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평소 외출하기 위해 준비했던 것의 배는 더 공을 들여 준비했다. 얌전한 게 나을 것 같아 높게 올려 묶으려던 머리도 좀 내려 풀고, 그러면서도 지저분해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 반을 묶었다가 다시 약간 땋아 올리고.
어차피 명망 있고 돈 많은 공작가에 방문하는 거라 화려한 건 절대 의미가 없으니 최대한 차분해 보이려고 애를 썼다. 물론, 에스티안의 부모님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마음이 더 든 거지만.
약속했던 시간이 되니 블라머프가에서 마차를 보내왔다. 새까만 외관에는 블라머프가의 문양만 딱 하나 박혀 있었는데도 그 위용이 엄청났다.
셋이 타고도 한참 여유 있을 정도로 크기도 크고, 내부 좌석의 감촉도 부드럽고……. 새삼 대단한 공작가라는 게 실감이 났다.
마차에서 내려서 한참을 지나쳐야 하는 정원도, 그렇게 지나쳐서 나온 몹시 큰 대문도, 그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을 때 고개를 뒤로 완전히 꺾어야만 볼 수 있는 높은 천장까지. 입을 다물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었다.
부모님은 아무래도 황실도 자주 갈 거고, 다른 귀족들의 저택도 여러 번 방문했을 테니 나만큼 놀라지는 않는 듯했다. 하지만 내 기준에 나는 아예 이런 집 자체를 처음 보는 거였다. 백작가만 해도 참 크고 노는 공간 많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노는 곳은커녕 청소할 걱정부터 들기까지 하니.
“오셨군요.”
시녀의 극진한 안내를 받은 뒤 대기하는 곳에 앉아 멍하게 주변만 휘휘 보던 차, 아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정확하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블라머프 공작이구나. 낮은 목소리가 에스티안과 참 닮았으면서도 그 기운은 더욱 강한 것 같았다. 부모님은 천천히 미소 지으며 일어났지만, 나는 그저 놀라 용수철이 튕기듯 절로 몸이 일어나졌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블라머프 공작. 블라머프 공작 부인.”
“아니에요. 원래 이렇게 초대하는 게 예의가 아닌걸요. 그런 무례한 초대에도 흔쾌히 응해 주셔서 저희가 더 감사할 따름입니다.”
블라머프 공작 옆에는 공작 부인도 함께였는데, 정말로 그들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 것 같았다.
새까만 머리에 보랏빛 눈을 한 공작과 반짝거리는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한 공작 부인. 저렇게 생긴 사람들이 정말로 있구나.
키들도 참 컸다. 객관적으로 아델린도 절대 못난 얼굴이 아니고, 우리 부모님도 참 멋스럽고 곱다고 생각했다. 리아나만 해도 엄청 예뻤으니 그냥 이 세상의 평균은 그 정도일 줄 알았건만 그보다 더한 사람들이 있을 줄이야.
그래서 에스티안이나 엘이 그렇게……. 가만 보니 공작 부부에게서는 정말로 에스티안과 엘의 느낌이 물씬 났다.
공작의 압도적인 기운에 공작 부인의 따뜻한 느낌을 한 스푼 정도 넣으면 에스티안이 될 것 같았다. 아, 한 스푼이 아니고 한 박스 정도인가. 엘은 전반적으로 부인을 닮은 것도 같았다.
넷이 함께 서 있는 걸 왠지 보고 싶다는 생각에 나오려는 헛웃음을 겨우 삼키고 재빠르게 곁눈질하던 것을 멈추었다.
“이쪽이 그러면…….”
“아델린 메이스프릴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내 쪽을 가리키며 묻기에 치마를 살짝 들었다 내리며 인사하는데, 공작 부인이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당황할 틈도 없이 그녀는 붙였던 몸을 떼고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이미 촉촉해진 게 아마 엘을 떠올렸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 뭐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먼저 그 위로 얹히는 손이 있었다. 얼떨떨해서 고개를 들어 보니 블라머프 공작이었다. 그는 양손으로 내 손과 부인의 손을 한 번에 감쌌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말로 그 감사를 더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당연히 이 모습이 밑도 끝도 없이 공작 부부가 의아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었다.
“놀라게 해 드려 송구스럽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으로 들어가서 나누시죠.”
하지만 곧 블라머프 공작이 상황을 정리했고, 우리는 너무 넓어 커다란 샹들리에가 세 개나 달린 방으로 안내받았다.
자리에 앉자 곧 차와 간단한 디저트류가 나왔는데, 생크림이 두껍게 쌓인 그 위로 체리가 올라간 케이크라 약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아야 했다.
차를 한 잔씩 마셔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 듯하자 공작과 공작 부인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연히 나는 아는 이야기였기에 그저 추임새를 넣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엘리디트 백작가의 부인과 그 딸도 수상해 보인다는 것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은 놀라서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내심 혼자 이 모든 얘기를 부모님께 하는 것이 감당이 안 될 것이라 생각했었기에, 이렇게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서 얘기해 주는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분명 얘기하면서 몇 번이나 주먹을 쥐고 한숨을 내쉬었던 것으로 봐서는 아픈 기억을 헤집는 것일 텐데도 그들은 심하게 동요하지도 않았다. 그게 오히려 감정을 꾹꾹 눌러 삭이는 듯해 보여, 나도 부모님도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오, 맙소사.”
“……정말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고생은 아델린 영애가 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저희는 영애 덕분에 더없이 귀중한 가족을 돌려받게 된 것뿐입니다.”
“가족이 다 모여 다행입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또 앞으로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이렇게 두 분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정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허리를 푹 숙이는 블라머프 공작과 공작 부인의 행동에 우리도 덩달아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들에게 있어 엘을 찾는 게 얼마나 간절했는지, 그리고 이제 엘을 그렇게 만들었던 사람들을 찾는 게 또 얼마나 간절할지가 눈에 보이는 듯해 마음이 먹먹했다.
공작 부부는 이미 나와 에스티안, 그리고 엘이 머리를 맞대고 리아나를 중심으로 과거의 일을 파헤쳐 가고 있다는 것도 전부 아는 상태였다. 그래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도 건넸다.
“말이나 마차가 필요할 때는 물론, 정보상을 고용해야 할 때나 검술 실력이 뛰어난 기사가 필요할 때도 얼마든지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얼마든지 도와 드리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든든하고 감사합니다.”
“물론, 에스티안 녀석이 아델린 영애와 함께한다면 아주 나서서 신경을 쓰겠지만 말입니다.”
자연스레 에스티안의 소문에 대한 누명도 벗겨진 상태였고, 미묘하게 부모님의 얼굴이 밝아졌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렴, 딸을 믿는다고 해도 딸의 연인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을 흘려 넘기실 수는 없었을 터였다.
각자 힘닿는 데까지 정보를 알아보고 서로 공유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우리의 대화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자리가 파하려나 싶은 찰나, 공작 부부가 잠시 우리를 멈추게 했다.
“아델린 영애가 구해 주신 우리 엘을 보고 가셔야지요.”
공작 부인이 서 있던 시녀에게 눈짓을 하자 곧 문이 열렸고, 그 안으로…….
“세상에, 엘!”
예의에 어긋난 줄도 모르고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소리를 지른 뒤 한두 걸음을 내딛고 말았다. 원래 예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지 하루만일지라도 역시 꾸며 놓으니 그 인물이 사는 정도가 달랐다.
평소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를 얌전히 내리기만 했는데도 장식이 필요 없을 정도로 고왔다. 아마 피부도 좀 더 관리를 받지 않았을까? 적당히 생기가 도는 붉은 뺨이나 분홍빛 입술은 이제야 엘을 자기 나이로 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는 우리 집에서 입었던 옷보다 훨씬 귀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그걸 입고 태어나기라도 한 듯 잘 어울렸다. 왠지 마음이 뿌듯하면서도 이제야 그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릿해졌다.
“언니!”
이거 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엘도 나를 보자마자 내 품으로 달려들어 나는 곧장 그녀를 안은 형태가 되었다.
귀족의 예법을 따지자면 그녀는 문에서부터 드레스 양쪽을 얌전히 잡고 천천히,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서둘러서, 그렇게 말도 안 되게 모순적으로 걸어온 뒤 윗사람인 우리 부모님에게 먼저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공작 부부도 너무나 발랄하게 뛰어온 자신들의 딸이 민망한 모양이었는지 어색하게 웃어 버렸다.
“메이스프릴 백작과 백작 부인께서 이해해 주시지요. 엘이 예법을 오늘부터 배우기 시작한지라……. 엘, 어서 인사해야지.”
“헙. 죄송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에란티아 블라머프 인사드립니다. 오늘부터 예법을 비롯해 기본적인 모든 교육을 받고 있어서 서툴렀던 점 사과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사과하지 않아도 되니 걱정 말아요.”
“아델린 언니……가 이전에 제게 자연물에 대해 알 수 있게 해 주고 제가 그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도 알려 줘서, 그 공부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제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도 얼른 생각해 내기 위해 상담도 받고 있습니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요. 반가워요. 정말,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약간 어설프지만 사랑스러운 그녀의 첫 인사에 부모님은 안쓰럽고 애틋한 감정으로 쳐다보다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곧 살짝 그녀를 끌어안게 되었다.
일단은 그녀의 존재를 숨기고 있는 동안 완벽한 공녀가 되는 것도 하나의 목표로 삼자고 했었는데 그녀는 바로 그걸 실행하고 있었다.
의지도 강하고, 좋아하는 거라면 금방 파고들 줄도 알고, 또 머리도 좋은 그녀라면 예법이나 공부 같은 건 물론, 기억에 대한 문제도 금방 해결할 것이리라.
엘까지 함께 모여 앞으로 블라머프 공작가와 우리 백작가가 편지나 초대장 없이 자주 왕래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엘의 기억과 사건의 전말을 함께 파헤치기 위함이긴 했지만, 괜히 친한 친구가 생기고 언제든 놀러 갈 수 있는 친구 집이 생긴 듯해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신이 났다.
생각해 보니 여태까지 지내 오면서 그렇게 놀러 갈 만한 친구나 친구 집이 딱히 내게 없었구나.
혼자 지내고 그것에 익숙해하던 것에서 점점 한 걸음씩 나아가는 기분이었는데, 그게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
가볍게 얘기까지 나누고 나니 어느새 해가 졌고 정말로 공작저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작 부인이 나를 잡았다.
“아델린 영애, 이런 말 주제넘을 수도 있지만…….”
“아니에요. 말씀하세요, 부인.”
“에스티안이 아델린 영애를 많이 좋아해요.”
“네?”
내 손을 갑자기 꼭 잡고는 눈을 빛내며 말하는 공작 부인의 말에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건 그의 행동을 봐서 나도 알 수 있는데…… 그리고 나도 그만큼 그를 좋아하고 있고.
말이 더 이어질 것 같아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이건 우리 엘을 구해 준 것과는 별개로, 아니 오히려 더불어라고 해야 하려나? 그저 에스티안이 영애를 정말 좋아한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서…….”
“아…….”
“어휴, 내 정신도 참. 에스티안이 아델린 영애 덕분에 더 잘 웃고, 감정 표현도 잘하게 된 것 같아서 어미 된 마음에 고마워서 말하고 싶었어요. 아델린 영애가 워낙 따뜻한 사람이라서 우리 에스티안과 엘이 모두 너무 좋아하고 있다고요.”
몸 둘 바 모르겠는 칭찬에 나는 목이 왠지 홧홧해지는 걸 느꼈다.
살면서 저렇게 순수하고 깨끗한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있던가. 그것도 친구의 어머니로부터. 아, 이제는 그냥 친구도 아니지. 애인의 어머니라고 해도 되겠지?
기분이 좋으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에 개미 같은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아니에요, 부인……. 제가 오히려 에스티안 경과 엘을 더 좋아하는걸요. 제가 그들로부터 오히려 많이 배웠어요.”
그녀는 맑디맑은 푸른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포옹을 했다. 부인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것 같아 달래 주고 싶은데, 나보다 키는 크면서 너무 가느다란 느낌이 들어 그녀의 등을 약하게 두드려야 했다.
“에스티안과 엘, 둘 다 의연하게 견디고 용기도 갖고, 좋지 않은 상황을 이겨 내려고 하는 것도 전부 아델린 영애가 계속 긍정적으로 힘을 불어넣어 줘서 그래요.”
“그렇다면 저도 기뻐요. 저한테도 그게 힘이 돼요.”
“어제 두 아이가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듣고 얼마나…… 얼마나 고마웠는지. 정말 고마워요.”
딸을 잃었던, 그리고 잃었다가 겨우 찾은 엄마의 마음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알기에 딸과 아들 앞에서 쉽게 기뻐하거나 슬퍼하지도 못했을 거라는 게 어쩐지 보이는 듯해,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나는 손으로 조심조심 그녀의 등을 쓸었다.
서로 약간의 시간 동안 그렇게 고마워한 뒤 우리는 백작가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는 이전부터 리아나 아가씨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나저나 에스티안 기사단장님은 정말 의외이기도 하네요. 아니, 의외가 아니고 참 멋지신 분이 맞네요. 리아나 아가씨만 문제군요!”
부모님과 함께 꽤 오래 외출까지 하고 온 데다 안나에게는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아 나는 모든 말을 그녀에게 전했다.
정원에서 일하던 아이의 정체를 시작으로 에스티안에 대한 이야기, 그동안 이상했던 모든 것들의 배후를 캐내려고 한다는 것까지.
물론 엘에 대한 건 당연히 극비사항이므로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고, 알려질 시에는 정말 큰일 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랬더니 안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화난 얼굴을 했다. 분노가 치미는 듯 속눈썹조차 바르르 떨다가도 나와 에스티안이 연인이 되었다는 말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우리가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축복해 주었다.
그러다가도 다시 파르르 화를 내는 그녀를 보니 왠지 재미있기까지 해서 진정시키다가 웃어 버렸다.
“안나, 이전에 분명 저한테 리아나와의 우애가 보기 좋다고…… 큭. 늘 둘이 함께하면 외롭지 않고 얼마나 좋냐고 하지 않았던가요?”
“아아뇨? 제가 언제요? 아가씨가 너무 그 영애를 싸고돌아서 안타까운 마음에 제가 듣기 좋은 소리를 했었나 봐요.”
“안나는 항상 저를 우선으로 생각해 줬으니 그게 당연해요.”
“어휴, 정말. 세상에. 그 정도면 여태까지 아가씨가 무사하신 게 천만다행 아닌가요? 당장 잡아서 황실 감옥에 집어넣어야 할 사람들이군요, 정말이지.”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신분이 귀족이다 보니 함부로 넣으려 했다가 되레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차라리 그들이 빼도 박도 못할 증거들을 모으려고요.”
“워낙 흉악한 사람들이니 항상 조심하셔야겠어요. 아, 뭐, 이제는 기사단장님이 늘 함께할 거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까요? 그래도 늘 조심, 또 조심하세요.”
안나는 계속 구시렁대며 내 이불을 정리했다. 그리고 내 머리를 빗겨 주는데 평소보다 빗질에 힘이 실린 것 같아 거기에 또 웃음이 났다.
가만히 거울을 통해 그녀가 머리를 정리해 주는 모습을 보며 손길을 느끼는데, 안나의 손이 차차 느려지더니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아가씨가 언덕에서 크게 구르는 사고로 사경을 헤매게 되셨을 때도 저는 리아나 아가씨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건 사실 내 기억이라기보다는 아델린이 원래 갖고 있던 기억이기에, 내가 똑바로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아델린도 언덕을 구르느라 충격이 컸는지 사고 직전이나 바로 굴러떨어지고 난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뭐가 더 생각날까 싶어 머리를 굴려도 그저 쥴이 놀라서 발견했다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떠올랐기에, 나는 안나보다도 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왜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저는 사실 그때 너무 놀라서 별 기억이 없거든요. 저는 저를 제일 먼저 발견한 게 쥴 경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아가씨가 아무리 정원 안에서 산책을 한다고 해도, 그 큰 나무 있는 뒤쪽 언덕까지는 잘 안 가셨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시녀들까지도 아가씨께 워낙 어릴 때부터 주의를 드리기도 했고요.”
“그렇죠.”
“사고 났던 날 리아나 아가씨가 놀러 왔던 건 기억나세요?”
그랬나……? 그것까진 내 기억에 없었다. 아델린이 가진 기억 속에 없으니 나도 모르는 것일 터였다. 나는 계속 혼자 굴렀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오래 깨어나지 못했으니 그 충격으로 잊어버린 것이려나? 내가 고개를 저었더니 안나는 말을 이었다.
“그때 리아나 아가씨가 차 마시고 얘기하러 놀러 왔다가, 날씨도 좋고 정원이 예쁘니 산책한다고 두 분이 함께 나가셨었어요.”
놀러 와서 뭔가 먹고 산책하는 건 기존의 아델린과 리아나가 많이 해 온 일이기에 이상한 건 아니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리아나 아가씨가 바람이 쌀쌀해 숄이 필요하다고 혼자 돌아오셨었거든요. 그런데 그 이후로 다시 나가시는 걸 못 본 것 같았어요. 분명 정원으로 나가는 길을 지나가야 할 텐데 그쪽으로 지나가지 않아서…….”
“아…….”
“물론 정원으로 나가는 길이 딱 한 군데는 아니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방문객이 모르는 길이기도 하고…….”
안나의 말이 맞다면 불쌍한 아델린은 진작부터 그녀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는 게 된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엘과 관련해서 수상한 점이 있는 것이나, 나에게도 결코 달갑지 않게 굴었던 걸 떠올리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안나도 확신하기에는 어렵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산책 중에 아가씨가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졌다고 소리 지르면서 리아나 아가씨가 그 언덕 쪽에서부터 달려왔거든요. 그래서 제가 나가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이구나 싶었죠.”
“음…… 네.”
“게다가 자기가 제대로 못 본 탓에 아가씨가 다친 거라며 너무 서럽게 계속 우는 데다 실신까지 해서…….”
“하하…… 어찌 됐든 리아나다운 반응이네요.”
“사고 당시에만 해도 아가씨가 그렇게 오래 누워 계실 줄은 몰랐거든요. 그래서 걱정 말라고, 그만 울라고 리아나 아가씨를 다들 달래기 바빴지요.”
“그렇군요.”
“이후에는 아가씨가 깨어나도록 치료하는 데 힘쓰고, 또 깨어난 뒤에는 몸조리하는 데 힘썼고요.”
그러니까 적어도,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 리아나가 직접 나를 밀었거나 나에게 어떻게든 해를 가했을 것 같지는 않다는 거였다. 내 생각도 그것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내가 아델린이 되고 나서 리아나를 처음 봤을 때, 그녀의 반응이 어땠더라.
황태자를 보러 가고 싶어 눈이 먼 상태이긴 했어도 적대감 같은 걸 가진 것 같진 않았다.
그냥 다쳤다가 일어난 이후로 잘 쉬어서 나은 것 같은데도 사교계 활동을 안 한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정도 아니었나?
그런데 순간적으로, 내가 아델린이 된 후 받았던 그녀의 편지에, 자신 때문에 다쳤네 아니네 하는 내용은 없었다는 게 떠올랐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렇게 펑펑 울 정도였다면 편지에 죄책감 어린 구절 하나 정도는 있어야 정상 아닌가? 뭐, 그땐 내가 너를 못 미처 못 봤다든가 하는.
단지 내가 정신을 차리고 난 지 좀 시간이 흐른 때여서 그런 얘길 안 썼다고 여기기엔, 리아나가 여태까지 보인 행동들이 좀 수상해야지.
엘의 일만 얽혀 있는 줄 알았더니 내 일까지 꼬여 있는 듯해 확 막막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의지는 불타올랐다.
부모님도 알았고, 공작가에서도 전적으로 돕겠다고 했으니 이제는 보다 편하게, 또 집요하게 정보만 모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묵묵히 정보를 모으면서 엘이 남은 희미한 기억을 힘들지 않게 마저 잘 찾기를 바라면 될 테니까.
*
이후의 일상은 규칙적이고 체계적이었다.
정원이 좀 더 넓고 기사들이 많아 안전할 수 있는 블라머프 공작가에 가서 각종 수업을 듣고 치료를 마친 엘을 만나 그녀의 얘기를 듣고 대화를 나눴고, 황실에서 일이 끝나고 오는 에스티안까지 함께 모여 이후의 일을 계획했다.
따뜻한 가족들의 품에 있으면서 원하는 공부도 하고 즐겁게 지내게 된 엘은 점점 공작가의 딸, 이른바 ‘공녀님’이라 충분히 불릴 수 있을 정도로 거듭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얼마든지 그렇게 보일 수 있게 점점 준비가 되고 있으면서도, 나와 에스티안 앞에서는 철없는 막내딸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게 여전히 귀여웠지만.
물론 엘의 적응을 최우선으로 뒀던 터라, 그녀가 치료를 받으며 무언가 중요한 것을 떠올리는 일이 상대적으로 더뎠음에도 우리는 절대 재촉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좋아진 상황에서 안 좋았던 과거를 억지로 떠올리려고 하면 혼란이 오고 고통스러워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오히려 편안한 환경에 적응해 가니 자신이 험난하게 살게 되기 전 가족과 함께했던 즐거운 기억들을 떠올리며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같이 기뻐해 줬다. 앞으로 다른 기억도 불편하지 않게 잘 날 거라고 다독이면서.
그리고 정말로 다행히도 마음이 편해진 건지, 엘은 일주일이 좀 더 지난 시점에서 치료사와 사제들과의 상담을 통해 중요한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차분히 떠오른 것들을 정리한 뒤, 저녁이 되어서 에스티안도 온 다음 우리 앞에서 얘기했다.
“우선…… 저는 제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 몰래 나갔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몰래가 아니고 제가 그냥 따라서 나간 거였어요,”
“어쩐지. 엘이 어느 날 한순간에 없어진 이유가 있었군. 절대 그럴 애가 아닌데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이미 부모님도 알고 계시니 함께 가도 된다고 저를 데려갔던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누구인지까지는 기억이 자세히 안 나지만요.”
그러니까 엘이 가족을 속이고 몰래 나간 게 아니고, 수상한 자들이 엘을 속인 거였구나.
악질적인 행태에 헉 소리가 나며 절로 입이 벌어졌다. 에스티안은 이 정도는 예상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하나, 그때 봤던 문양이 기억났어요. 저를 데려간 한 사람은 아마 기사였던 것 같아요.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망토 가운데쯤에 작은 문양이 있었어요.”
“문양?”
“네. 제가 그 사람한테 안겨서 배가 가득했던 곳으로 향했거든요. 어떻게 생긴 거냐면…….”
엘은 테이블 위에 미리 놔두었던 연필로 종이 위에 대강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게 맞나? 하고 고개를 기우뚱하면서도 제법 꼼꼼하게 문양을 그려 나갔다.
“치료사님 말로는 제가 그 당시에도 이걸 기억해야 한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어서 유난히 또렷하게 기억날 수 있는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양쪽, 아래위로 뻗어 나가는 곡선들. 가운데 뻥 뚫려 있던 공간을 메우는 날갯짓하는 새.
“아, 그런데 여기, 새가 있던 건 분명 맞는데 뭐가 또 있었어요. 사실 그걸 봤을 때 날이 어두워진 상태여서 슬쩍슬쩍 보이는 빛에 의지했던 거라……”
엘의 옆에 앉아 있던 나는 어느 정도 형태가 잡혀 가자 곧바로 그 문양을 알아볼 수 있었다.
“깃털이 말린 모양 같은 거였나? 아니, 그냥 새가 이렇게 날개를 펼치고 있었는데 여기에…….”
“혹시 새가 입에 뭘 물고 있지는…… 않았어요?”
“어, 맞다! 물고 있었어요! 이렇게 생긴…… 둥그런 거. 헛, 근데 언니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설마 아는 문양이에요?”
“엘리디트가의 문장이야.”
노란 보석을 입에 문 새. 대답은 에스티안에게서 먼저 나왔다. 그의 표정은 이미 싸늘하게 굳은 채였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설마 했던 것을 실제 피해자의 입에서 듣게 되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니랑 오라버니 둘 다 한 번에 이게 어떤 문장인지 알아낸 거예요? 그렇게 유명한 집안이에요?”
미안해, 염치가 없지만 사실 내 친구야. 그래서 계속 더 확실한 증거를 찾으려 하고 있어, 라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는데, 불안하게 테이블을 손톱으로 긁던 내 손을 에스티안이 잡았다.
단순히 손잡은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들다니. 시선을 마주치자 그가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뜨고는 작게 ‘괜찮아, 아직.’이라고 하곤 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 아는 법이 있지.”
“에이, 뭐야!”
에스티안이 장난처럼 넘겨 버리자 엘도 잔뜩 긴장해 움츠렸던 몸을 쭉 펴고 숨을 내쉬었다.
하긴, 가뜩이나 애쓰고 있는 엘에게 이런 얘기를 미리 해서 좋을 건 없으리라.
이후에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나도 고개를 끄덕이곤 잡고 있던 그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잘했다는 표시였다.
“그런데 제가 떠올린 게 도움이 된 건 맞는 건가요?”
“그럼요. 엘을 그렇게 만든 범인을 아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생각해 내느라 힘들었을 텐데 너무 고생했어요.”
반대쪽 손으로 의아해하는 엘의 어깨를 잡아 토닥이니 에스티안이 잡고 있던 내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를 바라보자 엘의 말을 들은 즉시 나와 같은 것을 떠올린 듯 입모양으로 ‘항구’라고 했다.
누군가를 안고 배가 있는 곳으로 간다면 상상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었다.
지금도 성행하고 있는 불법 노예선 운영.
노예로 삼을 어린애들을 밀실에 넣고 항해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상선이 많이 정박된 항구는 제국 내에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게다가 엘은 이전에 분명 큰 가게를 갔다가 나오는 길이었다고 했지.
지금 그 가게가 사라졌더라도 분명 다른 가게가 들어오고 상점가가 형성됐을 것이니, 번화가 주변의 항구를 중심으로 찾으면 될 것 같았다.
그중에서 제국의 세력이 확장되어 생긴 신생 항구들을 제외하기까지 한다면 정말로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얼마 안 남을 테지.
“그런 배들은 보통 저녁 시간이 지난 이후에 출항을 준비해. 딱 지금 정도.”
“더 늦기 전에 지금 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겠네요. 내가 가 보고 싶다고 하면 같이 가 줄 수 있어요?”
“위험할 것 같아서 나 혼자 다녀오려고 했는데.”
“같이 가면 하나도 안 위험하지 않을까요? 에스티안이 옆에 있는데.”
“그거야 그렇지만.”
내 말에 에스티안은 곤란하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가 결국엔 씩 웃었다. 그와 내가 소곤거리고 있자 엘이 갑자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언니와 오라버니는 연인인데 데이트도 제대로 못 하네요. 매번 모여서 이렇게 딱딱한 얘기만 하고요.”
혹시라도 항구 얘기가 바깥으로 나가면 엘이 자신도 가 보겠다고 할까 봐 조용히 얘기한 거였는데 그녀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
아직 기억이 분명하게 돌아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해당 장소에 가거나 관련된 사람을 만나게 해서 깜짝 놀라면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사제의 주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행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엘은 그 얘기는 못 들은 듯했고 그저 눈을 가늘게 뜬 채 우리 둘을 번갈아 살펴보고 있었다.
“아,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렇죠, 에스티안?”
“…….”
이 사람은 반응이 또 왜 이래! 여동생이 저렇게 말하면 당연히 아니라고 해야지!
에스티안은 손으로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마치 대단히 일리 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 있었다.
“에스티안도 그렇대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잽싸게 말했지만 엘은 이미 흐응, 하고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동안 모여 늘 얘기를 해 왔지만 이런 적은 없었는데?
“내일 주말이라서 오라버니는 근무를 안 나가기도 하고요.”
“음.”
저런 말에는 칼같이 대답하는 것 좀 봐. 역시 남매인가. 그래서 엘이 무슨 말을 더 하려는 건지 나도 잠자코 들어 보기로 했다.
“저도 내일은 예정된 수업이 없어요. 치료사님과 사제님도 그다음 날에 오시기로 했고요.”
“네에.”
“언니도 내일은 어차피 언니네 저택 안에만 있을 거 아니었어요? 우리 만날 때 말고는 밖으로 잘 안 나오니까…….”
“아아뇨? 내일…… 내일…… 뭐, 내일은 일이 없긴 하지만…….”
이 녀석…….
이미 간파당해서 체념한 내 얼굴을 엘은 재미있다는 듯 히히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티안은 한술 더 떠서 ‘그렇지.’ 하고는 내 손을 잡아 입을 살짝 맞췄다.
아니, 그래서 내일 아무 일정도 없는 사람들끼리 뭘 하자는 거야? 나와 에스티안은 그렇다 쳐도…….
아니, 이것도 아니지. 뭘 그렇다고 치겠어. 내일 아무 일 없는 게 지금과 무슨 상관이야.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른 나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오늘은 모처럼 쥴 경도 오셨고요……. 주말 전에는 늘 구경하기 좋은 야시장이 열린다고 하더라고요. 귀족들이 많이 이용하는 거라서 위험하지도 않다고 하던데…….”
어라? 우리한테 당당하게 말하던 것과는 달리 엘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테이블로 시선을 향하곤 작게 목소리를 냈다.
원래 그동안 블라머프가에 올 때는 쥴이 아니라 다른 기사를 대동하고 방문했었다.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었고, 그저 쥴이 황궁의 부름을 종종 받아 그쪽으로 가서 근무를 서는 바람에 그랬던 거였다.
오늘은 그런 근무가 없어 나와 함께 여기 왔고, 지금은 별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엘은 쥴을 꽤 좋아했는데 블라머프가에서 지내게 된 후로는 한 번도 못 봤구나. 그제야 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아 스멀스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을 때 그녀가 늘 빨간 핀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떠올랐다. 물론 지금도 하고 있고.
장난 좀 쳐 봐?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에스티안의 얼굴을 보며 나는 찡긋 윙크를 한 뒤 엘에게 말했다.
“쥴 경한테는 제가 물어보면 돼요. 그런데 만약 쥴 경이 같이 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떡하죠?”
“아…… 그러면…… 언니랑 오라버니 두 분만이라도 놀러 다녀오세요……. 저는 같이 안 가도 괜찮아요…….”
천연덕스럽게 던진 말에 갑자기 풀이 죽는 엘의 모습을 보니 더 장난이 치고 싶었지만 이쯤 해야겠지.
모처럼의 외출이라니 나도 기대되는 게 사실이었다. 서로 다 알게 된 후에는 늘 저택에서만 봤지 바깥으로 나간 적은 한 번도 없기도 했고.
또 나가는 김에 항구도 슬쩍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엘은 쥴 경과 같이 야시장 구경을 가고 싶은 거죠?”
“네에? 아뇨?! 그냥 다 같이…….”
“쥴 경도 아마 엘이 같이 가고 싶어 한다고 하면 엄청 좋아할 거예요. 엄청!”
“……진짜요?”
“그럼요.”
*
“에란티아 아가씨.”
“쥴 경,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너무 딱딱하고 이상하단 말이에요. 그냥 이전처럼 엘이라고 부르고 말도 편하게 해 주세요.”
마차에 다 같이 타기 전 걸어가는 도중 쥴은 어떡하냐는 눈으로 나와 에스티안을 쳐다봤다. 나야 상관할 게 아닌 것 같아 에스티안을 쳐다봤더니 그도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엘이 원한다는데, 뭐. 그걸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라버니도 참!”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인 쥴은 그제야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정원에서 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라 놀랄 법한데도 쥴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대했다. 그래서 엘이 더 정신을 못 차리는 거구나…….
우리는 뒤에서 그 귀여운 모습을 실실 웃으며 바라보게 되었다.
“나 본다고 일부러 이 머리핀 하고 온 거야? 잘 어울리네. 예뻐.”
“그, 그런. 고맙습니다.”
결국 우리 넷은 마차를 타고 저택을 빠져나와 번화가에 도착했다.
거리는 등불들을 밝혀 놓아 아주 환했고 사람도 많았다. 모두가 신난 모습이라 그저 그 장소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흥겨움이 밀려왔다.
나와 에스티안은 놀기 전에 먼저 이 근처에 있는 항구 하나를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엘과 쥴이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기도 해서, 잽싸게 둘씩 나눠 돌아다니다 두 시간 정도 뒤 큰 시계탑 아래서 만나 다 같이 하기에 재미있어 보이는 걸 얘기하고 함께 다니기로 약속했다.
먼저 둘만 돌아다니게 된 상황에 엘은 이미 잔뜩 신난 듯했다.
“엘, 얼굴이 빨개요.”
“더, 더워서 그래요!”
“조심해서 둘이 잘 놀고 이따 봐요.”
엘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 작게 속삭였더니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귀여운 모습을 뒤로하고 에스티안과 나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항구는 번화가 초입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거기가 엘이 사고를 당했던 장소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게 아닐지라도 무슨 정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연인이 된 뒤로 이렇게 그대와 나온 건 처음이군.”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데 에스티안이 말하며 슬그머니 내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져 있고 귀가 붉어져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고 걷고 있으면서 저런 모습이라니! 푸스스 웃음이 나와 나는 반대쪽 손으로 그의 귀를 살짝 건드렸다.
“귀가 빨개요, 에스티안.”
“왜 그렇겠어.”
낮게 웃으며 말한 그는 내 입술에 그대로 입을 살짝 맞췄다. 이젠 내 귀도 빨개졌겠구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사람과 내가 연인이라서 이렇게 입을 맞추고 손을 잡은 채로 걷는다니. 문득 기분이 좋아져 손을 가볍게 흔들었고, 그는 부드럽게 내 손을 올려 입을 맞췄다.
“이전에는 어색하게 걷기만 했던 거 같은데 이렇게 같이 걸으니 좋네요.”
주변을 보면서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점점 항구 쪽이 가까워지자 자연스럽게 대화는 엘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나는 아까부터 고민되던 얘기를 시작했다.
“엘한테 이 사건의 중심에 리아나와 그녀의 집안이 얽혀 있다는 건, 더 확실해진 이후에 밝히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음.”
“엘은 지금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도 벅찬데, 괜히 얘기하면 엘한테 별로 안 좋을 것 같아서요.”
내 말을 들은 에스티안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하는 것 같길래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엘을 그렇게 위험하게 만들었던 사람이 사실은 나랑 아는 사이다, 아니 아는 사이를 넘어 친구다, 이렇게 말하기가 좀 그랬거든요. 엘이 엄청 놀랄 것 같아서 걱정도 많이 됐고요.”
“…….”
“사실 지금 우리 둘은 너무 친하고 보기만 해도 좋은 사이인데, 그 얘길 듣고 엘이 왜 친구라면서 제대로 못 밝혀 주냐, 못 찾아 주냐고 해도 저는 할 말이 없기도 하죠. 으, 어쩐지 엘한테 너무 미안해서.”
계속 고민만 하던 속마음을 내뱉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런데 에스티안은 대답도 없이 살짝 굳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아, 객관적으로 보면 동생을 위험하게 한 사람이 애인의 친구인 셈이니까 사실 민감하기로는 그가 더 민감할 수 있겠구나.
뭐라고 계속 얘기를 해야 하나 그의 얼굴만 보고 있는데, 그가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그는 내 눈가와 볼에 느릿하게 입술을 누르고는 뺨을 손으로 살짝 어루만졌다. 뭐야, 이런 걸 할 타이밍인가?
“역시 그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
“네?”
“아델린. 델.”
그는 한숨을 내쉬듯이 내 이름을 불렀다. 단지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도 목 뒤부터 온몸이 찌릿찌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묘한 느낌이 좋으면서도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나 더 긴장되었다.
“아까 엘 앞에서 리아나 영애의 얘기를 하려던 것을 막은 건, 그런 얘기를 직접 하면서 상처받을 게 뻔한 그대가 걱정돼서였어.”
“어…….”
“그대가 아는 엘은, 그렇게 생각할 아이가 절대 아니야. 오히려 친구가 나빴다며 그대를 위로했으면 위로했겠지. 그건 그대가 더 잘 알잖아.”
“아…… 그건 그렇죠. 그러네요.”
에스티안의 말을 듣자마자 어딘가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들었다.
착하고 밝은 엘은 분명 나에게 그런 식으로 비난하는 것처럼 반응할 리가 없다. 그저 내가 제 발 저려서, 나 나름대로 리아나가 보인 악독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멋대로 생각해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 엘이 타인을 탓하거나 나무라는 건 상상도 안 된다. 착한 아이인 걸 내가 옆에서 그렇게 봐 왔는데.
왠지 안도감이 들어 기분 나쁘지 않은 숨과 웃음이 동시에 푸스스 흘러나왔다. 에스티안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나를 살짝 끌어안곤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이건 아델린 그대가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잖아. 이상한 건 리아나 영애 쪽이라고.”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걔가 진짜 이상한 거죠. 그렇죠. 그런데, 그래도 엘한테는 리아나에 대해선 아직 얘기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이건 정말 순전히 엘이 많이 놀랄까 봐 걱정되어서니까 그렇게 해요.”
“그대가 이렇게 나서 주는 것에 내가 한없이 고마워해야 하는 것으로도 모자란데, 그대가 그렇게 얘기하면…….”
나를 안아 주던 그는 어느새 내 목덜미에 고개를 푹 묻곤 뜨거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단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절절한 그의 마음이 느껴져 절로 가슴이 찡했다.
이렇게 내 편을 들어 주고 나를 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연애한다는 건가.
간질간질한 마음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보이는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저 안고 입 맞추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이 났다.
애틋한 마음으로 서로를 그렇게 좀 보다 걸으니 우리는 항구에 거의 가까워졌다.
오며 가며 지나다녔던 기억은 나는데 이 정도로 가까이에 와서 배가 잔뜩 늘어서 있는 모습이나, 뱃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저녁이 한참 지나 어두컴컴한데도 사람들은 바빠 보였다.
좀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귀족들이 많이 다니는 번화가였기에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쪽으로 가까이 올수록 사람들이 거칠고 다소 험상궂어 보이기도 해서 에스티안이 옆에서 내 손을 꽉 붙잡고 있는데도 절로 발걸음이 느려지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도 그럴 게, 전부 덩치가 에스티안의 두 배 정도 되는 것 같아서. 에스티안이 결코 키가 작은 사람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리고 뱃사람들의 힘이 세다는 건 어딜 가든 만국 공통의 사실 아닌가.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뭘 하든 다치면 안 돼요. 알았죠?”
나름대로 진지하게 얘기한 거였는데 에스티안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목울대를 울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니, 걱정도 못 해?! 나는 주절주절 변명을 시작했다.
“물론 에스티안이 강한 기사라는 건 당연히 아는데요…… 저번에 다쳤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아요…….”
그는 내 손을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올려 입술을 대고는 그대로 말했다. 기분 좋은 울림이 손부터 퍼져 온몸에 스며들었다.
“그때 사실 아델린 그대를 생각하다가 다친 거였어.”
“네? 진짜요?”
“응. 자꾸 생각나고 보고 싶어서 토벌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싶었지.”
“헛…….”
“지금은 그대가 완전히 나의 연인이고 내 옆에 있으니 그럴 일이 없지. 그래도 걱정해 주는 건 좋은데.”
에스티안은 어차피 블라머프가의 기사들도 주변에 매복해 있으니 정말로 마음을 놓아도 된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어느 틈에 숨어 있던 기사 하나에게서 챙이 넓고 큰 모자를 받아 내게 씌워 주었다. 얼굴에 온통 그림자가 져 내가 주위를 보는 것도, 남이 나를 보는 것도 어려울 것 같은 물건이었다.
그는 얼굴이 드러나 봤자 위험해지기밖에 더 하겠냐며 모자를 조심스럽게 씌우곤 그 챙 안으로 슬쩍 들어와 내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이러려고 모자를 준비한 걸까……. 큰 모자 덕에 새빨개진 내 얼굴이 가려져 다행이었다. 그러고는 그도 눈매까지 어둡게 가려 주는 모자를 눌러썼다. 그렇게까지 하고 나니 어느새 두려웠던 것이 전부 사그라든 느낌이었다.
우리는 가장 앞쪽에 정박된 배를 향해 갔다. 그 앞에는 선박과 관련된 물건들을 정리하는 노인이 한 명 있었다. 아까 내 모자를 가져온 기사 한 명과 함께 우리는 노인에게 다가갔고, 곧 기사가 먼저 입을 떼었다.
“여기서 뱃일을 한 지 얼마나 되셨소?”
“거의 50년이 다 되어 가는구먼. 무슨 일이시오? 뱃일을 하러 온 분들은 아닌 것 같은데.”
“궁금한 게 있어서 왔소. 대답해 줄 거요?”
“뭔지를 알아야 대답을 하지. 이상한 걸 물을 셈인가 보오?”
“그런 건 아니고. 아직도 노예들을 받으시오?”
기사는 목소리를 낮춰서 슬쩍 물었다. 일부러 떠보는 거였다.
받는다고 하면 오래 일했으니 과거의 일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물어보면 될 거고, 모른다는 반응이어도 분명 노인으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어차피 뱃사람들끼리는 전부 알음알음하는 사이라고 하니까.
그리고 첫 번째 예상이 맞아떨어진 듯했다. 노인은 흠칫 놀란 얼굴을 하고는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요새도 받지, 그만큼 짭짤한 게 없는데. 하지만 이전만 하진 않소. 규제가 심하니까, 지금은. 왜, 넘길 애라도 있소?”
금세 눈을 빛내며 뻔뻔하게 물어오는 모습에 내 주먹이 다 꽉 쥐어졌다. 있으면 뭐, 바로 어떻게 하려고?
손톱이 손바닥을 강하게 누를 정도로 주먹을 쥐는데 에스티안의 손이 그 위로 덮이는 느낌이 났다. 괜찮다는 듯 그는 내 손을 잡아 가볍게 손가락으로 살살 두드렸다. 내가 이렇게 화가 나는데 사건과 관계된 그는 마음이 더 착잡하고 분노가 치밀겠지.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숨을 내쉬었다. 나와 에스티안을 힐끗 본 기사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니, 지금은 아니고. 좀 예전에 넘겼던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 해서. 한 10년 됐나? 그보다 좀 적은가. 그게 이 항구에서였는지도 좀 가물가물해서 말이오.”
“내가 기억력 하나로 여기서 수십 년을 일해 온 사람이네그려. 노예들을 기억해서 팔아넘기려면 사람을 보고 한 번에 파악하는 능력은 필수라오. 웬만해서는 기억날 거요. 어떤 아이였소? 몇 살 정도? 계집이었소?”
노인은 뿌듯한 얼굴로 한껏 흥분해 기사를 재촉했다. 역겨운 모습이었지만 정말로 큰 단서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떨렸다.
에스티안은 품속에 미리 넣어 가져온, 엘의 초상화가 그려진 목걸이형 펜던트를 꺼내 기사에게 슬쩍 건넸다. 당연히 어릴 적, 대략 엘이 사라졌을 무렵보다 조금 전 정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기사가 그걸 노인에게 보여 준 순간, 노인은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아아, 이렇게 튀는 애라면 당연히 기억하지. 아무리 봐도 행색이 이런 데 올 애는 아닌 것 같았거든. 가끔 귀족 애들이 오긴 오는데, 그래도 그 급이라는 게 보이잖소. 이 애는 절대 팔려 올 애 같지는 않아서 그때도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오.”
노인은 자신의 말을 듣다가 어느새 얼굴색이 달라진 우리 쪽은 보지도 않고 펜던트 속 엘의 초상화와 기사만 번갈아 보며 계속 말했다.
“게다가 이 애는 섬에 도착했을 때 배 안에 없었소. 근데 당시 배에 특히 험악한 사내들이 좀 많았거든. 우리 배에 원래 타던 놈들 말고 다른 놈들도 몇몇 같이 탔기 때문이오.”
“…….”
“그래서 그네들이 그 귀족 같은 애를 어떻게 한 다음 그냥 바다로 던졌나 보다, 생각했지.”
들을수록 가관인 말에 머리가 다 띵해질 지경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에스티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기에 이번에는 내가 부드럽게 깍지를 꼈다.
눈앞이 노래질 정도로 화가 나는 게 당연한데도 일단은 참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사실조차 짜증이 났다. 기사는 우리와 다시 한번 눈을 마주치곤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질문했다.
“그렇군. 그럼 혹시 그 아이를 당신에게 줬던 사람도 기억나시오?”
“물론이지. 팔아넘기는 애도 튀는 데다 돈을 한두 푼 준 게 아니어서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 그런 걸 잊어버리면 쓰나.”
“어떤 행색이었는지까지도 생각이 나시오?”
“그럼, 눈만 빼고 온몸에 검은 천 같은 것도 두르고 있었소. 눈가에는 핏자국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선원 중 하나인 줄 알았지. 선원들은 워낙 거칠어서 서로 치고받고들 자주 싸워서 상처 나고 피 나는 건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선원은 아니었던 듯했소.”
“눈에 난 흉터가 그때 생긴 거였나.”
에스티안이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얘기하자 나도 그걸 이해하고는 눈을 마주쳤다.
오른쪽 눈에 흉터가 있는 리아나의 호위 기사. 그임이 틀림없었다.
“내 기억에 이건 정말 오래된 일인데 이런 얘길 왜 갑자기…… 윽!”
혹시 자신에게 무언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욕심으로 번들거리는 노인의 눈빛을 보자마자 에스티안은 그의 정강이를 세게 발로 찼다. 그러고는 뒷목을 내려쳐 기절시켰다.
화가 치밀어 올랐을 텐데도 참 인도적인 처사라고 생각했다. 신음 한 마디 내고 고꾸라진 노인 곁으로 곧 숨어 있던 기사들이 전부 다가와 그를 포박했다.
“소란스러워지면 안 되니 조용히 지하에 가둬 놓도록. 중요한 증인이니 절대 죽여선 안 된다. 자살하게 해서도 안 돼.”
일제히 묵례한 기사들은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졌다.
엘리디트가에 완벽하게 살인미수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큰 단서를 잡아냈다는 게 실감 나자 한숨이 튀어나오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에스티안은 곧바로 내가 넘어지지 않게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이런 걸 보고 듣게 하고 싶지 않았어. 이래서 혼자 오려고 한 거였는데.”
“아니에요. 저도 봤어야 하는 게 맞죠. 다행이에요. 엄청난 수확이네요. 진짜 나오길 잘했어요.”
그는 안도했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필요 없어진 모자를 거칠게 벗은 뒤 머리를 휙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내 모자도 벗겼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정리해 준 그는 내 이마에 입술을 깊게 눌렀다. 그 입맞춤이 왠지 모든 게 다 잘 마무리될 것 같다는 느낌을 줘서, 나도 발뒤꿈치를 들어 올려 그의 볼에 입술을 살짝 대었다 뗐다.
사냥제 때 나를 유인하고 끝내 자살한 평기사의 가족, 그리고 농약을 사 간 가문을 알려 준 농원의 주인.
이전에 사냥제 때 나에게 저질렀던 만행과 관련된 사람들을 사실 계속 관리하고 감시해 오고 있었다. 증인으로 어떻게든 이후에 부를 수 있도록. 그러니까 평기사처럼 죽지 않도록.
거기다 엘과 관련해서 리아나의 집안이 수상하다는 얘기를 같이 들었던 황실의 시녀 소니아도 꾸준히 살펴보고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그간 수상하다 여겼던 것을 넘어 정말로 확실한 증거를 찾았으니 이제는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는 거라는 생각에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다.
애초에 우리의 목표는 정말로 항구만 확인하고 정보를 얻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생각보다 빨리 달성하고 나니 엘, 쥴과 약속한 시간까지의 여유가 많이 생겼다.
에스티안은 혹시라도 내가 항구 근처를 계속 무서워할까 봐 얼른 번화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우리는 다시 금방 야시장으로 들어와 이것저것을 구경하면서 다녔는데, 썩 반갑지 못한 인물들이 말을 걸어왔다.
“아델린 영애? 여기서 이렇게도 보게 되네요. 야시장에 놀러 나오신 건가요?”
“영애가 그 어떤 티타임에도 안 나온 지 꽤 오래되어서 소식이 궁금했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얼굴은 눈에 익었다. 사냥터에서 내가 막 뒷얘기 한다고 욕했던 영애들 세 명이었다. 내가 만약 저들의 입장이었다면 ‘저기 그때 그 이상한 애 지나간다’고 하면서 마구 뭐라고 했을 텐데…….
그냥 지나칠 법도 하건만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 주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가볍게 대꾸하자 그제야 내 옆에 있던 에스티안을 발견한 건지 그녀들은 숨을 삼켰다.
“흡, 옆에 계신 분이 그…….”
“황실기사단장님 맞으신지……. 몰라뵈어 송구합니다. 인사 올립니다.”
에스티안은 특별한 감흥 없는 얼굴로 묵례를 할 뿐이었다.
그는 그녀들을 마주친 순간부터 인사를 하는 지금까지도 내 어깨에 팔을 둘러 닿는 대로 머리카락이나 목덜미, 볼 같은 데를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게 그녀들의 눈길을 아주 강렬하게 잡아챈 듯했다.
그녀들이 에스티안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아델린 영애, 그, 기사단장님께서는…… 아니, 기사단장님과는…….”
“어떻게 두 분이 같이…….”
뻔히 듣고 싶은 대답이나 예상할 만한 대답이 있는데도 그걸 두 귀로 들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은 눈들을 보니 오기가 생겼다.
고개를 살짝 들어 에스티안을 바라보며 작게 ‘뭐라고 얘기해야 통쾌할까요?’ 하고 말하는데, 그는 낮게 웃으면서 내 눈가부터 뺨과 귓불에 연이어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건 그녀들에게 대답이 된 듯했다. 아,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이렇게 통쾌하게 보여 줄 수 있구나…….
그러나 그녀들은 헉 하고 벌어졌던 입을 금세 다물고는 마치 나를 생각해 준다는 것처럼 애처로운 얼굴을 하며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저런, 기사단장님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델린 영애, 괜찮은 건가요?”
“그러게 말이에요. 이게 다 우리가 영애를 생각해서 말 걸어 주는 거라고요.”
“어제도 기사단장님이 저녁에 술집들이 늘어선 길을 빠져나와서는 어느 틈엔가 또 다른 남작가 영애를 만나 함께 기사단장님의 전용 숙소로 갔다고 하던데.”
“그래요, 맞아요.”
“거기서 뭘 했겠어요.”
본인 앞에서 이 정도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것에 박수를 쳐 줘야 하나.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이미 저들끼리 결말까지 다 지어 놓은 듯한 말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엘을 찾은 뒤로 에스티안은 늘 그를 둘러싸고 흉흉하게 소문이 나던 장소들에 발걸음을 딱 끊었다. 더 이상 갈 일이 없었기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리아나와 그 집안의 악행을 캐느라 항상 황궁에서의 근무가 끝나면 블라머프가 저택으로 와서 나와 엘과도 얘기를 나눴다. 어제도 당연히 그랬기 때문에, 저들이 하는 말에는 하나도 맞는 부분이 없었다.
이번에도 나는 에스티안을 바라보며 분노에 찬 얼굴로 ‘어떻게 처리할까요?’ 하고 물었다.
아까의 키스처럼 에스티안이 곧장 무언가 행동을 할 줄 알고 내심 기대까지 하고 있었는데, 그는 잔잔히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잘못하면 저들이 그대에 대한 소문을 이상하게 낼 수도 있어. 그냥 무시해도 돼.”
아니, 소문이 이미 이상하게 난 건 에스티안 쪽이잖아.
이미 극악스러운 소문 때문에 고생이 심한 에스티안이 나 때문에 그걸 묵인한다니.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딘가 뾰로통해진 내 표정에 그가 의아한 눈빛을 했다.
“나만 믿어 봐요.”
나는 그에게 작게 속삭인 뒤 앞의 영애들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그녀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에 대해 쑥덕대며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림도 없지. 헛소문엔 사실로 대응하는 게 최고니까.
“에스티안, 어제저녁에 어디에 있었어요?”
내 물음에 먼저 입을 연 건 영애들이었다. 별생각 없이 에스티안의 누명을 벗겨 주려고 물은 건데 그녀들은 이상한 부분에서 놀란 듯했다.
“어머, 기사단장님이라고 안 부르고 이름 부른 거 방금 들었어요?”
“블라머프 기사단장님이라고 불러야 되는 게 아닌가요?”
“세상에, 세상에.”
아, 이름을 불러서 그랬구나. 그러는 자기들도 나랑 안 친한데도 성 대신 이름 불렀으면서.
그 말까지 하면 이 상황에서 멋있지 않을 것 같았기에 그건 꾹 참았다. 그리고 에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어제저녁에는 블라머프가 저택에 있었지.”
에스티안은 내가 뭘 의도하고 물었는지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왠지 모르게 아름다운 푸른 눈에 장난기가 좀 보이는 거 같은데…….
그래도 내 의도를 알아서 그런 것이겠거니 여겼다.
이미 영애들은 자신들이 아는 헛된 정보와 다른 얘기가 에스티안의 입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다시 말했다.
“그렇죠. 술집 쪽은 가지도 않았어요. 저택에서 누구와 있었죠?”
“그대와 있었지.”
어, 이게 아닌데……. 나는 블라머프가 가족들과 있었다는 대답을 예상했는데. 뭐, 물론 나와 있던 게 거짓은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인 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렇죠. 그리고 뭘 했죠?”
건전하게 대화를 했다, 같은 대답을 예상하고 그를 슬쩍 보는데 그가 낮게 웃고 있었다.
아, 뭐지…… 하는 순간 입술에 따뜻하고 말캉한 것이 닿았다.
잠시 멍청하게 벌어졌던 틈 사이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고는 그대로 입술을 스치듯 붙인 채 말했다.
“이런 걸 했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을 말이었지만 이미 그녀들에게는 넘치도록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심지어 이것도 앞선 대답처럼 거짓은 아니었다. 엘을 앞에 두고도 에스티안이 몇 번이나 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으니까…….
그래서 엘이 오늘 아예 바깥으로 나가 버리자고 제안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이미 눈앞의 영애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부채로 가리는 것도 잊은 채 입을 크게 벌리곤 서로 깜짝 놀란 눈길만 주고받고 있었다.
에스티안은 입술을 그렇게 대고는 뭐가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다.
제대로 대화를 끝낼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기에 나는 에스티안과의 간격을 살짝 벌린 뒤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러니까 영애들이 알고 계신 건 잘못된 정보라고요. 당사자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대체 누가 그렇게 소문을 내는 건가요?”
“그, 그건 저도 그냥 들은 거라…….”
“네, 뭐 떠도는 얘기라서…….”
점점 작아지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나는 크게 숨을 내뱉고는 정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런 거짓 소문 때문에 상처받고 견뎌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 주셔야 할 것 같네요. 오늘 야시장 구경 잘하세요.”
그녀들도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갔고, 우리도 금방 야시장 내의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 둘만 있고 좀 조용해지자 나는 투정 어린 말을 에스티안에게 건넸다.
“아깐 사실 그렇게 대화를 이끌려던 게 아니었는데……. 사실로 밀어붙여서 그 영애들이 잘못된 얘길 들은 거라고 탁 주지시켜 주려고 했단 말이에요. 왜 갑자기 그러셔서…….”
“벌이자 고마움의 표시였어.”
“네? 벌이요?”
“그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분명 저들은 그대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낼 테니까. 걱정하게 만든 벌이야.”
그런 벌이라면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욕망 어린 말을 삼켰다.
내가 이 모든 걸 처음 겪는 거라서 이런 거겠지. 이미 빨개진 내 양쪽 볼을 손으로 가볍게 감싸 그대로 입을 맞춘 그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대가 나를 위해 그렇게 얘기해 줬다는 게 너무 기쁘고 고마웠어. 걱정이 되면서도 너무 기뻐서 몸 둘 바를 모르겠더군.”
“……아직 멀었는데요, 뭐. 이상한 소문들 얼른 다 바로잡아야죠. 저는 엘의 사건만큼이나 에스티안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얼른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에스티안이 겉으로 티 안 내려고 해도 씁쓸하고 기분 안 좋은 건 분명할 테니까요.”
“그대에겐 솔직해야지. 그런 감정이 안 든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대가 내게 말하는 순간 그런 건 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려. 그래서 정말로 고마워. 그대를 볼 때마다 스스로도 주체 못 할 정도로 애정이 점점 커지고 있어.”
“……저도요.”
절절하고 애틋한 그의 시선과 말에 내 얼굴과 온몸은 열기로 달아올라 식을 줄을 몰랐다. 에스티안의 귓불도 붉어져 있는 상태라 묘하게 더 설렜다. 우리가 같은 마음을 느끼고 있다는 게 실감나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끌어안던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곧 시계탑 근처에서 엘과 쥴을 만날 수 있었다.
“언니랑 오라버니는 뭘 하고 놀았길래 그렇게 얼굴이 빨개요? 내기 도박 같은 거 해서 흥분하기라도 한 거예요?”
“다 노는 방법이 있어.”
“에스티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 그냥 좀 더운가? 근데 엘 얼굴도 빨개요. 아까 봤을 때보다도 더!”
“아, 아니거든요!”
“그러고 보니 아가씨 말씀이 맞네요. 열이 나나?”
내 말에 쥴은 고개를 돌려 엘의 얼굴을 코앞에서 확인했는데,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기까지 했다.
저러면 얼굴은 더 뜨거워지고 더 빨개질 텐데!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는 엘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다 같이 매운 것, 단것, 시원한 것 등을 사 먹었다. 먹은 것밖에 안 한 것 같지만도 사 먹고, 단것도 사 먹고, 시원한 것도 사 먹고…… 야시장 특성 자체가 쭉 늘어선 가게들이었기에 잔뜩 먹으며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귀여운 액세서리 종류를 파는 가게에 들어가 모두 실로 만든 팔찌도 하나씩 샀다. 즐겁고 경쾌했다.
나는 에스티안과 얘기하다가 엘과도 잠시 얘기하고, 쥴과도 얘기했다. 또 엘은 쥴과 얘기하다가 나나 에스티안과 얘기하기도 했고.
남자 둘에 여자 둘, 이게 사람들이 많이 하는 더블데이트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말할 상대도 많고 완전히 둘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왠지 혼잡스럽기도 했지만, 어째서 이전에 주변의 사람들이 연애만 했다 하면 지인들을 모아 더블데이트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여럿이 있으면서 느끼는 신나는 마음과 그 안에 오롯이 내 편인 사람이 있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 공존하며 주는 감각이 기묘하리만치 짜릿하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다 같이 다녀도 참 좋다고 생각하는데, 같이 걷던 엘이 내 팔을 몇 번 두드렸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다녀 보자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나랑 엘이 같이 다니고, 에스티안과 쥴이 같이 다녀야 한다는 건데.
나랑 엘은 상관이 크게 없지만 에스티안과 쥴이 나란히 야시장을 거니는 건 상상이 안 되었다. 안 되다 뿐인가,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귀족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야시장이라고는 해도, 같이 다니는 게 덜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에스티안과 쥴의 표정도 떨떠름한 채였다. 쥴은 특히 둘이라고 못 다닐 건 아닌데 위험하기도 할 것 같아 굳이 떨어져야 하느냐고 바로 반대 의견을 냈다.
“아, 위험할 수가 있겠구나.”
가뜩이나 한 번씩 데인 전적이 있지 않은가. 금세 꼬리를 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엘이 내 옷깃을 잡아 귓속말을 했다.
“아이, 언니한테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단 말이에요.”
곁눈질로 쥴을 한 번 본 뒤 땅 한 번, 하늘 한 번 힐끗거리는 엘의 모습에 나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쥴에 대한 것이라고 직감했다. 심지어 에스티안조차 그걸 느낀 듯했다.
에스티안이 눈길로 엘 한 번, 쥴 한 번 이렇게 보고는 내게 윙크를 했다.
“어차피 계속 우리 넷이 다니는 동안에도 블라머프가의 기사들이 뒤따라오고 있었어. 아델린과 엘 둘만 다니는 동안에는 나와 쥴 경 있는 쪽의 기사 몇몇을 그쪽으로 더 넘기면 되니까.”
안전 문제까지 해결되고 나니 둘씩 다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에스티안과는 엘과 쥴이 서로를 어찌 생각하는지 알아보고 전해 주자고 잠시 속삭였다.
엘이 쥴을 좋아하는 게 너무 눈에 보이는 데 비해 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 없었기에 이런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자, 너무 떨어져 다니면 재미없으니 한 시간 정도만 이렇게 둘씩 다녀 봐요. 당연히 재미있는 게 있으면 이따 만나서 서로 알려 주기로 하고요.”
다시 시계탑 앞에서 보자는 약속을 하고 우리는 방향을 다르게 하여 흩어졌다. 쥴이 가는 걸 하염없이 보다가 엘이 한숨을 내쉬길래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하고 싶은 얘기, 쥴 경 얘기죠?”
“히익, 티가 나나요? 나겠죠……. 마음을 숨기질 못하겠어요. 쥴 경은 저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도요.”
엘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쥴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얘기를 듣고 보니, 엘이 우리 저택에 있었을 때 그가 그녀에게 잘해 줬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냥 잘 대해 주는 선에서 그친 게 아니고, 감정적으로 충분히 설레고 좋을 만큼 잘해 준 거였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가끔 마주치면 장난을 거는데 그게 그렇게 떨리고 멋있는 거예요. 제가 몇 번 일하다가 덥다고 했더니 어느 날부터는 손수건을 가져오시고…….”
“어머…….”
“그분은 그냥 그러셨을 수 있겠지만 저는 얼마나 설렜다고요.”
나 같아도 설렜겠다……. 엘이 거리에서 지냈던 것을 생각하면 멀쩡한 남자들을 많이 마주칠 기회가 없었을 것이기에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었겠다.
그런 데다 쥴은 객관적으로 봐도 깔끔한 호남형이고, 기사다 보니 친절이나 매너 같은 것도 몸에 배어 있고.
“일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내심 쥴 경이 또 왔으면 하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또 정말로 오시고 해서 더 좋았어요.”
“헤, 진짜 좋았겠어요.”
“가끔 초콜릿 같은 것도 주고 가시고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정말 포근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쥴이 했던 행동이나 말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며 꿈꾸는 듯한 얼굴로 말하는 엘도 사랑스럽고, 동생에게 대하듯 다정하게 한 쥴의 얘기를 듣는데도 웃음이…….
아니, 잠깐만. 동생을 대하는 듯?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쥴은 최근에 나를 호위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바빴다. 물론 본분을 다하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호위해야 할 때는 꼭 했고, 황궁의 명을 받거나 해서 피하지 못할 때만 다른 기사에게 요청을 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엘이 일하는 정원에는 곧잘 들른 것 같은데.
온갖 군데서 일이 몰아쳐 힘들었을 게 뻔한데도 엘을 보면 장난을 걸고 간식도 주고 했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자 곧장 떠오른 게 있었다. 매번 피곤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늘 정원에 왔던 에스티안…….
‘그대가 말하는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늘 그대의 정원에 갔지.’
그리고 연인이 된 후 에스티안이 했던 말까지.
거기까지 떠올리자마자 확신했다.
쥴은 엘을 동생으로 대하고 있는 게 아니다!
모태솔로인, 아니 이제는 연애를 하게 된 지 얼마 안 된 내가 생각해도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엘의 얘기를 들어 보면 쥴이 특별히 자기감정이 어떻다 하는 말은 아직 전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럴 때 섣불리 내가 ‘쥴도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다’고 전하는 건 시기상조일 것 같았다.
“……아무래도 쥴 경은 저를 여동생처럼 생각하고 잘해 주시는 것 같아요. 아까 같이 다닐 때도 자꾸 빨리 커라, 빨리 커라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애 취급을 하시는 것도 같고요.”
단둘이 있는데 장난으로 빨리 크라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나는 다시 묘하게 확신했다. 쥴도 엘에게 마음이 있지만 엘이 어려서 망설이고 있던 거 아닐까. 심지어 이번에는 엘이 가족까지 다시 찾고 신분이 완전히 바뀌었으니 쥴로서는 더 그녀에게 접근하기가 어려워진 건 아닐까.
“……그래서 예법을 배울 때 조금이라도 더 성숙해 보이는 법이 있는지도 막 물어보고 그랬거든요. 근데 그런 게 저를 진짜로 성숙하게 해 준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나는 엘의 손을 붙잡고 얘기했다.
“엘, 모습이 아니면 뭐 어때요, 엘은 지금 나이가 많지 않은 게 맞는데. 그런 건 자연히 크면서 어떻게든 될 거예요.”
“정말 그런가요? 왠지 쥴 경은 저 같은 어린애보다는 좀 더 관능적이고 어른스러운 여인을 좋아할 것 같아서 더 걱정돼요.”
“쥴 경이 직접 그런 말을 했나요? 엘에게 빨리 크라고 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닐 거예요.”
“그런가요?”
“그럼요. 음…… 그런 것보다는 엘이 가진 지금의 그 마음을 쥴 경에게 잘 보여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지금 마음을요?”
“그렇죠. 억지로 성숙하게, 다른 모습으로 꾸미기보다는 엘만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을 보여 줘요.”
“으,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 거로 될까요?”
“그런 거라뇨. 그건 엘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요. 쥴 경도 지금 엘처럼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헛, 쥴 경이 고민을 한다니…….”
“그럴 수 있잖아요. 쥴 경이 좀 더 자기 마음을 드러내도록 엘도 그런 느낌을 슬쩍 전달해 봐요.”
“아, 그 생각을 못 했어요. 쥴 경도 정말로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까요?”
“그럼요, 그럴 거예요.”
사실 쥴의 마음은 잘 모르지만, 일단 내 추측으로 절대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열심히 엘을 다독였다. 고민 어린 얼굴을 하던 그녀는 다행히 기운을 찾고는 늘 그랬던 것처럼 밝게 웃었다.
“언니 덕분에 고민이 없어진 것 같아요. 앞으로는 그럼 저도 쥴 경한테 좀 더 잘해 주면서 마음을 전달해야겠어요. 언니, 정말 고마워요!”
엘이 더 적극적으로 나가면 쥴도 분명 반응을 하겠지.
왠지 당황하면서도 좋아할 그의 모습이 얼핏 상상돼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티 살롱에 들어가 거의 눈높이까지 과일을 쌓아 올린 케이크를 먹으며 계속 수다를 떨었다.
쥴이 얼마나 멋진가에 대해 엘이 얘기하면 그걸 듣고 내가 웃으며 끄덕이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그냥 그러고만 있어도 재미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이전에 친구랑 카페에서 수다 떨며 달달한 거 먹은 적도 별로 없구나.
왜 다들 그랬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디서 뭘 먹고, 이런 것보다 그냥 친구와 둘만이 할 수 있는 얘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 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언니, 오라버니가 언니에게 잘해 줘요?”
“억. 아이고.”
계속 쥴 얘기만 하길래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엘이 갑자기 의외의 대화 소재를 던지는 바람에 차를 마시다 흘렸다.
당사자 동생 앞에서 당사자 얘기를 어떻게 해!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일수록 얘기해야 하나?
그런데 엘이 에스티안에게 뭐라고 전하기라도 하면……. 내가 열심히 눈을 굴리며 대화를 대충 넘기려고 하는데 엘이 다시 입을 떼었다.
“언니, 저는 이미 비밀을 언니에게 공유했다고요. 오늘 저희가 나눈 이야기는 저희밖에 모르는 거니 걱정하지 말아요.”
에스티안도 참 감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집안 내력인가.
내가 뭘 고민하는지 정확히 눈치챈 그녀는 자신만 믿으라며 가슴을 주먹으로 통통 치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에스티안에 대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면 그걸 넌지시 전해 고치게 하겠다는 말까지 하면서.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엘 앞에서 나는 뭘 고민했던 걸까. 오늘은 그야말로 서로의 비밀 얘기를 하는 날이 된 것 같은데.
“맞아요. 오늘 우리가 나눈 얘기는 우리밖에 모르는 거죠.”
나도 씩 웃었다. 그리고 계속 말하려 입을 열었건만, 음…… 아무리 생각해도 에스티안이 나한테 뭔가를 못해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늘 배려해 주고, 한결같고. 스킨십이 좀 잦은가, 하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지만 그게 싫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스킨십을 안 하는 편도 아니고…….
오히려 그가 잘 자제하는 편일 거라는 추측이 들자마자 오히려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엘, 근데 이건 농담이 아니고요. 진짜로 에스티안은 나한테 늘 잘해 줘요.”
“흐응.”
“진짜인데. 진짜예요, 엘. 일부러 말 안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양손을 붕붕 저으며 말하자 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 비밀을 얘기한 것 같아 민망하지만, 언니 말도 진짜 사실인 것 같아서. 제가 오히려 다행이에요. 오라버니가 언니한테 잘 안 해 준다고 하면 제가 뭐라고 하려고 했거든요.”
“말만으로도 든든한데요.”
“그 정돈 당연하죠. 근데 오라버니 얘기를 할 때마다 언니가 그렇게 예쁘게 웃고, 또 얼굴도 새빨개지는 걸 보면…….”
엘은 다 알겠다면서 뿌듯한 얼굴을 하고는 앞으로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곧바로 자기에게 얘기하라 일렀다.
이게 대체 누가 누구의 고민을 들어 주는 거야. 엘은 저런 걸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요새 뭘 배우고 있는 걸까? 오히려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건 내 쪽이 아닐까 싶었다.
티 살롱을 나와 그 주변을 좀 더 구경하던 우리는 시계탑 앞으로 갔다.
에스티안과 쥴은 먼저 와 있었다. 저절로 에스티안에게 먼저 시선이 갔는데, 그의 표정이 어쩐지 밝지 않았다.
뭐지? 에스티안과 쥴 사이의 관계는 원래 나쁘지 않다고 알고 있었는데. 기사단장으로서 에스티안이 훈련이나 업무도 잘 진행하고, 또 마주치면 둘이 인사도 곧잘 한다고 분명 들은 기억이 있는데.
설마 쥴과 싸우기라도 했나? 쥴이 엘에게 관심 있다는 걸 진짜로 알게 되어 기분이 언짢아진 건가? 자기 여동생을 찾은 지도 얼마 안 됐는데 그런 얘기를 듣게 되어서?
추측만 하고 있던 것과 당사자에게 듣는 건 아무래도 다른 문제일 테니까. 그냥 호감이 있는 정도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쥴의 마음이 엄청나게 깊었다든가…….
그런데 또 그런 것치고 쥴의 얼굴은 평온했다. 표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게 기사의 능력이라곤 해도 정말로 아무 일도 없던 것 같은 얼굴이었다.
우리를 보고도 큰 동요 없이 ‘다녀오셨습니까.’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가만히 에스티안을 보는데, 팔짱을 낀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겹쳐 꼬고 있던 팔을 풀어 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둘이 구경 잘하고 왔으니 다시 이렇게 둘씩 다녔으면 하는데.”
나는 놀란 얼굴로 에스티안을 보았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엘과 쥴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어딘가 느낌이 평소와 달라 일단 가만히 있었다.
“엘은 제가 마차를 태워 공작가로 잘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마차는 다시 이쪽으로 보내 두 분이 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군. 쥴 경, 그대도 마차를 타고 메이스프릴가로 갈 수 있도록 해 두었으니 그렇게 해.”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에스티안과 쥴을 보면 둘의 사이가 틀어지거나 어색해진 건 절대 아닌 것 같은데. 거의 짜 맞춘 듯 딱딱 떨어지게 대화하고 있고 말이다.
심지어 쥴은 에스티안 앞에서도 엘 아가씨나 공녀님 같은 호칭이 아니라 엘이라고만 부르고 있잖아? 그러면 저쪽은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분위기가 이렇게 무거운 건…… 우리 때문인가?
“어? 저는 집에 가고 두 분만 남아요? 으흐응.”
확실히 에스티안과 쥴만 무언가 얘기한 게 맞는지 엘은 고개를 양쪽으로 휙휙 돌리며 말하다가 눈가를 가늘게 좁히고는 나에게 윙크를 했다.
아니, 정말로 저런 반응이나 표정은 어디서 배우는 거야? 공작가만 따로 가르치는 거야?!
“어린애는 집에 가야지. 가뜩이나 못생겼으면서 이상한 얼굴 하지 말고 이리 와.”
“모, 못생겨요? 누가요? 제가요? 저 그런 얘기 정말 처음 들어 보거든요?!”
“그런 얘기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처음 해 주게 되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아…… 아…… 몰라요.”
“가자.”
쥴은 우리 쪽으로 묵례한 뒤 아무렇지도 않게 엘의 흐트러진 머리를 슥슥 다듬어 주고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마차가 있던 쪽으로 사라져 갔다.
장난치면서도 따뜻한 눈길로 엘을 바라보며 그녀를 대하는 쥴의 행동이나, 그의 말 한마디에 얼굴이 하얘졌다 빨개졌다 하는 엘을 보니 쥴과 엘은 완전히…… 완전히 잘되어 가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저 정도의 모습을 서슴없이 보인다는 건 에스티안도 둘의 관계를 받아들였다는 게 되고. 아, 정말 잘됐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이 떠난 것으로 더 확실해졌다. 아직도 에스티안의 표정이 밝지 못하고 분위기가 이렇게 무거운 것은, 분명히 우리 문제 때문이구나.
어렴풋이 에스티안으로부터 늑대의 기운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약간 성질이 난 듯한 느낌으로.
대체 뭘까.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잠깐 걸을까.”
“아, 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