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장 (12/18)

12장

“그래도 괜찮게 된 거예요?”

“응. 엘 스스로도 교육과 상담 치료를 통해서 마음을 거의 다잡았고 두려움을 많이 없앴거든.”

“정말 잘됐다. 정말, 정말 잘됐어요.”

“부모님도 지금이라면 엘에게 괜찮을 거라 하셨고, 무엇보다 엘 스스로의 의지가 강하기도 하고.”

드디어 엘이 사교계로 나가는구나.

황실 측에도 최근에 오래전 잃어버렸던 딸을 겨우 찾았다고 얘기한 상태라고 했다.

황실에서는 당장 그녀를 사교계에 내보내고 오래된 사건의 범인을 공개적으로, 또 공격적으로 캐낼 것을 제안했지만 이는 블라머프가가 거절했다.

황실에 그 얘기를 전할 때만 해도 과거 엘에게 있었던 사건의 배후를 정확히 모르는 상태여서이기도 했고, 아직 상담과 교육을 병행하는 엘을 섣부르게 세상으로 내보냈다가 다시 위험해질까 두려워서이기도 했다.

나는 그게 정말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게 준비된 다음에 나가도 전혀 늦지 않으니까.

그리고 황실에서 수상한 가문 하나가 있다고 엘리디트 백작가를 마구 털었어도 분명 묘한 시선을 받았을 것이다.

다만 블라머프가는 이런 내용까지 황실에 전하진 않고, 그저 그녀의 건강을 위해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배후는 메이스프릴가의 도움을 받아 찾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행히 블라머프 공작가를 황제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다 황실과 공작가가 워낙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기에 소문이 새어 나갈 위험도 없는 듯했다.

개인적으로 신기한 건 황태자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자세를 취했다는 것이었다. 내 기억에 황태자는 어쩐지 제멋대로이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 같았는데.

“황실에서 협조하다니 뭔가 의외이지만 정말 다행이네요. 사실 황실이라기보다는, 유리엘 황태자 전하가 고분고분 이 모든 걸 수긍하고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는 게 신기해서요.”

“황제 폐하께서 공작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하고 계신데 황태자 전하가 별수 있나.”

“그건 그렇죠.”

“그런데 그런 것과 별개로 전하와 나도 친우나 다름없는 꽤 가까운 사이라서.”

“아, 정말요?”

“전하께서 어렸을 적에는 내가 개인 호위를 하기도 하고 검술을 알려 드리기도 했어. 뭐, 그대 말대로 절대 고분고분하시지 않는 분인 건 맞지만.”

에스티안은 그렇게 말하곤 옅게 웃었다. 그 미소가 정말로 친한 친구를 떠올리는 듯 따스해 보여서 보기가 좋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꽤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전하께서 얌전히 계신 데는 메이스프릴가가 도왔다고 말한 영향이 크지.”

“저희 가문이요? 저희는 사실 평범한 백작가라서 특별할 게 없는데.”

“그대가 있으니까. 델, 그대가 메이스프릴가의 영애니까. 혹시라도 그대에게 피해가 갈까 봐 신경을 많이 쓰셨지. 전하께서 그대를 꽤 마음에 담고 계셨는데 혹시 몰랐나?”

“네?! 어, 그냥 좀 특이하신 분이다, 이런 정도였지 그런 건…….”

아니,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이야기야. 물론 무도회 때나 사냥제 때 미묘한 느낌을 받긴 했는데 그래도 이런 얘기를 직접 들으니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말을 전하는 게 현재 애인인 에스티안이라니…….

내 멍청한 표정에 그는 픽 웃고는 말을 마저 계속했다.

“역시 그대는 잘 몰랐군. 그랬으니 리아나 엘리디트를 그렇게 전하와 붙여 두려고 애를 썼겠지.”

“하하…… 정확하네요, 에스티안.”

“전하가 매번 어찌나 나에게 하소연을 했는지.”

그 정도였단 말이야? 그래서 유리엘이 그런 말을 했던 거구나.

‘항상 그대는 리아나 영애와 나를 함께 있게 만들고는 슬쩍 빠졌지.’

“허어…… 그랬구나. 두 분은 이런 얘기를 할 정도로 가까운 거예요? 그리고, 음…….”

말하려고 생각하다 보니 원래의 내용, 그러니까 내 친구가 썼던 내용이 떠올랐다.

분명 원작에서 아델린은 리아나와 황태자가 서로 친해질 수 있도록 둘을 연결해 주었는데.

리아나만 황태자를 좋아하는 거였나?

그런데 그런 것치고 원래 결말은 결국 둘이 결혼하지 않나. 그래서 에스티안은 자기가 모시는 황태자의 사랑을 응원하며 손을 떼는 게 결말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중간에 끼어들게 되면서 이야기에 뭔가 변동이 생긴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전하 얘긴 괜히 알려 줬군.”

내가 멍하니 가만히 있자 에스티안이 가볍게 내 손을 잡고는 입을 맞췄다. 나도 따라서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입술을 꾹 누르고는 불현듯 알고 싶은 것을 물었다.

“이건 정말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혹시 황태자 전하가 에스티안보다 저를 더 먼저 좋아했어요?”

“아니. 내가 먼저.”

아, 내뱉고도 부끄러운 단어들뿐이라 괜히 얼굴이 벌게지는 기분이었는데, 에스티안의 입에서 곧장 나온 즉답에 목까지 다 홧홧해졌다.

그럼에도 꿋꿋이 물어볼 건 물어봐야겠다 싶어 나는 입을 또 열었다.

“어, 언제부터요?”

“그대와 리아나 엘리디트가 사교계에 데뷔하고 나서부터 이곳저곳 다니며 나와 전하를 마주치게 되었으니, 2년 정도 된 건가.”

으아, 그렇게 오래되었단 말이야? 하긴, 에스티안은 아델린을 처음 봤을 때도 그렇게 벽을 세우는 느낌은 아니었지.

그가 나를 이전부터 좋아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전하와 리아나 엘리디트를 붙여 두면 자연스레 그대는 나와 함께하게 되었던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

“헤, 그랬구나.”

“그대는 몹시 활발하고 주위 사람들과도 모두 친해서, 나와는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도 했었어. 나는 그런 것과는 썩 가깝지 않은 사람이라, 그대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

“그런 생각도 했어요?”

“응. 꽤 고민이었어. 그런데 그대가 생각보다 활발하지도 않고 사람들과 친한 것도 아니라서…….”

너무 사실만 얘기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역시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무언가 변한 거구나.

에스티안은 방 안에 처박혀 나오지도 않던 내 모습들을 얘기하며 계속 낮게 웃었다.

장난스럽게 놀리는 듯하면서도 그 웃음 속에 나를 향한 애정이 그 어떤 것보다 깊게 깔려 있는 걸 느낄 수 있었기에, 나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도 애틋해졌다.

결국 우리는 얘기를 그렇게 더 나누었고, 나는 그 별장에서 결국 하루를 더 있다가 돌아갔다.

다행인 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에스티안과 지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도 정말로 내가 엘과 놀다 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에스티안이 블라머프가에서 전령을 보낸 것과 또 따로 쥴에게 대충 말을 전했고, 쥴이 그걸 부모님과 엘에게도 전한 모양이었다.

이건 전부 저택에 들어섰을 때 힐끗 가늘어진 눈빛을 보내는 쥴이 하도 수상해서 캐물어 듣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귀여웠던 나들이 한 번과 처음 겪은 뜨거운 나들이 한 번이 각각 마무리되었다.

*

마치 쉬는 날 논 것이 폭풍전야의 평화로움이었던 것처럼 며칠 지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주가 바뀌고 나니 변화하는 것들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해 뭐가 변화할지 대충 알고 있는데도 그 변화를 눈앞에서 마주하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으, 제가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고 사교계로 완전히 들어가고 나면 이렇게 편하게 언니를 보러 올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퍼요. 귀찮게 편지를 먼저 보내 확인하고 그래야 하잖아요. 또 우리 둘이 만난다고 하면 다른 영애들이 눈치 없이 끼어들기도 할 거고요.’

며칠 전 ‘정체가 밝혀지기 전 마지막으로 놀러 왔다’고 말하며 엘이 우리 저택에 방문했었다.

그날도 그랬고 평소에도 그랬고 원래 엘은 특별한 편지 없이도 자유롭게 우리 저택을 드나들었다.

다만 에스티안은 근무 중인 시간이고, 대외적으로 그를 제외하면 블라머프가에 나를 그렇게 자주 방문할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블라머프가의 마차를 타고 올 수는 없었기에 늘 가문 문장 표시가 없는 마차를 타고 왔더랬다.

그리고 엘의 존재는 어제 밝혀졌고, 그녀와 나는 지금 시내 한 티 살롱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저택으로 서로 오가기에도 시선이 너무 집중되는 듯해 일부러 사람이 없다는 살롱까지 꾸역꾸역 찾아왔건만, 주변은 인산인해였다.

“아, 왠지 거리에서 공연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에요, 언니.”

“어제부터 피곤하죠. 그래도 나는 엘이 이제 당당하게 바깥으로 다닐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엘은 포크로 생크림을 얹은 케이크를 작게 잘라 입으로 가져가 넣고는 오물오물 먹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것도 사실은 한입에 다 넣을 수 있는데. 공녀가 뭐라고. 그래도 주변 시선이 확 달라지니 씁쓸하면서도 뿌듯하긴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동안 엘이 고생했던 거 생각하면 훨씬 더 뿌듯하게 느껴도 돼요.”

“제가 고생은요. 저도 저지만, 저는 오히려 오라버니에 대한 누명이 싹 다 벗겨져서 너무 좋아요. 아, 이건 오라버니뿐만 아니라 언니에게도 너무 좋은 거죠?”

아무렴. 나는 거의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을 숨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오라버니는 그런 얘길 대체 왜 저한테 안 한 건지.”

“아, 에스티안이 소문에 대해서는 엘에게 말을 안 하고 있었나 봐요.”

“네! 그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자신에 대한 소문은 크게 상관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걸 보고 펑펑 울었어요. 그리고 저는 언니도 소문을 진짜로 생각하고 있는 줄 알고, 언니는 어떡하냐고 그랬는데 언니는 알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죠. 엘에게 숨기려고 숨긴 건 절대 아니에요. 말할 기회를 놓친 것이기도 하고…….”

“아아, 언니한테 뭐라고 하는 게 절대 아니에요! 그냥 신기하고 너무 보기 좋아서요. 오라버니가 언니한테는 사실을 먼저 밝히고 싶었다고,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마음을 그에게서 직접 들었을 때 얼마나 벅찼던가. 계속 웃는 나를 따라 엘도 같이 웃었다.

“헤헤. 아, 그건 그렇고 흐, 저번에 저택에도 안 들어오셨을 때 얘기 좀 해 주면 안 돼요?”

씩 웃으며 낮게 웃는 엘에게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살롱 바깥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잠시 서서 우리를 보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어제의 발표는 블라머프 공작과 황제가 함께 황실 내 대형 광장에 직접 나와 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광장에는 우리 같은 귀족들, 관심 있는 일반 사람들, 호외를 써서 날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청년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발표 내용의 골자는 9년 전 블라머프 공작가에서 잃어버린 딸 에란티아, 그녀를 극적으로 찾았고, 그녀를 찾는 데 황실과 메이스프릴 백작가가 준 도움이 아주 컸다는 것이었다.

미리 말했던 것처럼 이른바 ‘에란티아 실종 사건’과 그 배후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호외꾼들이 몇 번이나 ‘혹시 납치였던 건 아니냐’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지만 공작도, 황제도, 황태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날카로운 호외꾼의 질문과 그에 대한 공작의 대답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건 별개의 질문입니다만, 에스티안 블라머프 황실기사단장께서 그동안 제국 내 곳곳을 뒤지고 다니며 수많은 여자를 만난 것도 에란티아 공녀님을 찾기 위해서였습니까?’

‘……그렇소. 내 손이 닿기 어려운 곳은 기사단장이 직접 탐문하고 다녔소.’

에스티안에 대한 진실은 밝혀진 엘의 존재만큼이나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바람둥이에 호색한인 줄 알았던 사내가 사실은 잃어버린 여동생을 몇 년간이나 찾아다니고 있었고, 심지어 자신을 두고 도는 몹쓸 소문들도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는 사실은 거의 모든 여성들의 마음을 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입꼬리가 슥 내려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때 언니 별장 가셨다면서요. 오라버니만의 공간이라 제가 갈 일이 없기도 하지만요. 어떠셨어요? 아, 별장에 대해 묻는 건 아니고요…….”

상념을 깬 건 다시 흐흐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곤 입가에 손을 대는 엘의 목소리였다.

아! 다 알면서 묻는 거지! 이것도 분명 블라머프가의 교육을 받으며 다 알게 된 거겠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별장이 정말 크고 좋더라고요. 엘은 계속 요새 쥴 경이랑 친하게 잘 지내는 것 같던데. 뭐 진전된 거 없어요?”

“아, 그렇지 않아도 언니에게 물어보려고 했어요! 쥴 경이…….”

다행히 대화 주제가 바뀌었다.

내심 안도하며 엘과 계속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데, 뒤쪽 테이블의 대화가 자꾸만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게 대화하고 있다가 흥분해서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건지 어렴풋이 말소리가 들렸다. 엘도 그걸 느꼈는지 눈썹을 한번 올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공작의 친자식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안 그래요?”

“하긴, 갑자기 딸 찾았다고 공표하는 게 영 이상하긴 했죠. 그렇죠?”

“황실기사단장이 워낙 방탕하게 생활하니까, 오히려 그쪽이랑 관련된 건 아니냐는 얘기까지 있더라고요.”

“어휴, 망측해라. 그러면 대체 그게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니, 그런데 그 기사단장 만나는 영애도 있다던데요. 그게 지금 저 옆에 앉은 영애 아니에요? 저 영애는 다 알고 만나는 건가?”

삼류 막장 소설 같은 상상들을 직접 떠들고 있는 몇몇 영애들을 잠시 보다가 눈이 마주친 엘과 나는 서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테이블 간 간격이 좀 있어 이렇게 귀 기울이지 않는 이상 남의 얘길 들을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그리고 또 눈에 보이면 그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심리가 생기는 거도 맞기는 하니까.

하지만 막상 듣고 있으니 목구멍으로 울컥 분노가 치미는 것 같았다. 공작이 황실과 함께 발표를 했는데도 멋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내가 뭐라고 말할까? 하는 눈짓을 엘에게 보냈는데 그녀는 고개를 작게 적고는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떴다. 그리고 자길 믿으라는 듯이 작은 주먹을 들어 가슴팍을 탁탁 쳤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 수군대며 떠들기에 여념이 없는 영애들에게 다가갔다.

나는 의자를 소리 나지 않게 슬쩍 빼서 어떤 상황인지 지켜보기로 했다. 여차 하면 바로 달려 나가서 엘의 편을 들어 줄 준비를 하면서.

“…….”

그러나 엘이 먼저 뭐라고 입을 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조용했다. 뭐지? 작게 얘기하고 있는 것도 아닌 듯한데.

“……에란티아 영애?”

“어느 가문 영애들인지 참 무례하군요. 가문의 위계상 영애들이 나를 먼저 알아보고 와서 인사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내가 이렇게 친히 걸음을 옮긴 것으로도 모자라 입도 먼저 열어야 하나?”

블라머프가에 박혀 교육만 받은 보람이 있구나. 예법상 틀린 것도 없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엘의 말에 영애들은 모두 굳어 있다가 서로 눈치를 보고는 퍼뜩 일어나 치마를 잡고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블라머프가의 에란티아 공녀님을 뵙습니다. 인사가 늦은 점, 송구합니다.”

“에란티아 공녀님을 뵙습니다.”

서너 명 정도 되는 영애들의 인사를, 엘은 가만히 서서 흐트러짐 없이 하나하나 받았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인사를 하지도 않아 분위기는 몹시 차가웠다.

아, 인사만 한 것으로도 통쾌하다니. 인사를 마치고도 그녀들은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그녀들보다 고위 귀족인 엘이 건너편에 먼저 앉아야만 그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내 얘기를 하고 있던 것 같은데. 마저 해 봐요. 듣고 맞는 얘기면 같이 웃지요.”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묻는 엘의 말에 그녀들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까 떠들던 그 패기는 어디로 간 거야? 고작 이 정도로 다물어질 입이었으면 열지나 말지.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될 만큼 엘이 너무나 멋지게 대응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저 뒤에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바라만 봐도 되었다.

“저, 송구스럽습니다. 공녀님에 대해 좋지 못한 소문을 들어 그 얘기를 한다는 것이 그만.”

“예,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아, 소문. 그 소문은 어디서 나왔나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엘이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그녀들을 향해 물었다. 단지 질문을 들은 것으로 그녀들은 압도당해 눈만 꿈벅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나온 거 아닌가?”

엘은 장갑 낀 손가락을 들어 가장 목청 높여 떠들었던 한 영애의 입술 위로 가져다 댔다. 그 영애는 사색이 되어 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는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소문의 진위를 알려 줄 연회를 열 거예요. 블라머프 공작가가 주최하고, 황궁에서 친히 장소를 제공해 주어 꽤 규모가 큰 연회가 열릴 예정이거든요.”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는 영애들에게 엘은 계속 이어서 말했다. 어느새 엘은 그 영애에게서 손을 떼고 장갑도 양쪽 모두 벗어서 그녀들의 테이블 아래로 던진 상태였다.

“아마 거기서 다시 한번 공작님, 즉 아버지께서 나를 소개할 것이고, 마물 퇴치를 훌륭히 해낸 것과 거리의 왈패들을 모두 잡아들인 것, 노예선의 뿌리를 뽑는 데 일조한 것으로 황실기사단이 포상을 받을 거예요.”

“헙…….”

“그 대표로 방탕할 겨를도 없이 바빴던 황실기사단장님이 연단에 설 거고요.”

“아, 아아…… 공녀님, 그게 아니고요.”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누가 감히 말을 끊는 거지요?”

날 선 엘의 목소리에 다시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엘이 무슨 말을 이어서 할지 나조차 긴장되었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기사단장님의 아주 오래된 연인도 그 자리에 함께 있을 거예요. 그게 누구인지는 다 아시는 것 같네요.”

으아, 내 얘기까지! 오랜 연인이라니, 이런 상황에서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엘의 말에 그녀들은 힐끗 내 쪽을 쳐다봤다가 곧바로 시선을 다시 엘에게로 돌렸다.

“그래서, 연회에 참석하시면 그 모든 소문의 진위를 알 수가 있을 텐데. 아시다시피 어느 정도 격이 되는 가문의 영애와 영식들을 부르지 않겠어요?”

그제야 그녀들은 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은 듯했다.

이대로 간다면 그들은 이른바 사교계의 변두리에서 계속 지내야 할 것이다.

엘은 이미 연회 전에도 티타임을 열 생각을 하고 있었고, 또 그녀에게 수많은 티타임 초대장들도 오고 있었다.

사교계의 맨 꼭대기가 엘이 될 거라는 게 너무도 자명했기에,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잘못 보였다간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보아하니 남의 뒷얘기 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니, 내가 앞에 있었으니 그저 근거 없는 이야기로 험담하는 것을 좋아하는 거로군요.”

틀린 것 하나 없이 지적하는 엘의 말에 영애들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린 채였다.

“정말 망측한 건 영애들이네요. 그럼에도 나는 자비를 베풀어 그대들이 소문이 아니라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사교계 활동을 활발히 하는 영애들로서는 큰 연회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어딘가에 가서 얘기할 거리가 됨은 물론, 다양한 다른 귀족을 만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기도 하니까.

그것을 모를 리 없는 그녀들은 아주 간절한 시선으로 엘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은 잠시 그녀들을 눈으로 한번 훑고는 안타깝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슬쩍 올렸다.

“초대장이 갈지 모르겠군요.”

엘이 치마를 잡아 몸을 틀어 다시 내 쪽으로 오면서 그녀들은 완전히 외면당한 거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녀들은 어안이 벙벙한 듯 그대로 굳어 가만히 있다가 ‘큰일 났다’, ‘다 틀렸다’ 등의 말을 하고는 울상을 짓더니 살롱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엘이 물론 아주 매섭고 도도하게 얘기하긴 했지만, 저렇게 싱겁게 나가다니, 애초에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어휴, 저 어땠어요? 좀 근사했어요? 공녀로서의 위엄이 있었어요? 아,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말은 이렇게 했어도 연회에 사람이 너무 적게 오면 큰일인데.”

엘은 털썩 내 앞에 앉아 아까 먹던 생크림 케이크를 한입에 넣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 이렇게나 귀여운 아이가 그토록 멋진 공녀라니. 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완전 위엄 있었죠, 에란티아 공녀님. 너무 근사했어요. 연회는 사람으로 아주 붐빌 것 같으니 하나도 걱정하지 말고요. 늘 궁금했는데 블라머프가에선 대체 무슨 교육을 하는 거예요?”

남 험담한 영애들을 혼쭐내서 내쫓은 우리는 그녀들 험담을 좀 하다가 시내에서 구경할 것들 얘기도 했다. 그러다가는 결국 각자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얘기로 귀결되었다.

엘은 확실히 그때의 수상했던 더블데이트 이후로 쥴과 가까워진 것 같았다.

최근 며칠 동안 엘과 만날 때마다 내가 일부러 쥴을 대동하고 가기도 했고, 꼭 그렇지 않아도 둘은 각각 일이 있어 황궁에 갔을 때도 몇 번 마주친 듯했다. 그 각각의 일이 서로를 보는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되어 나는 슬며시 웃었다.

실컷 얘기를 나눈 우리는 살롱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흐르기도 한 데다 별로 특별할 게 없다고 다들 생각해서인지 다행히 아까처럼 모여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언니, 저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 봐야 하지만 언니는 그냥 가지 말고 황궁에 들러요. 아직 오라버니가 있을 거예요.”

“아, 그래요?”

“네. 제가 알기로 오늘은 서류 작업 말고 평기사 검술 훈련 하는 날이라서, 아마 연무장에 있을 거예요. 그것만 끝나면 오늘 업무도 끝이라고 들었고요. 어때요. 가 보는 게 좋겠죠?”

엘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소곤소곤 얘기해 주었다. 그녀가 너무 귀여워 나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귓가에 웃으며 속삭였다.

“내가 또 깜짝 놀라게 하는 거 좋아하는데. 엘이 이렇게 도와주네요.”

*

“…….”

“…….”

“그리 어색한가?”

“아닙니다.”

엘의 말을 듣고 부푼 마음을 안은 채 황궁으로 왔건만, 가장 먼저 마주친 건 너무나도 뜻밖의 인물이었다.

황태자 유리엘.

그는 업무를 보다가 산책을 하러 나온 거라고 했다. 심지어 원래는 집무실 바로 옆에 달린 정원으로 가려던 거였는데 걸음을 옮긴 거라고.

“업무를 보시느라 바쁘고 피곤하실 텐데 왜 가까운 곳으로 가지 않으시고…….”

왜 굳이 여기까지 나왔느냐는 말을 최대한 곱게 포장하려 했지만 잘 되지도 않았다. 어쩌면 무례할 법도 하게 말했는데 유리엘은 픽 웃었다.

“집무실에서 창밖을 보는데 메이스프릴가의 마차가 지나가기에 주저 없이 경로를 바꾸었지.”

“아…….”

“그대를 보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 거니 오해는 하지 않아도 돼. 그대가 황실기사단장과 연인 관계로 잘 지내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아…….”

“물론 마음이 허전한 건 부정할 수 없군.”

“아…….”

“뭐라고 말 좀 하지. 언제까지 감탄만 할 건가.”

계속 작게 입을 벌리곤 한숨처럼 탄식을 쏟아 내는 나를 보며 유리엘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저런 말에 내가 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해. 애초에 특별한 대답을 기대하고 말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래도 감히 황태자 앞에서 계속 입 다물고 있을 수는 없기에, 나는 무슨 얘기로 말문을 열지 열심히 생각했다.

아, 그 얘기가 있었지. 정말로 사과해야 하는 문제.

“그…… 전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 친구를 그렇게 무작정…… 정말 송구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리아나네 가문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다는 것까진 아직 유리엘이 모른다는 거였다.

물론 곧 밝혀질 거고, 그렇게 되면 나는 진짜 이상한 애를 황태자에게 붙여 주려고 했던 죄를 물어도 뭐라고 못 하는 수준이 되겠지만.

고개를 꾸벅 숙인 채 나는 유리엘이 대답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일단은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게 낫겠다 싶어 그러고 있는데, 양어깨를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뭐야? 절로 고개가 퍼뜩 올라갔다.

“그대가 고개를 숙이는 걸 보겠다고 꺼낸 말이 아니니 이러지 말게.”

“그, 그래도…… 송구합니다.”

“이미 여러 번 상처를 받아 아무렇지도 않아.”

“네?”

“그대의 친구인 리아나 영애를 자꾸 내 곁에 있도록 하려는 데서 한 번, 그리고 내 마음을 전혀 모른 채 정말 순수한 의도로 그래 왔다는 데서 두 번, 기사단장과 연인이 되면서 세 번, 지금 이렇게 내 마음에 대해 사과를 하면서 네 번…….”

“저, 전하. 그, 그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장난이네.”

유리엘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말도 안 되는 항목을 읊다가 어쩔 줄 모르는 내 반응에 씩 웃고는 손을 내렸다.

이놈이……. 확실히 유리엘은 멀쩡한 황태자가 아니다. 속내를 종잡을 수 없기도 하고.

모든 게 딱딱 맞아떨어지게 행동하고 생활하는 것 같은 에스티안은 이런 놈이랑 어떻게 친하게 지내는 거지?

잠시 정적이 흐르고 어색해져 나는 입을 열어 아무 얘기나 꺼냈다.

“어, 에스티안과, 아, 아니 에스티안 황실기사단장님과 친하시다고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생각하던 걸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느라 나는 에스티안의 이름을 그냥 말해 버렸다. 뒤늦게 직위를 붙여 격식을 차렸지만 눈썹을 슬쩍 올리는 유리엘을 보아하니 이미 틀린 듯했다.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더 친한 게 아닐까 싶네만.”

“……송구합니다.”

“이걸로 상처받는 횟수가 추가되었어.”

빈정대는 게 아주 최고로구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이를 꽉 깨물어야 했다.

하지만 유리엘이 편안하게 미소 지으면서 말하는 걸 보자 나도 곧 얼굴이 풀려 버렸다.

“그와 내가 친하다니. 기사단장이 허언을 했군.”

저런 말을 할 정도면 정말로 친하다는 거겠지.

유리엘은 생각지도 않게 에스티안과 자신이 곧잘 붙어 지냈던 어릴 적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에스티안은 어릴 때도 곧고 아이답지 않게 우직한 성격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그의 단단함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어 괜히 유리엘이 장난도 걸고 했지만 늘 한결같았다고……. 참으로 그들다운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소문들도 사실 난 전혀 믿지 않았어.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아니까. 말하진 않아도 사연이 있을 거라 여겼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믿어 주고 있었구나. 이건 분명 에스티안도 느꼈겠지. 그리고 티는 내지 않았어도 아주 큰 힘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괴짜라고만 생각했던 유리엘의 이미지는 어느새 좋은 친구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그의 단단함이 그대 앞에서 녹아내릴 줄은 몰랐지.”

“아…… 허헛.”

괴짜 맞나……. 결국엔 내 쪽을 힐끗 보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낸 유리엘 때문에 대부분의 대화는 흐르다가 곧 원점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났다. 하지만 점점 이야기를 할수록 불편하지 않고 편안했다. 황태자라는 걸 고려하면 절대 편안하게 얘기할 수 없어야 할 텐데도.

그가 배려를 나름대로 해 주고 있기 때문이겠지. 지금도 그렇고 여태까지 그의 도움을 안 받은 건 아니었기에, 나는 정말로 그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신붓감을 맞이했으면 했다.

“아마 연회 때나 보게 되겠군.”

“그렇지요.”

“그땐 가면도 쓰지 않을 테니 그대에게 몰래 접근할 수도 없겠어. 그리고 그대 옆에는 에스티안이 달라붙어 있겠지.”

“하하…….”

유리엘에게 좋은 상대를 만나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말하니 그는 맑게 웃으며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연무장에 가는 거겠지.’라고 하고는 연무장 가는 길을 알려 주기까지 했다.

직접 데려다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황태자로서의 체면도 좀 차려야 하고, 그대로 갔다가 에스티안을 마주치면 할 말도 없다고 웃고는 아주 산뜻하게 자기 갈 길을 갔다.

어딘가 의뭉스럽다고 생각했던 황태자의 환한 미소를 보니 나도 슬쩍 지고 있던 마음의 짐이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유리엘이 알려 준 대로 조금 걷다 보니 연무장이 나왔다.

바깥까지 기합 소리며 검으로 무언가를 치는 것 같은 소리가 크게 들렸다. 저걸 지도하고 있는 게 에스티안이겠구나. 무도회 같은 때 그가 기사들을 이끌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멋있었는데 가르치는 건 또 얼마나 멋질지 얼른 보고 싶었다.

하지만 훈련받고 있는 기사들 틈으로 무작정 뛰어들어서는 안 될 것이었기에, 나는 일단 근처에서 좀 서성거렸다.

그러다 훈련받지 않는 것 같은, 약간은 고위 기사인 듯한 사람이 있길래 그에게 말을 걸었다.

황실기사단장은 아직 근무 중인 거냐고만 물었을 뿐이었는데 그는 아아, 하고 웃고는 곧바로 앞장섰다. 그가 연무장에 달린 작은 대기실로 안내해 주어 거기서 기다리기로 했다. 

연무장 옆에 있는 공간이라고 해서 내심 좀 지저분하다거나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일단은 황궁 내에 있는 연무장과 대기실이기에, 모든 관리는 아마 황실에서 해 주는 거라서 그런 거겠지.

내부는 아주 깔끔했으며 생각보다 넓고 화려했다. 테이블과 의자도 여러 개 마련되어 있었다.

내부에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기에 그저 앉은 채 발이나 구르며 이 신기한 공간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나를 여기로 안내해 준 기사가 차까지 한 잔 가져왔다.

“급한 대로 구비되어 있는 홍차를 끓여 왔는데,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아, 다 좋아요. 감사합니다.”

차를 한 입 마셨는데 심지어 차 맛도 의외로 좋았다. 너무 편견을 가지고 있었나…….

그렇게 가만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데 시선이 자꾸만 한곳에 멈추게 되었다. 그 기사가 떠나지도 않고, 테이블 맞은편에 앉지도 않고 그저 계속 내 앞에 차렷 자세로 서 있기만 했으니까.

어색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나는 또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지경이 되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불편하신 게 아니면 앉아서 기다리세요. 아, 혹시 가 보셔야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대기실에 손님이 오시면 이렇게 지키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았다가는 기사단장님께서…….”

그는 얘기하다 말고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기사단장님께서 영애 덕분에 정말 부드러워지셨습니다.”

“어, 그런가요?”

“예. 이전에는 훈련은 해도 해도 모자란다며 늘 길게 하기 일쑤였는데, 기사단장님께서 빨리 가고 싶으신지 그 시간도 좀 줄었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엘과 블라머프가에서 수다를 떨고 있으면 에스티안이 오늘은 일찍 올 수 있었다며 저녁때 생각보다 금방 오는 적이 종종 있었는데. 아마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영애를 이전에 가면무도회 때도 뵌 적 있고, 사냥터에서도 뵌 적이 있습니다.”

“정말요?”

“예. 아름다우시니 눈길이 절로 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지요.”

낯간지러운 그의 말에 나는 그저 하하 웃어야 했다.

생각해 보니 그도 기사라면 각종 행사마다 참여했을 테니 나를 당연히 볼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때마다 난 왠지 좀 멍청한 모습이었던 거 같은데.

“기사단장님은 원래 무도회도 근무하러 가시는 분이라, 그분이 춤을 추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렇죠, 그렇게 느끼셨을 것 같아요.”

“사냥제 때도 그분이 눈에 띄는 여성과 대화하는 모습에 저를 비롯한 모든 기사들이 놀랐지요.”

하긴, 그때 나는 객기를 부려 다른 영애들과는 아주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으니 놀랄 만도 했겠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그의 말이 더 놀라웠다.

“사실, 오해가 풀린 지금에 와서 말하는 것이지만, 저희 기사들은 기사단장님에 대한 소문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아…….”

“가장 가까이서 그분을 지켜보는 게 저희인데, 절대 그런 소문이 날 만한 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 일에 대해 진지하게 여쭤보려 해도 기사단장님은 늘 수련에나 힘쓰라며 묵살하기 일쑤였습니다, 하하.”

“아…… 좋은 기사님들이 믿어 주신 덕에 기사단장님이 의연하게 지낼 수 있었을 거예요. 제가 더 감사하네요.”

내 말이 의외라는 듯 그 기사는 손을 저으며 ‘아닙니다, 어휴. 아닙니다.’라고 하기 바빴다.

하지만 유리엘에 이어 그들도 에스티안에게 큰 의지가 되었을 게 너무 당연해 보였다. 자기가 이끌어야 하는,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늘 믿고 따른다는 건 분명 엄청난 힘이 됐을 것이니까.

가만 보면 에스티안은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같이 평이 참 좋구나. 아, 그런 사람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말도 안 되는 소문에 휩싸여 있었다니.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차는 노릇이었다.

다소 감동 어린 분위기가 만들어져 나나 그 기사나 뭉클한 마음으로 웃으며 눈을 마주치고 있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쾅 하고 큰 소리가 들렸다.

“아델린? 델?”

뒤를 돌아보니 땀에 잔뜩 젖은 에스티안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가슴 방어구 같은 걸 여전히 두른 채 얼이 빠져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연무장 문을 열고 뛰쳐나온 것 같았다.

아, 운동하는 남자, 일하는 남자가 멋지다는 걸 이렇게 깨닫게 되는구나. 땀에 젖은 머리칼이나 살짝 상기된 얼굴이 그때 밤을 생각나게도 하는 것 같고…….

아니, 이게 무슨 생각이야. 목구멍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아 나는 침을 삼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에스티안을 쳐다보고 웃었다.

“아, 에스…… 어, 음. 기사단장님.”

에스티안이라고 부르려다가 아까 유리엘 앞에서 무의식중에 말이 나갔던 게 생각나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아무래도 옆에 모르는 기사도 있고 하니까 그리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아서.

그러나 내 말을 들은 에스티안은 정말 들어선 안 될 걸 들었다는 절망적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단장님이라니, 그게 무슨…… 하.”

그는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큰 보폭으로 나와 기사 앞으로 다가왔다.

“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훈련은 벌써 마치신 겁니까?”

기사 특유의 인사를 건네며 그가 묻자 에스티안이 아까의 놀란 기색을 전부 지운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중간에 나왔다. 웬 몹쓸 놈이 내 연인에게 허튼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서.”

“히익. 오해십니다. 제가 영애를 여기까지 안내해 드렸습니다.”

기사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억울하다는 투로 항변했다.

아, 이 정도 반응을 하는 걸 보면 역시 고위 기사인 데다 에스티안과도 어느 정도 친한 건가?

생각해 보니 저 기사가 자기소개를 하지 않은 것 같아 내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아차 싶은 듯 입을 열려고 했다.

“아, 죄송합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부기사단장…….”

“들을 필요 없어, 델. 그냥 내 부하야.”

“아니, 너무하십니다! 그래도 기사단장님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저!”

어쩐지, 부기사단장인 모양이구나. 그가 기가 막히다는 듯 숨을 내뱉든 말든 에스티안은 나를 따뜻하게 쳐다보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나를 대하는 것과 그 기사를 대하는 게 다른 건 당연한 것일 텐데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연인의 특권이란 이런 건가.

나는 에스티안을 가볍게 끌어안기라도 하려고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런데 웬걸, 그가 뒷걸음질을 쳤다. 뭐야? 왜?

“기사단장님……?”

한 번도 그가 나를 피한 적 없었기에 너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음에도 정신을 차리고 호칭은 정직하게 불렀다.

그 호칭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쉰 에스티안이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살짝 젖어 있었기에 손이 닿는 대로 약간은 삐죽삐죽하게 머리가 서 있는 상태였다.

“훈련하다 나온 거라 땀이 많이 나서 지금은…….”

에스티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머리를 잠시 긁적이더니 상체만 살짝 기울여 내 귀에 속삭였다.

“그대에게는 깨끗한 모습만 보이고 싶다고.”

어쩐지 난처하다는 얼굴로 몸을 빼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기에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저는 이미 에스티안이 땀 흘렸던 모습을 본 적 있잖아요. 괜찮아요.”

내 말에 그가 잔뜩 커진 눈으로 몹시 놀란 얼굴을 했다가 작게 소리 내서 웃어 버렸다.

에스티안이 갑자기 웃자 옆에서 우릴 멀뚱멀뚱 보던 부기사단장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나름대로 필살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웃어넘길 정도의 일인 건가?

왜 그리 웃는지 몰라서 눈을 샐쭉하니 뜨고 바라보는데 그가 낮고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당장 그대를 안고 싶지만 여기는 불편하겠지. 금방 씻고 나올 테니까 그때 별장…….”

아니, 무슨 소리야! 언제 생각이 거기까지 갔어! 나는 양손을 들어 에스티안의 입을 꾹 막았다.

그는 내 손에 잔잔한 진동이 전해질 정도로 계속 웃다가 손가락부터 손바닥 곳곳에 입을 맞춰 왔다.

따뜻하고 간질간질한 느낌에 나는 절로 배시시 웃음이 나왔지만, 그걸 계속 지켜보는 부기사단장은 이제 노골적으로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아, 공공장소에서 보이기 민망한 꼴을 보이긴 했지.

에스티안이 씻는 동안 부기사단장은 내가 심심하지 않게 옆에서 이런저런 말을 걸어 주었다.

대부분이 훈련장에서 에스티안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내용이었기에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저 묵묵히 기사들을 훈련시키고 능숙하게 다룬다는 얘기였는데, 확실히 처음 듣는 것이었기에 즐거웠다.

곧 에스티안이 단정한 제복 차림으로 나왔다. 완전히 격식을 갖춘 제복이 아니라 활동하기 좋게 개량된 것이라 지금의 살짝 풀어진 그의 모습과 잘 어울렸다.

가만 보니 머리가 덜 마른 것 같기에 나는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기사단장님, 왜 이렇게 빨리 나오셨습니까? 원래 훈련한 뒤에는 뜨거운 물로 몸을 풀어 줘야 한다고 오래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의문스럽다는 듯 부기사단장이 입을 열자, 에스티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낮게 으르렁댔다.

“그러게. 웬 놈이 밖에서 나의 연인과 있는 걸 생각하니 몸을 풀지도 못했지 뭔가.”

부기사단장은 나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기분 좋게 웃었다.

아, 그런 거야? 빨리 나온 거였어? 왠지 또 귀여운 마음이 들어 나는 그에게 가까이 갔다. 익숙한 숲 향기가 났다.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구석이 있는, 그와 참 많이 닮은 숲과 나무 향기. 샤워 제품은 아닌 것 같고, 에스티안이 늘 쓰는 바디 코롱이나 향수 같은 거겠지.

머리 물기를 좀 털어 주고 싶어서 다가갔건만 그의 청량하고 깔끔한 향이 너무 좋아 나는 코를 킁킁댔다.

“아, 나는 에…… 아, 기사단장님에게서 나는 향기가 너무 좋아요.”

부기사단장이 계속 옆에 있었기에 나는 그가 들을 때는 계속 일반적인 호칭을 썼다. 그에 에스티안의 미간이 구겨지는 건 당연했고, 부기사단장이 덩달아 미움받는 것도 당연했다.

“누구 때문에 여기에 있을 수가 없군. 조금 쉬었다 나가려고 했더니.”

“왜 저를 그렇게 노려보십니까?”

“갈까, 델.”

에스티안은 부기사단장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게 팔을 잡으라며 내밀었다.

아, 애인의 회사 동료를 만나면 이런 느낌인 건가. 이게 이런 재미가 있네.

나는 에스티안에게 팔짱을 낀 뒤 부기사단장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도 우리가 가는 모습을 보며 묵례를 했다.

연무장 근처를 나오고 아예 황궁 바깥으로 나간 우리는 다른 귀족들이 산책하고 놀고 하는 골목으로 진입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카페 야외 테라스에 앉아 있기도 했고 그저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도 했다.

우리도 그 사이로 걷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던 건 사람들이 힐끗힐끗 에스티안을 쳐다본다는 거였다.

현재 에스티안은 제국에서 정말로 가장 인기가 있는 남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여성의 주목을 받고 있긴 했다. 귀족 영애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의 소문은 쑥 들어간 지 오래였고, 이제는 그의 굳건함이나 동생을 사랑하는 이야기들이 주가 되어 황홀해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에게는 당연히 의아한 시선이 쏟아졌다.

쟨 뭐야? 쟨 누군데 블라머프 경 옆에 있어?

아, 예전에 그 영애인가? 사교계 나오다가 안 나오는 영애. 왜, 사냥제 때도 좀 튀었던.

아, 그때도 블라머프 경 옆에 있었던가? 근데 그런 건 상관없고, 저 영애가 왜?

수군거리는 게 너무 잘 들려서 그냥 그런 말이 들릴 때마다 나는 말하는 사람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면 당황해서 시선을 곧장 아래로 내리긴 했다. 그마저도 나를 보고서가 아니고 에스티안을 보고 눈을 아래로 향한 거 같긴 하지만.

공작가에 비하면 백작가는 한둘이 아니기도 했고, 아델린이 이전에 사교계 활동을 왕성하게 했다고 해도 내가 저택에 처박혀 혼자 놀고먹은 지가 더 오래된 게 더 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전에 길에서 마주쳤을 때 나랑 에스티안이랑 있는 거 다 본 영애들은 어디 가서 남 얘기 하는 거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이 얘기는 안 하고 다니는 거야?!

그래, 이건 사실 엘을 찾았다는 발표를 제국 내에 할 때부터 내가 선택한 것이기는 했다.

에스티안은 그 공식 발표를 할 때 아예 자기는 나와 연인 관계이며 이후에 결혼할 예정이라고까지 못 박아 두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걸 거절한 건 나였다.

‘음, 그건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아요. 이건 블라머프 공작가의 딸인 엘의 일이고, 황궁과도 함께 하게 되는 발표잖아요. 무엇보다 엘이 나와서 간단하게나마 인사까지 하고 들어가기로 했잖아요. 처음으로 엘이 세상으로 나와서 인사하는 자리인데 거기에 제 얘기를 넣는 건 뭔가…… 뭔가 어색하기도 하고요. 우리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해도 괜찮을 거예요.’

내가 무슨 생각으로,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의젓한 척 그런 말을 했을까.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대가 그걸 원한다면.’ 하고 말하는 에스티안을 다시 붙잡아 당장 그냥 우리 연인이라고 말하라고 해야 했을까.

너무 잘난 애인의 존재를 몸소 느끼고 있자니 자랑스러움과 기묘한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애인이 있어 봤어야 뭘 알지.

이제는 까마득해진 과거의 삶에서 회사 사람들은 늘 ‘잘난 애인’을 만나야 한다고, 애인은 무조건 주위에서 봤을 때 잘나야 좋은 거라고 얘기했었다.

글쎄, 못난 애인을 두는 것보단 잘난 애인을 두는 게 좋을 것이니 틀린 말이 아니긴 한데. 지금 이 기분으로 봐선 마냥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평소보다 조용한 내가 신경 쓰였는지 에스티안이 잡고 있던 내 손을 들어 올려 그대로 입술에 대고는 물었다. 주위 사람들이 히익! 하고 경악하며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어휴.

“아니에요. 그냥…….”

“그냥?”

“에스티안이 너무 멋있는 거 같아서요.”

“아.”

실없는 소리라는 듯 그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는 계속 내 손에 입을 맞췄다. 그의 반응으로 봐서는 내가 그냥 아무 얘기나 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진짠데. 지금 주위에서 전부 다 에스티안만 보고 있잖아요. 저기 저쪽 영애들은 얼굴이 전부 빨개요. 에스티안 보고 설레서.”

“그 반대쪽에 흉하게 몰려 있는 듣도 보도 못한 가문의 놈들은 아까부터 그대만 보고 있어. 나와 눈이 마주치면 꼬리를 내렸다가도 금세 머리를 드는데.”

“에이…….”

나야말로 정말 실없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 많은 골목을 빠져나가 차라리 에스티안과 둘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드니 웬 연약해 보이는 귀족 영애 하나가 서 있었다.

아, 물론 내 앞이 아니고 에스티안의 앞에.

“…….”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고 그냥 길이 막혀서 서 있다는 느낌으로 에스티안은 나만 쳐다보았다. 여전히 내 손에 입술을 꾹꾹 누르고 있는 채였다.

이런 걸 보면 민망해서라도 갈 만한데, 그녀는 비키지 않고 그저 흔들리는 눈으로 에스티안을 잠시 보다가 손수건을 그에게 내밀었다.

“바, 받아 주세요! 기사단장님!”

손에 입까지 맞추고 있건만, 특별한 관계라고는 인정도 안 하는 건가. 와…….

하지만 그쯤 되니 어떻게 될지 약간 재미있기는 했다. 에스티안의 반응이 궁금해 얼굴을 슬쩍 들었는데, 그는 짜증 난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눈앞에 누가 와서 손수건을 내밀든 말든 아예 반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다 긴장돼서 곁눈질로 그 영애를 바라보니 그녀는 이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는 채였다.

통쾌하고 고소하다……고 생각해도 될까. 아니, 저 영애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

누굴 좋아하게 되면 이렇게 근거 없이 누군가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는 거구나. 심지어 리아나 생각까지 났다.

그때 머리 위로 에스티안의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역시 그때 황실과 발표할 때 공표했어야 했어.”

“그러게요. 저도 좀 후회되네요.”

“…….”

“그때 거리에서 본 몰상식한 영애들이 소문이라도 좀 내줬으면 좋았겠다……. 아, 헉.”

무슨 얘길 한 거야, 내가! 망했네.

에스티안의 목소리를 듣고 무의식중에 마음속으로 계속 생각만 하고 있던 얘기가 튀어 나가 버렸다.

이렇게 다 얘기할 거면 대체 난 왜 그때 발표할 때는 그렇게 근엄하게 거절했던 거야.

에스티안이 반응 없이 조용한 것 같아 쥐구멍으로 숨고 싶어 눈을 꽉 감는데, 별안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슬쩍 눈만 굴려 에스티안을 보니 그는 너무나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가 웃으면서 만들어 내는 진동이 여전히 내 손을 시작으로 온몸에 퍼지고 있었다. 

“상식적이면서도 소문을 잘 내는 사람을 알아. 소문은 그 사람한테 맡기지.”

“그, 그게 누군데요?”

웃음기 가득한 말을 잇는 에스티안이 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지 알 수가 없어 겨우 대답하는 순간, 코앞으로 그의 얼굴이 다가오더니 입술 위로 따뜻하고 촉촉한 숨결이 닿았다. 

“나.”

아, 너무 달달해서 머리털이 전부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주변 사람의 시선이나 수군거림 따위가 다 뭐야. 에스티안이 이렇게 나를 사랑해 주는데.

이미 주변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오로지 내 눈앞은 에스티안으로 가득했다.

뜨겁게 밀려들어 오는 그의 숨결과 혀가 따뜻하게 내 안을 채우는 기분이었다. 장난기에 흥분이 섞였는지 이로 살살 아랫입술을 무는 감촉까지도 달콤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내가 입을 열려고 할 때마다 그의 혀가 밀고 들어와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인기척이 나서 슬쩍 눈을 돌려 보니 손수건을 주려던 영애가 뒤돌아서 마구 뛰어가고 있었다. 그래, 이걸 지켜보고 있을 순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에스티안이 입술을 살짝 떼고는 양손으로 내 얼굴을 잡아 왔다.

“집중해 주면 좋겠는데.”

“아앗.”

집중이란 집중은 우리가 다 받고 있었다. 내가 그의 가슴팍을 약하게 몇 번 치고 나서야 그는 작게 웃으며 내 어깨를 끌어안고 그 골목을 유유히 벗어났다.

모든 시선은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따라붙었고, 수군대거나 의아한 눈길을 보내던 것들은 모두 부러움 어린 감탄들로 바뀌어 있었다. 다행인 게 맞겠지.

우리는 가볍게 조금 더 걷다가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 들어가 앉았다.

당연하다는 듯 크림이 올라간 디저트 하나와 내 취향의 차를 알아서 주문하는 에스티안을 보고 웃었는데, 그 서늘한 얼굴이 나를 보고 나서 크림 한 입 먹는 것으로 녹아내리는 걸 보고 또 웃었다.

심지어 입에는 크림이 묻어 있잖아. 절대 저렇게 묻히고 먹는 사람이 아닌데. 지금 에스티안은 왠지 좀 평소보다 신이 나 보이기는 했다. 

“왜 자꾸 웃는 거야.”

“그냥요. 에스티안이 오늘 좀 귀여워서? 기분 좋아 보여요.”

“그대가 예상치 못한 방문을 했고, 그런 그대와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기분 좋은 이유가 모두 나 때문이라니, 그건 그것대로 마음이 뭉클한 일이었다.

그래서 충동적인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입술에 묻어 있던 크림을 혀로 핥았다.

아, 내가 이런 걸 하게 될 줄이야. 이전에 드라마 같은 데서 이와 같은 장면을 보면 참 요란도 저런 요란이 없다고 어처구니없어했는데.

내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을 때 깜짝 놀란 그의 얼굴까지 보고 나니 이제는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좀 알 것 같았다.

“크림이 묻어서. 원래 잘 안 묻히고 먹잖아요. 사실 이런 거 좀 해 보고 싶…….”

변명 같은 말을 내뱉던 입은 다시 그의 입술로 뒤덮였다. 저 케이크가 이렇게 달콤한 것이었나.

그는 윗입술을 부드럽게 물다가 낮게 웃었고, 또 안쪽을 자연스럽게 얽어 오면서도 웃었는지 목 안쪽으로 떨림이 느껴졌다. 간격을 벌려 입술을 떼고 그는 말했다.

“나도 좋아하니까, 이런 게 해 보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으아, 민망하다고요!”

“그리고 크림은 일부러 묻힌 거였어. 그대가 다가오길 기대하면서.”

“에스티안!”

충분히 사람 없고 외진 곳에 있는 카페였지만 더더욱 외진 곳으로 가는 게 좋을 뻔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웃기도 하고, 서로 뭔가 먹여 주기도 하면서 손도 잡고 입도 맞추는 등 연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꽤 오랜 시간 그렇게 노닥거리다가 우리는 곧 현실감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만일을 대비해 그대의 저택 주변과 엘리디트가 주변을 우리 가문 쪽 기사들이 지키고 있어. 조금이라도 이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해결해야 할 테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서, 그 전에 아마 우리 가문 측에서 발표를 할 거야. 사냥제 때의 일과 엘이 과거에 겪은 일에 대해 우리와 황실이 함께 수사 중이라고.”

“드디어 사건에 대해서 밝히는 거군요.”

“응. 그리고 그 발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본 뒤에 증인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고 다시 발표를 할 거야. 포위망을 좁힐 수 있도록.”

웃고 떠들던 게 한순간으로 느껴질 정도로 묵직한 얘기였다.

황실도 그렇고 블라머프가 사람들의 의견도 그렇고, 여태까지의 그들의 행보로 봐서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었기에 급습하는 것보단 서서히 압박을 가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래, 엘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사교계로 나왔다고 다가 아니었지.

가장 근본적이고 큰 문제는 아직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가장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건 엘이 등장하고 약간의 사교계 활동을 하기 시작한 뒤부터 리아나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거였다. 아무리 조용한 편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잠적한 적은 없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더 묘하게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 전만 해도 거의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으로서 군림하고 있다시피 했는데. 자기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리아나 스스로도 엘의 얼굴을 보는 게 꺼림칙하다는 걸 알긴 아는 건가.

“아직 눈에 띄는 움직임은 없는데,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있으면 바로 얘기해 줘.”

“네. 에스티안도 꼭 말해 줘요. 혼자서 어떻게든 하고 넘기려고 하지 말고요.”

“서로 걱정하지 않으려면 계속 눈에 보이는 곳에 같이 있는 게 좋은데.”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하는데 그가 살짝 웃고는 말했다. 그러게, 그러면 진짜 좋겠구만.

“근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가 없으니까요…….”

“방법이 있어.”

“진짜요? 어떻게요?”

“혼인하는 거야.”

“헉. 콜록.”

혼인?! 전혀 생각도 못 해 본 말에 나는 절로 들이켜지는 숨에 사레까지 들렸다.

아, 결혼 얘기를 꺼낸 사람 앞에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닌데. 그래도 이건 좀 빠르지 않나?

아니, 빠르다고 느끼는 건 내 기준이고, 이쪽 세계에선 이게 일반적인 것일 수도 있겠구나.

사실 에스티안이랑 결혼해서 나쁠 건 없지…… 않나? 그래도 이건 역시 빠른 거 같은데.

이미 내 얼굴에 당황스러움이나 놀람이 다 드러났을 텐데도 에스티안은 그저 웃으면서 물을 건넸다.

“이렇게 놀랄 거라곤 예상 못 했는데.”

“아, 그게. 제가 싫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놀라서…… 그리고 좀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응, 지금 당장을 얘기하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만 이후에 갑자기 얘기하면 그대가 이것보다 더 놀랄 것 같아서 미리 말만 꺼내 두려는 거였어.”

사실 에스티안은 좀 더 극적이거나 기뻐하는 내 반응을 기대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아직 상상이 안 되는 게 더 컸다. 좋아하는 마음과 별개로 좀 부끄럽기도 했고.

에스티안과 결혼? 그러면 저택 안에 있을 때 내가 하던 몹쓸 행동들을 그가 다 보게 되는 거잖아.

아무것도 안 하고 틀어박혀 있기 좋아하는 건 이미 아니까 그렇다 쳐도, 별일 없으면 그냥 침대에 누워 있는 게 가장 많이 하는 일이고.

심지어 매일 같이 잘 거 아냐.

저번에 함께 밤을 보냈을 때는 정신이 없어서 별 기억도 나지 않았다. 평소 내가 코를 골거나 이를 가는 건 아니지만…….

‘저는 아가씨가 아시는 줄 알았는데. 아가씨, 주무실 때 가끔 눈 뜨고 주무신답니다.’

‘으악, 진짜요? 전혀 몰랐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그러시더라고요. 피곤하셔서 그런가 보다 했지요.’

안나가 어느 날부터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 그건 아델린이 아니라 내 잠버릇인 것 같았다.

혼자 지내 온 지 오래되었고, 내가 자는 걸 볼 사람도 없었으니 내가 알 턱이 있나. 그러나 그보다 더 황당했던 건 당시의 내 반응이었다.

‘시원한 천을 주무실 때 눈가에 대어 드릴까요?’

‘에이, 괜찮아요. 자다가 뒤척이면 어차피 떨어질 텐데요. 금방 다시 눈 감고 잘 잔다면서요. 그리고 저 자는 거 누가 또 본다고. 안나가 보고 즐거웠으면 됐어요.’

재미있다는 듯 웃던 안나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하하…… 무슨 정신머리로 그따위 대답을 했을까. 아찔하고 절망적인 느낌이 뒤통수를 때렸다.

결혼한다는 건 저런 수치스러움까지 모두 공유하게 되는 거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나는 결혼할 일이 없으니 그런 게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 오기도 했고.

이런 곳에서 저런 멋진 사람과 결혼에 대해 고민하게 되리라곤 정말 꿈도 안 꿨는데.

“내가 너무 섣부른 얘기를 한 모양이야. 델, 마음 쓰지 마.”

또 나에게 무슨 흉한 습관이 있나 떠올리고 있는데 에스티안이 내 손을 차분하게 잡아 왔다.

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있지만 정작 마음이 좋지 못한 건 에스티안이겠지.

이 사람은 이렇게 얌전하고 멀쩡한데 그에 비해 내가 너무 막 지내 와서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고 어떻게 말하겠어!

저런 말까진 못 하더라도, 오해가 생기는 것보단 아무 소리나 하는 게 훨 나았기에 나는 급하게 입을 뗐다.

“에스티안, 에스티안과 혼인하는 것 자체를 고민하는 게 절대 아니에요. 그냥 놀라서 그런 거고…… 제가 아직 부족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에스티안이랑 혼인하는 게 왜 싫겠어요…….”

점점 수그러드는 고개와 작아지는 말투에 절로 위축되던 찰나, 에스티안이 양손으로 내 얼굴을 천천히 잡았다. 마주한 푸른 눈동자는 살짝 놀란 빛을 띠고 있었지만 늘 그렇듯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그대만 원하는 나한테 그대가 온다는데 대체 뭐가 부족하다는 거야. 그렇게 얘기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됐어. 나중에 근사하게 정식으로 청혼할 테니까…….”

그는 깃털이 내려앉듯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 온도가 어쩐지 높은 것 같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기대해도 좋아.”

“……네.”

나는 저렇게 근사한 걸 기대하고 있으면서, 에스티안은 숨겨져 있던 나의 괴상한 모습들을 마주할 각오를 하게 만들어서는 안 될 텐데. 이건 차차 생각해 봐야겠구만.

우리는 계속 완벽한 해결을 앞둔 사건들의 미래에 대한 것과 우리의 미래에 대한 얘기 약간을 하다가 카페를 떠났다. 그리고 바라던 대로 그 후부터 에스티안과 내가 연인 사이라고, 그것도 아주 죽고 못 사는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

“이렇게 여유 있게 드레스 맞추는 거,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요.”

“저는 언니랑 드레스 맞추는 거 자체가 처음이라 너무 신나요!”

엘과 나는 연회를 위한 드레스를 함께 맞추러 살롱을 방문했다.

늘 기껏해야 일주일쯤 앞두고 급하게 드레스를 만들러 왔던 것 같은데. 게다가 리아나와 오거나 혼자 오거나 해서 사실상 살롱 주인의 추천을 곧이곧대로 따라 드레스를 제작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현재 인기 있는 드레스를 모아 놓은 책자를 보여 주세요. 그리고 원단을 만져 볼 수 있게 해 둔 안내서도 함께 보여 주세요.”

엘은 이제 완전히 공작가 영애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되었다. 그것도 몰상식하거나 예의 없는 영애가 아니라, 아주 인성 바른 영애처럼.

바깥에 나와서 하는 걸 보면 내가 아는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도도하고 근사했다.

“요새는 어깨에 프릴을 많이 달고 부풀리는 게 유행이라고 배웠어요. 근데 그런 거 잘못 입으면 어깨 엄청 넓어 보일 텐데. 아아아, 큰일이다…….”

그리고 나와 있을 때는 영락없는 여동생 같은 모습을 잃지 않으니 그건 그거대로 귀여우면서도 참 고마웠다.

살롱 주인이 전시용 드레스와 원단을 가져와 보여 주자 그녀는 다시 전문가 같은 면모를 보였다.

“연한 푸른빛 원단에 보석을 잘게 갈아 흩뿌린 이 원단이 좋겠어요. 보석이 잘 떨어지지 않게만 고정해 주세요. 어깨의 주름은 너무 많이 잡지 말아 주시고요.”

“엘은 목 부분이 예쁘니까 카라가 많이 안 올라와도 될 것 같아요.”

“우앙, 진짜요? 흠. 흠. 카라는 이 정도까지만 올라오도록 재단해 주세요.”

내 말에 잠깐 풀어진 반응을 보인 엘은 금세 목소리를 가다듬곤 드레스 디자인을 마저 골랐다. 신중했지만 빨랐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입을 드레스도 함께 고민하며 골랐다. 내게 드레스를 고르는 일이 아직 어색한 건 둘째 치고, 오늘은 그녀가 골라 주는 대로 선택하기로 한 터였다.

“언니는 아무래도 눈 색이랑 드레스를 맞추는 게 가장 예쁠 것 같아요. 머리는 한쪽으로 땋아서 내리고요. 청록색이면 괜찮으려나. 작은 보석으로 꽃문양을 수놓은 이건 어때요?”

가만 보니 원단마다 느낌도 전혀 달랐고 같은 계열의 색이더라도 얼마나 빛을 받고 얼마나 움직이느냐에 따라 다른 빛깔을 띠었다. 같은 보석도 어느 크기로 세공해서 달아 놓았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졌다.

드레스 구경하고 고르는 게 이 정도로 재미있는 일이었나? 내심 그냥 엘이 골라 주는 걸 덥석 물어야지 했던 내가 오히려 신나서 이것저것을 구경하게 되었다.

“영애께서 이렇게 즐겁게 드레스를 고르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이전에 다른 영애와 오셨을 때보다…….”

살롱 주인은 리아나를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이 뭘 의미하는지 나도 뻔히 알 것 같아 같이 웃고 말았다.

예쁘게 잘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우리는 시간도 여유 있으니 살롱을 나와 간단하게 디저트류를 먹은 뒤 각자의 저택으로 갔다.

엘은 연회를 앞두고 요새 사교댄스와 연회 예절을 따로 배우고 있어서 그거 때문에 들어가 봐야 했고, 나는 그저 별달리 할 일이 없어 돌아간 거였다.

그리고, 저택에는 리아나가 보낸 편지가 와 있었다.

내용은 무섭도록 짤막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냐, 언제 얼굴을 보고 싶다, 며칠 안으로 저택 방문해서 티타임을 갖고 싶다, 빠르면 내일이 좋겠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니 사나흘 뒤면 적당하겠느냐, 가능하다면 답신을 보내 달라.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느낌이었다.

에스티안이 전에 말했던 대로 블라머프가는 모든 불미스러운 사건을 수사 중이라는 발표를 이미 한 상태였다. 그리고 서서히 수사망을 좁혀 주동자가 귀족 작위를 가진 집안에 있을 수 있다는 소식까지 넌지시 흘린 뒤였다.

그렇게 발표한 지 사흘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무언가 행동을 취한 거였다.

블라머프가 기사들이 엘리디트가를 눈여겨보고 있었기에 그녀가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그 이전에, 그러니까 엘이 사교계로 나오고 나서 뭔가 리아나 쪽에서 진작에 행동이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건 오히려 의아하기까지 했다.

이제 와서 블라머프가를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나를 보러 오겠다고?

사과를 할 거였다면 엘을 직접 찾아가는 게 맞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우리 저택에 무작정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편지를 보내서 약속을 잡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의문이 든 것도 잠시,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리아나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분명 알고 있는 것이다.

자기네 집안의 악행이 밝혀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도, 그걸 내가 알고 있다는 것도 이미 파악하고 있을 게 당연했다.

아직 귀족 가문의 소행이라는 얘기만 떠돌 뿐이지만 내 느낌엔 리아나가 모든 걸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 매듭을 지어야 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특이한 세계에 들어와 어느 정도는 인간관계를 바꾸어 놓은 데 대한 괴상한 책임감이었다.

근본적으로는 친구의 소설에 대고 멋대로 내 생각을 내뱉은 것에 대한 죄책감일 수도 있겠다.

일단은 이 속의 주인공인 리아나에게 나만의 예의를 차리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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