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장 (13/18)

13장

생각은 했지만 머릿속이 복잡한 것은 맞았기에, 나는 깨끗한 종이에 사흘 뒤 오후에 와도 된다는 답장을 쓰고 그저 가만히 정원에 앉아 있었다.

이미 편지를 전달하느라 불안감을 느낀 안나는 쉴 새 없이 내게 다시 생각해 보라며 말했다.

“아가씨, 제가 항상 얘기했잖아요. 리아나 영애는 어딘가 의뭉스러운 부분이 있다고요. 저는 그 영애를 저택으로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었다. 옆에 서 있던 쥴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보탰다.

“저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괜히 불러서 좋을 거 없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황실 측에 지원을 요청해서 엘리디트가 전원을 체포하는 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둘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나도 그걸 알고는 있었다. 스스로가 뭐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고 있고 이미 답장까지 쓴 상태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냥 나는, 책임감과 더불어 리아나의 얘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녀에게 잔인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이런 증거들을 찾았고 증인도 확보했는데 너는, 그리고 너의 집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당연히 나라고 아무 대책이 없는 건 아니기도 했다.

“……그래도 제법 오래 친구여서 그런가 봐요. 리아나랑 얘기를 좀 해 보고 싶어요. 지금 답장을 보내야 사흘 뒤에 만나는 약속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할게요.”

시녀를 시켜 편지를 보낸 나는 덤덤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얘길 에스티안과 부모님께도 해야 하는데 뭐라고 입을 떼어야 할지 감이 안 오기도 하고, 그들에게 얘기하는 것보다 먼저 리아나에게서 답장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답장보다 먼저 날아온 건 저녁때 저택을 방문하겠다는 에스티안의 급한 전언이었다.

당일 방문을 요청하는 것에 양해를 구하는 정중한 문구와 함께였지만 필체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거칠게 흘려 쓴 듯해서 나는 그냥 그도 다 알았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는 해가 질 무렵 놀람과 화가 섞인 얼굴로 달려왔다. 나는 평소랑 다를 것 없이 그의 손을 잡고 정원에 함께 앉았다.

“오, 늑대의 기운이 마구 넘실거려요, 에스티안.”

“……델.”

억눌렸다가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말과 한숨을 동시에 내뱉은 그는 내 손에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그의 숨결로 기분까지도 다 파악될 정도였다.

“쥴에게 들었어.”

“역시 그럴 것 같았어요. 하긴, 그동안 그렇게 발표를 하는데 엘리디트가에서 아무 말도 없고 조용한 건 진짜 이상하지 않았어요? 리아나가 사교계 활동을 딱 끊은 것도 그렇고요.”

“그러니까…….”

“그런 와중에 저한텐 말을 걸었으니 이건 되게 좋은 기회예요. 뭐, 과거의 친구로서 리아나의 얘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정말 큰 게 더 맞지만.”

“생각 같아선 그대를 그대의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 하고 나와 황실이 모든 걸 해결하고 싶을 정도야. 너무 위험해. 그치들은 그대를 한번…….”

“죽이려고 했죠.”

“델…….”

말을 하는 것으로도 괴롭다는 듯 에스티안은 무겁게 숨을 내쉬고는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걱정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가 만약 혼자 무언가 하려고 했다면 나도 쌍수 들고 말렸을 테니까.

“저도 무작정 리아나를 보려고 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에스티안한테 도움 요청할 생각도 계속 하고 있었고요.”

당연히 나도 겁나고 대책 없이 일을 저지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분명히 머릿속으로 나름대로의 대책을 세운 상태였다.

“리아나를 만나는 날, 저택에 블라머프가의 기사분들이 곳곳에 매복하고 있을 수 있나요?”

“매복?”

“네. 응접실에서 대화하자고 할 거긴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응접실 내부부터 정원 쪽까지, 이왕이면 최대한 많은 장소들에 매복하고 계실 수 있을까요? 여차하면 튀어나오실 수 있도록이요.”

에스티안은 내 말을 듣고는 잠시 고민하는 듯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아, 이건 절대 나쁜 방법은 아닌데. 오히려 운만 잘 맞는다면 범죄 현장을 급습하는 거나 다름없을 수도 있는데.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한때 그래도 친구였던 감을 따르자면, 리아나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자기를 조여 온다는 걸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한테 모든 걸 얘기할 거예요.”

“…….”

“이건 확실해요. 그렇지 않고서는 그 애가 갑자기 저를 보자고 할 이유가 없어요. 그게 아니더라도 전 리아나에게서 진실을 이끌어 낼 자신도 있어요. 저도 그렇고, 더 운이 좋다면 주변에 숨어 계시던 기사분들까지도 어쩌면 증인이 될 수 있는 거예요.”

한껏 흥분해서 얘기하는 내 말을 듣고 에스티안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떼를 쓰는 아이를 어쩔 줄 모르며 바라보는 것 같은 그의 시선에 나는 더 진지하게 보이려 애쓰며 얘기했다.

“저희 백작가 기사분들도 훌륭하시긴 하지만, 아무래도 블라머프가의 전력이 좋다는 얘기는 유명하니까요. 그래서 에스티안에게 일부러 부탁하는 거고요.”

“…….”

“혹시 리아나와 얘기를 나누다가 무언가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포위해서 황실로 넘기는 거예요.”

에스티안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다음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고민하는 얼굴로 그저 가만히 내 손을 잡은 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델, 그대의 계획이 승산 있다는 건 분명 맞아. 그런데…….”

“그런데요?”

“그걸 그대가 직접 해야 하는 거잖아. 그대가 그자의 친구였으니까. 그대를 인질로 사용하는 그런 계획 같은 걸 내가 무슨 정신으로 할 수 있겠어. 이성을 잃어버릴 거라고.”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내 손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따끈따끈한 그의 체온과 더불어 떨리는 숨결까지 느껴졌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한, 불안한 기색이 가득한 푸른 눈을 보니 마음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리아나가 직접 보자고 한 이 기회를 저버린다면 무언가 다 어그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생각했던 하나의 가정은 리아나를 비롯해 그 가족 전체, 또는 엘리디트 백작 부인이 도망치는 거였다. 그 집 주변에 기사들이 있으니 당연히 잡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들을 벌였는지는 영영 정확하게 알 수 없을 게 뻔했다. 보통 귀족가를 처벌하는 경우 죄를 아무리 물어도 전말을 실토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이미 자신들의 명예나 위엄이 땅에 떨어졌음에도 그것을 위한다며 침묵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엘리디트가도 그런 성향이 있을 터였다.

“……어찌 되었든 친구로서 리아나 입으로 직접 얘기를 듣고 싶은 마음과 그냥 사건을 확 끝내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였어요. 그리고 블라머프가 기사분들이 도와주시면 하나도 안 위험하지 않겠어요? 너무 염치없게 부탁하고 있나요, 저. 헤헤.”

그는 허탈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대의 상냥함과 사려 깊은 마음을 사랑하는데 그건 늘 주변 이곳저곳을 향하는 것 같아.”

“아, 에스티안…… 그런 건 아닌데요…….”

나도 그 어떤 것보다 에스티안을 늘 먼저 생각하는데, 그 마음이 혹시라도 잘 전해지지 않을까 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가볍게 입을 맞춰 왔다.

“그대의 사랑스러운 상냥함과 따뜻함이 향하는 길목을 내가 지키도록 할게.”

따뜻하고 상냥한 건 오히려 에스티안 쪽이었다.

내심 그가 내 제안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 어떡하나 하고 대책 없는 심정이었는데, 그는 결국 고민 끝에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 주기로 했다.

리아나가 우리 저택에 오는 날 그는 물론 그의 가문 기사들이 곳곳에 매복하여 지키고 있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아예 몇몇 기사는 나와 리아나가 움직이게 되는 경우 따라서 움직이도록 하겠다고까지 했다.

기본적으로 기사들은 시력이나 청각이 좋아 멀찌감치 계속 우리를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증인 역할을 할 수 있어서 결정한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가문의 도움을 받게 된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리아나에게 이야기를 똑바로 듣고 제대로 모든 걸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도 긴장되긴 마찬가지라, 에스티안의 허락에 기분이 좋아 웃고 있으면서도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그가 내 한숨을 삼키기라도 하는 듯 다시 자신의 입술로 내 입술 위를 꾹 눌렀다. 그러고는 이를 세워 아랫입술을 살살 물다가 그대로 맞댄 채 말했다.

“무조건 그대의 안전만 생각할 거니까 그대도 그걸 최우선으로 생각해 줘.”

“네, 그럴게요.”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내 결정을 모두 정리된 상태에서 전해 들은 부모님은 충격받은 얼굴을 잠시 했지만 곧 그녀와 얘기하고 싶다는 내 말을 진지하게 듣고는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흠, 사실 엘리디트가를 곧장 황실 측에서 몰아세우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 아닌가 싶었는데 네가 그렇게 얘기하니…….”

“델, 네가 리아나와 제법 가까웠지.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어미 된 입장에서 걱정이 된단다.”

“그래도 블라머프가에서 그렇게 도와주신다고 하니 다행이구나.”

“여차하면 바로 기사분들께 도움을 요청해야 해, 델.”

“네, 그럴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처음엔 역시 부모님도 못마땅해했지만 몇 번이고 설득한 끝에 이해했다는 반응을 들을 수 있었다.

믿음의 다른 이름은 책임감인지라 바라던 대로 되어 다행스러우면서도 마음이 묵직해지는 건 당연했다.

주변인들과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난 바로 다음 날, 귀신같이 리아나에게서 방문을 수락해 줘서 고맙다고, 이틀 뒤 방문하겠다는 편지가 도착했다.

좀 더 시간을 흘려보낸 다음 방문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랐기에 나는 급히 에스티안에게 이를 알렸고, 주어진 시간 동안 우리는 동선도 맞춰 보고 하며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편지에 쓰여 있던 날짜와 시간에 딱 맞게 리아나가 저택을 방문했다.

그녀는 자신의 백금발과 어울리는 깔끔하고 단정한 상아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야위었는지 얼굴이 수척해져 있었고, 눈가도 붉었다. 자기 나름대로 마음고생을 한 건가? 마음고생은 왜 했지? 울었나? 왜 울었을까. 리아나 쪽은 가해자 아닌가?

그녀를 본 순간 머릿속에 묻고 싶은 것들과 따지고 싶은 것들이 생각보다 아주 많이 떠올라서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듣는 게 먼저라는 생각으로 나는 웃으며 그녀를 손님들을 보통 상대하는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은 넓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는 큰 공간과 작은 테이블이 있는 좁은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좁은 공간은 안쪽 커튼 뒤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나왔고, 그곳엔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시녀가 가져다준 차가 서늘하게 식을 때까지 리아나는 말하지 않았다.

응접실 안에 와서 내가 예의상 오는 데 힘들진 않았느냐고 물은 것에 그저 고개를 저으며 살짝 미소를 지은 것 말고 그녀는 아무 말도,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네가 먼저 보자고 했으니 네가 먼저 얘기하라고 닦달할 분위기조차 안 만들어진 탓에 나도 애꿎은 찻잔만 손톱으로 툭툭 두드리며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어야 했다.

서로 결국 경쟁하듯 차만 마시다가 티포트 하나를 다 비웠을 때, 드디어 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델, 정원으로 나가지 않을래?”

듣는 귀가 분명 있을 밀폐된 공간에선 말을 쉽게 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정말로 바깥으로 나가자고 할 줄이야.

그리고 여전히 나를 델이라고 부르다니. 그건 그거대로 미묘했다. 나는 그녀를 한번 떠보았다.

“많이 답답해? 이제 저녁이 되고 하면 쌀쌀해질 텐데.”

“뜨거운 차를 마셔서 그런지 땀도 나고 좀 답답해서. 나가서 좀 걷지 않을래?”

가만 보니 리아나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실내가 더운 건 아닌데.

나는 시녀를 불러 찻잔을 치워 달라고 한 뒤 리아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찻잔을 치워 달라고 한 게 일종의 신호였기 때문에, 정원 구석구석에는 당연히 기사들이 매복하고 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천천히 정원을 산책했다. 그냥 발 닿는 대로 움직였고, 걷는 내내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리아나가 먼저 뭐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나무 아래를 좀 걷기도 하다가 꽃밭 근처도 걷고, 일반적인 산책이나 다름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리아나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너랑 정원 걷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델.”

너무나 평화로운 어투로 흘러나온 그녀의 말에 나는 헛숨을 삼켜야 했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말문부터 연 거라고 생각하고 나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 없이 정원을 두어 바퀴 돌고 오후의 해가 기울어 갈 무렵, 리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먼저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네.”

“……나는 그냥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어, 리아나.”

“무슨 행동을 했는지겠지. 결국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게 만드는구나. 델, 넌 항상 그랬어. 별로 손을 쓰지 않고도 원하는 대로 뭔가 이뤄지게 하고 원하는 걸 얻어 내는 것 같아. 이미 얻을 만큼 얻은 상태인데도.”

그런 것도 아니고,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말을 시작한 이상 듣는 게 우선일 것 같았기에 나는 가만히 있기로 했다.

“다 알고 있겠지? 너 좋아하는 기사단장네와 황실이 지금 파고드는 일들이, 나와 우리 집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지금 나보고 얘기하라는 거야?”

이제야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쳐다보고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얼마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네 얘기를 들려 달라는 마음을 담아서.

그리고 그게 정말로 전해지긴 한 건지, 리아나는 모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블라머프가의 딸에 대해서 먼저 얘기하는 게 좋겠지? 시작은 우리 어머니였어. 물론 나라고 생각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어릴 때 일부러 가까이 지냈어, 어떻게든 해 보려고. 그리고 유인했지.”

리아나는 엘리디트 백작 부인과 함께 엘을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덤덤히 얘기했다.

이유는 예상했던 것처럼 엘만 없어지면 제국 내 황태자의 신붓감으로 꼽힐 사람이 자신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라 했다.

슬쩍 접근해서 같이 뭐도 먹고 뭐도 사고 하며 놀자고 꼬셔 놀러 나갔고. 일부러 엘을 놓친 뒤 자신의 기사를 시켜 그녀를 항구 쪽으로 데려오도록 했다고.

“기사가 기절한 공녀를 데려온 뒤론 나도 잘 몰라. 어려서 뭘 잘 모르기도 했고, 어머니께 물었을 때 그냥 그 공녀를 잘 불러왔다고, 이젠 내가 황태자의 신부가 될 거라고 얘길 들은 게 전부니까.”

“…….”

“그래서 나도 다 잘된 건 줄 알았는데 너한테 이런 얘길 하고 있네.”

누군가와 함께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를 탈 뻔했다고 했던 엘의 얘기와 틀린 것 없이 맞아떨어졌다.

다 알고 있는 얘기라 들어도 큰 느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막연하게 떠올리기만 했던 것들이 머릿속에 영상으로 재현됐다.

친구와 노는 줄 알고 속아서 나왔다가 낯선 배 안에서 눈을 뜨고 당황했을 모습, 겨우 거길 빠져나와 길에서 살아갔을 모습, 그리고 서서히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 가족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지내 왔을 모습…….

“어머, 네가 왜 우니?”

코웃음을 치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툭 던진 리아나 때문에 상념에서 깨어나 거칠게 눈가를 닦아야 했다. 처참했을 엘의 어린 시절이 다시 생각나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흐른 거였다.

그리고 더불어 리아나에 대한 실낱같던 기대감 같은 게 깨지면서 터져 나온 눈물이기도 했다.

내심 나는 리아나네 집안이 문제일 뿐 리아나도 어쩌면 권력에 대한 욕심 같은 것에 희생된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구나.

“벌써 공녀랑 그 정도로 친해진 거야?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다들 친해지는 거야? 그 공녀의 오라비도 그렇고, 황태자도 그렇고. 그래, 이제 황태자 얘길 할 차례인가?”

리아나는 걸으며 쭉 기지개를 켜고는 다시 입을 뗐다.

“예전부터 네가 황태자랑 나랑 어떻게든 이어 주려고 고군분투했던 건 참 고맙게 생각해. 바보 같게도 나는 그게 되게 도움이 되는 줄 알았거든.”

“…….”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들더라. 너는 정말로 나를 위하고 있는 게 맞을까? 왜 나를 위한다고 하는데 오히려 황태자는 너만 볼까?”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아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근데 별수 있나. 일단 그를 보기는 해야 하는데, 난 정말로 다른 사람들 앞에 혼자 나설 용기는 안 났거든.”

그제야 리아나가 거의 병적으로 황태자가 가는 데마다 따라가겠다고, 데려가 달라고 했던 게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녀는 나름대로 노력을 한 거였다.

“다른 영애들에게 네 험담을 하고 다닌 건, 진짜 너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내려고 했다기보다는 그냥 나는 그에 비해 선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거였고.”

그게 그거지, 저 나쁜 것.

고개를 이리저리 꺾곤 태연하게 손가락 하나하나를 꼽아 가며 말하는 리아나를 보니 나오려던 눈물도 쏙 들어가 버렸다.

물론 저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싶은 안쓰러운 마음도 들긴 했다. 

“점점 황태자가 너만 보는 것 같고, 너는 또 왠지 안 그런 척 그런 상황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질투가 커졌지.”

“안 그런 척이라니. 그건 진짜 오해야. 난 관심도 없었어, 황태자. 이미 나는 그때 에스티안과…….”

“그래, 내가 그걸 좀 늦게 알았지. 네게서 직접 그런 호칭으로 들으니 이제야 실감이 나네. 나는 그 사람과 네가 친해진 게 단순히 나에 대해 들쑤시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했거든.”

“들쑤셔? 널?”

“응. 그 공녀에 대한 일 때문에 내가 제 발 저렸던 거지. 그 사람이랑 너랑 점점 자주 만나는 걸 보고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데.”

아, 설마. 그동안의 모습이…….

“나는 이전부터 그 사람이 혹시라도 나에 대해 뭔가 알아내고 나를 어떻게 할까 봐 겁나서 얼굴도 못 쳐다봤는데 넌 금방 가까워져서는. 뭐, 결국엔 둘이 다 알아내기도 했구나.”

리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아, 소리를 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사냥터에서의 일은 전적으로 내가 꾸민 게 맞아. 사람 매수하고 뭐 그런 거지. 알고 있었겠지? 황태자 때문에 질투가 나서 그런 것도 맞긴 한데, 그땐 네가 공녀의 오라비와 너무 가까워서 불안한 마음이 더 컸어.”

정말 별거 아니라는 투로 이것저것 쏟아 내는 리아나의 말에 나는 계속 머리를 맞는 기분이었다.

‘리아나는 에스티안 경을 정말 많이 무서워하는구나.’

‘……너무 냉정해 보여. 무슨 일이든 할 것처럼.’

그동안 리아나가 에스티안이 무섭다며 그를 쳐다보지도 못할 때마다 나는 늘 그녀의 성정이 여려서라고만 판단하고 항상 감쌌다.

하지만 들킬까 봐 무서워하던 거였다니. 속으로 나를 얼마나 멍청하다고 생각했을까. 허탈한 웃음이 나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 입으로 이걸 네 앞에서 얘기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얘기하면서 걸으니까 좋아서 그런가?”

입이 절로 벌어지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정신 빠진 채 발걸음이 닿는 대로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우린 정원 내 있는 언덕의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화단길에 있었다.

이전의 나, 즉 아델린에게 사고가 났던 언덕은 더 높은 곳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조금 뒤쪽에 있는 여기가 더 높은 것 같았다.

리아나가 대화하면서 바깥으로 빙빙 나돌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여기까지 올 줄이야. 물론 여기에도 기사들이 숨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언덕의 중앙쯤 도착했을 때 리아나는 더 이상 어디로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아래쪽을 봤다. 나도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는 그녀를 따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여기서 어느 정도 보이는 제국 시내의 모습은 여태까지 들은 얘기와는 정반대로 너무나 평온하고 고즈넉해 보였다.

“나는 그래서 다 네 탓이라고 생각했어.”

이번엔 또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 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비난조의 말을 하는 것치고 노을빛을 받아 붉게 빛나는 그녀의 옆얼굴은 아래 보이는 풍경만큼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너 아니면 안 되도록 나를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고, 나보다 더 황태자와도 친해지고 그 공녀의 오라비인 기사단장과도 친해졌으니까. 내가 저질렀던 일을 알고 그 기사단장과도 일부러 더 친해졌으니까.”

“억지인 거 알지, 리아나.”

“응, 알아. 근데 이렇게 생각해야만 나는 마음이 편할 거 같아. 그 정도는 괜찮잖아? 어차피 다 끝난 마당에.”

리아나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여태까지 그녀가 한 말들에 대해서는 나와 매복해 있던 기사 몇몇이 증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죄를 밝히는 데 활용되겠지.

썩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일단은 자수에 가까운 얘기를 해서 그런 건가? 그녀는 편안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나는 이제 다 잃었어.”

“무슨 말이야, 그게.”

“별로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이 정도 높이에서 구르면 죽지 않나?”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느낀 나는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러나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그녀는 흔들릴 정도로 휙 반동을 일으키더니 단번에 내 손을 탁 쳐 냈다.

“이전에 그런 생각으로 널 밀었었는데 넌 살아났더라.”

“뭐?”

이전에? 그러면 내가 아델린의 몸으로 들어온 그때를 말하는 건가? 안나가 수상하다고 했던 그 일을 얘기하는 거야?

진짜 그것도 리아나가 한 거였어?

너무 갑자기 내뱉듯이 얘기한 그녀의 말에 내가 당황한 사이, 리아나는 아래쪽을 힐끗 보곤 나를 다시 똑바로 쳐다보았다.

“넌 내가 죽어도 울어 줄까? 친화력 좋고 붙임성 좋은 애니까.”

“하지…….”

“안녕.”

리아나는 아래가 아득하게 보이는 언덕 아래로 몸을 던졌다.

전혀 상상 못 한 상황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웅성거리는 게 느껴지던 찰나, 나는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로 발을 두 번 굴렀다.

그리고 발을 구르기가 무섭게, 곧장 저절로 손과 몸이 그쪽으로 나가 버렸다.

안 돼. 이렇게 그냥 죽어선 안 돼. 내가 잡아야 해.

재빠르게 팔을 뻗는다고 뻗어 겨우 그녀의 드레스 끝자락을 잡았지만, 이미 걷잡을 수 없게 된 뒤였다.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가 땅을 수도 없이 몇 바퀴 이리저리 구르는 내내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기사들이 금방 튀어나와 우리를 막은 것 같기도 한데. 다급하게 치료사를 부르는 소리에는 내 이름도 간혹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엄청 천천히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내 눈앞에는 현재 풍경이 아니라 리아나와 아델린이 친했던 순간들이 재빠르게 지나갔다.

심지어 나는 처음 보는 상황이었으니 내가 겪은 게 아니고 과거의 아델린이 겪은 일인 듯했다.

같이 티타임을 갖고, 드레스를 맞추고, 사교 모임에 나가 아델린이 리아나를 소개하고, 황태자 앞에서 예쁘게 웃고. 둘은 즐거워 보였다.

이건 내 의지일까, 아델린의 의지일까.

아델린, 내가 네 몸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리아나는 너를 미워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너는 이런 기억을 다 갖고 있던 거야?

알량한 우정이라는 생각이 마음을 스치고 나자 과거의 추억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내가 아는 얼굴들이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에스티안.

내가 좋아하는, 내가 사랑하는 에스티안.

그리고 그의 소중한 가족인 엘.

그들과 즐겁게 웃고 떠들던 상황이 흘러간 것도 잠시, 금방 눈앞에 보이는 건 고통스러운 세월을 살아왔을 그들의 모습이었다.

몹쓸 오해를 받으면서도 묵묵히 가족을 찾는 에스티안과 힘든데도 삶을 놓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지내는 엘.

그 또한 내가 직접 본 상황들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먹먹하게 차올랐다.

리아나와 대화를 해서인지 그녀 내면에 깊이 자리한 정체불명의 거짓 상상이나 처절한 마음들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아마 이미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엘에게 그런 짓을 저지르고 나서 한시도 안심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살아온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리아나가 쉽게 죽어선 안 된다.

나만 얘기를 들을 게 아니라 똑바로 다 알린 다음에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아야 해.

이미 돌이킬 수 없어도 피해자들에게 사죄도 해야 하고, 그들이 주는 처벌도 받아야 해.

꽤 높은 데서 뛰어 구른 것치고 몸의 흔들림은 생각보다 금방 멈춘 것 같았다.

그 찰나에 너무 많은 생각들이 지나간 탓인지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귀는 먹먹해졌다.

나는 끝까지 리아나의 드레스 자락을 놓지 않고 있었기에 내 손에서부터 시선을 따라가 그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절한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지만, 절대 죽지는 않았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아, 다행이다. 그럼 됐다.

곧 그림자가 어둡게 지고 내 이름을 몇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힘이 빠져 그대로 의식을 놓아 버렸다.

*

‘다른 남자 주인공은 무조건 바람둥이여야 해. 여성 편력 있어서 옆에 여자 매번 갈아치우고 하는 그런 나쁜 남자로. 그런 남자가 또 매력 있단 말야.’

‘그건 너무 쓰레기 아니야?’

제삼자의 입장이 된 내 눈에 친구와 내가 대화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나는 이미 친구의 이야기 속 아델린이 되었으니까 이건 꿈이려나?

과거에 친구와 내가 나눴던 대화였다.

아, 아무 생각 없이 해 버린 말 때문에 에스티안은 말도 못 하게 오랜 세월을 고생했는데.

당장 달려가 말하고 있는 내 입을 막고 싶었지만 무슨 장벽이라도 있는 듯 친구와 내가 있는 쪽으로는 갈 수 없었다.

‘바람둥이니까 네가 여자 주인공에 대한 진정한 마음을 깨닫도록 하라고 했지?’

‘그렇지. 근데 그냥 깨닫기에는 좀 심심하니까…… 사연 같은 걸 네가 만들어서 끼워 넣어 봐. 나름대로 사연이 있어서 바람둥이처럼 사는 거지.’

‘사연…… 사연은 뭐로 하지. 하여간 알겠어.’

‘아, 근데 이거 약간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건가?’

‘뭐 어때. 내가 내 마음대로 쓰는 글인데. 사연을 좀 잘 써 볼게.’

친구와 나는 에스티안에게 사연을 만들어 주겠다며 낄낄댔다.

이후에 그녀의 소설을 읽었을 때 에스티안의 여동생 얘기 같은 건 나오지 않았기에, 아마 에스티안을 위한 사연은 친구가 넣지 못했거나 아예 다른 것이거나 둘 중 하나였을 터였다.

사실 친구는 인기 있으면 별도로 외전을 쓰겠다며 엄청 벼르고 있었는데, 인기가 없어서 그건 쓰지 못했다. 에스티안의 이야기는 어쩌면 외전에 담길 내용이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정말로 그에게 생긴 어떤 또 다른, 나는 알 수 없는 특징일 수도 있을 것이다.

눈앞은 곧 휙 바뀌었다. 나와 내 친구가 바람처럼 흩어지더니 어느새 눈앞에는 에스티안이 나타났다.

“에스티안!”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나갔지만, 내 목소리는 아예 나오지 않고 입만 뻐끔댄 것처럼 되었다. 그리고 아까처럼 어떤 막 같은 게 있는 듯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의 뒤로 보이는 풍경은 제국의 시내였다.

어쩌면 내가 이전에 회사 생활을 하고 혼자 지내던 동네의 모습보다도 훨씬 익숙할지도 모르는 풍경이었다.

그는 제복 아닌 가벼운 차림으로 시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엘을 찾고 있는 거였다.

그는 항상 추측만 하던 뒷골목의 술집 거리나 어두컴컴한 뒷길 등을 서슴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어떤 표정도 없이 정말 목표 하나만 있는 느낌으로 재빠르게 이곳저곳을 헤치는 그의 모습은 낯설었다.

검을 들었을 때도 저런 느낌은 나지 않았는데.

하긴, 늘 그가 엘을 찾으러 다니다가 나를 만나러 왔을 때만 봤지, 엘을 찾고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나의 상상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정말로 있던 일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에스티안은 엘을 찾지 못한 듯했고, 여전히 아무 감정도 없는 표정으로 그저 걸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에스티안이 아주 착잡하고 절망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 티를 내지 않지만 적어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 먹먹해져 눈물이 고임과 동시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게 누구보다 힘들게 또 묵묵히 견디며 지내 왔을 에스티안의 사연인 건가. 내가 보는 이 단면보다도 훨씬 더 마음 아픈 것이었을 터다.

그렇게 에스티안에게 가까이 갈 수도 없어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다시 친구와 내 모습이 나타났다.

그냥 내 꿈이라서 이렇게 아무거나 나오는 건가?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가까이서 대화를 지켜볼 수 있었다.

‘어디다 넣을지는 모르겠는데, 약간 곁다리 느낌으로 여자 주인공이랑 그 친구랑 한번 다투는 장면을 추가하려고 하거든.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지? 아예 웃긴 느낌으로 둘이 치고받고 싸우게도 할까 생각했어.’

‘둘이 치고받고……? 여자 주인공 되게 소심하고 숫기 없는 타입이잖아. 친구는 엄청 활발한 타입이고. 그냥 일방적으로 맞는 거 아냐?’

분명 저런 대화를 나눴던 걸 기억한다. 주인공들의 연애만으로 이야기 진행이 되지 않자 몇몇 에피소드를 넣겠다는 거였는데, 그중 하나가 리아나와 아델린이 싸우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리아나는 하나도 안 소심하고 숫기 없지도 않은데. 나랑 싸우게 되었을 때 그녀가 이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그냥 싸우는 게 아니라 둘이 감정적으로 어떻게 좀 골이 생기고 그걸 풀어 나가게 하고 싶은데…… 맨날 여자 주인공 입장에서만 생각하다 보니까 그 친구가 어떻게 생각할지 감이 안 와. 되게 웃기지. 실존인물도 아닌데 진짜 모르겠더라.’

‘이야, 작가님 마인드네. 그럴 수 있지.’

‘여자 주인공이 예를 들어 친구한테 뭐 잘못 같은 걸 했다고 치자. 당연히 남자 주인공인 황태자는 여자애가 뭘 하든 다 받아 주고 이해해 줄 거야.’

‘그렇지, 그래야지.’

친구가 애초에 만들었던 유리엘은 리아나의 순수하고 여린 모습에 푹 빠져 있는 존재였기에 당시만 해도 저렇게 얘기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가 맹수처럼 상황을 판단하고 단번에 모든 것을 제압하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린 상태였다. 유리엘이 뭘 하든 다 받아 준다니, 상상이 안 되네.

다음에 친구랑 무슨 얘길 했더라?

잠깐 멍하니 과거를 떠올리는데 어느 순간부터 미묘한 느낌이 들어 시선을 바로 하자 친구가 나를 보고 있었다.

과거에 얘기하던 내가 아니고 지금의 나를.

어느새 과거의 나는 사라져 있었고, 지금의 내가 친구 앞에 앉아 함께 얘기를 나누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친한 친구인데도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들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너 같으면 어떻게 할 거야? 이번에도 네 얘기대로 써야겠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보며 얘기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사라진 것 같았다. 말을 하면 이것도 전달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내가 대답해도 되는 건가?

“……뭐를?”

말이 나왔다. 그리고 눈앞의 친구에게도 닿았다. 친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

“뭐긴. 여자 주인공이 잘못했을 때 만약 네가 걔 친구라면 어떻게 할 거냐고. 황태자처럼 다 용서? 아니면 분노에 차서 너도 엿 한번 먹어 봐라 하고 보복?”

이것도 분명히 과거에 친구와 나눴던 얘기였다. 기억이 난다.

근데 내가 뭐라고 했더라.

기억을 더듬고 나서 그때처럼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희한하게도 내 입에서 말이 먼저 나갔다.

“어떤 잘못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얘기를 좀 들은 다음에 판단할 거야.”

위화감도 없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 말을 했던 게 맞는지도 좀 불분명했다. 내 입에선 또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 이어져 나갔다.

“자기 잘못을 인정 안 한다거나 뭐가 잘못인지도 모른다면 그건 좀 심각한 거니까, 그럴 땐 법의 심판 같은 걸 받게 할 거야. 그리고 피해자가 있으면 그 피해자의 고통도 풀어 줘야지.”

“그렇지? 역시 그렇게 해야겠다.”

친구가 저렇게 대답했던가?

네가 소설 속 주인공 친구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심각하게 구냐고 묻지 않았던가?

기억이 어디서부터 이상한 것인지 곱씹는데 불현듯 내가 한 말에서 무언가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눈앞에 있던 친구는 다시 사라졌고, 언덕이 나타났다. 아델린이, 그러니까 내가 구른 적 있는 그 언덕이 나타난 것이다.

홀린 듯이 언덕 위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과거의 리아나와 아델린이 보였다. 둘은 붙어서 뭐라고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지만 말소리까지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들을 필요도 없었다. 곧장 리아나가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아델린을 언덕 아래로 밀었으니까.

리아나는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뒤돌아 뛰어갔고, 얼마 안 있어 쥴을 선두로 사람들이 뛰어왔다.

‘이전에 그런 생각으로 널 밀었었는데 넌 살아났더라.’

아무리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거라고는 해도 이게 의미 없는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 리아나가 민 거였구나.

여러 사람들 틈에서 너무 놀라 굳은 표정을 지은 쥴에게 안겨 정신을 잃고 늘어진 채 있는 아델린을 보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주변 사람들이 더 마음 아팠겠지.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절망스러운 얼굴로 덜덜 떨며 나를 보던 시선이 마음을 쿵 치고 지나갔다.

‘아델린. 델. 델…… 제발. 정신 잃으면 안 돼. 눈 떠서 나 좀 봐 줘, 델. 제발…….’

에스티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에스티안이었다.

나는 꿈을 꾸기 전 분명 에스티안을 본 것 같다. 괜찮다고 대답도 했던 것 같은데.

꿈을 왜 꾸기 시작했지? 아, 언덕에서 리아나를 쫓다가……!

‘법의 심판 같은 걸 받게 할 거야. 그리고 피해자가 있으면 그 피해자의 고통도 풀어 줘야지.’

그래, 그렇게 하고 싶어서 내가 뛰어들었잖아.

그건 내 생각이었다.

얼떨결에 아델린으로 지내게 되었어도 결국 난 중요한 순간 친구의 소설 속에서 내 생각대로 결정하고 행동을 한 셈이 되었다.

그동안 피해 받았던 엘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또 에스티안을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니 뿌옇고 몽롱했던 꿈 같은 시야가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얼른 꿈에서 깨서 에스티안을 봐야 해. 그가 보고 싶어.

*

정신은 깨어난 것 같은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방망이로 맞은 듯 너무 아프고 욱신거려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이라도 뜨고 싶은데 눈꺼풀조차 잔뜩 무거워 들어 올리기 힘들었다. 팔을 올리려고 하는데 팔도 안 올라가고 어딘가 뻣뻣한 느낌까지 들었다. 다리를 굽히려고 하는데도 굽혀지지도 않았다.

뭐야, 가위 눌리는 건가? 얼른 눈이라도 뜨고 싶어 눈꺼풀에 힘을 잔뜩 주었다. 반쯤 떠진 것 같은 눈 사이로 빛이 찌르고 들어왔다.

가만히 있는데도 눈이 따가워 다시 눈을 감고 싶었는데, 순간적으로 바로 옆에서 의자를 거칠게 끄는 소리가 나서 뻑뻑한 눈을 겨우 굴렸다.

아직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아 느리게 눈을 몇 번 감았다 떠야 했지만, 알 수 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얼굴. 어렴풋이 보이는 푸른 눈.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특유의 안정감 있는 숲 향기.

소리 내서 얼른 이름을 말해 주고 싶은데 입술도 바싹 마르고, 목구멍도 너무 따가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입술을 떼니 바보같이 옅은 숨만 새어 나왔다.

“델, 델, 정신이 들어? 정말로 깨어난 게 맞나? 나를 알아볼 수 있는 건가?”

에스티안은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먹먹하고 낮게 가라앉은 에스티안의 목소리가 너무나 반가웠다.

점점 밝아지는 시야로 잔뜩 충혈된 그의 눈이 보였다. 너무 야위고 초췌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윽.”

그의 손을 잡고 싶어 팔을 움직이려는데 또 아까처럼 아파서 절로 인상이 구겨지며 신음이 나왔다. 내 반응에 튀어 오르며 놀란 에스티안은 급하게 종을 울려 사람을 불렀다.

치료사인 것 같은 사람 둘이 와서 내 이곳저곳을 살폈다. 눈꺼풀을 잡고 올려 안약 같은 것을 넣어 주니 눈이 덜 뻑뻑해졌고, 미지근하고 쓴 물을 주길래 마셨더니 목도 덜 아프고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으로 그들이 이불을 걷어 냈을 때, 드러난 내 꼴에 나는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부목이었다. 오른팔과 왼쪽 다리에 각각 부목이 대어진 상태였다. 이러니까 팔도 다리도 움직일 수가 없었구나.

부목이 대어지지 않은 쪽의 팔과 다리는 붕대로 둘둘 감겨 있었다. 여긴 이래서 또 움직이기 힘들었을 테고.

치료사들이 부목 상태를 확인하고 약을 한 번 더 먹이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던 에스티안은, 그들이 나가자마자 상처에 바르는 연고와 붕대를 가져와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역시 입을 열지 않고 내 팔에 감겨 있던 붕대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붕대 꼴을 보아하니 감겨 있던 시간이 좀 지났을 것 같았다. 그냥 북 찢어도 될 것 같은데 그는 유리조각을 잡듯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었다.

붕대가 완전히 벗겨지자 이곳저곳에 붉게 상처가 난 팔이 드러났다. 하긴, 나뭇가지며 돌이며 그런 게 가득한 곳을 굴렀으니 이런 상처가 난 건 당연할 것이었다.

에스티안은 잠시 그 상처들을 보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마른세수는 곧 눈가에 차오르는 열기나 눈물을 참는 것처럼 눈두덩을 꾹 누르는 행동으로 바뀌었다.

그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먹먹해졌지만, 오직 나만 그의 침체된 기운을 끌어 올릴 수 있을 게 뻔하기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에스티안.”

약을 먹어서인지 다행히 목소리가 그렇게 갈라지거나 흉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말이 없는 채로 내 팔에 연고를 바른 뒤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너무 조심하는 게 느껴져 오히려 간질간질했다. 나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아무 얘기나 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야위었어요. 너무 피곤하고 아파 보여요.”

“…….”

“아, 확실히 부목을 한 팔은 움직이기가 힘드네요. 손잡고 싶은데…….”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스티안은 내 손을 잡아 왔다. 그의 손이 평소와 다르게 너무 차가워서 놀란 건 내 쪽이었다.

“손이 너무 차요, 에스티안. 원래 엄청 따뜻하잖아요.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

“나 좀 봐 주면 안 돼요? 나 일어난 지 꽤 됐는데 여태까지 한 번도 제대로 눈 안 마주쳤잖아요.”

에스티안은 잡고 있던 내 손 위로 무거운 한숨이 담긴 입술을 꾹꾹 눌렀다. 거칠게 일어난 그의 입술이 손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고는 드디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피곤하게 가라앉은 눈이라 오히려 그걸 보고 내가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 그가 나를 확 끌어안았다. 떨리는 그의 숨결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일어난 지 꽤 된 게 아니라 그대가 일어나지 못한 시간이 너무 길었어.”

얼마나 됐는데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무겁게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보고 있을 때는, 그대가 계속 눈을 감고만 있어서.”

“…….”

“무서워서. 내가 쳐다보면 또 그대가 눈을 감을까 봐. 그래서 그랬어.”

그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와중에 늑대의 기운이 느껴졌다. 잔뜩 상처받아 웅크린 채 울고 있는 것 같은, 기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약한 것이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몸을 살짝 떼어 내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지금 그는 나를 보고 있었지만, 너무 마음 아픈 얼굴이라 그를 보는 나도 마음이 아렸다.

그가 다쳤을 때 내가 지었던 그 표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애써 입을 열었다.

“저 일어났는데. 이제 완전 멀쩡해요.”

에스티안은 여전히 붉은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뜨겁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손을 움직여 붕대를 풀고 새로 감으며 그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하기 시작했다.

내가 깨어난 건 언덕에서 리아나와 구른 사고가 있고 난 지 열흘이 지난 뒤였다.

사고 당시 나와 리아나는 둘 다 다행히 근처에 가깝게 숨어 있던 블라머프가의 기사들이 뛰쳐나와 잡아 준 덕에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다.

다만 둘 다 기사들이 구했을 때 충격을 받았는지 기절한 상태였고, 한 4일 정도 있다 정신을 차린 리아나보다 내가 훨씬 늦게 깨어난 거였다.

리아나와 나는 모두 신나게 굴렀으니 타박상이 좀 있었고, 나는 다짜고짜 달려들어 구른 탓에 팔과 다리에 금이 갔으며, 리아나는 구르다가 손을 잘못 움직여 손가락뼈가 부러졌단다.

의식이 없던 내내 나는 지금 있는 여기, 에스티안의 개인 방에서 치료받고 상태를 확인받으며 있던 것이다.

소란이 일어나자마자 나의 부모님이 달려왔고, 상황을 전해 들은 뒤 만신창이가 된 나를 본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충격으로 쓰러졌다고 했다. 에스티안이 급한 마음에 나를 바로 안고 이동한 데다, 어차피 어머니와 나, 둘 다를 메이스프릴가의 치료사가 봐 줄 수 없었기에 나는 계속 그의 저택에 있었다는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어머니와 아버지, 엘과 쥴, 안나 등 모두가 다시 블라머프가로 찾아왔으나 당장은 내가 깨어나지도 않았으니 그저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블라머프 공작과 공작 부인이 수시로 찾아온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했던 리아나의 상황에 대해서도 에스티안은 천천히 얘기해 줬다.

그녀에 대해 얘기할 때 어쩐지 늑대의 기운이 순간적으로 흉흉하게 솟구치면서 그가 화를 내는 것 같아,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손으로 더듬더듬 그의 손을 잡아야 했다.

나와 리아나의 대화를 듣는 임무를 맡았던 기사의 증언과, 이전에 황실에 방문했을 때 리아나와 엘리디트 백작 부인이 하는 말을 함께 엿들었던 시녀 소니아의 증언으로, 엘리디트 백작 부인과 리아나는 현재 처벌을 기다리며 감옥에 갇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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