뛰어내릴 줄은 몰랐어요.”

“……나는 할 말이 없어요. 나는 내 딸, 리아나가 잘되었으면 하는 모성애에서 모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아델린이 누구보다 상냥하고 따뜻하다는 걸 가장 오래 가까이서 봐 온 작자들이 이따위 말을 지껄이다니.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반성하는 기미도 없고. 대화하려던 시간이 아깝고 살려 둘 가치가 없군.”

감옥을 빠져나와 가슴에 상쾌한 공기가 들어차니 좀 살 것 같았다.

저런 자들을 위해 아델린이 목숨을 걸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정신도 못 차릴 지경이 되었다는 걸 떠올릴 때마다 피가 전부 몸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아델린 메이스프릴.

그녀는 이전부터 정 많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메마르게만 살아온 내가 마음에 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 밝고 맑은 모습으로 사교계를 휘젓고 다녔기 때문에, 누구나 그녀를 좋아했다.

사교계가 제2의 사냥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경우가 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델린은 그런 날 선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티타임이나 연회장에 등장하면 싸늘했던 분위기가 훈훈해지고는 했다. 그녀는 진심을 다해 모든 사람들을 대했다.

그런 그녀가 언덕에서 굴러 다쳤다고 했을 땐 많이 놀랐다.

지금이야 흉악한 짓을 저지른 게 그녀의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때만 해도 몰랐으니까.

내가 봐 온 그녀는 주위를 밝게 만들고 주변 사람들을 챙기면서 정작 자신은 딱히 돌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언덕에서의 사고도 그렇게 난 게 아닐까 추측했기에 자연스레 걱정이 커졌다.

눈을 오래 못 뜨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주위를 밝히는 그녀의 미소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어느 날 제대로 정신을 차렸다길래 나는 남몰래 안도했다. 내가 왜 안도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마음속에는 안도감이 가득 찼다.

늘 리아나 엘리디트를 데리고 황실로 놀러 오곤 했으니 이번에도 낫자마자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내심 그녀를 보길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어딘가 바뀌어 있었다.

아픈 몸을 추스르고 있는 거라고는 했는데, 바깥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이다. 사고가 나기 전의 그녀는 아파도 모임에는 꼬박꼬박 나오는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로 아픈 것이길래, 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나를 아예 잠식했을 무렵, 우연히 그녀를 시내에서 만났다.

‘아, 제가, 아팠다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정신이 좀, 오락가락해서요. 경께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각보다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말을 건넸는데, 정말로 오래 아팠기 때문인지 나를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이전에 리아나와 황태자를 붙여 두고 자연스럽게 남은 우리 둘은 대화를 많이 해서 제법 친해져 있는 상태였는데, 그걸 전부 잊은 건가.

그녀의 건강보다 그녀와의 관계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씁쓸했지만, 나에게 긴장의 벽을 세우고 말하는 게 너무 느껴져서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비단 나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그녀가 사교계 생활 전반에 지쳐 있는 느낌이라는 점이었다.

한편으로는 그게 그녀에게 더 좋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은 너무 자기 자신을 챙기지 않았으니까.

그녀에게는 차라리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더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물론 자주 못 보게 된 것 같아 아쉬웠지만, 그건 내가 해결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빌미를 만들어 내가 그녀를 찾아가면 되니까.

그런데 도통 어떤 핑계를 대고 그녀를 보러 가야 할지 몰라 골머리를 앓던 중, 뜻밖에도 그녀가 먼저 내게 손수건을 돌려보냈다.

고마운 일이 생기거나 단순한 호의를 표시하기 위해서라도 귀족 영애들이 보통 손수건에 수를 놓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게 호감을 가졌다고 말했던 몇몇 영애는 그저 자신이 수놓은 손수건을 내게 선물로 주려고 한 적도 있었다.

물론 받지 않았다. 얘기 한번 나눈 적 없는 그녀들이 다짜고짜 다가와 내게 주는 그것들은 의미가 없었으니까.

손수건은 그냥 그 정도의 의미만 가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델린의 손수건을 받고 나서는 모든 생각이 멈추는 듯했다.

그건 이미 내 손수건이 아니라 그녀의 향과 색을 가득 품은 다른 물건이 되어 있었다.

사실 한눈에 봐도 바느질 솜씨가 서툴었는데, 그게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꽃말이 감사, 또 뭐더라…… 따뜻함, 애정이라고 하더라고요.’

‘꾀병은 아니고요. 바느질이 좀 서툰 건 맞아서요.’

수놓인 꽃의 꽃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상처투성이가 된 그녀의 손을 보았을 때, 태연한 척하느라 얼마나 애썼나.

손수건이, 아니 그녀가 나를 송두리째 감싸 버리는 건 순간이었다. 그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입 안에 넣고 굴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무슨 생각으로 그녀의 손에 붕대를 감아 주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뒤 나는 내 방에 딸린 정원에 그녀가 수놓아 줬던 꽃을 심었다.

기사단과 개인 숙소만 오갈 뿐 내 방에 들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물며 정원은 저택 정원사가 관리하는 대로 놔두는 게 고작이었다. 기껏해야 혼자 검을 휘두르고 싶을 때 실내에선 그럴 수 없으니 나가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내가 정원을 자주 찾게 되면서 그 꽃을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꽃을 심고 가꾸고 피우는 행위가 그녀와 좀 더 가까워지는 무언가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시종인들이 씨앗을 가져와 정원에 들어가려는 것을 말린 채 내가 직접 씨앗을 받아 들어가서 심었다.

잘 안 자라는 듯해 고개가 절로 기울어질 때쯤 빼꼼 고개를 내민 새싹과 꽃봉오리를 보고 어쩐지 울컥한 마음이 들었을 때부터였나.

아니, 모든 시종인을 물린 뒤 홀로 가만히 앉아 화단의 흙을 파고 씨를 넣고 물을 뿌리는 순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이 메말라 있던 정원에 다정하고 따뜻한 꽃들이 핀 것처럼 내 마음 안에도 어느새 네가 들어와 가득 피었다.

꽃까지 그렇게 피니 나는 더더욱 정원을 찾는 빈도가 높아졌다.

좋아하는 사람을 닮아 가기라도 하는 건지, 정원에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게 그토록 좋은 일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녀가 어떤 기분으로 늘 정원에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일부러 나도 더 정원을 들락거려 봤다.

사실 처음엔 땀 흘리며 훈련하고 검을 휘두르다 고즈넉하게 찾아오는 그 평온함과 안정감이 좋은 거라고, 고단했던 하루가 그렇게 정원 안에서 마무리되니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정원을 찾아가 그녀와 함께 앉아 있는 것만큼의 느낌은 들지 않았다.

사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십 분도 되지 않아 그냥 일어나 버리기 일쑤였다.

바보 같은 나는 몇 번이나 혼자 내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녀와 함께 있고 난 뒤에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좋다고 생각했던 건 정원이 아니고 그녀였다.

그래, 애초에 네가 생각나는 꽃으로 가득 찬 정원에 있는 것보단 너와 정원에 있는 편이 더 좋은 것이었다.

아델린에 대한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더 깊어진 건 에란티아를 찾아 헤매면서, 그리고 또 찾으면서였다.

에란티아를 미친 듯이 찾고는 있었지만 내심 이제는 끝난 게 아닌가, 포기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10년 가까이 제국에서 갈 수 있는 곳 없는 곳 모두 샅샅이 뒤지며 찾아다녔는데 못 찾았으면 찾을 수 없는 게 아닌가 스스로 자조했던 거였다. 당연히 부모님께는 말하지 못할 마음이었다.

애초에 나는 에란티아를 잃어버렸을 때부터 어린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나를 꾸짖지 않았다.

분명 네 탓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도, 너도 어렸다며 나를 사랑으로 감싸 주었다.

부모님이 황실에서 근무하는 고위자들과 다른 귀족들을 만날 때마다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녀도 충분한, 힘 있는 공작과 공작 부인이라는 직책을 가졌는데도.

그건 전부 동생에 대한 소식을 혹시라도 접할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얘기를 들을지 모르니 늘 벌벌 떠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 쉽게 ‘동생 찾는 일을 포기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편으로 참 나만 정 없고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 된 것 같아 씁쓸했다.

나라고 에란티아를 찾고 싶지 않은 건 절대 아니었다. 지쳤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주변에서 각종 소문이 들려 나를 이상한 놈으로 만들어도, 동생을 제대로 찾지 못해 매번 허탕을 치는 주제에 자조적인 마음만 커지는 오라비 입장에선 달게 받아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델린은, 따뜻하기 그지없는 그녀는 그런 자들과 같은 눈으로 나를 보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에게 도움을 여러 번 받았다며 다정한 얼굴을 했다.

그게 무슨 도움인가. 내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

동생도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나에게 맑게 웃어 주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그녀 덕분에 내가 괜찮은 놈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녀의 앞에서는 나도 사실은 정상 범주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너의 옆에 서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사실은 그저 너의 다채로운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것일지도 모르고.

점점 그녀는 내가 처음 겪는 것들을 가지고 내 안으로 들어왔다.

‘에스티안 경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전부 뒤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뿐이에요.’

내가 어떤 사람이라며 내 편을 들어 얘기해 주는 것이나.

‘늑대…… 왠지 잘 어울려요.’

무언가 잘 어울린다고 하는 것.

‘기억들 중에 에스티안 경에 대한 게 은근히 많아서…….’

‘언제든 저희 저택으로 오셔서 차도 마시고…… 얘기도 나누고 가셔도 돼요.’

가끔씩 솔직하게 진심을 내보이는 것까지.

전부 그녀가 내게 처음 안겨 준 것들이었다.

그런 걸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녀로 인해 새 세계가 열린 기분이었다.

한없이 낯설면서도 영원히 간직하고 싶고, 눈이 멀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애틋한 마음을 내가 받아도 될까 싶다가도, 그 마음이 오롯이 내 것이었으면 하는 심정이 짙어졌다.

내가 그런 그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에스티안 경이 다친 것도, 아픈 것도 싫단 말이에요.’

‘아니, 제가 얼마나 티를 냈는데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을 땐 정말이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척 그녀를 안고 키스했지만, 맞닿아 오는 그녀의 심장 박동보다 몇 배는 더 내 심장이 뛰고 있었다.

어설프게 작은 입술을 열고 나를 받아들이는 그녀를 그 무엇보다 아끼고 소중히 하고 싶으면서도, 좀 더 깊이 내 안으로 들여놓고 나만 바라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으니, 나는 진작에 그녀에게 완전히 빠진 거나 다름없었다.

‘제가…… 에스티안 경의 잃어버린 동생을 찾았는지도 몰라요.’

게다가 그녀는 결국 에란티아를 찾아내기까지 하지 않았나.

가족인 나도 포기하려던 마음을 먹었던 일인데 남인 그녀가 온몸을 던져서 알아냈다는 얘길 들었을 땐 단순히 고맙다는 생각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다정함이 나만을 향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어느샌가 내 동생까지 감싸 안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저릿저릿했다.

고맙다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모두 어떻게 흘러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동생을 찾아 준 데 대한 고마움으로 덮이지 않았으면 했고, 한편으로는 고마움이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게 여겨졌으면 싶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겨우 그녀와 마음이 같다는 걸 알았을 때 사실 내 마음은 그녀의 마음보다 몇 배는 더 컸을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과 애틋함, 고마움과 그녀가 영원히 나와 함께했으면 하는 진득한 소유욕까지 더해진 채로 소용돌이치는 마음일 터였다.

그녀에게 지나치게 흥분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나름대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택한 방법은 또다시 정원을 가꾸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내 정원에는 에란티아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꽃이 이전에 피었던 꽃들과 함께 자라기 시작했다.

정원의 모든 꽃은 사실 네가 피운 거나 다름없었다.

그녀를 안았을 땐 또 어땠지. 애틋함이 터져 넘칠 것만 같았다.

또렷한 목소리를 내며 입을 열다가도 나에게 안겨 여린 숨소리를 가쁘게 내뱉는 것이나, 어색해하면서도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잔뜩 밀려드는 나를 바라보는 것은 세상 그 어떤 모습보다 아름다웠다.

‘에스티안도 사랑스러워요.’

‘사랑해. 사랑해요, 에스티안.’

그녀를 안았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더 황홀한 건 그런 것들이었다.

자제를 거의 하지 못해 그녀를 잔뜩 몰아붙였는데도 어떻게든 가느다랗게 쉰 목소리로 내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계속 말했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내 열망을 가득 받아 내느라 한껏 붉어진 채로 잠든 그녀를 보고 있으니 마음 한구석이 아리면서도 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힘이 들어 흐려진 눈을 반쯤 뜨고 자는 것조차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종종 그녀가 잠든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었는데, 아마도 그녀는 가끔 스스로 눈을 뜨고 잔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잠에서 깨면 깜짝 놀라고는 손을 들어 눈부터 비볐으니까.

안겨 있을 때도 무의식중에 그녀의 손이 올라가려 해서 나는 여린 손목을 살짝 잡아 내리고 눈두덩 위로 입술을 꾹 눌렀다.

분홍빛의 부드러운 살결이나 촘촘하고 기다란 속눈썹이 아름다워 한참 입술을 묻고 있다가 떼면, 그녀는 잠시 놀라 눈꺼풀을 반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게 나임을 확인하면 안도하는 얼굴로 미소를 지은 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얌전히 닫히는 눈꺼풀에 또 마음이 동해 입술을 머금은 건 그녀에게 비밀이었다.

리아나와 대화하다가 아델린이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봤을 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몸이 먼저 나갔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절대 그녀가 리아나를 만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녀의 상냥한 마음을 멋대로 내가 막을 수도 없었다.

대신 나는 그녀의 곧은 마음이 유지되게, 그리고 그녀가 다치지 않게 그녀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장 달려 나가 그녀를 받아 내긴 했지만, 이미 그녀의 몸 곳곳에 생긴 붉은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보자 이성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힘겹게 팔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흘러나오는 신음에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다.

‘저, 저는 괜찮아요. 진짜 괜찮으니까…….’

그녀는 이미 너무 아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절대 괜찮은 상태가 아닌데 웃어 보이면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 얼굴 쪽으로 뻗으려던 그녀의 손이 한순간 힘없이 뚝 떨어져 내리며 그녀가 의식을 잃어버린 순간, 나는 너무 절망적이거나 슬프면 눈앞이 새까매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 이후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쓰러진 그녀를 안아 옮긴 뒤 마치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그녀의 의식이 없음을, 그녀의 몸 어딘가가 부러졌음을 듣는 동안도 현실감이 없었다.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시간은 지옥 같았다.

충격을 받은 데다 다친 곳이 적지 않아 깨어나는 데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하다는 치료사의 말도 귀를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어느 고전 이야기처럼 입을 맞추면 그녀가 일어날까 싶어 이마에도, 볼에도, 입술에도 입을 맞췄다. 눈꺼풀에 입술을 대면 혹시 다시 눈이라도 뜰까 싶어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동도 없어 오히려 내 마음만 땅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매일같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자리를 비운 건 시녀가 그녀의 몸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 줄 때뿐이었다.

그것도 내가 해 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해 야위어서 움직이지 않고 툭툭 떨어지는 그녀의 하얀 몸을 보면 손이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시녀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그나마 얼음장같이 차갑던 몸이 점점 온기를 찾고 있는 것에 위안이 되던 차, 리아나가 먼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장 감옥에 보냈다가 송장을 치울 수는 없어 최소한의 인도적인 처사로 약간의 치료를 받고 있고, 생각보다 얌전하고 태연하다는 얘길 전해 들었을 때부터 속에서 화가 솟구치고 멋대로 비이성적인 생각이 들었다.

아델린은 아직 눈도 못 뜨고 여전히 다친 채인데 그치는 그렇게 일어나 있는 건가.

아델린은 심지어 그치를 구하려다가 곧 끊어질 것 같은 옅은 숨만 내쉬는 상태가 되었는데.

리아나가 결국 감옥에 갇혔고 처벌도 확실하니 일은 전부 끝났다는 얘길 들었는데도 아델린보다 먼저 정신을 차렸다는 것에 괘씸하다는 생각과 분노가 밀려왔다.

혹시 리아나가 죽으면 아델린이 살아나는 건 아닌가 하는 광기에 사로잡힐 때쯤, 다행히 그녀가 눈을 떴다.

생기 어렸던 녹색 눈이 오랜 잠과 약에 흐릿해져 탁하게 뜨인 걸 보고, 그리고 그런 눈빛 안에도 나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긴 걸 보고 마음은 다시 무너져 내려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래도, 그래도 정말 깨어나서 다행이야.

천천히 기력을 되찾고 웃는 그녀를 보면서 몇 번이나 다짐했다. 앞으로는 그 어떤 위험에도 절대 노출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일어나던 이상한 일들의 원흉을 없앴다고는 해도, 또 어떤 다른 이상한 일이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그녀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느꼈던 마음을 이번에야말로 뼈저리게 깨닫게 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녀를 완벽하게 지켜서, 그녀가 평생 지금처럼 맑게 웃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이 얼마나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고백과 청혼에 그녀는 온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울어 주었다.

사실 긴장과 설렘과 고마움으로 점철되어 너무 떨린 나머지 그녀보다 더 울고 싶은 건 나였는데, 어쩐지 그녀가 우는 것을 보니 묘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내가 한 말 때문에, 내가 전한 마음 때문에 우는 너를 보는 게 기분이 너무 좋아서, 어쩌면 자꾸 울리고 싶을 수도 있겠다.

네가 이 마음을 알면 분명 파르르 떨며 나름대로 매섭게 화내는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반응조차도 분명 사랑스러워서 끌어안고 싶어질 터였다.

“나갈까.”

“네!”

버석하게 말라비틀어진 것 같던 내 삶의 한구석에 들어와 나를 따뜻함과 다정함으로 한껏 적신 너.

너의 다정함과 따뜻함이 평생 나만을 향하길 바랐고, 그게 비로소 꿈처럼 이루어졌다.

그 미소를 내게만 쏟을 수 있게 내가 더 노력할게. 내가 더 사랑할게.

아델린, 나만의 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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