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8/18)

8장

황홀한 기분에 휩싸인 채로 나는 에스티안의 마차에 올랐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내내 어딘가 들뜬 마음이 들었다. 축제의 밤이, 그리고 그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생길지 모르는 일이니까.

“에스티안 경, 그,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언제든 저희 저택으로 오셔서 차도 마시고…… 얘기도 나누고 가셔도 돼요. 아, 그래도 오시기 하루 이틀 전에는 알려 주세요. 시종을 보내시거나 편지를 써 주시거나 해서요. 너, 너무 무방비하게 있다가 보면…….”

“……약속할게. 기별을 하고 가지.”

“네, 네. 고맙습니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에스티안은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웃음은 처음 보는 것 같네. 오늘 그도 축제를 구경한 것이 분명 즐거웠기 때문에 저렇게 웃는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이어 말하는 내용은 귀를 의심하게 했다.

“……그대도 언제든 블라머프가 저택이나 개인 숙소로 티타임을 가지러 와도 돼.”

“네? 헉. 아, 에스티안 경의 개인 숙소도요? 기사단장 전용 숙소를 말씀하시는…….”

“나만 쓰는 곳이라 조용하고, 나름대로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으니 차 한 잔 마시는 데는 문제없을 거야.”

“아…….”

“……매번 저택에 찾아갔을 때 좋은 차를 마시게 해 줬던 게 고마워서 그러는 것이니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해.”

에스티안의 초대나 다름없는 말이 신기하고 반가워 그저 입을 벌리고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그는 자신 혼자 있는 곳에 나를 부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당황해서는 말을 덧붙였다. 천하의 황실기사단장이 저런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다니. 심지어 바람둥이로 소문난 사람이 말이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그런 거 아니니 걱정 말라고 하고 싶은데, 덩달아 당황한 나는 또 바보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 그럼요! 저희는 그…… 친구잖아요!”

“……그래, 나는 그대의 친구지. 그대는…….”

에스티안이 말을 하려다 픽 웃고는 나를 바라봤다. 할 말이 있어 보여 침 삼키는 것도 잊은 채 나도 그를 마주 보고 있는데, 그 순간 마침 마차가 나의 저택 앞에 멈췄다. 그는 고개를 짧게 절레절레 젓고는 먼저 내려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늘 그래 왔듯 손등에 입을 맞추며 기사로서의 예를 전했다.

방 안에 들어와 목욕 시중을 받는 동안, 마차 안에서의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에스티안이 조금이라도 어색해하는 반응을 보이면 그걸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내가 친구라는 단어를 꺼내 든 것이었다. 그는 친구라는 얘기를 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뭐 공작가를 방문해라, 자기 숙소도 와도 된다 했던 모든 걸 친구로서 서로 오가자, 이런 느낌으로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친구 이상이었으면 하고 바라긴 하지만 그게 어딘가. 적어도 이렇게 서로 얘기한 이상, 그가 올까, 안 올까를 생각하며 전전긍긍하던 건 이제 안 해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일종의 계획을 위한 밑바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 저택이든 그의 거처든 왕래를 자주 한다면 이후 에스티안과 엘도 어느 장소에서든 좀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정말로 그들이 남매가 맞다면…….

친구의 소설에 대해 떠들면서 나는 어쩌면 멀쩡히 어릴 때부터 붙어 살 수 있던 남매도 찢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에스티안의 삶이 나 때문에 고달파진 건 이미 확인했고, 아무리 원래 소설에는 엘이라는 인물이 나오지 않았어도 지금 내가 있는 여기에는 분명히 있으니까. 그것도 아주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 오면서 말이다. 서로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를 아는 나로서는 그들이 행복해지는 데 힘써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

다음 날 나는 여기서 지내게 된 이래로 가장 일찍 일어났다. 안나도, 다른 시녀들도 깜짝 놀랐지만 나는 결연한 얼굴로 그녀들의 도움을 받아 씻고 깔끔하게 단장도 마쳤다.

그리고 곧바로 한 일은 메이스프릴가의 치료사와 제국 중앙신전 신관을 모시는 사제에게 만남을 청해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급한 내 부름에 응해 금방 방문했고, 내가 천천히 에스티안과 엘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신중한 얼굴로 들어 주었다. 물론 에스티안과 엘이라고 이름을 말하기엔 섣부른 것 같아, 친구라고 둘러댄 상태였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긍정적인 기대감까지 가진 다음 이후에 다시 연락하겠다고까지 말하고 나니 이미 오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나는 곧장 엘을 잠시 따로 불렀다. 점심시간 넘어서까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듯해 정원사와 다른 시녀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그녀를 정원 테이블로 불렀다.

“아가씨, 오늘 진짜 일찍 일어나셨다고 들었어요! 어제 늦게 들어오셨는데 피곤하진 않으세요? 아, 맞다! 그 기사님이랑 재미있게 구경하고 오셨어요?”

해맑은 엘의 얼굴을 보자 괜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젯밤부터 계속 엘에게 생각한 것을 말해야지 다짐했는데 오히려 그녀를 마주하니 아무런 말도 안 나왔다.

이유는 그거 하나였다. 엘이 가족을 찾고 싶어 하지 않는 거라면 어떡하지?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그녀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나 안타까운 느낌은 내비쳤지만, 그들을 찾아야겠다는 의지나 마음 같은 건 보인 적이 없었다.

가뜩이나 좋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겨우 흘려보내듯 잊었는데, 괜히 이제야 편하게 살게 된 어린애를 내가 들쑤시는 건 아닐까 싶은 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에스티안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에스티안이 각종 어두운 뒷골목을 샅샅이 뒤진 다음 보고하면, 그 얘기를 듣고 더 윗선에서 정보를 캐느라 여념이 없다는, 에스티안과 같이 그렇게 몇 년간 딸을 찾아온 블라머프 공작과 공작 부인까지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둘을 붙여 놓은 거나 다름없었지만, 함부로 붙였다가는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나는 신중해야 했다.

“아가씨? 어디 안 좋으신 거예요?”

“아니에요. 엘한테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어떤 얘기요?”

“이건 어디까지나 엘이 원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는 걸 우선 밝힐게요. 엘이 원하지 않는다면 절대 강요하지 않으니까 그런 걱정은 말고요.”

“아가씨……?”

“엘, 어릴 때 기억이 희미하다고 했죠. 혹시 좀 더 적극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가족을 찾고 싶은 생각이 있나요?”

“네?”

“안 좋은 기억은 웬만하면 희석시키고, 좋았던 기억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서 기억나게 하는 치료가 있대요. 우리 가문 치료사분과 중앙신전에서 신관을 모시는 사제분들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진행하면 어렵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엘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얘기를 들은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늘 헤실헤실 웃는 얼굴이었는데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을 보자 내 심장이 다 철렁했다.

괜찮은 건가? 나 잘하고 있는 건가? 그녀가 어느 정도 파악을 한 것 같아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치료라고 해서 심각하거나 거창한 게 절대 아니고요. 그냥 엘이 갖고 있는 어릴 때의 좋았던 기억을 좀 더 잘 생각나게 해서 가족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얻으려는 거예요.”

“아…….”

“엘이 기억나는 대로 생각을 얘기하면, 그 생각이 좀 더 구체화될 수 있게 말하는 걸 치료사분과 사제분들이 도와주시는 방식이래요. 눈 감고 명상하고, 숨을 내쉬고, 계속 대화하면서요.”

“네…….”

“그런데 혹시, 엘이 음…… 그런 게 귀찮아서 하고 싶지 않다거나 뭐, 억지로 옛날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거나, 그…… 가족을 딱히 찾고 싶지 않은 거라면…….”

가족을 찾지 않는다, 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내가 마음이 먹먹해 말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겨우 입을 떼어 마무리했다.

“엘이 그렇게 내키지 않는 일이라면 당연히 절대 하지 않아도 돼요. 이건 무조건 엘을 위한 일이니까, 엘이 원하지 않으면 안 할 거예요.”

엘은 내 얘기가 끝나자 한동안 멍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몇 번이나 잘근잘근 뜯었고, 얕은 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 침묵 속에서 엘이 수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나도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별안간 입을 떼었다.

“그런데 아가씨.”

“네, 네.”

“그런 좋은 기회를…… 제가 누려도 되는 건가요?”

“네?”

“너무 잘해 주시니까요……. 그게 보통 일이 아닐 거라는 건 저도 알아요. 제가 기억을 잘 떠올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해 주시면.”

엘의 눈에서는 어느새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도 흐느끼는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적어도 머리가 좀 크고 나서는 한 번도 속 시원하게 누군가에게 기대서 펑펑 울어 본 적 없는 아이의 흐느낌에 나도 울컥했다.

“엘이랑 저는 친구잖아요. 엘이 나를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요.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냥 엘 스스로만 생각해요. 엘이 해서 고통스러운 거면 안 해도 되니까요.”

엘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전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아요. 저도 어렴풋이 생각나는 좋은 과거의 기억들을 다 똑바로 떠올리고 싶어요. 다 기억해 내고 싶어요. 그리고 가족도…… 가족도 찾고 싶어요.”

천천히 엘의 말이 이어지면서, 그녀의 턱 끝에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들이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가씨가 말씀하신 그 치료를 받으면 가족들의 얼굴도 생각날까요? 나를 버린 거였더라도 괜찮으니까 그냥 가족을…… 가족을 기억해서 찾고 싶어요.”

목이 메는데도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힘주어 얘기하는 엘의 모습이 안타까워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를 꽉 안아 주었다. 엘은 그제야 소리 내고 흐느껴서 울기 시작했다.

“저도 가족이 있었을 테니까, 보고 싶어요. 찾고 싶어요. 정말 찾고 싶어요…….”

떠올리기 싫은 것을 억지로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아니, 오히려 엘이 이토록 바라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어 나도 눈물이 났다.

그동안은 대체 저 마음을 어떻게 참았을까. 늘 꾹꾹 누르고 있다고만 생각했지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나는 한참 엘을 끌어안고 달랜 뒤 다시 치료사와 사제를 불러 엘을 잘 부탁한다고 다시 전했다.

엘은 그다음 날부터 정원 일을 하는 시간 중 일부를 치료사와 사제 두 명에게 치료받는 데 사용했다. 정원 일을 다른 시녀들이 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따로 임금을 올려 해결했다.

엘이 받는 것은 사실 말만 치료지 거의 수련이나 명상, 또는 최면요법이나 대화 같은 거였다. 엘이 자신의 기억 속에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여야 하기에, 저택에 따로 마련된 편안한 분위기의 방에서 딱 그들끼리만 있는 채로 치료가 진행되었다.

사제에게 전해 듣기로는 엘의 기억이 비교적 뚜렷한 10살 정도부터 거슬러 점점 어릴 적으로 올라갈 것이라 했다.

“아직은 길에서 지내던 때를 더 많이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언뜻언뜻 아주 어릴 적의 기억을 하는 것도 같긴 한데, 조금 더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너무 빠르게 진행하려다 보면 오히려 기억이 꼬여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거든요.”

“네, 엘이 천천히,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그냥 자신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과 가족들을 잘 떠올릴 수 있게 해 주세요. 잘 부탁드려요.”

이후 엘은 매일 정원 일과 그 수행 같은 치료를 병행했다. 너무 고맙고 귀엽게도 그녀는 치료를 통해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이 생각나면 그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내게 다 얘기해 주었다. 좋지 못한 기억도, 좋았던 기억도 전부 다.

“아가씨, 오늘은 어렴풋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났어요. 아직 얼굴도, 목소리도, 아무것도 생각나지는 않아요. 하지만 되게 무뚝뚝하신데도 은근히 친절하셨나 봐요. 제가 무언가 선물로 드린 것 같았는데, 겉으로는 티 안 내시고는 그 선물을 아주 소중히 여기셨거든요.”

“정말 따뜻한 일이었네요. 기억해서 다행이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인 것 같은데, 그때만 해도 저는 그게 아버지의 속마음인 줄 몰랐던 것 같아요. 크크.”

자신의 기억이어도 헷갈릴 법도 하고 혼란스러울 법도 했다. 그리고 주위에 아무 없는 지금 억지로 그런 걸 떠올리면 정말 미쳐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은 차분히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안에서 가족을 찾으려 애썼다. 그럴 때마다 안쓰러워 나는 그녀의 얘기를 잘 듣고 안아 주었다.

그런 식으로 며칠이 지났는데, 별거 아닌 치료같이 보일지라도 정신적으로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모할 것이 분명해서 나는 그녀를 정원 일에서도 당분간 제외해 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 막은 건 오히려 엘 쪽이었다.

‘제 기억을 찾아 주시려고 하신 것도 감사한데, 일도 안 하면 저는 죄책감과 부담에 견딜 수 없을 거예요. 정원 일은 제가 좋아서, 즐거워서 하는 거라서 계속하고 싶어요.’

엘이 너무도 완강했기에 나는 그녀를 만류할 수 없었다. 대신 힘들거나 피곤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해 주는 수밖에.

축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앞으로도 한 일주일 정도는 계속 축제가 진행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에스티안과도 축제를 구경했고, 엘과도 축제를 구경했기 때문에 더 이상 굳이 축제를 보러 나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 나가 봤자 피곤하기만 하지, 뭐.

이미 그것도 한 일이 주 전의 까마득한 일들이 되었고, 나는 그저 저택에서 좀 쉬면서 엘의 기억 찾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간간이 에스티안과 편지를 주고받기는 했다. 그는 축제 내내 진행되는 무도회를 전담해 호위하고 있다고 했다. 황실의 인사들은 물론 간간이 황제와 황후, 황태자도 참석하는 것이었기에 그가 자리를 비우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호위 근무를 서지 않을 때는 축제가 끝나자마자 있을 대규모 마물 토벌을 위해 훈련을 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그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오지 않았어도 그냥 바쁘겠거니 하고 넘겼을 것이다. 물론 궁금하고 서운하긴 했겠지만.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꼬박꼬박 자신의 근황을 특유의 깔끔한 글씨체로 전해 왔다.

<이게 대체 누굴 위한 축제인지 모르겠어. 그대와 축제를 즐겼던 때가 꿈같군.>

투정 어린 에스티안의 편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단것 좋아하고, 은근히 섬세하고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란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런 말까지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만!

그러나 한껏 신이 나 들떴다가도 그와 내가 지금 엄밀히 말하면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걸 떠올리면 시무룩해졌다.

몇 번이나 나도 그도 얘기했듯 우리는 아직 친구 사이였다. 물론 어느 친구와 그렇게 지내며 이렇게 매번 편지를 쓰고 저런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괜히 이런 걸 물었다가 에스티안으로부터 ‘나는 원래 친구한테 이러는데?’ 하는 식의 반응이 돌아올까 봐 겁이 났다.

그러니 뭐, 일단 나는 뭐 열심히 또 그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름대로 그렇게 평온한 생활을 하던 차, 평온을 깨면서 확 현실로 나를 끌어당기는 편지가 도착했다. 다름 아닌 황태자 유리엘로부터 온 것이었다.

사냥제 때의 수상한 자와 관련해서 전할 말이 있고, 축제가 거의 끝나 가는 시점에서 축제와 관련하여 할 말도 있으니 잠시 시간을 내 입궁하라는 거였다.

에스티안이 며칠 전 보냈던 편지로 이미 수상한 평기사가 자취를 감춰 도통 잡히지 않는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터였다.

그런데 그와 관련해서 황태자가 직접 전할 말이 있다는 건, 분명 어느 정도 범인이든 뭐든 사건의 윤곽이 나왔다는 거겠지. 이미 그때 이후로 몇 주가 지난 상황이기는 했다.

당장 오늘 황궁을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궁에 가게 되면 머리가 아파질 게 뻔하니 쉴 수 있을 때 좀 더 쉬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혼자 가는 것보다는 유일한 목격자인 리아나와 함께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녀에게 같이 가자고 물어봐야 했기 때문이다.

뭐, 리아나로서는 유리엘을 보러 가는 거니까 싫을 리 없을 터였다. 당연히 그녀는 단번에 함께 황궁에 가자는 부탁을 수락했다. 유리엘로부터 편지를 받고 난 이틀 뒤 리아나와 함께 입궁하겠다는 편지를 써서 보냈고, 그의 허락이 떨어졌다.

*

“델, 나 너랑 황궁에 방문객으로 함께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아델린은 여러 번 왔겠지만, 아델린이 된 내가 리아나와 황궁에 이렇게 같이 온 건 엄밀히 말해 처음이었다. 무도회 때야 뭐, 따로 들어간 데다 싸우기까지 했으니 말 다 한 거였다.

우리는 기사의 안내를 받아 유리엘이 기다리고 있다는 방으로 향했다. 내심 에스티안을 이 안에서 잠깐이라도 볼 수 있으려나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와 마주치지는 못했다.

긴 복도를 쭉 걸은 뒤 시립해 있던 기사가 열어 주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은 아닌 것 같고, 그저 황태자 신분으로 휴식을 취하는 공간인 것 같았는데, 그 방 안에 있는 모든 게 커다랬다. 방 자체의 크기는 물론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도, 간단한 다과가 놓인 테이블도, 그 테이블을 비추고 있는 햇빛이 들어오는 창도.

무엇보다 가장 거대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건 당연히 다름 아닌 유리엘이었다. 그는 화려하고 거대한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큰 테이블 위에는 서류 뭉치가 잔뜩 놓여 있었다.

“제국의 성장하는 붉은 사자를 뵙습니다.”

리아나와 나는 나란히 치마를 들었다 내리며 유리엘에게 인사했다. 리아나는 그저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정말로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귀여워라. 후딱 심각한 내용을 듣고 나면 그녀와 황태자를 또 붙여 놓은 다음 나는 얼른 황궁을 떠나야지.

“앉지.”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다 같이 차를 마셨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침묵이 지속되어 좀이 쑤셨지만, 유리엘이 먼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으니 우리라고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차를 한 잔 다 마신 다음에야 그는 말을 꺼냈다.

“사냥제 때의 사고는 다시 한번 사과하지. 전체 관리를 제대로 못 했던 내 잘못이다. 그 후 몸조리는 잘했나?”

“네, 걱정해 주신 덕에 잘 지냈습니다.”

“리아나 영애는 증인 자격으로 여기 온 셈일 테고.”

“네, 그렇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리아나가 수줍어하는 얼굴로 예쁘게 말을 더 하려 했지만 유리엘은 손을 들어 그걸 막아 버렸다. 인정도 없는 놈. 자기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 좀 그냥 들어 주지.

물론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 것 같기는 했다. 그는 곧장 우리를 여기 부른 목적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우선 리아나 영애에게 확인하지. 영애가 본 평기사가 이자가 맞는가?”

유리엘은 작은 족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두었다. 초상화였다. 어린 얼굴, 쑥색에 가까운 눈, 수염.

리아나가 전에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기에 나도 머릿속으로 맞춰 볼 수 있었고, 그녀가 말했던 그대로였다.

“네, 맞습니다. 제가 본 평기사가 분명 맞습니다.”

“이자는 황실기사단 소속도 아니고, 그 어떤 귀족의 기사단 소속도 아니었다. 외부 인원이 슬쩍 하나 섞여 들어온 거였지. 웃기게도 내가 마지막으로 인원 점검을 했을 때조차 없던 자였다.”

“어머, 세상에…….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리아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곤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자기가 본 사람이 잠입한 존재였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긴, 놀랄 법도 하겠지. 나는 왠지 수긍할 수 있었다. 누굴 죽이려 할 때 내부자를 쓰는 바보가 어디 있겠어.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영애는 외부인에게 죽을 뻔한 것인데 놀라지도 않는군. 하지만 이 얘기를 들으면 놀라겠지. 그자는 잡혔었다.”

잡혔다도 아니고 잡혔었다?

물론 그것도 여기 올 때 이미 예상한 바이긴 했다. 그냥 잡혔다면 처형을 하든 뭘 하든 해서 황실 선에서 처리하고 그저 그 결과를 내게 알려 줬을 것이다.

이렇게 불렀다는 건 뭔가 더 있는 것일 터였다. 범인이 잡힌 것을 넘어 뭐가 더 있는 거지? 도망이라도 가서 다신 못 찾게 됐다, 그런 건가?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가고 긴장한 얼굴을 하자 유리엘은 나를 힐끗 보고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내가 놀라길 바란 거야?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그는 다시 시선을 나와 리아나 모두에게 향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자는 귀족을 죽이는 데 가담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었어. 알고 보니 정식 기사도 아니고 그냥 평민이더군. 스무 살도 안 된 자 혼자서 여기에 잠입하고, 귀족을 불러내고, 마물이 없는 숲에 마물까지 소환해 낼 리는 없다고 판단해 배후를 밝히려 했다. 그래서 그자를 고문했지.”

제국에서 범인을 고문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귀족 위주의 사회인지라 귀족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라면, 게다가 그자가 평민이라면 고문은 그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서슴없이 행해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머리론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초상화를 봤을 때 분명 어린 얼굴이었기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잠시 숨을 내쉰 유리엘은 마저 얘기했다.

“알다시피 지나치게 어린 자나, 배후가 따로 있어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는 심하게 고문하지 않아. 이자도 그쪽에 속해 그저 뒷배가 누구인지, 또는 어디인지를 밝히려고 강하게 추궁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그가 그저께 자살했다. 내가 편지를 보냈던 날.”

자살? 황궁에서 제국법의 심판을 받은 게 아니고? 전혀 상상도 못 한 결말에 나는 정말로 표정 관리도 못 한 채 놀라 굳었다. 리아나는 입가에 가져간 손을 떼지도 못한 채 숨을 헉 들이켜고는 멈춰 있었다.

“감옥에 가둬 놨을 때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기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었지. 그런데 몸에 독을 아예 지니고 있다가 먹고 자살한 모양이야. 농약의 일종으로 추정되는 거였어. 그가 쓰러진 곳에 작은 병이 깨진 조각들이 있었고, 병에서도 독이 묻어 나오는 것을 치료사가 확인했다. 그의 사인 또한 중독이었고.”

독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감옥에 들어간 거라면, 그건 분명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정보가 새어 나가거나 정체가 들통나려 할 때를 대비해 여차하면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거니까.

그리고 그가 모든 걸 안고 죽어 버렸다는 뜻도 되겠지. 대체 누구길래, 뭐길래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놀란 마음은 어느새 가라앉아 다시 침착해졌고 오히려 의문이 생겨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배후를 찾을 수 있을까요? 그 평기사가 죽었다면…….”

유리엘은 잠시 나를 본 뒤 말을 이었다.

“영애도 이미 예상했겠지만 그자가 죽으면서 이 사건에 대한 정보가 모두 끊긴 셈이지. 그나마 단서가 되는 게 그를 마지막으로 추궁했던 기사의 말이었어. 그 기사의 말에 따르면, 배후가 귀족이냐고 물었을 때 가장 크게 동요했고 그 이후에 죽은 거라 하더군.”

“귀족…….”

“그래서 귀족이 뒤를 봐줬는데 본인이 감당이 안 된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배후가 되는 귀족 쪽에서 꼬리 자르기를 한 것인지 추측만 하는 중이다.”

쉽게 생각하면 귀족이 사주한 놈이 수를 써서 나를 대놓고 노린 거였다.

사냥제 전까지 나는 저택 밖도 잘 나가지 않으며 사람도 안 만났으니, 굳이 추측을 해 보자면 사냥제 때 나를 보고 아니꼽게 생각한 누군가의 짓일 것도 같았다. 사냥제 때는 내가 좀 튀었어야지.

혼자 낯선 복장을 하고 와서는 대부분의 귀족 영애들 앞에서 훈수를 두고 아주 잘난 척을 해 댔으니까 그때 날 보고 별꼴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랬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범인은 사냥제에 와서 나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자리에서 사람을 매수해 일을 저질렀다는 소리가 된다.

다들 사냥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사람을 은밀히 불러서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기사단도 뭣도 아닌 평민을 어디서 어떻게 찾고.

자연히 내 생각은 나를 원래 알던 사람, 나를 원래 아니꼽게 여기던 사람 쪽으로 흘렀다.

그러나 그조차 추측이 안 돼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내가 충격받아 말을 못 잇고 있다고 생각한 건지 유리엘이 테이블 위 내 손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얹었다. 그러고는 안심하라고, 최대한 돕겠다고 확신을 주는 말투로 얘기했다.

“그자의 가족들도 혹시 한패일 수 있어서 그들에게 아는 귀족이 있는지, 최근 수상한 점은 없었는지도 더 강력하게 추궁할 예정이야. 뭐든 알아내면 알려 주도록 하지.”

그가 나름대로 위로해 주는 방식이라 생각하니 새삼 고마웠다.

그런데 리아나가 이걸 달가워할 리가 없는데.

절로 그의 손으로 시선이 갔다. 그는 내 눈길을 곧장 느끼고는 스스로의 행동을 뒤늦게 의식한 듯 다소 뻣뻣하게 손을 거두었다.

나는 다시 생각을 이어 갔다. 가족을 추궁한다……. 그럼 그 가족은 어디론가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위치도 쉽게 파악해서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내가 뭔가 잘못을 저질러 꺼림칙한 게 있다면, 나는 불똥이 가족에게 튈 것을 걱정해 그들을 대피시켰을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어떤 한 사람이 무언가 문제를 일으켰을 때 그 주변을 살펴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데 가족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그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가족들은 그 평기사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가족이 어딘가로 도망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으로 봐서는, 아예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도 모를 가능성이 있을 듯해요.”

내 말에 유리엘은 서류를 보느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확 들어 찌푸렸던 표정을 바로 하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확실히 그렇군. 평기사가 죽기 전 황실에서 기사들이 나가 그의 가족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불안한 모습이긴 했지만 자기 아들이 무슨 짓을 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고 했지.”

“그렇다면 평기사는 가족들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유리엘은 나를 잠깐 다시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어딘가 ‘이해가 빠른데?’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기에 나도 그저 아래로 했던 시선을 슬쩍 올려 그를 보았다. 물론 압도적인 위엄 차이나 위치 차이가 있어 금방 눈을 내리깔았지만.

일을 저지른 자의 가족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추궁이나 수사에 진전이 크게 있을 리가 없었기에 황실 측도 현재는 좀 어려워하는 상태라 했다.

그저 혹시 주변에 또 다른 수상한 사람이 있었는지를 더 살피는 일이 좀 더 진행될 거라며, 그래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끝으로 사냥제 때의 사건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그 얘기가 끝나자 리아나는 비로소 거의 참고 있다시피 했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황태자와 내가 얘기하는 내내 긴장한 상태로 눈을 굴리며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유약한 성정을 지닌 애가 듣고 있기에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옆에 계속 앉아 있어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황태자가 나와 이야기한 사항을 부관 같은 사람에게 정리하고 명령을 내리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리아나의 손을 잡았다.

“오늘 이렇게 어렵고 무거운 자리에 같이 와 줘서 너무 고마워. 이상한 얘기들 듣느라 힘들었지. 이따 황태자 전하 다시 들어오시면 둘이 축제 구경이라도 하러 나가. 원래 전하께서는 항상 축제 기간마다 하루 이틀 정도는 평복 입고 정체를 숨긴 채 돌아다니시잖아. 같이 나가서 놀아.”

“음, 그런데 오늘은 우리 어머니께서 잠시 황궁에 입궁하셨어. 어머니께서 너와 함께 황궁에 간다니까 너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고, 건강해졌으면 얼굴 꼭 보고 싶다고 했거든. 계속 나 도와주고 있는 것도 너무 고맙다고 하시고.”

“아, 어머니께서?”

“응. 그냥 정말 그동안 몸조리 잘했는지, 이젠 괜찮은지 궁금해하시는 거라서 오래 걸리거나 네가 부담스럽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너와 셋이서 잠시 티타임을 가지려 했는데…… 괜찮을까?”

아니! 사실 안 괜찮다. 하지만 리아나네 엄마는 이미 황궁 손님 대기실에 와 있는 듯했고, 리아나도 셋이 오손도손 대화하는 플랜을 딱 짜 둔 것 같아 나만 거기서 빠지겠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리아나의 엄마, 즉 엘리디트 백작 부인에 대한 기억은 아델린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이기에 나에게도 있었다.

그녀는 왠지 좀 수상한 느낌이었다. 리아나에게도, 아델린에게도 굉장히 친절했고 따뜻하게 굴기는 했지만 어딘가 눈치도 많이 보는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권력욕이나 출세에 대한 욕구를 분명 가지고 있기도 했고.

열세 살인가 열네 살쯤 됐을 때 아델린이 리아나네 집에서 놀았던 적이 있었다. 단순히 귀족 영애들이 하는, 손안에 있는 돌 개수 맞추기 같은 게임을 같이 했다.

그때 엘리디트 백작 부인은 우리가 혹시 위험한 짓을 하거나 돌을 갖고 놀다가 상처가 날까봐 옆에서 지켜보며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부인은 농담 삼아 ‘이번 게임을 잘해 이기는 사람이 황태자와 결혼해 황태자비가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기억 속 리아나는 분명 죽기 살기로 게임에 임했고, 당연히 별생각 없이 게임 좀 지면 어떤가 하는 마음과 리아나를 좀 추어올려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게임을 한 아델린은 그녀에게 졌다.

그때 아델린이 너무 기묘하다 싶은 말을 들었기에, 나도 그걸 마치 내가 겪은 듯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 아델린이 졌으니 황태자 전하의 옆자리는 우리 리아나의 차지가 되겠구나!’

어미 된 입장에서 보면 딸 친구가 져 준 게 뻔히 보이기도 할 테고, 어차피 이게 게임이란 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꽤 날카롭고 재미있다는 듯,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던 걸로 기억난다.

의아하긴 했으나, 그저 가뜩이나 숫기 없는데 황태자를 멋있다고 생각하는 리아나에게 용기를 주려는 건가 보다 했다.

원래의 아델린은 그렇게 넘겼지만, 나는 곱씹을수록 이상했다.

그랬는데 그 엘리디트 백작 부인과 리아나와의 티타임이라니. 그것도 황실에서 말이다……. 이거 뭐 차라도 제대로 넘어가겠어?

좋게좋게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 얘기는 황태자에게도 들어갔는지, 곧 돌아온 황태자의 부관이 리아나와 나를 백작 부인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오, 델. 이게 얼마 만이니. 저번에 오래 눈을 못 뜨고 있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는 얘길 들었지. 하지만 각종 무도회에 잘 참여하고 다닌다기에 건강해졌나 싶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이런 일을 겪었을 줄이야……. 몸은 괜찮은 거니?”

저것 봐, 묘하게 또 신경에 거슬리게 말하잖아! 마치 아프면 가만히 있지 왜 나다녔다는 투 아닌가? 그게 다 자기 딸을 황태자랑 이어 준답시고 돌아다닌 거라는 것도 다 아는 여자가 말이야.

다른 영애들이랑 티타임 갖는 것의 몇 배는 더 피곤할 것이 예상되어 나는 경련이 이는 얼굴에 힘을 주고 웃었다.

“엘리디트 백작 부인.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덕분에 저는 정말로 건강해요. 무도회나 각종 행사에 갈 때마다 리아나와 함께 갔으니 리아나가 그것을 증명할 수도 있는걸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그러나 미소가 그렇게 인자해 보이지도 않았다.

리아나보다 조금 더 푸른 기가 강해 하늘색에 가까운 눈동자에는 전혀 웃는 기색이나 따뜻한 느낌이 없었다. 그냥 입매만 늘여 웃고 있는 거였다.

게다가 내 손과 손목을 잡고 있는 그 힘이 꽤 세서 손이 얼얼할 정도였다. 보통 여자가 아닌 것 같은데 아델린은 대체 그녀를 그동안 어떻게 대했을까. 그냥 친구 엄마라고 하기엔 확실히 수상한데 말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도 그저 손을 맞잡았다.

곧 호화롭게 장식된 테이블 위로 차와 간단한 타르트 종류가 놓였다. 황실에서 주는 것이니 당연히 맛도 좋고 품질도 좋겠지. 오늘은 그냥 이거 많이 먹으러 온 거라 생각하자.

대부분 그동안의 제국 상황이나 뭐 무도회 얘기, 축제 얘기 등에 대해 엘리디트 백작 부인이 이것저것 얘기하면 리아나가 살짝 대답하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을 잇기가 싫어 차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어 입을 다물어 버리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내가 굳이 이 자리에 없었어도 얘기가 충분히 진행됐을 거라는 거다……!

점점 배도 불러 오고 얼른 자리를 뜨고 싶다고 생각한 찰나,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유리엘이 들어왔다.

“제국의 성장하는 붉은 사자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엘리디트 백작 부인.”

우리는 아까 인사를 했기에 그저 잠시 일어나 묵례했고, 부인은 여태까지 우리 앞에서 보여준 적 없는 아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치마를 잡고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리엘도 예를 지켜 인사를 했다. 테이블 세팅이 하나 더 이루어지고, 그가 곧 자리에 앉았다. 리아나 옆이나 저 부인 옆에 앉았으면 했는데 떨떠름하게도 그의 자리는 내 옆에 마련되었다.

“앉으시지요.”

유리엘이 앉고 나서 차를 마시는 동안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그 중심 소재가 황태자 쪽으로 좀 넘어갔다는 게 차이였다.

뭐, 정치는 황제 폐하가 하고 계시지만 그 아래서 황태자 전하가 잘하고 있으니 모든 게 잘되어서 각종 무도회들도 안전하게 마무리되고 축제도 평온하고 즐겁게 진행되고 있으며 사냥제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런 얘기를 부인이 계속 꺼냈다.

아니, 내가 사냥제 때 사고가 나서 리아나랑 사건 파악을 위해 황궁에 들렀다는 걸 알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저렇게 얘기하는 거야?

약간 억울하고 화가 나서 최대한 조곤조곤 그것에 반박하기 위해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부인, 그 말씀은 좀 어폐가 있소. 알다시피 아델린 영애는 사냥제 때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목숨이 위험할 뻔하지 않았소? 이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오.”

오, 나도 그의 귀족 백성이라 이건가? 여태까지 계속 고개만 끄덕이고 우리를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던 유리엘이 손을 들어 단호한 어조로 말을 꺼낸 것이기에 모두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냉기 서린 말에 백작 부인은 물론 리아나도 얼굴이 파랗게 질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송구합니다. 저는 그저 전하의…….”

“부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니 그만해도 괜찮소.”

또 한 번 단칼에 엘리디트 부인의 말허리가 잘려 나갔다.

영향력이 적지 않은 가문의, 중년을 바라보는 백작 부인의 말을 자를 수 있는 사람은 제국 내에 얼마 있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경험은 겪어 본 적 없을 터였다. 아무리 황태자라 해도 그는 부인보다 훨씬 어린 사람이기도 하고.

부인의 맑은 하늘색 눈에 살짝 서린 노기와 꼭 쥐어 하얗게 된 주먹은 나만 알아본 것일까? 절로 한숨이 나올 것 같아 나도 그저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유리엘이 차가워진 분위기를 감지하긴 했는지 말을 다시 자연스럽게 시작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하께서도 이제 혼인을 하셔야지요.”

“아직은 생각이…….”

“……어떤 귀족 영애를…….”

나는 기계처럼 고개를 움직이고 단것이나 먹으며 들려오는 이야기를 흘리고 있었다. 대화 소재는 어느새 유리엘의 결혼, 연애 등으로 옮겨 간 모양이었다.

엘리디트 부인이 여기까지 행차한 이유는 사실 저것 때문이겠지. 리아나도 있고, 핑계 댈 만한 나도 있고, 목적인 황태자도 있고.

드디어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나는 곧 이 지루한 티타임이 끝날 것 같아 오히려 좀 개운해졌다. 그래서 마지막 기운을 쥐어짜 자리에 집중했다.

“보통은 귀족 혈통인 황실 근무자나 기사 등의 가족과 어릴 때부터 약혼하여 결혼을 준비하기 마련인데, 전하 곁에는 안타깝게도 그런 분이 계시질 않아서 늘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지요.”

“그렇긴 하오.”

“그도 아니라면 오래전부터 왕래한 귀족 영애와 인연을 맺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지요. 오래 봐서 익숙하기도 하니까요. 호호…….”

유리엘은 열띤 부인의 말에 시큰둥하다는 듯 턱을 약간 만지작대며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계속 ‘그렇긴 하지.’, ‘그렇소.’ 같은 말로만 대답할 뿐이었다.

둘의 온도 차가 너무 심해 보는 내가 다 답답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리아나를 지칭하는 표현이니까. 부인은 그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듯 또 흥분한 채로 입을 열었다.

“지금 제국에 황태자 전하의 신붓감으로 알맞은 영애는, 이제 아무도 없지 않나요, 저희 리아나밖에는?”

뭐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어딘가 서늘하고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황태자는 부인의 말에 크게 의미를 두지도 않는 듯 자세 한 번 흐트러뜨리지 않고 그저 먼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또 까딱거리기만 했는데, 내 머릿속에는 저 ‘이제 아무도’라는 말이 박혀 웅웅 울렸다.

이제 아무도, 라는 건 원래 무언가 있다가 없어졌을 때 쓰는 표현이 아닌가? 누가 남았니, 하고 물으면 무엇무엇이 있었는데 그게 다 없어지고 이제 아무도 없어,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보통은 귀족 혈통인 황실 근무자나 기사 등의 가족과 어릴 때부터 약혼하여…….’

‘이제 아무도 없지 않나요?’

엘이 맞건 아니건 에스티안에게 동생이 계속 있었다면, 그녀는 자연스럽게 황태자의 신붓감이 되는 건가? 그는 공작가의 자제고, 제국에서 제일가는 기사니까.

순간적으로 몹쓸 상상력이 발휘되었다.

이건 분명 내가 이전 삶에서 막장 드라마나 소설들을 많이 접해 온 탓이겠지.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에서는 원래 이것저것 꼬여 있는 게 당연하니까.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와 고개를 재빨리 저었다. 이런 생각은 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니까 아예 잊어버리는 편이 좋겠어.

하지만 이상한 구멍이 보이면 파고 싶은 게 사람 심리 아니던가.

아무리 편하게 지내고 싶고 사교계 활동들도 전부 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그런 거와는 별개로 내가 보았을 때 이상한 거라면, 그리고 그게 에스티안과 엘과 관련되어 있을 일이라면 얼마든지 물고 늘어질 용의가 있었다.

마침 엘은 계속 치료를 받으며 기억을 찾으려 하고 있고, 나는 꾸준히 에스티안에 대한 마음을 품고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정말로 운 좋으면 아니, 잘 맞아떨어지기라도 하면 내가 그 둘이 못 누리고 지나쳐 온 행복이나 가족애 같은 것을 찾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속으로 다짐을 하고 차를 한 입 마셨다. 다행히 내가 딴생각에 빠져 멍했던 사이 대화는 끝난 상태였다. 유리엘은 잠시 나갔는지 자리가 비어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아래를 향했던 얼굴을 살짝 드는데, 곧장 엘리디트 백작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기묘한 소름이 돋았다. 눈에서 생각을 읽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무언가 생각을 품은 눈인데 내가 그걸 읽을 수가 없어서였다.

차라리 유리엘의 눈이라면 그저 매정하고 차갑기만 하지, 그냥 기운이 좀 강렬하고 생각을 알 수 없는 정도에서 그치는데 저 부인의 시선은…….

“아델린, 어떻게 할 거야?”

“어?”

“황태자 전하께서 축제 구경을 같이 가자고 하셨잖아. 지금 그래서 준비하러 가신 거고. 아까 멍해 보이더니, 다른 생각 했구나?”

리아나가 가볍게 웃으며 얘기했다. 그랬구나.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부정하지 않고 따라 웃었다.

축제 기간 동안의 민생을 살피러 가는 것이고, 당연히 황태자 복장 그대로 나갈 수 없기에 유리엘은 간단하게 정체를 감출 옷으로 갈아입으러 자리를 비운 거였다. 지금이 축제 끝물이기에 그나마 사람이 좀 적어 돌아다니기에도 나쁘지 않아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백작 부인은 쉬고 싶어 백작가로 돌아갈 거라고 했고.

아니, 그래서 유리엘이 우리 둘 다한테 같이 가자고 제안을 했으면 그냥 명 받드는 입장에서는 가게 되는 거지 어떻게 할 거냐니…….

너무나 티 나는 얼굴과 말투로 리아나는 그와 둘이 축제를 즐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휴, 그래. 여기까지 와서 증인 노릇 하느라 고생한 그녀에게 이 정도 상도 못 줄까 싶었다.

“황태자 전하랑 너랑 둘이 다녀와. 나는 어차피 여러 번 축제 구경해서 사실 별로 볼 게 없어. 좀 지치기도 했고. 모처럼 좋은 기회니까 둘이 잘 놀고 와.”

“어머, 아델린…….”

감동했다는 듯이 인상까지 찌푸리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는 모습이 참 애 같았다. 너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어서 다 가려지지도 않는데.

나는 그저 픽 웃었다. 곧 얼굴과 눈을 어둡게 다 가리는 모자에 황태자치고는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은 유리엘이 들어왔고, 나는 리아나에게 작게 ‘잘해!’라고 말했다.

“황태자 전하, 저는 몸이 좋지 않아 함께 축제 구경을 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좋은 제안을 해 주셨는데 송구스럽습니다. 리아나 영애가 전하께 축제가 이루어지는 곳곳을 잘 알려 드릴 것입니다.”

유리엘을 보자마자 선수를 치니 그의 얼굴이 매섭게 변했다. 아니, 둘이 가나 하나가 가나 어차피 축제 구경하는 데는 큰 차이도 없을 텐데 저렇게 험악해지냐.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인 채 우선 그대로 있었다.

“……몸이 안 좋다니 할 수 없군. 오늘도 그렇고 워낙 험한 일을 많이 겪고 들었으니 더 쉬는 게 역시 낫겠지. 그리하시오. 혹시 영애에게 사냥제 일로 전할 이야기가 생기면 다시 부르겠소.”

예상외로 유리엘이 순순히 납득해서 나는 고개를 슬쩍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그는 꽤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황태자구나. 이렇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자기가 책임지고 조사도 하고, 책임도 지고. 그러면서 축제 같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관심을 갖고.

문득 그게 신기해 나도 모르게 의외라는 것처럼 쳐다보게 되었다. 아, 불경죄 같은 게 되려나.

금방 표정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유리엘이 그걸 이미 알아챘는지 눈이 잠깐 커졌다. 그러고는 미간에 잠시 주름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하. 우선 나가시지요. 부인과 아델린 영애를 마차 앞까지 모셔다 드린 뒤 리아나 영애와 축제를 보러 가면 되겠군.”

대충 넘어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내궁의 바깥까지 나가 먼저 백작 부인을 마차에 태워 저택으로 보냈고, 그다음으로 나도 백작가의 마차 앞까지 데려다주고 유리엘과 리아나는 떠났다.

유리엘은 가면서 한 번 슥 뒤를 돌아 나를 쳐다봤다. 살짝 매섭게 보는 듯하지만 화난 건 아닌 시선. 분명 내가 자신을 리아나와 또 붙여 놓은 것을 눈치챈 얼굴이었다.

뭐, 뒤로 돌긴커녕 그의 팔에 손을 얹고 가장 행복한 얼굴로 유유히 떠나간 리아나를 보면 확실히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저 사이에 괜히 끼어서 축제까지 봤다간 정말 몸살이 났을 테니까.

마차 앞에는 쥴이 서 있었다. 타라는 듯 에스코트하는 그의 손을 보는데, 불현듯 충동 어린 생각이 들었다.

황궁 옆에는 황실기사단의 숙소가 있다. 당연히 에스티안의 개인 숙소도 있다. 아까 궁에서는 그를 못 만났다. 그리고 저번에 나는 이미 그로부터 숙소에 방문해도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면…… 가도 되려나?

“아가씨?”

내가 마차를 타지 않자 쥴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땅을 보며 잠시 망설이고 서 있었다.

아, 나한테 올 때는 미리 연락하고 오라고 해 놓고, 내가 이렇게 무작정 쳐들어가는 건 역시 매너가 아니겠지? 그래서 더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잘 오지도 않는 황궁까지 온 데다, 요즘 바쁘다고 했던 그를 생각하니 얼굴이라도 좀 보고 싶었다. 어떡하지…….

“……아가씨.”

“네?”

“혹시 기사단장님의 숙소를 찾고 싶은 거라면…….”

“헉. 그, 그런 게 아닌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을 건 쥴 때문에 화들짝 놀란 나는 아닌 척을 했다. 아니, 대체 뭘 보고 안 거지? 입 밖으로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 그냥 가만히 고민만 했을 뿐인데?

그러고 보니 나는 에스티안의 숙소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였다. 그냥 궁 안을 돌아다니면서 어디냐고 물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지. 금세 얼굴이 달아오른 나는 땅만 보며 웅얼거렸다.

“근데, 너무 뜬금없이 찾아가는 거고. 빈손이라서 민망하기도 하고요. 갔는데 없을 수도 있고…… 있으면 바로 만나기가 또…….”

쥴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럴 때는 얼굴에 표가 다 납니다, 아가씨. 지금은 기사단장님께서 숙소에 계실 시간이기도 하고요. 황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간단한 선물을 살 만한 가게 구역도 형성되어 있지요.”

“어, 그럼 거길 먼저 들렀다 갈게요!”

“음, 이미 가시기로 결정하신 건가요?”

“아, 어, 그건 아니었는데…….”

쥴은 하하 웃고는 ‘호위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 앞장섰다. 사실 길도 모르는 나는 그저 그를 따라가게 되었다.

그가 말한 대로 간단한 손수건, 검집 장식 같은 걸 파는 상점가가 금방 나왔다. 아, 이런 걸 주는 건 뭔가 너무 나간 느낌인데. 이미 그에겐 손수건이나 장식품이 분명 많을 것이다. 어쭙잖은 걸 사 줘서, 그걸 그가 쓰지도 않고 어딘가 처박아 두는 걸 원하진 않는다. 뭐가 좋을까…….

그때, 눈에 곧바로 들어온 가게가 하나 있었다. 아, 저거지! 다른 거 아니고 바로 저거지!

“쥴 경, 저기로 같이 가 주세요!”

*

“음…… 기사단장님 드릴 선물이 아니고, 그냥 아가씨께서 사고 싶으셨던 건 아닌가요? 아무리 봐도.”

“뭐, 뭐랄까. 네, 사실 맞아요. 아, 그래도 겸사겸사죠. 같이 먹으면 좋잖아요?”

내가 에스티안에게 주려고 산 건 생크림이 돔 형태로 아름답게 깎여 장식되어 있는, 안에는 과일을 으깨 잼으로 만들어 넣은 작은 케이크였다.

물론 에스티안의 평소 분위기와 그의 이미지를 위해 케이크는 내가 좋아서 사는 거라고 대충 둘러댔다. 속으로는 생크림을 입가에 묻히지도 않고 잘도 먹는 에스티안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화 나누고 나오세요.”

쥴은 에스티안의 숙소 근처까지 나를 데려다주고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혼자 케이크 상자를 들고 그의 숙소 문 앞에 서 있으니 괜히 긴장되었다. 아, 뭐라고 하고 문을 두드리지? 놀러 왔습니다? 잘 지내셨어요? 차 한 잔 합시다?

아니면 아예 사냥제 때의 일 때문에 모처럼 황궁을 왔는데 문득 생각이 났고 빈손으로 오기가 미안해 무언가를 사 가지고 왔다고 서사를 다 읊어? 무슨 말을 해도 이상했다.

계속 이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것도 수상해 보일 것은 매한가지였기에, 나는 얼마간 발을 동동 구르다가 숨을 크게 내쉬곤 문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문이 쿵 하고 바로 열렸다. 뭐야, 안에 사람이 있었어? 아니, 여긴 에스티안의 개인 숙소니까 그러면 안에 있던 사람은…….

“아델린. 그대가 맞았군.”

곧바로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에스티안과 눈이 마주쳤다.

아, 어떻게 알고 대체. 바깥에 누가 왔는지를 알려 주는 장치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 속으로 생각하던 모든 말을 전부 까먹었다.

“저, 친구가 왔습니다. 케이크 드세요…….”

분명 맹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입 밖으로 흘러나간 말은 더욱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친구가 왔다니. 케이크 드시라니. 무슨 동요도 아니고, 빵집 홍보도 아니고!

뒤늦게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밀려온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고개도 아예 푹 숙여 버렸는데, 그 순간 익숙한 그의 숲 향기가 나를 감싸 안았다.

“그대가 와 줘서 너무 기뻐, 아델린. 친구라는 말은 여전히 화가 나지만…….”

와 줘서 기쁘다니. 그가 내 목덜미 가까이에 대고 말을 해서 뒤의 얘기는 잘 못 들었지만, 그의 격한 반응만으로도 나는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꽉 끌어안은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강렬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한 손에는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고, 너무 놀란 나머지 한 손은 그저 떨어뜨린 채로 가만히 서 있는 상태였는데도 마치 마주 안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렇게 좋은데 뭘 그렇게 고민했을까.

나는 에스티안의 안내를 받아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말했던 대로 내부는 정말 깔끔하고 깨끗했다. 벽부터 바닥, 테이블 등 대부분이 반질반질한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고 관리도 잘한 듯 먼지도 없었다.

이전의 삶과 지금을 모두 통틀어 남자의 집에 처음 와 어안이 벙벙해진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이끌어 티 테이블에 앉힌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찻잎까지 우려 차를 내왔다. 그에 나는 상자를 열어 작은 케이크를 꺼냈다.

“작아서 이건 지금 다 드셔도 될 거예요. 큰 걸 사면, 따로 보관하기가 어려우실까 봐……. 생크림, 좋아하시잖아요. 속에 딸기 같은 것도 들었대요.”

에스티안이 케이크를 보고 놀라서 눈이 커졌기에 나는 변명하듯 이 얘기 저 얘기를 꺼냈다.

그와 축제를 구경했을 때 그가 이것저것 다 잘 먹었던 걸 생각하니 내가 사 온 케이크가 너무 작아 보여 크기 얘기도 하고, 또 생크림만 위에 덜렁 발라진 게 아니라는 점도 언급하고 싶어 그 얘기까지 했다.

민망해서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오는데, 에스티안이 얼굴을 가리고는 낮게 웃기 시작했다. 

“이런 걸 사 올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아델린, 그대는 늘, 정말 늘 내 예상을 뛰어넘어 버려.”

“하하…….”

너무 기쁘다는 듯 웃는 그의 모습을 보니 나도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 정도 마음에 드니까 저렇게 웃는 거겠지?

우리는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함께 나눠 먹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평소보다 왠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말을 주고받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궁에 온 거였군. 평기사가 자살할 줄은 몰랐는데. 너무 계획적으로 그대를 노린 일이잖아.”

“그런 것 같죠? 저 별로 저택 밖으로 돌아다니지도 않는데 누가 그런 건지 모르겠어요.”

“한 번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두 번 안 하리라는 법은 없어. 항상 조심해, 아델린. 생각 같아서는…… 하.”

사실 어느 정도 내 손을 떠나 버린 일이라 생각했기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그러나 에스티안은 고맙고 설레게도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같이 분노해 주었다.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을 만나는 건 귀찮고 방에 혼자 박혀 있는 게 제일 편한 게 맞으면서도, 에스티안을 이렇게 만나고 그에게 내 일거수일투족을 얘기하며 그가 화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오히려 너무 즐겁고 계속하고 싶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커졌는지 알 만했다. 우리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제가 또 눈치 있게 리아나를 황태자 전하와 붙여 두고 왔지요. 황태자 전하께서 평복까지 입고 나가시는 그런 자리에 리아나가 같이 가면 좀 더 친해지고 좋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아델린, 그렇게 둘이 함께 있도록 만들어 놓고…… 그대는 나에게 온 건가?”

리아나와 함께 있었다는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레 유리엘 얘기까지 흘러간 거였다.

그래서 저렇게 얘기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나’에게 왔냐니, 사람 속도 모르고 그런 모호한 표현을 잘도 쓴다, 정말!

씩 웃으며 은근하게 물어오는 걸 보니 에스티안은 분명 나를 놀리고 있었다. 어딘가 커플을 이어 주고 너는 뭐 하냐는 뉘앙스를 풍기는 듯해 나도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어. 네, 뭐 그런 셈이지요. 여, 여기로 왔죠, 제가. 에스티안 경도 제가 와서 좋지 않으세요? 적적하지 않고.”

“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겠어.”

저렇게 진심으로 좋아하는 얼굴로 말해 주다니. 따뜻하게 빛나는 푸른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최근 에스티안은 근무에 치이고 훈련에 치여 아주 바쁘고 고단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게 분명했기에 이런 휴식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그 휴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내가 더 기분이 좋고 기뻤다. 덤으로 설레고 떨리기까지.

하……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이미 얼굴이 새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에스티안의 숙소 안이 완전히 밝은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아, 그리고 오늘은 리아나네 어머니도 입궁하셨거든요. 이전에 보고 꽤 오랜만에 뵌 거였어요.”

그리고 그녀는 어딘가 수상해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직 이 얘기를 하는 건 시기상조인 것 같았다. 그녀의 얘기까지 꺼내는 건 정말 내 추측과 상상을 과장해서 말하는 거나 다름없을 것 같았다.

그녀를 만났다는 내 말에 에스티안도 크게 반응하지 않고 그저 그 사람도 왔군, 하는 식이었다.

에스티안이 오후에 마물 퇴치를 대비하는 훈련이 있다고 해서, 우리의 대화가 아주 길게 이어지기는 어려웠다.

그는 정말 코앞으로 다가온 마물 토벌 때문에 요새 눈코 뜰 새 없이 훈련한다고 했다. 일반 사냥도 아니고 마물을 잡으러 단체로 나가는 것이라 다른 기사들과 합을 맞추고 대열을 짜는 게 중요해, 늘 모여 훈련해도 모자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는 그와 계속 얘기를 나눌 수 없어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기사단장으로서 책임감 있게 의무를 다하는 모습이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저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축제 끝나고 곧장 출발이라고 하셨죠? 아직 그래도 축제가 좀 남았는데도 제대로 못 즐기시고 훈련하시는 거, 정말 대단하세요.”

“축제는, 그때 그대와 즐긴 것으로 충분했어.”

“헛…… 저도 그때 너무 즐거웠어요. 그 이후로 저도 사실 축제 구경하러 더는 안 나갔거든요.”

마주 보고 웃으면서 눈길과 따뜻함이 서로에게 전달된 것 같았다.

에스티안이 이것에 대해 미묘한 관계라는 생각을 할 수도, 아니면 단지 친구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게 상관없을 정도로 함께 대화하고 시선이 오간 게 좋았다.

곧 갈 훈련을 위해 황실기사단장 제복을 걸쳐 입기 시작하는 그의 움직임이, 마치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간다는 듯 어딘가 느릿느릿해 웃음이 또 나왔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또 나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마물 토벌하러 출발하시기 전에, 공작가로 또 손수건에 자수 놓아서 보내 드릴게요. 징표처럼요. 다치지 말라는 의미에서…….”

“손에 또 붕대를 잔뜩 감고 올 거라면 안 만들어 줘도 돼.”

그는 슬쩍 웃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이제는 잘 만들어서 정말 괜찮은데!

솜씨가 좀 늘어서 꽃 정도는 나쁘지 않게 놓을 것 같다고 큰소리를 친 뒤 무슨 자수를 놓아 줄까 고민했다.

저번엔 감사의 의미였고, 이번엔 사실 안전의 의미긴 한데 그런 꽃말을 가진 꽃 같은 걸 내가 알 리가 없었다. 이번에도 엘한테 물어보고 만드는 게 나을까?

아, 엘?!

‘프리모스 꽃이라고, 붓꽃의 일종인데 정말 예쁜 꽃이 있어요. ……사실은 어릴 때 그 꽃을 본 기억이 있거든요.’

순간적으로 엘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키우기도 어렵고 찾기도 어려운 꽃을 어릴 때 본 적 있다고 했던 엘. 저때도 분명 엘이 보통 아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

나는 일종의 테스트를 해 보기로 했다. 내 감을 살피기 위한, 그리고 에스티안과 엘을 위한 테스트를.

“프리모스 꽃이라고, 이런 식으로 꽃잎이 좀 기다란 건데요. 저희 저택 정원에 예쁘게 피어 있거든요. 그게 꽃 피우기가 어려운 거라던데, 모처럼 가득 피었어요.”

“…….”

“그렇게 꽃이 피는 건 드문 일이고, 그건 곧 행운을 의미하니까 마물 토벌 하실 때도 모든 운이 에스티안 경을 따랐으면…… 하는 그런 의미를 담아서 이 꽃을 수놓아 드려도 될까요?”

에스티안이 모를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열심히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여 꽃 모양을 설명한 뒤 그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리고 말을 하려다 멈추고 살짝 놀란 듯 굳은 그의 표정을 보니, 내가 틀린 건 아닌 듯했다.

“에스티안 경? 혹시 그게 마음에 안 드시면…….”

“……아니, 좋아. 사실 그대가 해 주는 거라면 뭐든 상관없지만, 조금 놀라서.”

“왜요?”

“그 꽃, 동생이 좋아했던 꽃이거든. 향기가 좋다고. 내 코에는 꽃치고 독한 향이 나는 것 같아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동생은 많이 좋아했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이건 단서가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간 거였다. 아무리 우연이라 해도 똑같은 꽃에 대해 똑같은 감상을 보이는 경우가 그렇게 많을까?

물론 꽃 한 송이를 들이밀며 ‘이게 바로 너희가 남매인 증거다!’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기에 울렁거리는 마음은 참아야 했다. 엘은 아직도 기억을 열심히 찾아가고 있으니까, 괜히 서두르다가 역효과가 나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다음 말했다.

“혹시, 동생분과의 추억을 제가 괜히 건드리게 되는 거라면…….”

“그렇지 않아. 오히려…… 고맙지. 동생이 좋아하는 꽃에 그대가 의미를 부여해 주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에스티안은 노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맑고 따뜻하지만 묘하게 씁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 마음이 다 욱신거릴 것 같은 표정이지만, 적어도 싫어하거나 언짢아하는 건 절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더 그리워하고 있는 거겠지. 다시 한번 책임감이 솟구쳤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예쁘게 만들어 드릴게요. 에스티안 경에게 정말로 행운과 행복을 다 가져다줄 수 있도록.”

*

다른 영애들과도 티타임을 거의 안 가진 내가 에스티안 경의 개인 숙소에서, 그와 함께 생크림 범벅인 케이크를 먹게 될 줄이야.

아까 리아나, 리아나네 엄마와 함께한 티타임이 숨 막히고 괴로웠던 것과는 달리 가는 시간이 아쉽기만 해 신기하면서도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에스티안이 훈련을 하러 떠나면서 나를 마차 앞까지 데려다주었고, 곧 기다리던 쥴이 모습을 보였다.

“티타임은 잘 가지셨습니까? 뭐,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네요.”

“하하…… 쥴 경이 아까 도와주신 덕이지요.”

“이제 저택으로 가시는 건가요?”

그래야겠다, 하고 생각한 순간 머릿속에 평기사의 가족이 떠올랐다.

내가 아까 그렇게 말했으니 아마 그 가족에 대한 추궁이나 수사는 강하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사건을 저지른 한 사람 때문에 그 가족이 피해 보는 것은 안타까운 게 맞기에 그렇게 얘기한 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죽을 뻔했던 것을 그저 넘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적어도 누가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정도는 파악하고 싶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러나 쥴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같이 평기사의 집을 찾아가 그 가족들을 만나겠다고 했을 때 돌아온 건 칼 같은 거절이었다.

“저 혼자 간다는 게 아니고, 쥴 경에게 같이 가 달라고 하는 거예요. 혼자서는 저도 못 가죠.”

“그게 문제가 아니지요. 가족들이 만약 그자와 한패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가씨 얼굴을 보고 기억해 뒀다가 혹시라도 이후에 또……!”

쥴은 이럴 때 보면 동생을 걱정하는 오빠 같기도 했다.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미 나대로 정보를 알아내고 싶어 마음을 먹은 상태였기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가족들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한패가 아님을 보여 주는 거예요. 황궁에서 기사들이 가서 물었을 때도 모른다고 했대요.”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제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쥴 경에게 그런 식으로 심부름을 시킬 수는 없어요. 같이 갈 거예요. 호위 기사시잖아요.”

“……아가씨.”

결국 타협하여 나는 마차 안에만 있고, 쥴이 바깥에서 가족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대신 나도 그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어야 하니 마차 앞에서 얘기를 하기로, 그리고 말할 것들은 내가 미리 쥴에게 일러 주기로 했다. 또한 얘기가 진행되다가 내가 궁금한 게 생기면 마차 안쪽을 살짝 쳐 쥴이 그걸 파악해 대신 물어볼 수 있게 하자고도 했다.

미리 전해 들은 평기사의 집 앞으로 마차가 향했고, 마차는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

곧 쥴이 그 가족들을 불러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 나도 귀를 기울였다. 쥴은 내가 말했던 대로 가족들을 먼저 안심시켰다. 저렇게 먼저 해 놔야 무슨 정보든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여기서 내게 말하는 모든 것은 절대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니 안심해도 좋다. 나는 내 주군의 명령을 받아 자네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들으러 온 것이고, 자네들은 하나의 거짓도 없이 사실만을 얘기해 주면 돼. 그렇게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이 끝날 것이다.”

“예, 예에…….”

다행히 어느 정도 경계를 푼 그들은 쥴이 묻는 대로 대답했다.

그리고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들이 그 평기사, 즉 자신들의 아들이 한 짓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저 그들은 최근에 아들이 갑자기 죽어 혼란스럽고 슬픈 가족일 뿐이었다. 가족한테는 아예 비밀로 했던 게 맞구나.

“그, 그런데 이, 이번에는 어디서 온 기사님이신가요? 저번에는 화, 황실에서 기사님들이 오셨었고, 또 그 전에도 웬 기사님이 오셔서…….”

그 순간 떨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내 주의를 잡았다. 아마 평기사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듯했다. 분명 그녀는 황실 기사들이 아니고 다른 기사 하나가 왔었다는 것처럼 얘기했다.

황실에서 기사들이 오기 전에도 기사가 왔다 갔다고? 나는 다급하게 마차 안쪽을 작게 쳤다. 곧 쥴이 입을 열었다.

“황실 기사단 사람들이 아닌 다른 기사가 다녀간 적이 있었나?”

“예, 워낙 기세가 무서운 기사분이셔서 기억합니다. 검은 갑옷 겉으로 검은 천을 두르고, 얼굴에도 눈만 빼고 천을 둘러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여러 번 오셨어요. 와서 아들놈을 몇 번 따로 보기도 했고요.”

“다른 기사가 와서 그를 따로 본 적이 있었어? 이 얘길 황실기사단이 와서 추궁했을 때도 했나?”

“아, 아뇨. 딱히 그런 건 물어보지 않으셔서 말하지 않았어요. 중요한 것도 아니라고 새, 생각했는데……. 저희는 그저 아들놈이 하급 기사 생활을 한다기에 선배 기사가 오신 거라고 생각했지요. 키, 키도 아주 크셨고, 그, 무엇보다 오른쪽 눈에 큰 흉터가 있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눈만 보이는데 거기 흉터가 있었으니까요.”

그 얘기를 들은 즉시 쥴은 침묵했다. 나 또한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마차를 두드리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오른쪽 눈에 큰 흉터가 있는 키 큰 기사. 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쥴도 그를 본 적 있을 것이다. 그는 리아나의 호위 기사 중 한 명이니까.

무섭다거나, 끔찍하다거나, 놀랍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덤덤했고, 내가 왜 미처 리아나를 생각하지 못했나 싶기까지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먹먹했다. 또 황태자 때문인가?

나는 리아나와 황태자를 한자리에서 볼 때마다 늘 둘을 붙여 두려고 했는데. 그리고 몇 번이나 나는 황태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도 했던 것 같은데.

결국 리아나는 나를 아예 안 믿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아델린은 리아나의 오랜 친구인데. 이런 일을 벌일 정도로 황태자에 대한 리아나의 마음이 깊었던 건가?

설마 아델린이었을 땐 이런 일이 없었고, 내가 그녀를 대하면서부터 이렇게 꼬인 것은 아니겠지.

리아나가 사람까지 시켜 나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에 대한 충격보다, 그냥 그녀가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씁쓸한 마음이 더 컸다.

“……오른쪽 눈에 상처라. 알겠다. 그것 말고 또 특별한 사항은 없나?”

“예, 그 외에는 황실에서 사람들이 찾아오시고…… 아, 아들놈의 옷에서 이상한 걸 발견해서 놔두긴 했습니다. 이건 황실 측에서 농약의 일종이라고 하셨어요. 작은 병이 여러 옷에 전부 다 들어 있었습니다. 그, 그거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그리하게.”

잠시간의 침묵 뒤 쥴은 다시 말을 이었고, 가족 측은 사건을 저지른 자가 자살하는 데 썼던 농약이 든 병을 갖고 오려는 것 같았다.

그 얘기를 들으니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

여러 옷에 농약 병을 하나씩 넣어 놨다는 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자살할 수 있게 미리 준비를 해 둔 게 아닌가.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치밀하고 잔인한 것 같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집을 떠나 시내 쪽으로 향하다가 답답해진 나는 잠시 마차를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이 없는 공원 터에 나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뻐근한 목도 이리저리 꺾고, 고개를 들어 하늘도 좀 쳐다봤다.

변하는 건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는데 바로 옆에 그림자가 졌다. 아까보다 훨씬 어두워진 표정의 쥴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애써 웃었다.

“쥴 경 덕분에 혼자 갈 수 없던 곳을 다녀왔는데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요?”

“……역시 제가 혼자 다녀올 걸 그랬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절대 안 되죠. 혼자 다녀오셨다면…… 저에게 아무것도 안 알려 줬겠죠.”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쥴의 말에 풋 하고 웃었다. 어차피 무언가를 알게 된 이상, 아무것도 몰랐던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입술을 깨물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피곤하실 텐데 저택으로 바로 가라고 하겠습니다.”

“아직이요. 하나 남았잖아요. 아까 쥴 경이 받은 그 농약 든 병. 그것만 같이 확인하러 가 주세요.”

“……저는 아가씨가 더 이상 상처받는 건 보고 싶지 않은데요.”

“상처 안 받았으니까 걱정 마시고요. 뭐, 충격은 좀 받았네요. 그러니까 더 확인하고 싶어요.”

쥴은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살짝 숙였다. 명을 받들겠다는 거였다.

곧 마차는 다시 출발하여 시내에 있는 가장 큰 농원으로 향했다. 각종 꽃과 나무 분재, 열매, 씨앗, 비료 등을 비롯해 농약까지도 전부 취급하는 대규모 화훼 단지 같은 곳이었다. 황실이나 귀족가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나무나 대형 화분 등도 모두 여기서 취급했다.

나는 수국 화분을 고르는 척하며 쥴의 옆을 맴돌았고, 쥴은 농원의 주인에게 슬쩍 병을 건넸다.

주인은 병 안에 든 액체를 어딘가에 덜더니 작은 화분을 가져오는 등 여러 가지를 살핀 다음 입을 열었다.

“이건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꽃보다는 과일 나무 종류에 쓰이는 농약입니다. 좀 독하기 때문에 사용하실 때 정말 조심하셔야 하긴 해도, 그만큼 열매 맺게 하는 데는 효과가 아주 좋거든요. 그런데 지금 쓰는 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과일을 재배하는 시기가 아니니까요.”

“그러면…….”

“좀 더 있어야지요. 그래서 정원을 관리하시는 분들이나 농장 운영하시는 분들도 아직은 이걸 찾지 않는데, 비교적 최근에 이걸 딱 사 가지고 간 댁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어디였나?”

“엘리디트가였습니다.”

죽을 걸 알면서도 사형선고를 대체 뭐라고 하는지 궁금해 일부러 듣는 게 이런 느낌일까. 쥴은 숨을 헉 하고 삼켰지만 나는 더 이상 숨이 넘어가지도 않았다. 그렇구나, 싶은 생각뿐이었다.

농원을 나와 다시 마차에 몸을 싣고 저택으로 향하는 내내 머릿속은 여러 생각으로 휘몰아쳤다.

리아나를 잠시 떠올렸지만 금방 생각은 나 자신에게로 흘렀다.

지금뿐이 아니고 이전의 삶을 돌이켜 봐도 내가 그렇게 원한과 적의를 살 만한 행동을 했던가. 항상 나는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눈에 띄지 않게 조용조용 지내 왔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내가 용기 내서 시도한 거라곤, 단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나 마음이 간다고 느껴진 걸 행한 것뿐이었다. 그 결과는 치밀하기 그지없는 살해 시도인 건가.

뒤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거 말고도 고민해야 할 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일단은 좀 가만히 있고 싶었다.

저택에 도착하면 보통 쥴은 저택의 거실 정도까지만 나를 호위하고 자신의 저택 내 숙소로 간다. 하지만 오늘 그는 방문 앞까지 나를 호위했다. 계속 얼이 빠져 있는 나를 위해서겠지. 나는 밝은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저 때문에 이리저리 돌아다니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원래 그런 건 쥴 경께서 하실 일이 아닌데. 제가 억지로 부탁드린 건데도 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야말로 오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따뜻하게 푹 주무십시오.”

“네. 아, 오늘 있던 모든 일은, 부모님께 비밀로 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아가씨,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두 분도 아셔야 해요. 어차피 황궁에서도 계속 수사를 진행할 텐데…….”

“그냥 사고를 친 사람이 자살해서 더 이상 증거를 찾기가 어렵다더라 뭐, 그 정도로만 전해 주세요. 오늘 저희가 보고 겪은 것들을 말씀드리면 분명 걱정하실 거예요. 그건…… 좀 그래요.”

“……아가씨.”

쥴은 끝까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지만, 몇 번이나 부탁하는 내 말에 결국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들이고 내가 사교계 생활을 했다 안 했다 하는 것에 내심 우려를 표하는 분들인데 더 큰 걱정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따로 나와 사는 동안 부모님께 전화가 오면 아무리 아프고 괴로워도 저는 잘 살고 있어요, 하고 대답하는 딸을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적 있는데, 마치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작 진짜로 나를 낳아 준 부모님과는 너무 빨리 헤어지고, 뚝 떨어진 이곳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니.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어차피 오늘 만나고 온 평기사의 가족이나 농원 주인에게도 다른 곳으로는 절대 오늘 일을 얘기하지 말라고 입단속도 시켜 놨다. 만일을 대비해 그들을 보호하는 인력도 배치해 두었다.

일단 내가 더 알아보면서 퍼즐을 완벽히 맞추기 전까지는 조용히 넘어가게 하고 싶었다.

평소보다 기분이 가라앉은 나를 보고 안나는 특별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이 진정되고 편해지도록 은은한 향기가 나는 목욕 소금을 물에 풀어 주며, 피아노 같은 건반 악기가 연주되는 잔잔한 음악을 틀어 준 뒤 평소보다 천천히 목욕 시중을 들었다.

완전히 지치고 풀어진 나는 거의 반수면 상태로 침대에 눕게 되었고, 안나는 마지막으로 이불을 정리해 주며 속삭였다.

“저는 항상 아가씨의 편이에요. 그걸 잊지 마시고, 아가씨도 늘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 주세요.”

따뜻한 그녀의 말에 나는 작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곧바로 잠들었다.

*

그 일이 있고 난 뒤 이틀 정도는 내리 잠만 잤다. 정신적으로 피로해서였는지 자도 자도 졸려서 그냥 잤다. 어차피 깨어 있어 봤자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모처럼 정말 푹 쉴 수 있었다.

쥴은 내 말대로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부모님이나 안나도 그저 내가 오랜만의 황궁 나들이로 지쳤다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쉬고 나니 멍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자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축제가 끝났고, 마물 토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사실 알아보고 싶은 게 많았고,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도 많았지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프리모스 꽃을 손수건에 수놓기 위해 준비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머리가 복잡해도 에스티안을 가장 먼저 챙기고 싶은 마음이 들다니. 대단한 친구 납셨네. 정말 갈 데까지 갔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정원으로 나가 아예 작정하고 프리모스 꽃 한 송이를 꺾은 나는 준비물을 챙겨 정원에 앉았다. 토벌 시작 전에 이걸 에스티안에게 무사히 건네주고 싶은 마음에 손이 빨라졌다. 그리고 나는 일부러 치료를 막 끝낸 엘도 정원으로 불렀다.

“어? 아가씨! 이번엔 프리모스 꽃 수놓으시는 거예요? 우와, 너무 예뻐요!”

“사실 아직 어설픈데 엘이 마음씨가 좋아서 그렇게 봐 주는 거예요. 제가 며칠 잠만 자서 엘이 치료 잘 받고 있는지도 확인을 못 했네요. 어때요, 괜찮은 것 같아요?”

“헤헤, 아가씨가 정원으로 나오시면 얘기해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 되게 많이 기억났거든요.”

엘의 말에 나는 들고 있던 바늘을 떨어뜨릴 뻔할 정도로 놀랐다. 되게 많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분명 맞춰질 정보가 있을 터였다.

“정말 다행이에요. 얼른 엘이 전부 기억을 찾아서, 가족들도 꼭 찾아 만나게 되면 좋겠어요. 어떤 기억이 났는지 나한테도 얘기해 줄 수 있어요?”

“그럼요. 음…… 저는, 길에서 살기 전에 생각보다 사랑받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요. 가족들의 얼굴은 아직 좀 희미한데, 다 같이 즐겁게 지냈던 건 분명하게 기억났거든요.”

엘이 정말로 밝게 웃으면서 즐거운 기색을 보이기에, 적어도 안 좋은 기억을 꺼낸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떠오른 것들을 꼽아 가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맛있는 걸 해 주셨어요. 특히 케이크나 빵 종류를 잘 만들어 주셨던 것 같아요. 제가 생크림을 좋아하는 게 어머니가 원래 그런 걸 잘 만들어 주셔서였나 봐요! 근데 그런 걸 너무 많이 먹으면 이가 썩으니까 또 안 된다고도 하셨어요.”

생크림이 진짜 어릴 적과 관련이 있었구나. 나는 머릿속 한편으로 엘과 똑같이 어릴 적의 기억으로 생크림을 좋아한다던 에스티안을 떠올리며 계속 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아가씨가 지금 수놓으시는 프리모스 꽃도, 어릴 때 있던 집에 많이 피어 있던 거였어요! 가뜩이나 키우기 어려운 꽃인데 제가 맨날 밟고 다니고, 꽃밭 사이로 뛰어다니고, 향기 좋고 예쁘다고 꺾어 가고 그래서 혼났던 기억도 있더라고요. 헤헤.”

그리고 역시 희귀한 꽃인 프리모스 꽃도 엘의 과거와 연관된 것이었다. 의아하다고 생각했던 게 다 맞아떨어지니 점점 출구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가장 신기했던 건, 남자 형제가 있었다는 거예요! 치료사님과 사제님이랑 얘기하는데, 계속 부모님 아닌 다른 사람과 어린 시절을 많이 보낸 기억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다른 가족이거나 저를 도와주는 분인 줄 알았는데 남자 형제였어요. 같이 맨날 케이크 먹고, 꽃밭에도 늘 가서 같이 있고 그랬던 기억이 났어요. 근데 얼굴까지는 기억이 안 나서, 오라버니인지, 동생인지…….”

“오라버니! 오라버니예요!”

엘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나를 거의 출구 밖으로 꺼내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져서는 멋대로 말이 나가 버렸다.

“네에?”

“아…… 그, 오라버니……가 아닐까 해서.”

“아가씨는 그렇게 생각하세요? 사실 저는 아직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아서요.”

“아, 그렇죠. 그렇죠. 미안해요. 내가 억지로 엘의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건 아니고. 그냥 나는, 어…… 엘이 워낙 귀여우니까 남동생보다는 오라버니 쪽이 왠지 있었을 것 같아서…….”

“헤헤, 아가씨만 저를 그렇게 보시는 거라니까요.”

귀여우니까 오빠가 있을 거라니, 이게 무슨 멍청한 말이야. 너무 당황해서 급하게 아무 말이나 둘러댔는데도 엘이 크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냈다는 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나 관심 있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거라는 것도, 그리고 비록 내가 얘기한 것일지라도 오빠의 존재를 떠올린 것도 모두 의미 있는 성과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의미 있는 건, 엘의 생각이 긍정적인 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조금씩 생각나는 가족들과의 기억이 모두 행복하고 좋은 것들뿐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마 버려진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많이 사랑받았던 것 같으니까, 저를 잃어버린 다음에 가족들이 저를 안 찾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은걸요.”

에스티안과 엘이 남매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는 나는 마음이 씁쓸해졌다.

버려지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일 거란다. 너희 오빠는, 그리고 너의 가족은 지금도 너를 애타게 찾고 있단다.

그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아직은 일렀다. 이대로 천천히 엘이 기억을 찾는다면, 분명 가족과 떨어지게 된 순간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둘을 만나게 해야 서로에게 지나친 충격이나 놀람이 없을 테니까.

기억에 대한 얘기를 하던 엘은 곧 정원 일을 하러 떠났고, 나는 계속 자리에 남아 손수건에 마저 프리모스 꽃을 수놓았다.

확실히 이전보다 나아진 솜씨라 속도가 금방 붙어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었고, 나는 시녀에게 부탁해 그걸 에스티안이 토벌을 가기 전 최대한 빨리 받을 수 있도록 블라머프 공작가로 보냈다.

이번에 워낙 많은 인원이 다 함께 나가는 거라고 한 데다, 아무리 황태자도 간다지만 그보다 실제 토벌 작업을 할 때 상황을 전부 관리하는 건 에스티안일 거라서 정신없이 바쁠 게 분명했기에, 그저 조심히 잘 다녀오라는 뜻에서 손수건만 급히 보낸 거였다.

“아가씨, 에스티안 황실기사단장님께서 꽃을 한가득 보내셨어요. 세상에, 너무 아름답네요!”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나는 내 몸보다 큰 아리사 꽃바구니를 받게 되었다. 꽃말은 너무나 잘 알다시피 따뜻함, 감사, 그리고 애정.

오늘부터 마물 퇴치 작업이 시작되니 그는 꽃을 보내고 곧장 토벌하러 뛰어들었을 것이었다. 이게 뭐라고 마음이 두근거리다 못해 얼얼하고 먹먹하기까지 할까.

은은하게 퍼지는 꽃향기를 맡고 있으니 설렘과 동시에 모종의 책임감과 사명감이 더불어 떠올랐다. 마물 토벌은 못해도 일주일 정도는 지속될 테니까, 나는 그동안 치료사와 사제들을 최대한 지원하고 북돋아 주면서 엘이 얼른 기억을 찾을 수 있게 하면 딱 될 것 같았다.

마물 토벌을 무사히 마치고 온 에스티안의 품에 선물로 잃어버렸던 동생을 다시 안겨 주는 거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다 당신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고백도 해야지.

뭐, 고백한 뒤 이어지고 자시고 하는 것에는 아직 관심도 없었다. 그저 쓸쓸했던 그들의 삶에 얼른 가족이라는 조각을 끼워 주고, 점점 커진 내 마음을 얼른 전하고 싶었다. 완벽한 계획을 짜고 나니 힘이 났다.

*

“어젯밤에도 북쪽 숲에 큰 마물이 많이 나타났는데 기사단이 전부 토벌했다고 하더구나.”

“밤에 갑자기 나타난 거라 다들 우왕좌왕할 법했는데도 침착하게 금방 대열을 짜서 무찔렀다고 했단다. 부상자조차 없었다고 하는구나.”

“역시 이번 토벌에서도 에스티안 황실기사단장님이 가장 많은 마물을 잡고 계시대요. 황태자 전하보다도 더요.”

토벌이 진행된 뒤부터 매일 나의 아침은 부모님, 그리고 안나 등으로부터 마물 토벌의 상황 얘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쥴도 토벌하러 나가 있는 상태였고 기본적으로 제국 내 큰 행사인 만큼 어디에서나 토벌 소식을 접할 수는 있었지만, 저택의 사람들은 나와 에스티안의 관계를 신경 쓰며 몇 번이고 정보를 더 알려 주었다.

사실 에스티안과 나는 정확히 무슨 관계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상태이지만, 나로선 일단 소식을 최대한 많이, 자주 전해 준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엘은 이전보다 어릴 때를 아주 많이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기억 대부분이 살아난 것에 가까워졌지요.”

“본인이 기억을 되찾아 그걸 통해 가족을 만나야겠다는 의지가 아주 강해서 진행이 빠른 것 같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엘과 대화하며 직접 기억이 얼마나 났는지 얘기를 듣고 치료사와 사제들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다시 전해 듣는 게 또 하나의 일과였다.

엘이 해 준 이야기와 치료사들이 해 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오늘까지 그녀는 자신이 꽤 부유한 집의 딸이었다는 것, 그냥 남자 형제가 아니고 진짜 오빠가 있었다는 것, 어느 순간 가족을 놓치면서 자기가 혼자가 되었다는 것까지 생각해 낸 상태였다.

정말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지는데, 치료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가족을 어떻게 하다가 잃어버리게 되었는지는 아직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부드럽게 그 시기쯤의 기억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데 고통스러워하고 쉽게 떠올리지를 못합니다.”

“엘이 고통스러워한다고요?”

“예. 무언가 떠올릴 듯하다가도 두통을 호소해서요. 자기도 기억해 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잘 안 되는 모양이었습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일부러 잊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이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너무 충격적인 일을 겪고 나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아예 좋지 못했던 그 기억 통째를 날려 버리는 것이다.

엘에게 분명 가족을 잃어버린 순간은, 자신의 기억을 그렇게 방어해야 할 만큼 충격적이고 무서웠을 테니 그런 반응이 일어나는 건 당연할 것 같았다.

“절대 억지로 기억해 내지는 않게 해 주세요. 안 좋은 기억이라 아마 그럴 것 같아요. 엘이 힘든데도 일부러 생각해 내려고 하면 그것도 말려 주세요. 무조건 천천히, 엘 스스로가 상처받지 않도록 부탁드려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제대로 떠올리지도 못하고 힘들어하는 걸까.

생각은 곧 엘리디트 백작 부인이 했던 말로 흘렀다.

‘이제 아무도 없지 않나요?’

벌써 시일이 훌쩍 지난 일인데도 마치 조금 전에 들은 것처럼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엘이 가족과 헤어지게 된 것과 그 순간을 떠올리기 힘들어하는 것이 백작 부인과 관계가 있는 거라면. 그렇게 상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로 그런 거라면…….

그 정도의 일이라면 아마 내 손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피해자인 엘과 블라머프가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그리고 아마 제국법을 따르게 되겠지.

그런 일이라면 섣부르게 판단하기가 더욱 어려우니, 나는 우선 엘의 기억만이라도 제대로 찾아 놓는 것에 힘쓰기로 했다.

*

며칠이 흘렀고, 마물 퇴치 작업도 순탄하게 진행되며 거의 끝이 보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였다. 리아나가 유리엘에게 황실 문양을 수놓은 망토를 보냈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물 토벌이 주로 진행되는 지역이 북부의 숲이고, 그곳은 늘 칼바람이 부는 곳인지라 따뜻한 옷이 필수였는데, 그 필수 물품 중 하나인 망토를 아예 토벌 중에 보낸 거였다.

애초에 망토를 보낸 것도 좀 지난 일인데 이제야 소문이 난 듯했고, 토벌 현장에 있는 다른 기사들의 반응도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교계의 반응은 뜨거웠다. 얌전하기만 했던 리아나가 사랑 앞에서는 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낸다며 호기심 어린 채로 신기해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전 같았다면 나도 리아나의 열정을 높게 사며 대단하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아니, 아예 그녀에게 먼저 토벌 나가는 황태자를 위해 무언가 하라고 용기를 북돋아 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리아나를 따로 만나 얘기를 하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뭐가 꼬여서 사냥제 때의 일을 저지른 건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는 쥴과 이것저것을 캐고 다녔을 때 이미 거절당했다. 부모님에게도 알리지 않을 거라면서 왜 그녀를 만나냐는 거였다.

‘혹시라도 따로 그 영애를 만날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죠. 아무리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으니 위험합니다. 대놓고 전부 밝히는 게 아니라면 가만히 계시는 게 좋습니다.’

쥴의 말이 맞았기에 나도 얼마간 리아나 생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하지만 언제든 그녀와 대화할 준비는 하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하고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게 많았기에 늘 하나하나 물어보는 상상을 했다.

조곤조곤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유리엘에 대해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에스티안에 대해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도.

원래 남자 주인공 중 하나인 에스티안은 리아나와 점점 가까워진다는 게 친구 소설의 설정이었는데, 설정이고 뭐고 그녀가 그를 심하게 무서워해서 지금 둘 사이엔 아무것도 없는 게 맞았다.

단순히 나는 에스티안의 소문 때문에, 그리고 그의 차가워 보이는 외모 때문에 리아나가 그를 무서워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그 무서워하는 이유가 엘과 관계가 있는 거라면…….

그런 얘기들을 그녀가 내게 해 줘서 그걸 듣고 난 뒤 내가 무슨 얼굴을 하게 될지까지는 상상이 안 됐지만, 적어도 그런 생각이라도 해 놔야 언젠가 그녀와 얘기하게 됐을 때 당황하거나 놀라서 어버버거리지 않을 것 같았다.

*

“아가씨, 치료사님이 급히 찾으시는데요?”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면서 고민하며 보내던 어느 한가한 오후, 안나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찾았다. 치료사가 날 찾는다니. 치료사는 지금 사제들과 함께 엘의 기억을 찾는 대화를 나누고 있어야 했다.

그가 나를 찾는다는 건 분명 무슨 일이 났기 때문일 것 같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들이 늘 이야기를 나누는 별실로 갔다.

“치료사님, 저를 찾으셨다고…… 엘?”

엘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가만히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놀라서 달려가니 어깨가 잘게 떨리는 데다 손이 잔뜩 젖어 있는 게 울고 있었다.

“엘, 왜 그래요? 혹시 어디 아파서 그래요? 아니면 기억해 내고 싶은 게 있는데 생각이 잘 안 나서 그래요? 너무 억지로 생각하려고 해도 안 좋아요. 걱정 말고요.”

나는 옆에 급하게 앉아 엘을 끌어안고 달래며 눈짓으로 치료사와 사제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곧 그들이 나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평소처럼 대화하면서 옛날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말하다가 갑자기 한 20분 정도 전부터 저 상태입니다. 울기 전에는 오히려 기억들이 다 선명하다며 웃으면서 얘기도 자세히 하고 즐거워했는데도요.”

“엘이 더듬더듬 이야기하긴 했는데, 직접 들어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계속 즐거워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울었다면, 분명 눈물이 나오게 한 기억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직감은 그게 엘의 과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기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울고 있는 엘을 안은 채 토닥였다. 먼저 얘기를 꺼내기보다는 이렇게 해 주는 게 우선일 것 같았다.

엘은 크게 소리 내서 우는 것 자체를 모르는 것처럼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고 그게 마음을 더 미어지게 했다. 투정 부리고 조르는 것 자체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일 테니까.

달래 준 지 좀 지나고, 손길에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은 엘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바로 맞췄는데, 울어서 눈이 빨간 와중에도 어딘가 결연한 빛이 보이는 것 같아 내 마음이 다 두근거렸다.

“아가씨, 저 기억났어요. 저는…… 정말로 버려진 게 아니었어요.”

엘의 입이 열리고 나온 말에 심장이 내 귀에서 바로 뛰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쿵쿵거렸다. 말을 하자마자 다시 엘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졌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닦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부모님이나 오라버니가 모르도록 속이고 혼자 나갔어요. 친구와 가게에서 만나서 장난감을 사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돌아다니기로 했었어요. 그런데…….”

다급한 것처럼 말을 쏟아 내던 엘은 잠시 입술을 깨물며 침을 삼켰다.

“가게가 너무 크고 복잡해서 친구랑 다니다가 친구도 잃어버렸어요. 무서워서 혼자 울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친구를 찾아 준다고 했어요. 저는 그 사람을 따라갔어요.”

나는 재촉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가게를 나가서 어둡고 되게 복잡한 길을 갔어요. 그러다가 이상한 배를 탈 뻔했는데,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서 제가 도망쳤고…… 그다음은 기억이 잘 안 나요. 근데 제가…… 제가 괜히 혼자 나갔다가 그렇게 된 건 확실해요. 제가 잘못해서…….”

엘은 가족이 자신을 버린 게 아니라 자기가 혼자 나가 버려서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된 거라며 자책했다.

헤어진 가족을 찾아 주기 위해 그녀의 기억을 헤집으려고 했던 나 스스로가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자신이 바보 같았다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애써 기억을 떠올리는 모습에 나도 울컥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 얘기 하지 말아요. 엘을 따라오도록 만들었던 사람이 나빴던 거예요. 엘이 잘못한 게 절대 아니에요…….”

치료사와 사제들의 말에 따르면, 아마도 엘이 과거에 그렇게 누군가를 따라갔다가 노예로 팔아넘겨지는 배에서 탈출한 뒤부터 길거리에서 지내게 되었을 것이라 했다.

그 부근의 기억이 듬성듬성한 건 당연히 어린아이가 견디기에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말을 하면서도 엘은 몸을 떨고 있었기에 나는 다시 그녀를 꼭 안았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아가씨 덕분에 옛날 기억도 다 났고, 가족들이 저를 버린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잖아요. 안 그랬다면 저는 계속 가족들을 내심 원망하면서 지냈을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조금 더 그때의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려 얘기를 마무리한 엘은 30분 정도 있으니 금세 침착해졌다.

기억도 거의 다 났으니 정말로 가족을 찾고 싶다고 당차게 말하기까지 하는 걸 보니 그 정신력이 보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공작가의 혈통이라 그런 건가. 이미 여태까지 얻은 정보들로 결론을 내린 나는 지금이 때라고 생각했다.

“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이것도 엘을 위한 거라서, 엘이 좋다고 하면 하고 엘이 조금이라도 싫다고 하면 안 할 거예요.”

엘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말하는 내 모습에 그녀는 잠깐 놀란 얼굴을 했다가 곧 세게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푸른 눈빛에서도 힘이 느껴져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용기를 얻었고, 곧 입이 떨어졌다.

“엘이 기억해 낸 남자 형제, 그러니까 오라버니 있잖아요. 그 오라버니를 제가 찾은 것 같아요.”

*

단장해 주는 안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긴 채 멍하니 가만히 있었다. 에스티안을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엊그제 오후부터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좀 울고, 얘기하고, 다시 좀 눈물을 흘리다가 또 얘기한 다음 끌어안는 것의 연속이었다.

나는 엘에게 그간 나를 찾아오던 기사가 네 오빠일 것 같다고, 그도 네가 기억해 낸 어린 시절에 대해 알고 있다고 모든 얘기를 꺼냈다.

생크림 얘기나 꽃들에 대한 얘기를 할 땐 깜짝 놀란 듯 또 기쁜 듯 활짝 웃다가, 오빠를 비롯해 공작가에서 너를 지금까지도 찾고 있다는 말을 하자 그녀의 눈시울은 금방 붉어졌다. 몇 번이나 가족을 찾아 줘 고맙다는 말을 하며 엘은 눈물을 쏟았다.

‘저는 내일모레 에스티안 경을 만나러 황실로 갈 거예요. 늦은 오후 시간쯤 마물 토벌을 갔던 모든 기사분들이 돌아온다고 했거든요.’

‘아, 아, 정말요?’

‘엘만 괜찮다면 같이 가도 돼요. 사람들 많은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거든요. 황실 내에 마련된 그의 개인 숙소가 있어요. 그곳이라면 엘도 마음 놓고 오라버니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어…….’

‘오라버니를 만난 다음 함께 블라머프 공작가로 들어가면 덜 어색하고 좋지 않겠어요?’

힘든 마물 토벌을 마치고 돌아올 에스티안에게 깜짝 선물 느낌으로 엘을 보여 주고 싶었던 나는 엘에게 먼저 동행을 제안했다.

아직 바깥을 돌아다니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지만, 나와 함께 가는 데다 또 자신의 오빠인 에스티안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엘의 대답은 오히려 내 뒤통수를 한 대 때리는 것 같았다.

‘음……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좋아하는 분을 만나러 가시는 건데. 게다가 오……라버니도 아가씨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는데 그 사이에 제가 낄 수는 없어요. 동생이라면 더더욱요.’

‘엘…….’

‘두 분이 먼저 만나신 다음이어도 충분해요. 그 이후에 저와 같이 오라버니를 만나 주세요.’

‘…….’

‘그리고 황실은…… 사실 제가 아직 감이 안 와서요. 공작가에 들어간다는 것도 실감이 안 나는걸요. 아가씨를 보러 오라버니가 항상 오셨듯이, 우선 여기 정원에서 뵙기는 어려울까요?’

‘……엘이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요. 정원에서 보는 것, 그분도 좋아할 거예요.’

아직 에스티안을 오라버니라고 칭하기가 어색한지 살짝 껄끄러워하면서도 엘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뜻을 얘기했고, 이미 그녀에게 말렸다 생각한 나는 그녀의 말대로 하겠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짜고짜 엘을 데려가는 것보단 내가 먼저 가서 얘기부터 하는 게 순서일 듯했다. 나도 너무 흥분해서 상황 파악을 못 한 거였구나.

에스티안에게 가서 사실 전에 얼핏 얘기했던 애가 당신 동생인 것 같다고, 엘에게 하나하나 설명했듯 그에게도 여러 단서들을 알려 주는 절차가 필요할 것이었다. 그렇게 각자에게 어느 정도 정보가 주어진 다음 만나야 좀 더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까.

“황실까지 호위하겠습니다.”

“쥴 경, 토벌 갔다 온 지 하루밖에 안 지났잖아요. 쉬셔야죠. 다른 기사분을 시켜도 돼요.”

“아가씨의 호위 기사가, 아가씨의 호위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아가씨가 좋아해 마지않는 훌륭한 기사단장님께서 본인이 뒷정리를 다 하신다고 저희를 전부 먼저 빨리 귀가시킨 덕에, 하루 쉬어서 거뜬합니다.”

“……그런 말씀 하시는 걸 보니 정말 별로 안 힘든가 보네요.”

쥴은 어제 토벌에서 돌아왔다. 오래 말을 타고 일종의 전투를 벌인 거나 다름없었기에 좀 지친 것 빼고는 다친 곳이 없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에스티안을 비롯해 황태자나 몇몇 고위 귀족가의 기사들은 오늘, 딱 지금쯤 황실로 돌아가고 있을 터였다. 나는 에스티안을 만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마차에 몸을 실었다.

“황실 전담 시녀가 계속 함께할 테니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쥴은 정중히 인사한 뒤 시녀에게 뭐라 당부를 한 다음 떠났다. 아마 황실 내 마련된 대기실 같은 곳에 가 있는 것이리라.

황실 기사단 기사들이 상주하고 있는 터라 내부에서는 굳이 개인 기사를 대동할 필요가 없긴 했다. 그리고 그는 나와 에스티안 둘만 만나 얘기하도록 알아서 자리를 비켜 준 것이겠지.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이제 진짜 에스티안을 본다는 설레는 마음이 번갈아 계속 일어났다.

마물 퇴치를 하러 간다고 떠났던 게 벌써 까마득했다. 토벌 기간 동안 편지 같은 건 오지 않았지만, 주위에서 들려주는 소식에 의하면 워낙 마물 잡는 데 모두가 힘을 쓰고 있어 그럴 여유가 없는 게 당연할 것 같았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허리를 꾸벅 숙이고 나를 안내하는 시녀의 뒤를 따랐다. 저번에 쥴이 안내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어 주변을 둘러보면서 나름대로 길을 파악할 수 있었다. 혹시 이후에 혼자서 찾아갈 일이 생겨도 길을 잃지 않고 잘 와야 할 테니까…….

아니, 근데 내가 에스티안의 숙소에 왜 혼자서 가지? 분명 쥴이든 시녀든 누군가를 대동하고 올 텐데.

혼자 가면 그의 숙소에는 우리 둘뿐이고, 저번에는 그가 바빠 짧게 있었지만 지금은 토벌도 끝났고…….

콜록, 콜록.

“괜찮으세요?”

“네, 네. 괜찮습니다.”

“말씀 낮추세요, 아가씨.”

허튼 상상을 하다가 사레들려 기침이 나왔다. 숨 막힐 때까지 기침을 해도 싼 상상이었다.

엘이 그의 동생임을 알려 준다는 게 가장 우선적인 목표이고, 그를 보고 싶어 하던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게 그다음 목표인데 주객전도가 된 내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긴, 제법 잦은 빈도로 이렇든 저렇든 보던 에스티안을 이렇게 오래 못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라고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는 거 있어?”

“아뇨, ……어요.”

그때 넓은 황실 복도의 한쪽 구석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얘기하는 건 아닌 듯했고, 얘기를 나누는 소리인 것으로 보아 두 명인 것 같았다.

황제도, 황후도 있고 황태자도 있는 황궁에서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얘길 하고 있다니 간도 크네. 이렇게 누가 들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그냥 지나치고 싶었지만, 괜한 호기심이 내 발을 붙잡았다.

나는 약간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시녀의 어깨를 살짝 쳐 잠시 멈춰 숨어 있다 가자고 손짓했다.

우리는 속닥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기둥들 뒤로 몸을 숨겼다. 조용히 있으니 대화가 잘 들려와 모든 신경을 그곳에 집중했다.

“……런데 왜 기사단장이랑 계속 붙어먹느냔 말야.”

“저도 몰라요. 언제부터 그렇게 가까워져서는…….”

기사단장, 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들리는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어 본 적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장 머리를 슬쩍 움직여 대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리아나와 그녀의 엄마인 엘리디트 백작 부인이었다.

저들이 여기는 왜 와 있지? 아, 마물 토벌 끝나서 설마 황태자를 보러 온 건가. 리아나만 온 것도 아니고 엄마까지 오다니 대단하구만. 게다가 와서는 얼핏 들어도 수상한 얘기를 하고 있고.

그녀들은 숨길 생각도 없는지 손짓도 크게 해 가며 얘기 중이었다.

멀리서 보고 있는 것임에도 그녀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노기를 띠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 애쓰며 더욱 귀를 기울였다.

“설마 아델린이 그 여동생 일에 대해 아는 거 아니니? 그게 아니라면 대체 왜 자꾸 둘이 같이…….”

“아니에요, 그건 아닐 거예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때 어머니께서 확실히 해결했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데려간 다음에요. 저는 기억도 잘 안 난…….”

“그래, 분명 해결했지. 그래도 만일이라는 게 있잖니. 이런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야. 그러면…….”

“그렇게 되면 저번처럼…….”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중요한 단어들은 다 들은 것 같아 천만다행이었다.

그들이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번뜩였기에, 더 이상 여기에 있다간 들킬 것 같아서 나는 다시 시녀에게 앞장서 달라고 부탁했고, 금방 그 자리를 떴다.

에스티안 얘기도 나왔고, 내 이름도 나왔고, 여동생이라고 하는 단어도 나왔다.

부분 부분 들린 단어들이어도 내가 갖고 있는 추측을 더해 보니 대충 가정이 세워졌다.

리아나와 엘리디트 백작 부인은 나와 에스티안이 같이 있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었고, 같이 있는 이유든 같이 있으면 불안한 이유든 그게 전부 여동생이라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여동생이 없으니 그건 당연히 에스티안에 대한 얘기일 것이고, 그러면 곧 지금은 잃어버린 줄로만 아는 엘에 대한 얘기라는 건데.

‘이제 아무도 없지 않나요?’

엘리디트 부인의 음산했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늘 상상하려고 폼만 잡다가 그 상상이 너무도 소름 끼치고 또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해 흘려 넘기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늘 뿌옇게 산발적으로 떠오르기만 했던 것들을 한데 뭉쳐 구체화해 봤다.

황태자의 비가 될 가능성이 있는 에스티안의 여동생 엘을, 어렸을 적 엘리디트 부인과 리아나가 어떻게 해 버리려고 했던 거라면.

아니, 이미 어떻게 해 버렸고, 그저 운 좋게 엘이 살아남아 나를 만나게 된 거라면.

그리고 이제야 엘이 에스티안을, 그리고 블라머프 공작가를 만나기 직전인 거라면.

당사자들은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거고, 이건 아직도 내 생각에 불과했다. 엘이 모든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좀 더 구체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앞서 걷던 시녀를 잠시 잡았다.

“아까 저와 같이 있을 때, 다 들으셨죠.”

“……송구합니다, 아가씨. 뒤에 있으려고 했는데…….”

“얼마나 기억하고 있어요?”

괜찮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는 말에 시녀는 겨우 입을 떼어 자신이 들은 것에 대해 얘기했다. 내가 들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얘기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만 몰랐을 뿐, 제대로 다 들은 상태였다.

내가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만 끄덕이자 그녀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무릎까지 꿇었다.

“정말 송구합니다, 아가씨. 잘못했어요.”

“아뇨, 이럴 필요 없어요. 일어나도 돼요. 들은 걸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니 걱정 말아요. 오히려 반대예요. 조금 전에 들은 얘기를 지금 아주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걸 절대 잊어버리지 말아 달라고 하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잊지 말아 달라고요?”

“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기억에 제가 신세를 질 수도 있을 거라서요.”

이름이 소니아라는 그녀에게 돈을 꺼내 쥐여 주었다. 절대 적은 양이 아니었고, 그녀는 이 요상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하면서도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내가 말한 대로 잘 기억하고 있겠노라고 대답했다.

이후에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나와 얘기를 같이 들은 증인 역할을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다시 한번 그녀에게 확인을 받은 후, 나는 다시 그녀의 뒤를 따라 에스티안의 숙소로 향했다.

“아직 기사단장님께서 돌아오시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대로 바깥에서 기다리시기엔 힘드실 텐데, 황실 내 별실로 안내해 드릴까요?”

한껏 기대하고 온 게 무색할 만큼 에스티안의 숙소는 비어 있었다. 마물 토벌 뒷정리를 다 하고 온다더니 정말로 그런 모양이구나.

아쉬울 것도 없었다. 기다리면 될 테니까.

하지만 황실의 다른 곳에서 그를 기다리려니 그건 어쩐지 꺼림칙했다.

그리고 이미 황실은 마물 퇴치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에 대한 작은 연회를 어제부터 연 상태였기에 혼란스럽기만 했다. 괜히 다른 곳을 돌아다니다가 방문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 아까 전 봤던 리아나와 리아나의 엄마가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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