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6/18)

6장

며칠 전 그렇게 우겼던 나는 내가 원하던 차림을 했다.

승마할 때처럼 셔츠에 재킷, 그리고 바지를 입었다. 천이 이리저리 흔들려서 말발굽 같은 데 밟히거나 해서는 안 될 것 같았기에 옷은 전부 몸에 잘 맞는 정도로 붙었다.

구두 대신 종아리를 거의 덮는, 굽이 낮은 가죽 부츠도 신었다. 길게 흩날리는 머리도 거추장스러울 게 분명했기에 하나로 묶었다.

한 손에는 치료사가 있어도 은근히 부족하다는 얘기를 들었던 약재와 붕대가 든 가방을 든 채였다.

사실 모든 이유를 차치하고, 그냥 이렇게 입으면 몸도 가뿐하고 편해서 참 잘 입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냥제 장소인 동쪽 숲 안쪽에 다 같이 모인 지금 모든 이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하…… 마치 내가 사냥이라도 한 듯 기운이 빠졌다.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아델린, 나는 아델린이 당연히 드레스를 입을 줄 알았어.”

내 모습에 가장 많이 놀란 건 리아나였다.

리아나는 차분하면서도 고운 드레스 차림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딱히 뭘 입으라고 골라 주지도 않았는데 본인에게 어울리는 예쁜 걸 잘 입고 왔다. 여러 영애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걸 보니 내가 괜히 오버했나 싶기도 했다. 얌전히 있는 게 역시 최고인 건가.

나는 한숨을 쉬며 다들 모여 있는 쪽에 치료할 거리가 든 가방에 대해 대충 설명하고는 내려놓았다.

“그냥, 불편한 복장이면 이리저리 다니기 힘들 것 같아서. 근데 괜히 이랬나 싶기도 하네.”

“아, 아냐. 아델린은 뭘 해도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

“그렇게 말해 주는 건 리아나 너뿐이야. 네가 그러니까 마음이 놓인다.”

내 말에 배시시 웃던 리아나는 잠시 시녀에게 부탁할 게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본격적인 사냥을 하러 가기 전 다들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하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그냥 있던 자리에서 몇 걸음 정도만 움직였다.

곧 기사들이 떠나고 나면 저쪽에 마련된 티 테이블에서 제2의 사냥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벌써 피곤했다.

가뜩이나 이리저리 눈길을 받아 괜히 몸이 찌뿌둥한 것 같아 팔과 어깨를 휘휘 돌리는데, 순간적으로 어정쩡하게 고개가 멈췄다.

단체로 쭉 도열한 황실기사단 맨 앞에 서 있는 에스티안…….

그는 이미 내가 그를 발견하기 전부터 나를 계속 보고 있던 것 같았다.

조금 놀란 얼굴인가? 적어도 웃는 건 아니었다. 놀랄 법도 하지. 혼자 이런 복장인데…….

사냥제에 오려면 적어도 짐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입은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부끄러워졌다.

그냥 튀지 않게 드레스나 입을걸. 이왕이면 에스티안이 봤을 때 좀 더 예쁠 만한 것으로 말이다. 생각이 짧았나. 아니, 아예 생각도 못 했다는 쪽이 더 가까웠다.

그래, 기사단장인 그는 당연히 여기 오는 게 맞지. 오는 정도가 아니고 아마 사냥이 진행되는 내내 선두로 설 것이다.

평소에 그렇게 에스티안 생각만 해 댔던 주제에 나는 이런 파격적인 복장을 정하면서 그가 어떻게 볼까에 대해서는 짐작도 못 했다.

더 웃긴 건, 입고 있는 사냥제용 재킷을 맞추면서 에스티안의 몸에 근사하게 맞았던 검은 제복을 떠올리며 ‘제 재킷도 검은색으로 해 주세요!’ 하고 소리쳤다는 거다.

하나만 알고 둘은커녕 반도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있는데, 어느새 에스티안은 내 앞에 서 있었다. 인사도 잊고 나는 바보 같은 말을 시작으로 입을 떼었다.

“어, 에스티안 경. 이렇게 대열에서 나와 있어도 돼요?”

“그대가 나오게 했잖아.”

“제가 뭘 어쨌다고……. 아, 복장이 이상해서 그래요? 이래 봬도 고민 끝에 이렇게 입은 거예요. 방해가 안 되었으면 싶기도 하고 해서…….”

“방해라니, 그게 무슨. 아, 방해가 맞나. 사냥은커녕 그대 때문에 다른 데 시선을 돌릴 수가…….”

“그래도 치렁치렁한 것보단 이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많이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지금 모든 기사 놈들이 그대만 쳐다보고 있다고.”

온몸으로 다른 기사들로부터 나를 가리고 선 에스티안은 화가 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고는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이거 분명 설레도 되는 상황이 맞는 거지! 가슴이 심하게 쿵쿵대며 두근거리면서도 기분이 묘해진 나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웃기까지 하고 말이야.”

그는 특유의 기운을 생생하게 뿜는 동안에도 언짢은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또 문득 충동적으로 용기를 내고 싶어 입을 열었다.

“에스티안 경. 저, 그, 제가 징표 드릴까요?”

그러고는 재킷의 주머니와 바지 주머니를 다급하게 뒤졌다. 하지만 뭔가가 나올 리 없었다.

쓸데없는 건 챙겨 가 봤자 불편하기만 할 거라고 큰소리치며 모든 짐을 두고 온 게 누구였는지……. 정말 스스로가 한없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말을 던져 놔 에스티안은 이미 엄청나게 놀란 얼굴로 나를 저렇게 보고 있는데!

이대로 내가 낸 용기가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지나 싶던 찰나, 기적적으로 내가 머리를 묶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잽싸게 머리를 묶었던 손가락 두 개 두께의 짙은 적색 천을 풀었다. 높게 올라가 있던 머리카락들은 순간적으로 흐드러지며 어깨 너머까지 내려앉았다.

“아델린.”

당황한 듯한 에스티안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자의 털처럼 흩어졌을 내 머리도 별 상관 없었다.

오직 징표! 징표를 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내 머리는 길고 숱도 많았기에 천 길이도 길었다.

나는 초인적인 힘으로 천의 4분의 1 정도를 이로 끊어 냈다. 너무 당황하면 없던 힘도 이렇게 발휘되는구나. 내 머리는 남은 천으로 묶어도 충분할 것이었다.

나는 끊어진 천을 요리조리 묶어 작은 리본으로 만든 뒤 에스티안에게 건넸다.

“좀 그렇긴 한데…… 그래도 오히려 이런 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사냥 성공 기원. 아, 그. 사냥 성공도 좋지만 절대 다치지 마시고요. 항상 조심하시고요. 물론 조심만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또…….”

호기롭게 리본을 내밀고는 또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이고 헛소리를 하는데, 에스티안이 리본을 든 내 손을 천천히, 아주 꽉 잡았다. 천천히 얼굴을 드니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델린, 그대는 늘 내 예상을 깨 버려.”

에스티안은 내 손에 한 번, 리본에 한 번 입을 맞추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입술을 꾹 누르는 그 몸짓이, 리본에 닿는 건지 내 손에 닿는 건지 구분이 안 되었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너무 성스럽고 아름다워 내 입은 절로 벌어졌다. 그리고 그는 리본을 갑옷 안쪽에 잘 고정했다.

그 순간 황태자 옆에 있던 시종이 나팔을 불어 모든 기사와 귀족이 대열을 지키고 주목하기를 알렸고, 에스티안은 푸른 눈을 나와 마주친 뒤 씩 웃으며 내 손을 꽉 잡았다 놓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얼굴이 달아올라 후끈거리는 걸 그대로 느끼며 서 있던 나는 어느새 옆에 온 리아나가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멍할 수밖에 없었다.

곧 황태자 유리엘이 앞으로 나와 사냥제를 알리는 말을 시작했기에, 모두 고개를 살짝 내렸다. 나도 정신을 퍼뜩 차리고는 여태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했다.

“매년 축제를 앞두고 시행하는 사냥제에 이번에도 많은 협조를 해 주어 고맙소. 신전에서 의식을 행했을 때 신관의 느낌이 좋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올해도 안전하고 감사히 사냥을 마칠 수 있을 것 같군.”

역시 황태자인가. 말하는 것에서부터 위압감이 느껴졌다.

가면무도회 때도 느꼈지만, 이렇게 공식적인 행사에서 내가 직접 보게 된 건 또 처음이라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사자의 흉흉한 기운이 가득하면서도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을 우두머리로서 감싸는 든든함까지도 느껴졌다. 선이 고운 얼굴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냥제의 시작과 축복의 기원 등과 같은 말을 꺼내고 나서 마무리만 지으면 될 것 같은데, 유리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에 모두 잠시 고개를 들었다.

얼떨결에 나도 고개를 들었는데, 곧장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냥 내가 있는 방향 쪽을 보는 거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그런 여지도 없이 나를 보는 게 확실했다.

으, 저놈의 붉은 사자. 붉은 눈. 헉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실로 강렬한 눈빛이었다. 그는 화가 난 건지 표정도 몹시 안 좋았다.

“……사냥제가 진행되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이오. 허튼짓을 하다가는 다칠 수도 있으니 언제나 조심하시오.”

움츠러들 것 같은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지만, 어떻게 해도 그는 분명 나를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들어 보니 내 얘기가 맞는 것도 같잖아. 그냥 드레스 입었으면 별일 없었을 것을, 정말 괜히 이런 복장으로 온 건가.

모든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사냥하러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고 분주해졌는데도, 유리엘은 여전히 나를 매서운 눈길로 쳐다보며 서 있었다.

아니, 황태자여서 앞장서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저러고 서 있어!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한 나는 옆에 있던 리아나에게로 고개를 돌려 잽싸게 말을 걸었다.

“황태자 전하께 징표는 드렸어? 아직 못 드렸으면 같이 가 줄까?”

“…….”

“리아나?”

“아, 응. 전하께서 이쪽을 보고 계신 것 같아서. 징표는 아직 못 드렸어.”

“그래? 그래서 너 보고 계신 건가 보다. 얼른 드리고 우리도 가서 앉아 있자. 혼자 다녀올 수 있겠어? 내가 같이 가도 징표 준다는 말은 네가 직접 전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 같이 가 줘. 고마워, 아델린.”

나는 리아나의 손을 잡고 유리엘에게 갔다. 가는 내내 그가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앞까지 가서는 인사했다.

“제국의 성장하는 붉은 사자를 뵙습니다. 리아나 영애가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 하여 같이 왔습니다.”

유리엘은 말없이 나와 리아나를 보았다. 리아나를 한 2초, 3초 정도 보다가 다시 눈길을 돌려 나를 본다는 게 문제였지만. 일단 그건 무시하고 고개를 살짝 돌려 리아나에게 징표를 꺼내라는 신호를 주었다.

“전하께 사냥제 성공을 기원하는 징표를 드리고자 합니다. 부디 받아 주시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직접 황실 문양을 수놓은 듯한 손수건을 든 리아나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휴, 정말 얼마나 긴장될까. 가뜩이나 공기가 일렁일 만큼 유리엘의 기운이 넘치고 있는데.

나도 덩달아 긴장하던 순간, 다행히 그가 리아나의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비록 아무런 표정은 없었지만 리아나의 징표를 그가 가졌다는 게 어딘가. 눈을 돌려 슬쩍 보니 리아나도 놀라며 기뻐하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야……. 이제 산 하나를 넘었다는 생각에 대충 묵례하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아델린 영애는 징표가 없는가?”

리아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도, 내가 늘 아델린이랑 자신을 붙인다는 것도 뻔히 알면서 저런 질문을 하다니, 악질이 따로 없구나.

기쁜 마음에 예쁘게 웃던 리아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가시는 게 느껴졌다. 나는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 입가를 억지로 끌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네, 송구스럽게도 없습니다. 제 징표가 없어도 사냥제가 당연히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미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무시하고 당장 뒤돌아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을 참고 말했다.

그런 마음이 제법 잘 숨겨진 것 같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사회생활 했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되긴 하는구나.

그러나 유리엘은 거지 같은 상사나 클라이언트보다도 더 극단적이고 악독한 상대임이 확실했다.

“만일 사고가 나면 아델린 영애의 징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뭐라는 거야, 저놈이.

그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억지에 가까운 그의 말에 이미 리아나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심지어 대부분의 기사들은 이미 전진할 준비를 마쳐서, 유리엘만 빨리 가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그는 이러고 있는 거였다.

“매사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는 전하께서 일어날 수 있는 좋지 못한 가정을 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는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얼굴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하를 포함해 다른 기사들이 모두 힘써 주실 것이 자명하기에, 저는 그런 상상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미 대기하고 서 있는 기사분들의 자태가 늠름하기도 하고요.”

“…….”

“또한 리아나 영애의 징표에 걱정하는 마음과 안전을 위한 기원이 아주 가득하니, 전하께서 그 모두를 믿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미친놈, 지랄 말고 빨리 꺼져, 하는 말에 살을 붙여 풀었다.

잘못 해석하면 리아나의 징표에 대해서는 물론, 그만을 믿고 진작에 사냥하러 갈 준비를 마친 기사들의 가치까지도 깎아내려질 수 있음을 넌지시 얘기했다.

내가 쓴소리를 이런 듣기 좋은 소리로 포장하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라고.

“하, 재미있군.”

내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유리엘은 나와 리아나를 한 번씩 쳐다본 뒤 갑옷 부딪치는 소리를 크게 내며 대열 쪽으로 갔다.

그의 손에 리아나의 징표가 들려 있다는 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약한 안도였다. 사냥은 이제야 시작이고 내가 하지도 않으면서 벌써 한바탕 사냥을 끝낸 것처럼 지쳐 버렸다.

“리아나, 네 징표를 전하께서 받아 가셔서 정말 다행이야. 우리도 가서 앉자.”

“으, 으응. 그래.”

리아나와 나는 이미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모인 다른 영애들 쪽으로 갔다. 리아나가 예쁘기도 해서였지만, 내 복장이 여기 있는 그녀들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당연히 이목은 집중되었다.

“아델린 영애, 이번에는 드레스가 아닌 복장을 하고 오셨네요.”

“아델린 영애야 워낙 아름답지만, 이런 복장으로 오실 줄은…….”

“드레스가 아닌 재킷과 바지도 보통 살롱에서 맞춰 주나요?”

“아, 혹시 신사 전용 살롱에서 따로 맞추신 것이려나요?”

원하지 않는 관심은 사절이다. 그리고 관심을 원하는 이가 나와 가까이 있을수록 더더욱.

리아나는 모든 질문 공세가 나에게 쏟아진 것에 당황스러우면서도 내심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 말할 타이밍을 찾아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으니까.

애써 마음먹고 여기까지 왔는데 저러고 있게 할 수야 없지.

“드레스가 아닌 복장을 하고 온 이유는.”

내가 입을 열자 모든 영애들이 집중했다. 하…… 이거 뭐, 프레젠테이션 하는 것도 아니고.

“드레스보다는 재킷에 바지 차림이 아무래도 사냥제에서는 움직이기 편할 것 같아서예요. 수풀도 많고, 땅도 험하고. 드레스가 어디 걸리기라도 하면 찢어지기 쉬우니까요.”

“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드레스를 안 입고……. 이왕이면 기사님들도 계시니까…….”

“기사님들은 사냥하시느라 바쁘지 않을까요? 사냥하러 오셔서 저희 드레스만 보고 계시는 기사님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예쁜 복장으로 있어서 나쁠 것 없지만, 그분들의 아량은 저희의 복장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넓을 거라 믿고요.”

옅게 웃으며 말하는 나를 보며 그녀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당황하긴 아직 이르다, 이 사람들아.

“그, 그럼 저 가방은…….”

“거기엔 치료할 거리가 들었다고 아까 말씀드렸죠. 아무리 준비해도 약초가 부족하다고 하던데요.”

“…….”

“치료사분들이 계셔도 많은 게 부족하다는 얘기를 듣고 간단히 챙겨 온 거예요. 여기까지 오려면 이 정도의 쓸모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쓸모! 내 입에서 이런 치 떨리는 단어가 나오다니…….

평범한 삶을 살 적 회사에서는 늘 효용 가치와 쓸모를 운운했다.

사람이 한 집단에서 쓰임새가 있어야 한다, 자기 몫은 할 줄 알아야 한다, 최소 1명분의 효용 가치는 발휘해 낼 줄 알아야 한다 등등.

당시에는 돈 더 안 주려는 수작이라고 욕하며 비꼬기 일쑤였는데, 알게 모르게 그게 내게 이미 배어 있던 모양이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얼빠진 영애들을 쳐다보았다.

“뭐, 그래서 그랬어요. 그건 그렇고, 드레스 차림 아닌 저보다 여기 리아나 영애가 훨씬 우아하지 않나요? 리아나 영애의 드레스는 버슬도 없고, 장식도 적고. 그렇게 활동성은 있으면서도 근사함은 놓치지 않았으니 참 현명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그러네요. 리아나 영애의 드레스, 정말 아름답네요. 길이도 너무 길지 않아 끌릴 일도 없고…….”

“그 드레스는 어디서…….”

다행히 금세 화제는 전환되었다. 리아나도 잠깐 당황한 듯하더니 나를 보고 살짝 웃고는 조심스럽게 무리에 섞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그들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어차피 이렇게 차만 마시는 거라면 정말 내 방 내 정원에서 마시면 되는 건데.

가뜩이나 일찍 일어나 이리저리 준비까지 한 탓에 잠이 오는 나는 재잘재잘 얘기하는 그녀들의 말소리를 음악 삼아 먼 산을 보고 간간이 고개나 끄덕이며 눈만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하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있었을까. 태양열 받아 까딱대는 인형처럼 움직이던 걸 멈추고,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으며 눈이 더 이상 감기지 않게 된 건, 귀에 꽂히는 이야기를 그녀들이 나누고 있어서였다.

“……역시 기사님들은 사냥이나 마물 퇴치 하실 때처럼 강인한 모습을 보이실 때가 너무 멋진 것 같아요.”

“에이, 이런 외부 행사 말고 훈련장에서 훈련하실 때도 얼마나 멋지신데요.”

“……에스티안 블라머프 기사단장님이 그중 가장 멋지신 것 같죠.”

“네에, 그분은 정말 보고 있으면 황홀해질 정도예요. 그 큰 키에, 단단한 몸에. 게다가 검술 실력은 또 얼마나 뛰어나신지.”

여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대화하는 그녀들 틈으로 뛰어들기엔 민망했다. 아, 어차피 온 거 집중 좀 할 걸 그랬나.

그래, 이왕 에스티안에게 계속 용기를 내기로 했으니 정보는 많이 얻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어쩌면 지금부터가 정말 알짜배기 정보일 수 있었다.

나는 귀만 연 채로 계속 테이블 위나 그녀들 뒤로 보이는 숲을 애매하게 바라보았다.

“……아무 감정 없는 푸른 눈에 새까만 머리카락을 보면 사실 너무 무섭지만, 그 냉기로 모든 것을 베어 버리시니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사실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닌데. 감정이 그렇게 없는 사람도 아니고.

“저번에 마물 퇴치도 제일 많이, 훌륭하게 해내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 마물 퇴치 때도 아마 중책을 맡으실 예정이라고 하더라고요. 어쩜, 겁이 하나도 없으신 건지. 그 정도로 대담하고 용맹하신 건지.”

여동생 얘기를 할 때 한껏 떨렸던 에스티안의 눈동자를 나는 분명 기억하고 있다. 겁 없는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것도 알고.

“그렇게 멋지신 분인데, 항상 여자 문제가 따라다닌다는 게 너무…….”

“그렇죠, 어제만 해도 기사단장님께서 또 3번가 술집 쪽에 가는 걸 본 사람들이 있다더라고요.”

“그 후에는 기사단장님 개인 숙소로 웬 남작가 영애를 불렀다고 하던데요.”

“뭐, 그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니까요.”

당연히 그 모든 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지만 내 얘기가 아닌 것에 대해, 그리고 에스티안이 예민해하는 부분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었기에 의연한 척 가만히 있었다.

“정말, 사람은 완벽할 수는 없나 봐요. 그렇게 근사하신데 그런 문제가 있다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게다가 그건 모든 좋은 점을 다 흔들고도 남을 나쁜 점이라…….”

“저는 그런 분은 아무리 멋지셔도 좋은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 봐야 호색한이 아닌가요?”

이런 식으로 소문이 나는구나. 아무런 근거도 없는데 그저 입에서 입으로 퍼져서. 그래서 이전부터 이렇게 여럿이 모여 뒷얘기 하는 걸 싫어했던 건데.

이 얘기는 또 사냥제 이후 일파만파 퍼져 제국 전체에 돌 것이고, 빠르게 에스티안 본인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축제를 거쳐 더 부풀려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는 또 늘 그랬듯 그러려니 하고는 흘려 넘기고 여동생 찾는 데만 마음을 다하겠지.

나는 혀까지 차며 몹쓸 것이라도 봤다는 듯 얘기하는 그녀들을 더 이상 앞에 두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아무리 어떤 사람에게 좋지 못한 점이 있다고 해도.”

“……아델린 영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말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요?”

“영애, 그건 기사단장님께서…… 영애도 소문을 익히 들어 아시는 게 아닌가요?”

“네, 알지요. 알지만, 본인 앞에서도 하지 못할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누구든지요.”

나는 숨을 겨우 고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 호호 웃으며 대화하던 영애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든 채 나를 올려다봤다.

한껏 열이 오른 머리를 잠시 짚었다가 나는 다시 입을 떼었다.

“지금 사냥제도 잠시 쉬는 시간인 것 같은데, 저는 잠깐 일어날게요. 몇몇 기사분들이 베이스캠프인 이곳으로 온 것 같고, 아마 더 오실 테니까요. 혹시 생겼을 부상자를 위해 가져온 약초 좀 전달해 드리려고요. 남의 뒷얘기를 하며 그냥 앉아만 있는 것보단 이게 낫겠죠.”

그 자리를 떠나 치료사들에게 가방에 든 것들을 대충 건넨 다음, 나는 한쪽 구석에 서서 그저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열을 식히고 있었다.

사실 남의 일, 남의 소문이라 내가 이 정도로 화내는 건 그들로서는 어이없는 상황일 것이다. 내가 에스티안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하니까.

아마 옷도 튀게 입고 온 주제에 정의의 사도인 척하는 관심 종자라고 생각하겠지. 에스티안의 뒷얘기에서 이제 내 뒷얘기로 대화 소재가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 사냥제가 내가 참가한 마지막 사냥제가 되려나. 헛웃음을 삼키며 뻣뻣하게 굳은 어깨와 목을 주무르고 꺾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저, 아델린.”

작게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의 리아나가 서 있었다.

하, 에스티안 생각에 빠져 그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리아나 잘되게 해 주겠다고 데려와서는 이게 또 무슨 짓인가 싶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리아나, 미안해. 내가 갑자기 나와 버려서 놀랐지. 내가 흥분해 버리는 바람에. 내가 너를 끌고 와서는 뭐 한 건지 모르겠다. 진짜 미안해. 저 자리에 있기 어색하면 여기서 나랑 있다가 가도 돼.”

놀라고 미안한 마음에 두서없이 내뱉는 내 말을 들은 리아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냐, 아냐. 다른 영애들도 지금 잠시 쉬었다가 다시 모이기로 했어.”

“그렇구나. 그럼 리아나, 황태자 전하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그쪽으로 데려다줄까?”

“아냐, 그것도 아냐. 나는 네가 걱정돼서 온 거야.”

“어?”

“네가 기사단장님과 친한 걸 아는데도 나는 저 자리에서 아무 말도 못 했잖아. 나야말로 미안해.”

“아, 그…… 친한 건가. 친한 건 아니지만. 아니, 안 친한 건 아니지만.”

늘 내가 데리고 다녀야 하는 애라고만 생각했던 리아나가 저런 생각을 하는지 몰랐기에, 나는 당황해서 말이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을 계속했다.

“다들 소문 얘기만 해서 네가 속상했을 걸 알아. 그리고 거기에 대해 친구라고 앉아 있는 내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어서 정말 미안했어. 너는 오늘도 나를 위해 줬는데.”

“아, 아냐…… 그 정도는.”

정말로 리아나가 좀 성숙해진 건가? 멋쩍어진 기분에 목덜미를 잡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리아나가 갑자기 내 귀에 가까이 대고는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이 말을 델 너한테 전해 주는 게 맞는 거 같아서.”

“응?”

“저쪽, 동쪽 숲 안쪽에서 기사단장님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뭐?”

“잠시 여기로 돌아온 평기사 한 명이 전해 줬어. 쉬는 시간 동안은 계속 기다리시겠다고 했대. 이쪽으로 나오거나 자리를 비우시지는 못하니까 안쪽에서. 이런 건, 이렇게 은밀하게 전해 주는 게 맞는 거지?”

“어…… 음…….”

어안이 벙벙한 내 앞에서 귓속말을 마친 리아나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네가 아까 나를 잘 데리고 있어 준 덕에, 나도 여기 그냥 혼자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아델린, 다녀와.”

“하하…….”

“얼른.”

리아나는 숲 안쪽으로 들어가 몇 시 방향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큰 나무에 리본을 매어 표시해 놨다며 정확한 장소를 얘기해 주었다.

그러고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밀고 화사하게 웃고는 양 주먹을 꽉 쥐며 힘내라는 동작까지 취했다. 그리고 다른 영애들과 약간 떨어진 쪽으로 돌아서 갔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에스티안이 나를 따로 불렀다니. 몇 시간 전 잠깐 봤던 것에 이어 또 얘기를 하게 되는 건가. 이렇게 사냥제 중간에 둘이 따로 얘기를 나눠도 괜찮은 건가.

아니, 안 괜찮으니까 본인이 직접 못 나오고 다른 사람을 시킨 건가. 설마 다친 건 아니겠지. 징표, 징표도 줬으니까.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건 금방이었다. 쉬는 시간은 길지 않다. 만나려면 사냥이 다시 시작되기 전에 얼른 만나야 한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발걸음은 곧장 움직여졌다.

나는 숲 안쪽으로 걸었다. 걸음은 점점 빨라져 나는 뛰게 되었다. 드레스를 입었다면 역시 이렇게 빠르게 뛰지는 못했겠지. 그 순간에도 복장 선택이 탁월했다는 생각이 들어 더 속도가 붙었다.

리본, 리본이라고 했지. 내가 준 그 리본인가. 근데 징표를 그렇게 빼서 나무 같은 데다 걸어 놔도 되는 건가. 부정 타지는 않을까?

정신없이 알려 준 길대로 오다 보니 어느덧 숲 안쪽에 도달한 건지 우거진 수풀과 나무로 주위가 약간 어두컴컴해졌다.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별로 무섭다는 느낌도 안 들었다. 곧 에스티안이 온다는 생각 때문인가?

고개를 휘휘 돌리며 나는 에스티안이 어디 있는지만 찾았다. 그는 너무나 눈에 띄는 사람이니 이런 숲속에서 찾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므로.

이삼십 분쯤 더 걸었을 무렵, 여전히 에스티안은 만나지 못한 채였다. 그는커녕 매달아 뒀다던 리본도 아직 발견을 못 했다.

길이 어긋났나. 숲에서 사람 만나는 게 쉽진 않을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쉬는 시간도 이젠 끝난 것 같고 나도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오던 길에서 방향을 틀어 돌아가려던 순간.

“어?!”

절로 높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미처 못 보고 오던 왼편 구석 나무에 걸린 리본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내가 준 리본은 아니었고, 그냥 빨간색의 일반적인 리본이었다.

이 숲에, 이곳에, 저 나무에 리본이 매여 있을 일은 없을 테니 저건 분명 에스티안이 해 둔 게 맞을 것이었다.

그를 만나지 못해 내심 축 처졌던 마음이 다시 위로 솟구치며 가슴이 쿵쿵대기 시작했다.

저 나무 뒤에 서 있으려나, 옆에 서 있으려나. 다치지는 않았냐고 물어야 하나? 아니, 헤매다가 늦었다고 말하는 게 먼저겠지. 늘어지던 걸음을 재촉해 나는 리본이 달린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리본만 묶여 있을 뿐이었다.

“먼저 갔나……. 너무 늦었나 봐, 내가. 너무 많이 헤맸나 보다.”

기대했던 만큼 허탈한 숨이 터져 나왔다. 여기서 좀 더 얼쩡거리다가 가는 게 그래도 좋을 것 같았다. 미약한 기대마저 저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 기대까지 무너지면 사실 더없이 처지겠지만, 일단은 기다리고 싶었다. 나는 나무 주변을 휘휘 돌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뒤쪽에서 수풀을 밟았을 때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인가?!

“에스티안 경?”

곧장 몸을 돌렸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뭐라 할까. 아무리 봐도 짐승은 아닌 것 같으니 마물이 맞겠지.

아주 검고, 형태가 어딘가 불명확하고, 꿈틀대는 동안 연기인지 나쁜 기운인지 모를 것이 주변으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분명 동쪽 숲에는 마물이 없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래서 일부러 여길 장소로 잡았다고 하는 말도 들은 것 같은데.

그러나 고민하기엔 이미 늦은 것처럼 보였다. 마물에게는 딱히 눈이랄 것이 없었지만, 그게 나를 보고 향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분명하게 느껴졌다.

꿈틀대는 몸짓이 좀 더 커지고 빨라지더니 금세 훅 하고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 움직임이 너무 빨라 눈앞에서 뭔가 번쩍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기이하게도 모든 게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이루어졌다.

이쪽으로 움직이는 검은 형태,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것 같은 와중에 손처럼 뻗어져 나오는 무언가. 내 발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머릿속에 곧장 바로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에스티안이었다.

이런 게 주마등이라고 하는 건가? 내가 이렇게 죽으면, 에스티안은 혹시 늦게라도 와서 기다리고 있으려나?

그러면 기다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유언에는 사실 네가 그렇게 여동생을 찾아 헤매며 갖은 못된 소문에 시달리게 된 게 사실 나 때문이라고 밝혀야지. 그리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그런데도 열심히 사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고, 좋아졌다고도 써야지.

아, 이 정도로 에스티안을 향한 내 마음이 깊었던가? 깊어진 마음인지 알량한 책임감인지 둘 다 때문인지, 그래도 그가 이후에 여동생을 잘 찾고 잘 살고 하는 모습을 보고 싶긴 했는데.

친구가 글 쓰는 내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댔는데 그걸 나 몰라라 하고는 이렇게 죽는 건 정말 책임감 없고 그야말로 쓸모없는 게 아닌가?

그래도 빡빡하게 살다가 잠시나마 겪어 본 적 없는 귀족의 삶을 누려 즐거웠기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도 큰 후회가 없는 것 같았다.

아, 하나 있네. 에스티안을 더 이상 못 본다고 생각하면 그건 좀 아쉽다.

이제 느려 보이던 마물도 정말로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무섭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생각뿐이었는지 소름이 끼쳐 왔다. 사냥제의 사냥감은 내가 된 건가…….

“아델린!”

누군가 내 몸을 확 끌어안고 바닥을 굴렀다. 여러 바퀴 구른 것 같은데도 내 머리며 팔을 강하게 감싸고 있어 나는 별로 충격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게 누군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나무와 숲 향기. 만났구나. 우리 여기서 드디어 만난 거구나. 그가 안 온 게 아니었어.

“……!”

반가움과 울컥함에 에스티안을 부르고 싶었는데,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에스티안이 내 몸을 낚아챈 순간 어떤 힘 같은 게 정통으로 내 가슴을 세게 미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그가 갖고 있는 특유의 오러인 것 같은데…….

늑대?

그의 검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내가 느끼는 오러에는 형태도 색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늑대라는 느낌이 분명하게 들었다.

귓속을 웅웅 울리는 거친 늑대 울음소리 같은 게 들리는 것 같고, 날카로우면서도 강한 힘이 훅 느껴졌다.

아, 그래. 생각났다. 에스티안은 늑대의 힘을 내뿜는 오러를 쓴다. 그것도 사실 내 탓이나 다름없었다.

‘황태자는 사자의 오러를 쓰게 하고, 다른 남자 주인공은 뭘 쓰게 하지?’

‘야, 뭘 고민해. 나쁜 남자라면 당연히 늑대 아니냐! 그것도 아주 강렬한!’

아주 단순하기 짝이 없는 사고였지…….

에스티안이 마물을 잡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에스티안이라면, 너무 강해 일반인은 쉽게 다루지 못한다는 늑대의 오러를 쓰는 그라면, 마물 따위는 단칼에 없앨 수 있겠지.

그런데 정말로 그 힘이 너무 강해서인지 계속 가슴께에 묵직한 압력이 왔다. 몸이 무거워질수록 시야가 점점 흔들리며 흐려지더니 귀에서 삐- 하고 이명이 들렸다.

마물과 에스티안이 맞붙었다면 이제 마물로부터는 안전해진 것 같은데 왜…….

“……델린, 제발. 제발 눈 좀 떠 봐!”

“헉. 헉…… 억. 윽.”

물속에서 바깥으로 확 끌려 나온 것 같더니 갑자기 번쩍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던 건가? 에스티안과 나는 함께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내 머리는 뒤로 넘어가 있었고, 그가 손으로 강하게 받치고 있었다.

놀라서 고개를 바로 하니 약간 뿌옇게 에스티안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내 목과 볼에 급하게 손을 대 보았다. 손길도 옅게 떨리고 있는 데다 너무 절망스러운 표정이라 얼른 뭐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헉헉대며 가슴을 쳐야 했다.

“괜찮아. 괜찮아. 나 쳐다보고 숨 쉬어. 그렇지. 그렇게.”

에스티안은 주먹 쥔 내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붙잡아 내리고는 내가 천천히 호흡할 수 있게 같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 주었다. 그 덕에 나는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괜찮아? 정신이 들어?”

“어, 네. 으아…….”

온몸에 힘이 확 빠져 몸이 기울고 앞으로 엎어질 뻔했지만 에스티안이 내 어깨를 곧바로 잡았다.

한 팔로 나를 끌어안듯 꽉 붙잡은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를 확 쳐다보는데 무언가 걱정과 원망이 뒤섞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조금 전보다는 약해졌다고 하나, 계속 늑대의 기운을 미친 듯이 뿜고 있으면서 그렇게 분노까지 보이자 정말로 으르렁대며 성난 늑대 같았다. 아니, 사실은 대형견 느낌인가?

또 푸른 불꽃처럼 일렁이는 에스티안의 눈을 보며 너는 다친 곳이 없냐고 먼저 물어야 할지,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지금 나는 완전히 멀쩡하다는 말을 해야 할지 잠깐 머뭇거리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피하지 않았지? 그냥 그대로 있었으면 죽는 거였어.”

“아, 그건. 너무 놀라서, 무서워서…….”

에스티안이 너무 화난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 나는 절로 눌린 목소리가 기어가듯 흘러나왔다.

아니, 무서워서 놀란 게 내 잘못은 아닌데. 하지만 그가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으로 말을 잇기에 나는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나타난 건 동물도 아니고 마물이었어. 그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하, 그걸 떠올리는 게 더 무섭군. 이 깊은 숲까진 대체 왜 혼자 온 거지? 내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랬다면 그대는……!”

에스티안은 늑대의 기운을 여전히 풀풀 날리면서 거의 날뛰다시피 흥분하고 있었다. 그의 걱정스러운 마음이 너무 절절하게 느껴져 나는 기가 죽어 있었는데도 그 와중에 기분이 좋아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델린, 지금 웃음이 나와? 그대가 죽을 뻔했다고. 그대가…….”

한숨을 크게 내쉰 뒤 에스티안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고 마른세수를 했다.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은데도 다른 한 손으로는 나를 꽉 붙잡은 채였다.

내가 혹시라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대로 넘어갈까 봐 흙바닥에서 여전히 일어나지도 않고 있는 그를 보니 마음속에서 몽글몽글 무언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의 인생을 꼬아 놨는데 그는 내가 죽을까 봐 이렇게 걱정해 주는구나. 낯선 곳에서 내가 죽을까 봐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그래서, 또 한 번 용기를 냈다. 아니, 용기라기보다는 충동에 가까웠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겨우 팔을 들어 올려 에스티안을 끌어안았다. 힘이 빠진 건 사실이었기에 꽉 안을 수까지는 없었지만, 최대한 그를 안아 주려고 했다.

“안 죽었잖아요. 에스티안 경이 살려 주셔서.”

“……그걸 지금 말이라고.”

당황한 듯 잠시 몸이 굳었던 그는 숨을 깊게 내쉬고는 곧 내가 안은 힘의 몇 배는 더 되는 것 같은 힘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으스러질 것 같은 포옹이면서도 너무 소중한 것을 다루듯 부드러운 그 느낌에 마음이 또 울렁거렸다.

“고마워요, 정말.”

“내가 더. 내가 더……. 아무 일 없어서 고마워.”

끝나지 않았으면 하던 포옹을 마치고 에스티안은 조심스럽게 몇 번이나 내 상태를 확인했다.

열이 갑자기 오르지는 않는지, 앞은 잘 보이는지, 현기증이 나지는 않는지, 가슴 압박 같은 건 없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했다.

“저 완전 괜찮아요, 진짜.”

“완전 괜찮은 사람은 기절하지 않아.”

“그건…….”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나와 눈을 맞추며 에스티안은 손을 내 이마에 얹었다. 사실 눈앞이 빙 돌았기에, 그가 이마를 눌러 주니 좀 나았다.

그저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는 것도 좋겠다 싶어 가만히 있던 나는 문득 생각나서 얘기했다.

“에스티안 경은, 늑대군요.”

“뭐?”

“아, 에스티안 경이 아까 마물을 죽일 때 느꼈어요. 늑대의 오러를 쓰시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 늑대의 기운이 느껴져서요.”

앞뒤 다 잘라먹은 내 말에 황당한 얼굴을 한 에스티안은 아, 하고 탄식한 뒤 말을 이었다.

“그래, 늑대의 힘과 오러를 써. 아깐 내가 너무 흥분해서……. 게다가 죽은 마물의 기운이 좀 남아 있었을 거야.”

“늑대. 늑대…… 왠지 잘 어울려요.”

“그런가.”

“네, 그래요.”

“그대가 그렇다면.”

에스티안은 옅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곧장 나를 안아 들며 일어났다.

아, 안 돼! 순간적으로 베이스캠프 내에 있는 영애들에게 내가 얼마나 대담하게 말을 날리고 왔는지가 떠올랐다.

사실은 나도 사냥하러 직접 가지 않는 그냥 영애 하나에 불과한데 뭐 그리 날이 서선 까칠하게 말하고 왔지……. 아, 에스티안 때문이었지.

하여간 이렇게 안긴 채로 갈 수는 없었다. 나는 양손을 허공에서 붕붕 저으며 발버둥 쳤다.

“에, 에스티안 경. 내려 주세요. 저 무거워요.”

“아무 느낌도 안 나니까 걱정하지 마.”

“그, 그럴 리가요. 그리고 저 정말 멀쩡해요.”

“조금 전에도 현기증 났던 거 아니까 가만히 있어. 자꾸 움직이면 더 힘들지도 모르니까.”

“에스티안 경은 어디 다친 곳 없으세요? 아픈 상태에서 막 그러면…….”

“아픈 건 아델린 그대지. 아까 전의 상황을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말하는 족족 에스티안에게 가로막혔고, 이미 에스티안은 나를 안은 채 몇 걸음을 옮긴 뒤였다.

아, 지치지도 않는 기사인 그는 이 기세로 곧장 베이스캠프 안에 들어갈 것이다.

영애들에게 쓸모 있게 굴라며 떵떵거린 뒤 자리를 박차고 나간 나는 기사단장의 품에 안긴 채 그녀들을 다시 마주하겠지. 참으로 쓸모 있는 모습이구나.

그리고 여전히 으르렁대고 있는 에스티안은 분명 가서 늑대의 기운을 또 무섭게 쏟아 내며…….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부끄러웠지만 나는 모든 걸 다 얘기해야 했다.

“그, 그런 게 아니라요. 저 여기 오기 전에 다른 영애들한테 한바탕 뭐라고 하고 나왔단 말이에요. 막 앉아만 있지 말라는 식으로. 게다가 옷까지 이 모양으로 입고 온 이유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고 거창하게 설명했고요.”

“…….”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나가서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안겨 돌아온다니 말도 안 돼요. 에스티안 경한테도 또 이상한 소문이 돌 수 있어요.”

에스티안은 작게 중얼거리는 내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틀린 말 하나 한 거 없는데 그런 게 대체 뭐가 중요해. 그리고 자꾸 잊어버리는 모양인데 아델린, 그대는 죽을 뻔했어. 내 소문 같은 것도 아무래도 상관없고.”

“아아,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내가 끊임없이 웅얼거리자 그는 낮게 웃고는 선심 쓴다는 듯 대답했다.

“베이스캠프 근처에서는 내려 주지. 하지만 지금은 절대 안 돼. 얼굴이 창백하다고.”

그의 단호한 말에 나도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람들 앞에서만 안 안겨 있으면 되긴 하니까.

그렇게 그에게 안긴 채로 나는 계속 이동하게 되었다.

사실 에스티안은 지금 사냥을 하고 있어야 할 텐데, 나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궁금할 법도 하고 그가 알아야 할 법도 하건만, 아까 화가 나서 물었을 때 말고는 지금까지 나에게 딱히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았다.

그 마음이 무언가 고맙고 미안해 마냥 조용히 있기가 민망했던 나는 혼자 떠들었다.

“제가 왜 여기 있었냐면요. 얘기하자면 좀 긴데 천천히 말해 볼게요. 다른 영애들 하는 얘기를 그냥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아니, 글쎄 어느 순간부터 에스티안 경에 대해 험담을 하더라고요.”

“…….”

에스티안은 별말이 없었다. 어떤 험담인지는 그도 잘 알 거라 생각해 자세히 말하지는 않은 채 나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어디서 근거도 없는 얘기를 들어와서 막 자기들끼리 얘기하길래 저도 모르게 화가 나서…… 막 뭐라고 했어요. 정신 차려 보니 다들 입 다물고 있고…… 민망해서 뛰쳐나온 거예요, 사실.”

“그런 거라면 더더욱 내려 주고 싶지 않은데.”

“으아, 진짜 안 돼요.”

내 말을 듣던 에스티안은 계속 웃었다. 이렇게 환하게 웃는 것을, 이렇게 가까이서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입매도 예쁘게 올라갔고 하얀 이도 살짝 보였다.

그저 낮게 웃는 건데도 이렇게 우아하게 웃을 수 있구나. 홀린 듯이 그가 웃는 모습을 보던 나는 마저 이야기를 이었다.

“휴. 하여간 그래서 거길 나왔는데, 어떤 기사가 에스티안 경이 저를 찾는다고 했다는 거예요. 여기 동쪽 숲 안쪽에서 찾는다고요. 에스티안 경은 나올 수가 없어서 평기사한테 전달했다면서.”

나는 리본 얘기와 숲에서 헤맨 얘기, 그러다 마물을 맞닥뜨린 얘기까지 차례로 했다. 얘길 들을수록 에스티안의 표정은 굳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그대를 죽이려 한 거였군. 마물도 일부러 소환한 거야. 동쪽 숲에는 마물이 없어. 어떤 미친 자가 사냥제 때 이런 일을 벌인 거지? 혹시 그 말을 전했다던 평기사의 얼굴을 기억하나?”

“아뇨, 그건 제가 직접 전달받은 건 아니라서요. 리아나가 전해 줬거든요. 아마 리아나는 얼굴을 기억할지도 몰라요.”

내 말에 에스티안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도착하자마자 찾아내야겠어.”

에스티안과 나는 그 후로도 계속 얘기를 나눴다.

저택으로 차 마시러 왔을 때와 크게 다를 것 없이 내가 이것저것 뭐 사냥은 잘했냐, 안 다쳐서 다행이다 등 얘기를 하면 그가 차분히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테이블에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안겨 있는 탓에 그와 얼굴을 한껏 가까이 한 채로 눈을 마주쳐 가며 얘기하는 것부터가 그랬다.

게다가 함께 대화하는 내내 그와 맞닿은 몸이 웅웅 울려서 온몸이 설렘으로 간질간질했다.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와 곧장 자라면 잠들 수 있는 상태였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자기에는 아까웠다고 하는 게 맞겠다.

혼자 정신없이 뛰어왔을 땐 얼마나 되는 거리인지도 몰랐고 그저 너무 오래 걸린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에스티안과 함께 오니 지나치게 금방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것 같았다.

그는 베이스캠프의 소란스러움이 가까워지기 전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큰 바위에 잠시 나를 걸터앉게 한 다음 마지막으로 내 상태를 살폈다.

여러 번 묻고 또 물어 내가 진짜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내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아까 전의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결국 다시 여기로 무사히 왔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어지러워 나는 잠시 휘청했다.

“역시 아직 안 되겠는데.”

“아, 아니에요. 긴장이 풀려서. 너무 안심돼서 그래요.”

“……정말 예측할 수가 없어, 그대는.”

에스티안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고는 내 어깨와 팔을 꽉 붙잡았다. 사실 공중에 안겨 있다가 자세만 바꿔 선 채로 안겨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맞닿은 품은 말할 것도 없이 따뜻했고, 그의 손에서 전해진 열기는 재킷도 뚫어 버리는 듯했다.

그렇게 베이스캠프로 들어서니 당연하게도 시선이 집중되었다.

내가 이상한 복장을 하고 왔다고 다들 쳐다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주목이었다. 황태자도, 모든 기사들도, 영애들도 이쪽을 쳐다봤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축제가 진행될 수 있을 만큼 사냥은 무사히 마친 것 같다는 거였다.

에스티안은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테이블 자리에 나를 잠시 앉힌 뒤 상황 보고를 위해 유리엘에게 갔다.

그 찰나에도 그는 안심하라는 듯 내 손을 꽉 잡았다가 놓고는 떠났고, 나는 절로 붉어지는 얼굴에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이제야 좀 두근대는 마음을 혼자 진정하나 싶었는데, 리아나가 곧 내 곁으로 왔다.

“아, 아델린. 무슨 일이야? 기, 기사단장님을 만나느라 이렇게 늦게 온 거야?”

“하아, 얘기하자면 길어. 네가 알려 준 덕에 에스티안 경을 만난 건 맞는데…….”

나는 내가 설레고 두근거리고 했다는 것만 빼고 벌어진 일 모두를 리아나에게 얘기했다. 리아나는 얘기를 들을수록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 그런. 그, 그래도 기사단장님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네…….”

“그렇지. 아마 그분 아니었으면 난 뭐 죽었겠지.”

이미 새까매진 셔츠의 먼지를 잠시 털고 있는데, 유리엘과 에스티안이 매우 빠른 보폭으로 나와 리아나가 있는 테이블까지 다가왔다.

저들 선에서 해결되는 줄 알고 그냥 기다리려고 했는데,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일단은 황태자가 총책임자인 셈이니 같이 와야 하는 건가.

아무런 표정이 없는 에스티안과 달리 유리엘은 또 뭔가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괜히 책잡히고 싶지는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황태자를 향한 예를 갖추려 했다. 그러나 유리엘은 손을 한번 들었다 내려놓으며 만류했다.

“몸도 좋지 않을 텐데 인사는 됐어. 많이 다쳤나?”

주절주절 붉은 사자를 찬양한다고 읊으려던 나는 그대로 멈춘 채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붉은 눈. 뿜어져 나오는 사자의 기운이 강렬하다 못해 흉흉했다. 나는 숨을 헉 들이켠 뒤 대답했다.

“아닙니다. 에스티안 경 덕분에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얘기는 전부 들었다. 그대를 유인한 평기사를 우선 찾아내면 실마리가 보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사냥제 분위기가 뒤숭숭해진 것 같아서 송구스럽습니다.”

“사냥제가 안전하게 진행되지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어. 그대가 사과할 필요 없다. 그리고 사냥제는 진작에 잘 마무리되었으니 신경 쓰지 마. 혹시라도 다친 곳이 있으면 곧바로 말하라. 황궁의를 불러 줄 테니.”

황궁의라니, 그거야말로 송구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를 안고 구른 건 에스티안이었기에 다쳤어도 그가 다쳤을 수 있는 거라 나는 슬쩍 여태 아무 말 없이 그냥 서 있던 에스티안을 쳐다보았다.

“…….”

눈길이 느껴져 예상은 했지만, 에스티안은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절로 미소가 지어질 뻔한 걸 꾹 참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는 눈을 느릿하게 꾹 감았다가 떴다.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에 정말 모든 일이 다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또 달아오를 것 같아 표정을 애써 관리하려는데, 에스티안이 리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리아나 영애. 내가 아델린 영애를 데려오라고 했다는 말을 전한 평기사를, 유일하게 영애가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네, 네. 마, 맞습니다, 기사단장님.”

리아나는 에스티안과 유리엘이 앞에 섰을 때부터 눈에 띄게 불안해하며 고개도 못 든 채였다. 유리엘은 좋아하는 사람이니 상관없을 테고, 아마 에스티안을 너무 무서워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조금 더 있다간 리아나가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아 나는 불안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평기사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네, 네. 그, 어, 어떤 모습이었냐면…….”

평소 행동이 조심스럽고 조곤조곤 말하긴 하나, 말을 더듬거나 주변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는 리아나였기에 나는 그녀의 상태가 걱정될 정도였다.

아니, 막말로 죽을 뻔했던 나도 이렇게 극기로 버티고 앉아 있는데 왜 그러나 싶기도 하면서, 얼마나 에스티안이 무서우면 이럴까 싶기도 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쉴 새 없이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걸 보자 내 손이 먼저 나갔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작게 ‘괜찮아.’라고 속삭였다.

“고, 고마워.”

다행히 리아나는 안정을 조금 찾았는지 살짝 웃고는 평기사의 인상착의를 말하기 시작했다.

키가 약간 작았고, 눈은 짙은 올리브색에 수염이 나 있었으며 나이는 10대 후반으로 보였다고 했다.

물론 그녀는 고개를 여전히 숙인 채였지만 아까만큼 불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말하는 것을 어느새 다가온 황태자의 직속 부하인 것 같은 사람이 바쁘게 받아 적었고, 부기사단장이 에스티안과 말을 나누며 단원 중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 확인했다.

조금 있자 유리엘도 나와 리아나의 어깨를 몇 번 친 다음 자리를 떠났다.

“네가 도움을 준 덕에 황태자 전하도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 그렇지?”

“아, 으응. 그, 그런 거면 좋겠다.”

“리아나는 에스티안 경을 정말 많이 무서워하는구나.”

“헉! 그, 티, 티가 많이 나?”

“그렇게 말도 더듬으면서 티가 나냐니. 근데 괜찮아,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 무서운 분이 아니시니까. 나는 심지어 이미 도움도 많이 받았고.”

“……너무 냉정해 보여. 무슨 일이든 할 것처럼.”

“무슨 일이든……? 기사단장이라 그런 건가? 그래도 정말 그렇게 무서운 분은 아니니까.”

내가 아무리 리아나를 달래도 그녀는 잔뜩 굳어 몸을 떨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와 팔을 쓸어 준 뒤 그녀가 마차를 타고 저택까지 잘 가도록 배웅했다.

아, 이제 내가 가는 일만 남았구나. 아침과 오전만 해도 너무 하루가 길고 시간이 안 간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이미 해가 져 가는 상황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미 마물을 마주치고 한 것도 아주 옛날 일이 된 것 같았다.

어느새 대부분이 다 떠나고 한가해진 상황이라 나도 슬슬 가야겠다는 생각에 기지개를 쭉 켜는데, 그 순간 사냥터 내부 상황을 정리하던 에스티안 경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와서 그의 향기가 나는 순간, 까마득하기만 했던 아까의 기억이 다시 생생해졌다. 그래, 저 사람 덕분이구나, 전부 다.

“에스티안 경.”

“리아나 영애는 갔나? 다친 건 그대인데 거의 자기가 사고를 당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더군. 그대는 자기 몸도 돌보지 않고 그런 영애를 챙기고 있고.”

냉정하기 짝이 없게 흘러나온 에스티안의 말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얼굴로 이렇게 얘기하니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겠지.

“아…… 저 안 다쳤다니까요. 리아나가 에스티안 경을 되게 무서워해요. 그래서 많이 놀랐나 봐요. 아깐 막 늑대 기운도 엄청 쏟아 내셔서.”

내가 손으로 귀 모양을 흉내 내며 머리 양옆에 갖다 대고 으르렁거리는 표정을 짓자 그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사실은 이렇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인데.

“나를 안 무서워하는 건 그대뿐이야.”

“무서워할 일이 뭐가 있나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에스티안 경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전부 뒤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뿐이에요. 아, 리아나가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고요.”

그는 말없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 안에서 어쩐지 나는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나도 그저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등 뒤로 붉게 노을이 타고 있었고, 어렴풋한 그 빛에 푸른 눈은 따뜻하게도 빛났다. 바람은 약하게 불어 그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 그림 같은 장면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나는 민망해져 얼른 말을 꺼냈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에스티안 경이 아니었으면 전 정말 죽었을 거예요.”

“아델린.”

내 말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그런 반응을 보니 문득, 아까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모든 게 에스티안이었음이 생각났다.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기는 너무 부끄럽지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 마물이 덮쳤을 때 정말 주마등처럼 모든 일이 막 생각나더라고요. 그런데 그 기억들 중에 에스티안 경에 대한 게 은근히 많아서…….”

“…….”

“죽으면 그런 기억도 다 없어지겠구나, 싶어서 좀 그랬거든요. 뭐, 죽었으면 아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도 몰랐겠죠? 하핫. 어…….”

슬슬 아무 얘기나 나오던 그 순간, 에스티안이 나를 확 끌어안았다. 다짜고짜 잡아 안은 것치곤 너무 부드러운 손길과 따뜻한 품이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도, 어쩐지 그가 떨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가만가만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대가 죽는다는 얘기를 그렇게 쉽게 입에 담지 마.”

“아…….”

“제발.”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전기 자극이라도 받은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찌릿했다. 괜히 목구멍이 간지럽고 따끔거리는 것도 같았다.

내가 안도한 것보다 더 안도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온 마음과 온몸으로.

그걸 계속 느끼고 싶어 나도 그를 놓지 않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소란스러웠던 사냥제는 그렇게 끝이 났다. 에스티안은 아프면 잘 먹어야 한다며 축제 때 쓰일 사냥감을 제외한 것들 중 그 자리에서 손질된 질 좋은 고기 몇 덩이까지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원래 직접 사냥한 기사들만 손질된 고기와 가죽을 가져갈 수 있는데……. 이 고기, 아까워서 먹을 수나 있을까. 먹지 않아도 이미 배부른 채로 나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

저택에 왔을 땐 이미 사냥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부모님과 안나 등의 귀에 다 들어간 상태였다. 모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맞이하며 꽉 끌어안아 주었다. 여기서 나는 정말 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구나.

“무사해서,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델. 다친 데는 없니? 응?”

“아직도 안색이 안 좋은 거 아니냐? 진정할 수 있게 뜨거운 차라도 마셔야 하나?”

“걱정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저 완전히 멀쩡해요. 아시다시피 에스티안 경이 금방 오셔서 도와주셨거든요.”

“어쩜, 참으로 감사한 은인이네요.”

“정말 천만다행이구나.”

“언제 블라머프 공작가에 답례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러게 말이오. 델, 원래도 기사단장과 좋은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더냐.”

“아, 아. 네, 그……그렇죠.”

부모님은 에스티안이 저택에 자주 드나들고, 나와 여러 번 만나게 된 후부터는 그의 소문 등에 대해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그를 그저 정말 한 명의 좋은 친구로 여겨 줬는데, 이상한 얘기에 흔들리거나 휩쓸리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고 대해 주는 게 너무나 감사했다.

“지금은 잘 몰라도, 분명 씻고 누우면 꽤 피로가 몰려올 게야. 푹 쉬려무나. 미리 약을 먹고 자는 것도 좋겠구나.”

“그래. 혹시라도 몸이 아픈 곳이 있으면 바로 말하렴. 치료사를 곧장 부를 테니.”

따뜻한 부모님의 환대를 받고 그들에게 한 번씩 안긴 뒤 방으로 갔을 때는 안나의 투덜거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조차 너무 좋구나. 정말로 죽었으면 이런 걸 또 못 듣는 거였잖아.

“아가씨는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콩 같으세요.”

“콩…….”

“드레스 안 입고 가신다고 할 때도 그랬지만. 어휴, 사냥제에서 사고가 났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하하…… 죄송해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라서.”

“아가씨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누가 고의로 아가씨한테 몹쓸 짓을 저지른 것 같던데요. 다친 데 없으시고 안전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가씨.”

“네, 저도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황실기사단장님이 구해 주셨다고 들었는데, 맞으세요?”

“소문 진짜 빠르네요. 네, 맞아요.”

“요정 동화 속 기사님 같은 모습이셨겠어요.”

“네…… 정말 멋있으셨…… 아. 어…….”

홀린 듯 대답하던 나는 놀라서 손으로 입을 가리곤 안나의 눈치를 봤다. 안나는 사실 그동안 에스티안의 여자관계를 넌지시 암시하는 것처럼 얘기하며 그를 썩 마땅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안나 앞에서는 에스티안을 이 정도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티 내지 않고 있었는데. 하지만 안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아가씨 곁에서 몇 년을 있었는데요, 제가. 아가씨께서 마음이 깊어지신 것도 진작에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분도 아가씨께 자주 오시고, 자주 도와주시고 하는 걸 보면 뭐 나쁘지 않고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안나는 작게 힘내세요, 하고는 목욕물을 준비해 주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다른 시녀들의 손에 온몸을 맡긴 채 마사지를 받으며 나른하게 있으니 피로가 한순간에 몰려왔다.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사냥제에서 너무 진을 뺐던 게 분명 맞는지, 내가 일어난 건 다음 날 오후였다. 내가 힘들어하는 걸 알았기에 안나나 다른 시녀들도 나를 아침에 깨우지 않았다. 한낮의 햇빛을 받으며 겨우 일어나 씻고 정신을 차려 정원으로 나가 앉으니 곧 쥴이 옆에 섰다. 

“저는 마물 퇴치 준비 때문에 황궁에 잡혀 있느라 사냥제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아가씨께서는 참가하셨던 모양이지요.”

“하하…….”

이미 모든 걸 다 듣고 온 얼굴로 눈썹을 슬쩍 올리며 쥴이 말했기에 나는 시선을 피하며 그저 웃었다. 뭐라고 놀리거나 한 소리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다치지 않으셔서 천만다행입니다.”

“그렇죠. 다들 너무 걱정해 주셔서 죄송할 지경이에요. 저 진짜 멀쩡하거든요.”

“아가씨께서 조금이라도 다쳤다면 저는 죄책감에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모릅니다.”

죄책감? 너무 뜻밖의 단어를 들어 나는 이해가 안 갔다.

가뜩이나 주위에서 온통 괜찮냐고 물어오는 게 부담스럽고 미안할 지경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숲길에 어느 정도 들어섰을 때 이상하다 싶었으면 재빨리 돌아왔어야 하는 게 맞을 텐데. 나 혼자 에스티안에게 눈이 멀어 날뛰다 사고가 난 건데 대체 무슨 죄책감이란 말인가.

“말도 안 돼요, 죄책감이라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당장 버려요. 무슨 죄책감이에요, 쥴 경이.”

“아가씨께서는 그때 언덕에서 사고가 났을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정신을 잃어 가는 도중에.”

이건 내가 들어오기 전 아델린의 기억으로 대충 알고 있었다.

그 큰 나무가 있는 언덕에서 아델린이 이미 구르고 난 뒤 달려온 쥴은 정말 시체라도 보는 것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마 당시 아델린도 정신이 오락가락했기 때문인지 정확하게는 나도 알 수가 없지만, 그때 혼자 언덕 쪽을 갔다가 그렇게 굴렀던 것 같았기에 누구라도 아델린을 금방 구해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쥴은 호위 기사로서 아델린의 옆에 계속 있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아델린을 안아 들 뿐이었고, 아델린은 정신이 깨어 있는 동안은 계속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라는 말을 반복했더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아델린이 되고 나서 호위 기사인 쥴과 마치 뒤늦게 친해진 듯한 느낌이 든 것도 쥴의 죄책감이 너무 커서 나에게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는 이전과 같아졌지만.

그리고 그가 그 얘기를 꺼낸 이상, 나는 내 생각을 분명하게 말해야 했다. 그리고 진짜 아델린도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쥴 경에게 아무 잘못이 없고, 따라서 그 어떤 죄책감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건 똑같아요. 혼자 떨어져 나온 건 저였고, 쥴 경이 자리를 비운 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요.”

“…….”

“그렇다고 제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다 잘됐는데 대체 왜 죄책감을 갖는 거예요?”

“아가씨.”

“한번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예시가 좀 맞지는 않을 수 있겠지만, 가령 쥴 경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데 제가 막 ‘나를 호위하느라 쥴 경이 자기 자신의 몸을 못 지켰다’며 다 제 잘못이라고 엉엉 울면 어떻겠어요?”

“하…… 그건 다르지 않습니까.”

“다른가요? 전 모르겠어요. 어쨌든, 쥴 경은 그런 마음 가질 이유 전혀 없어요.”

내 말에 쥴은 한숨을 크게 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혹시라도 그가 또 죄책감이 어쩌고 운운할까 봐 나는 그에게서 계속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웃지도 않고 계속 그렇게 시선을 보내자 곧 쥴이 졌다는 듯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올렸다.

“아가씨는 원래 그런 분이시지요. 어쨌든, 다치신 곳이 없어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황실기사단장님이 구해 주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아니, 왜 잘 마무리됐나 싶었는데 얘기가 거기로 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사단장님은 다른 기사들과 함께 사냥하다가, 갑자기 숲에서 아가씨의 느낌이 난다며 미친 듯이 뛰어갔다고 하더군요. 역시 단장님의 기감이란 엄청나지요.”

어제는 상황이 혼란스러워 에스티안이 내가 있는 곳으로 어떻게 온 건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도 딱히 그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고.

그러나 쥴에게서 직접 들으니 약간은 심란해졌다.

에스티안의 이름까지 이용해서 진짜로 나를 죽이려고 한 거였나?

대체 왜. 사교계 활동도 안 하고 저택에서 얌전히 차나 마시는 나를 왜.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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