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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쥴 (15/18)

외전 1. 쥴

메이스프릴 백작가의 배려로 쥴은 아델린이 혼인하여 블라머프 공작가로 들어간 이후 그녀를 따라가 그녀의 개인 기사로 쭉 살지, 백작가에 남을지, 그도 아니면 황실의 부름을 받은 김에 황실기사단의 일원이 될지 선택할 수 있었다.

쥴은 자신의 집안이 원래 갖고 있던 자작 작위를 이어받은 채 황실기사단에 들어가기로 했고, 최근의 마물 퇴치 공을 인정받아 백작위를 받았다.

엘과 교제하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기에 그의 그런 결정을 모두 수긍했다.

그렇게 모든 게 잘 해결되는 듯 보였지만.

이 어린 아가씨를 어떻게 할까.

그런 그에게 최근 든 가장 큰 고민이었다.

황실기사단에서 근무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면 백작위를 이어야 하는 등의 문제도 어렵진 않았다.

쥴에게 이것만큼 더 큰 고민은 없었다.

교제를 시작한 이후 부쩍 적극적으로 변한 엘을 그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아니, 감당하기 힘들다기보다는 극기로 참고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쥴, 손 좀 잡아 줘요.’

‘쥴, 뺨에 입 맞춰 주면 안 돼요?’

‘입술엔…… 안 해 주겠죠. 괜찮아요.’

괜찮지 않은 건 쥴이었다.

그는 그가 모시던 아델린보다도 몇 살이나 어린 엘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그저 아델린이 그녀를 도와주니까, 주인 된 사람이 그렇게 마음을 쏟는데 기사인 자신이 돕지 않을 수 없어 겨우 일으키던 마음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델린을 어느 정도 돕는 것 같기도 해 고개가 끄덕여지고, 그랬던 마음이 점점 안쓰러움으로 번져 동정인 줄로만 알았는데.

‘쥴 기사님!’

‘기사님 덕분이에요. 고맙습니다.’

별로 해 준 것도 없는데 늘 웃으며 대해 준 탓일까.

사실은 아주 긴장되는 마음으로 겨우 골라 내민 빨간 머리핀을 그녀가 항상 하고 다니는 걸 봐서일까.

가까운 데서 늘 재잘재잘 얘기하고 불러 주던 애가 한순간 블라머프가로 옮겨 가 지내게 되면서 그 허전함을 너무 강하게 느껴서였을까.

이미 쥴은 그 어떤 이유도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엘을 어느 순간부터 애틋하게 생각했는지도 몰랐던 틈에 그녀가 먼저 마음을 전했으니까.

‘쥴 경, 너무 좋아요. 항상 웃어 주시는 것도 좋고, 저를 도와주시는 것도 좋고, 그냥 제 옆에 계실 때마다 항상 좋았어요. 쥴 경이 너무 좋아요…….’

단 하나의 꾸밈도 없는 그 순수하고 따뜻한 고백에 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고백에 뭐라고 말해 봐야 그녀의 말이 퇴색될 것 같아서.

이리저리 신경 쓰이는 게 많다는 핑계를 대며 그녀에게 마음을 먼저 전할 기회를 이미 놓친 그는, 그 마음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그 순수하고 맑은 마음을 최대한 오래 간직한 채로 지켜 주고 싶었는데.

“쥴, 오늘 저 어때요?”

“……예뻐.”

“아, 그런 말 말고요! 항상 예쁘다고는 해 주잖아요.”

“그야 진짜 예쁘니까 그러지.”

엘은 요즘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계속 쥴을 자극하고 싶어 했다. 시각적으로도, 촉각적으로도,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라도 쥴을 자극하려 했다.

당연히 쥴은 거기에 자극을 받았다.

오늘 엘은 어깨부터 가슴 라인까지는 훤히 드러나고 허리 아래로는 달라붙는 라인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며 입기엔 과한 드레스였지만,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걸 입었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시선은 저절로 하얗게 드러난 어깨와 여리게 도드라진 빗장뼈, 그리고 드레스가 감싼 가느다란 허리에 꽉 붙들렸다.

정원을 지키는 기사들이 그녀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꼴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오르고 그들의 눈알이라도 전부 뽑아 버리고 싶지만, 그녀가 그런 옷을 입은 건 순전히 쥴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녀에게 왜 이렇게 입었느냐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어디가 어떻게 예쁜지라도 말해 줘요.”

“……그냥, 정말 다 예뻐. 안 예쁜 적이 없어.”

쥴은 겨우 신음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어디가 예쁘냐고. 대답은 귀족들이 주고받는 편지지로 5천 장 정도는 거뜬히 적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도 늘 참았는데, 오늘은 어쩐지 그 정도가 심한 것 같았기에 그는 속으로 계속 무섭고 괴로운 생각을 했다.

마물 사냥을 하다가 불현듯 엘이 생각나 멍하니 있다가 마물이 뒤에서 덮쳐 죽을 뻔한 경험, 기사단에서 대련 연습을 하는데 엘이 갑자기 응원을 하러 와 급소를 공격당해 위험했던 찰나…….

생각이 이어질수록 소용없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엘이 더 생각나 버려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에게 정말 괴로운 건 그런 생각들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작은 아가씨가 있는 눈앞의 현실 쪽이었다.

“……다 예쁜데 손도 더 안 잡고 키스도 안 해 줘요?”

뾰로통한 목소리로 엘이 속삭였다. 아래를 보다가 시선을 위로 해 쥴을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가 맑디맑았다.

쥴은 희미하게 웃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예상했다는 듯 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뱉은 한숨의 다섯 배는 더 끊임없이 내뱉을 수 있는 쥴은 그걸 속으로 삼켰다.

그는 늘 엘에게 짙은 키스를 하는 상상을 했다.

그녀의 작은 입 안을 자신이 가득 채우는 그런 상상을. 맑고 푸른 눈동자가 정염과 눈물로 잔뜩 흐려질 때까지. 그녀가 엉엉 울며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그녀가 원하는 대로는커녕 자신이 원하는 대로 욕망을 가득 실어서.

이 부드러운 손등에 입술을 누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아무렇게나 옮겨서 그녀의 연약한 목덜미나 가슴에 더 깊게 입술을 묻고 싶었다.

그러고는 새하얀 곳곳을 혀로 핥아 올리다가 이로 긁고 깨물어 자신만의 붉은 흔적을 남기는 그런 상상을, 안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버린다면, 입술을 묻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강하게 그녀를 탐하게 되겠지.

안 될 노릇이었다.

엘이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고 성인이 되려면 몇 년은 더 있어야 했기에 쥴은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쥴은 나한테 별로 관심이 없는 거 같아요.”

그 말을 하느라 움직이는 작은 입술도 사실 다 삼켜 버리고 싶지만, 쥴은 애써 웃었다. 그리고 욕망을 억누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관심이 없긴. 너무 많아서 죽을 지경이야.”

“치이. 말만 맨날 그렇게 하잖아요.”

엘은 손을 올려 쥴의 가슴을 가볍게 더듬었다. 얇은 셔츠 속 쥴의 가슴팍이 흠칫하고 단단하게 부풀었지만 엘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백날 이래도 아무 느낌도 없죠?”

아니! 아니! 절대! 쥴은 몇 번이나 외치고 싶은 말을 목 뒤로 삼켰다.

늘 그렇듯 엘이 이렇게 자신을 도발하고 나면 그날 밤은 스스로 애처롭고 비참한 위로를 해야 했다.

오늘 밤도 처참하겠군. 쥴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저 엘을 안아 토닥였다.

그 여린 몸을 한껏 세게 끌어안아 그녀의 안이 자신으로 채워지고,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한껏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

몇 년이 흘러 엘이 사교계 데뷔를 하고 성인이 되었음을 인정받는 날이 드디어 찾아왔다.

몇 년간 엘은 지치지도 않는지 쥴에게 계속 자극을 보냈고, 쥴은 그것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누르며 받아 내고 있었다.

쥴로서는 오늘만 바라보고 견뎌 온 셈이었다.

오늘만 지나면 끝이다. 오늘만 지나면 나는 진짜 성인이 된 그녀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 헛웃음이 새어 나와 쥴은 마른세수를 거칠게 했다.

자신이 관계에 환장한 짐승도 아니고 몇 년간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안고 싶은 건 지극히 당연한 마음이지만 자신 정도여도 괜찮은지 매번 고민이 컸다. 물론 그 고민이 오늘 끝날 거라는 사실에 기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오늘 저 어때요? 눈에 띌 거 같아요?’

‘정말 예뻐. 눈에 너무 띌 거 같아서 걱정이야. 다른 놈들이 널 엄청나게 쳐다볼 것 같아.’

다른 놈들보다도 사실 더 걱정되는 건 쥴 자신이었다. 참았던 것을 쏟듯 엘을 밀어붙이고 몰아칠까 봐.

엘이 그동안 자신에게 열심히 어필하던 것을 쥴은 마음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 두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이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그녀에게 뜨거운 마음을 보여 주겠다는 다짐만으로 몇 년을 견딘 거나 다름없었다.

엘이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연회는 그 어떤 것보다 호화스럽게 진행되었다.

황실의 영원한 우방이나 다름없는 공작가의 막내딸. 그것도 없어진 줄 알았다가 겨우 찾은 막내딸이라 주위에서 받는 애정 자체가 달랐다.

쥴은 자신의 앞에서 입을 내밀고 툴툴대던 그녀가 그 정도의 위치라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춤을 서너 번 추는 내내 의아한 시선을 약간 받았다.

대부분 ‘아직도 저 작위 낮은 사람과 연인이네.’, ‘공작가의 금지옥엽이 대체 왜 한낱 기사와 만나는 걸까.’ 같은 유의 눈빛이었다.

이런 시선은 쥴이 그녀와 함께 있을 때마다 종종 받은 것이어서, 그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았다.

둘이 연인 관계라는 건 이미 사교계의 모두가 알고 있었고, 그것으로 트집 잡는 사람도 소수였다.

쥴은 검술 실력이 좋아 본인이 가진 백작위보다도 황실기사단의 일원이라는 명칭이 더 자주 붙었고, 엘은 자신이 언젠가 공작가를 벗어나 백작 부인이 된다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도 어디에나 아니꼬운 시선은 존재했다. 그럴 땐 쥴보다 엘이 더 분노해서 이상한 사람들을 전부 막곤 했다. 오늘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었다.

“정말 미개한 사람들은 연회에 초대하지 말든가 해야지. 쥴, 참지 말고 다 베어 버려요. 책임은 다 내가 질게.”

“내가 사고 친 걸 왜 네가 책임져. 난 아무렇지도 않아. 흥분하지 마, 엘. 머리 장식 망가진다.”

“흥분 안 하게 생겼어요? 아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연애하고 혼인하고 다 할 거라는데 대체 왜들 난리람. 다 어떻게든 수를 써야겠어요.”

“네 손에 더러운 거 묻히지 말고. 네가 신경 쓰인다면 내가 알아서 할게.”

“……이렇게 다정해서 쥴은 이 험한 사교계에서 어떻게 백작으로 우뚝 설 수 있겠어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엘이 귀여워서 당장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쥴은 그 마음도 꾹 참았다. 아직 연회가 끝나려면 몇 시간은 더 남았다.

그리고 그보다 오늘 밤 12시가 지나야 엘은 진짜 성인이 된다. 그 전까지 모든 마음을 눌러야 하는 쥴은 무슨 정신으로 연회가 진행되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이 생겨 드레스를 갈아입어야 할 때가 되었고, 엘은 처음 입었던 무겁고 큰 드레스를 벗기 위해 연회장 바깥에 있는 내실로 들어갔다.

쥴도 조금 더 편안한 연회복으로 갈아입었고, 금방 나와 엘이 들어가 있는 방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지났는데도 엘이 나오지 않았다.

여성들의 드레스는 입는 것부터 벗는 것까지 어느 하나 까다롭지 않은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쥴은 더 기다려 봤지만, 그걸 다 이해하더라도 지나치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순간 그는 축하한다며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술을 건넸던 것이 기억났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가 성인이 되지 않았기에 술을 마시면 안 되었지만, ‘어차피 오늘로 성인이 되니까’ 하고 다들 생각 없이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녀는 분명 네다섯 잔까지 마셨던 것 같았는데.

뒤늦게 술기운이 올라와 어디서 자고 있는 건 아닐까. 속을 게워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기절하기도 하는데 그런 건 아닐까.

기절하는 바람에 어디 머리라도 잘못 부딪혔으면…….

생각이 부정적인 쪽으로 점점 흐르자 쥴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물론 문제가 생기면 안에 있던 시녀가 곧바로 자신을 불렀겠지만, 문제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만큼 멍청한 건 없을 것 같았다.

참다못한 그가 거칠게 내실 문고리를 잡아당기려는 순간, 안에서 문이 열렸다.

“경, 아가씨께서…….”

쥴은 시녀의 얘기도 다 듣지 않고 곧장 열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

무언가 이상하다고 깨닫는 순간, 문이 철컥 잠기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바로 뒤로 돌아 문고리를 이리저리 돌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눈앞에 펼쳐진 것을 보았다.

현악기가 주 선율을 이루는, 어딘가 끈적끈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이 틀어져 있었고 바닥 곳곳에는 장미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원래 내실에 침대도 있었던가? 여긴 단지 옷 갈아입는 공간 아닌가? 침대 위에도 장미 꽃잎이 한가득이었다.

“엘? 어디 있…….”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돼 겨우 입을 열어 엘을 부르는데, 쥴의 허리로 가느다란 엘의 팔이 감겼다.

“짠!”

뒤를 돌아보니 아까 전에 입었던 무거운 드레스와는 차원이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엘이 배시시 웃으며 서 있었다.

“엘, 이게 다…….”

그녀는 속옷에 가까운 얇은 슬립 형태의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장미꽃과 같은 짙은 붉은색에,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고 아래쪽으로는 허벅지 중간부터 길게 트임이 있는 파격적인 드레스였다.

드레스와 대비되어 새하얗고 가냘픈 몸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오늘 저 완전히 성인도 되었잖아요.”

아, 설마.

묻고 싶은 질문을 겨우 삼킨 쥴은 방 안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12시가 되려면 20분은 더 남아 있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20분 남았어. 그리고 이렇게 해서 뭘 어떻게…….”

“어떡하긴요. 나는 쥴을 이미 너무너무 좋아하니까 쥴도 나를 그만큼 좋아한다는 걸 보여 줘야죠.”

“……좋아한다는 걸 보여 주는 척도로 그러는 건……. 난 널 아프게 할까 봐…….”

침이 절로 넘어갔고, 쥴은 사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엘은 쥴의 반응에 까르르 웃으며 그의 재킷을 휙 벗기고는 셔츠 단추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아프면 뭐 어때요. 쥴이 간호해 줄 거잖아. 아, 그 간호가 아닌가?”

대담하게 말하고 후후 웃는 엘을 보자 쥴은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의 퓨즈가 하나씩 끊기는 기분이었다.

아직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아도 물밀 듯이 들어오는 엘의 달콤한 미소와 부드러운 손길에 미칠 것 같았다.

“아직, 연회가 안 끝났잖아. 엘이 오늘 주인공인데…….”

“그러니까요. 주인공은 좀 늦게 나가도 되거든요.”

“…….”

어느새 셔츠 단추가 다 풀어 헤쳐져 자신의 가슴과 배 근육이 눈에 들어오자 쥴은 헛웃음을 지었다. 언제 이렇게 또 손이 빨랐대.

“이러면 분위기가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침대도 가져다 놓고 음악도 준비하고 장미꽃도 다 준비해서 하나하나 뿌린 거예요. 어때요?”

“……이런 건 사실 내가 했어야 하는데.”

“누가 하면 어때요. 어차피 그 위에서 뒹군다는 건 똑같은데.”

뒹굴어?

서슴없이 튀어나온 엘의 말에 쥴은 무의식중에 풀어져 있던 셔츠를 다시 잠글 기세로 잡았다. 그러나 엘의 손에 의해 저지되었다.

“애써 벗겼는데 뭐 하려는 거예요. 이젠 쥴이 나를…….”

“…….”

“벗겨 줄 차례잖아요.”

원래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미는 게 익숙한 엘이었지만, 오늘은 술도 좀 마신 데다 성인이 된다는 것 때문에 좀 더 흥분한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니 아직도 15분은 남은 상태였다.

“……아직…….”

아직 안 된다고 말하려던 쥴의 입술을 엘이 가볍게 물었다. 굽 높은 구두를 신었음에도 키 차이가 났기 때문에 그녀는 거의 그의 목에 매달리듯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겨우 그의 아랫입술을 이로 물어 살짝 벌린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혀로 그의 입술 안쪽을 핥았다.

그녀의 작은 혀가 깊게 들어오지도 못하고 입술 안쪽의 부드러운 살만을 겨우 쓸 때마다 쥴은 배와 하반신이 불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쥴이 딱 붙은 그녀의 몸을 떼어 내려 했지만, 그녀는 떨어지지도 않았다. 결국 쥴은 그녀에게 입술이 고정된 채 입을 열어야 했다.

“……엘, 이러지 마.”

“왜요? 쥴은 아직도 내가 어려서 싫어요?”

“아니. 그 반대야. 넌 어리지도 않고, 내가 널 싫어한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야. 내가 너를 얼마나…….”

쥴은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서툰 키스로 잔뜩 반짝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베어 물었다.

“나는 엘을 사랑해. 근데 내가 자제를 못 할 거 같아. 엘은 잘 모르겠지만…… 나 많이 참았거든. 그래서.”

죄를 고백하듯 느릿하게 말하는 쥴을 보며 엘의 얼굴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참지 마요.”

그녀는 다시 그에게 매달리듯 기대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도 뭔가 시도하려는 듯 그녀의 혀가 작게 움직여 그의 입 안으로 들어왔고, 그 순간 쥴의 얄팍한 이성이 한 줄 끊겼다.

그는 손길이 거칠어지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며 그녀의 얇은 드레스 끈을 내렸다. 한없이 부드러운 살결이 그의 뜨거운 손바닥에 벌써부터 착 감기는 듯했다.

“엘, 아직 네가 성인이 되려면 10분 정도 남았어. 그리고 나는 네가 원한다고 할 때만 너를 안을 거야. 다시 잘 생각해 봐도 늦지 않아.”

쥴로서는 요동치는 정신을 붙잡아 특단의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는 엘이 지금 이 자리에서 무서워서 그에게 안길 수 없다고 해도 전부 이해할 자신이 있었다.

어린 그녀를 한두 해 기다린 것도 아니고, 좀 더 기다린다고 무슨 문제가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다만 오늘 밤은 정말 견디지 못할 테니 평소보다 좀 더 스스로를 위로하는 시간을 오래 갖게 되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쥴, 저 시계는 사실 고장 났어요. 나도 가져오고 나서 알았어요. 그래서 나는 지금 성인일 것 같은데.”

“……하.”

“어차피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쥴이 그냥 내 기준이 되는 거예요.”

“……엘.”

“쥴이 참지 말고 안아 주면 좋겠어요.”

여린 목소리로 흘러나온 말이 다 끝맺어지기도 전에 쥴에게 남아 있던 모든 이성이 사라졌다.

그는 자신의 셔츠도 벗어 던지고 그녀의 드레스와 속옷도 순식간에 벗겼다. 그러고는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린 뒤 침대에 눕혔다.

얌전히 놓여 있던 꽃잎들이 이리저리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설프게 했던 키스와는 차원이 다른 농도로 쥴이 그녀의 숨결을 전부 집어삼켰다.

입천장을 약하게 두드리고 안쪽 살을 강하게 쓸다가 또 빨아들이며 강렬하게 구는 탓에 그녀는 저절로 숨이 거칠어져 헐떡댔다.

그녀의 얕은 숨소리에 아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된 쥴은 그녀의 가느다란 양쪽 손목을 단번에 잡아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덜미부터 가슴, 팔뚝, 겨드랑이를 지나 옆구리, 배, 그리고 허벅지 안쪽까지 장미보다 짙은 꽃잎 자국을 새겨 나갔다.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모를 거야, 엘. 나는 네가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렸어. 너를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았어. 너한테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야. 오히려 너무 많아서 죽을 것 같았지. 얼마나 자제했는데.”

그녀의 몸에 쉴 새 없이 입술을 문지르며 낮게 고백하듯 속삭인 쥴의 말에 엘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얼굴을 했다.

놀라서 벌어진 그 입술이 귀여워 쥴은 또 그 안으로 자신의 숨을 넣었다. 그는 거친 키스에 눈물이 맺힌 그녀의 눈꼬리를 혀로 가볍게 핥았다.

그 느낌이 간지러웠는지 엘이 배시시 웃고는 입을 열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나를 그렇게 소중히 대해 줬다는 것도 모르고 철없이 굴었네요.”

“철이 좀 없었지. 결국 난 철없는 아가씨를 10분 일찍 안게 된 건가?”

장난스레 쥴이 대답하자 엘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저 시계, 고장 난 게 아니고 10분 느려요. 나는 10분 전부터 어른이었으니까…….”

가만히 내리깔았다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요염한 눈빛에 완전히 이성이 날아간 쥴은 그대로 엘의 입술을 가득 삼켰다.

쉬는 시간이 지나고도 엘이 나타나지 않자 연회장은 다소 웅성거렸고, 시녀는 재빠르게 엘에게 감기 기운이 있어 더 이상의 연회 진행이 불가능할 거라고 연회장에 전달했다. 그날 연회 2부는 결국 그렇게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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