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장 (14/18)

14장

엘과 관련된 죄와 더불어 사냥제 전 농약을 판 농원의 주인, 이후 자살한 평기사의 가족 등의 증언으로 사냥제 사건과 관련된 죄까지 합쳐져 완전히 살인미수죄가 적용되어 있었다.

백작 부인과 리아나의 행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엘리디트 백작은 작위를 버리고 백작 부인과 딸, 그리고 소유했던 모든 재산을 포기한 뒤 제국 땅에 영영 발을 못 붙이는 것을 대가로 목숨은 붙은 채 떠났다.

리아나의 기사와 노예선을 운영하던 노인은 이미 처형당했고, 불법 노예선 운영을 제국에서 법으로 전면 금지하고, 발각될 시 즉결처분을 가능하게 한다는 법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아나와 얘기를 나눈 내 증언까지 더해 백작 부인과 리아나의 최종 처벌을 정하는 일만 앞두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내 상태가 좋지 못한 걸 황실에서 전적으로 감안하고 있기에 굳이 황실을 방문하지 않아도 자필 편지로 적어서 황실로 보내면 그것으로 증언을 인정하겠다고도 했단다.

사실 귀족이 귀족을 죽이려 한 데다 엘의 경우는 작위도 높은 공작가의 딸이었기에 거의 처형이 확정이라 그럴 것이긴 했다.

직접 깨어 있는 상태로 이 모든 걸 생생하게 옆에서 듣고 지켜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인 에스티안의 입으로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걸 전해 듣고 나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다 끝났네요. 정말 잘됐어요. 아, 진짜 다행이에요.”

“그대가 이런 상태인데 뭐가 잘됐고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일어나지 않는 그대를 보면서 나는, 나는…….”

“이제 진짜 일어났으니까 괜찮아요. 나는 오히려 에스티안을 보자마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고요. 너무 야위었어요. 얼굴색도 안 좋고. 지금부터는 에스티안의 건강에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이제 리아나 문제도 빨리 해결하고 다 털어 버린 뒤 함께 신나게 둘이 놀자고 얘기했다. 그제야 마음이 좀 나아진 듯 에스티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내 손에 입을 맞췄다.

그러나 호기 있게 말한 게 우스울 정도로, 내가 에스티안을 위해 뭔가를 하긴커녕 에스티안의 걱정이 오히려 커지게 됐다.

뼈에 문제가 생겼으니 말도 안 되게 붓고 아팠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것과 진통제를 먹으며 쉬는 것이었다.

당연히 수면 성분이 들어간 진통제 때문에 몽롱하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나는 누워 있는 생활만 해야 했다.

잠깐 깨면 치료사가 상태를 살피고 몇 번 가볍게 몸을 움직인 다음 다시 통증을 줄이는 약과 뼈에 좋다는 약을 바르고 먹고 한 뒤 나도 모르게 잠드는 거다.

그때마다 병문안차 나를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는데, 너무 착잡하고 슬픈 얼굴들이라 그걸 보는 게 더 힘들 지경이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파리한 얼굴로 내 뺨을 쓰다듬는 부모님과 안나가 왔을 땐 그들을 달래 주지도 못해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엘이 왔을 때도 제정신 아닌 상태로 ‘연회는 어떡하냐’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그거 말고도 수다 떨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 와중에 엘은 내가 다 나으면 모든 걸 할 테니 제발 얼른 일어나라고 이야기하고는, 너무 울어 힘이 다 빠진 상태로 기사의 부축을 받고 나가기까지 해 마음이 쓰렸다.

사실 나는 처음 아델린이 되었을 때 이 정도로 아프지 않았기에 당연히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거의 똑같이 굴렀으니 분명 이 정도로 다쳤을 텐데 그땐 정말로 그녀의 몸에 내가 들어가서인지 하나도 아프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게 뭐람…….

“치료사님, 저 얼마나 이러고 있었나요?”

“2주 정도 지났습니다. 다행히 팔 쪽은 회복이 다 되었는데, 아직 다리는 일주일 정도 더 있어야 완전히 나을 듯합니다.”

가만 보니 어느새 팔은 부목 없이 얇은 붕대만 감겨 있었다. 다리도 부목 없이 두꺼운 붕대가 좀 강하게 감겨 있는 정도였다.

이것도 못 알아챌 정도로 잠만 잤다니.

그래도 치료사가 이 정도면 조심해서 돌아다니는 것까진 괜찮다고 했기에, 나는 다시 진통제를 주려는 그를 막았다.

“약은 이따 밤에 자기 전에만 먹을게요. 지금은 많이 아프지 않은 거 같아요. 그리고 천천히, 힘 많이 안 주고 정원만 걸을게요. 계속 누워만 있으니까 답답하고…….”

에스티안을 어떻게든 정상인으로 돌려 놔야 할 것 같아서요. 당장 내뱉고 싶은 말을 겨우 삼키고 옆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비몽사몽하며 지내는 내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내 옆에 있었던 것 같다.

잠깐이라도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게 그의 창백한 얼굴이었고 점점 메말라 갔으니 그걸 보는 내 속은 말이 아니었다.

하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 보며 웃지도 못했으니 당연할 것이다.

“델, 약을 안 먹겠다니. 그리고 지금 걸어도…….”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던 에스티안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금세 날카로운 눈으로 치료사를 쳐다보았다.

아, 불똥이 거기로 튀면 안 되지.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아까 치료사님이 분명 괜찮다고 하셨죠?”

“네, 네. 바, 밤에 약을 꼭 드신다면…… 그리고 잠시 걷는 것은 괜찮습니다. 오, 오히려 도움이 될 겁니다.”

“에스티안, 그렇대요. 같이 준비해서 산책 나가요.”

에스티안은 나와 치료사를 한 번씩 번갈아 보고는 한숨을 내쉬곤 치료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다 내 손을 잡았다.

“델, 무슨 생각으로…….”

“에스티안 얼굴 좀 제대로 보고 싶어서요. 그동안 너무 답답했다고요. 맨날 잠에 취해서 제대로 얘기도 못 하고.”

“회복이 무조건 우선이야. 델, 무리하지 마. 얼른 치료사를…….” 

“아니, 아니! 진짜 괜찮아요. 이러고 있으니까 더 병나겠어요. 그리고 팔다리 아픈 것보다, 에스티안이 그렇게 힘들어하는 거 보는 게 훨씬 더 마음 아파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픈 그대에게 내 걱정까지 하게 만들다니, 난…….”

“서로를 걱정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우린 연인인데. 에스티안이 아프면 나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예요.”

“아델린, 델…….”

“나 좀 안아 줘요. 얼마나 끌어안고 싶었는데.”

깊게 한숨을 내쉬던 에스티안은 곧바로 팔을 뻗어 나를 껴안고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넓은 줄로만 알았던 그의 등이 왠지 너무 여리게만 느껴져 나는 그 등을 천천히 두드리고 쓰다듬었다.

그래, 그냥 누워 있는 것보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안고 있는 쪽이 더 회복을 빠르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게 나에게나 그에게나 훨씬 더 좋을 것 같으니 오늘은 어리광을 좀 부려야지.

“거봐요. 이렇게 좋잖아요. 오늘 날씨도 좋은데 같이 정원에 나가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고 보니 나 에스티안 방에 딸린 정원은 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에스티안은 몸을 약간 떼어 나를 바라보았다. 착잡해 보이면서도 확실히 아까보다 얼굴이 나았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내심 짙은 키스로 이어졌으면 싶었는데 에스티안은 그저 마주 입술을 댈 뿐이었다.

“아픈 그대가 나를 위로해 주고 있으니 면목이 없어. 그러면서도 그대가 밝게 얘기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 에스티안의 모습에 내가 더 미안했다. 얼마나 마음을 졸였으면 저런 얘길 다 할까 싶었다.

나는 깨끗하게 나가고 싶다고 우기며 그에게 아예 머리를 감겨 달라고 했다. 팔이나 다리에는 어차피 약을 발라 씻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시녀들이 몸을 따뜻한 수건으로 다친 곳을 피해 닦아 주면서 머리도 감겨 줬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에스티안은 정말로 나가도 괜찮겠냐며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그래도 아직 정상은 아니니까, 그냥 이렇게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이왕이면 다른 사람들보다 에스티안이랑 같이 있으면서 에스티안이 도와주는 게 좋으니까…… 에스티안이 많이 힘들지 않으면.”

“전혀 힘들지 않아. 그대가 아플까 봐 걱정이지.”

그 말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안아 들고 큰 욕조가 있는 욕실로 향했다.

내 몸이 젖지 않게 목부터 어깨까지 큰 타월로 감싼 뒤 머리만 욕조 쪽으로 향하게 하고 자기가 직접 그 안에서 물을 트는 기묘한 자세로 그는 머리를 감겨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 나도 누군가의 머리를 감겨 본 적도 없고, 누가 내 머리를 감겨 준 적도 없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머리에 따뜻한 물과 거품이 닿고 그의 어색한 듯한 손길이 느껴지자 절로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누가 제 머리 감겨 주는 거 처음이에요. 기분 되게 좋다…….”

“그대가 좋다면 다행인데,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나도 누군가의 머리를 감겨 본 건 처음이라서.”

“아, 엘 어릴 적에 해 준 적 없었어요?”

“엘과 함께 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게 맞구나. 사건 다 해결됐다고 좋아할 땐 언제고 그걸 잊어버리고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어떻게든 말을 돌리려고 아무렇게나 얘기했다.

“아, 앞으로 감겨 주면 되죠! 음, 다 큰 여동생 머리 감겨 주는 건 좀 이상한가? 어쨌든 괜찮아요. 와, 에스티안이 이렇게 해 주니까 너무 좋은데요. 앞으로 종종 아파야겠다.”

내 말에 에스티안은 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다시 천천히 거품을 냈다.

왜 그러나 싶어 감았던 눈을 슬쩍 뜨자 곧바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주 마음이 저릿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해 주는 게 좋다면, 그대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내가 머리를 감겨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아플 거라는 그런 얘기는 하지 마.”

허둥대며 허튼소리를 할 바엔 입을 닫는 게 낫겠다. 입장 바꿔서 그가 다치고 아팠다면 나도 정말 정신이 나갔을 텐데.

나는 작게 대답하곤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곧장 눈가와 볼에 뭔가 확 묻는 느낌이 났다.

“으아, 에스티안?”

깜짝 놀라 눈을 떴는데 눈이 따가워졌다. 거품이잖아?

어색하다더니 잘못 묻힌 건가 싶었지만 곧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는 슬며시 웃고 있었다.

“못된 얘기를 한 벌이야.”

일부러였다니! 그런데 그의 목소리에 약간 웃음기가 배어 나온 것을 느끼자마자 엄청 큰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야 제대로 웃는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에스티안 얼굴 보고 싶은데. 거품 치워 주면 안 돼요?”

내 말에 곧바로 거품을 치우고 물기까지 닦은 그는 양쪽 눈꺼풀 위에 한 번씩 입술을 댔다. 그리고 내 입술 위로도 그의 열기가 부드럽게 전해졌다.

잠시 머뭇대는 것 같던 그는 내가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열자 가볍게 혀를 얽어 왔다.

너무나 따뜻한 그의 숨결.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얼굴을 서로 거꾸로 한 채 입술을 맞댄다는 건 자각이 안 될 정도로 달콤했다.

다행히 머리 감기 이후로 에스티안은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됐는지 옅게 계속 웃었고 말수도 좀 늘었다.

너무나 멋지면서도 마음 여린 나의 연인. 그는 내 머리를 완벽하게 말려 주고는 다시 나를 안아 들었다.

“조금이라도 아픈 기색이 보이면 곧장 안으로 들어올 거야.”

“에스티안이랑 이렇게 있으니까 하나도 안 아파요. 너무 좋기만 한데.”

“나도 좋아. 이제야 살아 있는 것 같아.”

에스티안은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속 나를 안고 정원을 돌아다닐 생각인가. 나는 다리 운동도 안 되고 그는 힘만 들 텐데?! 

“에스티안, 저 그냥 걸을 수 있게 부축만 해 주셔도 돼요. 어떻게 계속 이렇게 안고 다녀요.”

“이전부터 그대는 내가 안으면 항상 놀라는 것 같아.”

“그야, 무거울…… 테니까…….”

차마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걸 입 밖으로 내고 나니 목소리도 점점 작아지고 고개도 수그러들었다.

그런데도 안겨 있는 채라 얼굴을 숨길 방법이 에스티안의 가슴팍에 대는 것뿐이라 더더욱 민망했다. 그가 내 말에 작게 웃어서 옅은 진동이 맞닿은 얼굴과 몸으로 전해졌다.

“한 번도 무거운 적 없었어. 그리고 지금은 다쳤던 것 때문에 오히려 전보다 더 살이 빠졌잖아.”

“그러는 에스티안도 엄청 말랐잖아요. 처음에 일어났을 때도 엄청 야위어 있어서 놀랐는데 점점…… 그래서 힘들까 봐…….”

“힘든 건 아픈 그대를 지켜보는 일이었지. 그리고 내가 힘이 없지 않다는 건, 그대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어느새 다시 장난기와 웃음기가 살짝 묻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그런데 가만 보니 그의 귀가 붉어진 상태여서, 나도 모르게 풋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의 가슴팍을 작게 두들겼다.

“그야 당연히 잘 알죠……. 이미 나만 알고 있는 거로도 충분하니까 괜찮다고요. 나가서 그냥 내려 줘도 돼요.”

내 고집에 다행히 그는 져 주었고, 안지 않는 대신 그가 내 어깨와 손을 꽉 붙잡은 채 우리는 정원을 걸었다.

정원은 안에서 보이는 것보다 크기가 꽤 컸다.

잎사귀 정리나 가지치기 같은 게 깔끔하게 잘 된 큰 나무들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는 구역이 있는가 하면, 생명을 키우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마지못해 관상용으로 놔둔 것 같은 작은 연못도 하나 있었다. 정원이라기보다는 어쩐지 작은 숲 같은 느낌이 컸다.

“정원이 꼭 에스티안 같아요.”

“그런가?”

“네. 깔끔하고, 단정하고. 꽃이 없어도 차가운 느낌도 하나도 없고, 오히려 나무가 울창해서 숲같이 품어 주는 느낌이 나서요.”

“그대니까 그렇게 아름답게 봐 주는 거야. 그리고 사실 꽃도 있어.”

에스티안은 씩 웃더니 조심스럽게 나를 부축한 채 어느 한쪽으로 이끌었다.

나무들이 가득한 곳을 조금 지나자 작은 화단이 나왔고, 거기에 심겨 있는 꽃은 나도 익히 아는 것들이었다.

“우와, 아리사 꽃이랑 프리모스 꽃이네요! 너무 예쁘게 피었네요. 어떻게 이렇게 잘 키웠어요?”

“그대를 생각하며 키웠어.”

뭔가 준비된 것 같은 말인데도 로맨틱하구나. 그도 그럴 게 진짜로 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하루 이틀 그냥 피워서 될 게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추켜세워 주는 것처럼 눈을 작게 뜨곤 환호하며 에스티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야. 그대를 마음에 담았을 때부터 아리사 꽃을 키웠고, 엘의 존재를 그대가 알려 줬을 때부터 프리모스 꽃을 키웠으니까. 둘 다 그대를 생각하며 키운 셈이지.”

꽃잎들을 괜히 손으로 한번 슬쩍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코도 가까이 대 보면서 우리는 정원을 거닐었다.

사실 계속 돌아다니고 싶었는데 아직 그렇게까지 할 정돈 아닌지 다리가 살짝 찌릿했고, 그걸 놓칠 리 없는 에스티안이 바로 나를 안아서 테이블 앞에 앉혀 주었다. 테이블이나 의자 모두 관리가 잘된 듯 깨끗했다.

사실 처음엔 정원이 썩 잘 관리되지 않아 곳곳에 풀도 무성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서 좀 놀랐다.

그리고 또 왠지 테이블도 없을 거라고 이상하게 추측했는데, 그 예상도 빗나가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곧 시녀가 뜨거운 차를 가져왔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티타임을 갖게 됐다.

“에스티안의 개인 정원에서 차를 마시게 될 줄은 몰랐어요. 에스티안도 여기서 차 마시고 그래요? 왠지 상상이 안 돼요. 아, 그래도 나랑은 자주 마시긴 했지만.”

“그대 말이 맞아. 그대 덕분에 마시게 된 거나 마찬가지야. 혼자서도 가끔 마시긴 하는데 그대 생각이 나서 조금 그렇게 있다가 일어나 버려. 역시 그대와 함께 마시는 게 제일 좋아.”

수줍은 듯이 얘기하며 작게 웃고는 살짝 입을 맞춰 오는 에스티안의 모습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굉장히 그다운 깔끔한 정원에 나를 생각하며 만든 고운 화단과 내 생각이 난다는 테이블 자리가 있다는 것에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그렇게 둘이 계속 대화하는 동안, 에스티안의 이야기에 집중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계속 내 머릿속에 맴도는 건 다름 아닌 결혼 생각이었다.

같이 있기만 해도 좋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 정도로 좋을 줄이야.

생각해 보면 어색해서 아무 얘기나 늘어놓았던 때 빼곤 늘 풀어야 하는 사건들이 앞에 있어 그런 얘기만 나눴지, 이렇게 서로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은 많이 없는 것도 같아 더 그런 듯했다.

그런 행복한 감각과 더불어, 에스티안이라면 정말로 내 부끄러운 모습을 다 보여 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시녀가 씻겨 줬다고 해도 나는 기억도 잘 안 나고, 어찌 됐든 에스티안은 내가 아파서 씻지도 못해 더러운 꼴로 있어도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서 내 걱정만 하는 사람이 아닌가.

머리 감겨 줄 때 목을 뒤로 꺾어 거꾸로 못생겨지는 얼굴도 봤다. 아마 계속 자는 동안 한 번은 눈 뜨고 잔 적도 있지 않았을까?

상상할수록 가관이긴 했지만, 그런 수치스러운 부분을 내보여도 에스티안이라면 이해해 줄 것도 같고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건 나 때문에 제대로 생활도 못 하던 에스티안의 약한 모습을 봐서일 수도 있겠다. 그의 여린 부분을 나만 알게 된 셈이고, 심지어는 그걸 나만 보듬어 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생각하니 더더욱 그와 오래 함께하고 싶었다.

근데 저번에 그렇게 미지근하게 말했으니 너무 변덕스러워 보이려나. 그것도 그렇고.

‘나중에 근사하게 정식으로 청혼할 테니까.’

그 말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단지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표정 관리가 안 돼 침을 삼켜야 했다.

그냥 말만 해 줘도 좋을 것 같다는 느낌과, 한편으로는 평생 딱 한 번 받아 볼 청혼이 대체 어떨지 너무 궁금하기도 한 느낌이 들었다.

근데 내가 여기서 덥석 에스티안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그 근사한 청혼은 날아가는 게 아닌가?

“델, 역시 나오면 안 되는 거였어. 얼굴도 빨갛고 아까부터 멍한 얼굴이잖아. 약을 언제 먹었지?”

“멀쩡해요. 약은 밤에 먹으면 되고요. 그냥 에스티안이랑 이러고 있는 게 너무 좋아서 그래요.”

자기 생각 때문에 이런 줄도 모르고 웃던 얼굴을 굳힌 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랑스러운 에스티안을 보자 괜히 청혼은 꼭 그에게 먼저 듣고 싶다는 얄궂은 생각이 피어올랐다.

나는 씩 웃고는 그에게 기댔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아프면 안 되는데.’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것조차 견딜 수 없이 귀여워 나는 계속 웃었고, 그도 결국엔 나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서로 웃기만 하며 평온하게 정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

한 닷새 정도 지나고 나는 완전히 건강해졌다. 치료사도 생각했던 것보다 회복이 빨라 다행이라고 말했다.

한번 정원에서 에스티안과 여유를 즐긴 이후로 그게 너무 좋아서 함께 있는 횟수를 높였는데, 몸도 조금씩 더 움직이고 그와 즐겁게 웃고 했던 것이 분명 긍정적인 역할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팔다리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한 것은 황실로 편지를 보내는 일이었다.

내가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 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리아나가 내게 털어놓듯 말했던 것들에 대해 낱낱이 적어 보냈다.

황실에서는 공식 자리를 마련해 그것을 대신 읊었고, 아예 엘리디트 백작 부인과 리아나에 대한 처벌을 교수형으로 확정지었다. 치밀하게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서 살인을 몇 번이나 저지르려고 한 그 죄질이 몹시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한자리에 있게 하면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일지 모른다는 판단에 감옥에도 각각 갇혀 있던 그들은 사형 날짜조차 매우 빨리 정해졌다.

더 섬뜩한 건 리아나가 마지막으로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내 목표는 오로지 그녀의 입을 통해 모든 사건의 전말과 그 사건을 저지른 중심에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있었다는 걸 듣는 것이었기에,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만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언덕에서 우리 둘이 구르기 전까지도 그녀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자신 때문에 몇 명의 인생이 어그러졌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죽기 직전 날 본다고 해서 사과를 하거나 잘못을 뉘우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최근의 사건도 있고 해서 에스티안을 비롯한 내 모든 주변인은 그녀를 만나지 말라고 극구 말렸고, 나도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사실 주변인들이 말렸어도 내 생각을 고수하고 싶었으면 언덕에서 굴렀을 때처럼 그녀를 만나겠다고 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이제는 정말 과거의 아델린이나 지금의 나나 리아나와 친구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서 나도 진작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그녀의 만남 요청을 거절했고, 이걸 예상했는지 리아나도 더 이상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엄마는 처벌이 확정된 대로 세상을 떠났다.

엘과 에스티안에게도 그렇고 나에게도 그렇고, 너무나 장기간에 걸친 집요하고 끔찍한 죄였기에 그녀들의 처형은 공개적으로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이름깨나 있는 귀족 집안의 영애와 그 부인이 그렇게 대놓고 처참한 몰골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전무후무한 것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걸 구경하러 몰려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가지 않았다. 에스티안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엘도 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엘리디트가의 요주 인물 몇 명이 그녀와 내게 저지른 죄가 밝혀져 사형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좋지 못했던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 낸 엘은 리아나에 대해서는 끝내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엘에게 말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머리가 허리까지 길고 색이 옅은 여자였어요. 저한테 되게 잘해 줬던 건 기억나는데 얼굴이 희미해요.’

치료사와 신전 사제는 아마 충격이 너무 컸기에 그녀가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는 의견을 보였다. 내 생각도 같았다.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하나의 마음이 아닐까 싶었다.

굳이 기억나게 하려면 해당 사람과의 좋았던 기억을 자꾸 떠올리게 하고 그 당시와 흡사한 분위기를 계속 만들어 주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알아낼 정도로 좋은 기억도 아니기에 엘도 더 이상 기억하거나 밝히고 싶지 않아 했고 우리도 그저 덮기로 했다.

겨우 되찾은 행복한 지금에 충실하며 살기에도 바빴다.

그렇게, 정말로 악랄했던 사건은 끝이 났다.

*

“언니, 이젠 팔이랑 다리 정말 다 괜찮은 거죠?”

“그럼요. 저번에도 만나서 확인했잖아요.”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모자라요. 아직도 그때 언니 누워 있던 것만 생각하면, 으으.”

엘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 손을 꽉 잡았다. 아, 이럴 때 보면 왠지 에스티안 같단 말이지.

오늘에서야 나 때문에 미루고 미뤘던 연회가 열렸다.

황실에서는 미리 말했던 대로 가장 큰 연회홀을 선뜻 내주었고, 황제가 아닌 황태자 유리엘이 나와 일련의 끔찍했던 사건들을 모두 잊고 즐겁게 즐기자는 축사를 읊었다.

그다음으로는 황실기사단이 여태까지 세운 공을 치하하며 해당되는 모든 기사가 포상 휴가를 받았다.

에스티안의 경우 기사단장이라 기본적으로 휴가 일수 자체도 다른 기사들보다 많긴 했는데, 이번에 내가 정신 못 차리고 누워 있는 동안 그 휴가 날짜들을 다 쓴 상태였다. 아마 근무해야 하는 날짜 며칠도 휴가로 보내 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내심 너무 미안했는데, 포상으로 그게 어느 정도 상쇄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블라머프 공작과 공작 부인이 나와 엘을 정식으로 소개했고,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그녀의 존재가 드디어 완전히 인정받는 것 같아 보는 내가 다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더 떨렸던 것은, 자연스러운 연회 분위기가 진행되기 시작하자마자 빠르고 큰 보폭으로 내게 온 에스티안의 미소 띤 얼굴이었다.

그는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부드럽게 키스했다. 순식간에 뜨거운 그의 숨결이 입 안을 파고들었다.

그는 내 허리가 그와 더 밀착될 정도로 깊게 입속의 여린 살을 헤집고 자극하다가도 금세 낮게 웃으며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가볍게 입술 위를 꾹꾹 눌렀다.

그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진심으로 나를, 아니 나아가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우리를 부러워하는 눈길들이었기에 마음이 뭉클했다.

“계속 함께 있고 싶은데, 쓸데없는 일이 좀 있어. 다시 금방 올게. 다른 놈들은…… 안 쳐다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델?”

흘러나오는 음악 두세 곡에 맞춰 키스를 하는 건지 춤을 추는 건지 모를 정도로 나와 붙어 있던 에스티안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블라머프 공작이 공작위를 에스티안에게 아예 주기 위해 다른 귀족들에게 그를 인사시키고 함께 얘기를 나눠야 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일이 절대 아닌 거지…….

홀 한구석에서 에스티안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다른 귀족들의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보고 나는 얼른 잘 해결하고 와야 나와 더 오래 있지 않겠냐고 설득하며 그의 등을 떠밀어야 했다.

에스티안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기고 나니 홀 야외에 마련된 테라스 한쪽에는 나와 엘만이 남았다.

전에 쥴에 대한 얘기를 나눴을 때 말고는 또 이렇게 둘이 얘기할 기회가 마땅치 않았기에, 우리 둘 다 모처럼 수다를 떨 생각에 신나 있었다.

“이건 언니도 완전히 건강해지고 나서야 하는 말이지만, 오라버니가 얼마나 언니 걱정을 많이 했는지 몰라요.”

먼저 입을 연 건 엘이었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도 항상 눈을 뜨고 정신이 좀 차려지나 싶으면 에스티안이 바로 보였던 기억이 났다. 그건 그가 한시도 내 옆을 떠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너무 미안했어요. 에스티안이 점점 야위고 힘들어하는 게 보여서, 그걸 지켜보는 게 더 슬펐거든요. 그런 에스티안을 보는 다른 사람들 기분은 또 어땠겠어요.”

“사실 저는 오히려 오라버니의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음,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요.”

“엘…….”

“오라버니가 그 정도로 한 사람에게 푹 빠진 데다, 그 사람이 아프니까 아무것도 못 하는 그런 모습을 보니까 신기했어요. 어릴 때 생각을 해 보면 오라버니는 어떤 것에 대해 욕심을 내거나 마음을 깊게 들이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거든요.”

엘이 마치 에스티안의 누나인 것처럼 소곤거리듯 한 말은 꽤 놀라웠다.

에스티안이 나에게는 항상 질투 어린 모습도 보이고, 나를 갈망하는 것 같은 뜨거운 눈빛도 보내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애틋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 내가 더 잘 알았다. 나도 그를 그렇게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나에게만 해당된다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언니도 항상 오라버니를 볼 때 그렇게 푹 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보고 있다는 거, 알죠?”

“당연히 알죠. 너무 티가 나서 문제일 텐데. 나는 원래 나만 에스티안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걱정했거든요.”

“에이, 오라버니의 그런 표정과 행동을 보고도요? 언니, 진짜 아무 걱정 안 해도 돼요. 정말 감정을 알 수 없는 건 쥴 쪽이죠.”

자연스럽게 엘과 쥴의 연애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갔다.

둘은 연애를 시작한 지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니었고, 그녀의 말에 따르면 쥴의 생각을 도통 알 수가 없다는 거였다.

“다른 영애들한테 물어봐도 지금, 딱 연애한 지 얼마 안 된 지금이 가장 서로 좋아하고 죽고 못 살 때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쥴의 반응을 보면 그건 다 남의 얘기 같아요.”

나도 늘 쥴 경이라 불렀던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쥴이라 부르는 엘을 보니 신기하고 귀여워 유난스럽게 소리라도 지르면서 그녀의 어깨를 마구 치고 싶었지만,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심각해 보여 그건 참아야 했다.

“잘해 주는 건 맞지만…… 뭐 손이나 뺨에는 입맞춤도 자주 해 줘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입술에는 입을 맞춰 주지 않아요. 제가 껴안아도 그냥 큰 반응 없이 등만 두드리고요.”

“등만 두드린다니…….”

“웃기죠. 말로도 항상 제가 좋다고 해 주는데 얼굴을 보면 너무 덤덤해 보이고. 아, 정말 답답해요!”

에스티안의 경우 엘이 말한 것처럼 표정에 드러나는 것은 물론이고, 말로 표현도 서슴없이 하는 편이었다. 스킨십 또한 정말 자연스럽게 했기에 나는 그런 종류의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게, 엘의 말처럼 상대방이 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반응을 알아보는 게 먼저가 아닐까? 너무 좋은데 티를 안 내는 것일 수도 있고, 스킨십을 원래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쥴한테 직접 확인하는 건 어때요? 한번 물어봐요.”

“네? 직접 물어보라고요?!”

내 말에 엘은 온갖 얼굴 근육을 다 써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직접 쥴한테 나를 좋아하긴 하는 거냐, 왜 당신은 날 보고도 설레지 않는 것 같냐, 왜 자꾸 다른 데만 보고 있냐, 왜 당신은 손과 볼 같은 데만 입을 맞춰 주냐, 왜 입술에다가는 키스도 안 해 주냐 이렇게 물어보라고요?!”

아니, 그 정도로 자세히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확실히 엘의 말처럼 그렇게 물어보면 정말 이상하겠구나.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음…… 대신 은근하게 떠볼 수는 없을까요? 아, 그래. 그게 낫겠어요.”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는 과거 봤던 드라마들의 몇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관심 있는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 남녀 가리지 않고 대체로 음악을 틀고, 장미꽃을 곳곳에 뿌려 두고, 근사한 옷을 입고 유혹하고 그러지 않나?

그런 장면이 빛 번지는 효과 같은 것과 함께 지나가고 나면, 다음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이미 연인이 되어 있고 말이다.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유혹의 장면들을 헤집어 보며 엘에게 설명했다. 다행히 그녀도 솔깃해하며 귀를 기울였다.

“음…… 정말 그런 거로 괜찮을까요?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요? 다시 생각해 보니 아까 언니가 말한 대로 그냥 솔직하게 물어보는 게 나을 것도 같고요.”

“에이, 그건 더 이상할 거예요. 이쪽이 훨씬 나아요, 정말로!”

한껏 들떠서 얘기한 보람이 있게 그녀는 그걸 정말로 대단한 비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몇 가지는 그냥 듣는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작은 메모장을 꺼내 급히 적기까지 했다.

아, 이게 잘 먹혀서 둘의 관계가 더 좋아지면 좋겠는데.

“아, 언니도 이런 거 다 해 보신 거예요?”

그때, 바보 같은 얼굴로 웃으며 흐뭇해하던 나를 때리는 듯한 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 해 봤냐고요?”

“네. 해 보셔서 이렇게 잘 아시는 건가 해서요.”

나는 아까 엘이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해 주고 싶었다.

심지어 에스티안은 나한테 감정도 잘 표현해 주고 스킨십도 잘 해 주는데도 직접 에스티안에게 평소보다 좀 더 예쁜, 그러니까 유혹할 만한 옷을 입고, 장미꽃도 흩날리고 장식된 방으로 그를 부르고 하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언니 반응을 보니 언니가 해 보진 않으셨나 봐요.”

아까보다 차분해진 엘의 반응에 나는 괜히 침이 목으로 넘어갔다. 네가 해 보지도 않은 걸 나한테 강요하는 거냐고 해도 할 말이 없으니까.

그래도 여러 군데서 간접적으로 본 게 있어서 괜찮을 거라고 말하려는데, 엘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좋은 방법 같아서, 나만 하긴 아까운 것 같아요. 언니도 해 보는 건 어때요? 쥴이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방법이라면 아마 오라버니는…… 후후.”

어딘가 방향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심지어 쥴이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근거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침이 마르도록 이것저것을 제안했고 엘이 그에 눈을 반짝였기에 나는 그것들에 대해 근거가 없다며 정정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는 내심 엘이 말한 것처럼 에스티안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까지 슬슬 궁금해지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내가 직접 뭔가 하는 건 생각을 안 해 봐서.”

“그냥 언니가 말했던 대로 하면 어때요? 평소보다 좀 더 신경 쓴 것 같은 옷차림을 하고, 분위기가 부드러워질 수 있는 음악을 준비하고…… 아, 이런 건 어때요? 그리고 이런 건…….”

엘이 말하는 건 내가 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얘기한 것보다 그 정도도 아주 센 것 같았다.

내가 본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이런 건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 텔레비전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언제 이런 얘길 했다고! 이런 걸 알고 있으면서 대체 엘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야? 나한테 조언은 왜 부탁한 거지?

하지만 낯간지럽다고 얼굴을 붉히던 나는 아까 엘이 흥미를 보였던 모습의 몇 배는 더 흥분한 모습으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둘이 즐거워 보이네.”

“으아, 에스티안!”

화들짝 놀라는 나를 보고 에스티안은 씩 웃었다. 그러고는 엘을 향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얘길 했기에 델이 이렇게 놀라?”

“헤헤, 별 얘기 안 했는데요.”

“혹시 델에게 내 얘기를 무언가 이상하게…….”

“흐응? 그런 얘긴 하나도 안 했는데. 오라버니, 혹시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요?”

“아, 아니.”

정작 나는 당황해서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엘은 다다다 쏘며 에스티안을 당황하게 했다.

아, 여동생에게 별말 못 하고 눈만 꿈벅이는 에스티안이라니, 너무 귀여운데.

“언니, 제가 오라버니에 대해서 뭐라고 했나요?”

“아뇨, 아무 얘기 안 했어요.”

정확히는 에스티안에 대해 얘기한 게 아니고, 내가 하면 에스티안이 좋아할 거라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지만 절대 말할 수 없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수상한 게 너무 티가 났는데도 다행히 에스티안은 그에 대해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둘이 얘기 다 했으면, 이제 델은 나랑 시간을 좀 보내도 될까.”

“아아, 그렇구나. 저는 그 정도로 염치없지 않아요. 언니, 오라버니랑 가도 돼요, 얼른.”

엘은 갑자기 양손으로 나를 밀며 에스티안 쪽으로 보냈다.

뭐야, 이렇게 그냥 가도 되는 거야? 우리 한창 좀 재미있는 얘기하고 있었는데?

에스티안과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내심 엘의 얘기를 들으며 에스티안을 나도 자극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얼빠진 얼굴로 슬쩍 엘을 보자 엘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나에게만 들리도록 귓속말을 했다.

“우리 얘기한 건 우리끼리의 비밀이에요. 알죠, 언니?”

알다마다. 어디 얘기할 곳도 없었다.

엘과 눈인사를 한 뒤 나는 에스티안에게 이끌려 테라스를 나왔다. 그는 한쪽 팔로 내 허리를 감곤 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아까 사람들이랑 얘기는 잘 나눴어요? 이제 에스티안 공작님 되는 건가요? 멋있다. 아니, 더 멋있어지겠어요.”

기사단장도 기사단 제복을 입긴 하지만, 공작이 되면 그와는 또 다른 귀족 작위에 맞는 제복을 보통 입게 되는 듯했다.

에스티안이야 뭘 입혀 놔도 멋있겠지만, 어딘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군데군데만 반짝이는 금이나 보석으로 장식된 공작 제복은 그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리고 원래 기사단장으로 있을 때도 그가 전반적인 상황을 보고 그에 대한 전략 짜는 것에 특히 능통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작 업무를 할 때 그런 것도 더 잘 발휘될 것이다.

“그런가.”

나는 그런 에스티안을 상상하며 히죽 웃는데, 어쩐지 그의 얼굴은 썩 밝지 않았다.

왜지? 그는 더 힘들어지는 건데 멋있다고 표현하면 좀 그런 상황인가?

“아, 혹시 일이 많아서 바빠지려나요? 제가 철없는 소리를 했나 봐요.”

“아니, 철없는 소리는 내가 지금부터 할 것 같아, 델.”

“네?”

에스티안이 가는 대로 따라갔더니 우리는 어느새 연회장과 거리가 살짝 있는 안쪽 복도의 한 방 안에 있었다. 소파와 테이블이 있고, 천장에는 쏟아질 것 같이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황궁 내에 있는 공간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화려하고 호화스러웠지만, 다른 곳들에 비해 규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은 응접실처럼 보였다.

에스티안은 나를 방 안쪽으로 안내하곤 방문을 닫은 뒤 내 앞에 와서 섰다.

“에스티안……?”

이렇게 딱딱한 얼굴로 철없는 소리를 할 거라니.

그의 표정이 살짝 굳은 채인 데다, 그가 한숨을 내쉬곤 머리를 휙 쓸어넘기는 등의 모습을 보여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델, 내가 생각하는 미래에는 그대가 있어.”

“네? 헛…….”

미래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오자마자 숨이 고르지 않게 멋대로 쉬어지고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에스티안이 하려는 말이 상상이 되면서도, 아직은 저 한마디만으로 멋대로 재단했다가 실망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 불쑥 들어 그저 덜덜 떨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블라머프가 공작이 되는 것을 떠올릴 때마다, 늘 공작 부인이 되는 그대의 모습이 먼저 상상됐어.”

“어…….”

“그리고 항상 생각했지. 그대에게 넓은 배려심도 있고 날카로운 통찰력도 있으니, 그대가 힘들지 않은 선에서 공작저 사정에 대해 함께 신경 써 준다면 어떨까.”

“…….”

“공작가 전체를 그대의 향과 색으로 덮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는 그렇게 얘기하고는 초저녁에 떠오르는 달 느낌이 나도록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그대는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사실 다른 사람 만나는 것도 그대에게 좋을 게 없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놈들이 그대를 보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아…….”

“그냥 그대는 공작저 안에서 편하게 지내도록 하고, 내가 모든 일을 재빨리 끝마치고 그대에게 달려가면. 그러면.”

잠시 숨을 내쉬고 나를 바라보던 에스티안은 말을 계속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푸른색 눈동자가 오늘은 더더욱 진하게 빛나 보였다.

“우리는 함께 참 잘 살 수 있겠다.”

“…….”

“그렇게 생각했어.”

에스티안이 꺼내는 말의 무게가 하나하나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건드리는 느낌이라 나는 말도 못 하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좋고 감격스럽고의 문제는 두 번째였고, 한 마디 한 마디에 혹시라도 내가 놀라거나 겁먹을까 넘치지 않게 눌러 담은 그의 진심 어린 말을 내가 받아도 되는지 의문부터 들었다.

그는 나와 간격을 살짝 좁히고는 손을 올려 내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감쌌다. 조금 전보다 따뜻하고, 왠지 안고 싶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물론 여태까지의 말보다 그대의 다정함이 나만을 향했으면 하는 게 더 큰 내 욕심이지만.”

“에, 에스티안.”

너무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지면, 아니 그냥 예상 못 한 일이 아니라 너무 행복한 것이라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지면 원래 이런 걸까.

에스티안이 말하는 바를 분명히 이해했다고 생각해서 얼른 대답하고 싶은데 말도 더듬거리는 채로 나오는 등 제대로 꺼내지지 않았다.

에스티안은 그런 나를 다 이해한다는 듯한 얼굴로 작게 웃고는 입술을 내 눈가에 갖다 댔다.

따뜻한 그의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자 그제야 약간의 물기 어린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 있던 것 같다.

이런 행복하고 근사한 순간에 볼썽사납게 울고 싶지 않아서 손으로 눈을 문지르려는데, 그것도 그가 제지해서 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내 눈꺼풀 위부터 눈꼬리 쪽까지 입술을 눌렀다.

“델, 나는 그대가 생각하는 미래에도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민망하게 눈물이 자꾸 차올라서 뿌옇게 변한 눈으로 겨우 그를 바라보니 아까의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에스티안 공작님 되는 건가요? 멋있다.’

‘일이 많아서 바빠지려나요?’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뻣뻣하고 눈치 없이 말했던 건 나였다.

왜 그렇게 얘기하느냐며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에스티안은 내게 이토록 다정한 말로 하나하나 얘기하고 진심을 보여 주었다.

늘 그는 내게 다정하다고 하지만, 정말로 다정하고 따뜻한 건 항상 에스티안이었다. 나는 그에게 곧장 안겼다.

“에스티안. 에스티안…….”

그는 정신도 못 차리고 울먹이는 나를 단단히 안아 주었다. 가만가만 등을 두드리다가 잠시 눈물을 닦아 주고, 잔뜩 빨개졌을 내 얼굴을 보고 픽 웃곤 다시 끌어안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진정된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기댔던 몸을 떼었다.

그리고 아직도 울음기가 가시지 않아 멋대로 들썩이는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지금 빨리 얘기하고 싶었다.

“내 미래 안에도 에스티안이 있어요. 아까 제가 에스티안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르고 이상하게…….”

에스티안은 천천히 내 입술을 삼켰다. 가볍게 두드리듯이 혀로 입술을 핥아 왔고, 내가 그걸 받아들이자 부드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치열을 훑는 것이나 혀를 이리저리 얽는 것, 입천장을 두드리거나 안쪽의 부드러운 살을 음미하는 것까지 어느 하나 정중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와 숨결을 섞은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렇게 뭉클하고 성스러운 느낌까지 드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볍게 버드 키스로 입술 위를 꾹 누른 그는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델, 아니 아델린 메이스프릴.”

따뜻하면서도 깊어진 눈빛으로 나를 보며 에스티안은 정확한 내 이름을 불렀다. 그에게 그렇게 불리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라 나는 다시 긴장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는 재킷 안쪽에서 작은 함을 꺼내 옆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그걸 열었다.

“우와…….”

그가 그 안에서 먼저 꺼내 든 건 영롱하게 보석이 가득 박힌 머리 장식이었다.

티아라처럼 머리 위에 살짝 얹는 형태지만 보석 장식이 자연스럽게 내려오게 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몹시 예쁜 것이었다.

그는 그걸 내 머리 위에 잘 고정한 뒤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다음으로는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손에 쥐어 입을 맞췄다.

“이건 서로의 생각만 하자는 의미.”

에스티안이 씩 웃은 뒤 다시 함으로 손을 뻗은 거로 보아 또 무언가 있는 듯했는데, 나는 이미 이 머리 장식을 얹은 것만으로도 또 눈물이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예쁜 것까지 하고 있는데 또 울어서 벌겋게 부은 눈으로 그를 보고 싶지는 않아 겨우 눈물을 삼키고 나니 그가 이번에는 귀걸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머리 장식과 비슷한 모양의 것으로, 그것도 귀 아래로 길게 내려와 언뜻 보기에도 우아한 형태였다.

그는 내 양쪽 귀에 귀걸이를 얌전히 건 뒤 귓바퀴를 천천히 손가락으로 쓸곤 이로 가볍게 물었다.

“원래는 여기에도 입을 맞춰야 하는데, 귀걸이가 생각보다 커. 그대의 귀가 작아서 그런가 봐.”

작게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조곤조곤 들리니 잔뜩 얼었던 마음은 다시 녹고 있었다.

그는 튀어나온 귀의 연골을 톡톡 건드리다가 혀로 가볍게 핥곤 입술을 댔다.

“이건 서로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이자는 의미.”

다음으로 에스티안이 꺼낸 건 목걸이였다.

맥이 뛰는 목에서부터 빗장뼈 살짝 아래까지 내려오는, 역시 아름답고 고운 것이었다. 그는 내 뒤로 가서 목걸이를 천천히 걸어 채웠다.

순간적으로 차갑고 묵직한 게 닿아 나도 모르게 움찔했더니, 그가 목걸이를 피해 내 목덜미에 입술을 꾹 눌러 묻었다.

뒷목과 목선을 따라 입술을 지분대며 누르니 따뜻한 그의 숨과 부드러운 입술이 생생하게 닿아 왔다. 목걸이의 무게나 온도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서로의 숨결이 서로에게 달렸다는 의미.”

에스티안이 하나씩 액세서리를 해 줄 때마다 그 의미나 애틋함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이게 여기만의 프러포즈 방식인 건가? 아니면 그저 에스티안이 해 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뭐가 되었든 나는 아까부터 몽롱한 기분으로 그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함이 빈 걸 보니 에스티안이 마지막으로 그 안에 있던 걸 꺼낸 것 같았다.

“아…….”

반지였다.

반지로 영원을 맹세하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기에, 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에 미소가 지어졌다. 가운데에는 적당한 크기의 보석도 박혀 있었다.

에스티안은 어느새 무릎을 꿇고는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천천히 앉는 것부터 반지를 밀어 넣는 것까지 너무나 가슴 떨리고 마음이 얼얼한 장면들이라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눈물이 고여 뿌예진 시야는 아까부터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반지 위로 가볍게 입술을 댔다가 뗀 뒤 손등에 입술을 천천히 묻었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내 눈꺼풀을 느릿하게 눌러 눈물을 닦아 줬다.

“그리고 이건 그 모든 걸 포함해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의미야.”

에스티안이 눈물을 닦은 보람도 없이 내 눈에서는 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러다 기운 빠져서 쓰러지겠어.’라고 중얼거리며 계속 내 눈물을 닦고는 나를 안아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그토록 애틋하게 마음을 울리는 말을 듣고, 이렇게 따뜻한 품에 안겨 있는데 어떻게 눈물이 안 날 수 있을까.

사실 그의 프러포즈는 그냥 결혼하자는 말 이상의 것으로 내게 다가왔다.

혼자 밋밋하게 살아오던 때가 거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이곳의 이런 행복한 생활에 적응했다고 늘 생각했지만, 가끔씩 이전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계적으로 일을 하고, 주위 사람도 만나지 않고 홀로 지내는 생활을 반복했던 그때를 생각하다 지금을 바라보면 이토록 기쁠 수가 없으면서도, 막연한 두려움이나 불안함이 있었다.

나는 여기 뚝 떨어진 사람인데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이 행복은 내가 누려도 되는 게 맞는 건가.

원래의 아델린이 얌전히 살 수 있었을 삶을 내가 엉뚱하게 살아 버린 뒤 그녀가 누려야 할 행복도 내가 뺏어서 누리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고 누군가 내게 ‘그래, 그 행복은 사실 네 것이 아니야.’라고 말이라도 하면 그건 그거대로 또 쉽게 수긍하지 못하고 벌벌 떨 거면서 말이다.

그런 나에게 에스티안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근본적인 불안함을 전혀 생각나지 않게 했다.

그냥 나 자신이 여기서, 그의 옆에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있어도 된다는 듯이 얘기해 주는 것 같았다.

이곳의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내가 소중하게 대접받는 것부터 에스티안이 나를 둘도 없는 사람으로 대해 주는 것까지, 모두 내가 받아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특별히 누군가에게 마음을 써 본 적도 없는, 참 재미없게 살아오다가 여기에 온 나인데도 모든 이에게, 에스티안에게 사랑받아도 괜찮다는 느낌을 언제나 받을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만들었다.

에스티안에게 계속 기대고 있던 몸을 살짝 들자 걱정스러운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 너무 울어서 어떡하지.”

큰 결심을 하고 긴장한 채 내게 뜨거운 진심을 전한 에스티안이야말로 더 떨렸을 텐데, 그가 계속 나를 달래기만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사실 나도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나다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웃음이 나오는 기묘한 상태였다. 나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슬퍼서 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좋아서 그래요. 너무 행복하고 기뻐서.”

“벌써 기뻐하면 안 되는데.”

“네?”

“아직 중요한 말 하나를 안 했으니까.”

“어…….”

“아델린.”

“에……에스티안?”

“사랑해. 나와 혼인해 줘.”

아, 뜨거운 열기가 가슴을 훅 치고 들어오는 느낌과 동시에 웃음은커녕 내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얼른 대답을 알려 주고 싶어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에스티안은 낮게 웃고는 눈물을 양손으로 닦아 준 뒤 나를 끌어안았다.

친구가 쓰던 글에 멋대로 첨언하다가 낯선 곳에 낯선 몸으로 들어와선 결국 내 코가 꿰인 줄 알았지만, 코가 꿰인 게 아니고 사실은 굴러 들어온 행복과 행운, 사랑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대충 멋대로 살아 보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확히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에스티안을 만난 이후부터 이곳에서의 내 삶과 마음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의 삶을 마음대로 얘기한 것에 대한 책임감에서 시작한 마음은 결국 애틋함이 가득한 사랑이 되었다.

내가 그를 도울 수 있어서, 그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받은 마음이 더 컸을 것이기에, 고마운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은 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렇게 영원히 함께하면서 살아가는 건 이전 삶에서도, 심지어 이곳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제 현실로 다가온 이 행복을 나는 그와 함께 누리기만 하면 된다.

“나도 사랑해요, 에스티안. 너무 고마워요…… 헛!”

에스티안은 내 대답이 마치 연료라도 된 듯 나를 번쩍 들어 옆으로 안고는 뜨거운 입술로 얼굴 곳곳을 꾹꾹 눌렀다.

아까의 진중한 모습이 슬쩍 남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금세 열망이 가득해진 눈으로 나를 보는 그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무슨 충동인지 나는 다가오는 에스티안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에스티안, 혼인하고 나서…… 기대해도 좋아요.”

“……어?”

“아, 몰라요. 그래도, 조금은 기대해도…… 으앗!”

에스티안은 작게 웃으며 내 목덜미를 잘근잘근 물었다. 간지러우면서도 발끝이 짜릿한 느낌에 절로 목을 뒤로 젖히게 되었다.

“울어서 새빨개진 눈과 얼굴을 하고 그런 얘길 하면, 내가 참을 수가 없어, 델. 당장 나가서 그대와 내가 혼인할 사이라고 밝힌 다음 어디로든 빨리……. 별장이 지금 비어 있을…….”

“무, 무슨! 에스티안이 말한 것처럼 지금 내 얼굴은 완전히 눈물로 만신창이인데! 게다가 방금 목까지……!”

“목에는 목걸이가 있고, 눈물은.”

“흐아아…… 에스티안!”

그는 목덜미에서 움직이던 입술을 눈가로 올려 내 눈가에 여전히 맺혀 있는 눈물을 핥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하는 그의 행동에 나도 그만 따라서 웃어 버리고 말았다.

당장이라도 나갈 것처럼 행동하던 에스티안은 나를 소파에 앉히고는 슬쩍 시녀에게 얼음주머니를 달라고 하기도 하며 내 얼굴에 오른 열기가 가라앉기를 천천히 기다려 주었다.

어차피 들뜬 마음으로 쉽게 가라앉지 않을 거란 건 내가 더 잘 알았기에, 붉어진 눈이나 얼굴이 좀 나아지자마자 입을 열었다.

“에스티안.”

“응. 좀 괜찮아? 나갈까.”

“네!”

나를 일으켜 세우고 허리에 감는 그의 손이 너무나 따뜻하고 든든했다. 올려다본 그의 푸른 눈동자는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함께 걷는 걸음 소리가 맞춰지는 게 좋았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고 이제야 본격적으로 살게 되는 거나 다름없는 이곳에서의 내 삶. 에스티안과 행복하게 사랑하며 사는 일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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