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1장 (11/18)

11장

에스티안은 여전히 내 쪽을 보지 않은 채 그저 손만 잡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곁눈질로 계속 그를 쳐다보았다. 평소엔 불꽃이 들어 있는 것처럼 일렁였던 푸른 눈이 지금은 차갑게 식어 있는 느낌이었다.

남들이 무서워해 마지않는 매서운 얼굴을 다시 이렇게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지금 보니 정말 자비 없는 냉철한 기사이자 새까만 한 마리의 늑대 같았다. 대체 나는 무슨 정신으로 여태까지 이 사람을 그렇게 편하게 대해 온 거지? 그는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는 걸까.

추측할 수 있는 건 쥴과 대화한 후로 그가 이런 분위기를 풍긴다는 거였다.

설마 쥴이 내 욕을 했나? 집 밖도 웬만해선 안 나가고 사람들도 또 안 만나려 한다고?

그 정도야 에스티안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인데. 그가 어딘가 화가 날 정도라면, 이건 왠지 엘과 관련되어 있을 것 같았다.

엘이 우리 저택에 있던 동안 내가 무언가 잘못 대한 게 있던가? 정원 일을 시켰던 것은 오히려 그녀의 적성을 찾아 준 거나 다름없다고 그도 좋아했고. 쥴을 마음에 품은 것도 상관없는 것 같고.

워낙 마른 아이였으니까 좀 더 살을 찌웠어야 했나?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점점 혼란스러워질 무렵 우리는 제국에서 관리하는 공용 정원에 도착해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도 않았고, 여기는 철저히 황실기사단이 지키는 공간이기 때문에 안전한 곳이기도 했다.

에스티안은 얼이 빠져 멍한 내 손을 잡아 이끌어 분수대 근처 대리석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벤치 위에 펴서는 그 위로 내가 앉도록 했다.

그렇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배려하는 마음은 한결같았고, 심지어 여전히 우리는 아까부터 한순간도 손을 놓지 않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도 여전했다.

그럼에도 그는 먼저 뭐라고 말을 하지는 않고 낮게 한숨만 쉬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던 내가 입을 떼려던 순간, 드디어 그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델, 그대는 역시 이게 가장 궁금하겠지.”

“네?”

“쥴 경과 엘의 사이는, 내가 관여할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

“아.”

에스티안이 입을 열자마자 시작한 얘기는 쥴과 엘에 대한 것이었다. 역시, 아까 전 쥴과 같이 다니면서 이런 얘기를 나눴겠구나. 나는 잠자코 들었다.

“혼자 힘들었을 엘에게 그대만큼 도움을 준 게 쥴 경이기 때문에 엘이 그를 좋아하는 거라 생각했어. 엘은 사실 쥴에 대한 얘기를 내게도 꽤 많이 했지.”

“아…….”

“마음이 컸던 거야. 쥴도 장난스러운 마음이 절대 아니라 정말로 진심이더군. 그를 다시 보게 될 정도로.”

그랬구나. 두 사람 다 진심이고 그 사이에 가로막힐 게 없다면 해 줄 건 응원뿐일 것이다.

아직 서로는 서로를 좋아하는지 모르고 있으니 그 설레고 떨리는 순간을 둘이 맞이하면 될 것이고, 그 후는 따뜻하고 달달하겠지.

“와…… 진짜 잘됐네요! 엘이 저한테 엄청 걱정스럽다고 털어 놨거든요. 쥴 경이 자길 안 좋아하는 것 같다고, 동생으로 보는 것 같다고요. 그런데 엘 이야기를 들을수록 쥴 경에게도 분명 마음이 있는 것 같았는데. 잘됐네요. 다행이다.”

에스티안은 신나서 다다다 쏟아지는 내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리게 보이는 푸른 눈동자. 이토록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던 적이 있었나.

아니, 정말로 잘된 일 아닌가? 이 이야기 때문에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 리는 없는데.

사실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엘과 쥴에 관한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었기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뭐가 문제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에스티안의 입이 열리는 게 더 빨랐다.

“그대가 궁금한 건 이거였을 테고.”

“…….”

“내가 궁금한 건 그대에 대해서야.”

“……네?”

“왜 나에게 얘기하지 않았지? 사냥제 때 그대를 해치려고 한 게 리아나 영애 쪽이었다는 것을.”

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에스티안의 말에 나는 어딘가 부딪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만 빠르게 깜박거렸다.

쥴이 얘기한 건가? 그렇겠지. 저건 쥴과 나만 알고 있는 거였으니까. 내가 부모님께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으니까 말이다.

쥴이 비밀을 아무 곳에도 말하지 않았던 덕에 현재 모두가 알고 있는 ‘엘리디트가의 수상한 점’은 어디까지나 엘의 과거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당사자나 다름없는 에스티안에게 말하다니…….

대체 무슨 얘기를 하다가 이 얘기를 한 거야? 근 십 년 만에 가족을 찾게 된 엘의 사건이 너무 급했고 또 악랄했던 데다, 사냥제 때의 일은 일단 두 번째로 제쳐 놔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해서 그런 거였는데.

가뜩이나 엘의 일로 모두 정신이 없는데 나까지 나서서 걱정을 더 키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까보다도 더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몰아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 음…….”

“게다가 리아나 영애 쪽이 수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알아보러 직접 범인의 집을 찾아갔다고. 그대를 죽이려 했던 그 평기사의 집을. 엘리디트가에서 매수했을 수도 있는 그 집을.”

“아…….”

죽은 평기사만 문제였을 뿐 가족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는 말이 그에게 위안으로 들릴 것 같지가 않아 나는 이번에도 말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갈수록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렇게 위험한 행동을 한 것도 모자라 그걸 나한테 얘기하지도 않고 있었으면서, 엘리디트가가 수상하다는 걸 엘한테 말하지 말자는 내 말에 그대는 동의도 했지.”

엘리디트가의 문장을 엘이 기억해 냈을 때, 내가 엘에게 먼저 ‘리아나라는 내 친구가 좀 이상하다’고 말하려던 순간 에스티안이 그것을 막았었다. 그에 대해 내가 수긍했던 걸 말하는 건가.

에스티안은 너무나 고맙게도 내가 받을 상처 때문에 그런 거라고 했었지. 나는 엘이 그 순간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거였다고 이미 말도 했고 말이다.

어차피 엘이 충격받지 않게 하기 위해 이건 일단 비밀로 하기로 한 게 아닌가?

입만 작게 벌어진 채 그 틈으로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 가문이 이상하다고, 그대를 해칠 뻔했다고 말했어야지.”

“…….”

“그걸 얘기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받을 충격을 걱정하는 것보다 먼저, 그대를 죽이려 했던 가문이라고 바로 말했어야지.”

억누르는 듯 흘러나오는 에스티안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생각하자 비로소 그가 화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게 얘기하지 않고 이리저리 다녀서, 그리고 수상한 걸 알아냈지만 그에게 말하지 않아서. 그리고 수상한 걸 밝힐 수 있는데도 그걸 숨기자는 데 수긍해서.

그러니까 에스티안은 나를 걱정한 거였다.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떨려 오는 게 느껴져 나는 손을 떼고 천천히 그를 끌어안았다.

“그대는, 그대가 죽을 뻔했던 일을 대체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거야.”

에스티안은 나를 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곧 그의 뜨거운 숨이 목덜미로 쏟아졌다.

어두운 분위기를 그렇게 흘릴 정도로 그의 마음이 편하지 못했던 게 나 때문이었다니. 심지어 나는 그 이유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고.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등을 차분히 두드렸다.

“미안. 미안해요.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사실 걱정할까 봐 그런 거였는데…….”

“연인을 걱정하는 게 연인의 일이잖아. 그대를 걱정하는 게 내 일이야.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다가 걱정이 커지면, 정말 제정신으론 지낼 수 없을 거라고…….”

에스티안은 거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말을 마친 그가 뜨거운 한숨을 섞으며 자신의 입술을 내 목부터 턱을 거쳐 입술까지 꾹꾹 눌렀다.

연인끼리라면 익숙하고 당연한 행동인데도 온몸이 다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걱정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늑대의 기운이 아직도 넘실거리고 있어 마음이 울렁거렸다.

에스티안은 이 정도로 나를 생각해 주는구나. 정말 나는 사랑받고 있는 게 맞구나.

에스티안의 볼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가 뗀 나는 몸을 잠시 떼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보다는 분노가 잦아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가 상처받은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어서, 애틋하면서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잇새로 웃음을 흘려 버렸다.

“나는 아직도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데 그대는 왜 웃는 거야.”

“에스티안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요. 그리고, 제가 변명할 시간도 안 주고 몰아붙이시길래. 음…….”

에스티안에게 할 말을 생각하느라 내가 잠시 숨을 고르고 눈을 내리깔고 있는 내내 그가 언짢은 얼굴을 한 것은 당연했다. 나는 머릿속을 정리한 다음 입을 열었다.

“우선, 혼란스러웠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어요. 알다시피 리아나는 그래 봬도 곧잘 붙어 다녔던 친구이기도 한데, 그녀와 그녀 집안의 악의를 그렇게 마주하게 되었다는 게 좀 실감이 안 났어요.”

순간적으로 늘 아무렇지 않게 내 이름을 부르던 리아나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잠시 말이 나오려다 막혔고, 내가 그렇게 주저하는 모습을 에스티안은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려 주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리아나가 나를 해치려 했다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말하려니 입이 잘 안 떨어졌어요.”

문득 떠올랐던 웃는 리아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사실 아직도 나는 사냥제 때 일의 배후가 리아나였다는 걸 떠올리면 약간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 하는 격한 감정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가 나를 그 정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구나, 하는 덤덤한 마음이 드는데도 오싹한 건 사실이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잖아.”

“아, 티 안 났으면 좋겠는데요.”

정말이었다.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나 손 같은 걸 에스티안 앞에서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이상한 오기일 수도 있는데, 그의 앞에서 나는 언제나 좀 밝고 이런 일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으로 비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나를 자신의 품에 다시 넣고 도닥거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부드럽게 내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그에 끊기듯 뱉어지던 한숨도 안정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미안해, 델. 그대가 걱정된다고 해 놓고 그대의 감정 하나 헤아리지 못한 내가 잘못한 거야. 안 좋은 건 다 잊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런 마음을 내가 대신 감당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 아니에요. 그게 왜 에스티안 잘못이에요. 그리고 그걸 왜 에스티안이 감당해요. 이미 에스티안은 더 큰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잖아요.” 

나는 자연스럽게 엘의 얘기를 꺼내며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마저 변명 아닌 변명을 시작했다.

“그때 마침 사냥제 끝나고 엘에게 있던 사고도 엘리디트가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엘에게 일어났던 일이 워낙 끔찍했던지라, 그에 대해서 ‘나도 사실 그 집안 사람들이 괴롭혔어요!’라고 하기에 좀…….”

나는 계속 묘하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에스티안에게는 엘이 일단 우선순위이고 가장 우선적인 문제라고, 그리고 그다음이 나일 거라고.

그렇게 오래 찾아 헤맨 동생이고 몹쓸 일까지 겪었는데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질투가 나거나 서운한 것도 아니고 그건 내 머릿속에서 늘 당연한 거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엘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내 문제를 뒷전으로 미뤘던 게 분명 맞기도 했다.

에스티안은 미처 말을 다 못 잇는 그런 내 마음을 이미 다 안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괴롭힌 게 아니라 그대가 죽을 뻔한 거라니까.”

“으앗.”

그는 낮게 토해 내고는 마치 혼이라도 내는 듯 내 귓불을 살짝 이로 물었다. 기묘한 감각에 등이 찌르르 울리는 기분이 들어 눈을 슬쩍 찡그렸다.

그는 내가 아파하는 줄 알았는지 부드럽게 귓불을 핥았다. 그러고는 다시 얼굴을 살짝 떼어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델린. 델. 그대는 나의 연인이야. 엘의 문제와는 아예 다르다고.”

“어…… 뭐, 그렇긴 하죠. 그래도…….”

“연인과 가족이라고. 연인에게 더하면 더했지, 나는…… 하.”

“에스티안…….”

“그대는 내 문제를 위해 그렇게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데 나는 그대의 일도, 마음도 알지 못했잖아. 연인으로서 실격이나 마찬가지라고.”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델, 나를 연인으로 만드는 건 그대야. 모든 걸 나에게 말해 줘. 좋지 못한 일, 마음 아팠던 일, 전부 나한테 털어놔. 짊어지고 있는 걸 달라는 말이야.”

“……응, 그럴게요.”

생각해 보면 에스티안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모습을 내 앞에서만 보였다. 그래서 남들이 다 그를 냉정하고 차가운 데다 소문이 좋지 못한 기사라고 할 때, 나는 그것과 정반대인 그의 면모를 알고 있었기에 그를 더 믿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정도 많고, 사려 깊고, 배려심도 많은 사람. 오히려 그런 예상하지 못한 모습에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이기도 했고.

그러니 나도 연인인 그에게 그만이 볼 수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얘기를 들려줘야 하는 게 당연했다.

나만큼이나 애가 탔을 에스티안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면서도, 이건 내가 이전에 아무도 만난 경험이 없어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어느 선까지 애인에게 얘기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감정까지 내비쳐야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재지 말고 그냥 전부 그에게 보여 줘도 될 것 같아 마음 한편이 아려 왔다.

“에스티안이 나한테 모든 모습을 보여 준 것처럼, 나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해 주고 보여 줄게요.”

내 말에 에스티안은 무언가 갈구하는 듯이 다시 나를 꽉 끌어안고는 입술을 내 얼굴 이곳저곳에 내렸다. 곳곳을 방황하는 듯 오가던 그의 입술은 결국 내 입술 위에서 자리를 잡은 채 깊이 들어왔다.

따뜻하고 촉촉한 그의 혀와 숨결이 드나들 때마다 나는 그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숨을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간절한 입맞춤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일 터였다. 확인하는 것 같은, 안도하는 것 같은 그의 키스는 평소에 해 주던 것들과는 느낌이 아예 달랐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아무도 없는 밤의 정원에는 우리의 숨소리와 입술끼리의 마찰음만이 울려 퍼졌다.

바로 옆 분수대에서 솟아오르는 물소리가 크게 들릴 법도 한데 마치 귀에 뭔가를 한 꺼풀 씌우기라도 한 듯 그런 주변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달뜬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우리는 은은한 달빛 아래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스티안은 또 늑대의 기운을 강렬하게 뿜고 있었는데, 여태까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늑대의 기운이었다. 그 기운이 뭘 의미하는지 너무 분명하게 느낄 수 있어서 웃음이 터졌다.

“에스티안, 뭔가 엄청 모자란 얼굴이에요.”

“……역시 그대는 내게 모든 걸 알려 주지 않아.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묻는 거잖아. 나만 그대에게 전부 내보이고 있군.”

“으아, 에스티안이 그런 말을 하다니.”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어야겠다는 애 같은 얼굴로 으르렁거리면서 키스만 이어 가고 있는데.

분명 내일은 나도 그도 아무런 일정이 없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지…….

멋대로 드는 생각에 나는 금세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끄러워 시선을 바로 내렸지만, 그걸 모를 리 없는 에스티안은 낮게 웃으며 내 눈꺼풀에 입술을 꾹 눌렀다.

“이런 기분으로 그대를 안으면 분명 거칠게 그대를 다루게 될 거야.”

“어떤 기분인데요?”

“그대가 너무 걱정돼서 나만 볼 수 있게 하고 싶은 마음이지.”

에스티안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들끓고 있는 게 뻔한 마음을 누르며 어느새 점잖은 황실기사단장으로 돌아간 그를 보자 오히려 욕망이 터진 건 내 쪽이었다.

“……제가 에스티안을 걱정하게 한 건 맞으니까, 거칠게 해도 이해할게요.”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하기는 했는데 곧장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 나는 뭘 알지도 못하면서 이래도 되는 걸까? 하지만 충동을 이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에스티안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느새 귀가 내 얼굴만큼 새빨개져서는 허탈하게 웃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처음이잖아. 아,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해. 나도 그건…….”

그래, 나나 에스티안이나 모태솔로였잖아?! 사랑이나 흥분 같은 감정이 인도해 주지 않을까. 같이 어떻게든 길을 찾아 나가지 않을까.

이상한 동질감에 나는 다시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작게 벌어진 내 입술 사이로 다시 에스티안의 입술이 잠시 내려앉았다 떨어졌다.

“그대가 아픈 건 절대 원하지 않아.”

“……아프지 않게 사랑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무슨 정신으로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입술을 한 번 꾹 깨물고 말을 내뱉었을 때 에스티안의 푸른 눈은 심해처럼 어두워진 상태였고, 한눈에 봐도 그의 머릿속 퓨즈 어딘가가 끊어졌다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는 촉촉해져 있는 내 아랫입술을 엄지로 쓸더니 살짝 눌러 조금 더 벌리고는 깊게 한번 빨아들였다. 그리고 나를 안아 들고 마차가 있는 곳까지 달리듯 걸었다. 마차까지 가는 내내, 그리고 마차 안에서도 우리의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마차가 달리다 멈춘 곳은 교외의 몹시 큰 저택이었다.

문지기가 놀란 얼굴로 뛰어나와 궁전같이 생긴 그곳의 대문을 열어 주었고, 에스티안은 나를 안은 채 그대로 저택 내부로 들어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에 의해 시녀들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지만 곧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사실 그걸 하나하나 보고 받아 줄 정신도 없었다. 그의 품에 안긴 채 키스 세례를 받던 나는 그들을 아주 빠르게 스쳐 지나가야 했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가장 안쪽에 있는 것 같은 방이었다.

한눈에 넓이가 안 들어오는 건 당연했고, 높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안 되는 천장에는 호화스러운 전등형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제국 내에는 아직도 촛불을 밝히는 곳이 적지 않았기에 들어간 돈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앞서 시녀들을 지나친 것처럼 고개를 든 상태 그대로 나는 샹들리에도 지나쳐야 했고, 에스티안이 도달한 곳은 사람 다섯은 누워도 될 법한 침대였다.

침대를 보는 순간 몸이 침대에 닿으면 너무 푹신하고 부드러워 푹 꺼지겠다, 하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에게 안긴 그대로 침대에 안착하게 되었다.

“여기는 어디예요?”

“블라머프가 별장. 쉴 때 오는 곳이야. 차기 가주에게 주어지는 공간이라 다른 누구도 여길 모르고, 누구도 온 적 없어. 그대가 처음이야.”

그는 열망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얼굴에 끊임없이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대답도 하고 따뜻하기 짝이 없는 말도 이어서 꺼냈다.

“델, 지금이라도 원하지 않는다면 얘기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뜨거운 분위기가 조성되면 이성을 잃고 옷부터 벗으며 달려든다, 하는 게 내가 이전에 각종 매체나 성인 콘텐츠에서 봐 오던 각종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에스티안의 눈빛도 거의 그러기 일보 직전이라는 듯 푸른 불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평소 느끼던 것보다 강렬하고 남성적인 늑대의 기운도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약간 겁을 먹은 채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도 사실인데 이렇게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고, 부르고, 깃털 같은 손길로 머리를 쓸어 넘겨 주다니.

나는 살짝 상반신을 일으켜 그의 흐트러진 셔츠를 잡아당겼다.

“……샹들리에가 너무 예쁘고 커서요.”

“응, 그래서.”

“좀…… 어두웠으면 좋겠어요.”

내가 말하고도 왠지 웃겨 흐흐 하고 바보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에스티안은 낮게 웃고는 내 양쪽 눈꺼풀 위에 입술을 한 번씩 꾹꾹 눌렀다.

“이렇게 하면 어둡겠지만, 계속 여기에 입을 맞추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그러고는 눈 깜짝할 새 샹들리에와 연결된 끈을 잡아당겨 등을 전부 끈 다음 벽에 마련된 고정대에 향초를 켰다.

어느새 창가로 드는 달빛과 촛불만 빛나 에스티안의 얼굴이 은은하게 빛나 보이게 되었고, 꽃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나를 눕혔다. 긴장되는 마음에 작게 입을 열어 숨을 들이마시자 어쩐지 마음을 자제하려는 것처럼 그보다 배는 큰 소리로 한숨을 내쉰 그가 작게 속삭였다.

“델, 괜찮아.”

에스티안은 탐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 이마부터 눈꺼풀, 콧등, 볼과 턱까지 잘게 입을 맞췄다. 그러다 다시 입술로 가서는 숨결을 불어넣었다.

숨이 차서 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뜨거운 혀가 밀려 들어왔다. 내 혀를 옭아맨 다음 여린 입천장을 살살 건드리다가 치아도 가볍게 훑은 그는, 언제 점잖았냐는 듯 어느 순간부터 약간 거칠어졌다.

입안을 급하게 훑고 강하게 빨아들인 다음에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기도 했다. 내 치아 외에는 닿아 본 적 없는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이 남에 의해, 아니, 그에 의해 자극받자 나도 충동적으로 그의 입술을 이로 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짝 그의 윗입술을 깨물자 그게 마치 기폭제라도 된 듯 에스티안은 입술을 목덜미로 옮겨 붉은 자국을 강하게 남기기 시작했다. 

“아응…….”

간질간질하다가 욱신거리기도 하고, 꾹 누르는 느낌도 들어 입 밖으로는 민망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스티안도 목 안쪽에서부터 으르렁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계속 입술을 움직였다.

그는 내 목덜미에 곧잘 고개를 묻고 있었기에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건, 정말이지 생각해 보면 시작한 것도 아닌데 눈앞에 별이 왔다 갔다 하는 듯했다.

그리고 곧 에스티안이 부드럽게 움직여 내 드레스를 벗겨 냈다. 속옷과 아주 얇은 슬립 차림이 된 내 위로 에스티안의 손이 닿았는데, 천 하나를 사이에 둔 것치고는 너무 뜨거웠다.

어느새 그는 목덜미에서 어깨로, 팔 안쪽의 여린 살로, 가슴께로 입술을 옮긴 뒤였다.

“아프면 바로 말해야 해, 델.”

마치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말하는 것처럼 살피는 듯한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강하게 내 상체 곳곳을 입술의 힘만으로 붉게 만들고 있었다.

여린 곳일수록 자국은 더 금방 붉게 달아올랐다.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걸 멈추게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바랐다고 하면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그 꼴인 걸까.

“으응.”

그가 엄지를 느리게 움직여 팔 안쪽부터 겨드랑이를 훑고 가슴 바로 위까지 올라간 다음 그 위로 곧장 입술을 내렸을 때는 절로 달뜬 신음이 흘렀다.

긴장한 탓에 내 몸이 차가웠던 건지 그의 입술이 말도 안 되게 뜨거웠던 건지, 닿을 때마다 불꽃이 튀는 느낌이었다.

에스티안은 곧 천천히 손을 움직여 슬립과 속옷도 벗겨 냈다. 그 누구에게도, 그러니까 이 소설 밖에서든 속에서든 아무에게도 보여 준 적 없던 몸이 달빛을 받아 그의 눈에 비치고 있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게다가 목부터 가슴까지는 온통 붉겠지. 왜냐면 여태까지 그가…….

그 생각에 순간적으로 부끄러워져 나는 다리도 굽혀 세워 딱 붙이고, 손으로 가슴도 가렸다.

하지만 모든 건 에스티안에게 제지당했다.

“약간 부끄러운데요, 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워. 가리지 마, 제발.”

푸른 눈이 정말로 성스러운 것을 본다는 듯한 감정을 품고 있어 오히려 벅차오르는 건 내 쪽이었다.

그는 내 손을 천천히 잡아떼고는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온전히 드러난 가슴 위 가장 솟아 있는 곳을 뜨거운 입으로 머금었다.

아, 손이 와도 놀랄 판에 입이라니. 그의 열기가 오롯이 정점에 몰렸다. 한없이 촉촉하고 뜨끈해졌다가 그가 입을 떼면 다시 싸늘해지는 그 감각에 절로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혀가 부드럽게, 얕게 솟은 내 가슴 위를 끊임없이 배회했다.

“아읏.”

“미안해. 괜찮아?”

흥분을 이기지 못한 에스티안이 그 정점을 이로 살살 긁다가 세게 빨고 깨물 때면 허리에 힘이 들어가 상체가 튀어 올랐다.

그때마다 그는 놀라서 급하게 묻다가도 허리 아래로 손을 넣어 나와 몸을 더 밀착시켰다. 말하는 것과 행동 간에 일치가 전혀 되지 않아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간지럽고 뜨거운 기운에 고개를 돌릴 때면 그는 내 뺨을 자연스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맞췄다.

에스티안은 가슴에 묻었던 입술을 천천히 배까지 내렸다. 생각해 보니 배에도 타인의 손길이 닿은 적이 전혀 없구나.

순간적으로 숨이 훅 들이마셔져 나는 숨을 거칠게 쉬었고, 그에 따라 배가 위아래로 가볍게 오르내렸다. 

그는 못 참겠다는 듯 목 안쪽을 긁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배 위를 혀로 한번 훑고는 옴폭한 배꼽으로 그대로 혀를 박았다.

“아응.”

처음 느끼는 간질간질함에 입에서 낯선 소리가 나왔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입고 있던 셔츠를 거의 찢다시피 벗으려 했다.

“내가, 벗겨 줄게요. 에스티안이 나를…… 벗겨 줬으니까. 에스티안 건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이 나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나만 기분이 좋으면 불공평하다는, 지극히 초보자 같고 유치한 생각이 들어 나는 이미 구깃구깃해진 그의 셔츠를 벗겨 냈다.

군살 없이 매끈하고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나도 모르게 그의 가슴 위로 손을 얹었을 때는 이미 그가 나를 다시 눕혀 내 입술을 삼킨 뒤였다.

“으응.”

“델, 그대는 역시 예상을, 늘 벗어나서.”

그는 거칠게 입 안을 헤집다가 입술을 그대로 붙인 채 말도 했고, 손으로는 내 가슴부터 배를 살살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곧 손이 아랫배를 천천히 쓸고 지나가 아래로 향했다.

아, 정말로 이건 떨리는데.

아랫배에 순간적으로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가 옅은 비음이 나왔다. 허벅지 안쪽으로 계속 힘이 들어가서 다리를 더 꽉 붙인 채 무릎을 세우게 되었다.

“부디.”

에스티안은 딱 붙은 채 나란히 모인 내 동그란 무릎을 손으로 가볍게 잡았다가 그 위로 입술을 내린 뒤 조심스럽게 틈을 만들었다.

신사적인 말투와 잔뜩 흐려진 푸른 눈에 홀린 듯 내 다리는 절로 움직였다. 세워진 무릎 사이로 간격이 생겼고, 곧 그 사이로 그의 무릎이 들어왔다.

그의 한 손은 내 한쪽 허벅지를 부드럽게 잡아 옆으로 벌린 채였다. 힘주어 붙이고 있던 다리가 열린 만큼 닿아 오는 공기가 차가운 것도 같았다.

그 누구 앞에서도 보인 적 없는 자세로 있는 순간이었다. 한 번도 세상에 나온 적 없던 은밀한 곳이 그에 의해 드러났다는 생각에 목이 탔다.

그러면서도 느릿하게 그가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 손길이 싫지 않았다. 기묘한 두근거림과 긴장감에 온몸이 떨렸다. 에스티안은 내 어깨를 살짝 쓸고는 이불로 감싼 뒤 점점 손을 중심으로 가져갔다.

“흐읏.”

“쉬이, 괜찮아. 델, 괜찮아.”

그의 뜨거운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비밀스러운 틈을 덮었다. 가슴과 배를 누군가 쓰다듬는 것도 처음 겪은 일이라 잔뜩 떨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손가락이 가볍게 좌우로, 또 위아래로 입구에서 살살 움직일 때마다 목덜미서부터 그 중심의 틈까지 전부 불타는 느낌이 들었다.

내 떨림에 그는 나를 풀어 주려는 것처럼 입술을 끊임없이 내 몸 곳곳에 내렸는데, 입술 틈으로 이가 나와 살을 얼핏 긁기도 하는 데다 숨조차 거칠고 뜨거워 더 묘한 긴장감이 일어났다. 

그 순간 그의 손가락은 틈을 부드럽게 헤치고 안으로 닿아 왔다.

“잘 들어가서 다행이야.”

스스로가 민망할 정도로 젖고 있다는 건 당연히 느끼고 있었다. 그가 한 말도 다행이라는 의미로 한 것치고 너무 색정적이었다. 점점 더 촉촉해지고 있는 상태였기에 아프지도 않았고, 오히려 내벽을 천천히 쓸어 주는 그 손길에 긴장은 난생처음 느끼는 쾌감으로 바뀌었다.

어색한 이물감에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과 좀 더 어루만져 줬으면 하는 마음이 번갈아 부딪치며 눈앞도 어질어질해지는 듯했다.

미끄러지듯 내부 곳곳을 탐험하는 움직임이 생생히 느껴질 때마다 머릿속으로는 평소 눈으로만 봤던 그의 손이 떠올랐다.

마디가 살짝 굵지만 길고 가느다란, 아름다운 기사의 손.

그 손이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다시 깨달은 순간 힘이 들어가 그의 손가락을 품은 안쪽이 절로 조여들었다. 그에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낮은 신음을 내뱉고 손가락을 하나 늘렸다. 그러고는 손짓을 조금 빨리했다.

“흐응…….”

은밀한 곳을 쉴 새 없이 오가고 헤집는 그 손놀림에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빠른 속도감과 낯부끄러운 소리에 나도 처음 내는 신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너무 놀라 곧장 에스티안을 쳐다본 뒤 나는 어디에 가 있는지도 몰랐던 손으로 입을 겨우 가렸다.

그러나 그는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듯, 또 그 소중한 것을 완전히 소유하려는 듯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눈빛을 하고는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고는 손을 떼어 내기가 무섭게 자신의 입술로 입 안을 파고들었다.

혀가 빠르게 오가고 얽혔다가 떨어졌고, 입술이 살짝씩 깨물릴 때마다 내 코와 목에서는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둘의 입술은 서로의 타액으로 점점 반짝거리게 되었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느껴질 정도로 거친 키스였지만 분명하게 사랑받는 느낌이 들어 가슴 부근은 뻐근하기까지 했다.

애틋한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 여전히 틈 안에서 유영하던 그의 손가락이 안쪽의 여린 어느 지점에 꾸욱 닿았다.

“흐윽…….”

으아, 이게 뭐야! 눈앞에 번개가 튀는 듯 불이 번쩍하는 기분에 숨이 헉 들이켜졌고 안으로는 힘이 잔뜩 들어가 그의 손가락을 빨아들이듯 물었다.

단 한 순간이었지만 놀라움보다 경이로움이나 짜릿함이 더 커 신음을 낼 타이밍조차 놓쳐 버렸다.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으니 그의 손가락은 어느새 내벽을 다시 여유 있게 훑고 나와 발갛게 된 조그만 열매를 건드렸다. 단순히 스치는 건가 싶었지만, 그는 손가락 두 개 사이에 열매를 끼우고는 약하게 힘을 주었다. 

“흐앙…….”

아래로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에 이상한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온 건 물론, 다시 허리가 번쩍 튀어 올랐다.

아, 이런 곳까지 다 그의 손길이 닿는 거구나. 당연한 일인데 너무나 생경해 실감이 안 났다.

그런데도 그 짜릿함을 자꾸만 느끼고 싶으니 큰일이었다. 이런 마음을 에스티안이 알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는 엄지로 잘 익은 열매처럼 솟아 있는 돌기를 느릿하게 문질렀다가 다시 틈을 파고들어 가볍게 내벽을 긁었다. 그의 손가락이 살짝 구부러진 채 내 안에서 움직이는 게 느껴져 숨이 거칠게 쉬어졌다.

마지막으로 어느덧 부어올라 통통해진 돌기를 살짝 잡아 누르는 것까지 느끼게 되자 다시 숨이 차올랐다.

그런 부위라서 이렇게 예민하게 느끼는 건가? 뜨거운 그의 손가락이 돌기에 짓눌리듯 닿았을 때 찌릿하고 따끔했던 느낌은 발끝까지 징징 울렸다.

으아, 숨을 그대로 내쉬다간 아까처럼 오묘한 신음을 낼 것 같아 입술을 깨물고 꾹 참았다. 그러나 눈앞이 아예 핑 도는 것 같아 결국 입으로 숨을 토해 내야 했다.

“아, 아아. 흐윽. 응.”

“숨 참으면 안 돼, 델. 괜찮아?”

“으응.”

꾹 감은 눈꺼풀 위로 그의 손가락이 느리게 지나갔다. 촉촉한 느낌이 눈가에 남았다. 왜 그의 손이 촉촉한지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었기에 괜히 얼굴로 열이 몰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손길에 안정은 된 것 같아 겨우 덜덜 떨리는 듯한 한숨을 내쉬는데 이번에는 입술이 역으로 올라왔다.

돌기를 혀로 가볍게 훑은 느낌이 나더니, 곧 틈의 입구, 허벅지 안쪽, 아랫배, 배꼽에 그의 뜨거운 입술이 스쳤다. 다시 가슴, 그리고 팔의 안쪽까지 입술이 올라온 순간 뜨겁고 뭉툭한 것이 아래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아, 볼 엄두가 나지 않지만 뭔지는 알 수 있었다. 에스티안의 중심이겠지.

“흐윽.”

“피임은 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되고. 진짜 걱정은 그대가 아플까 봐……. 많이 풀어 준다고 풀었는데, 혹시라도 아프면 바로 말해야 해, 델.”

“으응. 네. 네.”

에스티안은 제국 내에서 흔히 판매되는 피임약 상자를 가볍게 들어 확인시켜 주었다.

남성이 먹는 피임약이 따로 있다는 것도, 그걸 에스티안이 어느새 먹었다는 것도 전부 의아한 것투성이였지만 이미 흐려진 머릿속은 모든 것을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긴장감이 솟아올랐다. 드, 드디어 하는 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관계가 친구가 쓴 소설 속에서라니. 헛웃음이 나올 단계도 이미 지나쳐 버린 듯했다.

그는 내 입술을 부드럽게 한번 머금고는 중심을 움직여 내 입구로 가져다 대었다.

틈새를 천천히 문지르는 게 어쩐지 더 흥분되고 간질간질하다고 느끼는 순간.

“아아, 으응!”

뜨겁고 단단한 것이 안으로 빠듯하게 가득 차올랐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묵직함에 숨이 절로 삼켜졌다. 틈은 손가락 한두 개가 여유 있게 유영하던 때보다 몇 배는 더 벌려진 채 그의 중심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 이 정도가 원래 들어가는 거야?

숨 쉴 시간을 못 찾아 헐떡이자 그는 숨을 불어넣듯 다시 입을 맞췄다. 그가 미끄러지듯 내 앞으로 파고드는 게 너무나 생생했다.

심장이 아래에 달린 것처럼 그와 내가 맞닿은 부분부터 들어와 있는 부분까지 쿵쿵 울리듯 뛰고 있었다.

나의 안과 그의 중심 모두가 두근두근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걸 자각하는 순간 허벅지부터 내벽까지 힘이 들어가 나는 그의 것을 힘껏 조이게 되었다.

“그대의 맥이 느껴져. 하아…… 괜찮은 거지.”

탁해진 눈동자로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 순간까지도 에스티안은 내 상태를 확인했다. 끊임없이 확인해 주고 사랑해 주는 기분에 나는 또 충동적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으응, 괜찮아요. 에스티안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아요. 해 줘요.”

그는 낮게 웃고는 ‘난 몰라.’라고 내 귀에 작게 속삭인 뒤 귓불을 혀로 훑었다.

아, 뭘 하려고, 하는 순간 그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며 그의 중심이 내 안에서 오가는 게 느껴졌다.

부드럽다고 느낄 틈도 없이 어느새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고, 묵직한 그의 것이 깊숙한 곳까지 쿵쿵 닿았다.

“아응, 응, 응!”

그가 들어올 때마다 온몸에 진동이 퍼졌다. 누워만 있으면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기에 나는 상체를 살짝 세웠다. 어느새 그는 내 겨드랑이 아래를 덥석 잡아 나를 자신의 위에 앉혔다. 나는 그와 연결된 채로, 순식간에 그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상태로 그가 강하게 쳐올리듯이 내 안을 침범했다 살짝 멀어질 때마다 아래부터 허리가 뻐근해져 저절로 튕겨졌다. 에스티안은 괜찮다는 듯 양손으로 부드럽게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끌어안을 때마다 우리의 몸은 더 가깝게 붙었기에, 저절로 그의 중심은 내 안으로 깊게 들어오게 되었다.

“흐아, 아, 아, 아아!”

배 속이 그로 가득 찬 듯했다. 그가 강하게 박을 때면 아래부터 위까지 휘저어지는 낯설고 짜릿한 기분에 어디서도 내 본 적 없는 신음이 흘렀다.

내가 내는 목소리와 그가 참는 듯한 소리, 그리고 역시 어디서도 들어 본 적 없는 물기 어린 소리가 찰박거리며 방 안을 온통 울렸다.

점점 힘이 빠져 나는 고개를 아예 묻은 채 그의 목에 팔을 둘러 힘을 주었고, 그는 오히려 점점 힘이 나는 듯 허리를 거칠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의 중심이 내 안 어느 깊은 지점에 강렬하게 콱 박힌 순간.

“아으응!”

눈앞이 정말로 새까매지면서 별이 번쩍했다. 손가락이 닿을 때와는 차원이 달라 신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깜짝 놀라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한참이나 쌕쌕거리며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그러면서 저절로 안쪽에 힘이 들어가 그의 것을 내벽이 삼키듯 조였는지 그도 낮은 신음을 냈다. 아찔하면서도 우리 둘 다 낯선 감각을 느끼고 있다는 그 기분이 황홀했다.

나갈 것 같던 정신이 돌아와 또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매달리는데, 그가 다시 아까와 같은 곳을 중심으로 빠르게 계속 쳐올렸다.

“으, 으응!”

쿵쿵 아래에 힘이 들어올 때마다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가 번쩍했다. 휙 들린 고개를 내릴 수도 없었다. 내 눈동자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눈의 초점이 나간 듯 몽롱할 거라는 것도 이미 알 수 있었다.

나만 이렇게 달뜬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닐 것 같아서, 에스티안의 달뜬 얼굴을 보고 싶어 눈동자만 겨우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푸른 눈이 어지럽게 어두워지고 흐려진 걸 보자 괜히 만족감이 들었다.

그렇게 눈이 마주치고 내가 묘한 웃음을 짓는다는 걸 느꼈는지 그가 낮게 웃었다. 그러더니 거친 숨을 훅 내뱉고는 허리 움직임에 힘을 가했다.

퍽, 퍽, 퍽 하는 질척한 소리가 점점 크고 빨라졌고, 그는 이제 익숙해진 듯 내가 정신을 놓아 버리는 지점을 자신의 중심으로 찍어 눌렀다.

“흐으응! 응!”

나도 제대로 감이 안 오는데 그는 대체 어떻게 매번 알고 특정 부분을 자극하는 걸까. 이번에는 눈앞이 검게 변하는 게 아니라 새하얘졌다. 마치 눈앞에서 불꽃이라도 터뜨린 것처럼 하얗게 점멸해 버렸다.

“으응, 에스티안!”

눈을 아무리 깜박여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고 오직 그와 닿아 있는 은밀한 부분만 쿵쿵 맥박이 뛰었다. 그랬기에 저절로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싫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의 이름을 부르며 한없이 혼미한 상태를 느끼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신음이 나온 건 당연했고, 몇 번이나 강하게 그를 받아들여 깊은 안에서부터 틈의 입구까지 점점 덜덜 떨리고 얼얼해지는 것이 느껴지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여기구나.”

“흐윽, 응, 에스티안…….”

강렬하고 거칠게 중심을 움직이면서 말은 따뜻하게 하고 말이야. 저렇게 말하는 그가 보고 싶어 자꾸만 올라가려는 고개를 겨우 내렸다.

나는 이미 무언가 생각하고 그에게 말할 기운도 전부 잃은 상태였지만, 힘들어 그만두고 싶으면서도 그가 내 안에서 계속 강하게 움직였으면 하는 이중적인 심리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에스티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름다워, 델. 숨 참지 말고, 소리 질러도 돼. 괜찮은 거지. 이제…….”

그 뒤에 나올 말이 뭔지 예상되어 다시 몸에 힘이 들어가며 긴장이 되었다. 그 탓에 나를 배려해 잠시 천천히 내 안을 드나드는 그의 중심을 다시 내벽이 한껏 조였다.

그는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신음을 내더니 다시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거칠어진 움직임이라 내 허리는 활처럼 휘었고 고개는 다시 뒤로 젖혀졌다. 드러난 목덜미에 그가 입술을 꾹꾹 누르고 못 견디겠다는 듯 이를 살살 세워 박았다.

여전히 아래는 그의 것으로 빠듯하게 채워졌다 풀어졌다를 아주 빠른 속도로 반복하고 있어 정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곧 그가 훅 안으로 아주 깊숙이 치고 들어왔다.

“으응!”

몇 번이나 그가 닿았기에 괜찮을 줄 알았지만, 나는 다시 온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그도 나만큼이나 헐떡이다가 나를 그대로 무너지듯 꽉 끌어안았다.

그의 중심은 물론 심장까지도 거세게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 내 심장도 맞닿은 채 엄청난 속도로 뛰고 있었다.

한껏 거칠어졌던 그의 숨소리가 잦아진 다음 그는 중심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아래를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 한순간에 빠져나가자 서늘하고 낯선 느낌과 동시에 아쉽다는 마음이 곧장 들었다.

게다가 마치 나를 채웠던 그의 것을 기억하기라도 하는 듯, 깊은 곳부터 계속 열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의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터라 여전히 벌어진 아래가 움찔거리는 느낌도 들어 스스로가 경악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내벽에 들어가 있던 힘이 모두 빠져 버려, 나는 그대로 그의 가슴에 쓰러지듯 기대야 했다.

안쪽 허벅지부터 시작해 다리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치 마라톤을 전력질주라도 한 것처럼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황홀한, 또 겪고 싶은 그런 피로감이.

그는 끌어안은 채 내 등을 두드리다가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는 눈을 마주쳐 왔다.

“괜찮아? 많이 힘들었나?”

“흐, 그 질문만 몇 번을 하는 거예요, 에스티안.”

“걱정되니까…….”

땀으로 잔뜩 흐트러진 앞머리를 간지러운 손길로 정리해 주던 에스티안은 낮은 신음을 내뱉고는 단숨에 내 입술을 삼켰다. 아니, 걱정된다면서…….

윗입술을 가볍게 물고 빤 다음 아랫입술을 천천히 이로 잘근잘근 씹은 그는 마치 키스를 처음 하는 것처럼 혀로 입 안 곳곳을 유유히 휘저었다.

지친 데다 숨이 차올라 정말로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쯤, 내 상태를 깨달은 에스티안이 붙였던 입술을 떼어 반쯤 감긴 내 눈꺼풀 위로 눌렀다.

“눈이 다 풀렸어.”

“응…….”

“그게 너무나 아름다워, 델.”

자기도 혼미하게 풀린, 숨 막히게 아름다운 푸른 눈을 하고서는. 그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거의 방전된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나를 안아 눕힌 뒤 다시 이마부터 발끝까지 정신없이 입을 맞추었다. 그 입맞춤이 좋아 웃던 내가 정신을 차리자 그는 나를 따라 웃고는 다시 내 다리를 느릿하게 밀어 올렸다.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한다며 그는 짙은 눈빛으로 나의 은밀한 부분을 바라본 뒤 열기가 가득한 손길로 어루만졌다.

아, 자기도 분명 지쳐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저렇게 다시 정염에 불타게 됐지.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애틋한 마음과 아까의 쾌락을 기억하는 몸은 손놀림에 착실하게 반응하며 떨었다.

결국 나는 당신이 더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말을 전했던가? 그가 물기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미친 듯이 밀려들어 왔던 것이 어렴풋한 기억 속에 있는 거로 봐선 전한 것 같다.

무슨 정신으로 어떤 시간이 흘렀는지, 모호했던 몽롱한 정신이 잠시 돌아왔을 때 나는 침대에 기대앉은 에스티안의 품에 안긴 채 이불에 둘러싸여 있었다.

뒤에서 나를 안고 있는 그는 내 목에 끊임없이 뜨거운 입술을 눌렀다. 더 이상 붉어질 구석도 없을 텐데.

너무 지쳐 버린 나는 그에게 완전히 기댔고, 그는 자연스럽게 드러난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델, 나의 델…….”

대답할 힘도 없는 나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내 뺨을 쓰다듬고 입을 맞춘 뒤 엄지로 천천히 귓불 뒤부터 옆 목을 쓸었다.

“괜찮은 거지.”

“그럼요…….”

“맥이 너무 빠르게 뛰고 있어서.”

“에스티안 때문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대 때문에 내 맥도 빨리 뛰거든.”

그는 낮게 웃고는 정확히 맥이 팔딱팔딱 뛰는 위치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다가 낮게 목을 울리더니 이를 세워 그 위를 긁었다.

이를 드러낸 다음 그가 어떻게 하는지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또 그 이상 진전한다면 나는 완전히 기절할 것이 분명한데. 아, 더 이상은 안 돼!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로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몇 번이나 그에게 안긴 뒤 정신을 거의 못 차리고 축 늘어진 나를 에스티안이 조심스럽게 안고 꽃잎이 잔뜩 띄워진 큰 욕조 안에 들어간 건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씻고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물론 뜨거운 물 안에서도 내 얼굴이며 목이며…… 온몸에 계속 입을 맞춘 건 생생했지만.

그러고는 방을 옮겼던 것 같다. 당연히 나는 에스티안에게 안긴 채로 이동했다. 새 침대가 필요했기 때문일 거라고 조심스레 추측했다…….

새로 옮겨 간 방도 그 샹들리에가 크고 화려했던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전 방에 큰 샹들리에 하나가 달려 있었다면 여기는 그보다 크기가 작은 샹들리에가 대여섯 개 달린 방이었다. 침대 크기는 또 5명이 누워도 괜찮을 정도로 커 보였다.

에스티안이 무어라 얘길 했는지 시녀들이 바쁘게 두꺼운 이불과 연기가 나고 있는 티포트 같은 걸 가져왔다.

너무 힘들어 돌아가지도 않는 눈을 겨우 굴려 시녀들을 바라보다가 어쩐지 민망해 한숨을 쉬었는데, 에스티안은 그걸 다르게 해석했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저택에서 일하는 자들은 전부 블라머프가에 충성을 다하기 때문에 입이 무거워. 그리고 모두 그대의 편이기도 하고.”

“…….”

“혹시 오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 걱정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델.”

아, 그런 건 신경 쓸 겨를도 안 줬으면서.

잔뜩 열락에 젖은 뜨거운 눈을 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에스티안은 몇 번이나 안심해도 된다면서 어느새 신중한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웃긴 건, 내가 그 배려가 고마워 희미하게 미소를 짓자 다시 푸른 불꽃이 그의 눈 속에 타오른다는 것이었다.

“……새 장소에 오니 다시 그대를 안고 싶어지지만.”

“하…….”

“그대가 아프고 힘든 건 정말 원하지 않아서.”

이미 늦었네, 이 사람아! 그런 말조차 힘들어서 못 꺼내는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그에게 매달리듯 안길 수밖에 없었다.

“사랑스러워.”

목 안쪽에서부터 나오는 듯한 그의 절절한 말에는 나도 대답을 꼭 하고 싶었기에, 겨우 입을 열어 쇳소리를 냈다.

“에스티안도 사랑스러워요. 으아, 목소리 좀 봐…….”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아.”

“무슨…….”

어떻게 이렇게 모든 말이, 매번 들을 때마다 새롭고 설렐 수가 있을까.

배시시 지어지는 미소와 더불어 흐흥, 하고 민망한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이미 그는 이보다 더한 것도 몇 번이나 들었으니…….

“델, 나의 델…… 고마워. 고맙고 사랑스러운 나의 델…….”

내가 완전히 잠들어 버릴 때까지 에스티안은 계속 내 귓가에 그렇게 속삭여 주었다. 가슴이 아린 그 말을 그냥 듣고만 있기가 아깝고 아쉬워 나도 계속 입을 열어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것 같고 애틋한 순간이 지나갔다.

*

“델, 온통 붉은데.”

“…….”

“뺨도 붉고, 목도 붉고, 빗장뼈 부근도 붉고, 그 아래…….”

“으, 그만……!”

“눈까지 너무 붉게 충혈돼 있어서. 걱정돼서 그래.”

“왜 이렇겠어요. 누가 잠도 못 잘 만큼 욱신거리게 해 놔서 눈은 붉은 거고요. 나머지는…….”

차마 말을 못 잇고 내가 눈을 감아 버리자 에스티안은 목울대가 크게 움직일 정도로 웃었다. 그러고는 내 눈두덩을 엄지로 부드럽게 몇 번 문지르곤 그 위로 입을 맞추었다.

열기가 오른 눈가에 서늘한 그의 입술이 닿자 기분이 좋았다.

눈을 떴을 땐 당연히 오후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라 놀랐다.

정말로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서 잠을 제대로 못 잔 거구나……. 단순히 누워 있는 건데도 팔을 드는 거나 목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당연히 다리를 움직여 누운 방향을 튼다든가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놀란 건, 눈을 뜨자마자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에스티안과 눈이 마주쳐서였다. 씩 웃는 눈이나 입매가 따뜻하고 싱그러웠다. 새벽에 함께 씻었지만 혼자 다시 한번 씻었는지, 그는 단정하고 편안한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하긴, 새벽에는 거의 의식이 없다시피 한 나를 씻기느라 본인은 정신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괜히 민망해졌다. 혼자서 저렇게 깨끗한 상태로 잔뜩 흐트러져 자는 나를 보고 있었단 말이지!

“……일찍 일어났어요? 깨워도 되는데.”

목에서는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좀 자고 일어났으니 괜찮아졌을 줄 알았는데. 소리를 그렇게 크게 지른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왜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거야. 더 부끄럽게!

“그대 자는 거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았어.”

에스티안은 곧장 따뜻한 차를 한 잔 가져다주고는 아까보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더 크게 목소리를 안 내도 되게 하려는 거겠지.

그는 찻잔을 받아 들다가 혹시 내가 팔에 힘이 빠져 흘릴까 봐 직접 잔을 잡고 조심스럽게 마시게 해 주기까지 했다. 그 배려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그의 손을 잡고 싶어 이불 안에 여전히 파묻혀 있는 팔을 들어 올리는데, 어젯밤을 다시 생생하게 떠오르게 하는 붉은 자국이 팔뚝 안쪽에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으아, 민망하게.

“완전 무방비 상태인데. 저, 에스티안이 말한 것처럼 지금 죄다 시뻘게서 아주.”

“이것보다 더 무방비한 모습도 봤잖아.”

“……으으. 몰라요.”

에스티안은 내가 좀 더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도와주었고 다시 나를 씻겨 주었다.

씻다가 또 어떻게 되는 건 아닌지, 내심 두려움인지 기대감인지 모를 것을 느꼈는데 그는 그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정말 깨끗하게 해 주는 데만 집중했다.

머리도 잘 털어서 말려 주고 별장에 준비되어 있던 여벌의 옷도 입을 수 있게 해 주는 등 온전히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자 수줍음이 잠시 밀려오다가 엄청난 만족감이 들었다.

어젯밤부터 지금 모든 순간까지 에스티안이 나를 정말로 절절하게 생각하고 마음을 다해 사랑해 주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져서.

일어난 뒤부터 발을 땅에 디딘 적이 없어 민망했지만, 일어서려고 하면 허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너무 욱신거려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몇 번 그렇게 넘어질 뻔한 것을 에스티안이 잡아 주었고, 이후에는 아예 나를 안아서 방 안을 움직였다. 그래도 내가 너무 힘들어하자 그는 시녀를 불러 내 몸을 마사지하도록 하기도 했다.

어딜 가서도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시녀들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는 당부했는데, 정작 가장 걱정되는 건 따로 있었다.

시녀들이 조금만 다리를 눌러도 엄살을 피우다 지쳐 내가 반쯤 시체가 된 상태로 마사지 받는 걸 옆에서 에스티안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지켜봤는데, 그게 더 어딘가 부끄러운 느낌이었다.

그래도 마사지를 좀 받으니 살아난 나는 많이 아프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방에 딸린 작은 실내 정원으로 나가 차를 마시기로 했다.

저택이 워낙 컸기에 사실 정원도 작지 않았다. 통유리창으로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데다 위쪽은 창문을 열 수도 있어서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물론 이 안까지는, 뭐하러 무리하냐며 얼굴 위로 입술을 꾹꾹 내리는 에스티안에게 안겨서 들어왔다.

얌전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먼저 입을 연 건 에스티안이었다.

“메이스프릴 백작과 백작 부인께는 어제저녁에도 미리 말씀을 드렸고, 오늘 아침에도 다시 한번 전령을 보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늘 일어나기 힘들면 하루 더 있다 가도 되고.”

“아…… 그러는 편이 더 힘들어지는 거 아니에요?”

내 말에 에스티안은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낮게 웃고는 가볍게 버드 키스를 볼과 입술에 여러 차례 했다.

대답 안 하는 걸 보니 역시 맞네! 그런 거겠네!

다시 얼굴이 뜨거워졌지만, 내가 부모님께 먼저 말했어야 하는 건데 그가 대신 얘기해 준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사실은 그와 함께 있는 데 정신이 팔려 미처 생각도 못 한 거나 다름없었기에 세심한 그 행동에 더 고마웠다.

“부모님께 말해 줘서 고마워요. 제가 했어야 하는 건데. 근데 뭐라고 말씀드렸는지 물어봐도 돼요?”

“음. 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해서 집에 못 들어갈 수도 있다고 했지.”

“네에? 네? 뭘 해요?”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뭐? 뭘? 즐거운 시간?

이미 에스티안을 거의 신랑감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는 부모님이라 다행이라고 할 수 있나? 아무리 성인이어도 다짜고짜 외박하는데 그 얘기를 딸도 아닌 딸의 애인이 전했는데?

정신없이 손으로 입술을 뜯고 눈이 아무 데나 굴러 가기 시작하자 에스티안은 내 손을 잡아 내리고는 양손으로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곧장 푸른 눈을 마주하는 순간 순간적으로 정신이 확 들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눈 안에 깃든 장난기를 본 순간, 눈꼬리가 절로 치켜 올라갔다.

“이제 안 것 같네. 당연히 농담이야, 델. 너무 놀라는걸. 엘과 둘이 파자마 파티를 한다고 말씀드렸고 두 분이 잘 놀다 오라는 말도 하셨어. 정말로 괜찮아.”

“하…… 에스티안, 놀리면 어떡해요. 진짜 놀랐다고요.”

“장난쳐 보고 싶었어. 그대는 당황했을 때 귀여우니까…….”

그 말에 또 부끄러워진 나는 고개를 숙여야 했고, 그는 나를 따라 고개를 숙이고는 입을 살짝 맞추었다. 우리는 그렇게 애정을 한참 더 나눈 뒤에 비로소 약간 진지한 얘기를 시작했다. 

“아마 다음 주에도 엘과 함께 모여 얘기를 나누게 되겠지만, 미리 말하자면 이제 엘의 존재를 세상에 밝히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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