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혹시라도 만나면 내가 아무리 얼버무린다고 해도 그들 마음대로 생각할 게 뻔하고, 또 어딘가에서 아까처럼 아무 얘기나 조심성 없게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더 나아가서는 괜히 에스티안에게 불똥이 튈 것 같기도 해서였다. 내 마음속에선 이미 그들이 엘에게 손댄 게 분명했기에, 그들이 에스티안에게 손 안 대리라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금방 오시겠죠. 어차피 바로 앞이 정원이니 여기서 산책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안내해 줘서 고마워요. 아까 말한 건, 절대 잊으면 안 되고요.”
“네, 네. 아가씨. 당연하지요.”
소니아는 고개를 강하게 여러 번 끄덕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에스티안의 숙소에 딸린 작은 정원을 휘휘 둘러보았다.
무언가 작물이나 꽃이 심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늘 잔디 관리를 해 주는지 아주 깔끔한 상태였다. 그 모습조차 에스티안과 느낌이 비슷해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두어 바퀴를 돌던 차, 불현듯 내가 빈손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동생의 존재를 알려 주러 온 거라고는 해도, 근 3주 정도 가깝게 마물과 싸우고 온 사람을 빈손으로 덜렁 맞이해 주는 건 어쩐지 별로일 것 같았다.
과거의 내 삶을 돌이켜 보면, 아무리 사람 만나는 것 싫어하고 집 안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걸 좋아하는 나조차도 가장 서러웠던 순간이, 힘들게 일하고 들어왔는데 불 꺼져 있고 아무도 집 안에 없을 때가 아니었던가.
나는 잽싸게 저번에 쥴을 따라갔던 가게 구역을 향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언제 에스티안이 올지 몰라 급하게 이것저것을 사서 돌아왔는데, 다행히 그가 아직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손에는 뭉친 근육을 푸는 데 좋은 약초들, 지혈을 돕고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는 약초들, 그리고 생크림을 얹은 타르트까지 들려 있었다.
타르트나 근육 푸는 약초는 그렇다 쳐도, 사실 상처를 치료하는 데 쓰는 약초는 사면서도 쓸 일이 없기를 바랐다.
한편으로는 에스티안이 강한 기사니까 그 약초를 쓸 일이 분명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워낙 힘들기로 소문난 마물 퇴치를 하고 오는 거니 혹시 살짝 긁힌 곳이라도 있을까 봐 산 거였다.
급하게 사느라 제대로 산 게 맞는지 잠시 살펴보느라 쪼그려 앉아 이것저것 살피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렇게 기다려 온 목소리가.
“……아델린?”
이런 식으로 만난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오늘은 괜히 긴장이 됐다.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자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말을 끌고 오는 에스티안이 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의 앞까지 달려갔다.
“에스티안 경! 지금 오시는 거예요?”
그는 어쩐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웃으면 웃었지 날 보고 저런 얼굴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던 것 같은데?
그는 내 말에 그저 작게 대답하고는 마구간에 말을 매었다. 오랜만에 보니 너무 반가워 나는 신이 나서 이 얘기 저 얘기를 시작했다.
“에스티안 경께서 이번 마물 퇴치 때도 엄청 활약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인원이 워낙 많아 다른 기사들을 지휘하는 것도 힘드셨을 텐데…….”
그는 쉴 새 없이 떠드는 내 말에도 옅게 웃으며 ‘그런가.’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평소와는 어쩐지 너무 다른 느낌에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말수가 적은 편이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또 무턱대고 찾아온 거라 화났나? 생각해 보니 연락하고 오라고 그렇게 강조했던 건 나였는데 내가 그걸 계속 어기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자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이런 상황이라면 사과가 우선일 것 같아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그리고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이전과 분명히 달랐다.
“에스티안 경?”
고된 토벌 작업으로 인해 살이 약간 빠져 핼쑥하고 창백해 보이는 얼굴은 그렇다 칠 수 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테니 피곤해 보이는 것도 그렇다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갑옷 안쪽으로 묻은 핏자국이나, 이전에 나를 구해 줬을 때 느꼈던 늑대의 기운이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약해졌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를 잡아 내 앞에 세우곤 그의 이곳저곳을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아델린, 갑자기 왜…… 엇.”
핏자국이 있는 갑옷 쪽을 살짝 누르니 무방비한 상태였던 에스티안의 미간이 바로 찌푸려졌다.
갑옷 바깥에 묻은 피는 마물의 피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안쪽 피는 그의 피라고밖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아 일부러 살펴본 거였는데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에스티안 경, 다쳤어요?”
“아, 아니야.”
“아니기는……!”
평소 미친 듯이 뿜어 대는 늑대의 기운이 잦아들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지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했다.
피가 날 정도로 다쳤는데 겉으로 티도 안 내고, 힘들면 차라리 나를 본 순간 그냥 오늘 말고 다음에 오라고 말해도 되는데 다 받아 주면서 아픈 걸 꾹꾹 참고 있고.
그걸 깨닫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머릿속이 아예 텅 빈 것처럼 되었다.
“얼른 문, 문 열어 줘요.”
그가 또 어디가 아플지 몰라 아무 데나 꽉 잡지도 못하고 나는 그의 손만 겨우 잡아끌었다.
마치 내 집에 들어가듯 그를 재촉해 안에 들어가서는 그를 소파에 앉혔다. 그러고는 얼른 가지고 들어온 것들을 헤집어 지혈용 약초와 상처 치료용 약초를 꺼냈다. 혹시 몰라 적지 않게 사 온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갑옷 벗어요, 빨리. 갑옷에, 피가, 에스티안 경의 피가…….”
“아델린, 괜찮으니까 침착해도 돼. 얼굴이 새하얘졌어.”
그 와중에도 에스티안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나와 끊임없이 눈을 마주치려 했다. 자기가 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약초를 잡고도 덜덜 떨리는 내 손을 꽉 잡는 에스티안의 손길에 나는 아예 눈물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가 갑옷을 벗자 그의 가슴과 배 쪽 대충 감은 붕대 위로 피가 새빨갛게 배어 나온 게 눈에 들어왔다. 붕대 자체도 이곳저곳에 감은 데다 피가 심하게 새어 나온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걸 본 순간 머리를 어딘가에 계속 부딪히는 듯 멍해져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지금 이 정도라면, 그 전에는 피가 훨씬 더 많이 났을 게 아닌가? 그렇게 피가 났다는 건 상처가 작지 않다는 거고, 그건 결국 에스티안이 어쩌면 큰 위험에 처했던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가 상처를 입었다. 그가 위험했다. 그가 죽을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떠올리니 숨이 잘 쉬어지지 않으면서 눈물이 계속 뚝뚝 흘렀다. 내 입에서는 아무 말이나 나갔다.
“왜, 왜 이렇게 많이 다쳤어요. 책임져야 할 기사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예요? 마물이 엄청 강했어요? 내가, 설마 내가 손수건에 수를 예쁘게 놓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에스티안 경. 나는 에스티안 경이 이렇게 다친 줄도 모르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숨 쉬는 것도 버거워하며 그의 이마로 손을 갖다 댔다. 상처 때문에 열이 약간 오르는 것 같았다.
더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떨리는 손으로 약초를 으깨고 붕대를 자르는데, 곧 에스티안이 내 양어깨를 누르듯이 잡았다.
“진정해, 아델린. 숨 천천히 쉬어. 이러다 쓰러지겠어. 그리고 손 다쳐. 제발 진정해. 난 아무렇지도 않아.”
몸을 약간 숙여 나와 맞춰 오는 그의 눈길과 단단한 목소리에 정신이 바짝 드는 것 같았다. 그래, 바보같이 울고 있어 봤자 다친 사람만 힘들다.
나는 눈가를 벅벅 닦고는 그의 상처 부위를 우선 소독했다. 약이 묻은 천이 살짝 닿을 때마다 그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기는 걸 보니 나는 또 뭔가가 마음에서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피가 왜 나. 내가 확인 안 했으면 아무 말도 안 해 줬겠죠, 에스티안 경은.”
“……아델린.”
나는 또다시 눈물이 차오를 것 같은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약초를 소독한 부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잘 흡수되도록 손으로 두드렸다.
세게 건드린 것도 아닌데 에스티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걸 보자 원망스러운 마음까지도 들었다.
“오늘 여기 들어와서 가장 먼저 꺼내게 되는 건 저번처럼 생크림 들어간 디저트가 될 줄 알았는데. 이게 뭐예요.”
입술을 이로 뜯다가 그것도 성에 안 차 꾹 깨물고는 잘라 둔 붕대를 상처 부위에 감았다. 상처 부위가 컸기 때문에 그의 가슴팍을 빙 둘러 붕대를 감아야 했다.
붕대가 너무 헐거워도 안 되고 너무 팽팽해도 안 되었기에 나는 손으로 몇 번이나 그의 몸을 앞뒤로 확인하고 직접 그 위를 두드려 봐야 했다. 에스티안은 내 손이 닿을 때마다 억누르듯 신음을 삼켰다.
“이렇게 아파하면서. 대체 왜 자꾸 고통을 참아요.”
“……아파서 그러는 게 아니야.”
“이미 상처 다 봤는데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모른 척할 테니까 아파하셔도 돼요.”
“그게 아니라.”
“네?”
낮게 한숨을 쉰 에스티안은, 붕대를 감고 매듭지은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느라 그의 몸 위를 배회하는 내 양손을 잡아 조심스럽게 내렸다.
“그대의 손이 자꾸 몸에 닿으니까 나도 모르게 반응하는 거야.”
……뭐라고?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반응한다고? 무슨 반응?
목 끝까지 차올랐던 눈물이 순간적으로 쑥 들어간 느낌이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곤 에스티안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너무 정신이 없어 자각도 못 했지만, 치료를 하느라 그는 상반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걸친 거라곤 내가 둘러 준 붕대뿐.
그제야 내가 그의 단단한 맨몸에 손을 이리저리 댔다는 걸 깨달았다. 아깐 분명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그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까지 지은 채였다.
“전에 그대가 죽을 뻔했을 때, 나도 사실 지금의 그대처럼 울고 싶었어. 숨도 못 쉴 만큼.”
이게 무슨 소리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또 오해할 만한, 설렐 만한 이야기를 들어 버린 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게 그대로 느껴져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내가 그때, 지금 그대가 느끼는 것과 같은 마음을 느꼈던 거겠지. 놀라고, 걱정되고. 그리고 그게…….”
그는 얕게 숨을 쉬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그대가 똑같이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서.”
“아…….”
“우리,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도 되나?”
에스티안은 상처를 입고 온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맑고 해사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빨개질 구석도 없는 내 얼굴은 끝도 모르고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그가 어딘가 나를 떠보는 것 같은 말을 했던 게 몇 번 되었는데, 지금은 그런 순간들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리 모태솔로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라고 해도 지금이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 대체 뭐라고 해야 그 뒤의 상황까지 이어지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에스티안 경, 우선은 치…….”
“이번에도 친구라서 그런 거라고 하려는 건가?”
아, 치료 먼저 하자고 하려던 거였는데.
그러나 에스티안은 이미 치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는 아까보다도 훨씬 깊고 진지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니 너무나 싱겁게도 내 마음속 결론이 내려졌다. 이미 나로서는 당연히 알고 있고 느끼고 있던 거였지만 그의 눈을 보고 확인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친구라서 그럴 리가 없지.
대체 어떤 친구가 다치면 이렇게 마음이 땅끝까지 처박히는 느낌이 나겠어.
어떤 친구가 다치면 그렇게 숨도 못 쉴 만큼 놀라겠냐고.
어떤 친구가 다치면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죽는 것까지 상상돼 눈물이 계속 쏟아져 나오겠어.
“……아니요. 친구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에스티안 경, 저는…….”
“아델린, 나는 그대를 친구로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에스티안은 어느새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그를 치료한다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를 자신의 옆으로 앉히고는 끌어안았다.
강한 포옹이 아니라, 사람이 옆에 있는지 없는지 그 정도를 확인하는 것같이 여리고 부드러운 포옹이었다.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그리고 그의 뜨거운 몸이 느껴져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는 곧 몸을 떼고는 한 손을 내 볼에 가져다 댔다.
“좋아해, 아델린. 좋아해 왔어, 계속.”
어느 때보다 포근한 푸른 눈동자.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오해할 가능성도 없는 말을 들으니 눈가가 다시 뜨거워졌다.
멈췄던 눈물이 미친 듯이 흐르기 시작했다. 흐려진 시야로 그 따뜻한 시선을 놓치고 싶지 않아 나는 약초가 묻은 손 대신 팔뚝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하도 많이 문질러서 눈 주변이 전부 얼얼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물론 에스티안은 내 팔을 잡아 내렸다.
“아델린, 눈이 새빨개졌잖아. 자꾸 그러지 마.”
끝까지 걱정스럽다는 눈빛을 한 에스티안은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두덩을 부드럽게 한번 쓸고는 그대로 입술을 댔다. 열기가 오른 눈꺼풀 위로 약간 온도가 낮은 그의 입술이 닿자 마음이 찌르르 울렸다.
그의 입술은 눈꺼풀 위에서 아래로, 코로, 볼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내 입술에 닿았다. 버드 키스처럼 시작한 입맞춤은 그가 내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핥아 올리면서 짙어졌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프렌치 키스인가?
모태솔로인 나로서는 난생처음 겪는 생경한 것이었다. 나는 바보처럼 에스티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만히 있었다.
분명 그도 아무런 경험이 없을 터였는데, 그는 키스를 참…… 잘했다.
아랫입술을 살살 무는 것을 시작으로 조심스럽게 그의 혀가 들어오더니 입 안의 여린 살을 부드럽게 쓸었고, 입천장을 두드리기도 하다가 미끄러지는 것처럼 흐르기도 했다.
그 느낌이 간질간질하면서도 뭔가 민망해 내가 혀를 다른 곳으로 두어 도망치려고 하면 그의 혀가 귀신같이 내 혀를 잡아서 옭아매고 휘감았다.
숨 쉴 타이밍 같은 걸 알 턱이 없는 나는 그저 에스티안의 키스를 받다가 어느 순간 숨이 차 헉헉댔고, 그걸 느낀 그는 곧 입술을 떼었다.
그러고는 짧게 입을 한 번 더 맞춘 뒤 눈물이 아직 맺힌 나의 눈꼬리를 부드럽게 핥았다.
그걸 왜 핥아! 싶은 마음이 불쑥 들다가도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서 스스로 신기했다.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리니, 따뜻하면서도 왠지 낮게 가라앉은 듯한 그의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씩 웃고는 다시 내 입술을 삼켰다.
그리고 조금씩 그의 입술은 턱선에서 잠시 멈추고, 맥박이 뛰는 목에서 조금 더 뜨겁게 머물다가 쇄골까지 내려갔다. 남의 신체가 한 번도 닿은 적 없는 부분 위로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숨이 흐르는 것 같았다.
홀린 듯이 에스티안의 키스를 받아 낸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의 입술이 천천히 내 어깨를 훑고 점점 내려가려고 하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 사람, 지금 다쳐서 내가 치료해 주고 있었잖아? 이게 뭐 하는 거야!
물론 그의 입술을 계속 받고 있는 건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황홀하고 좋았지만, 아직 치료는 덜 된 상태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떼었다. 그러자 곧 놀란 듯 상처받은 것 같은 눈빛으로 에스티안이 나를 바라봤다. 진짜 상처 입은 건 당신의 몸인데!
“에, 에스티안 경. 아직 치료가 덜 됐잖아요. 에스티안 경이 다친 것도, 아픈 것도 싫단 말이에요. 잠시만…….”
나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에스티안과 거리를 벌려 나머지 상처에도 약초를 바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내 양손을 붙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아, 손바닥은 감각이 무딘 신체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학창 시절에 선생님들이 고통이 그나마 덜한 손바닥을 때린 게 아니었던가.
그건 다 거짓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뜨겁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마자 손끝부터 간질간질해 손가락이 제멋대로 굽을 것 같았다.
“이게 치료가 아니면 뭐겠어, 아델린. 이것보다 더 좋은 치료는 없어.”
그가 내 손바닥에 입술을 그대로 댄 채 말을 했기에, 말할 때마다 손바닥이 웅웅 울렸다. 손바닥뿐 아니라 팔도, 가슴도 쿵쿵 울렸다.
평소 냉철하고 날카로운 모습만 보이던 황실기사단장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는 나른하면서도 순하고, 또 한없이 들끓고 있는 것 같았다.
에스티안이 다친 모습을 보고 갑자기 흥분했다가 그 감정이 가라앉고 다른 쪽으로 모든 감각이 곤두선 나는 긴장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그의 정중하고 집요한 욕망이 담긴 키스 세례를 받으니 곧장 지쳐 버렸고, 그도 내가 힘들어하는 걸 알았는지 더 격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오랜 토벌을 하고 다쳐 와서는, 몸에 붕대도 제대로 감지 않은 채로 내 상태만을 우선적으로 살피며 괜찮냐고 묻는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니.
에스티안이 나를 좋아한다니.
혼자 고민만 해서 뿌옇던 것들이 전부 선명해진 기분이었다.
너무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도 못하는 나를 한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며 그는 계속 신사다운 키스를 했다.
물론, 각 잡힌 정장을 입은 신사는 아니고 재킷을 열고 셔츠의 단추도 한두 개 푼, 나른한 숨을 내뱉는 그런 늑대 같은 신사의 모습이었다.
*
빠르게 했으면 30분밖에 걸리지 않았을 치료와 붕대 감기는 거의 2시간 가까이 걸리고 나서야 대충 마무리되었다.
아니, 사실 마무리가 된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지만 에스티안 본인이 싹 나은 것 같다고 입술을 부딪쳐 오기 일쑤였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열릴 줄 알았던 타르트 박스는 이제야 열린 채 테이블 위에 놓였다. 티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던 저번과는 달리 오늘 나는 그가 편히 앉는 소파에 함께 앉은 채였다.
그는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계속 내 머리카락, 속눈썹, 볼, 입술 같은 곳들을 슬쩍슬쩍 건드리고 있었다.
그 손길에 담긴 애틋함이나 따뜻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서 발끝에 절로 힘이 들어갈 것 같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간지러우면서도 좋았다.
그리고 겨우 눈을 돌렸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생크림 장식을 보자마자 내가 여기 왜 왔는지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에스티안을 오랜만에 만나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나 여기 엘 얘기 해 주러 왔지. 이게 무슨 주객전도된 상황인지.
나는 내 얼굴을 이곳저곳 톡톡 건드리는 그의 손을 잡아 내려 꽉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에스티안 경, 사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에스티안 경이 무사히 마물 토벌을 마치고 왔는지 알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하나 있었어요. 제가…… 에스티안 경의 잃어버린 동생을 찾았는지도 몰라요.”
놀라서 눈이 천천히 커진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에스티안에게 나는 그간의 일들을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엘을 처음 만나게 된 것부터 정원 일을 하게 한 것, 그리고 최근 치료를 통해 가족과 헤어진 그 순간 말고는 웬만한 것을 다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
에스티안이 말했던 생크림 들어간 디저트나 여러 꽃에 대해서 그녀도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까지 모두.
그가 내 얘기를 듣고도 아무 반응이 없자 나는 조금 무서워졌다.
잘못 얘기한 건가? 알아서 찾도록 했어야 하나?
아니, 그건 아닐 텐데. 그러면 내가 얘기하지 말고 아예 엘을 데려왔어야 하나?
혼란스러워진 나는 떠오르는 대로 입을 열었다.
“그, 이름이 에란티아라고 했죠. 아마 어릴 때여서 이름을 잘 발음하지 못해 엘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던 것 같아요.”
“…….”
“그리고 워낙 꽃을 좋아해서, 무언가 미래에도 아이한테 도움이 됐으면 싶어서 정원 일을 배우게 했는데…… 정원 일이 쉬운 건 아니라서, 손에 굳은살이 박여 있거나 상처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어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
“…….”
“사실 엘은, 아, 그러니까 에란티아는 공작 영애인 거잖아요. 공작가 딸인 걸 알았으면 정원 일은 안 시켰을 거예요……. 그리고…… 엇.”
고개를 숙인 채 얘기하던 나를 에스티안이 갑자기 확 끌어안았다. 양팔로 나를 강하게 감싸는 강한 포옹을 하고 있는 것치고 그가 왠지 떨고 있는 것 같아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그저 그의 등을 두드렸다.
“아델린. 그대는 정말…… 매번 나를 놀라게 해. 그것도 선물처럼…….”
“에스티안 경…….”
“고맙다는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 그래도 고마워. 그대는 나의, 공작가의 은인이야. 아니, 은인이라는 말로도 부족하지. 그대가 내 동생을 살린 거야. 어떻게…… 하.”
“아니에요. 그저 에란티아가 우연히 저와 만나게 되어서 지금까지 온 거예요.”
“그대가 에란티아를 받아 주지 않았다면…… 그 애는…….”
“에이, 그런 안 좋은 생각은 이제 하지 말아요.”
“그대 덕분에 못난 오라버니가 동생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어. 우리 부모님도 물론이고.”
“못나다뇨. 에란티아도 알아요. 에스티안 경과 블라머프 공작님, 그리고 공작 부인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자길 찾아 헤맸는지. 전혀 못나지 않았어요.”
“……그대는 늘 정이 많아서, 그대의 정이 나만을 향하지 않는 것 같아 화가 날 지경이었는데. 그대의 정이 내 동생에게도 향하고 있었다니.”
“에스티안 경…….”
에스티안은 한참을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는 감정을 추슬렀다.
그는 감정도 능숙하게 조절할 수 있는 기사 중의 기사라서, 눈물과 벅차오르는 마음을 견디고 참았을 것이다.
마음이 아린 포옹을 끝내고 그의 얼굴을 봤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으니까.
에스티안과 나는 제법 오래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는 늘 대화를 자주 했기 때문에 이전과 달라진 것은 크게 없었다.
아, 하나 있구나. 말이 좋아 이야기지 몇 마디 하다 말고 밑도 끝도 없이 에스티안이 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게 되었다는 거였다.
왠지 민망해 그만해도 될 것 같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푸른 눈을 반짝이며 ‘딱 한 번만.’이라고 말했고, 나는 당연히 거기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이 대체 몇 번이 된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에스티안 경, 이럴 거면 왜 그동안은 맨날 친구라고만 했던 거예요?”
내 말에 에스티안은 놀랍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다가 내 손을 잡아 깍지 꼈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대를 친구라고 생각한 적 없었어. 내가 그런 얘길 했던 건 전부 그대가 나를 친구로밖에 보지 않아서였지. 그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으니까.”
“좋아하지 않는다니…… 아니, 제가 얼마나 티를 냈는데요.”
“나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대의 얼굴이라도 보고, 그대가 말하는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늘 그대의 정원에 갔지. 보면 자꾸 웃음이 나고, 이렇게 그대에게 닿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서 차만 마셨지. 못 느꼈나?”
에스티안은 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살짝 눌러 벌어진 틈으로 그대로 자신의 입술을 내렸다.
그는 이제 어느 정도 키스를 하면 내가 힘들어하고 숨이 차오르는지까지도 완벽하게 파악한 듯했다. 내가 숨을 내쉬어야 할 때가 오면 알아서 입술을 떼었고, 몸에서 힘이 빠져 가면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아 줬다.
그 덕분에 나는 계속 그저 황홀하고 따뜻한 키스만을 받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다는 게,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아껴 준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조금 그러고 있다 보니 정말로 앞으로의 엘의 거취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엘이라는 명칭 자체가 에란티아의 애칭이라 그대로 그녀를 그렇게 불러도 되긴 했지만, 그녀의 거취에 대해서 확실하게 하는 건 이름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에스티안은 이틀 정도 뒤 우리 저택을 방문해 엘을 만나기로 했다.
그가 한 번 엘을 혼자 만난 뒤 어느 정도 계획을 좀 세운 다음 엘이 블라머프 공작가로 직접 가서 부모님을 만나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나는 당연히 엘을 본가로 보내 또래 공작가의 영애들처럼 좀 더 귀족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지만, 에스티안은 의외로 그녀에게 지금이 더 편안하다면 섣불리 그녀를 부르지 않을 것이라 했다.
사려 깊은 오빠의 모습 같아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는 그대로 얼굴을 내 쪽으로 가까이 붙여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사실 엘이 앞으로 어디서 지내느냐보다 더 큰 문제는, 엘의 존재에 대한 거였다.
블라머프가가 계속 찾아 헤매던, 9년 전 잃어버린 막내딸을 찾았다고 제국 전체에 알리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역시 정보력 강하고 대단한 공작가라며 블라머프가가 칭송받게 될 것이고, 귀족 특유의 교육만 더 받는다면 그녀는 원래대로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가 다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내가 도왔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메이스프릴 백작가의 위상도 높아질 것이다. 당연히 나 자체도 별다른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은 채로 명성도 명예도 높아질 테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런 가문의 위상과 더불어 여기에 늘 에스티안이 여동생을 찾느라 갈 곳 못 갈 곳 다 돌아다녔던 거라는 것까지 같이 알려진다면 그에게 씌워진 몹쓸 소문도 다 지워 버릴 수 있었다.
지워 버릴 뿐일까, 그에 대한 찬사가 한가득 쏟아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건 엘이 그렇게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리아나와 리아나의 엄마가 보일 반응이었다.
내 추측을 사실처럼 생각해 본다면, 그녀들이 분명 과거의 엘에게 무슨 짓을 했기 때문에 결국 이런 사달이 난 거였다. 한 번 그랬다고 두 번 안 그럴 리가 없기 때문에 섣불리 엘에 대해 소문을 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미 리아나의 계략에 한 번 죽을 위기도 겪지 않았던가. 내가 그들의 뒤를 파고 다녔다더라, 하는 얘기가 퍼진다면 이번에는 위기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러나저러나 이건 엘의 일이었다. 분명 나보다는 가족의 입장이 중요할 것 같았기에, 나는 에스티안에게 리아나와 리아나의 엄마에 대한 얘기도 전했다.
나를 죽이려 한 것도 리아나였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고, 오직 리아나와 관련해서만 우선 얘기했다. 원래는 너무나 내 추측에 가까웠던지라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차라리 말한 다음 그와 내가 같이 방도를 찾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 얘기를 들은 에스티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은 건 당연했다.
“그 영애와 엘리디트 백작 부인이 그딴 짓을 저지른 게 맞다면, 단순 처벌로는 끝나지 않을 거야. 귀족 납치와 더불어 살인미수죄가 적용될 테니까. 그리고 그와 별개로 블라머프가의 응징을 받게 되겠지.”
“그런데 아직 이렇다 할 확실한 무언가를 잡아내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섣불리 엘을 세상에 내보여도 괜찮을지…….”
여러모로 예민한 부분인 만큼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는 엘이 공작가에서 좀 더 편히 지내도록 하고, 그녀를 찾게 되었다는 말만 당분간 퍼뜨리지 않았으면 해요. 물론 엘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전적으로 따르는 게 저는 좋다고 생각하지만요.”
에스티안도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말대로 그편이 훨씬 낫겠어. 자세한 얘기는 엘과 먼저 나눠 보면 될 테니까.”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나 싶었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내게는 엘의 일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에스티안에 대한 소문.
이전에는 내가 어떻게 손쓸 수 없는 거라고만 생각해 주변의 허튼소리들을 들으며 속만 부글부글 끓었지만, 지금 그와 마음을 서로 확인한 나는 그렇게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옆에 있던 에스티안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런데 엘을 찾았다는 것을 당분간 알리지 않는다면, 에스티안 경에 대한 나쁜 소문도 계속 그대로 더 남아 있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아아.”
“저는 에스티안 경이 오해받고 이상한 얘기를 듣는 게 사실 싫어서요……. 엘 얘기는 어차피 하지 않으면 되니까, 제가 그냥 에스티안 경에 대한 소문 다 거짓말이라고 얘기하고 다닐까요?”
나는 진심으로 말한 거였는데 에스티안은 낮게 웃고는 내 입술에 잘게 키스를 흩뿌렸다. 키스를 하면서도 계속 옅게 웃고 있었다. 이거 뭐 말도 제대로 안 듣고 있는 거 같은데.
“괜찮아. 그러다 괜히 그대에게 안 좋은 얘기가 씌워지면 어쩌려고. 그건 내가 참을 수 없어. 이젠 그런 일이 생기면 정말로 돌아 버릴지도 몰라.”
“저는 어차피 사교계 활동도 많이 안 할 거라 괜찮을 텐데요……. 아, 물론 에스티안 경의 누명을 벗기는 활동은 하겠지만…….”
“소문이 오해라는 건 그대만 알면 충분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 봤자 아무 의미가 없어.”
그는 어느새 자신의 입술을 내 귓불로 옮겨서는 이와 혀로 톡톡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곳까지 입술을 댈 수 있구나. 생경하기 짝이 없는 느낌에 귓가부터 목덜미까지 모든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아 찌릿했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애초에 소문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했다. 그저 동생, 그리고 부끄럽지만 나 정도가 그의 관심사에 드는 것 같았다. 어쩐지 우쭐한 마음이 들어 나는 실실 웃음이 나왔다.
“진짜죠, 그 말? 사실 에스티안 경은 너무 멋있어서…… 그런 소문이라도 있어야 다른 여자들이 접근 안 할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인기 정말 많은데.”
내 말이 뜻밖이었다는 듯 눈이 커진 그는 이가 살짝 보일 정도로 목울대까지 울려 가며 웃더니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대고는 웅얼거렸다.
“그러는 그대야말로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도 더 계속 저택에만 있으면 좋겠어. 이기적이고 못된 바람이지.”
“아핫, 왠지 부끄러워지는 말이네요.”
“정말이야. 사냥제 때 그대를 보던 놈들의 눈빛이 아직도 난 잊히지가 않아. 그놈들은 이후에 전부 강도 높은 훈련을 하다가 지쳐 쓰러지도록 만들었어. 기사단에서 방출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라고.”
“네에? 에이, 말도 안 돼요.”
미간에 주름까지 생긴 채로 에스티안은 그때를 생각하며 으르렁거렸다. 그 반응이 그답지 않으면서도 나만 아는 그의 모습인 것 같아 귀여워서 나는 또 웃고 말았다.
“그래도, 이건 농담이 아니에요. 저는 항상 에스티안 경의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너무 화가 난단 말이에요. 그냥 그런 거 다 거짓말이라고만 얘기하면 되잖아요.”
“그대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래도 돼. 혹시 그대에 대해 험담하는 자가 있거든 내가 전부 해결하면 되니까.”
“그러면 에스티안 경한테 괜히 안 좋은 소문이 또 나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건…….”
“그런 건 상관없어. 제발 나한테만 이렇게 상냥하고 따뜻한 거라고 말해 줘, 아델린.”
“……제가 저택 안에서나 밖에서나 항상 만나는 건 에스티안 경뿐이에요.”
“영광이야.”
에스티안은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계속 키스했다. 몇 번이나 그가 여기에 키스했지만, 그의 입술을 받을 때마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온몸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문제라더니, 아무것도 몰랐던 내가 그의 모든 몸짓에 이렇게 반응하게 될 줄이야…….
심지어 지금 그는 다친 사람이 아닌가. 본인이 괜찮다고 우겨도 다쳐서 힘들 것은 분명했다. 그런 상태인데도 이 정도로 애정 표현을 한다면, 이후에는…….
아무것도 몰라 멋대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 얼굴은 곧 달아올랐고, 그걸 놓치지 않은 에스티안은 붕대가 벌써 헐거워진 줄도 모르고 내 머리카락부터 얼굴 곳곳에 입술을 꾹꾹 눌렀다.
나는 에스티안을 슬쩍 밀어 앉힌 뒤 상처를 확인하고 약초가 더 필요한 곳은 약초를 바르고, 붕대가 더 필요한 곳엔 붕대를 감았다. 물론 이것도 10분이면 끝날 일이었지만 1시간이 걸렸고, 끝났을 때는 다친 에스티안보다 내가 더 지쳐 있었다.
*
‘진짜로, 진짜로 그 돈을 다 주시는 거죠?’
‘그래, 그렇단다. 네가 시킨 일만 잘하면 지금 여기에 세 배를 얹어서 다 네게 줄 거야. 그러니까 무조건 성공해야 해. 그리고 또 내가 뭘 기억하라고 했지?’
‘……가족들에게 알리지 말고, 만약에 들켜서 정체를 의심받거나 배후를 캐려는 사람이 있으면 목숨을 끊으라고요.’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구나. 들킬 리는 없으니 네가 목숨을 끊을 일도 없을 거야. 그건 정말 만약의 경우란다. 그리고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너희 가족은 내가 책임질 거야. 네가 황실의 훌륭한 기사가 되어서 중책을 맡는 바람에 집에 못 가게 되었다고 둘러대 전한 다음, 내가 정기적으로 돈과 식량을 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알겠지?’
‘……네. 저는 정말 아가씨만 믿을게요.’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계획은 순조로웠다. 리아나는 숲 안쪽으로 아델린을 보내는 데 이용할 평민 하나를 완벽하게 구슬린 상태였고, 신전의 사제 하나까지 매수해 마물도 풀 준비를 해 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차에 그 평민까지 무사히 태우고 와 사냥터에 그를 투입하는 것까지도 성공했다.
‘작정하고 튀는 옷까지 입고 왔다 이거지. 게다가 자기 혼자 생각 있는 사람인 척 아주 훈계를 하고.’
아델린이 집 밖으로 잘 안 나오게 된 뒤로 리아나는 사교계 내 최고 위치에서 군림하며 지내고 있었다. 원체 성정이 약하다는 소문이 나 있었기에 그녀는 드세게 굴거나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수많은 영애를 자신의 발아래에 두었고, 여러 영식으로부터 구애를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쓴 덕에 그녀가 그렇게 사교계의 여왕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쉽게 눈치채는 자도 없었다.
‘걘 징표도 주지 않았는데 대체 왜 황태자 전하께서 계속 보고 있느냔 말야.’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황태자도 자신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건만, 사사건건 중요하다 싶을 때마다 자신이 아닌 아델린이 주목받는 상황이 고까웠다.
게다가 최근 들어 아델린이 황실기사단장과 점점 친해지는 것 같아 리아나는 속이 새까맣게 탈 지경이었다.
‘기사단장님께서 맨날 아델린 영애를 보러 간다던데요? 물론 여자관계가 안 좋으신 분이지만, 아델린 영애에게 하는 건 좀 달라 보인다는 얘기도…….’
이미 사교계에도 소문이 파다했다. 사냥제가 시작되기 전에도 아델린은 기사단장과 함께 있으면서 무슨 얘기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델린은 황태자에게 주지 않았던 징표도 그에게는 주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로 둘이 친할 줄은 몰랐는데. 매번 둘이 무슨 얘길 하는 거지?’
리아나는 아델린이 황태자의 시선을 은근히 끌고 있다는 것보다도 그녀가 에스티안과 밀접해 보이는 것이 신경 쓰였다. 둘이 어느 정도의 관계인지를 알 수가 없었기에, 리아나는 사냥이 진행된 뒤 다른 영애들과 대화하는 동안 아델린을 떠보려 했다. 그녀는 일부러 대화 주제가 바뀔 수 있도록 단어를 흘렸다.
‘……에스티안 블라머프 기사단장님이 그중 가장 멋지신 것 같죠.’
쓸모 운운하며 잘난 척하고 다른 영애들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던 아델린은 기사단장의 이름을 듣자마자 눈을 굴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극도로 예민해진 리아나만큼은 아델린이 당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지 주의만 기울이게 했는데도 저 정도의 반응이란 말이지.’
원래 리아나는 황태자가 부른다는 핑계를 아델린에게 대서 그녀를 숲속으로 유인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아델린의 반응을 보니 굳이 황태자 핑계를 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황태자 전하의 이름을 팔아먹는 거 같아 마음이 아팠는데 차라리 잘된 것 같았다.
‘기사단장님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아무것도 모른 채 기사단장의 이름만 들어도 표정을 못 숨기는 꼴이라니, 리아나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표정을 갈무리하며 아델린이 스스로 숲 안쪽까지 가도록 속삭였다.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아델린을 보자 애써 참았던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를 미리 준비한 장소로 보내는 것까지도 무사히 성공하고 나니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그녀는 잔뜩 굶주려 있던 마물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지리라.
사냥제가 거의 마무리되고 나서도 아델린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리아나는 속으로 쾌재를 지르고 있었다. 이제야, 드디어 그녀를 눈앞에서 치웠다는 생각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황태자 전하도 이제는 오롯이 자신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었고, 기사단장과 그녀가 붙어 있는 꼴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리아나는 장밋빛 미래를 그렇게 그릴 수 있었다.
멀리서 기사단장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난 아델린을 보기 전까지는.
‘어떻게 된 거지? 일부러 사냥이 진행되는 곳과 정반대인 곳으로 유인한 거였는데. 게다가 진짜로 기사단장을 만나서 함께 오다니.’
리아나는 심장이 쿵쿵거려 아델린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손톱만 물어뜯던 것을 멈추고 겨우 입을 떼어 돌아온 아델린에게 말을 건넸을 때, 그녀가 바보 같은 대답을 하는 걸 들었는데도 떨리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내가 알려 줘서 기사단장을 만났다고 하는 걸 보면 쟨 모르는 게 확실한데.’
설상가상으로 황태자 전하까지 놀라서 아델린에게 달려 나온 꼴을 보니 리아나는 더더욱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기사단장은 자신의 코앞까지 와서 감정 하나 들어 있지 않은 말투로 추궁을 했다. 감이 좋은 저 사람에게 자신이 까딱 잘못 말해서 괜히 감시받게 되었다가는 큰일 날 것이었다.
‘괜히 그의 시선 아래 있다가는…….’
애초에 리아나는 평민과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의 인상착의를 전부 말해 버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기사단장이 무섭냐며 손을 잡아 오는 아델린의 멍청함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내가 그와 왜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무서워하는지도 모르면서 착한 척은.’
자신에게 불똥이 튈 것을 걱정한 리아나가 평민에 대한 묘사를 아주 자세히 한 덕에 그는 금방 잡혔다. 그리고 얼마간의 고문을 거쳐 결국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황실에서 아델린과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순진한 평민은 리아나를 철석같이 믿고 정말로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혼자 모든 것을 끌어안은 채 죽은 것 같았다. 물론 리아나가 그 평민의 가족을 다시 보는 일은 없었다. 더 이상 파헤칠 것도 없어 보였고, 아델린이 그걸 캐 볼 것 같지도 않았기에 리아나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와 황태자와의 티타임에서도 자신을 황태자의 짝으로 못 박는 것처럼 얘기했기 때문에 그녀는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델린과 기사단장이 연인 관계가 된 것 같다는 사교계 영애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리아나의 불안감은 다시 가중되었다. 어차피 매번 근거 없는 소문만 떠드는 영애들이라 그걸 무시하려고도 했지만, 블라머프 공작가 측과 메이스프릴 백작가 측에서도 모두 둘이 연인임을 알고 있다는 얘기까지 돌자 그녀는 몸이 떨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연인이라니, 아무리 둘이 붙어 있는 적이 많았다고 해도 벌써 연인이라고?’
연인이라면 그들은 앞으로도 더 자주 붙어 있을 것이고, 더 대화를 많이 나눌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리아나는 9년 전,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가 저질렀던 잘못이 이미 다 밝혀진 것 같은 공포감에 휩싸였다.
*
“명심하렴, 리아나. 이번 일만 잘하면 리아나 네가 황태자 전하의 신부, 황태자비가 되는 거야. 알겠니? 아무리 똘똘하다고 해도 걘 겨우 대여섯 살밖에 안 된 애야. 그렇지 않니?”
“네에. 그냥 혼자 나오게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할 수 있어요.”
엘리디트 백작 부인의 말을 들은 어린 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한다는 게 좋지 못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황태자의 신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기회를 자신만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에란티아의 앞에 섰다.
“에란티아, 이따 나랑 둘이서만 시내 분수대 쪽에 있는 큰 가게로 장난감 같이 사러 가지 않을래?”
“저희 둘이서만요? 안 돼요. 어른들이 안 된다고 하실 거예요.”
“아까 내가 너희 어머니와 아버지께 허락받았어. 나와 우리 집 기사님이 같이 가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더니 그렇게 다녀와도 된다고 하셨어.”
“와아…… 진짜요?”
“그래. 그러니까 우리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장난감 사고 놀다 오자. 부모님이 안 사 주시는 불량 식품도 사 먹고!”
“아아, 어머니께서 허락해 주셨구나. 으응…… 그래도. 우리끼리만 가면 너무 무섭지 않을까요?”
“하나도 안 무서워! 우리 둘이 같이 있고, 또 우리 집 기사님도 있는데 뭐가 무서워? 그분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거야.”
“아, 정말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 부모님께는 내가 말했으니 또 말 안 해도 될 거야. 나만 믿는다고 하셨거든. 우리 기사님도 계시고, 지금 그대로 가면 돼. 가자!”
리아나는 계획적으로 에란티아에게 접근해 친해져 좋은 언니 흉내를 냈다. 오빠뿐인 그녀에게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언니는 매우 새로운 존재였고, 에란티아는 금방 마음을 열었다.
리아나는 손쉽게 그녀가 가족이나 호위 기사, 시녀 등에게 다시 물어보지 않고 바로 갈 수 있도록 달콤한 말로 속삭였다. 에란티아는 아무런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겼고, 리아나는 속으로 쾌재를 지른 뒤 그녀를 이끌고 시내의 잡화점으로 갔다.
“우와…… 이렇게 큰 잡화점이 있었네요. 사람도 정말 많다.”
“나도 처음 본 지 얼마 안 됐어. 여기 항상 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오게 될 줄은 몰랐지 뭐야. 에란티아, 너와 함께 오게 되어서 너무 기뻐.”
“저도요! 저도 너무 기뻐요!”
둘은 잡화점 내부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여러 장난감들을 보고는 즐겁게 웃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때, 리아나는 인파에 휩쓸리는 척 에란티아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다.
“어? 어디 갔지?”
리아나가 없어진 것을 깨달은 에란티아는 혼자 남았다는 공포에 질려 울먹거리며 잡화점 내부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리아나를 찾을 수 없었다.
무서워서 집에 가고 싶었지만, 자신을 직접 데리고 와 준 언니를 잃어버린 상태로 혼자서만 집에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계속 잡화점 안을 몇 바퀴고 돌았다.
“이런, 에란티아 영애. 여기 계셨군요.”
그러다 에란티아는 곧 리아나와 함께 왔던 호위 기사를 만날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혼자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드디어 벗어났다는 생각에 그녀는 울음이 쏙 들어간 채 그에게 매달렸다.
“어, 기사님!”
“리아나 아가씨가 영애를 잃어버렸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리아나 아가씨는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계세요. 저를 따라서 가시면 됩니다.”
“네, 네!”
리아나가 먼저 나가 있다는 말에 에란티아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애초에 자신과 리아나와 함께 잡화점에 들어왔던 기사였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잡화점을 빠져나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골목을 지나, 점점 길이 좁아지고 어두워져 꽤 으슥한, 퀴퀴한 냄새까지 나는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는데도 에란티아는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저, 기사님. 리아나 언니가 멀리 가 있는 거예요?”
“아닙니다. 곧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입이 심심하시면 사탕이라도 드시겠습니까?”
“우와, 네! 감사합니다!”
기사가 내민 사탕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먹은 에란티아는 곧 축 늘어져 의식을 잃었다. 기사는 에란티아를 어깨에 둘러메곤 유유히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갔다. 골목에서 대로로 이어지는 사이의 구석에 도달했을 때, 거기에는 리아나와 엘리디트 백작 부인이 서 있었다.
“약은 언제 먹였어? 효과는 한 세 시간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어. 확실히 기절한 게 맞지?”
“예. 30분 정도 전에 먹었고 여태까지 의식이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수고했어. 저쪽에 정박된 배 옆에 선원이 있을 거야. 그에게 애를 넘겨.”
기사는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배 쪽으로 갔다. 겉으로는 물건을 가득 실은 상선으로 보이지만, 안쪽으로는 각지에 사는 귀족가에 노예로 팔 아이들을 이곳저곳에서 납치해 와 태운 일종의 불법선이었다. 그는 선원에게 돈이 가득 든 주머니와 에란티아를 동시에 넘기려 했다.
“으아악!”
그러나 그 순간 에란티아가 갑자기 정신을 차렸고, 도망가려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다가 손톱으로 기사의 눈 주변을 확 긁어 버렸다.
“이 계집애가!”
기사는 곧바로 에란티아의 뺨을 강하게 내려쳤고, 그 충격으로 그녀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는 에란티아의 볼을 툭툭 쳐 그녀가 완전히 의식이 없음을 확인한 뒤 선원에게 감시 잘하라는 협박을 남기고는 다시 리아나와 백작 부인이 있는 곳으로 갔다.
“뭐야, 깬 거야? 응? 약 먹였다며!”
기사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자 백작 부인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잘못해서 에란티아가 정신을 차려 자신들을 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에 그녀는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그녀는 얼른 건물 벽의 그림자 때문에 어두컴컴한 곳으로 리아나를 밀어 넣었다.
“잠시 정신을 차렸던 것 같지만, 곧 다시 기절했고, 의식 없는 것을 분명히 확인한 다음 확실하게 선원에게 넘겼습니다.”
“똑바로 처리한 거 맞지? 응? 아아, 차라리 죽이는 게 나을 뻔했을까?”
몇 번이나 기사를 다그친 백작 부인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다가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배어 나온 식은땀을 닦았다. 배가 출항하려면 3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기에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백작 부인은 아예 속 편하게 아이를 아예 죽여 없애 버릴 생각도 했지만, 괜히 과한 짓을 했다가는 꼬리가 잡힐 것 같았기에 그것까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대로 아이가 배를 타고 떠나면 다시는 이쪽으로 오지 못하리라.
그렇게 에란티아가 떠나고 나면 황태자의 신붓감이 될 가능성이 높은 귀족 영애는 사실상 리아나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 생각을 하며 백작 부인은 리아나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리아나, 이제 정말로 황태자비가 되는 거야. 리아나만큼 제격인 아이가 또 어디 있다고.”
“어머니, 제가 정말로 황태자 전하의 신부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진짜죠? 저 잘한 거예요?”
“그럼, 네가 저 애를 데려온 덕에 일이 잘되었단다. 이제 계속 황태자 전하를 뵈러 황궁 방문도 하면서 신부가 될 준비를 하면 돼.”
한편, 배 안쪽의 구석에 처박힌 에란티아는 머리가 얼얼한 충격으로 눈을 떴다. 졸린 것처럼 눈꺼풀이 무겁게 자꾸 내려왔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그대로 잠들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극기로 쏟아지는 잠을 참았다.
배 안에는 자신과 같은 아이들이 아주 많았는데, 하나같이 멍하고 생기 없는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소름이 돋은 에란티아는 뒷걸음질 치곤 손을 더듬어 살핀 뒤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이들이 있던 곳을 벗어나니 물건이 잔뜩 실려 있고 거친 뱃사람들이 가득 탄 공간이 나왔다.
“뭐야, 이 애는? 저쪽 칸에 있어야 되는 거 아냐? 어떻게 나왔어? 누가 문 안 잠가 놨어?”
“잡아서 던져 버리기 전에 지금 들어가라. 좋은 말로 할 때.”
“야, 잠깐만. 쟤는 좀 예쁘장하지 않냐? 입은 옷 좀 봐. 어떻게 저런 애가 들어왔지? 귀족 같잖아?”
“귀족 자제가 이런 델 어떻게 오냐?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런데 네 말대로 좀 예쁘장하네? 어이, 너 이리로 와 봐라.”
“야, 이 새끼야. 먼저 발견한 건 난데 왜 네가 더 신이 나서 그래? 야! 이쪽으로 오라니까!”
험상궂은 얼굴로 입맛을 다시며 더러운 말들을 내뱉는 뱃사람들을 보자 겁이 난 에란티아는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불러도 안 오는 자신을 향해 점점 그들이 다가왔고, 그 순간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란티아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지금이 아니면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속도가 붙은 배는 얕은 물 쪽을 지나쳐 점점 육지와 멀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무작정 배의 위쪽으로 쏜살같이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체구가 작고 빠른 그녀는 보통 성인이 올라갈 수 없는 곳까지 잽싸게 올라갔고,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뱃사람들은 놀라서 그녀를 따라 위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움찔거리고 있는 상태였다.
“어어, 뭐야! 쟤 잡아! 뭐 하는 거야! 야, 네가 저기 좀 올라가 봐!”
“저길 어떻게 올라가! 이런 젠장할.”
“근데 저기 가 봤자 떨어지면 익사할 텐데 그냥 놔두면 되는 거 아냐?”
“야! 어딜 도망가!”
풍덩!
에란티아는 어느 정도 높이까지 올라갔을 때 그들이 당황한 틈을 타 아예 바다로 뛰어들었다. 온몸에 힘이 빠진 그녀가 그저 가만히 있자 곧 몸이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이미 배는 속력이 어느 정도 붙어 큰 소음과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키며 앞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이렇게 물속으로 뛰어들지 못했을 것이었다.
에란티아는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모두 짜내 육지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까의 항구 쪽으로 가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아직 있을 것 같았기에 거기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그만큼 에란티아는 물속에서 몸을 더 움직여야 했고, 한참 뒤에 겨우 육지에 몸이 닿을 수 있었다. 엎드린 채 터덜터덜 기다시피 해서 바다 쪽을 등지고 나와 외진 골목 안으로 접어들었을 때 그녀는 완전히 기절해 버렸다. 그녀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약 열 시간이 지난 뒤였다.
*
“기분이 어때요, 엘?”
“너무 긴장돼요. 처음으로 가족을, 오라버니를 만나는 거잖아요. 너무 떨려요! 말도 제대로 못 하면 어떡하죠?”
“오라버니도 엄청 떨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일단 따뜻한 차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오라버니를 데리고 올게요.”
둘에게 서로를 찾았다고 알린 지 며칠 뒤, 에스티안의 상처가 조금이나마 아물게 된 시점에서 나는 그들을 저택 정원에서 만나게 하기로 했다. 서로가 긴장하면서도 궁금해하는 동안 그들에게 힘을 불어넣고 하는 건 내 몫이었다. 엘은 바깥 정원에 미리 앉아 기다리고 있었고, 에스티안은 평소보다 근무를 빨리 마치고 와서 저택 내 별실에 가 있는 상태였다.
“엘이 떨리고 긴장된대요. 에스티안 경도 그렇죠?”
“응.”
날카로운 얼굴을 하고 제복까지 차려입고는 순순히 대답하는 그가 귀여워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확실히 평소보다 굳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기에 힘을 좀 빼 주고 싶어 계속 말을 걸었다.
“엘도 대부분 기억을 하고 있고, 저도 얘기를 충분히 해 두긴 해서 아마 막 어색하거나 아예 에스티안 경을 경계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그는 심각한 얼굴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
“단지 바깥으로 많이 다니지 않아서 아직 사람에 대해, 또 남자들에 대해 조금 겁이 많은 상태인데, 에스티안 경은 사실 엄청 따뜻한 사람이니까 엘이 무서워할 리도 없고요.”
“나에 대해 그렇게 말해 주는 건 아델린 그대뿐이야. 그대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벅찬데 그대는 나에게 잃어버렸던 가족까지 찾아 줬지. 아직도 믿기지 않아.”
에스티안은 아주 천천히 나를 끌어안았다. 살살 두드리는 듯한 부드러운 포옹과 작게 내쉬는 한숨에 절로 내 팔에는 힘이 들어갔다. 그냥 떨린다, 궁금하다 이 정도인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사실 내심 동생 찾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나도, 어머니나 아버지도. 놔줘야 하는데 우리가 못 놔주고 있는 거라고도 생각했지.”
“에스티안…….”
“백방으로 다니면서 이번엔 어떨까, 여기는 어떨까 하면서도 계속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정말 몹쓸 오라버니지.”
“…….”
“언젠가 나를 보게 될 그 애가 너무 늦었다고, 더 이상은 알고 지내고 싶지 않다며 원망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어.”
낮은 한숨과 함께 얘기하는 에스티안의 말을 들으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랜 기간의 생이별이 준 감정은 생각보다 몹시 컸다. 그가 조금 진정하고 깊은 숨을 내쉴 때까지 나는 그저 가만히 그의 등을 두드렸다.
“점점 그런 생각이 커졌지.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그대가, 이렇게…….”
그는 고개를 젓다가 쉴 새 없이 마른세수를 했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다 뒷목을 꽉 누르기도 했다. 동생을 찾았다고 말을 전했을 때 크게 나지 않았던 실감이 이제야 나는 듯 거의 혼이 나가 보였다.
어쩐지 에스티안이 엘보다도 더 긴장한 것 같아서 안쓰러웠다. 나는 차가워진 그의 손을 깍지 껴 잡곤 최대한 그와 눈을 마주치며 얘기했다.
“에스티안 경도 그렇고 블라머프가 분들도 그렇고, 얼마나 힘들게 지내 왔는지 엘도 다 알아요. 언젠가 이렇게 만날 날을 엘이 얼마나 기대했는지 몰라요. 엘을 찾을 수 있어서 저야말로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하고요.”
에스티안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짧게 내게 입을 맞췄다.
“하나도 안 늦었어요. 이제 얼른 가면 돼요. 저기 정원에 엘이 앉아 있거든요. 둘이 대화 좀 나눈 다음에 나는 낄게요.”
그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고, 우리는 함께 정원으로 향했다.
에스티안의 불안감이 나한테까지도 크게 느껴져, 그 순간 사실 나조차 혹시라도 둘이 남매가 아니라면, 하는 씁쓸한 상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어딘가 묘한 확신이 있었다. 그들과 나눴던 얘기나 상황에, 말도 안 될지라도 내 감까지 더했을 때 그들이 분명 가족이 맞다는 확신이 분명 있었기에 좀 더 의연하게 걸을 수 있었다.
우리가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엘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점점 그녀의 앞으로 갈수록 놀라서 잔뜩 커진 그녀의 눈이 제일 먼저 보였다.
에스티안을 슬쩍 보니 그도 긴장감조차 잊은 듯 매우 놀란 듯한 얼굴이었고,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재차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오라버니!”
어느새 눈물이 터진 엘이 먼저 에스티안에게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에스티안도 곧바로 그녀를 마주 안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맞죠. 저 기억났어요. 맨날 어머니한테 단것만 먹는다고 혼나고, 오라버니랑 정원에서 놀다가 늦게 들어가고…….”
“에란티아. 엘. 진짜 내 동생이 맞구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엘. 내 동생…….”
에스티안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도 울컥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계속 눈물을 흘리고 울먹이며 얘기하는 엘을 달래 주는 걸 보니 정말 오빠는 오빠였다. 엘도 에스티안의, 자신의 오빠의 마음을 아는지 그의 어깨를 작게 두드렸다.
저렇게 서로를 생각하고 아끼는 남매가 어쩐지 나의 객기 어린 말 때문에 힘겹게 떨어져 지냈던 것 같아 입 안이 썼다. 아직 갈 길이 멀다고는 해도, 드디어 그들이 제대로 된 삶을 찾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에 내가 책임을 다해 도울 수 있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에스티안은 양손으로 엘의 얼굴 가득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아 주곤 그녀를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섣불리 그 앞에 앉지 못하고 엘의 손만 잡고 있는 그를 보자 이제 정말로 둘만의 대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기에 나는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다.
물론 잠시 자리를 비우기 전 작은 선물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가씨, 이건…….”
나는 작은 병에 프리모스 꽃 몇 송이를 꺾어 넣고 물을 채운 것, 그리고 생크림과 계절 과일이 켜켜이 쌓인 파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아무리 약한 꽃이라 해도, 둘이 대화하는 동안만큼은 시들지 않고 계속 피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 파이는 더 말하지 않아도 둘 다 엄청 좋아하죠?”
한쪽 눈을 찡긋하며 에스티안과 엘을 번갈아 보았다. 엘은 아직 물기가 어려 빛나는 눈으로 감동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에스티안은 곧장 나를 끌어당겨 입술을 맞췄다. 그냥 꾹 눌렀다 떼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가 갑자기 아랫입술을 살짝 물어 왔다.
아니, 동생 앞에 두고 뭐 하는 거야!
곁눈질로 엘을 보니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라는 손짓을 했다.
엘은 또 왜 저런 반응이야!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나는 슬쩍 얼굴을 떼었다가 발꿈치를 들어 올리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 버드 키스를 했다.
“동생을 만나 놓고 뭐 하는 거예요. 엘이 보잖아요…….”
“그대의 위로 덕분에 겨우 엘을 만나러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어. 그걸로도 충분한데 이런 것까지 언제……. 그대 때문에 나는 늘 놀라기만 하는 것 같다고.”
에스티안은 옅게 웃더니 내 손에 입을 한번 맞추고는 엘을 향해 얘기했다.
“내 연인이 우리를 이렇게 만나게 해 줬어, 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떼며 얘기를 시작하려는 그들을 놔두고 잠시 방으로 들어왔다.
창가에서 얼핏 보니 엘이 에스티안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기도 하고, 에스티안이 그에 씩 웃기도 하는 등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도 자세히 얘기해야 할 거고, 앞으로의 거취 문제 같은 것에 대해서도 제대로 대화해야 할 것이다. 사실 그런 것보다도 그저 오래 헤어져 있던 가족을 다시 만난 그 감정 자체를 충실하게 느끼는 게 우선이겠지. 드디어 그들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아 내 마음도 후련했다.
안나가 찻주전자를 다섯 번 정도 새로 갖다주고 초를 두 번 정도 갈아 끼울 때까지 남매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어느새 해도 다 졌고 밤바람도 쌀쌀해진 것 같아 나는 숄을 챙겨 정원으로 나갔다.
“얘기는 잘 나누고 있어요? 엘, 혹시 추우면 이거 덮어요.”
“우아, 감사합니다. 아가씨, 정말…… 감사해요. 아가씨 덕분에 저는 거리에서 지내던 신세도 면했고, 좋아하는 꽃과 나무들을 보면서 지낼 수 있었고, 이렇게 가족까지 찾았어요. 정말…….”
“아이고, 너무 울면 머리 아파요. 기쁜 날이니까 울지 말아요.”
에스티안은 엘에게 리아나와 리아나의 엄마가 약간 수상하다는 현재 상황까지도 다 얘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도 당분간은 자신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고 말했다.
“제가 아직 그때, 딱 혼자가 되었던 순간의 기억은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어차피 계속 치료사분과 대화하며 기억들은 찾을 거니까요.”
엘은 오늘부터 블라머프가의 저택에서 지내기로 했고, 기억을 찾기 위해 받아 온 치료도 이어서 받기로 했다. 대신 블라머프가의 주치의가 전담하게 될 것이었다.
“사실 정원에서 계속 일하는 것도 저는 좋은데요…….”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이거였다.
엘은 우리 저택의 정원에서 계속 일을 하고 싶어 했지만, 공작가 영애가, 그것도 그냥 공작가도 아니고 블라머프가 정도 되는 곳의 막내딸이 손 다칠 위험을 감수해 가며 백작가의 정원에서 일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에스티안에게 엘이 공작가에서 보다 전문적이고 이론적으로 식물에 대해 공부할 수 있도록 개인 교습을 받는 것을 제안했고, 그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리고 더불어 혹시라도 그녀가 공부하다가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녀가 원하는 선에서 첫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 우리 저택의 정원사 할아버지께 얼마든지 와서 질문할 수 있도록 얘기해 두었다.
모든 대화를 나눈 뒤, 블라머프가의 마차를 타기 직전까지 엘은 내게 몇 번이고 인사를 건넸다.
“아가씨한테 대체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엘이 가족을 찾고 기뻐해서 내가 더 좋죠. 아, 그리고 아가씨라는 호칭도 이제 그만 써요. 나는 앞으로 엘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사실은 영애나 공녀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텐데…… 사실 우리 사이에 그건 너무 딱딱하잖아요.”
“으익, 공녀님이라뇨! 그냥 엘이라고 불러 주세요. 저는 언니라고 부를게요.”
“언니…… 엘한테 언니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
“저도 너무 좋아요! 아, 그런데 저보다 오라버니가 아마 언니를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제가 언니를 좋아하는 마음이 적다는 건 절대 아니고요!”
“아이, 그건 당연히 알죠.”
“아까 오라버니와 얘기할 때도 오라버니가 언니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언니가 발 벗고 나서 준 덕에 우리가 이렇게 만났고, 오빠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했거든요. 게다가 언니가 너무 사랑스럽고 좋다고…….”
“으아, 에스티안 경이요?”
“그런 건 말하면 안 되지, 엘.”
에스티안은 비밀 얘기라도 하는 듯 입가에 손을 대고 속삭이던 엘의 머리를 헤집으며 그녀를 마차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엘은 까르르 웃으며 안쪽으로 들어가 앉기 전에 ‘부끄러워한대요!’라며 소리쳤다. 에스티안도 엘도 귀엽기 그지없네. 전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짧은 시간 만에 진짜 남매 같은 모습을 그들이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엘이랑 많이 친해진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좋은 오라버니네요.”
“전부 그대 덕분이야, 아델린. 그대 혼자서 이리저리 다니면서 위험하게 정보를 알아낸 거겠지.”
“혼자 다니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에스티안 경이랑 같이 찾아볼 테니까요. 그렇죠?”
“물론이야. 그런데…….”
에스티안은 내 손을 잡아 입술을 댔다 떼며 픽 웃고는 이어 말했다.
“언제까지 경이라는 호칭을 붙일 생각이지? 나는 진작에 그대를 아델린이라고 부르고 있었잖아. 이제 델이라고 부를 기회만 찾고 있다고.”
“아, 음…… 갑자기 그러면 어색할까 봐요.”
“델.”
“헛…….”
“델, 대답해 줘. 나의 델.”
다시 그가 손에 입술을 묻었기 때문에 델이라는 소리는 낮게 웅웅 울렸다. 아, 델이라고 부르는 건 부모님과 리아나 정도였는데.
리아나는 심지어 이제 아예 논외 대상이 되어 버린 것 같으니 정말 부모님만이 나를 델이라고 부르는데, 그 느낌과는 차원이 달랐다.
델이라는 이름이 이토록…… 이토록 관능적이고 묘했던가.
푸른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며 끊임없이 내 이름을 반복해 부르는 그 모습에 나도 충동적으로 입이 떨어졌다.
“……에스티안. 에스티안도…… 나의 에스티안이죠.”
“그대만의 에스티안이지.”
작아서 거의 안 들릴 정도로 겨우 말한 거였는데 에스티안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그는 엘이 마차 창문을 쾅쾅 칠 때까지 내 얼굴 곳곳에 잘게 입술을 맞췄다.
“다음엔 블라머프가로 초대할 거야. 기대해도 좋아.”
그와 나는 결국 웃음이 터진 채로 잘 들어가라며 인사를 나누었다. 기지개를 쭉 켜며 방으로 들어오니 어느새 안나가 침대 정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저택에서 나간 엘에 대해 나는 부모님, 정원사 할아버지, 그리고 다른 시녀들에게 그저 그녀가 더 좋은 곳에서 지내고 공부할 수 있게 되어 떠났다고 둘러댄 상태였다.
내가 하도 이리저리 혼자 날뛰어 온 덕인지 다행히 모두 그렇구나, 하는 정도의 반응을 보여 다행이었다. 그저 뭐 지인의 지인 정도 되는 귀족이 엘에게 도움을 주기로 했다, 이런 느낌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의 만남은 내가 조용히 추진한 거였고, 차 준비만 안나가 도운 정도였다.
그런데 계속 에스티안과 엘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한 데다 원래 눈치가 빠른 안나는 무언가 대충 눈치를 챈 듯했다. 나를 잠시 보다가 내가 ‘왜요?’ 하고 물으면 아니에요, 하고는 다시 화장대나 침대를 정리했다.
그러길 몇 번 반복하기에 이번엔 내가 먼저 입을 열려 했지만 안나가 조금 더 빨랐다.
“아가씨께서 딱히 지금 말씀하시지 않는 걸 보면 이후에 어떻게든 알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도 묻지 않을 테지만, 아가씨께서 좋은 일을 하셨다는 건 어느 정도 짐작이 가요.”
“안나…….”
“그 과정에서 아가씨가 어느 누구에게서도 상처를 받는 일이 없으면 가장 좋겠고요.”
“……고마워요, 안나.”
안나는 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가 잘 준비를 도운 다음 침대에 눕혀 주고 나갔다.
마음에 짐처럼 남아 있던 한 과제가 끝났다는 느낌에 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피곤이 쏟아졌다. 부모님께도 이 모든 걸 말해야 하긴 할 테고, 아직 갈 길은 멀겠지. 겨우 남매를 붙여 놨고 이제는 남매를 떨어뜨렸던, 그 가족을 떨어뜨려 놨던 사람들에 대한 단서를 더 찾아야 할 테니까.
그런데 에스티안과 엘이 남매일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있던 만큼 나는 이후의 일도 어떻게든 잘되지 않을까 하는 확신이 들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을 느끼며 가물가물 눈이 감겼고 곧 잠이 들었다.
*
“네, 맞아요. 그와 저는 연인 사이예요.”
“호오…… 그렇지. 그와 원래 왕래도 잦고 친하긴 했지. 그러면…….”
“그래, 그러면…….”
부모님과 나는 모처럼 마주 앉아 진지한 대화를 하게 되었다. 두 분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다가 갸우뚱하고는 내게 무언가 물으려는 기색이었다.
블라머프가에서 에스티안 이름으로 이른 시간부터 보낸 꽃바구니가 모든 것의 화근이었다.
이전에도 이런 걸 보낸 적 있었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다들 넘기려 했지만, 꽃말이 사랑인 자색 튤립과 블라머프가에 언제 어느 때건 자유롭게 올 수 있는 초대장을 함께 보내 온 터라 저택이 뒤집힌 상태였다.
암묵적으로 제국에서 자색 튤립은 연인에게 주는 꽃이기도 하고, 에스티안이 아무리 이상한 소문에 휩싸여 있어도 그런 꽃을 여자에게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저택에 아무 때나 와도 된다는 초대장 또한 귀족들끼리 함부로 남발하는 게 절대 아니었다. 당연히 공작가라면 더더욱.
물론 나는 그 초대장이 엘을 찾은 것에 대한 일종의 인사 표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 한술 더 떠 그냥 보낸 거겠지, 하는 생각을 아무도 할 수 없도록 함께 온 에스티안의 자필 편지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의 연인에게.>
별생각 없이 꽃을 받아 온 시녀도, 역시 별생각 없이 꽃을 보고 잠시 흠칫했다가 초대장과 편지까지 목격한 부모님도, 그리고 나까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궁금해하는 건 딱 하나일 것이다.
에스티안과 연인인 건 그렇다 치는데, 그에 대한 소문들은 어떻게 된 거냐는 거겠지.
아니,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게 아니라 사실 나에게 ‘너는 그게 괜찮냐’고 묻고 싶은 것일 테다.
에스티안에 대해 말하려면 엘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엘을 찾은 것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결론을 내렸으니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공작가 측에서 먼저 얘기하고 싶었으면 편지든 초대장이든 엘에 대한 얘기를 썼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기에 일단 나는 입을 닫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숨을 크게 내쉬고 부모님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에스티안 경의 소문 때문에 신경 쓰이셔서 그러신다는 걸 알아요. 그런데 그분은 소문과 같은 분이 아니에요. 그 소문은 전부 억측에 거짓말이에요.”
“…….”
“그분이 저를 몇 번 도와주시고, 또 저도 몇 번 그분을 도와 드리고 하면서 가까워졌는데…… 여성 관계가 복잡하지도 않고, 이상한 곳을 오가는 사람도 아니에요.”
밑도 끝도 없이 그저 에스티안을 두둔하다시피 하는 내 말에 두 분은 서로를 마주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래, 그러실 만도 하지. 그런데 그 이후 두 분의 입에서는 내 예상 밖의 말이 나왔다.
“델, 네 마음이야 이미 우리가 잘 아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얘기하려던 건 블라머프 공작가가 네게 보낸 초대장과는 별도로 우리에게 따로 보았으면 한다는 편지를 써 온 것에 대해서란다.”
“네?”
“그래, 너와 기사단장이 한두 번 같이 있는 걸 본 것도 아닌데. 꽃바구니도 여러 번 받지 않았니?”
“그, 그거야 그렇지만…….”
“그런데 편지가 두 개였거든. 공작 부부 측에서 우리만 보는 게 아니라 너도 꼭 같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을 전했기에 그걸 얘기하려고 했지. 그것도 오늘 오후.”
“아, 오늘…….”
“그래서 우리가 의아한 거였단다. 그쪽에서도 물론 너무 급한 부름이지만 부탁한다며…….”
그럴 수밖에 없겠지. 엘의 일을 우리 부모님께도 얘기하고, 이후 오래전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배후를 캐는 것에 대해서 나에게도 뭔가 할 말이 있어서일 것이다.
잔뜩 긴장하고 각오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부모님이 미리 편지 하나는 가져갔던 건가? 단지 저 얘기를 하려던 건가? 소문 같은 얘기는 아무 상관 없나? 정말 괜찮은 건가?
“아, 아아. 네, 저는 괜찮아요. 이따 같이 방문하면 되죠. 그…… 그러면…… 에스티안 경에 대해서는 두 분께서…….”
소문은 전혀 신경 안 쓰시는 건가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물음을 삼키고 그저 그들을 바라보았다. 얼빠졌을 내 얼굴을 보며 두 분은 잠시 웃더니 떨려서 손톱끼리 이리저리 툭툭 치고 있던 내 손을 잡았다.
“늘 말했잖니. 우리는 델, 너를 믿어. 네가 그 정도로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또 그만한 믿음이 있는 거라면 그런 것이지 않겠니? 우리 딸이 아무 이유도 없는 선택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부모 된 입장에서 봤을 때, 기사단장이 네게 진심을 보이는 것도 맞다고 생각했단다. 황실에서 몇 번 봤을 때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에게만큼은 참 다감한 것 같더구나.”
“아아…….”
“사실 그가 자주 올 때마다 네가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알고 있지.”
“놀리지 마세요…….”
‘네가 그렇게 확실하게 그의 소문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구나.’라 말한 부모님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 짓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더더욱 폭탄 같은 말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은 좀 빠른 것 같아서 놀랐지. 그런데 또 델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렇게 빠른 건 아닌 것 같기도 하죠?”
“그러게 말이오. 오늘 가서 혼담이 오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구만.”
“아니에요!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결혼이라니, 혼담이라니. 이제야 겨우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데다 앞으로 이것저것 알아내야 할 게 산더미 같은데 결혼이라니.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부모님을 다행이라고 여겨도 되는 걸까.
나는 손을 크게 휘휘 저으며 부정했다. 이따 블라머프가에 가서 진지하게 엘에 대해 얘기할 게 분명한데, 잘못해서 이런 얘기를 부모님이 꺼내기라도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나는 몇 번이고 그런 얘긴 멀었으니 꺼내지도 말라고, 공작 부부가 이렇게 급하게 부른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 우리는 가서 먼저 듣기부터 하자고 신신당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