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가면무도회 때 황태자랑 춤춘 거 보고 질투한 사람이 또 있었나? 아니면, 혹시 에스티안이랑 춤춘 걸 보고 질투한 사람이 있었나?
아무리 떠올려도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황실 측에서도 그 수상한 평기사를 찾고 있다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고요. 어제 일은 다 잊으시고 아가씨도 축제를 즐기셔야죠.”
당분간은 정말로 너무 지쳐서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저택에만 있으려 했다.
하지만 어디 사람 일이 뜻대로 되던가. 쥴의 말대로 사냥제가 끝나고 나니 하루 만에 완연한 축제 기간으로 접어들어 제국 전체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거의 유일하게 귀족이나 일반 사람들이 거리에 전부 나와 똑같이 즐기는 기간이나 다름없었기에 분위기는 매우 밝고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방구석에 있기 좋아하는 나로서도 호기심이 생겨 빼꼼 정원 밖을 쳐다봤고, 이미 거리를 둘러보고 온 다른 시녀들에게 얘기를 일부러 해 달라고 해서 들었다.
“놀 거리와 먹을거리가 얼마나 가득한지 몰라요! 첫날이고 낮인데 이 정도라면 점점 더 재미있어질 것 같아요. 아가씨도 놀러 나가셔야죠!”
“아가씨는 워낙 친구들이 많으시니까 아마 더 재미있게 즐기실 수 있을 거예요.”
그 많던 친구들은 내가 차근차근 혼자 정원에서 놀면서 없앴고 어제 그 종지부를 찍어 버렸지.
사냥제에 왔던 영애 중 몇몇은 분명 그동안 왕래도 좀 하고 얘기도 나눠 왔는데, 어제 내가 그렇게 냉기 철철 흘리고 자리를 떴으니 앞으로 내가 먼저 티타임 같은 데 초대를 하거나 편지를 보내지 않는 이상은 또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마 축제를 즐기더라도 혼자 즐기게 될 것 같은데, 사실 이전부터 혼자 밥 먹기, 혼자 영화 보기, 혼자 술 마시기 같은 걸 아무렇지 않게 해 왔기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 억지로 맞추면 축제랍시고 나왔는데 괜히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까지도 들었고.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혼자 가는 것보다 더 좋은 대책을 알고 있으니까.
“엘! 준비 다 했어요?”
보통 축제 기간이 되면 다른 도시나 나라에서도 사람들이 놀러 오기 때문에 거리를 단속한다. 길에서 먹고 자는 부랑자들이나 왈패들이 대로 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철저히 잡기 때문에 그들은 보통 그들만의 지하 거처 같은 데 숨어 있어야 했다.
확실히 안전하고 쾌적하게 축제를 즐길 수 있겠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떠오른 건 바로 엘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길에서 지내기만 했지 거리의 축제를 제대로 즐긴 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축제 첫날을 근사하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어, 네. 그런데, 저 진짜 나가도 될까요?”
“엘만 무섭지 않으면 돼요. 지금은 축제라서 거리에 이상한 사람들이 절대 없긴 할 테지만, 나가는 게 혹시 무섭거나 불편하면 지금이라도 말해도 돼요.”
“아뇨! 그건 절대 아니에요. 아델린 아가씨랑 같이 가잖아요. 그리고 쥴 기사님도 같이 가시고요. 오히려 너무 궁금하고 얼른 나가고 싶은걸요. 다만 정원 일이…….”
“그런 거라면 걱정 안 해도 돼요. 오늘은 정원사 할아버지께 내가 허락도 받아 놨어요. 정 뭐하면 놀고 와서 이따 같이 정원 정리해요. 자, 가요!”
번화가까지는 멀지 않아서 마차로 금방 도착했다. 쥴과도 겨우 친해진 듯하고, 저택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던 엘은 다소 긴장한 것 같았다. 마차를 한쪽 구석에 잘 세운 뒤 내려서 나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그녀가 무서워하거나 당황하지 않도록 계속 말을 걸었다.
“우리 이렇게 나온 거 처음이잖아요. 나들이라고 생각해요.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놀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놀아요.”
내 말에 긴장을 좀 푼 듯 엘의 얼굴은 점점 호기심과 흥미로 상기됐다. 나도 이렇게 축제 기간에 거리로 놀러 나온 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억 속 아델린은 축제 때도 거리로 나오기보다는 황궁 내에서 열리는 무도회나 황실 정원에서 열리는 티타임에 참여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유는 어떻게든 유리엘과 리아나를 붙이려는 각고의 노력 때문이었지만.
그래서인지 나도 엘만큼이나 모든 것이 궁금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한편으로는 맨날 혼자 다니며 뭔가를 해 온 내가 엘을 잘 데리고 다닐 수 있을지 약간 걱정됐지만, 일단 거리로 뛰어들었다.
“자, 가요. 가자. 가자. 뭐 먹을까요?”
*
“아가씨, 이건 너무 맛있고 조금 전에 했던 저건 너무 재미있어요!”
“그쵸? 다행이다. 다음엔 저기 파는 철판구이를 한 접시 먹은 다음에 또 놀 게 뭐가 있나 보러 가요.”
리아나를 데리고 다녔던 것을 이 몸이 기억하고 있어서였는지, 나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엘을 잘 챙겨 데리고 다녔다.
보이는 것마다 물어보며 엘이 좋다고 하면 다 먹였고, 꽃잎 개수로 하는 내기 게임, 돌을 던져 큰 천 인형 따는 게임 등도 함께 참여했다. 다행스럽게도 돈 걱정 크게 안 하고 돌아다닐 수 있었던 덕에 우리는 배부르게 먹고 손에 이것저것 경품을 쥔 채로 다닐 수 있었다.
“쥴 경, 저희 때문에 피곤하셔서 어쩌죠?”
“그럴 리가요. 피곤한 건 아가씨와 엘이겠죠. 그렇게 신나게 먹고 노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체 그동안은 왜 저택에 계셨던 건가요?”
장난기 어린 쥴의 말에 우리는 배시시 웃고는 또 앞을 향해 걸었고, 사람들이 가득 모인 길거리 공연장을 발견했다. 짤막짤막한 콩트를 연이어 공연하고 있었는데 다들 즐겁게 웃고 있기에 우리도 자연스럽게 뒤쪽에 서서 구경을 시작했다.
“아이고, 어디 간 거니, 내 딸아!”
“아이고, 아이고! 하필이면 이렇게 복잡한 가운데 아이를 잃어버리다니!”
“거기 누구 없소! 내 딸 본 사람 아무도 없소!”
그런데 하필 마침 하고 있는 공연은 모처럼 바깥나들이를 나온 가족이 잃어버린 딸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혼자가 된 지 오래된 엘은 난생처음으로 이렇게 축제에 나왔건만. 이런 내용인 줄 알았으면 엘을 앞세워 보러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곁눈질로 엘의 기분이 괜찮은지 슬쩍 봤는데, 다행히 그녀는 그저 촌극의 하나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처럼 배우들이 안타까워하는 연기에 함께 탄식하고 있었다.
“아니, 땅바닥에 이게 다 무어야? 이건 우리 딸이 제일 좋아하는 고기 완자 꼬치 아니야?”
“정말이잖아?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 완자가 40개!”
“내 딸아! 역시 내 딸이구나!”
잃어버린 줄 알았던 딸이 혼자 고기 완자 꼬치를 사 먹으며 다녔는데, 먹을 때마다 마지막 남은 한 덩어리를 계속 흘리며 다닌 탓에 그녀의 자취가 남았고, 그걸 가족이 찾아서 결국 감격 어린 상봉을 한다는 괴상한 내용이었다.
물론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요소가 들어가고 미소 지어지는 결말로 마무리되는 게 대부분의 콩트이긴 했다. 어처구니없는 결말에 나뿐만 아니라 엘도 크게 웃었다. 엘이 억지로 웃는 기색 없이 정말로 즐겁고 재미있어서 웃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 정말. 아가씨, 저는 늘 길에서 지내면서도 저런 길거리 연극 볼 생각은 한 번도 안 했거든요. 그래서 본 게 처음인데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어요! 너무 좋아요.”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에요. 사실 저도 이런 연극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냥…… 가족 얘기라 그런지 마음이 좀 따뜻해졌어요. 뭔가 제 처지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해서 더 몰입해서 본 것 같아요.”
“엘…….”
“가족을 잃어버리면 저렇게 찾는 게 당연하구나, 그러면 우리 부모님도 나를 어느 정도는 찾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엘은 슬프거나 씁쓸한 기색 하나 없이 정말로 해맑게 웃으며 얘기했지만, 그런 게 오히려 마음을 저미게 했다.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어느새 조금 컸는지 나와 이제는 키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엘을 그저 꽉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 주는 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아가씨, 연극 보고 나니까 괜히 고기 완자 꼬치가 먹고 싶지 않으세요?”
나를 이해한다는 듯 내 등을 마주 두드리던 엘은 몸을 떼어 내곤 귀엽게 씩 웃으며 말을 건넸다. 조금 전의 침착했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흥미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어쩐지 이조차도 분위기를 가라앉히지 않으려는 그녀의 노력인 것 같아 나도 그에 호응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경쾌하게 흔들었다.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았어요! 가요, 엘.”
연극을 보기 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들처럼 우리는 주먹만 한 고기 완자 꼬치도 먹고, 목마르니 주스도 사 마시고, 달달한 시럽이 뿌려진 파이도 사 먹었다. 그러곤 다시 기름진 튀김을 사 먹고, 다시 음료를, 다시 단것을 먹으며 그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두 번째 정도 반복했을 때 냉차를 두 입 마시고 쥴은 두 손을 들었다.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더 들어가지도 않고, 아가씨께서 저택으로 굴러서 돌아갈 때 옆에서 굴려 드릴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요.”
“으하하, 쥴 기사님. 그게 뭐예요! 아가씨, 저희가 그렇게 많이 먹었나요?”
“아뇨, 하나도 안 먹었죠.”
“엘도 그 옆에서 같이 굴러갈 테니 저라도 자제해야겠지요. 이렇게 마르신 분들 몸의 어디로 들어가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엘은 아주 환하게 소리 내서 웃었다. 저택에서도 엘이 그렇게 웃은 적은 없었기에 나는 기분이 묘하면서도 흐뭇했다. 나와 쥴을 시작으로 그녀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졌으면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쥴에게는 남다른 감정을 품게 된 것 같기도 했고.
짝사랑, 뒤에서 지켜보기 전문인 내가 해 온 행동을 그녀도 돌아다니며 쥴에게 똑같이 하고 있었기에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엘은 우리를 호위하느라 뒤에서 오는 쥴을 계속 힐끗힐끗 쳐다봤고, 쥴이 옆으로 오면 그 옆모습을 또다시 쳐다보았다. 내가 손을 잡고 있어도 사람이 워낙 많아 휩쓸리기 쉬웠기 때문에 쥴이 팔로 우리를 살짝 가둔 채 걸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 그녀는 어딘가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엘의 입에 묻은 소스를 쥴이 별생각 없이 손으로 슥 닦으며 타박했을 때, 그녀의 귀는 입에 묻었던 붉은 소스만큼이나 빨개진 상태였다. 생각할수록 귀여웠다. 그리고 젊은 남자들을 무서워하는 그녀가 쥴만큼은 편하게 여기고 좋은 마음을 갖게 된 것 같아 애틋하기도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나와 엘은 마지막으로 먹을 디저트를 고르기 위해 각종 빵과 타르트 종류를 파는 가판대에 서게 되었다. 이제 먹는 건 정말 그만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배가 불렀지만, 그렇게 마지막 디저트를 고른다는 생각에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저는 생크림 올라간 이 타르트요!”
“나도 엘이랑 똑같은 거 먹어야지. 엘은 생크림을 좋아하죠? 아까도 생크림 들어간 걸 찾았잖아요.”
“네! 입에서 사르르 녹으면서 달콤해지는 게 너무 좋아요.”
엘은 크림 부분을 크게 베어 물고는 비밀을 이야기하듯 말을 이었다.
“사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릴 적에 제가 생크림을 어디서 먹어 본 적이 있었나 봐요. 너무 달콤하고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나거든요. 그래서 그냥 어릴 때부터 생크림은 항상 좋아했어요. 물론 길에서 지낼 땐 거의 먹을 수 없었지만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쉽게 먹을 수도 없고 접할 수도 없는 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니 코가 시큰해졌다. 나는 엘이 저택에 돌아가서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생크림이 들어간 다른 과자 종류를 더 샀다.
그곳을 떠난 우리는 가판대에 늘어놓고 파는 액세서리도 구경했다.
엘이 진지한 얼굴로 내 머리 색에 어울리는 것을 찾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진한 푸른빛이 도는 돌을 깎아 보석처럼 장식한 핀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띄게 돌의 크기가 큰 것도 아닌데 깊은 바다 색이 너무 영롱해서 한눈에 들어왔다.
“엘, 나는 이게 좋을 것 같아요. 엘이 보기에도 그렇죠?”
움직일 때마다 빛이 반사되는 것에 따라 짙어졌다 옅어졌다를 반복하는 그 돌은 마치…… 에스티안의 눈 같았다.
아델린이 된 뒤부터는 내 눈 색에 맞춘 액세서리를 했기에 나는 항상 옅은 녹색의 보석이 들어간 걸 착용해 왔기에, 이건 아마 내가 처음으로 갖게 되는 푸른색 액세서리일 터였다.
난데없이 푸른 계열을 갖고 싶어진 게 절대 우연은 아니겠지. 허탈한 웃음이 나왔지만 축제까지 나와 이걸 발견한 것도 무언가 나에겐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런 느낌을 엘도 조금 받았으면 해서 나는 슬쩍 말했다.
“엘이 내 걸 골라 줬으니, 엘의 것은 쥴 경이 골라 주시면 어때요?”
“저는 여성용 액세서리는 잘 알지 못해서, 안 어울리거나 예쁘지 않은 걸 골라 줄지도 모릅니다.”
“그런 게 뭐 중요한가요. 직접 골라 줬다는 데 의미가 있는 거죠. 그렇죠, 엘?”
“아, 네, 네! 쥴 기사님께서 골라 주시면 저, 매일 하고 다닐 거예요.”
잔뜩 기대감에 부푼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엘을 보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영문을 모르는 쥴은 ‘이건 아닌데’ 하는 표정으로 핀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그녀의 갈색 머리나 푸른 눈과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새빨간 광석을 둥글게 깎아 장식한 핀을 골랐다.
“얌전한 줄로만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열매처럼 튀어 다니길래. 뭐, 정원에서 일할 때도 차분하진 않았던 것 같으니까.”
아주 제대로 된 걸 골랐다는 듯 태연하게 그 핀을 건네는 쥴을 보자, 너무 이상해 내가 다시 골라 줘야 하나 했던 생각이 쑥 들어갔다.
저거야말로 쥴이 생각하는 엘의 이미지가 담긴 하나뿐인 선물이고, 엘은 당연히 그게 너무 마음에 들어 또 귓불이 새빨개졌으니까.
시간도 늦었고 놀 것도 다 논 것 같아 우리는 슬슬 저택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정말 마지막으로, 축제의 거리에서 우리의 발길을 잡은 건 트럼프 카드로 가볍게 운세를 봐 주는 가판이었다.
“아가씨, 카드 점 같은 거 본 적 있으세요?”
“음, 한 번도 없어요.”
사실 이 세상에 오기 전에는 사주나 타로 카드 같은 걸 종종 보러 다니긴 했지만, 여기서 그런 게 의미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트럼프 카드 점을 나도 한번 보고 싶었다. 원래 여기 사람이 아닌 내가 그걸 보면 뭐라고 나올지도 궁금하고, 앞으로 어떻게 지내게 되는 건지도 궁금하고.
“우리 저것만 딱 보고 들어갈까요?”
“네! 저도 늘 지나다니기만 했지, 점을 본 적은 없어서 너무 궁금해요.”
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연스럽게 트럼프 카드 점을 보는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나와 엘을 가판대 앞에 앉히고 뒤에 섰다.
“예쁜 아가씨들이 오셨구만. 누가 먼저 볼 거요?”
“엘, 먼저 볼래요?”
“네! 기대돼요. 나쁜 얘기만 듣는 건 아니겠죠?”
엘의 말에 카드 점을 봐 주는 노인은 껄껄 웃으며 카드를 섞었다.
“인생에 나쁜 것만 있을 리가 있나. 좋은 것도 분명 있으니 걱정 마시게. 자, 여기서 세 장…….”
엘이 고른 카드들을 뒤집어 쭉 늘어놓은 다음 노인은 천천히 훑어보며 평을 시작했다.
“클로버…… 평탄하지 못한 유년 시절을 보내셨군. 뭘 이리 뺏겼지?”
고개를 갸웃하는 노인의 말에 내가 더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편치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서두를 꺼내는 건 어디든 점쟁이들의 뻔한 레퍼토리라고 생각해 흘려 넘기려 했지만, 엘의 경우 정말로 사실이었기에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엘도 긴장하고 놀랐는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노인의 말을 우선 들을 뿐이었다.
“최근에는 그래도 최악은 면한 것 같고. 다이아몬드가…… 그래도 아직 멀었어. 돌려받아야 할 게 아주 많구만.”
“돌려받을 거요?”
“그래. 근데 그간 힘들었던 게 사라지고 오해가 풀린다는 카드가 나왔어. 그러고 나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돌려받게 될 거야. 아주 큰 걸 잃었다고 나오거든.”
“그, 그게 뭔가요?”
“글쎄, 그렇게 자세히 알면 신관에서 신을 모시고 있었겠지. 하지만 카드는 아가씨가 제대로 무언가를 얻어야 하고 또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좋겠군그래.”
어딘가 붕 떠 있는 듯하지만 결코 나쁜 말은 아닌 것 같은 해석에 엘과 나는 마주 보곤 눈을 찡긋하며 슬쩍 웃었다. 나쁘지 않다는 거였다.
괜히 깊게 의미를 부여해 보자니 엘 앞으로 남아 있던 엄청난 유산이 발견될 수도 있겠다는 허황한 생각도 들었다. 돌려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뭘 돌려받는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좋겠다고까지 말한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자, 다음은 이쪽 아가씨. 아가씨도 여기서 세 장을 뽑아 주시게.”
“저, 저는 그냥 가볍게 연애운만 봐 주세요.”
“그래, 그래.”
카드를 어느새 싹 정리했다가 다시 펼친 노인은 내 앞을 탁탁 쳤다. 아, 별것 아닌 재밋거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엘의 결과를 먼저 보고 나니 괜히 떨려서 전체 점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예 안 보기에는 궁금함이 생겼기에 나는 시키는 대로 카드 여러 장을 골랐고, 노인은 아까처럼 카드를 뒤집기 시작했다.
“음……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재미있구만. 이성을 나타내는 카드가 이리도 안 나오는 사람은 아가씨가 처음이오. 이 카드들은 전부 동성을 의미하거든.”
“하하…….”
“도움이 되는 동성, 도움이 안 되는 동성 아주 골고루 있어. 주변에 친구가 많나? 이 카드대로면 아가씨는 여태까지 이성은 만나 본 적도 없는 셈이 되겠군. 오늘 내 기운이 잘못되었나.”
“잘못…….”
어색하게 웃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아니, 그런 게 나온단 말야?
내심 ‘너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지?’ 하는 질문 같은 게 나올까 봐 떨고 있었는데. 웬걸, 차라리 그런 게 나오는 게 더 나을 뻔했다.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쥴도 엘도 어딘가 실실 웃고 있었다.
“그 와중에 고민하는 카드는 또 이렇게 많아. 이성도 없는데 왜 고민을 하는 거지?”
“그…… 그만 봐도 될 것 같은데요.”
가만히 앉아 있다가 카운터펀치 같은 걸 수십 대는 맞은 기분이었다. 이성 없다고 고민 못 하란 법이라도 있나!
어느새 노인이 뒤집지 않은 카드는 세 장이 남아 있었다. 노인은 호탕하게 웃다가 나머지도 뒤집었다.
“오, 오. 그래, 이제야 좀 나오는군. 아가씨에게는 뒤늦게 사랑이 찾아오는 모양이야. 그것도 아주 강렬한 것으로. 서로 생각도 하고 있다는 카드도 나왔어. 게다가 아가씨가 인기가 없지는 않은 모양인데?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만.”
어차피 인생은 살아가기 나름이라며 껄껄 웃는 노인을 뒤로하고 우리는 저택으로 향했다. 엘은 연신 신기하다며 점 얘기를 했다.
“어떻게 한 번에 그렇게 맞히죠? 제가 좋지 못한 상황에서 자랐다는 것을요. 지금은 아가씨 덕에 깨끗해지고 예쁜 옷도 입고 있어서 그런 티도 안 나는 것 같은데.”
“안 좋게 들린 게 있으면 다 잊어요, 엘.”
“괜찮아요, 다 재미있었는걸요! 근데 또 아가씨 카드 점 결과를 생각해 보면 하나도 안 맞는 것도 같고요. 아가씨는 인기가 많으시지 않나요? 다른 시녀분들이 얘기하는 걸 들은 적 있거든요. 그런 아가씨 주변에 이성이 없다니요.”
“나는 뭐, 저택 안에만 처박혀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하하.”
“그래도요. 아, 혹시 뒤늦은 사랑이라는 게 그 아가씨를 늘 찾아오신다는 기사님은 아니실까요?”
하필이면 그걸 참 잘 기억하고 있구나. 나는 그만 얘기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실없이 웃었다.
신이 나서 열심히 얘기하는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엘과 카드 점 얘기를 한 탓에 내 방에 혼자 있게 되고 나서도 계속 그 생각만을 하게 되었다.
사실 수치스럽게 나온 내 결과보다도 자꾸 생각나는 건 엘의 결과였다. 아무리 이런 점을 쉽게 믿을 순 없다고 해도, 그 얘기는 꽤 신경이 쓰였다.
엘에게 무언가 사연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어릴 적 기억도 뚜렷하지 않고, 그 뚜렷하지 않은 기억들도 결코 무난한 건 아닌 듯했고.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아무리 길에서 지내 여러 가지를 알고 있는 거라 해도 그녀의 나무나 풀에 대한 지식은 일반 수준을 지나치게 뛰어넘는 느낌이었다.
아까 전 생크림을 좋아한다고 한 것도 가만히 생각하면……. 이상한 추측이긴 하지만 길에서 떠돌던 아이치고 너무 고운 것도 사실 의아하고.
그런 데다 그동안 힘들었고 뺏긴 것에 대해 돌려받아야 할 게 있다니. 엘이 부모님을 만나게 될 수도 있는 걸까?
그러면 정원에서 더 볼 일도 없을 거고, 아마 보기 어려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서글퍼졌다.
하지만 엘이 늘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 점의 결과가 정말로 이런 걸 의미하는 거라면 좀 맞아떨어져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녀가 그렇게 더 행복해지는 데 내가 도와줄 수 있으면 더 기쁠 것 같았다.
“축제, 거리에서 즐긴 건 처음이었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축제 때도 늘 황실만 갔는데, 거기보다 훨씬 즐겁고 편안했어요.”
“이렇게 즐거워하시는 것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황궁은 아무리 축제 중이어도 내부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권력 싸움이나 눈치 싸움 같은 게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지금 축제를 즐기고 있는지 싸우고 있는지 몰라서 피곤한데, 그런 게 거리에는 하나도 없었어요. 그저 놀고먹으면 되더라고요.”
거의 처음으로 바깥을 오래 돌아다녔기에 나는 녹초가 된 몸으로 곧장 잠들었더랬다.
오전쯤 깬 나는 안나가 내 머리를 빗어 주는 내내 어제의 즐거웠던 시간에 대해 떠들었다.
아마 오늘이나 내일, 그게 아니더라도 며칠 안으로 안나도 거리의 축제를 즐기러 나갈 것이었으므로 나름대로 뭐가 재미있었고 뭐가 맛있었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녀는 웃으며 내 얘기에 하나하나 호응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녀들과 몇몇 사용인들끼리 업무 시간 겹치지 않게 맞춰서 구경하러 가려고 했거든요. 아가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벌써 기대가 되네요. 즐겁게 놀고 오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머리를 특별히 어떻게 하지 않고 깔끔하게 빗질만 한 다음 향수를 몇 번 뿌린 안나는 작은 목소리로 슬쩍 말했다.
“제가 딱 오늘 놀러 가서 다행이지 뭐예요. 내일부터는 하루 종일 옆에서 가꿔 드리고 머리도 더 예쁘게 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그런 게 아닌데요.”
“거리에 혹시 남녀가 하기 좋은 게임이나 놀 거리가 무엇이 있는지도 잘 보고 와서 알려 드릴게요.”
“……그런 게 정말 아니에요.”
안나가 저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 아침 내가 자는 사이 에스티안이 보낸 편지가 와 있었기 때문이다.
사냥제에서의 일이 있었기에 혹시 블라머프 공작가에서 무언가 서신을 보낸 건 아닐까 했지만, 에스티안 개인 서명이 들어간 편지였다.
편지지 자체도 황실기사단에서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묘하게 거기서 그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축제가 열리고 있으니 사흘 뒤 저녁에 보자고, 황실 근무를 마친 뒤 자신이 마차로 데리러 오겠다는 것.
보통 그렇게 만남을 청하는 편지는 이렇게 약속을 잡으려는 날 고작 며칠 전에 오지도 않을뿐더러 최대한 공손하게 ‘만나기를 청합니다’ 또는 ‘만날 영광을 주세요’ 같은 어투로 쓰이기 마련인데, 그의 편지는 거의 ‘만납시다’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애초에 거절도 안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당당함이 묻어나 약간 어이없기까지 했다.
내가 너무 그를 좋아하는 티를 많이 냈나 싶어 자존심이 약간 상하기까지 했는데, 마냥 그것을 오만함이라 치부하기는 또 어려웠다. 몸을 보하는 각종 귀한 약과, 너무 커서 품에 다 안기도 벅찬 장미꽃 바구니를 편지와 함께 보냈기 때문에.
꽃이야 그냥 영애들에게 주는 선물 중 기본이라고 치고, 약은 아무래도 사고도 있었고 해서 보내 준 것 같긴 했으나 그 양이나 귀한 정도가 좀 심했다. 가문 치료사가 와서 확인하고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
그것들을 보고 부모님은 물론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묘한 얼굴을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에스티안의 소문에는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 대신 나를 ‘바람둥이가 잘해 주는 아가씨’로 여기고 있는 듯해 허탈한 웃음이 지어졌다.
안나는 온갖 생각으로 얼굴이 살짝 상기된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그리고 ‘배고프실 테니 뭐라도 드셔야죠.’라 말하고는 정원 테이블을 가리킨 뒤 물건들을 착착 정리해서 나갔다.
뭘 해도 안나에게는 간파당하는 느낌이라 나도 체념한 채 정원으로 갔고, 테이블 위에 놓인 샌드위치와 뜨거운 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샌드위치는 안에 얇게 저민 고기가 들어가 있는 것이었는데, 그 고기는 에스티안이 사냥제 때 내게 준 것이었다.
나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동물의 고기이기도 해서 대체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몰라 그저 그걸 가만히 놔두려 했다. 물론 나는 그것보다도 그 고기가 에스티안이 내게 특별 대접을 했다는 일종의 증거 같아서 최대한 늦게 먹고 싶었다.
‘이렇게 질 좋은 고기는 손질된 즉시 먹는 것이 좋습니다! 아가씨께서 그 위험한 와중에도 정말 귀한 것을 가져오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주방장은 흥분하여 고기를 받아 온 날부터 모든 음식에 그걸 넣기 시작했다. 아니, 귀한 거라더니 이렇게 막 넣어 먹어도 되는 거야?
물론 야속한 입속으로 샌드위치는 술술 잘도 들어갔다. 며칠 뒤 만나자고 한 것도 특별 대접일 테니, 고기 정도는 다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으로 나는 그를 보기 전까지 거의 매끼 각종 조리법의 고기 요리를 먹어 치웠다.
그리고 그를 보기로 한 날, 아침부터 나는 안나를 비롯한 다른 시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목욕을 마친 뒤 몸에는 은은한 향유를 발랐고, 머리도 잘 말린 뒤 빗었다. 거리를 돌아다닐 테니 뒤가 풍성하고 무거운 드레스 대신 몸에 적당히 맞게 떨어지며 길이도 땅에 닿지 않는 가볍고 편한 드레스를 골랐고, 목걸이나 귀걸이도 무겁게 흔들리지 않고 각각 목과 귀에 딱 달라붙는 것을 선택했다.
안나는 내 머리를 이리저리 손으로 만져 보다가 뒷머리를 양옆에서 약간 잡아서 땋고는 얌전히 말아 올렸다. 흔히 생각해 오던 공주님 같은 고운 머리 모양에 절로 입이 헤 벌어졌다.
“오늘 유난히 머리가 더 잘된 것 같네요, 아가씨.”
“항상 예뻤는데요, 뭐. 감사합니다.”
“평소에 무도회 가시던 것보다 아가씨가 더 열심히 준비하시는 것 같아서 괜히 흐뭇하네요.”
“엇, 아, 아닐걸요…….”
“보통은 금방 돌아올 거니 드레스도 그냥 대충 입으시고 머리도 크게 신경 안 쓰셨지만, 오늘은 땋은 머리도 여러 번 확인하시고,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따로 안 맞췄는데도 이것저것 옷장에서 꼼꼼히 고르셨답니다.”
“잘못 보셨습니다…….”
민망해서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마저 화장도 받았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오늘만큼 치장을 받으면서 내가 이것저것 얘기한 날이 없는 듯했다.
아니, 그도 그럴 게 이거 첫 데이트 아닌가? 축제 날 만나자는 게 그런 거 아닌가?
이전에 회사에 다녔을 때 소개팅이나 데이트가 있다던 사람들도 전부 엄청 꾸미고 나왔고 하루 종일 들떠 있었다. 하루가 뭔가. 그런 약속이 잡혔다며 며칠 전부터 신나서 얘기하고 그날은 일찍 퇴근해야 한다고 쏜살같이 나가기도 했는데.
물론 당시 나는 그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냥 호들갑을 지켜보기만 했지만, 지금은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아가씨, 오늘 정말 예뻐요!”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생긴 나는 잠시 정원에 나가 앉았고, 곧 화단을 정리하다가 나를 발견한 엘이 달려와 말을 걸었다. 그렇게 말하는 엘이야말로 너무나 예뻤다. 영양 상태도 좋아지고 본인의 마음도 어느 정도 밝아지니 점점 그녀만의 매력이 살아나는 것 같아 기쁘면서 안심되었다.
“그야 모두를 닦달해서 꾸며 놓은 거니까요……. 엘은 이런 거 안 해도 예뻐요.”
“에이, 정말 아가씨는 예뻐요. 오늘 그 항상 오시던 기사님 만나러 가시는 거죠?”
“다른 시녀분들이 그러던가요?”
“그 얘기도 듣긴 들었지만, 그냥 제가 추측한 것이기도 해요. 아가씨는 항상 그분이 오신다고 했을 때 어딘가 난감하면서도 설레는 듯한 얼굴을 하셨거든요.”
난감, 설렘. 엘이 알아챌 정도면 뭐 그냥 얼굴에 내 감정을 써 붙이고 다닌 거나 다름없나?
그녀가 말한 정확한 단어들에 나는 바짝 말라 오는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근데 아마 아가씨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그 기사님이 아가씨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안 그러면 그렇게 매번 오고, 또 이렇게 데이트를 신청할 리가 없잖아요.”
“에이.”
“진짜예요! 그리고 아가씨처럼 좋은 분을 좋아하는 걸로 봐선, 제 머릿속에선 그 기사님도 진짜 좋은 분이라는 게 확실해졌어요!”
해맑게 웃는 엘을 보니 에스티안을 만날 준비를 하며 잠시 떨렸던 마음이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무심코 셋이 만날 일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찬바람 부는 에스티안이라고 해도 엘같이 귀여운 아이를 본다면 친절하게 대하고 잘해 줄 것이다. 그러면 그녀가 아직 품고 있는 두려움 같은 걸 조금이라도 없애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하……. 그분이 저를 좋아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엘 말대로 그분은 좋은 사람이 맞거든요. 엘이랑 그분이랑 저랑 셋이 언제 티타임을 가지는 건 어때요?”
“아…….”
“엘이 불편하면 절대 강요 안 하니 걱정하지는 말고요. 다만 나는 엘이 쥴 경과 친해진 것처럼 그분과도 친해지면 어떨까 싶어서요.”
“아이, 쥴 기사님과는 다른데요…….”
엘은 쥴 얘기를 하자마자 양손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달아오른 귀여운 뺨이 보였고, 그다음으로 곧장 눈에 들어온 건 왼쪽 옆머리에 꽂힌 빨간 핀이었다.
자식. 나한테 의젓한 척 얘기해도 아직 이렇게 감정을 못 숨길 만큼 어리면서. 어쩌면 우리 둘 다 자기감정은 전혀 못 숨기면서 서로에게만 쿨하고 든든하게 굴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잘 다녀오세요!”
어느새 노을이 지기 시작해 나는 엘의 인사를 받고 내부 저택의 문 앞까지 나갔다. 아예 저택 앞 큰 정원을 넘어 바깥문까지도 나가 보고 싶은 걸 겨우 참은 것이었다.
아, 바람 부는 정원에 앉아 있었으니 머리가 흐트러졌으려나? 마지막으로 머리라도 한 번 확인하고 나올걸, 아무리 가벼운 드레스라고 해도 주름 한 번 더 펴고 나올걸, 하고 고민하는 찰나 황실기사단의 소형 마차가 눈앞에 보였다.
마차 안에서 에스티안이 훌쩍 내려 보폭을 크게 해서 내 앞으로 왔다. 그는 완전한 기사단장 정복 차림은 아니었고, 가벼운 셔츠에 과하지 않은 약식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도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 같아서 역시 나도 좀 꾸미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덕분에요.”
기사단장의 예를 취하며 그는 내 손등 위에 입을 맞췄고, 자연스럽게 그대로 손을 잡아 나를 마차에 태우곤 자기도 마주 보는 앞자리에 바로 탔다. 곧 마차는 움직였다.
어둡게 밀폐된 공간에서 에스티안과 있는 것이, 아니 남자와 있는 것 자체가 처음인 나는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서 커튼 틈으로 보이는 길만 쳐다보고 있었다.
번화가로 들어설 때까지 여기만 보고 있어야 하나. 집 밖으로 정말 안 나가는 사람인 줄 알겠다.
하지만 침 삼키는 소리도 들릴 것처럼 조용하고 가까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마차에 탄 순간부터 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져서 눈길 자체를 돌릴 수 없었다.
같이 거리를 걷는 상황만 상상했지 가는 동안이 문제가 될 줄은…….
“원래는.”
그 순간 에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내 고개도 천천히 그에게 향했다.
“그대가 더 쉴 수 있게 며칠 기다리려고 했는데.”
“…….”
“걱정되는 만큼 보고 싶어서.”
“아…….”
내심 사냥제가 끝난 바로 다음 날 나도 그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를 먼저 찾지 않은 것도, 나도 기다려야 하나 했기 때문에 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기사단장이니까 끝난 사냥제를 총정리 해야 하지 않을까, 이후 진행되는 축제 관련해서도 분명 일할 게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내가 괜히 그를 저택으로 초대하거나 그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하는 게 방해되거나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했던 거다.
느릿느릿 고심한 티를 내는 에스티안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따뜻해지고 웃음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저도요.”
부끄러움에 개미만 한 소리로 말했지만 에스티안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조금 풀어진 마차 안의 느낌에 잠시 요 며칠 축제가 원활하게 잘 진행되고 있어 황실에서도, 그리고 제국 전체적으로도 분위기가 좋다는 얘기가 가볍게 오갔다.
순식간에 우리는 시끌벅적하고 즐거운 축제의 한복판에 도착했고, 에스티안이 먼저 내려 나를 에스코트하며 함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에스티안의 팔에 가볍게 손을 감아 잡고 걷는데, 어쩐지 그 활기찬 축제 분위기가 전부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며칠 전 엘과 왔을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그땐 철없이 보이는 대로 먹고 이것저것 사고 놀았지. 그걸 에스티안에게 그대로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그와 함께 얌전히 먹거나 뭔가를 하는 것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에스티안 경은 평소 축제 때 거리로 자주 나오세요?”
“아니, 이번이 처음이야. 보통은 황실에서 티타임이나 무도회 때 호위를 서지.”
“아…… 축제 때도 일하시는군요. 힘드시겠어요. 오늘은 나와도 괜찮은 거죠?”
“물론. 일부러 그대와 함께 나오려고 모든 일을 마쳤어.”
“헤헤…… 영광이네요. 저는 사실 며칠 전에 한 번 나왔었거든요. 그땐 저도 처음이라 좀 우왕좌왕하고 피곤하게 돌아다니기만 했는데, 이제 뭐가 어디에 있고 어떤 게 재미있는지를 알았으니 에스티안 경에게 잘 알려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애써 빼신 시간을 잘 보내야…….”
집에 놀러 온 친구에게 집을 잘 보여 주고 싶은 것 같은 사명감과 책임감에 들떠서 말을 계속하는데, 에스티안의 표정이 살짝 굳은 게 보였다.
왜, 왜 그러지? 뭔가 잘못 말했나? 분명 간식을 5분에 하나씩 사 먹은 얘긴 다 빼고 그냥 돌아다녔다고만 말했는데.
“……누구와 나왔었는지 물어도 되나?”
아, 그게 궁금한 거였어?
“저희 정원 일을 보조하는 아이가 있거든요.”
나는 엘이 어떻게 저택에 오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우연히 정원에서 봤고, 두 번째 봤을 땐 위험해 보여서 웬만하면 내가 책임지려고 한다는 식으로. 내가 누구와 나왔었는지에 대해 그가 너무 다급하게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최대한 짧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은 정원 일 도와주면서 저택에서 지내는데, 그 애도 거리의 축제를 즐겨 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그래서 같이 그냥 처음 구경하는 겸 아이 데리고 나와서 놀았어요.”
“……리아나 영애를 대할 때부터 느꼈지만, 그대는 정말 정이 많아.”
“어, 그런가요? 아닐걸요…… 하핫.”
“그래서, 그 아이는 그렇게 거둬서 계속 데리고 있는 건가?”
“네. 워낙 똑똑하고 착하고,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라서 제가 더 많이 좋아하고 아이한테서 많이 배워요.”
“그렇다니 다행이야.”
내 말에 다행히 에스티안은 고개를 약하게 끄덕이고는 굳었던 표정을 풀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대와 처음으로 축제를 구경할 기회를 놓친 것 같아서.”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며 씩 웃는 에스티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너무 의외라 나는 소리 내서 웃었다.
다른 누군가와 내가 먼저 놀러 다녔을 거라 생각하고 그랬던 건가? 사실 남자와 이렇게 둘이 축제를 구경하는 건 처음 맞는데……. 그러나 이걸 그대로 얘기하자니 남아 있지도 않은 자존심이 꺾이는 기분이었다.
“그건 며칠 전이었고, 오늘은 에스티안 경이 처음 맞는데요, 뭐!”
그리고 진짜 처음 맞으니까! 나는 그저 얼버무리며 그의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
그는 차가움 같은 건 거의 사라진 얼굴로 차분히 반응하며 내가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다녔다. 냉정하고 날카로운 기사가 다 어디 갔나 싶을 정도로 얌전히 내 손에 잡혀 이것저것 보고, 고개도 끄덕이고, 진지하게 주변을 구경하기도 했다.
음식도 가리는 것이 없다기에 순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내 생각에 괜찮다 여겨지는 것만 골라서 먹였는데도 전부 마음에 들어 했다. 이거 뭐, 나 제대로 다니고 있는 거 맞아?
“저, 에스티안 경. 괜찮으신 거죠? 뭐, 재미가 없다든가, 걸어 다니기 힘들다든가 하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그대 덕분에 기사단장 되고 난 후로 가장 즐거운 순간을 보내고 있으니 걱정 마.”
웃는 것도 근사하고, 말도 참 예쁘게 하고.
이렇게 같이 웃고, 대화하고, 구경하는 걸 썸 타는 것과 데이트라고 칭한다면, 썸과 데이트는 정말 행복한 거구나.
우리는 조금 더 둘러보다가 사람들과 불빛으로 가득한 거리의 야경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야외 테라스 티 살롱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후끈후끈한 인파 속에 있는 것도 즐겁고 신났지만, 거기서 빠져나와 위로 올라오니 기분이 또 색달랐다. 얼굴에 닿는 바람은 선선했고 아래쪽보다 차분해진 환경에 숨을 돌리기에도 좋았다.
“중간중간 쉬어야 계속 즐겁게 구경할 수 있더라고요. 그리고 에스티안 경은 또 내일 다시 근무를 서셔야 할 테니까 피로가 쌓이면 안 될 거 같아서 여기로 왔어요. 괜찮죠?”
“뭘 해도 좋아.”
얼굴이 훅 달아오르는 에스티안의 대답에 나는 잽싸게 종을 울려 직원을 불렀다. 내 모습에 에스티안은 이미 낮게 웃고 있었다. 하…… 적응될 법도 한데 매번 나는 왜 그의 모든 말에 놀라고 떨리고 하는 건지. 나는 메뉴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이것저것을 가리켰다.
“음…… 저는 이 잎을 사용한 홍차랑 퐁당 쇼콜라랑 오트 쿠키 먹으려고요. 에스티안 경은요?”
“이거면 돼.”
그는 메뉴판 위를 더듬던 내 손가락을 살짝 잡아 움직여 ‘특제 원두를 사용한 진한 커피와 생크림’을 가리켰다. 에스프레소 콘파냐인가? 새까맣고 쓰디쓴 커피 위의 생크림이라니, 어딘가 그를 닮은 느낌이 들었다.
에스티안이 메뉴들을 한 번 더 정리해 주문하고는 아예 계산까지 해 버렸다. 그리고 곧 주문한 것들이 모두 나왔다. 디저트류가 잔뜩 놓인 내 앞과 다르게 그의 앞에는 조막만 한 커피잔 하나만 놓여 있었기에 살짝 부끄러웠다.
“에스티안 경은 왠지 그냥 깔끔한 차나 커피를 드실 줄 알았어요.”
그는 잔에 입을 살짝 대서 커피를 한 입 마셨다. 생크림이 입술에 잔뜩 묻어나야 정상일 텐데 그의 입술은 깨끗하기만 했다. 신기하네.
“생크림을 좋아해.”
“아, 정말요? 오…….”
생크림을 좋아한다니. 그 차가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사실은 섬세하고 따뜻한 그의 성미와는 또 어울리는 듯해 감탄사만 연신 나왔다.
의외라는 듯한 내 반응에 그는 픽 웃고는 말을 이었다.
“단것을 잘 먹어. 생크림은 그중에서도 좋아하는 편이고.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생크림을 넣고 이것저것 만들어 주셨거든.”
“우와…….”
어머니가 해 준 단것을 잘 먹는 어린 에스티안이라니. 상상도 안 돼서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카페에 오기 전, 내가 그에게 거의 강요하다시피 하며 사 주었던 수많은 간식들이 생각났다. 견과류만 넣은 쿠키, 치즈가 주가 되는 타르트, 허브 버터를 겹겹이 발라 구운 페이스트리…….
쥴을 떠올려 봐도 그렇고, 보통 기사들은 단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당연히 그도 그럴 줄 알고, 심지어는 그보다 더 심할 거라는 생각으로 무의식중에 단것과는 거리가 아주 먼 것들만 골라 먹인 거나 다름없었다. 말을 좀 하지!
“아, 에스티안 경. 그것도 모르고 저는 아까 막 아무거나…… 으, 저는 에스티안 경이 다 좋다고, 맛있다고 하셔서 그것도 모르고…….”
“아니, 진짜 맛있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정말이야.”
평소보다 빠른 말투로 손까지 저으며 대답하는 에스티안을 보자 왠지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름대로 나의 서툰 행동에 대해 위로해 주는 건가. 생크림 좋아하는 것부터 또 다른 면을 알게 된 것 같아 기분이 꽤 좋았다.
‘입에서 사르르 녹으면서 달콤해지는 게 너무 좋아요.’
그러고 보니 엘도 생크림을 좋아한다고 했지. 축제 때 같이 다니는 사람마다 특징을 알게 되니 묘한 재미가 있었다.
둘 다 생크림을 좋아한다니. 그것도 하나는 아주 잘 어울리고 하나는 아주 안 어울리는 느낌으로 말이다.
에스티안은 알고 보면 정말 따뜻한 사람이고, 엘도 나에게 들어 그를 ‘늘 저택에 오는 멋지고 좋은 기사님’ 정도로는 알고 있으니 같이 만나도 거부감이 적지 않을까?
언제 정말 셋이 같이 만나 생크림으로 만든 디저트라도 먹으면 서로 친해지기도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잠깐만. 둘 다 생크림을 좋아한다고……?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릴 적에 제가 생크림을 어디서 먹어 본 적이 있었나 봐요.’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생크림을 넣고 이것저것 만들어 주셨거든.’
엘이 했던 말과 에스티안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동시에 울리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면서 말도 안 되는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정보 하나를 얻은 거 가지고 이런 가정을 세우는 게 웃기지만, 안 세울 수가 없었다.
에스티안은 동생을 9년 전에 잃어버렸다고 했다. 엘이 지금 몇 살이더라. 열네 살? 어릴 때 헤어졌으면…… 아니, 이름이 달라서……. 이름 같은 건 자라면서 붙이기 나름이지만.
엘의 눈동자가…… 분명 푸른색이었지. 머리는 갈색이고……. 부모님 쪽에 갈색 머리가 있는 건가? 가만 보니 그 둘의 이목구비가…… 닮은 건 아닌데. 남매는 원래 잘 안 닮아 보이나?
이 모든 가정은 둘이 서로 그렇게 찾던 가족, 남매라는 걸 전제로 했다. 에이, 설마. 말도 안 되지. 어떻게 그런…….
“아델린?”
“어, 네. 네.”
순간적으로 홀린 듯 에스티안과 엘의 이것저것을 비교하며 머리를 굴리던 나는 에스티안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재킷이 어느새 내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괜찮나? 역시 아직은 쉬어야 했던 건가. 얼굴이 안 좋아져서. 혹시 추워서 그러는 거라면…….”
“아, 아. 아뇨, 아뇨. 저 멀쩡해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냥 갑자기……. 아, 밤바람이 찬데 에스티안 경이 입으셔야 하는 건…….”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는 멍하니 생각하느라 테이블 위에 어색하게 놓였던 내 손을 잠시 잡았다. 퍼져 오는 온기가 너무 따뜻하다 못해 찌릿찌릿하기까지 했다.
거의 10년 가까이 동생을 찾아 온 에스티안.
동생을 찾느라 자신에게 들려오는 근거 없는 소문 따위는 전부 속으로 누르며 묵묵히 지내 온 에스티안.
차가워 보여도 마음도 많이 쓰고 사실은 굉장히 사려 깊고 친절한 에스티안.
계속 신세만 지는 것 같아서 그에게 언젠가는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계속해 왔다. 그리고 그게 동생 찾는 것과 관계가 있다면 더없이 좋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무작정 둘을 붙여 놓을 수는 없더라도, 하나씩 어떻게든 맞춰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물론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둘이 아무 관계도 아니고 나 혼자 그저 옛날에 봤던 막장 드라마를 생각하며 헛된 상상을 한 거라는 게 확실해지면 씁쓸하겠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우선은, 떠오른 대로 어떻게든 해 보고 싶었다. 에스티안은 제국 내 안 다닌 곳 없을 정도로 그렇게 힘들게 돌아다녔는데,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지.
“에스티안 경, 제가 저번에 에스티안 경의 동생 찾는 일을 도울 수 있으면 돕겠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저도 혹시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물어보려고 하니까, 너무 이상하게는 생각하시지 않으셨으면 해요. 물론 얘기하시는 걸 원하지 않거나, 에스티안 경의 마음이 너무 힘들거나 하다면 말 안 하셔도 되고요. 저는 정말, 그냥…… 도움이 되고 싶어서.”
뜬금없이 의외의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차근차근 말한 다음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주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뒤로 얼핏 보이는 달무리와 비슷한 미소였다.
“그대는 정말 정이 많군. 상냥하고.”
“아, 어…… 아니에요. 아, 아까 에스티안 경이 어릴 때 얘기도 하시고 해서…… 그, 그리고 그…… 친구잖아요, 저희는?”
괜히 당황한 나는 또 말도 안 되는 얘길 내뱉었다.
그놈의 친구. 친구는 무슨. 나는 사실 그를 전혀 친구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번에 그가 덤덤하게 친구라는 단어를 받아들였기에 내게는 특별한 선택권이 없는 것 같았다.
곧장 튀어나올 뻔한 말은 친구가 아니라 당신이 더 상냥하고 정이 많은 거 같아요, 하는 거였는데 애써 속으로 삼켰다.
“그래, 친구. 그대가 친구라고 했지, 우리는.”
내 말에 에스티안은 달빛 같던 미소를 금세 얼굴에서 지워 버렸고, 곧 알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동생 얘기에는 예민한 거구나. 나는 머릿속으로 겨우 정리한 것들 중 몇 개를 묻기 시작했다.
“동생분도…… 에스티안 경처럼 눈이 푸른색인가요?”
“응.”
“혹시 머리 색은…….”
“갈색 정도일까. 두세 살쯤 아주 어렸을 땐 꽤 밝은 색이었는데, 한두 해 지나고 커 가면서 조금씩 진해졌어. 지금은…… 나처럼 아예 검은색일 수도 있겠지.”
푸른 눈에, 정원에서 햇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나는 갈색 머리를 찰랑거리던 엘의 얼굴이 점점 어른거렸다.
하지만, 푸른 눈에 갈색 머리는 제국 내에서 너무 흔한 특징이니까 이것으로는 절대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성격은 어땠나요?”
“음. 밝고 활발했어. 어릴 때부터 말도 잘하는 편이었고, 이리저리 정원 같은 데를 뛰어다니는 것도 좋아하고.”
엘도 밝고 활발하며 정원 같은 곳을 잘 뛰어다니지만, 이 또한 그녀만의 특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입을 뗐다.
“아까 에스티안 경이 생크림을 좋아한다고 하셨으니까…… 동생분도 생크림을 좋아하시려나요?”
“그렇지. 어머니가 이것저것 케이크 같은 걸 만들어 주시면 둘이 같이 먹었으니까.”
생크림 얘기까지 듣고 나니 정말로 손이 벌벌 떨리는 것 같아서 주먹을 쥐고 테이블 아래로 내려야 했다.
마음은 이미 내 생각대로 마구 흘러가 버린 것 같았지만, 더 확인해야 했다. 애초에 섣불리 짐작만으로 타인인 내가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문제라는 것도 알지만, 적어도 확인은 하고 싶었다.
계속 말해 달라는 듯 내가 쳐다보자 그는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꽃을 좋아했어. 어린아이라면 벌레가 많아서 꽃밭 같은 데는 잘 안 들어갈 법도 한데,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고 꽃밭에서 뒹굴었지. 좋아하던 꽃이 있었는데 나는 꽃을 잘 몰라서.”
에스티안은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며 어색하게 웃었지만, 꽃에 대한 얘기까지 들은 순간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어느 정도 결정을 내린 채였다. 이는 분명 확인해 볼 가치가 있는 정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은 컸고, 당연히 마구 덤빌 수는 없었다. 복잡한 생각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란티아 얘기를 이렇게 하는 건 처음이야.”
“아…… 죄송해요. 무작정 얘기를 들으려던 건 아니에요, 절대. 에스티안 경은 얘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제가 그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게 한 거라면…….”
“아니, 그 반대야.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던 얘기를 그대에게만은 할 수 있는 거야.”
혹시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일까 싶어 겨우 고개를 들어 에스티안과 눈을 마주치며 눈치를 보았는데, 다행히도 그는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씁쓸함과 그리움이 잔뜩 묻어 있는 게 보였기에 마음이 더 아팠다.
만약 우연의 일치로 그저 둘이 닮은 구석이 있을 뿐이고 헤어졌던 남매는 아니라면?
설레발쳐서 내가 키워 둔 둘의 기대와 희망이 고꾸라지게 된다면?
그런 일을 저지를 바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나을 것이다. 둘의 그런 얼굴을 보게 되는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작하려면 책임질 각오를 해야 했고, 나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중한 추억을 얘기해 주신 만큼, 저도 도움이 되도록 할게요.”
“고마워. 하지만 그대는 어디로 튈지 모르니…….”
“어, 어…….”
에스티안은 슬쩍 웃고는 내 손을 들어 올려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으아, 갑작스러운 스킨십인 건가? 단순히 내가 그를 도와준다고 한 것에 대해 기사도에서 나온 예의라고 생각해야 하나? 나는 당황해 손을 뻣뻣이 굳힌 채 얼빠진 소리를 냈다.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아 달라는 거야. 걱정되니까.”
“아…… 아, 네. 네. 그, 역시 친구라서 그렇게 걱정을 해 주시는 거죠! 감사합니다.”
열감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달아오르자 내 입에선 아무 말이나 나갔다.
사실은 내게 동생 얘기를 털어놓을 만큼 나와 친구 이상으로, 그러니까 이른바 썸을 타는 것처럼 친하고 나를 걱정해 주는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태까지도 나는 내 나름대로 관심을 표현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에스티안에게서 큰 반응이 없으면, 그야말로 정말 나를 친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래서 매번 친구, 친구 하고 강조하는 것도 있고.
“……그대는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네?”
“그래, 그것으로 시작해도 나쁘진 않지.”
에스티안은 남은 커피를 마시며 무언가 작게 말했는데, 거리에서 폭죽과 불꽃을 터뜨려 소란스러워지는 바람에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나에 대한 말인 것 같아 다시 물어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가 눈을 잠깐 감았다가 곧장 불꽃이 수놓고 있는 하늘로 시선을 돌려서 나도 거길 따라 볼 수밖에 없었다.
“우와……. 너무 화려하고 근사하네요. 축제 기간에 불꽃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나도 처음이야, 모든 게.”
시끌벅적하게 다들 불꽃놀이를 보며 소리를 질렀지만, 우리가 그걸 바라보는 동안은 왠지 우리만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조용한 느낌이 들었다. 타닥타닥 불꽃놀이용 도구들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거리에 흐르는 음악이 약하게 들려왔다.
취할 것 같다는 분위기가 이런 거구나. 하늘에는 점점 꽃과 별 모양의 불꽃이 크기를 키워 가며 퍼지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워요…….”
“그렇군. 정말 아름답군.”
순간적으로 에스티안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 들었던 고개를 내려 에스티안 쪽으로 돌렸고, 곧장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하늘에 퍼진 붉은 불꽃과 상반되는 푸른 눈. 하지만 불꽃보다 몇천 배는 더 뜨거워 보였다. 몇 번 느낀 적 있는 푸른 불꽃 같은 눈. 이거야말로 정말 아름답네.
그런데 설마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던 건가? 그게 아니고 방금 그저 눈이 마주친 거라면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부끄러운 것일 터이기에, 나는 그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대는 정말이지.”
에스티안은 마른세수를 하고는 낮게 웃었다. 그가 왜 웃는 건지도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웃은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친구……니까, 뭐.
목 안쪽을 울리며 즐겁게 웃는 그 소리와 붉은 불꽃이 터지는 소리, 그리고 웃느라 정신없어 지금은 보이지 않는 푸른 불꽃의 잔상까지 한데 어우러진 그날 밤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