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5/18)

5장

가장 큰 걱정은 사실 이거였다.

그는 사실 꽤 진중하고 묵묵한 성격인 것 같으니 분명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리아나가 자길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 그녀에게 직접 접근할 수는 없으니 그 친구인 나를 통하려고 했는데 내가 눈치 없이 이러고 있는 거라든가.

나와 먼저 좀 가까워진 다음 리아나에게 본격적으로 다가가려고 하는 거라든가…….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서글퍼졌다. 그리고 또 잠시 잦아들었던 은둔하는 본능이 스멀스멀 나오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늘 그래 왔듯이 누군가를 마음에 담게 되어도 앞으로 나서지 말고 뒤에서 지켜보는 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었나.

괜히 또 혼자 신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리아나의 그 방문 이후 에스티안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기에, 그의 마음을 더 확인해 볼 길도 없었다. 혼자 신나고 설렜다가 나는 잠시 그렇게 잦아들었다.

*

“가면으로 어차피 가릴 건데 이렇게 화장을 심하게 해야 해요?”

며칠간 방 안에서 뒹굴고 정원에서만 지내던 나는 매사에 더 심드렁해진 상태였다.

애초에 가면무도회도 가면을 썼을 황태자를 어떻게든 찾아내 리아나 옆에 붙여 주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가는 거라 더 그랬다.

처음에는 그렇게 유명한 귀족이 여는 가면무도회니까 혹시 에스티안도 무도회에 오는 게 아닐까, 그는 무슨 가면을 쓸까 내심 생각도 했지만, 그라면 그런 데 안 올 것 같았다. 게다가 그런 마음 자체도 싸하게 식어 버린 상태였다.

“아가씨, 가면무도회에서 항상 가면만 쓰고 계시는 게 아니잖아요. 테라스로 나가서 가면을 딱 벗었을 때, 그때 역사가 시작된다고요.”

“역사요…….”

“그리고 가면은 코까지만 가리는 데다, 눈 구멍도 뚫려 있잖아요. 눈 화장과 입술 화장이 그래서 얼마나 중요한데요.”

안나는 쉴 새 없이 내 눈가에 무언가 발라 주며 얘기했다.

확실히 가면을 계속 쓰고 있으면 얼굴에 땀이 날 수도 있으니 크림이나 분 같은 건 적게 바르고 눈가에만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입술에도 몇 번이나 물을 들여서, 분홍빛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웬만해서는 지워지지 않도록 해 주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대충 어떤가 보려고 가면을 들어 얼굴에 대고 거울을 보았다.

오, 정말로 예뻤다. 가발도 꽤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가면 속에서도 얼굴이 결코 묻히지 않았다.

“와…… 예쁘네요. 진짜 이렇게 가려도 보일 데는 다 보이네요. 안나가 눈 화장을 잘해 줘서 눈가에 음영도 안 졌어요. 안나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아가씨가 원체 아름다운 덕이지요. 힘드시지만 않으시면 재미있게 잘 즐기고 오세요. 백작님과 백작 부인께서도 아가씨가 모처럼 또 사교계 생활을 하게 된 것을 반갑게 여기고 계세요.”

부모님도 알게 모르게 집에만 처박혀 있는 나를 걱정하고 계셨구나.

안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나를 배웅했다.

나는 이미 실크를 덧대 가문의 문장을 가려 놓은, 순전히 가면무도회를 위해 준비된 마차를 타고 나네트 후작저로 향했다.

가는 동안 해가 져서 어느새 깜깜해졌고, 도착했을 때는 문양을 가린 수많은 마차들로 이미 저택 앞이 가득했다.

리아나와 나는 저택 앞에서 만나 홀 안으로 같이 들어가기로 한 상태였고, 나는 리아나의 복장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들어가자. 네가 원하는 대로 황태자 전하도 오셨으면 좋겠네.”

리아나의 어깨를 잡고 말을 건네는데, 가면 속으로도 리아나가 나를 슥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왜 또 이래…… 무슨 말을 하려고.

“아델린, 정말 예쁘다.”

“너만 할까. 아까부터 저기 있는 남자들이 너 쳐다봐.”

“아냐, 델. 너니까 그렇게 봐 주는 거지. 델, 드레스와 가면은 어디서 맞춘 거야? 뭐라고 얘기하면 그렇게 예쁘게 만들어 주는 거야? 나한테 편지로 적어 줬던 것보다 훨씬 더 예쁜 것 같아.”

가면으로 가려진 건 눈뿐이라, 리아나가 뾰로통해서 얘기하는 입술이 다 보여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심지어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그 눈매도 보일 지경이었다.

리아나는 생각보다 질투도 좀 있고 자기감정에 솔직하구나. 그래, 차라리 이렇게 말해 주니 낫다.

“그때 너랑 갔던 살롱에서 맞춘 거야. 나는 귀찮아서 딱히 주문도 안 했고, 그냥 살롱 측에서 알아서 잘 해 준 거야. 그리고 정말로 여기서 네가 제일 예쁘니까 제발 걱정하지 마.”

“……드레스 맞출 때도 몇 번만 나랑 같이 가 주면 안 돼?”

알았아, 이것아. 한두 번만 같이 가고 말아야지. 나는 가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와 후작저 안 홀로 들어섰다.

확실히 전의 황실 무도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많이 자유로웠고, 미묘하게 좀 더 서로들 구애의 몸짓이 강렬한 느낌이었다. 동성끼리 모여 얘기하던 일반 무도회들과는 달리 대부분이 이성끼리 모여 이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와…… 멋지다.”

“그러게. 근데 여기서 황태자 전하를 어떻게 찾지? 혹시 주위에서 그냥 올 것 같다는 소문 말고 들은 거 있어? 뭐, 옷차림이나 가면이나.”

“음…… 나는 사실 그분의 붉은 눈만 보면 바로 알아챌 수 있다고 생각했는걸. 가면에는 눈 구멍이 뚫려 있으니까.”

“……그러려면 여기 와 있는 모든 남자들과 춤 한 번씩 다 춰야 하는 거 아니니?”

“어…… 음…….”

리아나는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하곤 고개를 휘휘 돌리며 그저 주위를 봤다.

바보 같지만 순수하고 귀여운 거라고 해야 하나. 특징이라도 알면 그래도 좀 찾는 데 수월할 텐데, 지금은 사람도 많은 데다 저런 붕 뜬 정보는 너무나 약해서 황태자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황태자만 찾고 잽싸게 나갈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벌써 지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열심히 리아나와 함께 다니며 조금이라도 황태자스러워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쪽으로 지나가며 그녀가 판단하게 했다.

내가 여기 와서 직접 황태자를 본 적은 없었지만, 아델린의 기억을 완전히 가지고 있었기에 떠올리고 비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 사람, 약간 키가 커서 그런지 황태자 같지 않아?”

“아, 조금 작은 것 같은데…….”

“저 사람, 가발 아래로 약간 보이는 머리가 금발 같은데. 체구도 비슷하고.”

“비슷하긴 한데 아닌 것 같아.”

“저 사람, 옷이 좀 비싸 보이는 것 같아. 저런 건 황태자 전하쯤 돼야 입지 않나?”

“확실히 비싼 옷이긴 하지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지목하는 족족 다른 사람이었다.

다행히 그들 모두와 춤을 춰야 했던 건 아니지만,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도 억지로 얘기를 해야 했기에 나도 리아나도 초반부터 살짝 지쳐 버렸다.

“미안. 생각보다 찾기가 어렵네.”

“아냐, 나도 계속 엉뚱한 사람만 짚고 있는걸. 그리고 나는 아델린이 아니었으면 여기 오지도 못했을 거야.”

테라스 쪽까지 가지 않아도 가벼운 음료를 마시며 쉴 수 있는 테이블과 소파가 마련되어 있었기에 우리는 거기에 잠시 앉아 쉬기로 했다.

리아나가 계속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 걸로 보아 당분간 여기서 나가기는 그른 것 같았기에 조금이라도 체력을 비축하고자 하는 거였다.

생각 같아선 답답한 가면도 다 벗고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까지 오고 나니 오기가 생겼다.

“최대한 근사하고 멋져 보이는 사람들 위주로 찾아봤는데, 알고 보니 황태자 전하가 되게 이상한 복장 하고 있고 가면도 별로고 그런 거면 좀 웃기겠다.”

“에이, 분명 멋지실 거야.”

“왜, 그럴 수도 있잖아. 그래 봬도 황태자인데 막 신분을 드러낼 수는 없으니 일부러 막 제복이 아니라 펑퍼짐한 바지에 재킷도 안 갖춰 입고, 부츠도 안 신고 맨발로 올 수도 있는 거고…….”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정말로 멋지게 하고 오실 거야.”

“그래그래, 리아나 네 말이 다 맞아.”

“그렇지, 델?”

완전히 틀린 소리를 들었다는 듯 파르르 반응하는 리아나가 귀여워 나는 그쯤 하고는 대화 주제를 바꿨다.

“황태자 전하가 오긴 오는 거래? 우리 이렇게 찾아다녔는데 안 온 거면 너무 억울하잖아.”

“응, 분명 온다고 들었어. 지금은 아직 파티 초반이나 다름없으니까, 좀 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전하께서도 오시는 게 아닐까?”

주인공은 나중에 등장한다 이건가. 그런데 가면을 다 쓰고 있는데 주인공인지 아닌지 알 게 뭐냐고. 그 정도로 황태자는 역시 티가 나려나?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곤 소파에 몸을 기댔다. 쟁반 위에 유리잔을 여러 개 올린 시녀가 지나가자, 리아나는 그녀를 불러 와인 두 잔을 받았다.

“이건 가벼운 디저트용 와인이라 달콤하고 도수도 낮대. 같이 마시자.”

“아, 그래.”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던 안나의 말이 언뜻 생각났지만, 이 정도 와인은 괜찮지 않을까?

모처럼 리아나와의 사이가 다시 좋아졌는데 그녀가 권한 것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함께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한 모금 마셔 보니 확실히 달달한 게 기분도 좋아질 법한 맛이었다.

홀짝홀짝 잔을 비우며 리아나와 좀 더 황태자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대부분 그녀가 황태자 찬양을 하면 나는 ‘네 거 해라’ 하고 말하는 식이었다.

“델, 은근히 짓궂다니까. 이제 또 사람들 몰려오는데, 혹시 좀 더 둘러봐도 될까?”

“아, 지금?”

웃고 떠들다 보니 술을 마신 게 슬슬 올라왔는지, 사실 나는 좀 더 쉬고 싶은 상태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냥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은 상태……. 하지만 반짝거리는 리아나의 눈을 보자 집에 가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또 일어나야 하나.

“호, 혹시 힘든 거면 나 혼자 다녀와도 되고. 너를 계속 괴롭힐 수는 없지. 나도 해 봐야 할 테니까.”

“어, 그럴래?”

애써 안 일으켜지는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 찰나 들려온 너무나 반가운 그녀의 말에 나는 곧장 대답했다.

내가 미적거리는 게 티가 났던 건가? 뭐, 어때. 덕분에 나는 쉴 수 있는데.

“근데 그래도 되겠어? 갑자기 그렇게 혼자 있다가 너 사람들한테 또 너무 치이면…….”

“그, 그때는 내가 바로 너 있는 여기로 올게. 델, 여기 계속 있을 거지?”

“응, 그래. 여기 있을게.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일단 홀 내에 상주하는 기사분들도 계실 테니 그분들께 도움 청하고. 힘들면 이쪽으로 바로 오고.”

예의상 건넨 말에 리아나는 생각보다 순순히 수긍하며 자리를 떠났다.

나름대로 홀로서기 연습을 하는 걸까. 기특하고 귀엽구나. 덕분에 나는 혼자서 편하게 쉴 수 있게 되었다.

아예 리아나보고 테라스로 오라고 할 걸 그랬나. 테라스가 혼자 있기엔 더 좋긴 할 텐데.

하지만 더 이상 움직이고 싶은 마음도, 기운도 없던 나는 팔다리를 한번 쭉 편 다음 소파에 깊게 기댔다.

한 30분 정도가 지났나? 아직도 리아나는 안 온 상태였다. 사실 내심 10분 정도 살펴본 다음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녀는 꽤 오래 버티고 있었다. 장하네……!

그런데 나는 잠이 슬쩍 올 것 같았다. 눈을 잠깐 붙여도 되려나. 어차피 가면 썼으니 좀 자도…….

“레이디의 옆자리에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네, 네? 아, 어…… 네. 그러셔도 됩니다.”

짜증 나게! 자려던 찰나 웬 남자가 소파 옆에 앉았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너무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무의식의 친절이 불쑥 튀어 나가 버렸다.

게다가 대충 보니 자리가 빈 다른 소파는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자기는 글렀네.

아예 내가 테라스로 나가야 하나? 일어나는 김에 리아나를 찾아서 테라스로 나오라고 말도 전하고.

“저, 저는 그럼 이만…….”

“레이디, 이렇게 함께 있게 된 것도 인연인데 잠시 시간을 내주시지요.”

“헛…….”

엉거주춤 일어나려고 폼 잡던 내 손을 그 남자가 잡았다. 세게 잡았다면 당연히 주변의 기사를 불렀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딘가 기운이 세다고 해야 할까? 천천히 그를 살펴보니 복장에서부터 너무 위압감이 들긴 했다.

온통 흰색인 제복은 처음이었다. 그는 금장이 가득하고 붉은 장식으로 수놓인 흰 제복 차림을 하고 새하얀 깃털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제복의 금장도 진짜 금 같고, 자수에 쓰인 실도 흔히 보기는 어려운 것 같았다. 며칠 수를 놓아 본 터라 용케 실만 보고도 그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가면은 또 어떤가. 여성용 가면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화려하게 하얬다.

실제 짐승 중 저렇게 하얀 털을 가진 게 있나? 그런 게 아니라면 그 또한 염료로 염색을 한 것일 텐데, 당연히 고급 염료를 사용했으니 저렇게 눈처럼 반짝이는 거겠지.

특이한 건 가면이 광대뼈 아래까지 내려와 그의 얼굴 중 드러난 곳은 입술과 턱뿐이라는 거였다. 입술은 적당히 생기 있는 붉은빛이었고, 턱도 날렵하면서 남성미가 넘쳤다.

그의 머리도 가면처럼 온통 흰색이었다. 당연히 가발이지 않을까 했지만, 워낙 부드럽고 결이 좋아 보여 진짜 관리를 잘한 머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차림새부터 나를 붙잡는 행동까지 거부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기운이라 나는 다시 앉아야 했다. 이게 뭐야…….

“친구와 오셨습니까?”

“네.”

“친구분은 잠시 떠나신 것입니까?”

“네.”

“레이디께서는 친구분을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네.”

“혹시 저와 대화하는 게 재미가 없으신 겁니까?”

“네. 네? 네? 아니요, 아니요. 제가 와인을 마셔서 좀 피곤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죄송해요. 방금 한 말은 잘못 나간 말이에요.”

저런 질문인 줄 몰랐지! 큰 의미 없는 말을 계속 걸길래 이어진 물음도 별거 아닌 줄 알고 기계적으로 대답한 거였다.

이미 진실을 말한 거나 마찬가지인 분위기라 그 남자가 불쾌해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소파에 기대고는 낮게 웃었다.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입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그럼, 제가 재미있는 얘기라도 좀 해야겠군요.”

“하하…….”

나는 사람 좋은 척,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척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가면을 썼어도 남자는 남자였다. 그리고 여기는 남녀 잘 어울려 노는 무도회장이고.

남자가 떠나지 않고 내 옆에서 계속 얘기할 기미를 보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어색함에 살짝 몸이 굳은 채로 웃었다.

난감하네, 정말. 정신적 에너지를 더 쏟는 기분이다. 그냥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하자. 

“제 옷차림은 어떻습니까?”

“네?”

뭐 질문이 저래? 저게 뭐가 재미있다는 거야? 억지로 지었던 미소가 어이없음에 지워지려는 순간, 그는 경악할 만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혹시 되게 이상한 복장이거나, 쓰고 있는 가면이 별로이진 않습니까?”

“……네?”

“보시다시피 눈에 좀 띄는 제복 차림이지만, 펑퍼짐한 바지를 입지는 않았고. 재킷도 잘 갖춰 입었고, 부츠도 잘 신었는데.”

“……아.”

“그래도 친구분께 저를 주실 겁니까?”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 사람? 아까 리아나랑 내가 한 말을 다 엿듣고 있었던 건가?

분명 주변에 이런 사람 없었는데? 이렇게 튀는 복장에 튀는 기운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못 알아봤을 리가 없는데.

내가 아까 뭐라고 했더라? 심하게 욕했던 건 아니겠지?

아니, 그보다 저 말은, 진짜로 자기가 황태자라는 거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레이디께서 재미있어하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고 사회생활에 충실했던 때를 떠올리며 옅게 미소를 짓고는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그는 별로 당황하거나 흔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최대한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 그저 불안하게 손만 만지작대며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사람이 진짜 황태자라는 확신이 없잖아?

그냥 우리 뒤에서 얘기만 엿듣고 있던 생판 남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어 언짢은 마음이 확 치밀어, 절로 고개가 팍 올라갔다.

“……하하.”

그러나 고개를 들자마자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바람이 새어 나가는 듯하게 헛웃음을 짓다가 아래서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분노 같은 건 1초 만에 사라진 상태였다.

가면 속으로 분명히 봤다. 붉은색 눈.

황태자 유리엘이 맞았다. 아델린이 기억하고 있는 붉은 눈과 똑같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분명 저런 붉은 눈은 흔한 게 아니었다.

리아나가 오버하는 게 아니었다. 진짜 눈만 보고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구나.

열매 같은 붉은빛인데도 전혀 달콤함은 찾을 수 없는, 뜨겁고 강렬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 눈을 확인하자마자 처음 봤을 때부터 그가 내뿜던 기이한 느낌도 이해가 되었다.

말로만 듣던 그놈의 붉은 사자. 그래, 저건 분명 사자의 기운이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지만 주변을 짓누르는 느낌이 들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장 잡혀 갈기갈기 찢길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그런 기운. 상황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제가 미처…….”

“음악이 바뀌었습니다. 춤을 출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네에?”

“부탁합니다.”

가면 아래 보이는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린 채였다.

내 반응으로 분명 그는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뭐라고 하지 않지? 아델린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서 그런가?

그는 손을 살짝 잡고는 멍하게 입만 벌리고 앉아 있던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소파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이 나와 하나둘 춤을 추고 있는 중앙으로 나갔다.

당연히 나는 기세에 눌려 그걸 거부할 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그 안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을 끌었다. 근사한 외관은 물론, 춤 솜씨도 남달랐기 때문이다. 남성스럽고 힘 있게 춤추면서도 여성을 리드할 때는 매우 섬세하고 여린 느낌을 주었다.

뭐, 황태자니까 이렇게 춤출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을 테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가 춤추는 상대인 나도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대는지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게 결코 달가운 얘기만 있는 건 아닐 거라고 직감했다.

쳐다보는 시선들에는 분명 질투가 어려 있었다. 눈과 코는 가면에, 입은 부채에 가려져 있었지만 사회생활로 쌓인 나의 내공은 그들의 미묘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숨이 막혀 오는구나. 리아나 얘는 대체 어딜 간 거야. 네가 찾던 놈 여기 있는데!

나는 황태자와 춤을 추며 은근슬쩍 시선을 뒤로하거나 옆으로 돌려 리아나를 계속 찾아 댔다.

튀는 복장이라서 금방 보일 텐데……. 아! 찾았다!

그런데 리아나가 어딘가…… 이상했다. 아니, 그냥 단순히 이상하다기보다 심상치 않다고 하는 게 맞겠지.

먼 거리에서 리아나를 발견한 데다 가면에 가려진 음영 때문에 그녀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부채로 채 가릴 생각도 못 한 것인지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건 확실하게 보였다.

주먹도 입술만큼이나 힘이 들어간 채로 꽉 쥐고 있었다. 그쯤 되니 안 보이는 눈빛도 보이는 듯싶었다.

아, 이거 어딘가 또 망하고 어긋난 느낌인데……. 일단 이 곡이 끝나면 곧장 리아나에게…….

“집중 좀 해.”

“헙. 송구합니다.”

바로 하대라니. 역시 내가 누군지 아는 거구나.

웃음기 어린 말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기백이 강렬한 상태였기에, 듣는 나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뭐라 말하면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게 전부였고, 머릿속은 그를 리아나에게 대령해야 한다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크게 다쳤다가 겨우 나았다는 얘기는 들었다. 이젠 완전히 괜찮은 건가?”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온 친구는 당연히 리아나 영애겠지.”

“네, 맞습니다. 다음 춤은 리아나와 추시는 게 어떠실까요, 전하.”

“아직 곡이 끝나려면 5분은 더 남았는데 왜 벌써 그런 얘기를 하는 거지?”

기가 빨려서 그런다, 왜!

그 말을 할 수 없는 나는 또 시선을 아래로 하고는 딴청을 피웠다. 가면 속으로도 느껴지는, 신기한 것을 보는 듯 나를 계속 쳐다보는 황태자의 시선과 더불어 언뜻언뜻 불같이 느껴지는 리아나의 시선까지 아주 온몸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항상 그대는 리아나 영애와 나를 함께 있게 만들고는 슬쩍 빠졌지.”

그야 리아나를 너랑 붙여 놓고 싶으니까! 그리고 나의, 그러니까 아델린의 살신성인으로 둘이 어느 정도 친해진 거 아니었어?

역시 마음속에서만 우렁차게 외칠 뿐 내 입은 열리지 못했다.

더 무서운 건 황태자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 상태로 우리는 계속 춤을 추었다.

곡이 길기도 하지. 몇만 시간쯤 지난 것 같다고 생각하자 마지막 동작이 거침없이 이뤄졌다.

그는 부드럽게 춤을 이어 가던 반동을 이용해 내 허리를 휙 팔로 감은 뒤 가까이 밀착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다음도.”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먹잇감을 향해 몸을 숙이고 있는 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으르렁대는 듯해 소름이 돋았다.

너무 가까워 고개를 들면 바로 그 붉은 눈을 마주할까 봐 벌벌 떠는데, 황태자가 팔을 쭉 뻗어 그와 나 사이에도 잠시 간격이 생겼다. 음악도 점점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야 숨 좀 쉬려나 싶은 찰나 곧바로 클라이맥스 부분이 찾아왔고, 그는 다시 팔에 힘을 줘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대와 추고 싶은데.”

안 돼! 그럼 리아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나는 놀라서 황태자를 쳐다보다가 그의 어깨 뒤로 작게 보이는 리아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한 자리에 선 채,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곡은 끝났다. 마주 보고 서로 손만 잡은 채로 춤도 멎었기에 그녀 쪽으로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했지만, 사자 같은 황태자의 기운을 이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아예 뿌리쳐 버려? 아니면 그냥 리아나를 보고 소리를 질러? 차라리 잠자코 두 번째 곡까지 춤을 추고 리아나에게 데려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나은가?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된 내가 속으로 그렇게 머리를 굴리던 바로 그때였다.

“이 아름다운 레이디와 춤출 기회를 제게도 주시지요.”

누군가 날 끌어당기고 있는 황태자의 손을 붙잡았다. 순간적으로 황태자가 흠칫 놀란 게 느껴졌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고, 나는 그 틈을 타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긴장과 안도의 한숨이 크게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고 고개를 돌렸다.

별다른 장식 없이, 아주 매끈하고 새까만 가죽으로 만든 가면으로 눈과 콧등까지만 가리고 있는 남자.

무도회용 제복 또한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남색이었고, 단추와 약간의 장식조차 쓸데없이 번쩍거리지 않는 은으로 되어 있었다.

눌린 자국 없이 그저 결 좋은 검은 머리인 걸 보면 아무리 봐도 가발이든 모자든 뭘 쓰지 않은 것 같고.

바라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는 에스티안이었다.

드러나 있는 검은 머리보다도, 이미 들은 목소리보다도 그가 에스티안임을 확신하게 만든 건 그만이 갖는 분위기와 향기 때문이었다. 황태자만큼이나 위압적인 기운, 그리고 특유의 숲과 나무 향기.

“어…….”

그걸 깨달은 순간 바보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면을 쓰고 있어 눈가가 어두운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미 나는 그가 너무 반갑고 좋아서 멍청한 눈빛을 하고 있을 게 뻔했으니까.

그는 정중하게 내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이번 춤은 저와 추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는 그를 바라보며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 틈새를 이용해 리아나를 불러왔다.

“아까 말씀드렸던 제 친구예요. 제 친구와 꼭 춤을 추고 싶다고 하셨죠.”

“하.”

나름대로 황태자의 자존심도 꺾지 않고 리아나도 자연스럽게 옆에 붙이려 꺼낸 말이었는데, 황태자는 어이없다는 듯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리아나의 입술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전부 설명할 시간이 없어 눈짓만 슬쩍 하곤 일단 이렇게 붙여 놓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 토라진 건지 화난 건지 아주 언짢은 듯했다. 황태자와 춤을 추러 홀 중앙으로 나가 멀어지면서도 내게 잠시 두는 눈길은 화로 불타고 있었으니까.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거야. 리아나가 자리를 안 비웠으면 됐을까. 아니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황태자가 춤추자는 걸 거절해야 했나?

하지만 누구든 황태자의 기운을 느꼈다면 아무런 힘도 못 썼을 것은 분명했다.

이미 다 지나가 버렸고, 나는 할 만큼 했다. 게다가 기적처럼 에스티안까지 이렇게 나타났으니…… 정말 다행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자리를 비우고 나는 에스티안과 둘이 남을 수 있었다. 아, 이제야 좀 편안해진 기분에 안도의 숨이 내쉬어졌다.

다만 황태자에게 우리가 춤추겠다고 말은 한 상태였기에,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가볍게 서로를 잡고 스텝을 밟긴 해야 했다.

에스티안이 먼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고, 다음으로는 허리에 가볍게 다른 손을 얹었다.

기분 좋을 정도의 따뜻한 손. 그리고 곧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을 때 마주한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 완전히 에스티안인 게 확실해져서 나는 종알종알 말을 쏟아 냈다.

“에스티안 경,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도 뵙게 되네요. 사실 이런 데 에스티안 경은 안 오실 줄 알았는데. 황태자 전하가 오시니까 같이 와야 했던 건가요?”

“…….”

“아, 그런데 에스티안 경은 저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그냥 모르는 귀족 영애인데 좀 곤란해 보이는 것 같아서 도와주신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소개가 너무 늦었네요. 저 아델린이에요.”

“나는 그대가 온 걸 진작에 알고 있었어. 당연히 알고 도와준 거고. 그런데 그대도 나를 알아볼 줄은 몰라서…….”

가면 속 푸른 눈만으로는 도저히 에스티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다행히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대도 나를 한 번에 알아봐 줘서 좋다는 얘기야.”

가뜩이나 춤까지 추고 있어 몸이 흔들흔들하는데, 이제는 덩달아 마음까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약간 얼빠진 내 반응에 그는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웃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네, 네. 어, 어떻게 모르겠어요. 가발도 안 쓰시고는.”

“그대는 오늘도 전하께서 오신다는 걸 알고 리아나 영애와 같이 온 건가?”

“그렇죠. 아…….”

에스티안의 질문에 별생각 없이 대답하다가 문득 그와 리아나 사이의 알 수 없는 관계가 떠올랐다.

리아나와 친해지기 위해 나에게 먼저 접근한 그의 큰 그림일 거라 추측하며 서운해했던 스스로의 생각은 둘째 치고, 지금도 혹시 내가 또 눈치 없게 말하고 행동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문득 든 것이다.

그가 리아나에게 관심이 있는 거라면, 황태자에게서 그냥 나만 조용히 벗어나도 될 것을 괜히 리아나를 끌어들인 셈이 될 테니까.

먼저 리아나가 워낙 황태자와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던 거라고 해명을 해야 하나?

고민이 거듭되는 순간에도 음악과 춤은 계속되었다.

순서에 따라 에스티안은 내 허리를 잡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내린 뒤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내 바로 눈앞으로 그의 단단한 몸이 다가왔다.

곧장 스며드는 그의 향기에 아찔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황태자와 춤출 때 느낀 것과는 정반대의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손에 들어간 힘이 세지 않아 강압적이지 않은데도 그만의 기운은 분명히 흘러넘치고 있어 어딘가 휩쓸리고 홀리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놓지 말고 나를 더 꽉 잡아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드니…… 내 문제겠지. 사교댄스가 원래 이렇게 설레는 거였나.

“그리고 그대는 오늘도 술을 마신 것 같군.”

“네? 헉.”

뭐라고?!

구름이 낀 것 같던 머릿속을 정리하고 겨우 입을 떼어 리아나 얘기를 하려던 나를 멈춘 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 그의 말이었다. 심지어 그는 약간 나를 혼내는 투였다.

지금 너무 가까워서 술 냄새가 났나? 가벼운 와인이었고, 마실 때 분명 과일 맛이 강했으니 그래도 일반 술보단 좀 낫지 않을까?

나는 당황해서 몸이 굳어 가고 있었는데 에스티안은 그런 나를 잘도 리드했다. 나는 입술을 꾹 한 번 다물었다가 최대한 작게 열었다.

“저, 술 냄새 많이 나요?”

에스티안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입이 저 정도 웃었으면 아마 눈도 웃고 있겠구나.

그 와중에도 그 웃는 눈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는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드러난 곳은 서로 약간의 뺨, 입술과 턱뿐인지라 그의 숨결과 내 숨결은 아주 좁은 그 사이에서 얽혔다.

“달콤하기만 하니 신경 쓰지 말고.”

에스티안의 얼굴은 춤의 진행과 함께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제야 내 입에선 한숨이 터져 나왔다. 분명 춤에는 저렇게 얼굴이 다가오는 부분이 없는데!

“술을 마시는 게 그대에게 좋지 않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저번처럼…….”

“아아, 아. 하하. 그래도 오늘 마신 건 디저트용 와인이라 그렇게 강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겨우 사이가 나아졌는데 리아나가 주는 걸 거절하기도 좀 그래서…….”

“리아나 영애도 그대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걸 알지 않나? 그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혼자 어딜 간 거지?”

“네?”

아까 황태자랑 있을 때 리아나를 같이 봐 두고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심지어 내가 리아나 있는 곳까지 가서 직접 그녀를 데리고 온 거였는데. 그러나 그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저, 아까 같이 보셨잖아요? 제가 리아나를 데려와서 황태자 전하께…….”

나는 이게 뭔가 싶은 심정으로 아까의 상황을 다시 짚으며 설명했다. 말하는 내내 너무 황당해 춤이 흐트러졌지만 다행히 에스티안의 팔이 단단히 붙잡고 있어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었다.

그는 진짜로, 아까의 리아나가 다른 사람인 줄 알고 있던 거였다. 즉, 그녀를 아예 못 알아본 거였다.

“그랬나.”

“그랬나라니요…….”

“나는 그래서 그대가 임기응변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지.”

“임기응변…….”

“어쨌든 리아나 영애는 술도 못 마시는 사람에게 술을 먹이고 버려 둔 게 아닌가? 그대는 그런 리아나 영애를 참 살뜰히 챙기는군.”

“하하…… 그렇게 되나요.”

모든 걸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는 리아나에 대해 너무나도 신랄하게 평가하는 에스티안의 말에 나는 그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둘이 그렇게 친해지지 않아서 그러는 건가. 그때, 문득 드는 의문에 그에게 질문했다.

“아니, 그런데 별 특징 없이 평범하게 하고 온 저는 알아보셨으면서. 리아나는 어떻게 못 알아보실 수가 있어요? 홀 안에서 제일 예뻤는데. 그거 다 제가 꾸며 준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아, 혹시 너무 예뻐서 짐작도 못 하셨으려나.”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아델린 그대밖에 안 보였어.”

펑. 펑.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얘기한 에스티안의 말에 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터졌을 게 분명했다.

가면을 쓰고 있는 안쪽으로 열기가 뜨끈하게 느껴졌다.

춤을 추다 샹들리에 조명 근처까지 간 덕에 가면 속 그의 눈을 순간 바라보게 되었는데, 너무도 맑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눈이라 나는 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

진작에 불타고 있던 마음은 이미 걷잡을 수 없어졌다.

정말로,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도 괜찮은 거지. 이런 말에 설레도 되는 거지. 멋모르는 나 같은 애만 설레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안 설렐 사람이 있을까? 한 바퀴 그의 손을 잡고 도는 동안은 그의 얼굴이 안 보이니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하지만 하필 이 곡의 마지막은 남녀가 서로 가까이 한 채 끝나는 것이었고, 곧장 에스티안은 내 허리를 팔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대의 첫 춤 상대도 나였으면 좋았겠군.”

“아…….”

저도요, 하는 말이 턱 끝까지 나올 뻔했지만 극기로 참았다.

황태자와 췄을 땐 너무 안 가서 고역 같던 시간이 이렇게 쏜살같이 지나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라면 정말 연이어 두 곡을 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두 곡이 다 뭔가. 계속, 계속 춤을 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하께서 불러온 웬 후작 영식과 기사단의 토벌 얘길 한다고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거든.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

특유의 기운을 내뿜으며 에스티안은 으르렁거렸고, 그 모습이 어딘가 미소를 짓게 만들어 나는 그저 웃어 버렸다. 황실기사단장이라면 이런 가면무도회에 와서도 그런 얘길 하게 되는구나.

곧 음악이 끝났고, 당연히 황태자와 리아나의 춤도 끝난 상태였기에 우리는 각자 그들에게 돌아가 봐야 했다. 나는 발걸음이 왠지 떨어지지 않아서 미적댔는데, 그는 황태자가 또 어디로 튈지 모르는지라 급했는지 빠르게 멀어져 갔다.

그 와중에도 인사처럼 내 손을 꽉 잡았다 놓는데, 그게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그 손을 맞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참으로 황홀한 댄스타임이었다.

“아델린.”

그리고 곧,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야 한다는 듯 리아나가 날 선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하…… 이제 시작인가? 우리는 가장 외진 테라스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튼으로 공간이 막혀 있는 데다 애초에 테라스 커튼을 걷어 버릴 만큼 무례한 사람은 없을 것이었기에, 리아나는 아예 가면도 벗은 상태였다.

나도 답답했기 때문에 가면을 벗었다. 질투와 분노에 찬 리아나의 눈을 마주하자마자 약간의 피로가 몰려왔다. 이럴 땐 선수를 치는 게 나을 것 같아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예상이 돼서, 내가 먼저 얘기할게. 네가 황태자 찾으러 떠나고 얼마 안 있어서 황태자가 내가 있던 쪽으로 왔어. 나는 처음에 그가 황태자인 줄도 몰랐어. 그런데 가만 보니 황태자가 맞더라고.”

“…….”

“그래서 곧바로 너를 어떻게든 찾으려고 했는데 네가 안 보이더라. 알다시피 황태자임을 안 순간 명을 거역할 엄두가 안 났고, 기운 자체도 워낙 세서 그가 춤추자는 걸 거절할 순 없었어. 그래서 같이 춤을 춘 거야. 그걸 네가 본 거고.”

얼른 이 피곤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데다 술기운까지 도니 말이 잘 나왔다. 내가 이토록 말을 따박따박 잘하는 사람이었던가. 전하라는 존칭도 집어던진 지 오래였다.

“흐응…….”

리아나는 내 말을 들었는데도 아직 약간 뿔이 난 듯했다.

“왜, 뭐가 문제야. 혹시 황태자의 제안을 내가 무조건 거절했어야 한다, 이런 얘길 하려는 건 아니지? 너도 그와 춤을 춰서 알 거 아냐. 그 흉흉한 사자의 기운. 나는 무섭기까지 했어.”

“…….”

“그리고 그는 이미 내가 너랑 왔다는 것도 알고 있는 상태였어. 내 최선은 춤추면서 계속 다음 춤은 너와 추라고 얘기하는 거였고. 그런데도 황태자가 억지를 부리던 와중에 에스티안 경이 오히려 도와준 거였다고.”

“에, 에스티안 경? 기사단장이 여길 왔었어? 아까 너와 있던 사람이 기사단장이었단 말야?”

상황을 그렇게 설명하는데 리아나가 놀란 것은 의외의 부분에서였다. 평소 같았으면 꼬박꼬박 기사단장님이라고 칭했을 텐데 그녀는 얼마나 놀랐는지 내가 황태자를 부르듯 그를 칭하고 있었다.

황태자 하나에만 신경 써도 모자랄 판에 뭘 또 신경 쓰고 있는 건가 했지만, 그녀는 저번처럼 또 에스티안 얘기를 듣자마자 공포에 질린 듯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리도 무서운가.

그런데 리아나도 에스티안을 못 알아봤구나. 무서워하기만 하고 서브 남주에 대한 취급이 너무한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내심 나는 에스티안과 서로를 알아봤다는 생각에 묘한 기쁨이 일었다.

“어쨌든 그렇게 된 거야. 나는 황태자를 네 손에 넘겨줘서 홀가분하기까지 했다고. 이제 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됐어?”

“……후우.”

내 얘길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것인지 가만히 있던 리아나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질투가 많이 났어. 내가 그렇게 황태자 전하를 만나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또 그분을 먼저 만난 건 왜 너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럴 순 있지. 하지만 만난 게 아니고 맞닥뜨린 거라고 하자.”

“……그래. 그리고 네가 황태자 전하를 모시고 나한테 왔을 때…… 그래도 너만큼 날 신경 써 주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에 너무 고맙고 미안했어. 항상 그걸 알면서도 너한테 이런 마음 갖는 내가 미울 정도였어.”

그녀의 절절한 말과 내리깐 눈에 매달린 눈물방울에 이번에는 내가 한숨이 나왔다. 리아나는 그냥 원래 이런 애인데. 그냥 황태자가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애라서 그런 거다.

그녀가 나한테 물어 가며 옷 맞춰 입고 이 사람 저 사람 들여다보면서 황태자를 찾던 그 노력을 떠올리니 더 수긍이 됐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다소 무모해질 수도 있는 건 맞으니까.

“오해 풀렸으니까 된 거지? 오늘 너도 고생했어, 리아나.”

“아냐, 네가 더 고생했지. 고마웠어. 염치없지만 네 덕분에 나는 황태자 전하와 춤도 췄는걸. 네가 이렇게 잘해 줬으니 앞으로 또 부탁할지도 몰라.”

“그래, 힘닿는 선에서는 나도 많이 도와줄게.”

리아나는 정말로 지쳤다며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먼저 테라스를 나가 홀을 떠났다.

가만 보니 어느새 밤 12시가 훌쩍 지나간 시간이었다. 나도 돌아가기 위해 가면도 다시 쓰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홀을 빠져나갔다.

나가면서 에스티안과 얼핏 눈이 마주쳤는데 그가 살짝 웃어 주어서 가는 길조차 행복했다.

요 며칠 이놈의 가면무도회 준비한다고 고생하고, 오늘도 아주 정신적으로 힘들었으니까 당분간은 정말 정원에서 유유자적 쉬고 놀아야겠다.

*

리아나는 거칠게 마차 문을 열고 그 안으로 휙 올라탔다.

제 주인의 성미를 아는 시녀는 그녀의 눈에 띄지 않게 마부석 쪽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마차는 곧 출발해 엘리디트가로 향했다.

자신만이 탄 마차 안에 적막함이 찾아들자 리아나는 조금 전보다 더 참을 수 없는 짜증과 분노를 느꼈다.

사실 리아나는 가면무도회에 황태자가 어떤 가면을 쓰고 어떤 차림을 하고 오는지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황태자가 무도회에 온다는 얘길 들은 순간 모든 시녀들과 기사들을 닦달해 억지로 황궁에 심부름을 보내는 등 하며 소문을 수집한 까닭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아델린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당연히 질투와 시기 때문이었다. 아델린이 자신보다 황태자를 빨리 발견해 먼저 춤이라도 추게 되면 안 되는 노릇이었으니까.

‘어쩌면 나를 위한답시고 편지에 적어 줬던 것들도 다 사실은 틀려먹은 것일지도 몰라.’

아델린의 가면과 드레스를 보자마자 리아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자신이 제일 아름다워야 하는 이 공간에서, 아델린만 그렇게 보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두문불출하며 저택에만 처박혀 있다는 애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가면을 쓸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리아나는 분명 어딘가, 자신 모르게 아델린이 정보를 취하는 구멍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랬기에 아델린이 다른 영애나 영식을 통해 이미 황태자가 여기에 어떻게 나타날 거라는 소문을 이미 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시험해 보기 위해 그저 입을 다물고 있던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델린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 계속 헛다리만 짚어 댔고, 리아나는 그에 크게 안심했다.

‘나만 아는 게 맞구나. 그러면 됐어.’

자신에게 정보가 더 많아 유리하다고 생각한 순간 리아나는 아델린과 술을 마셨다.

아델린이 술을 못 마시고, 마시게 되면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 된다는 건 오래전부터 봐 와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리아나는 그렇게 아델린을 대충 떼어 놓은 다음, 아까부터 눈에 띄던 황태자를 혼자서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결심을 하고 리아나가 나선 사이, 황태자가 아델린에게 먼저 접근을 한 게 문제였다.

‘정말로 쟤는 저 사람이 황태자 전하라는 걸 모르는 건가? 아니면 혼자 뭘 알면서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건가? 아무리 우연이라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리아나는 황태자와 마주한 아델린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계속 지켜봤다. 빨리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지만, 황태자는 아델린의 옆에 앉기까지 하고 이야기도 꽤 오래했다.

‘대체 무슨 얘길 하길래 전하께서 저기에 저렇게 붙어 있는 거야?’

둘 다 엉덩이를 들썩거리길래 이제 끝났나 싶어 그쪽으로 재빨리 걸어가려고 했지만, 황태자가 아델린을 안고는 홀 중앙으로 나서면서 그녀의 마음은 무너졌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쟤한테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쟤는 단번에 황태자와 춤을 추고 있는 거지? 황태자임을 알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춤을 출 리가 없어.’

그녀가 기억하기로 분명 황태자는 홀 안에 들어와서 아델린과 춤을 처음으로 추는 거였다.

사람들 중 그가 황태자임을 아는 자도 있고 모르는 자도 있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그는 이미 홀 안에 있는 모든 귀족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근사한 외관은 물론 사람을 휘어잡는 그만의 기운이 솟구치고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에, 그의 첫 춤 상대인 아름다운 귀족 영애라며 아델린까지 주목받는 것을 보니 리아나는 속이 뒤틀릴 것만 같았다.

‘저 자리는 내 자리인데. 전하와 춤추며 주목받아야 하는 건 나인데.’

곡이 하나 끝났는데도 둘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리아나는 아델린이 무슨 수를 써서 황태자를 데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말로 꾀든, 이후에 개인적인 수를 쓰든.

그리고 또한 황태자가 아델린과 춤췄다고는 생각을 못 할 것이라 여겼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태자가 아델린과 저렇게 오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분노가 점점 커져 갈 무렵, 아델린은 리아나의 앞으로 황태자와 에스티안을 데리고 왔다.

그녀가 황실기사단장과 사이가 멀진 않은 것 같았는데, 대체 또 언제부터 그렇게 지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맨날 자기 집 정원에만 있다는 애가 말이다.

‘아깐 몰랐지만, 기사단장까지 같이 있었을 줄이야. 기사단장은 그 기운에 정말로 짓눌릴 것 같아. 아니, 그런 기운을 떠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아델린이 그렇게 황태자를 자신의 앞으로 데려왔다는 것에 리아나는 순간적으로 한풀 감정이 꺾였다.

하지만 춤추는 내내 황태자가 ‘아델린과 같이 왔나?’ 하고 물은 말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에 빈정이 상했다.

황태자는 이미 자신이 아델린과 춤췄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그 순간을 계속 생각하는지 춤추는 내내 멍해 보였다.

아까 아델린과 춤출 때는 한 곡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붙어 있는 것 같았는데, 자신과 춤을 추니 곡이 끝남과 동시에 정중하면서도 칼 같은 인사를 하고는 바로 떠나 버리는 게 아닌가.

‘황태자 전하와 춤을 추면서 나에 대해 무슨 좋지 못한 얘기라도 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언짢은 상태로 춤을 마무리하고 나니, 리아나는 아델린에게 들은 말이 모두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우연히 황태자가 와서 싫었는데도 그 힘을 이기지 못해 억지로 춤을 추고, 그 와중에 자기 생각이 나서 선심 쓰듯 황태자를 넘겨줬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아델린의 그 꼴이 짜증 났다.

‘자기가 뭐라고 황태자 전하가 먼저 와서 알아보고 구걸하듯 춤을 췄다는 거야. 하, 네 덕분에 황태자와 춤을 췄다고 띄워 줬더니 좋아하는 꼴이란.’

이미 마음이 비틀릴 대로 비틀린 리아나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거짓으로 아델린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나니 분노는 더욱 커지는 것만 같았다.

늘 자신을 데리고 황태자에게 잘 다니다가 어느 순간부터 아델린은 피곤함 따위를 핑계로 협조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리아나가 생각하기에, 공교롭게도 그 시점은 자신이 황태자와 조금이나마 가까워진 것 같다고 느꼈을 때였다.

항상 말로만 황태자에게 관심 없다고 할 뿐, 아델린은 정작 자신을 도와야 할 때 그 어떤 도움도 안 되지 않았던가.

처음엔 아델린 본인이 너무 완강하게 거부했기에 리아나도 그저 그런 줄로만 알았지만, 생각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델린이 멍청하기 때문인지 알량한 우정 같은 걸 아직도 믿고 있다는 거지.’

리아나는 언제고 황태자를 보러 가겠다는 것을 핑계 삼아 아델린을 불러낼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아델린이 자기 입으로 분명 도와주겠다고 했고,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은 지키니까.

어쩌면 이전에 아델린이 설치면서 자신을 데리고 다녔던 때보다도 더 나을 수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먼저 정보를 있는 대로 수집한 뒤 원하는 대로 아델린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눈물 같은 것은 얼마든지 흘려서 아델린을 이용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황태자의 옆에 서서, 궁극적으로 황태자비가, 그리고 나아가서는 황후가 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더 머리를 굴려 어떤 수든 써야 했다.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정말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리아나는 마차의 흔들림과 관계없이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아 쥐곤 눈을 꽉 감았다. 머릿속에 아델린과 황태자가 춤추는 장면이 저절로 떠올라 입술도 피가 날 만큼 세게 깨물었다.

*

“아가씨, 이제는 정말 일어나시는 게 좋겠어요. 너무 오래 침대에만 계시면 정말 몸에 좋지 않아요.”

“아아, 좋은데…….”

“얼른 일어나세요. 목욕하실 물도 준비해 놨어요.”

나름대로 신경도 쓰고 술까지 마셨더니 아주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며칠간 계속 침대에서 자고 뒹굴기만을 반복했다.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았고 그저 푹신한 침대가 너무 좋았기에 계속 누워만 있던 거다.

그러다 결국, 오늘도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던 나는 안나가 일으키는 손길에 겨우 일어났고 시녀들에게 몸을 완전히 맡겨 겨우 사람 꼴을 하고 있게 되었다.

“백작님과 백작 부인께서 당분간 서쪽 영지를 확인하러 떠나 계신 걸 다행으로 여기셔야 해요, 정말. 이렇게 계속 잠만 자는 걸 보셨으면 분명 뭐라고 하셨을 거예요.”

“에이, 어머니랑 아버지는 그럴 분들이 아니시잖아요.”

안나는 천연덕스러운 내 대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래 누워 있던 탓에 몸이 뻐근한 나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테라스를 거쳐 정원으로 나갔다.

햇살이 생각보다 따뜻해 낮에는 숄도 필요 없을 것 같았고, 날이 맑고 좋아서 또 당분간은 여기서 죽치고 놀면 될 것 같았다.

나는 수놓을 손수건 몇 장과 책 한두 권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차를 마셨다.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물론 가면무도회가 정말 꿈 같았고 황홀하긴 했지만, 이렇게 한량처럼 있으니 또 그런 데를 가기는 참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 소모는 물론, 감정 소모까지 끊임없이 하게 되니 피곤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물론 리아나에게 신경 쓰고 황태자가 나타나서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사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데서 어떻게 노는지 제대로 본 건 아니지만, 얼핏 기억나기로는 그렇게 가면을 쓴 와중에도 다들 서로 기 싸움을 했더랬다.

다들 가면을 썼어도 서로가 누군지 거의 아는 것 같았고, 몰라도 상관없다는 듯 아무렇게나 다들 떠들고 그랬다. 그렇게 기 싸움이 난무하는 곳에서 나는 굳이 견디고 싶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친구가 쓰는 소설을 읽었을 때만 해도 맑은 여자 주인공 정도인 줄 알았던 리아나에게 꽤 큰 질투심과 욕망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더 허탈하고 어딘가 바람이 빠져나간 듯한 마음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적어도 내가 본 리아나는, 그런 마음이라면 아델린이 그렇게 끌고 다니면서 도와주지 않아도 충분히 자기가 앞가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녀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봐서는 안 될 걸 본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스스로가 지독해질 만큼 짝사랑을 하는 그녀가 어딘가 안쓰러웠다. 이건 나의 과거에 대한 투영일 수도 있겠다.

비록 남자 한번 제대로 사귀어 본 적 없지만, 누군가를 그렇게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만은 나도 알기에 그녀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에 얼마간은 또 데리고 다녀 주겠다고 했으니, 내 무덤을 내가 판 셈이기도 한 것 같고. 어쨌든 지금은 고생한 나에게 휴식을 주는 시간이었다.

“아델린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정원 의자에 늘어져 있는 나를 보고 엘이 달려왔다. 점심시간 겸 휴식시간이라 잠시 시간이 난 거라 했다.

엘은 점점 또래 아이처럼 생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지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엿한 보조 정원사처럼 보였고 또 즐거워 보였기에, 내가 다 기뻤다.

“저 완전 게으르죠. 엘은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정원을 관리해 주는데.”

“에이, 아가씨 덕에 저는 좋아하는 꽃 보고 나무 보면서 지낼 수 있는데요. 아가씨의 정원에는 정말 예쁜 꽃이 많아서 너무 좋아요. 오늘 저 정원사 할아버지께 아는 거 많다고 칭찬도 받았어요.”

“진짜 대단해요. 나는 정원에 뭐가 피어 있는지도 잘 모르는데. 엘이 보기에 어떤 꽃이 제일 예뻤어요?”

“음, 너무 많은데……. 아, 프리모스 꽃이라고, 붓꽃의 일종인데 정말 예쁜 꽃이 있어요. 저쪽 정원에 완전 한가득 피어 있더라고요. 그건 향기도 진짜 좋거든요. 포근하면서도 되게 진한 향이 나요.”

“아, 그거구나.”

“그런데 그게 꽃을 피우기가 정말 어렵거든요. 거름을 너무 많이 줘도 안 되고, 물을 너무 많이 줘도 안 되고, 햇빛도 많이 봐야 하고, 건조해도 안 되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정원에 가득 핀 거 보고 놀랐어요.”

다행히 프리모스 꽃은 나도 아는 거였다. 정원을 휘휘 돌아다니다가 정원사가 하는 말을 흘려들었던 기억이 났다. 엘이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아 잘 떠올랐다.

꽃 피우기가 워낙 어려워 종자 자체도 희귀하고 비싼 꽃이라 했다. 좀 더 정원에 큰돈을 들여 관리하는 귀족가의 경우, 아예 프리모스 꽃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정원사를 고용할 정도란다.

꽃가게에서도 프리모스 꽃은 찾기 어렵고 있어도 비싼 편이었다. 심지어 꺾어서 가지고 있으면 금방 시들기까지 하는 아주 까다로운 꽃.

정원사는 우리 정원에서는 자꾸 꽃봉오리가 맺혔다가 금방 지기 일쑤라서 관리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 꽃 예쁘죠. 그거 우리 정원에서도 꽃이 잘 안 피어서 고생했던 걸로 알고 있거든요. 결국 피웠나 봐요. 나도 보러 가야지, 이따가. 와. 그런데 엘은 정말 꽃을 많이 알고 있네요. 저는 저번에 정원사분께 얼핏 들은 게 고작이거든요. 프리모스 꽃이 그렇게 구하기가 어렵대요.”

“헤, 사실 정원사 할아버지가 칭찬해 준 것도 프리모스 꽃을 알고 있어서였어요. 찾기도 힘든 꽃인데 정확하게 키우는 법이나 그 까다로운 정도를 알고 있다고요.”

엘은 신이 나서 의기양양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음, 사실은 어릴 때 그 꽃을 본 기억이 있거든요. 꽃도 예쁜 데다 향기가 너무 좋아서, 어디서 들은 얘기까지 기억에 강하게 남았나 봐요. 어릴 적 다른 기억은 하나도 없는데 그 꽃이랑 향기는 완전히 똑바로 기억나거든요.”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며 덤덤하게 말하는 엘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그녀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워낙 험한 어린 시절을 보내 기억이 잘 안 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어린데도 엘은 감정을 참고 모든 것에 의연해지는 걸 먼저 깨달은 듯해 쓴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강하게 기억에 남았으면, 분명 좋았던 기억일 거예요. 그 꽃 마음에 들면 몇 송이 꺾어 가도 돼요.”

“그럼 꽃이 아파하는걸요. 그리고 프리모스 꽃은 꺾으면 금방 죽어 버려서 큰일 나요!”

킥킥대며 천진하게 웃는 엘을 한번 끌어안은 다음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만 보니 손에 자잘한 상처가 좀 나 있었다.

아무리 꽃이 좋고 나무가 좋다고 해도 이곳저곳에 상처가 나는 건 어쩔 수 없구나. 곧바로 나는 시녀에게 부탁해 상처에 잘 드는 연고를 가득 받아 엘에게 건넸다.

“엘도 쓰고, 정원사 할아버지도 드리고, 정원 관리해 주시는 다른 분들도 다 드려요. 부족하면 말하고요.”

“우와, 감사합니다! 이렇게나 많이 주셔도 돼요? 사실 이건, 아까 나무에 올라가려고 하다가 긁힌 상처예요. 저번에 봤던 정원 뒤쪽에 있는 나무 잎사귀가 더 커졌길래 보려고 하다가요. 히히. 잎사귀가 정말로 제 팔뚝 두 개 합친 거만 했거든요.”

그 나무 잎사귀 큰 거야 나도 늘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던 거라서, 엘이 저렇게 즐거워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조심하라고 당부했고, 그녀는 씩씩하게 알겠다고 한 뒤 다시 정원 일을 하러 달려갔다.

며칠 시체나 다름없이 지내던 내게도 엘 덕분에 긍정적이고 쾌활한 에너지가 좀 스며든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 에너지를 바탕 삼아 나는 여기서 계속 차만 마실 거지만.

엘이 다시 일하러 떠나고 나는 계속 정원에 앉아 평온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늦은 오후가 되자 쥴 경이 호위를 위해 정원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쥴 경. 황궁 훈련 갔다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잘 다녀오셨어요? 최근에 황궁 훈련이 많다고 들었어요.”

쥴은 기사의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슬쩍 웃었다.

“제가 먼저 여쭤봐야 하는 걸 아가씨께서 먼저 하셨네요. 호위 기사한테 그렇게 묻는 영애는 거의 없을 겁니다. 예, 저는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아가씨께서도 가면무도회는 잘 다녀오신 것 같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어, 그런가요? 뭐 재미없진 않았지만, 가뜩이나 사람들 만나는 것도 피곤한데 가면까지 쓰고 춤까지 추려니 고역이었어요. 그래서 며칠째 쉬고 있죠.”

“하하, 항상 아가씨는 쉬시지 않았나요? 그래도 전엔 고민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해결되셨나 봅니다.”

“아…… 뭐, 그러네요. 근데 산 넘어 산 같은 느낌이에요.”

“황실기사단장과 관련된 고민이셨겠지요.”

“네에에? 아, 아, 아닌데요?”

차라리 가만히나 있을걸. 단박에 정곡을 찔린 나는 과장되게 반응해서 부정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바보 같은 내 반응에 쥴은 그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항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어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친절하고 공평하게 대하던 아가씨께서 한 사람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이시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가씨가 굳이 상처받으며 성장하는 걸 호위 기사로서 지켜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군요.”

혹시라도 내 마음에 자극이 될까 봐 쥴이 에스티안의 여색 문제에 대해 최대한 에둘러 말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그런 쪽의 고민은 해결됐는걸……!

에스티안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심지어 나 같은 모태솔로라고 속 시원하게 밝혀 버리고 싶었지만, 그걸 얘기하면 그의 개인적인 문제까지도 다 얘기해야 하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동생을 얼른 찾으면 좋겠는데. 건너 건너 들리는 소식이라도, 아니면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하다못해 묻힌 장소라도…….

혼자 안팎으로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에스티안을 떠올리자 마음이 먹먹하게 아려 와서 나는 잽싸게 화제를 바꿨다.

“아, 그, 요새 황실에서 훈련을 길게 자주 하는 것 같아요. 그렇죠?”

내 말에 쥴은 마치 말 돌릴 것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허탈하게 숨을 쉰 뒤 대답했다.

“예. 조만간 황실기사단 전체와 귀족가 기사단 전체가 다 같이 마물 퇴치를 하러 갈 예정이라 훈련이 좀 잦습니다. 넓은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배치된 상태로 퇴치 작업을 할 거라 몇 번씩 합을 맞춰야 하거든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떠오른 건 또다시 에스티안이었다. 당연히 황실기사단이 주축이 되어 마물 퇴치를 할 테고, 그러면 황실기사단장이 총대를 메겠지.

그는 이전에도 마물 퇴치를 잘했다고 했다. 물론 자기 입으로 한 말이지만, 그래도 에스티안의 실력이 엄청나다는 건 제국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규모 마물 퇴치 작업이라면 꽤 위험할 텐데. 마음속에서 걱정들이 기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래도 되나 싶었다.

내가 에스티안을 걱정하는 게, 헛웃음 나오는 표현이지만 정당한 일이 맞나?

뭐, 이미 그만 보면 너무 좋아 가슴이 떨리게 된 내가 혼자 그를 생각하는 것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네가 무슨 상관이야?’ 하는 말로 단칼에 잘릴 수 있는 오지랖은 아닐까? 아무리 그가 내게 특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해도 그의 마음 자체는 알 길이 없으니 말이다.

가면무도회 이후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는 아직 방문하지 않았다.

원래도 매일같이 방문하는 건 아니었지만, 가면무도회 때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분명 하루 이틀 안에 또 찾아올 줄 알았는데.

쥴의 말처럼 훈련이 많아져서 그런가. 하지만 이전에는 피곤한 얼굴로도 왔는데…….

그렇게 생각이 이어지자 차가움이 뚝뚝 흐르는 얼굴만 봐서는 믿기 어렵지만 그냥 선천적으로 성격이 그런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은 거다. 산 넘어 산이 바로 이거였다. 내 마음 문제.

“또 고민이 깊어진 얼굴을 하시네요, 아가씨. 혹시 궁금해하실까 싶어 말씀드리자면, 황실기사단장님은 저를 포함한 모든 기사들을 잘 이끌고 계십니다. 그분의 검술은 말할 것도 없고, 전술과 지휘도 뛰어나시니까요. 저희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게 힘쓰는 것조차 소홀히 하지 않고 계십니다.”

“…….”

“뭐, 그런 훈련을 마치고 나서 늘 개인적인 일이 있다고 금방 나가시지만요.”

그건 다 에스티안에게 사정이 있어서 그래! 알 만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쥴에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겨우 그 마음을 참았다.

“……제가 뭐라고 했나요, 뭐.”

*

그로부터 이틀 뒤 에스티안이 다시 나를 방문했다.

평소 그랬던 것처럼 저녁 시간 티타임을 요청했고, 이제 저택 사람들은 전혀 놀라거나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그저 당연한 걸 받아들인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오늘 그는 기사단장 제복 차림이었다. 단단해 보이는 몸을 근사하게 휘감은 검은 제복은, 그의 새까만 머리와 참 잘 어울렸고 그의 짙푸른 눈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것 같았다.

거기다 얼빠진 채 자신을 감상하는 나를 보며 픽 웃는 모습까지.

이전에 아무리 제복 입고 웃는 걸 봤어도 이런 느낌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감정이 커지니 별것에 다 마음이 들어 가는구나.

에스티안이 또 차만 마시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서 나는 혼자 열심히 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뭐, 그때 가면무도회 끝나고는 잘 들어갔냐, 요새 마물 퇴치 준비한다고 바쁜 것 같은데 힘들진 않냐 등.

나로선 장족의 발전이었다. 내가 이렇게 남자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탄까지 나올 지경인데, 그런 나의 노력을 절대 알 리가 없는 그는 짤막짤막하게 잘 들어갔다, 힘들지 않다, 이런 식으로 대답하고는 금세 시선을 내리고 차를 마셨다.

시무룩해지는 감정이 이렇게도 허무한 것이었나.

남들이 보기에 내가 별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정말 엄청나게 온몸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에스티안의 반응을 봐도 그걸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나한테 특별한 관심이 없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한편으로는 오기가 생겼다.

내 마음이 티가 안 나는 거라면, 좀 더 티를 내 볼까 싶은 마음. 거기에 질려 그가 떠나가면…… 역시 또 시무룩해지겠지만, 더 이상 뒤에서 손으로 입 가리고 좋아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만 하지는 않겠다고 결심이 선 것 자체에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에스티안 경.”

그는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고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아니, 대답이라도 좀 해 주지. 물론 저렇게 웃는 것도 참 홀릴 것처럼 좋지만.

“왜 자주 안 와요?”

“어?”

그는 놀란 얼굴을 잠깐 하더니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마른세수를 했는데, 그러는 내내 낮게 계속 목 안쪽으로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뭐야, 왜 웃어. 뭐가 웃겨, 여기서?

“아델린 그대는 혼자 차 마시고 노는 걸 좋아하지 않나.”

“아…… 그건 그렇지만.”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자동적으로 대답하니 에스티안은 또 계속 웃었다.

일단 이전의 아델린은 사교계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황궁이나 다른 영애들의 저택을 누비고 다녔을 텐데도 곧장 에스티안이 저렇게 말한 게 의아했다.

그러니까 그는 정확히 내 성향을 파악한 거였다.

단 몇 번의 만남……은 아닌가.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기사단장이란 그런 건가.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정말 저런 이유로 자주 안 왔다는 거야? 내가 혼자 노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아주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구나. 계속 웃는 그를 보니 나도 약간 황당한 마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오면 불편한 얼굴을 하는 것 같아서. 혼자가 편한가 했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불편한 얼굴이 아니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 아니었을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다음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혼자가 편하다고 해도…… 아, 뭐 혼자가 편해서일 수도 있지만. 하여간 그래도요. 누가 불편한 사람과 몇 날 며칠씩 차를 마시고 얘기를 나누겠어요……. 다 좋으니까 그러는 거죠.”

물론 목소리는 부끄러워서 아주 작게 나갔는데 심지어 약간 횡설수설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얘기하고 잔뜩 숙였던 고개를 들자, 기다렸다는 듯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에스티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을 마주하자마자 내가 ‘좋다’는 말을 대놓고 꺼냈다는 걸 깨달았다.

뉘앙스가 이상한가? 너무 뜬금없었나? 갑자기 혼자 신나서 김칫국 마시고 고백한 사람 같나?!

뒤에 음침하게 숨어서 지켜보거나 앞에 나와서 방망이로 쳐 날려 버리거나,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둘 중 하나로밖에 대할 수 없는 걸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계속 눈길이 느껴져 나는 겨우 힐끗 그를 보았다.

당연히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고운 푸른 눈이 놀라서 다소 커진 상태였다.

처음에는 분명 차갑고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시린 푸른빛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눈은 분명 온기가 어린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 꼭 이럴 때만 그와 눈이 마주쳤으니 당연히 내가 자길 불편해한다고 생각했겠지.

나는 막 던졌던 말이나 내 태도 같은 것을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그…… 친구잖아요? 친구랑 차 마시고 얘기하고 하면 좋잖아요?”

물론 머리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고, 고작 내가 꺼내 든 건 친구라는 말이었다.

친구는 무슨. 내가 갖고 있는 활발했던 아델린의 기억 속에서조차 저택으로 직접 와서 티타임을 자주 갖는 사람은 없었다.

친구의 범위를 훌쩍 넘은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에스티안을 더 이상 마주하고 있을 용기는 안 나서 내가 미리 방어막을 친 셈이었다.

“……그래, 친구. 그대가 그렇다면 친구라고 하지.”

에스티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람 빠지는 듯 숨을 내쉬었다. 보일 듯 말 듯 하게 아주 옅은 미소를 짓고 있긴 했는데, 그 표정이 썩 밝아 보이는 건 아니라서 나는 또 철렁했다.

잘 무마된 건가. 방어막은 제대로 친 건가.

그의 얼굴을 보니 그 방어막에 되레 씁쓸하게도 내가 다친 것 같았다. 우리는 둘 다 작게 ‘친구’라는 단어를 작게 읊조리고는 각자의 차를 한 번에 다 마셨다.

“친구는 이만 가 봐야겠어. 내일은 훈련이 새벽부터 있거든.”

“치, 친구요.”

“그래. 나는 그대의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네…… 맞죠.”

“당분간은 기사단 일이 좀 바빠서 정말로 그대를 보러 못 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조만간 대규모의 마물 퇴치 작업이 있을 거라서.”

“아, 그, 그건. 무리하지 마세요. 아까 제 말은…….”

“친구라면 자주 와야 하는데 말이지.”

“하…… 제가 말을 잘못했나 봅니다.”

웃긴 건 심란한 내 마음도 모르고 에스티안이 내가 친구 얘기를 한 후부터 자신을 친구라 지칭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정원을 떠나 말을 끌고 대문으로 갈 때까지 그는 계속 저 모양으로 말했다.

찬바람 부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장난기 어린 말투로 저렇게 얘기하니 나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넋이 나간 채로 그에게 잘 가시라고 인사를 하고 나서도 계속 친구라는 단어가 귀에서 맴돌았다.

연인까지는 상상도 되지 않으니, 에스티안과 좋은 친구 사이가 되는 것으로도 일단 나는 성공하는 게 아닐까 싶어 얼떨결에 한 말인데, 제대로 말한 게 맞겠지. 그리고 그도 그렇게 생각한 게 맞기를 바랄 뿐이다.

에스티안이 다녀가고 나면 늘 그랬듯 오늘 밤도 잠은 다 잔 듯싶었다.

*

그날 뒤부터 일주일 정도는 제국이 전체적으로 바쁘면서도 활기찼는데, 또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웠다.

대규모 마물 퇴치를 하기 위해 각지의 기사들이 자주 황궁으로 모이는 듯했는데, 그 이전에 먼저 사냥제와 축제가 진행될 예정이라, 황실 측이나 귀족들은 그런 행사를 준비하기 바쁜 것 같았다.

“힘들겠다.”

백작가의 여식……임은 둘째 치고 그냥 사람 만나는 것도, 어딜 나가는 것도 귀찮은 나는, 물론 그 모든 것을 정원에 앉아 차나 마시다가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렇게 한가하고 편안하기 그지없는 날들을 보내던 차에 방금 전에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잠깐 산책 삼아 저택 밖을 나갔다 왔더니, 그 격양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기사들이 한데 모여 훈련을 준비하는 듯하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였고, 거리에 황실을 상징하는 깃발이나 천도 여럿 걸려 있었다. 귀족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다들 기대감으로 들뜨고 신나 보였다.

축제 기간이란 이런 거구나.

가장 먼저 열릴 사냥제는 황태자와 황실기사단, 몇몇 힘 있는 귀족가의 기사단이 함께 나가 사냥을 하는 거였다.

그냥 애꿎은 동물 잡는 거랑 뭐가 다른가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철저하게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경건한 행사 중 하나였다.

사냥제를 시작하기 전 황실은 신전의 도움을 받아 사냥제와 축제를 무사히 치를 수 있기를 기원하는 의식을 먼저 진행한다.

그리고 사냥할 때도 절대 새끼 동물류는 잡지 않으며, 사냥을 마친 후에도 자연에 감사하는 의식을 한 번 더 진행한다.

잡힌 짐승들은 조리할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지고, 사람들은 그 고기와 빵 등의 식량을 함께 나눠 받게 된다. 장사꾼들은 고기를 받아다 요리해서 축제 기간 동안 가판에서 팔기도 한다.

사냥제는 축제의 시작이자, 먹을 것이 없는 평민이나 재정 상황이 안 좋은 귀족을 비롯한 모두가 모처럼 맛있는 것을 다 같이 즐기는 기회인 것이다.

원래는 사냥제에 오직 사냥하는 인원만 갔다고 했다. 그러니까 황태자, 황실기사단, 귀족 기사단만 가는 거다.

그런데 기사를 남편이나 애인으로 둔 영애들과 부인들이 사냥제에서 그간 벌어졌던 몇 번의 사고에 안심할 수 없다고 함께 가겠다고 선언한 이후부터는 여인들도 약간씩 참여하고 있었다.

실제로 직접 사냥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경우 기사들이 상처를 입는 경우 약간의 치료를 해 주는 식이었다.

사실 응급 상황을 대비해 치료사들도 함께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가서 용기를 주고 힘을 북돋아 주거나 치료해 주는 편이 분위기가 더 좋은 건 당연했다.

그리고 점점 사냥제에 그렇게 참석하는 귀족 여성의 수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거기서 하나의 티타임 모임 같은 게 이루어졌다.

사냥에 참여하지 않고 기다리는 영애들이 모인 것이다.

스스로뿐 아니라 애인이나 남편이 사냥제에 참가할 정도면 어느 정도 지위도 있는 사람들인 셈이고, 그런 그들에게는 서로의 정보나 황실의 정보를 주고받는 게 매우 중요했기에 물 흐르는 듯한 수순이었다.

정보도 주고받고 서로의 힘겨루기도 좀 하고, 비꼬고 싶은 건 비꼬기도 하면서 또 하나의 작은 사냥제가 열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이들이 학원 같은 데 간 사이에 진행되는 학부모 모임 같은 느낌이랄까.

당연히 황태자가 늘 참가하는 중요 행사이기 때문에, 리아나와 나, 즉 이전의 아델린도 그동안 쭉 참여해 왔다.

아델린은 워낙 쾌활하고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사냥제에서도 모든 이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기사들 중에는 아델린에게 사냥 성공 기원을 위한 징표를 받으려고 애쓰는 자들도 많았다.

그때마다 아델린은 능숙하고 세련되게 그들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곤 그저 모든 이의 사냥 성공 기원을 빌었지. 기사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아델린이 베푸는 관용이라며 황홀해했다. 그러면서도 리아나가 황태자와 계속 가깝게 있게 했고, 황태자에게 징표를 주도록 만들었다.

하, 그 여유! 그 편안한 부드러움! 친구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리고 아델린의 기억을 내가 거의 자유자재로 떠올리게 되면서 나에게도 그렇게 여유와 센스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더랬다.

하여간 그런 전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리아나는 나에게 샤낭제에 같이 가자는 편지를 보냈다.

사실 편지가 올 줄 예상하지 못해서 좀 놀랐다.

아무리 내가 황태자 가는 곳에는 같이 가 주겠다고 얘기를 했다지만, 가장 최근 가면무도회에서 봤을 때는 울기까지 하고 정말로 마음이 안 좋은 것 같았으니까.

<아델린, 곧 있을 사냥제에 언제나처럼 함께 가 주면 좋겠어. 저번에 가면무도회 때도 너무 고마웠고 또 미안하기도 해서 이번에는 혼자 어떻게든 해 보려 했는데, 다른 영애들이 잔뜩 올 걸 생각하니 또 엄두가 안 나서 그래.

……델, 너도 알다시피 거기 오는 영애들은 전부 기사들 걱정은 하지도 않고 자기 잇속 챙기고 남의 험담하기 바쁘잖아. 사실 나는 그때마다 너와 함께 있었고 네가 도와줘서 아직은 혼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이번에 같이 가서 많이 알려 줘. 나의 델, 같이 가 주면 좋겠어.>

절절한 편지에 미묘한 웃음이 나왔다. 마냥 귀여운 애가 아니라는 건 이제 어렴풋이 알겠는데, 그럼에도 일단 내가 도와주겠다고 말한 이상 도와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나는 리아나에게 사냥제에서 보자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는 안나의 채근에 따라 사냥제 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다.

외출 준비를 급하게 마친 뒤 안나와 함께 밖으로 나와 도착한 곳은 늘 가는 그 드레스 살롱이었다.

“저는 사냥도 안 하는데 무슨 준비가 필요해요? 게다가 드레스 살롱이라니…….”

“어머, 아가씨. 무슨 말씀을. 다른 영애들은 사냥제만을 기다리며 힘을 쏟는답니다.”

“사냥을 하러 가는 게 아닌데도요?”

“그럼요.”

“음…… 그건 너무 사냥제에 놀러 가는 것 같네요. 아무리 그래도 사냥제인데. 위험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아가씨, 갑자기 그렇게…….”

생각해 보면 안나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간 아델린도 드레스 차림으로 사냥제에 간 게 맞으니까.

물론 다른 영애들이 좀 더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부채까지 들고 오는 것에 비하면 아델린은 가벼운 드레스를 입고 가긴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드레스는 드레스겠지. 정말 가만히 앉아 기사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만을 위한 게 아닌가.

그런 차림이라면 혹시라도 사냥터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나 기사들이 다쳤을 때 움직이기도 불편할 터였다. 게다가 마차를 타고 가지만 내가 말을 탈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는 사냥제에 어떻게 하고 갈지 금세 정했다.

“아가씨께서는 정말 늘 예측을 뛰어넘으시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로선 그런 분의 옷을 만드는 게 축복이자 영광이지요. 자, 이쪽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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