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4/18)

4장

“엘, 생각 같아선 엘한테 당장 돈이랑 먹을 것을 주고 지낼 곳까지도 마련해 주고 싶지만, 그건 임시방편밖에 되지 않을 거예요. 엘은 아직 어리고,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여기 내 방과 연결된 정원에서 정원사분을 돕는 일을 하는 게 어때요?”

“네? 어, 어떻게 제가…….”

“엘은 꽃을 누구보다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꽃의 특성이나 꽃말 같은 것도 아주 잘 알고 있고.”

“그건 정말 별것도 아닌걸요……. 괜히 아가씨랑 정원사님에게 피해를 끼칠 거예요.”

“피해라뇨. 정원사분께 정원을 관리할 손이 부족하다는 얘기도 들었고, 엘에 대해서도 이미 말해 놔서 엘만 좋다고 하면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어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엘은 눈만 굴렸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낼 곳은…… 이것도 그냥 나랑 방을 같이 쓰거나 옆방을 쓰라고 하고 싶지만, 아마 일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형평성에 좀 어긋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정원을 관리하는 시녀분들이 지내는 숙소가 있어요. 따뜻하고 시설도 절대 나쁘지 않으니 걱정 말고요. 어때요?”

“흐윽. 아델린 아가씨……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엘은 작은 손으로 얼굴을 박박 문지르며 펑펑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나는 엘의 손을 잡았다.

“저번에 내가 너무 크게 도움을 받았잖아요. 엘한테 나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좋아요. 앞으로 잘 지내요. 나랑도 저번처럼 놀고.”

*

몸을 완전히 추스르며 며칠을 보낸 엘은 정원사에게 본격적으로 정원 관리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맨날 정원에서 차 마시고 놀기는 해도 항상 엘을 확인할 수는 없어서 정원사에게 물어보며 아이를 살피려고 했다.

“엘이 워낙 나무나 꽃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해서 일에도 금방 익숙해졌어요. 아가씨 덕에 저는 정원 일이 더 쉬워졌지 뭡니까. 하하.”

“갑작스러우셨을 텐데 이렇게 배려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해요.”

다행히 나이 지긋한 정원사는 황당할 법도 했을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손녀 보는 느낌으로 엘을 가르치고 잘 대해 줬다.

한편으론 엘에게 억지로 일을 시킨 건가 싶어 걱정했지만, 엘은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 꽃을 다루며 일한다는 것에 정말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잎사귀가 큰 나무가 있는지 몰랐어요! 잎사귀가 질기기도 해서 거의 섬유 같았어요.”

“와, 그건 정원 뒤쪽에 있는 나무 아니에요? 정원이 꽤 넓은데 벌써 거기까지 다 돌았구나. 잘했어요.”

엘은 매일 혼자 티타임을 갖는 내 쪽으로 와서 오늘 뭘 배웠고 뭘 봤다고 종알종알 귀엽게 얘기했다. 사실 엘은 14살로 나와 나이 차이도 몇 살 나지 않았지만, 워낙 작고 말라서인지 어린 동생 같은 느낌이 있었다.

“엘이 여기 생활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정원사분께서 알아서 잘해 주시겠지만, 그래도 항상 조심해요. 특히 정원 뒤쪽은 수풀 사이에 가파른 언덕이 있으니까 특히 조심하고요.”

왜냐면 내가 거기서 굴렀다가 다친 거였으니까…….

이제는 아델린의 모든 일이 정말로 내 일이 된 상태였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정원 뒤쪽까지는 꽤 멀다고 느껴서 잘 안 갔는데 왜 거기서 굴렀던 걸까.

아마 워낙 이리저리 다니는 걸 좋아했으니 그랬던 거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엘이 갑자기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저번에 왔던 기사님은 또 언제 오시나요?”

“푸흡!”

엄청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걸 얘기하듯 소곤거리는 그 말에 나는 차를 분수처럼 뿜었다.

엘이 저택에서 지내게 된 이후 에스티안은 한 번 방문해 늘 그렇듯 나와 저녁 티타임을 가졌다.

길에서 지냈을 때 남자 왈패들에게 너무 위협을 받아 온지라 젊은 남자를 많이 두려워하는 엘은 에스티안이 온다는 얘길 전해 들은 순간부터 숙소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얼굴도 모르지만, 다만 다른 시녀들로부터 항상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되게 실력 좋고 직위도 높은 기사란다, 하는 정도를 들은 것 같았다.

컥컥 기침을 하고 겨우 앞에 있던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쓸 일 없을 줄 알았던 냅킨도 펼쳐 테이블도 닦았다. 좀 정리를 하고 나서야 아직도 나를 향해 눈을 동글동글 뜨고 있는 엘을 향해 입을 뗄 수 있었다.

“그……그러게요. 언제 오실까. 워낙 자기 마음대로 오시는 분이라.”

“그분이 아가씨를 엄청 자주 찾아온다고 들었거든요.”

“하하…… 왜 그러실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가씨를 좋아해서 오는 게 아닐까요?”

“에이, 그건 아닐 거예요. 그분은…….”

난봉꾼이니까! 나뿐만 아니고 모든 여자에게 이렇게 구는 사람이니까!

혀끝에서 도는 말을 내뱉을 순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이에 대해 괜히 안 좋은 감정 심어 줘 봤자 편견만 되고 좋을 게 없으니까.

나도 사실은 에스티안을 직접 마주하기 전에 그런 편견 어린 마음이 있지 않았던가.

실제로 만나 보고 대화해 본 그는……. 아! 그만 생각하자. 고개를 재빠르게 젓곤 민망한 듯 웃는데, 엘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자주 온다는 건, 보고 싶다는 거 아니에요?”

‘또 보고 싶어.’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보고 싶다고 말은 했지. 하지만 매일 오는 것도 아니고 뜨문뜨문 자기 마음대로 오는 데다 특별한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만 있다 가는데.

“에이, 그것도 아닐 거예요.”

“음, 그런데 보고 싶으니까 자꾸 오는 건 분명 맞을 거예요. 이전에 거리에 있을 때, 사람들이 그랬어요. 나를 버린 부모는 내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나를 찾지도 않고 보러 오지도 않는 거라고…….”

아, 그런 얘기를 들으려던 게 아닌데. 깜짝 놀란 나는 엘을 바라봤다.

차라리 화나 분노에 차서 그런 얘기를 짓씹듯 내뱉으면 같이 욕이라도 해 줄 텐데, 엘은 그저 덤덤하게 맞는 사실을 얘기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엘, 그런 건 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한 말이니까 잊어버려요. 그렇다고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건 절대 아닐 거예요. 분명 엘의 부모님도 엘을 계속 찾았을 거고…….”

위로도 안 될 내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그렇게 말해 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엘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져 내가 괜히 울컥했다.

이전에는 부모님의 사랑을 느낄 새도 없이 그분들이 돌아가셨기에, 내가 머리가 크고 나서야 알게 된 부모님의 사랑은 메이스프릴 백작과 백작 부인의 마음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나를 그 정도로 믿어 주고 생각해 주며 챙겨 주는 사람들. 잘못 넘어져 몇 주간 깨어나지 않은 딸을 고통스러울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지켜봐 준 사람들.

만약 내가 없어진다면 그들은 내 생각 이상으로 나를 찾으러 다닐 것이다. 모든 부모가 그렇지 않을까.

나는 울렁거려 오는 가슴을 누르며 엘이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너는 분명 사랑받았을 것이라고 몇 번이나 얘기해 줬다.

*

알지도 못하는 기사님이 또 언제 오느냐고 매일같이 묻던 엘의 기대와 달리 또 에스티안은 며칠간 오지 않았다. 사실은 엘의 기대가 아니고 나의 기대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제멋대로잖아!

불처럼 타올랐다가 얼음처럼 식었다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내 마음도 며칠간 지속됐다. 마음이 좀 얼어붙었나, 이제는 나도 에스티안이 대외적으로 보이는 얼음 같은 제법 차가운 얼굴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무렵, 그 얼음은 의외의 편지에 의해 깨졌다.

<편지가 늦어서 미안해. 그동안 몸이 좋지 않았어. 그때 일은 내가 더 미안해. 나도 모르게 너한테 섭섭해서 그랬나 봐. 다른 영애들에게 네 험담을 한 건 절대 아니야. 믿어 줘.>

리아나 얘가 끝까지! 내가 다 들었다고 말했는데도……!

아, 그래도 일단 계속 읽어 보자.

<나는 용기도 없고 숫기도 없어서 항상 네가 해 주는 대로 따라 하고 너만 믿고 쫓아다녔는데, 그게 너한테 부담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이제야 했어. 미안하고 고마워.>

철 좀 들었나. 답장이 안 오던 기간은 나름대로 고민하고 생각했던 건가?

<하지만 사실 혼자 사교계에 나서는 건 많이 무서워. 염치없지만 델이 조금만 더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래도 앞으로는 노력할게. 그래서 말인데, 다음 주에 가면무도회 같이 안 갈래? 나네트 후작 부인께서 후작저 내 가장 큰 홀에서 여는 거야. 가면 모양이나 드레스에 제한도 없고, 그저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가면과 가발을 쓰기만 하면 된대. ……(중략)……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을 대한다니,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너와 가고 싶어, 델. 이번에는 드레스나 가면도 함께 맞추러 가지 않아도 돼. 대신 어떤 게 나한테 어울릴지 편지로 알려 줄 수 있을까?>

철은 무슨, 역시나 싶은 편지였지만 리아나 스스로 정말로 노력을 하려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런데 편지로 그런 걸 알려 주는 것보다 차라리 한번 같이 가서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하지만 리아나가 이 정도로 애쓰고 있으니 거기에 나도 응해 줘야 하는 건 당연했다. 자식, 귀엽네.

나는 곧장 안나에게 리아나와 사이가 다시 좋아진 것 같다고 즐겁게 얘기하고는 가장 화사한 꽃 그림이 그려진 편지지를 건네받았다.

<그래, 같이 가자. 네가 많이 고민한 것 같아 나도 미안하고 고마워. 네가 노력하는 것만큼 나도 얼마든지 도와줄게. 리아나, 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은…….>

여리고 고운 머릿결과 몽환적인 회청색 눈을 떠올리며 나는 열심히 그녀에게 어울릴 법한 것을 적었다. 드레스 색은 어떠면 좋겠고, 장식은 어떠면 좋겠고, 액세서리는 어느 정도로 어떤 모양으로 하면 좋겠고 등등.

사실 리아나는 정말 예뻐서 뭘 걸쳐도 아름답겠지만, 저번에 그런 식으로 얘기했다가 사달이 났기에 최대한 꼼꼼하게 적으려 했다.

가면은 이왕이면 아름다운 눈에 어울리게 푸른색으로 하되, 반짝거리고 화려해도 예쁠 것 같다고까지 적고 나니 제법 글이 길어졌다.

원체 이런 거에 익숙하지 않아 떠올리며 쓰는 것 자체로도 머리에 쥐가 나는 느낌이었지만,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라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이제 문제는 내 옷차림과 내 가면이구나…….

남에게 신경 쓰고 났더니 역시 모든 에너지가 소진됐다. 어차피 서로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춤추고 하는 거라면 아무거나 걸치고 가도 되는 게 아닌가?

그때 드레스 살롱에서 주인이 추천해 줬던 게 다 마음에 들었으니 이번에도 그녀를 믿으면 될 것 같았다. 살롱의 그녀를 찾아가 가면무도회 느낌만 설명하면 어떻게든 해 주지 않을까?

“제가 함께 가서 봐 드리고 싶은데, 아마 저는 아가씨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목욕과 마사지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시내에 있는 드레스 살롱에는 안나 대신 다른 시녀가 함께 가게 되었다. 원래는 쥴까지 함께 가는 게 맞지만, 공교롭게도 오늘 쥴은 황궁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훈련에 참가한 상태였다.

보통은 저택 내 상주하는 다른 기사를 데려가야 하지만, 기사를 데려가 드레스를 고르는 내내 살롱 안에 가만히 세워 두는 것이 너무 민망했다.

드레스를 고르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몰라 바깥에 서 있게 할 수도 없으니. 흥미도 없을 텐데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그래서 어차피 마차에서 곧장 내려 드레스 살롱 안으로 톡 들어가고, 옷을 산 다음에는 또 마차로 다시 톡 올라탈 것이므로 이번에는 기사를 대동하지 않았다.

“저번에 오셨던 영애시군요.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네, 그렇게 됐어요. 아, 혹시 오해하실까 봐. 그때 왔던 친구랑 싸운 거 아니고, 이번에는 그냥 따로 온 거예요. 혹시 그 친구가 여기서 드레스를 맞춘다면, 그것도 잘 좀 부탁드려요.”

“어머, 따뜻하셔라.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이번에 준비하시려는 게 혹시 나네트 후작 부인의 가면무도회를 위한 건가요?”

“어, 벌써 아시네요. 맞아요. 유명한가요?”

“그럼요. 나네트 후작 부인이 워낙 재미있는 파티를 좋아해서 자주 열기도 하고, 이미 소식을 발 빠르게 접한 영애들께서 드레스와 가면을 많이 맞춰 가셨지요.”

“와, 벌써요…….”

하긴, 이번에도 무도회까지는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살롱의 주인과 조금 더 얘기를 나누다가 금방 드레스와 액세서리, 가면에 대해 이것저것 추천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나는 머리 색이 가장 튀어서 가면 크기도 커야 했고, 머리통도 다른 색의 가발로 전부 덮는 형태여야 했다.

“이렇게 고운 적색 머리를 다 덮어야 한다니 너무 안타까워요.”

“뭐, 그러려고 열리는 무도회 아닌가요.”

“호호, 그렇지요. 많은 영애들이 아가씨의 머리 색 같은 적색빛 가발을 주문했답니다.” 

“우아…… 저도 그냥 가발인 척 제 머리로 있을까요?”

“음, 진짜 머리와 가발은 아무래도 차이가 많이 나서 티가 날 텐데요. 아가씨는 쓰셔야 할 거예요.”

결국 나는 흔한 금발의 올림머리 가발과 녹색의 깃털과 보석이 가득 박힌 가면을 맞추겠다고 했다.

녹색 가면은 오히려 눈 색과 비슷하게 해서, 그냥 눈 구멍으로 보이는 부분부터 얼굴 전체적으로 눈에 잘 띄지 않도록 하려는 거였다.

드레스도 화려하거나 튀지 않고, 그저 몸의 선에 맞게 적당히 붙어 딱 떨어지는 스타일로 골랐다. 장식도 달려 있지 않고 그저 원단 자체에 수놓여 있는 문양이 전부였다.

금방 나갈 테니 무난했으면 싶었고, 움직이는 데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좀 편했으면 해서였다.

“다른 영애들이 맞춘 것들에 비해 아주 차분하고 평범하네요. 물론 아가씨께는 정말 잘 어울려요. 그런데 이래서 오히려 눈에 띌 수도 있겠는걸요?”

“에이, 아닐 거예요.”

그녀가 권하는 대로 다 좋다고 하니 모든 건 금방 정해졌다. 물건들도 며칠 안이면 전부 저택으로 보내 줄 수 있다고 했다.

감사 인사를 다시 한번 전한 뒤 나는 살롱을 빠져나왔다. 남이 해 주는 대로 가만히 수긍만 했는데도 계속 서서 구경하느라 에너지를 쓰긴 썼는지 몸이 뻐근했다.

길가에 마차를 계속 세워 둘 수 없어 마부가 잠시 이동한 상태였기에, 나는 시녀와 잠시 살롱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저택 가면 바로 마사지 좀 받고, 또 차나 마시다가 정원에서 엘과 수다나 떨어야지, 생각하며 의미 없이 구두 앞코를 땅에 톡톡 치고 있을 때였다. 살롱 뒤쪽 골목에서 무언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겠다니까? 대체 어디로 간 거냐고.”

“엘 그년이 처음에…… 받아 왔을 때…….”

“그래, 애초에 그렇게…….”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엘이라고 하지 않았나?

엘 자체가 흔한 이름이긴 하지만, 그 아이가 거리에서 지냈던 걸 떠올려 보면 왠지 저게 내가 아는 그 엘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녀의 시선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몸을 살짝 틀고 걸음을 살금살금 티 나지 않게 옮기며 그들이 뭐라고 하는 건지 더 듣기 위해 그 뒷골목 쪽으로 갔다.

“귀족을 하나 문 거 같다니까?”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사라지는 게 말이 안 되지. 아, 진작에 더 갖고 놀았어야 했나? 엘은 확실히 얼굴이 반반하잖아.”

“하지만 어차피 거리의 계집인데. 귀족이 데려갔다고 해도 금방 다시 버려질걸? 원래 그런 식이잖아.”

“그러면 다시 여기로 오겠지? 분명 갈 데가 없을 테니까. 그럼 그때야말로 엘 그 계집애를 더 괴롭혀 줘야겠구만.”

“비쩍 마른 주제에 제법 몸이 성숙해지더란 말이야? 아, 하필 딱 지금 사라져서는. 그년도 참.”

가래침을 거칠게 뱉는 소리와 더럽게 혀를 낼름거리는 소리가 아주 크게 났다.

낄낄대는 웃음 속에서 확실히 엘이라는 이름을 여러 번 들었고, 정황상 내가 아는 엘이 맞는 듯했다.

추악한 얘기들을 듣고 있으니 절로 이를 악물게 됐다.

저런 쓰레기 같은 놈들이 거리에 진짜 있구나. 치안대를 부르면 되나? 부른다고 해결이 되는 건가? 이래 봬도 내가 백작가 영애긴 하니까 그 힘으로는 저들을 어떻게 할 수 없나?

아, 쥴이라도 있었으면 호기롭게 덤볐을 텐데.

하지만 기껏해야 시녀 하나 데리고 마차나 기다리는 내 입장에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나았다.

그래도 너무 화가 나는데. 분명 엘에게 부모님 험담을 하고 때리고 한 것도 다 저들 짓일 게 뻔했다.

눈 딱 감고 가서 한 마디 한 다음 곧장 마차를 타고 도망쳐 버려? 어차피 쫓아오지는 못할 테니까…….

열심히 머릿속을 굴리자 절로 꽉 쥔 주먹이며 어깨가 벌벌 떨렸다.

그렇게 움찔거리며 무의식중에 발이 한 걸음 나가려던 찰나, 어깨와 내 주먹 위로 크고 따뜻하게 내려앉는 손길이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위험하게.”

“헉, 에스티안 경?”

그는 어느새 내 어깨와 주먹을 잡아끌고는 골목에서 적당히 멀어지도록 했다. 힘이 강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이끄는 손이 왠지 뜨거워서 조용히 따라야 할 것 같았다.

너무나 뜬금없는 등장이라 시녀는 깜짝 놀라 인사도 잊고 옆으로 비켜 선 채 그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눈짓으로 에스티안과 잠시 얘기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고, 시녀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 안녕하세요.”

이렇게 시내에서 마주친 경우는 이전에 리아나와 다퉜을 때 말고는 없었기에 나는 세상 어색한 인사를 건네고는 굳어 버렸다.

저택 내 정원에서 편안하게 보는 것과는 또 너무 달랐다. 거긴 일단 우리 집이기도 하고, 앉아 있었고, 에스티안이 찾아온 거였고…….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나?”

“아, 아뇨. 그냥 에스티안 경을 여기서 마주칠 줄 몰라서, 좀 놀라서, 그래서…….”

“위험한 쪽을 향해 서 있었잖아. 내가 안 봤으면 어쩌려고 한 거야.”

“그러게요……. 감사합니다.”

얼빠진 내 반응에 에스티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에스티안은 공작가의 자제이자 황실기사단장이니까 뒷골목의 왈패 정도는 어떻게든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권력이나 법 같은 걸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

“저, 뭐 하나만 여쭤보고 싶은데요, 에스티안 경.”

그는 대답도 안 하고 그저 나를 쳐다봤다. 물론 이어서 계속 말해 보라는 표정이긴 했다.

짙푸른 눈을 한참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 것 같아 헙 다물고는 조심스럽게 아까의 상황을 전했다. 물론 엘 얘기까지 하기엔 너무 오래 걸리고 귀찮을 것 같아서 간추려 전하기로 했다.

“골목에 왈패들이 있었는데, 뭐랄까…… 좀 듣기에 좋지 못한 얘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라고요.”

“그대한테 그랬나?”

헉. 순간적으로 에스티안의 눈에서 또 온도 높은 푸른 불꽃이 확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주변 공기도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이게 기사들이 내뿜는 살기인가? 뭔가 묘하게 다른데.

하지만 이런 거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허리춤에 있는 작은 검집엔 이미 그의 손이 닿아 있는 상태였다.

나는 깜짝 놀라 자동적으로 검집 위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역시 손등까지 뜨거운 걸 보니 화가 났구나.

“아뇨, 아뇨. 아니에요. 그냥 욕 같은 걸 하고 있길래,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도 좀 싫겠다 싶어서요.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에스티안 경에게 그자들을 때려 달라는 얘기가 아니니까 마음 가라앉히세요.”

에스티안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뜨더니 또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어딘가 표정이 너무 냉정해 보여서 이런 거 괜히 얘기하나 싶은데…… 그래도 말은 해 봐야지.

“염치없는 부탁이겠지만, 저런 왈패들을 황실 측에서 어떻게 처리해 주실 수 없나 해서요. 뭐, 그냥 거리에서 저렇게 위협적으로 굴지 않게 제재를 가한다든가 해서…….”

“황실기사단장의 이름을 걸고 그들을 강력하게 잡아들여 거리에 얼씬도 못 하게 하지.”

“헛, 감사합니다.”

그렇게 한 번에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일인가?

에스티안이 너무나 확신에 찬 어조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기에 나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을 그렇게 말하고 나니 또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시선을 아래로 하고 있다가 천천히 올렸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보지 않았는데, 에스티안은 이번에도 기사단장 정복이 아닌 간편한 셔츠 차림이었다. 또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기도 하고.

이런 경우마다 그는 여색을 취하고 온 게 아니었던가?

아무리 우연이라 해도 뒷골목 가까이에 있던 나를 한 번에 발견한 것도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갔다.

그 뒷골목 근처에는 여색을 즐기도록 해 둔 술집들이 즐비해 있으니까. 이번에도 거길 거쳐 온 것일 터였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안 좋아져 입술이 튀어나왔다.

아주 시도 때도 없이 나다니는구만. 그러면서도 나를 참 잘도 발견했고. 대단한 바람둥이 나셨다.

사실은 내가 끼워 넣은 설정이니 뭘 탓할 수도 없는 게 맞지만, 그래도 괜히 서운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간 에스티안이 보여 줬던 행동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 어디에서나 그런 행동을 보이는 거라면 차라리 나에게는 아예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고개를 들어 에스티안을 쳐다보는 시선이 곱지 않게 나갔다. 미간에 힘이 들어간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

“거리의 양아치들에게 더 큰 처벌을 내려 주길 원하는 건가? 그대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어.”

“네?”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이기에.”

“아뇨, 아니에요. 아니에요…….”

말도 자기 멋대로 존댓말 썼다가 이렇게 짧아졌다가 마음대로고. 그러면서 하나하나 신경을 쓰기는 써 주고.

“왜 그래.”

갑자기 저렇게 애매한 미소나 짓고 말이야.

“……아니에요.”

다시 눈을 내리깐 나는 시녀와 마차가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얘기를 하고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아델린, 그대는 여전히 기사처럼 말하는군.”

에스티안은 픽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편 반동으로 흐트러진 내 머리를 천천히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정리했다.

머리카락만 건드리나 싶어 가만히 있었더니, 어느새 그는 확 내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야! 왜 이래, 갑자기!

내가 떤 탓인지 곧게 마주한 그의 푸른 눈이 일렁이는 듯 보였다. 나만 형편없이 떨고 있는 게 맞구나.

그는 나를 잠시 똑바로 쳐다보다가 자신의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댔다. 여전히 시선은 내게 고정된 채였고, 당연히 그가 갖는 특유의 숲 향 같은 게 훅 코로 밀려들어 왔다.

“열도 없는데 좀 멍한 것 같아.”

그래, 이놈의 스킨십도 매번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만 속 타지.

한순간에 물이 끓어오르듯 나는 마음속에서 무언가 확 터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내 허튼소리로 인해 그가 바람둥이가 된 것에 대한 죄책감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그건 차치하고, 그냥 나는 그가 내게 하는 모든 행동들을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숨이 너무 크게 새어 나올 것 같아 숨을 속으로 삼킨 나는 몸을 뒤로 빼 그에게서 떨어졌다.

“저는 살롱에 잠깐 들렀던 거였는데, 에스티안 경은 시내까지 무슨 일로 나오신 거였어요?”

갑자기 거리를 두고 다짜고짜 묻는 내 말에 살짝 당황한 듯한 에스티안은 손으로 뒷목을 슬쩍 주물렀다.

“볼일이 있었어. 여기저기 좀 찾아갈 데가 있었거든.” 

“아아, 볼일. 걸어 나오신 건 아닐 것 같고, 말은 어디에 매어 두신 거예요?”

“광장 근처 숲길 들어가기 전 구석 쪽에 무기점이 있어. 말들을 보통 매어 두는 공터도 거기 있어서 그쪽에 부탁해 놓았어.”

갑자기 이상한 걸 묻는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에스티안은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숲길 쪽 무기점이라니 말 다했네.

그쪽도 이 살롱 근처 뒷골목 못지않게 술집들이 밀집되어 발달한 곳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 근처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그런 게 보인다는 게 너무 어이없어서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시네. 거기 들렀다가 여기까지 오고.

대낮부터 그러고 다니진 않았을 테니 그는 분명 짧은 시간 안에 시내를 오간 것일 터였다.

이거 뭐, 대단하다고 칭찬해 줘야 하나? 힘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무의식중에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삐져나온 옆머리를 꾹 잡았다. 휙 넘겨 버리려 했지만 생각이 거듭될수록 행동이 굼떠져서 그런 채로 잠시 있었다.

어쩌면 내가 잡고 싶은 건 저 깔끔한 에스티안의 머리일지도 모르겠다.

“아델린, 왜 그러는 거야.”

그 와중에 그는 머리를 거칠게 잡고 있던 내 손을 붙잡아 천천히 내리고는 직접 머리를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이놈의 손길! 한없이 다정하게 느껴지는 이 손길!

이마에 스치는 손가락으로부터 뜨거움이 전해지고 그 움직임에 간지러움까지 느껴지자 나는 절로 아랫입술을 꾹 물게 되었다.

그러자 곧 그의 손이 내려와 내 아랫입술을 살짝 눌렀다. 멍청하게 입술이 열렸다. 게다가 입술을 뜯어 놔서, 거기에 따뜻한 그의 손가락이 닿자 따끔했다.

“아까부터 입술을 왜 그렇게 뜯어. 피 나잖아.”

입술이 따끔한 건지 마음이 따끔한 건지.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욱해서 낮게 속삭이듯 숨과 함께 말을 뱉어 버렸다.

“에스티안 경, 작작 좀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뭐?”

여태까지 들은 에스티안의 목소리 중 가장 높고 크게 난 게 아닐까?

그는 내 머리를 만지던 손을 허공에서 멈추더니 아주 얼빠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항상 나만 멍청한 얼굴로 그를 본다고 생각했는데, 늘 냉정하고 차가워만 보이던 얼굴이 저렇게 흐트러지니 묘한 쾌감이 이는구나!

“무슨 말이야.”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는 진짜 시녀와 마부가 기다리고 있어서 가야 할 것 같아요. 에스티안 경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나는 말을 쏘아붙이다시피 내뱉곤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내가 고개를 다시 들고 몸을 돌리는 순간까지 그는, 무언가 당황한 듯 흔들리는 눈빛을 내게서 떼지 않았다.

분명히 그건 여태까지의 내가 보아 온 에스티안의 얼굴이 아니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아니, 자기가 왜 그런 얼굴을 해? 흔든 건 자기면서.

나는 침착하게 대화가 길어져 늦은 것에 대해 사과한 뒤 마차 문을 열고 타 몸을 뒤로 깊숙이 묻었다.

내 말에 이렇다 할 반응도 보이지 않고 당황하던 그의 얼굴이 계속 떠올라 괜한 말을 했나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나아가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설레거나 두근거리기만 하는 나를 우습게 보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저택으로 와서도 차가운 차를 벌컥벌컥 몇 번이나 마신 뒤에야 형체 없이 부풀었다 꺼진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후 정원을 뛰듯이 서너 바퀴 돈 다음 마사지까지 받고 나자 지친 몸을 뉘어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나름대로 화가 난 상태였기에 그렇게 난리를 떨었는데도 정작 잠이 든 시간은 아주 늦었다.

그래서 푹 자고 평소보다도 좀 더 늦게 일어나야지, 했으나 내 바람은 이른 아침부터 깨져 버렸다. 잠이 들다가 깬 건지 몽롱한 와중에도 헛웃음 나오는 말은 귀에 잘도 박혔다.

“아가씨, 에스티안 블라머프 황실기사단장님께서 오늘 저녁 방문을 요청하셨어요. 평소처럼 티타임을 가졌으면 하신답니다.”

“어, 음. 오늘은 바쁜 일이 있어서 못 뵐 것 같다고 전해 주세요.”

“그게, 기사단장님께서 꼭 덧붙이라고 하신 말이, 혹시라도 아가씨께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방문을 거절하시려고 해도 오늘은 그 거절을 거절하실 거라고…….”

“…….”

“황실에서 중요한 전달 사항을 받았기 때문에 꼭 티타임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어요.”

“하하하…….”

“마치 아가씨가 거절할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셔서 의아했는데 정말이셨네요. 황궁에서 무언가 귀족들에게 전할 사항이 있다는 얘기는 아직 없었는데.”

당연히 없겠지, 저건 분명 핑계일 테니까!

설마 또 저택으로 이전처럼 찾아오겠나 싶었는데 일이 있고 바로 다음 날 온다고 할 줄이야. 게다가 피하지도 못하도록 설계를 해 놓은 탓에 나는 빼도 박도 못하고 그를 또 마주하게 생겼다.

어제 말을 그렇게 던지듯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순간적으로 치밀었던 분노와 더불어, 당분간은 안 볼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리고 내 말을 들은 그의 표정을 보고 더욱 그걸 확신했는데.

잠도 다 달아난 나는 포기한 채 에스티안이 오기 전까지만이라도 좀 평화를 누리고자 정원으로 나갔다.

“아가씨! 오늘 일찍 일어나셨네요!”

정원사를 도와 나무 잔가지를 제거하며 낙엽을 치우고 있던 엘이 쪼르르 달려왔다.

엘을 보자마자 어제 거리에서 쓰레기 같은 말을 지껄이던 놈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파진 나는 곧장 엘을 끌어안았다.

“어어, 저 흙 엄청 묻어서 옷이고 손이고 다 더러워요!”

“아니에요. 깨끗해요.”

엘은 내 말에 배시시 웃더니 지금은 일을 해야 한다며 다시 저쪽으로 뛰어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테이블 자리에 앉아 뜨거운 차와 함께 책을 읽으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물론 머릿속은 이미 에스티안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긴커녕 차의 향도 즐길 수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이건 휴식이다, 생각할 뿐이었다.

점심시간쯤 되자 엘은 다시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엘을 앉히고 차와 디저트 몇 종류를 놔주었다.

“아델린 아가씨, 아침부터 좀 멍해 보여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저 아이한테까지 내가 정신 빠진 걸 들킬 정도면 에스티안이 보기에는 더 웃기겠구나. 그렇게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웃었다.

“전혀요. 완전 튼튼하죠. 오전에 일 잘 했어요? 힘들진 않았어요?”

“네! 오늘은 꽃 다듬고 심는 걸 했는데, 제가 이것저것 꽃을 많이 안다고 해 주셔서 좋았어요. 잘 알수록 관리도 잘할 수 있다고 정원사 할아버지가 그랬거든요. 제가 여기 있는 게 이왕이면 아가씨께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니까요.”

“그런 생각 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무조건 편하게. 꽃이랑 나무 좋아하는 평소 같은 마음이면 충분해요. 가시에 찔리거나 벌레에 물리지 않게 조심하고요. 그런 일 생기면 바로 얘기해요.”

착하고 귀여운 엘이 여러 가지 오늘 한 일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으며 대화하는데, 어쩌다 보니 대화 소재가 저녁때의 정원으로 옮겨 갔다.

저녁때는 정원의 나무나 수풀이 너무 무성하게 우거져 지나치게 어두컴컴하지 않게 군데군데 불이 날 위험이 없을 정도로만 등불을 매달아 놓는다.

“어젯밤 우연히 봤는데 너무 예뻤어요. 저번에 말씀드린 아리사 꽃 있잖아요. 그건 사실 햇빛이 없을 때 더 꽃이 활짝 피거든요. 그리고 어두울 때 보면 약간 반짝거리기도 해요. 화단 구석에 핀 아리사 꽃이랑 등불이랑 전부 너무 예쁘게 어울렸어요!”

그놈의 꽃이 저택 화단에도 있었구나. 그리고 해가 져야 더 활짝 피는 꽃이라니. 어스름할 무렵마다 나를 찾아오는 에스티안 생각이 또 불쑥 났다.

그를 정원에서 볼 때마다 분명 정원에는 등불도 켜져 있고, 꽃도 피어 있었을 테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거라곤 차를 마시면서도 늘 나에게 고정되어 있던 그의 눈길 정도였다.

그리고 기사 특유의 마디가 굵고 굳은살이 박인, 그러면서도 참 크고 길며 고왔던 손이 찻잔을 들어 올리는 모습 같은 것.

나도 정말 큰일이다 싶어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고는 엘에게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엘, 그때 엘이 물어봤던 기사님 있잖아요. 그분이 이따 저녁때 또 오신대요.”

“우와, 정말요? 역시 그분은 아가씨가 보고 싶어서 오시는 거라니까요!”

“하하…… 그런 걸까요?”

“그럼요!”

저는 궁금해도 물론 아직 무서워서 숨겠지만요, 하고 엘은 덧붙였다.

엘의 얘길 듣다 보면 티 없이 밝아서 기분이 좋다가도 이 아이가 지내 온 눈물 나는 상황들에 가슴이 턱턱 막혀 왔다.

왠지 에스티안과 같이 만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든든하게 왈패들을 없애 주겠다고 약속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에스티안은 사실 보이는 것처럼 냉정하거나 차가운 것만은 아니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엘의 손을 꼭 붙잡았다.

“엘이 괜찮아졌을 때, 궁금하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엘만 괜찮다면 같이 만나도 좋을 것 같아요.”

“나중에라도 그러면 좋겠어요. 덜 무서워지면 꼭 얘기할게요. 아가씨가 말하시는 거 보니까 그 기사님, 되게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

“네? 에이…… 아닐걸요.”

확신을 가득 담은 엘의 푸른 눈과 입가에 스민 미소는 어딘가 언니 같은 모습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네 마음 다 안다, 뭐 이런 느낌의 얼굴이었다.

하긴, 결국 에스티안에 대한 내 생각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나.

그 맑은 얼굴에 대고 마땅히 할 말이나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그저 시선을 돌리고 차를 마셔야 했다.

얼마 안 있어 엘은 다시 일을 하러 갔고, 나는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그리고 해가 거의 지고 노을빛만 남은 시간, 에스티안은 아침부터 알렸던 대로 정원을 방문했다.

시녀의 안내를 받아 정원으로 저벅저벅 들어오는 그는 기사단장 제복 차림이었다.

오늘은 정말로 근무 마치고 왔나 보네. 오늘도 그가 피곤해 보였기에, 나는 시녀에게 이번에도 피로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차를 내오게 했다.

그리고 당연히, 에스티안은 큰 미동 없이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말은 한 마디도 없었지만 시선은 여러 차례 나를 향했다.

푸르다 못해 밤기운에 어두운 느낌까지 드는 그 눈빛을 침묵 속에서 받고 있자니 좀이 쑤셔 왔다. 자기가 오겠다고 한 데다 거절도 못 하게 해서 억지로 받아들였더니 말은 없고 저러고 있으니…….

나는 태연한 척 눈을 굴리다 입을 뗐다.

“에스티안 경, 황실에서 전달해 주신다던 중요한 얘기가 뭔가요?”

그리고 들려오는 즉답에 나는 입이 다물었다.

“그런 건 없습니다. 그대를 보러 온 겁니다, 아델린. 이렇게 안 하면 분명 피했을 테니까.”

빈 찻잔을 내려놓은 뒤 에스티안은 시선을 잠시 아래로 했다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무언가 얘기할 것 같아 나는 계속 조용히 있었다.

“소문 때문에 그런 거라 생각합니다만.”

“어…… 어떤 소문이요?”

“제가 여자를 몹시 좋아하고, 그래서 매일 여자가 시중을 드는 술집을 드나드는 등 황실의 안팎을 가리지 않고 방탕한 짓을 한다는 소문 말입니다.”

“헙……! 아니…… 그…… 어휴.”

“더 있지 않습니까. 밤낮없이 이 골목 저 골목을 몇십 군데나 돌아다니고 난잡하게…….”

너무도 신랄한 말에 나는 말도 안 나오고 입도 바짝바짝 말랐다. 그는 이런 건 별거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 눈빛이나 입매에서 허탈함, 모든 것을 놓아 버린 것 같은 아득함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위로의 말이 기어가듯 흘러나왔다.

“저, 그만, 그만 말씀하셔도 돼요.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도 힘드실 테니까…….”

에스티안은 내 말에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가 픽 웃었다.

갑자기 뭐지? 극심한 자기 객관화 같은 건가? 자신에 대한 소문이 저렇게 나 있다는 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다 알고 있잖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네?”

“에란티아 블라머프. 9년 전 잃어버린 여동생입니다.”

“아……?”

“황실기사단에 들어간 것도, 여동생을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아…….”

“실력과 지위가 갖춰진 뒤부터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습니다.”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는 게 바로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그런 장소들일 터였다.

공작가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랐을 어린 여자아이의 행방을 찾기에 사실 그런 장소들은 적당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건 반대로 어딜 뒤져도 찾을 수 없었기에 ‘그런 곳들’까지도 샅샅이 뒤져야 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는 건, 아직도 여동생을 찾지 못했단 얘기겠지.

에스티안의 말에 따르면 그뿐만 아니라 블라머프 공작가 전체가 여동생을 계속 찾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눈빛에 흔들림이나 의심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이제는 여기에 익숙해졌지만, 과거 내가 살던 세상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내가 키웠던 강아지를 생각해 냈다.

산책 나가는 것 빼고는 늘 같이 집 안에 처박혀 자기 배만 만져 대는 주인이라도 최고라며 나만을 위한 애교를 떨던 사랑스러운 녀석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었다.

순전히 내 실수로 녀석이 사라지자 눈앞이 노래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똑똑한 녀석은 반나절 만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처가 많이 난 채로 다시 집 앞으로 왔다.

금방 찾게 되어 천만다행이었지만 그 반나절은 내게 없는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아직도 정신이 나가 있던 그 반나절의 기억이 별로 없다. 이후에 한동안 나는 목줄을 매고도 무서워 녀석을 안고 다녔다.

그런데 하물며 9년을, 동생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치솟아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에스티안은 내 손을 자신의 손으로 살짝 감쌌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에스티안과 눈을 정확히 마주친 순간, 아주 큰 의문이 들어 인상을 찌푸렸다.

잃어버린 가족을 몇 년째 못 찾고 있는 상황도 암담할 텐데 자신에 대한 그런 질 낮은 소문이라니. 내 속이 다 타 버리는 듯했다.

“아니, 그러면 왜 소문을 바로잡지 않으시는 거예요? 에스티안 경에 대한 그 나쁜…….”

“그녀를 찾을 때까진 계속 이렇게 다녀야 할 테니까요.”

“허…….”

“그리고 이미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 있지 않습니까.”

에스티안은 아까부터 정말로 이게 뭐가 문제냐는 듯 무덤덤하게 얘기했지만, 표정 뒤편이나 말투의 이면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문득 이전 황실 무도회에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는 것만큼 번거로운 게 없지요. 그러니 미리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바로잡은 거라면, 잘하셨습니다.’

그때 에스티안은 자기 얘기를 했던 거구나.

분명 주위 시선이나 헛된 얘기들이 그도 치 떨릴 만큼 싫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싫어하던 마음조차 포기하고 흘려보내게 되기까지도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지금도 소문을 대수롭지 않게 느끼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에스티안 경이 감정을 능숙하게 절제할 수 있는 기사라 해도, 아닌 건 아닌 거잖아요.”

감정이 북받친 탓인지 눈가와 광대뼈 쪽에도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겨우 목소리를 짜내 말한 내게 에스티안은 너무도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히 내 손은 그에게 부드럽게 잡혀 있는 채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닌 건 아닌 거라서, 이런 얘기까지 아델린 그대에게 하게 되는군요.”

“네? 어떤……?”

“저는, 여자를 사귄 적도, 관계를 가진 적도, 건전하지 못한 장소에서 여색을 취한 적도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로지 에란티아를 찾기 위해 여러 장소를 찾으러 다닌 것뿐이었습니다.”

“네……?”

“소문 같은 건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대에게는 말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에스티안은 슬쩍 웃으며 내 손을 잡았던 손을 떼더니 차를 다시 마셨다.

그래서, 에스티안도 나처럼 모태솔로라 이거야?!

무슨 얘길 들은 건지 어안이 벙벙해 입만 벌리고 있던 내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웃기게도 저거였다.

저 차가운 얼굴에 냉정한 성미…… 아니지, 생각해 보면 냉정한 성미도 아니지.

하여간 그런 그가 모태솔로였다니. 그리고 그걸 저렇게 당당하게 얘기하다니.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지만 극기로 참았다.

그리고 그 후 곧장 찾아든 감정은 두근거림이었다.

여태까지 에스티안이 내게 보인 행동이나 말을, 능수능란한 사람의 그저 그런 찔러 보기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것이었다고 생각해도 될 거라는 기대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아까부터 얼굴에 열이 올라 빨개진 것 같은데 에스티안은 근사하게 웃고 있을 뿐 얼굴색에 변화도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이 두근거림에 비참함이나 의구심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닌가?

“다행이다…….”

무의식중에 나온 내 말에 에스티안은 어딘가 당황한 듯한 얼굴을 했지만, 나는 거기에 미처 왜 그러느냐고 물을 새가 없었다. 그다음으로 곧장 죄책감이라는 아주 근본적인 감정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괜히 친구 소설 쓰는 데 옆에서 허튼소리를 했기 때문에 에스티안은 이렇게 힘겹게 지내 온 셈이니까.

내가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은 그에게 아주 무거운 족쇄가 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자기한테 도는 소문을 본인도 알면서 묵묵히 견디고,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타는 마음으로 동생을 찾으면서.

그럼에도 에스티안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폭주해 버리지 않고 살아온 것을 생각하니.

“정말 다행이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이번에는 내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에스티안은 아까보다도 더 놀란 얼굴을 하고는 숨을 들이켰다.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소문도, 동생을 찾는 일도…… 정말 너무 고생하셨어요. 저도 뭐든 알게 되면 알려 드릴게요. 도울 수 있으면 도울게요.”

“……앞으로 더욱 자주 뵙게 되겠군요. 좋습니다.”

에스티안은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전해져 오는 뜨거움과 좋다고 하는 저 말이 동생을 찾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이미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저 에스티안의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모든 마음이 열린 기분이었다.

“앞으로는 말을 정말로 편하게 할 거야. 아델린 그대도 그렇게 해 주면 좋겠는데.”

저택을 떠나기 전 에스티안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이고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이렇게 홀릴 것 같은데 말까지 편하게 한다면…….

나는 너무 편해지면 아무렇게나 살아 버리고 타인도 그렇게 대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건 안 될 것 같았기에 그저 허허 웃었다. 에스티안도 낮게 웃고는 내 손을 한 번 꽉 잡아 준 다음 말을 타고 떠났다.

손에서 또 열이 나는 듯해 몽롱한 상태로 방에 돌아왔다.

어느새 안나가 정원 테이블을 싹 치우고 침대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목욕물이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하며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안나는 내 옷을 받아 들더니 정리하며 흘리듯 물었다.

“그래서, 아가씨. 기사단장님이 전해 온 건 황실의 중요한 얘기던가요?”

“……네, 엄청 중요한 얘기였어요.”

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저 시중을 들었다. 달콤한 향이 나는 비눗물 안에 머리끝까지 담근 채 긴 목욕을 했고, 어제와 달리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

그 뒤 며칠간은 가면무도회 준비를 나름대로 하면서 보냈다. 춤도 좀 배웠고, 드레스도 좀 더 잘 잡고 우아하게 걷는 연습을 했다.

내가 춤을 아예 못 추거나 백작 영애로서의 태도가 좋지 못한 건 절대 아니었고, 그저 얼굴에 무거운 가면을 쓰고 걷는 게 앞도 잘 안 보이고 어색해 자꾸 헛발질을 하거나 비틀댔기 때문이다.

하루 몇 시간씩 그렇게 수업 듣는 걸 빼면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에스티안도 한두 번 정도 더 찾아왔었다.

말은 거의 하지 않고 차만 마시다 갔던 그는, 이제 자기가 근무할 때 어땠는지, 여동생 찾느라 어딜 다녀왔는지도 잘 얘기해 줬다. 사실 얘기해 줬다기보다 그냥 말한 것에 가깝긴 했다.

내 일상은 특별할 게 없이 평탄해서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매일매일을 보내는지가 좀 궁금해 내가 이것저것 물으면 그가 대답을 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본인이 막 얘기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정말 내키지 않았다면 대꾸도 안 하지 않았을까.

이게 바로 숱하게 들어온 썸과 그린라이트라는 건가? 일단은 설레고 두근거리는 것 이전에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니까, 열심히 대화나 해 보고 그러려고 한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방문은 바로 지금 찾아온 리아나였다.

이전에 에스티안이 처음으로 찾아왔던 것만큼까진 아니어도, 분명 리아나가 올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기에 나는 꽤 당황했다.

그녀는 귀엽게도 내가 편지에 써 줬던 대로 드레스며 액세서리 등을 맞추고 제작해서는, 이대로 꾸며도 괜찮겠냐며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 그러고는 내 앞에서 이것저것 입어 보며 꼼꼼히 물었다.

전체적으로 화사하고 화려한 느낌이었는데 리아나가 워낙 예쁘장해서 그 조화가 아름다웠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푸르게 반짝이는 가면 또한 그녀에게 참 잘 어울렸다.

“진짜 예쁘다, 리아나. 내가 써 줬던 것보다 네가 더 잘 소화하는 것 같아.”

“아델린. 역시 나의 델이야. 너무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뭘 입어야 할지도 몰랐을 거야. 가면무도회에 가고 싶다고만 생각하고 아무것도 못 했을지도 몰라. 정말 고마워.”

“혼자 해 보니까 많이 어렵진 않지? 이런 식으로 천천히 도와줄게.”

“응. 사실 그 가면무도회에 황태자 전하도 온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전하는 마주친다는 생각만 해도 좀 떨려서. 고마워. 앞으로도 황태자 전하가 가는 곳에는 항상 같이 가 달라고 부탁할지도 몰라.”

역시, 황태자가 오는 거였구나.

리아나는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숫기 없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았다.

그냥 영락없는 십 대 후반. 좋아하는 사람과 자꾸 마주치고 싶고 이왕이면 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데 용기가 잘 안 나는 아이일 뿐이었다.

다른 건 자기가 혼자 하도록 노력하겠지만, 황태자가 가는 곳에는 웬만하면 같이 가 달라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실 나라고 저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

매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뒤에 숨어서 지켜보던 나한테도 아델린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뭐가 좀 달랐을까? 그럼 나도 모태솔로에 건어물녀가 아니고 좀 외향적인 삶을 살았을까.

이런 고민 해서 뭐할까, 지금은 여기서 이렇게나 편하게 지내는데. 정원에서 리아나와 차를 마시며 나는 살짝 웃었다.

“그런데 델,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면 너무 심심하지 않아? 티타임이나 소설 낭독회 같은 데는 계속 참여하지 않을 거야?”

소설 낭독회라니. 마시던 차가 입 밖으로 나갈 뻔했다. 그런 것도 하는구나. 나는 겨우 차를 벌컥 다 마시고는 말했다.

“응, 조용히 지내니까 편하더라고. 그냥 저택 안에 가만히 있으면서 놀고 쉬는 거지. 그리고 생각보다 심심하지도 않아. 지금 네가 온 것처럼 손님이 오시기도 해서.”

“손님? 나 말고도 누가 다녀갔다는 얘기야? 하긴, 델 너는 원래 친구가 많아서……. 누가 다녀갔어? 기든스 백작 영애? 체이서 남작 영애인가?”

걔네는 또 누구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녀간 사람이 에스티안밖에 없다는 것에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에스티안 황실기사단장님께서 온 적 있어. 너도 알지? 황태자 전하 뵈러 갈 때마다 같이 봤잖아.”

한 손으로 꼽기 모자랄 만큼 왔었다는 말은 뺐다. 그리고 빼길 잘한 것 같았다. 이미 리아나의 눈은 잔뜩 커진 지 오래였다.

“기, 기사단장님? 아, 아아…… 그분은 매번 볼 때마다 너무 무서워서. 황태자 전하 옆에 있을 때도 무, 무서워서 쳐다볼 수가 없었어.”

에스티안은 황태자에 이어 또 다른 남자 주인공 아니었나?

뭐, 아직 좋아하는 감정까진 아니더라도, 원래 친구의 소설에서는 넷이 잘 만나서 차도 마시고 대화도 나눴다고 했던 것 같은데.

에스티안만 리아나에게 반한다는 설정인 건가? 아니면 아직 둘이 친밀하게 만날 접점이 없어서?

의아함에 고개가 슬쩍 기울었지만, 리아나의 반응이 워낙 격해 뭐라고 물을 틈도 없었다.

그녀는 에스티안을 많이 무서워하고 있던 모양인지,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렵다는 듯 얼굴이 곧바로 하얗게 질려서는 말도 잘 못했다.

뭐, 워낙 차갑게 생기긴 했지. 소문 때문에 저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소문도 다 거짓말이고, 그렇게 무서운 사람도 아닌데. 오히려 좀 무던하고 우직한 성격인 것 같은데. 이 말은 속으로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좀 무서울 수 있지.”

“그, 그런데 그분이 어떻게 델을 찾아온 거야? 그것도 저택까지…….”

“아, 그분께 내가 신세를 좀 졌거든. 뭐 받으러 오셨던 거야. 뭐 그냥 주거니 받거니…….”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니까. 리아나는 무슨 일로 신세를 졌냐고도 물었는데, 거기에다 대고 ‘너와 싸운 것에 대해 위로해 줬다, 그리고 나한테 잘했다고 해 줬다’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라 대충 얼버무렸다.

문득 다시 떠올리니 진짜로 꽤 많이 고맙잖아…….

손수건 말고 사실 내가 에스티안에게 준 건 부끄러움과 약간의 마음이 아닐까 싶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그랬구나. 나, 나는 기사단장님은 너무 무섭고, 또 그…… 소문도 너무 나빠서. 가까이 가기가 늘 어려워서.”

“그런데 그분이 황태자 전하를 개인적으로 호위할 때도 있잖아. 그럴 땐 어떡해?”

“그, 그러게……. 어떡하지……. 델, 그건 네가 어떻게 좀 해 주면 안 돼? 저택까지 찾아올 정도로 너는 그분과 가까운 거잖아. 내가 황태자 전하를 만날 때 기사단장님이 있다면, 너도 꼭 같이 가 줘. 그래서 그분과 있으면 되잖아.”

“그…… 그렇게 되나? 그래, 뭐. 응.”

벌벌 떠는 리아나가 귀여워 농담처럼 말을 던졌는데, 그녀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안절부절못하며 얘기하기에 나는 얼떨결에 대꾸를 해야 했다.

그녀는 남은 차를 한 번에 마셔 버리고는 더 있다간 감기에 걸릴 것 같다며 돌아갔다.

아무리 봐도 에스티안 얘기에 놀라고 또 무서워서 가는 것 같았지만, 그냥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었다.

그리고 정원에 남은 나의 고민이 이제 시작되었다.

리아나가 저렇게나 에스티안을 무서워하는데, 그가 황태자와 조금이라도 대등하게 리아나에게 애정을 받을 수 있나?

중간에서 내가 애매하게 리아나와 에스티안의 만남이나 감정적 교류를 막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아무리 이후에 에스티안이 리아나를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지금 상황만 보면 그건 절대 상상도 안 됐다.

이대로라면 그는 여자 주인공인 리아나로부터 애정은커녕 공포 어린 시선만 받게 되는 거 아냐?

그리고…… 에스티안이 티 내지 않고 리아나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내가 끼어든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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