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3/18)

3장

“주는 사람의 마음이자 정성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괜히 다른 걸 하지 말고 수를 놓아야겠네요. 조언 감사합니다.”

얘기는 그렇게 했지만 자수라니, 당황스러웠다.

그냥 단순한 바느질과 자수는 다르지 않은가. 그냥 비뚤게 바느질한 건 내가 쓰는 거지만 자수는 예쁘게 만들어 선물하는 거고.

그러나 더 마땅한 대안도 없고, 일단은 같은 기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충분히 믿을 만하다는 생각에 나는 곧장 시녀를 통해 수를 놓을 수 있는 실과 바늘 등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니, 이 정도로 어려운 거였나?

자수는 실을 넣었다 빼는 방법도 좀 다르고 까다로웠다.

기합까지 넣고 용맹하게 수놓기를 시작했지만, 쉴 새 없이 손가락만 찔러 대며 붕대를 감는 나를 보고 쥴은 내내 웃다가 사과하길 반복했다.

그러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별안간 얼굴을 확 굳히고는 말을 이었다.

“혹시, 에스티안 기사단장에게 드리는 겁니까?”

“네, 맞아요. 으,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으면 그냥 손수건만 전해 드리는 건데.”

잠시 말문이 막힌 듯 가만히 있던 그는 흐음, 하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에스티안 기사단장은, 하……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저로선 잘 모르겠습니다. 기사단장에게 드리는 것임을 알았다면 수놓기를 제안하진 않았을 겁니다.”

“아뇨, 쥴 경 덕분에 오히려 저는 좋은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아서 좋은데요. 생각할수록 아무것도 안 하기엔 그분께 도움을 받은 게 큰 것 같아서요. 귀족 영애의 마음가짐 같은 거죠, 뭐.”

“차라리 안나 님을 불러 드릴까요?”

“아니요. 제가 일단은 해 볼게요.”

한숨을 내쉬며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쥴을 옆에 세운 채 나는 에스티안의 손수건을 붙들고 계속 수를 놓았다.

아니, 수를 놓는다기보다 그냥 어설프게 바늘로 찌르고 있다는 게 더 맞았다.

귀족 영애 운운하며 핑계를 댄 것도 맞지만, 사실 내가 직접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게 컸다.

에스티안의 성향이 원래 누구에게나 그런 식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는 거고, 사실은 그가 좋지 못한 마음을 품고 있던 거라고 해도, 일단은 설정이랍시고 내 한순간의 말 때문에 그가 그렇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그런 걸 차치하고서라도 그냥 진심으로 위로해 줬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마워서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니, 이왕이면 내 손으로 뭔가를 해서 주고 싶은 거다. 마침 수놓기는 그 방법으로 참 제격이기도 하고.

그런데 만들어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보답은커녕 싸움 거는 꼴이 되겠는데?

심지어 블라머프가의 가문 문양이나 황실 문양 같은 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만들지도 못하고, 그냥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꼬인 모양을 넣고 있었다.

혼자 오래 지내 와서 그래도 구멍 난 양말도 잘 꿰매고, 뜯어진 주머니 같은 것도 감쪽같이 붙여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과 수놓는 건 또 다른 영역이었던 것 같다.

“아가씨, 아무래도 안나 님께 부탁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손가락에 붕대를 감을 수도 없겠군요.”

“아, 잎사귀들은 다 했어요. 이제 꽃만 하면 되는데…….”

바늘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커서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뭇가지 부분에 실을 넣고 뺄 때마다 오히려 손에서 자꾸 미끄러지기만 해서 찔리는 빈도도 높아졌다.

새하얀 손수건에 피가 묻지 않게 하려고 애쓰다 보니 계속 손을 찌르기 일쑤였고, 모양도 자세히 보면 삐뚤삐뚤했다.

하지만 그렇게 허둥지둥하면서도 나뭇가지와 나뭇잎 부분은 용케 완성했다. 그래서 꽃 한두 송이만 수놓으면 되도록 빈 곳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떠오르는 꽃도 없고, 꽃 같은 걸 아무 도안 없이 수놓을 자신도 없었다.

나뭇잎도 이런 모양으로 만든 내가 그런 건 절대 실로 표현할 수 없겠지…….

“무슨 꽃을 수놓으면 좋을…… 어?”

그래서 이번에도 쥴에게 물어보려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정원의 깊은 안쪽 우거진 숲으로 무언가 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

저번에도 저쪽으로 뭔가 지나가지 않았나? 아직도 작은 짐승 같은 게 있는 건가?

“왜 그러십니까?”

“저번에도 저쪽 숲 있는 데로 무언가 지나가는 걸 봤는데 조금 전에도 본 거 같아서요. 움직임이 작은 거로 봐서 사람은 절대 아닌 것 같은데,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이려나요?”

내 말에 쥴은 한 손을 검에 가까이 대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투는 거의 나를 혼내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걸 보시면 곧바로 저한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혼자 계실 때 이상한 게 나타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제가 가 보겠습니다.”

쥴은 시녀 한 명을 내 옆에 바짝 붙여 두고는 숲 쪽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하다는 느낌은 안 드는데. 뭐가 되었든 죽이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나름대로 수놓을 도안을 짠다고 어질러 뒀던 종이 위 여러 꽃을 그리며 잠시 기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제 꽃 이미지 같은 게 안 떠올라 큰일이었다.

그냥 잎사귀들만 해서 이렇게 줘 버려? 꽃은 좀 과한 것 같으니까?

갈등하며 연필로 종이 위를 톡톡 두드리던 차에 눈앞으로 큰 그림자가 졌다.

“아가씨가 보셨던 게 아마 이 아이인 듯합니다만.”

어느새 돌아온 쥴이 서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아주 마르고 작은 여자아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이는 발버둥 치지도 않고 그저 옷 뒤쪽을 쥴에게 잡힌 채 가만히 있었다.

얼굴은 약간 꾀죄죄하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다. 옷은 자신의 몸보다 좀 큰, 때가 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여기 온 뒤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인데?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진 눈으로 보는데, 아이는 얌전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너무 무서워서 아예 얼어 버린 것 같았다. 자그마한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으니까.

일단은 그 놀란 마음을 달래는 게 우선 같았다.

나는 쥴에게 아이를 놓아 달라고 말한 뒤 아이 몫의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시녀에게 부탁했다.

“저,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요?”

아이는 우유잔을 양손으로 꼭 붙잡은 채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내게 시선을 맞췄다. 아, 이런 말 하면 그렇지만 거지 꼬마애조차 이렇게 눈이 푸른빛으로 아름답냐!

“죄송해요, 죄송해요. 꽃이 너무 예뻐서 그만…….”

“꽃이요?”

“네. 담장 틈새로 보이는 트라브 꽃을 보고 너무 예뻐서 거기로 들어왔다가 정원이 커서 길을 잃었어요.”

트라브 꽃이 저쪽에 있었구나……. 정원을 매일같이 나오면서도 나는 알지도 못했는데. 게다가 담장 틈새로 들어왔다니. 아이의 작은 체구가 다시 한번 실감났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계속 작은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그래서 나가려고 했는데 어디로 나가는지 못 찾아서…… 계속 헤맸어요. 정말 죄송해요. 꽃을 꺾거나 훔치지는 않았어요. 정말 보기만 했어요.”

그렇게 많이 피어 있다는데 한 송이 훔치면 어떻다고.

이름이 엘, 이라는 이 아이는 14살이고 원래 길에서 지냈다고 한다.

길의 어느 장소에서 지내다가 그곳에 왈패들이 나타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생활을 계속해 왔다고. 힘들게 지내 와서인지 너무 왜소하고 말라서 14살로는 보이지 않았다.

엘은 천천히 말하면서도 벌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제, 제가 예쁜 꽃 보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그러다 여기 정원에 꽃이 너무 예쁘게 폈길래 잠시만 보고 나가려고 했는데……. 용서해 주세요.”

엘은 친구가 쓴 소설 속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실제로 이 세계가 이곳만의 규칙으로 굴러가고, 사람들도 알아서 살고 있다는 걸 저 아이가 생생하게 알려 주는 셈이었다.

그게 실감되니 흥분감과 묘한 책임감이 피어올랐다. 예쁜 꽃 보러 왔다는데 보여 줘야지.

“정원이 좀 복잡하고 넓어서 보기가 어려웠죠? 나랑 같이 둘러봐요.”

나는 엘의 손을 덥석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이 봤다던 정원길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쥴 경에게 눈짓을 하니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나와 엘의 뒤쪽으로 멀찌감치 서서 따라왔다.

“이,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요? 저 매 맞는 거 아니에요?”

“매를 왜 맞아요. 일부러 들어온 것도 아니고 잘못 들어와서 못 나가고 있던 건데. 그리고 꽃도 하나도 안 훔쳤잖아요.”

“네, 네. 믿어 주세요. 꽃을 함부로 꺾으면 안 되니까 절대 훔치지 않았어요.”

순수하고 귀여운 그 말에 나는 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금방 나타난 꽃밭을 보고 엘은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의 모습이 되어 감탄했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꽃밭은 태어나서 처음 봐요! 트라브 꽃 말고 루피에 꽃도 있고, 우와, 이건 로젠나무 아니에요? 이 나무가 꽃이 피면 정말 아름답거든요. 꽃 피우기가 어렵지만요. 우와, 우와…….”

고작해야 장미 정도 알고 있던 나는 처음 듣는 꽃 이름에 엘만큼 놀라서 입을 벌렸다. 이쪽으론 나도 처음 와 봤기에 이런 꽃밭이 있는 줄도 몰랐을뿐더러 엘이 꽃을 알고 있는 수준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엘은 어떻게 그렇게 꽃을 잘 아나요? 대단하네요.”

“아, 아니에요. 계속 길에서 지내고 자라면서 이런저런 들꽃을 많이 봐서 그런가 봐요.”

아무리 꽃을 좋아한다고 해도, 어떻게 이 정도로 잘 알고 있을까. 정원에 있는 꽃들이 분명 그렇게 흔한 종류는 아닐 텐데 말이다.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수줍게 웃는 엘의 얼굴을 보자 그런 생각도 금세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정말 소중한 것을 다루는 듯한 얼굴로 모든 꽃을 살펴봤다. 덩달아 나도 오랜만에 꽃구경을 하며 엘과 가벼운 얘기를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모르는 사람과 이렇게 편안하게 얘기하고 돌아다닌 게 대체 얼마 만이지?

어제의 무도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전 삶에서도 나는 낯선 사람들을 만난 다음에는 꼭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소모된 에너지를 채우곤 했다.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기운을 다 빨린 듯해서 한동안은 잠적하고 집 안에 처박히는 거다.

그런데 처음 본 이 작은 아이와 얘기하는 것은 에너지를 쌓는 느낌을 주었다.

아마 엘이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아이이기 때문이겠지.

나는 충동이 들어 꽃밭을 다 본 뒤 아이를 씻을 수 있게 해 주곤 아이가 새로 입을 수 있는 원피스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같이 앉아 뜨거운 차도 마시도록 했다.

“이렇게 잘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마님.”

“마, 마님이라니. 그냥 아델린이라고 불러도 돼요.”

“어떻게 귀족 아가씨의 이름을 그냥 부를 수 있겠어요, 제가.”

난처한 듯 웃는 엘의 얼굴에 나는 마음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여긴 그런 세상이지.

하지만 이 공간만큼은 내 구역이나 다름없으니 엘을 좀 더 편하게 만들어 줘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바깥도 잘 안 나가고 이 정원에서 되게 자주 놀거든요. 근데 엘이 와서 나랑 같이 놀아 주니까 너무 좋아서 그래요. 그냥 이름 불러 줘도 되는데.”

“그래도 어떻게……. 아델린 아가씨라고 부를게요.”

하, 귀여워라! 키웠던 강아지 생각도 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려나 싶었다.

엘은 배시시 웃으며 찻잔을 작은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엘은 의자 아래로 닿지 않는 발을 대롱대롱 구르며 테이블 위를 보다가 어, 하고는 말했다.

“손수건에 수놓으시는 거예요? 너무 예뻐요!”

거짓말……. 그럴 리가 없는데. 착한 엘의 머리를 나는 한 번 더 쓰다듬었다.

“말만으로도 너무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아직 완성이 안 돼서 고민하고 있는데.”

“꽃을 수놓으시려는 거예요? 아닌가, 나무인가. 약초인가. 이 나뭇잎이랑 나뭇가지는 어떤 걸 수놓으신 건지 잘 모르겠어요! 으, 아직도 공부해야 할 꽃이 많구나.”

아니, 그건 내가 마음대로 상상해서 수놓은 거라 그래…….

엘의 그 따뜻한 마음을 깨지 않고 고스란히 느끼기 위해 나는 그저 따라 웃었다. 아, 이렇게 된 김에 한번 물어볼까?

“이렇게 꽃과 나무에 대해 많이 아는데 또 공부한다고요? 엘은 정말 대단하네요. 사실 이 나뭇잎이랑 나뭇가지에 어울리는 꽃을 수놓고 싶은데, 어떤 거로 할지 못 정했거든요. 엘이 알려 주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네? 제가요? 어떻게 제가 감히…….”

“감히라뇨! 엘이 기꺼이 해 주면 제가 더 좋지요. 음, 이 손수건은 저를 도와주셨던 분에게 드리는 거예요.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요.”

내 말에 뒤에 서 있던 쥴이 또 낮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엘만 바라보았다.

“그런 의미도 전달하면서 꽃도 수놓아 드리고 싶은데, 제가 솜씨가 없어서요. 잘 꿰맬 수 있으면서도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꽃이 있을까요?”

솜씨도 없는 내가 이상한 부탁을 했는데도 엘은 심각한 얼굴로 함께 고민해 주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몇 번 가볍게 치더니 이내 소리를 질렀다.

“아! 아리사 꽃은 어떨까요? 아리사 꽃의 꽃말이 따뜻함, 감사, 애정이거든요. 그리고 꽃도 되게 예쁘고 귀엽게 생겼어요.”

엘은 테이블 위에 있던 종이에 연필로 슥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볍게 손만 댄 거였는데도 꽃잎의 개수가 많지 않아 수놓기에도 적절해 보이는 꽃이 금방 생겨나기 시작했다.

“엘, 그림도 잘 그리네요.”

거리에서 사는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예술이나 화훼, 원예 쪽으로 공부했어도 좋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내가 무작정 후원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엘은 뚝딱 꽃 그림을 완성했다.

“대충 이렇게 생긴 꽃이에요. 특이하게 꽃잎도 연두색이에요. 원래는 노란빛을 띠었다가 점점 꽃이 커질수록 연두색으로 변해요. 작은 동물들이 이걸 먹는 경우가 많아서, 일종의 보호색이거든요.”

마침 보석 가루 같은 것을 갈아 넣어서 반짝이는 옅은 녹색 실도 있었다.

이 예쁜 실을 뒤늦게 발견해서, 이걸 잎과 나뭇가지 수놓는 데 썼어야 하나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잘된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기사단장 같은 사람이 가지고 다니기에 분홍색 꽃이나 빨간색 꽃은 좀 그럴 것 같기도 했고.

나는 엘이 그려 놓은 꽃 그림을 보며 결국 연녹색 실, 상아색 실 등을 이리저리 섞어 가며 아리사 꽃까지 수를 놓았다.

손수건 한구석에 크지 않게 들어간 꽃을 보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기어코 완성했구나.

“아델린 아가씨, 너무 예뻐요! 받는 사람이 정말 좋아할 것 같아요.”

“그렇게 얘기해 주니 나도 좋네요. 다 엘 덕분이에요.”

“제가 뭘 했다고요. 헤헤. 그런데 손을 그렇게 많이 찔리셔서 어떡해요?”

엘은 붕대로 뒤덮인 내 손을 자신의 작은 손으로 잡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민망하게 뭐 이런 걸 지적하느냐고 속으로 투덜대곤 겉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손 찔린 것보다 서툴기 짝이 없는 손수건과 내 솜씨에 대해 얘기했을지도 모르고.

억측이라고 하기엔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내가 이 소설 속으로 오기 전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싫어하고 귀찮아하던 이유가 그런 거였다.

진심 없이 앞뒤 다른 말들에 지치는 것. 늘 ‘역시 사람들이랑 얘기하고 부대끼는 건 너무 기 빨리고 귀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이 이러는 건 진짜 걱정이라는 게 너무 잘 느껴져서 나조차 마음이 애틋해졌다. 아, 귀여워라!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엘, 오늘 여기서 자고 갈래요? 내 방에서 자도 되는데.”

신난 나는 충동적인 제안을 했다. 하지만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바로 거절했다.

“어떻게 제가 아가씨랑 같이 자겠어요. 제가 지내던 곳에 제 옷가지나 짐도 있어서, 거기서 자야 해요. 말씀해 주신 건 너무 고맙습니다.”

분명 길에서 지냈다고 했는데도 엘은 자신의 거처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어 보였다.

어린 나이에 너무 세상을 빨리 알아 버린 느낌이네. 오히려 그곳이 자신의 정당한 자리라는 듯 서서히 갈 준비를 하며 얘기하는 그 모습이 짠해서, 나는 빵이며 과일 같은 먹을거리를 잔뜩 안겨 주었다.

“언제든 또 와도 돼요. 꽃 보러 와도 되고, 맛있는 거 먹으러 와도 되고, 나 보러 와도 돼요!”

엘이 떠나고 나니 정원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모처럼 기쁘고 즐거운 만남이었다. 이런 게 무도회나 다른 귀족 영애들의 티타임보다 훨씬 더 행복한 거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이후 부모님과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는데, 그 또한 평화로웠다.

오늘 뭐 하고 지냈느냐는 물음에 나는 에스티안에게 줄 거라는 말만 빼고 손수건에 수놓은 것, 엘을 정원에서 만난 것에 대해 얘기했다.

혹시 아무것도 안 한 거나 다름없는 내게 뭐라고 하시려나 걱정했는데, 그들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래서 손을 그렇게 다쳤구나, 델. 어미로서 다친 딸의 손을 보는 건 마음 아프지만, 네가 얘기하는 얼굴이 몹시 밝으니 수놓는 동안 아주 즐거웠던 모양이야. 상처에 잘 듣는 치료약을 줘야지. 잘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 잘했다. 그래도 정원 담 정비는 다시 하도록 하마.’

이런 부모 아래에서 자랐으니 아델린은 밝고 쾌활하고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겠지.

내가 뭘 하든 믿는다는 눈빛을 보인 그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따뜻하면서도 씁쓸하고, 한편으로는 간질간질해 침대에서 좌우로 실컷 굴렀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또 호화스럽게 몸을 씻었더니 몸에 이불이 닿는 감촉도 좋았다. 하루 종일 이렇게 편하게 지내도 된다는 것이 다른 때보다 더 분명하게 느껴지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사는 게 오히려 더 좋네.”

환경 좋고, 주위 사람들도 크게 얽히지 않아서 좋고……는 아니구나.

퍼뜩 정신이 든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간이 테이블 위에 놔둔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에스티안을 직접 만나 이걸 전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인 것 같아, 아까 미리 쥴에게 물어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황실기사단장은 황궁과 가까운 곳에 개인 숙소를 얻어서 지낸다고 한다.

그러니 시녀를 통해서, 그러면 또 그 시녀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손수건을 그의 개인 숙소까지 전달하는 게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았다.

<무도회 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작은 감사의 표시입니다.>

손수건과 작게 적은 쪽지까지 함께 상자에 넣어 시녀에게 건넸다. 아, 마음에 있던 짐을 던 것 같아 속이 시원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심 이걸 받고 에스티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했다.

여자를 잘 아는 사람일 테니 이 정도 선물은 너무 많이 받아서 감흥도 없을 수 있겠구나.

어쩌면 그는 그냥 하루 무도회의 일 정도로 여기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스티안과 얼마나 얽히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내가 이 정도 정성을 보이려는 마음이 든다는 건 확실히 이전과 다른 일이었다.

뭐, 넘어지려던 걸 잡아 준 건 둘째 치고, 술주정이나 다름없는 말을 가만히 들어 주고 위로까지 해 줘서 정말로 고마웠으니까…… 그것뿐인 거지.

어쨌든 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느지막이 오전쯤 일어나 또 혼자 뒹굴거리고 있던 내게 안나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아가씨, 에스티안 블라머프 황실기사단장님께서 아가씨께 방문해도 되는지 요청하셨어요. 황실에서 근무가 끝나는 대로 오후 5시쯤 오실 거라고, 가벼운 티타임을 가졌으면 하신다는데…….”

그런데 저번에 그분은……. 하고 안나는 말을 차마 더 잇지 못했다.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내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건 분명…… 손수건의 자수가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는 이유는 이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받고 별생각 없으면 아무 대답도 없는 게 정상일 것이다. 괜히 기사가 새하얀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 게 아니기도 하지.

고결한 기사의 소지품에 내가 있지도 않은 솜씨로 장난을 쳤다고 생각했으려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받자마자 뛰쳐나오듯 보자고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리아나 아가씨나 황태자 전하 없이 두 분만 만나시는 건가요?”

아, 이전에는 아델린이 리아나랑 황태자 보러 자주 놀러 갔으니 넷이 자주 만났지. 나는 그냥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가씨께서 어련히 잘하시겠지만. 아가씨도 아시죠? 그 소문 같은 것들이요.”

“근데 실제로는 그런…… 분인지 잘 모르겠던데요. 친절하시기도 하고…… 오시는 것도 아마 제가 도움 받았던 것 때문에 오시는 것일 테고…….”

알기야 알지만, 왠지 모르게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나는 작은 목소리로 얼버무렸다.

당연히 내 말에 안나는 깜짝 놀라며 도끼눈을 떴다. 이럴 줄 알고 손수건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는데 다행이었다.

“아가씨, 정말 조심하셔야겠어요. 세상에 자기 얼굴에 대놓고 나 어떤 사람이다, 이렇게 써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오늘 백작님과 백작 부인께서 업무 때문에 남부 섬 쪽으로 출장 가신 걸 다행으로 여기셔야 해요, 정말.”

그건 다행이다. 부모님은 내가 그저 피할 수 없는 황실 무도회 같은 것만 가고 요새 사람들을 많이 안 만나고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에스티안이 이렇게 저택까지 온다는 걸 알면 나는 변명하기에 상당히 곤란해질 게 뻔했다.

아, 이런 것도 사실 다 그냥 나 혼자 마시는 김칫국이려나? 나는 나대로 심란해졌다.

안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씻고 옷 갈아입는 준비를 도왔다. 멀끔하지만 멍한 상태로 나는 정원에 나갔다. 쥴은 나오지 않았기에 완전히 나 혼자 그저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생각이라기보다 나는 시뮬레이션에 돌입했다.

“흠, 흠, 어떤 일로 오셨어요?”

아니지. 어떤 일로 왔긴, 알면서 묻는 게 너무 뻔해 오히려 이상하잖아.

“손수건은 잘 받으셨죠?”

이것도 아니지! 잘 받았으면 받고 가만히 있었지, 여기까지 왔겠어?

“자수 솜씨가 좀 그렇죠?”

좀 그런 걸 알면 수놓지를 말았어야지. 이미 저질러 놓고 무슨 말이야, 그게.

“제가 단둘이 남자와 이렇게 티타임을 가지는 게 거의 처음이라 뭐라고 할지 잘 모르겠어요.”

어휴, 아예 에스티안을 보면 묘하게 떨린다고 고백까지 해 버리지?

정말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이제는 까마득한 것처럼 과거가 된 시절, 정말로 업무차 카페에서 만난 남자와 얘길 나눴던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일 때문에 보는 게 아닌 남자는 에스티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집까지 찾아오다니,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인데.

드라마를 보면 집인데도 머리에 힘주고 목걸이 주렁주렁 건 사모님 같은 게 나올 때마다 이상하다고 지적했지만, 지금은 괜히 그 모습이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그는 근무를 하다가 온댔으니 당연히 제복 차림일 테지. 나는 저택 밖을 나가지 않으면 사실상 거의 잠옷같이 늘어지는 드레스에 숄만 걸치고 있는 꼴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무도회를 가듯 머리 올리고 허리 조이고 있자니 그건 정말 웃길 것 같았다. 내가 그 드라마 속 사람을 이상하다고 여긴 것처럼 에스티안도 나를 이상하게 여기겠지.

아니, 애초에 그가 어떤 목적으로 오는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고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나만 혼자 설레발치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로서는 손수건 준 것도 그냥 내가 흉하게 우니까 ‘옜다, 이거나 좀 써라.’ 하는 생각이었을 수도 있는 거다.

그 손수건 자체가 몇 명의 여성을 거쳐 왔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또 김이 빠졌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겨도 뒤에서 지켜만 봐 왔던 내가 대체 뭘 안다고 혼자 떠올리고 기대하는 걸까.

나는 마음을 대충 가다듬고는 늘 그랬듯 정원으로 차와 디저트 종류를 가져다 놓고 평화롭게 즐겼다.

어제 이 시간쯤 엘이 왔나?

손수건 자수를 완성하기까지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엘이었다.

그렇게 밝고 맑은 에너지를 주는 엘이라면 얼마든지 또 대화하고 만나고 싶은데.

내심 엘이 또 방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정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무도 없었다.

내일은 오려나. 혹시 어제의 첫 만남이 너무 별로였다는 생각에 다시는 안 오려나. 그런 것만 아니면 좋겠다.

놀고 쉬고 하니 금방 오후가 되었다. 사실 나는 수놓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었기 때문에 자수 놓는 연습을 좀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제의 서툰 바느질로 손가락이 남아나지 않은 상태여서 그럴 수도 없었다.

손가락 끝을 아주 조금만 찔려도 피가 그렇게 많이 날 수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내 손은 지금 허연 붕대로 덕지덕지 감겨 있었다.

그런데 사실 붕대를 감을 정도까진 아니었다. 이건 나의 계략이었다.

사실 이곳에선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일종의 귀족 영애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고생 안 하고 편히 지냈다는 걸 보여 주는 셈이니까.

그래서, 자동적으로 나는 앞으로 적어도 손이 깨끗해질 때까지는 어디 나가지 않고 이대로 편하게 있을 수 있게 된 거지!

안나가 손에 약을 바르고 치료하는 동안 엄살을 떨었던 게 어느 정도는 먹힌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에스티안이 찾아올 줄은 몰랐지.

손수건 자수도 어딘가 이상해, 대화도 제대로 못해, 손은 이 모양이야. 어느 하나 정상인 구석이 없는 내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이라도 오늘은 볼 수 없다고 거절해 버리자니, 내심 그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는 미약한 욕심과 두근대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손 정도야, 뭐. 그래, 보면 되지! 왜 보자고 했는지도 궁금하니까!

“…….”

“…….”

그러나 시녀의 안내를 받아 에스티안이 내가 있는 정원까지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차를 마시는 내내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까 혼자 쇼했던 것이 무색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예전에 남자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어떻게 대화했지?

다짜고짜 목적부터 얘기했던가? 날씨 얘기 같은 걸 먼저 했던가? 아니, 먼저 보자고 한 사람이 뭐라고 말을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마음속이 혼란한 나와는 다르게 에스티안은 평온한 얼굴로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는 차만 마셨다.

그러다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치면 나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지었고, 그러면 그는 다시 눈을 내리깔고는 차를 마셨다.

더 무서운 건 그의 손에 아무것도 들린 게 없다는 거였다. 당연히 손수건을 들고 왔을 줄 알았건만 대체 왜 빈손이지? 그냥 쉬러 온 건가?

황실의 기사단장이니 할 일이 많기는 할 것이다. 황실을 지키는 것 말고도 평기사들 교육이나 훈련에도 함께 참가할 테니까.

가만 보니 그는 꽤 피곤해 보였다. 물론 잘생긴 사람의 피곤한 모습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만 해도 좋을 정도로 황홀했다.

해까지 점점 지고 있어 노을빛까지 받으니 에스티안 자체에서 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나는 왜 이 사람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며 그는 말도 안 하고…….

정말 업무 때문에 지쳐서 차를 마시고 쉬고 있는 걸까? 여기는 카페나 티 살롱이 아닌데 대체 왜…….

“손수건은 잘 받았습니다.”

“헛, 네. 네.”

그러다 갑자기 에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우리 집인 데다 시녀가 돌아다닐 수도 있고 할 테니 황실기사단장의 예를 갖춰 말하는구나.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의 짙푸른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나는 몸을 움찔하며 깜짝 놀랐다. 아, 부끄럽다. 에스티안은 그런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자수는, 직접 놓으신 겁니까?”

“네, 네. 그, 그때 도와주셨던 게 너무 감사해서. 근데 솜씨가 별로죠……. 죄송해요.”

이게 무슨 바보 같은……. 말해 놓고도 참 스스로가 민망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분명 서툴게 놓은 그 자수를 생각하면 사과가 나가는 건 당연했다. 에스티안의 반응은 또다시 어딘가 아슬아슬했다.

“예뻤습니다. 무언가 묻을까 봐 들고 다니기 아까울 만큼.”

“그……그런. 들고 다니기 부끄러우신 건……?”

“절대 아닙니다, 절대.”

뭘 닦기 위해 들고 다니는 게 손수건인데 저렇게 말하는 건 왠지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귀족 영애에 대한 기사도 같은 것.

그래서 나는 애써 웃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건넨 거였는데, 돌아오는 그의 반응이 어딘가 맹수가 으르렁대는 것 같아 나는 금세 입을 다물어야 했다.

“수놓으신 건 무슨 꽃입니까?”

“어, 아리사 꽃이라고 해요. 꽃말이 감사, 또 뭐더라…… 따뜻함, 애정이라고 하더라고요.”

말을 마친 순간 또 에스티안과 눈이 마주쳤다. 마주쳤다기보다 그가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를 곧바로 쳐다본 거였다.

왜, 왜 또 저렇게 봐!

이번에도 바보같이 말했…… 아, 꽃말을 다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감사에서 끝냈어야 할 말인데 아무 생각 없이 줄줄 꽃말을 읊어 버렸구나. 따뜻함과 애정이라니, 무슨 얘길 한 거야!

슬슬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나는 머리를 비운 채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 그, 감사의 뜻을 전하기에는 그 꽃이 제일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에스티안 경 같은 기사님께는 붉은 꽃보다는 조금 더 무난한 게 어울릴 것 같았거든요. 괜찮으신 거죠?”

“적색도 좋았을 것 같군요. 하지만 해 주신 게 더 마음에 듭니다. 반짝이는 옅은 녹색.”

“네에.”

“아델린, 그대의 눈을 닮은 색이더군요.”

에스티안은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가를 톡톡 치며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된 채였다.

검을 잡는 사람이라 분명 마디도 굵고 강해 보이는 손인데도 참 아름답고 곱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내 눈을 닮았다고? 기계처럼 그의 말에 끄덕거리기만 하던 내 머리가 멈췄다.

그냥 녹색이라고 해도 되는 것을. 역시 여자가 뭘 듣고 싶어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라 그러는 건가.

“네에? 아, 아. 그렇게 보실 수도 있겠네요.”

내가 또 의미 없이 몸을 좌우로 흔들며 어색하게 웃자 에스티안도 그저 따라 웃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빈 찻잔을 채우려고 티포트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그가 티포트를 들어 올리는 손 모양새가 어딘가 이상했다.

자꾸 흔들흔들하면서 위태로워 보였다. 찻잎을 거르고 싶어서 저러나?

거르는 망이 그 안에 들어 있을 텐데. 저대로 따르면 찻물이 흘러서 손 델 것 같은데?!

“어, 조심하세요!”

에스티안이 티포트를 들고 따르려는 순간 아무리 봐도 위험해 보여 나는 손을 들어 그걸 잡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잡힌 건 내 손목이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위험해 보였던 티포트를 아주 가볍게 한쪽으로 놓아두고는 내 손을 살폈다.

아…… 망했다.

사실 나는 붕대투성이인 손을 드러내고 있기가 부끄러워 계속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리고 있었다.

말하면서도 손이 무의식중에 올라갈 뻔한 것을 꾹 잡아 눌렀다.

주인으로서 그에게 차를 따랐어야 하는 상황이 몇 번이나 왔지만 손을 올릴 수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무례하다고 생각해도 얼굴 들기 부끄러운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손을 들다니. 내 노력은 한순간에 사라진 셈이었다.

“이럴 거 같았어. 너무 심하잖아. 이 지경이 될 정도였으면 수를 놓던 중간에 시녀에게 시켰어야지.”

에스티안은 어딘가 화난 얼굴로 낮게 말했다. 많이 흥분했는지 말도 편하게 하고 말이야.

게다가 그가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일부러 내가 손을 보이도록 그런 행동을 한 듯했다.

아니, 무례한 건 생각해 보니 그쪽 아닌가?!

“저, 보이는 것만큼 다치진 않았어요. 그리고 좀 민망한데요.”

당황해서 나간 내 말에 그는 잡았던 손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숨을 크게 내쉰 뒤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는 내 손가락을 덮은 붕대 위를 살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역시 스킨십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자연스럽네.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면서.

어느새 무례하다고 여겼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손가락이 간지러운 건 둘째 치고 괜히 귓불과 볼이 화끈해져 오는 이상한 느낌에 나는 그를 쳐다볼 수도 없었다.

해가 거의 다 지는 바람에 정원 내 조명만 켜져 있어 어둑어둑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무례를 저지른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대의 손이…….”

“이거는, 정말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다른 티타임 자리나 사교계 활동하는 자리에 나가지 않으려고 일부러 붕대를 감아 둔 거라서. 아, 그렇다고 아예 꾀병은 아니고요. 바느질이 좀 서툰 건 맞아서요. 그냥, 그렇게 반응하실 정도는 아니니까…….”

고해성사라도 하듯 줄줄 진실을 읊는 나를 보더니 에스티안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계속 그가 내 손가락 위를 쓸고 있었기에 나는 손을 다시 테이블 아래로 내릴 수도 없었다.

왠지 그의 손길이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아 보였다. 진짜 어쩔 줄 모르는 상태인 건 나인데.

심지어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위로 올리면 계속 곧바로 에스티안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이리저리 주변만 보며 아무 말이나 꺼내야 했다.

“그,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제 손이 이 모양이라는 것을…….”

“손을 계속 아래에만 두고 계셨으니까요.”

“아…….”

“차도 전혀 마시지 않아 찻잔 속 찻물도 그대로이고.”

“그러네요…….”

“그리고 자수 솜씨가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아서, 고생을 좀 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하…….”

어느새 에스티안은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눈치가 좋은 편인 것도 맞지만, 내가 손을 너무 부자연스럽게 안 쓰고 있어서 그랬구나.

나는 그에게 여태 잡혀 있는 손 말고 다른 손으로 찻잔을 들어 식은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사실 이렇게 손도 잘 쓰는걸. 허탈한 듯 웃는 나에게 에스티안은 또 페로몬을 날렸다.

“자수 솜씨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예쁩니다, 그 어떤 꽃보다 더. 따뜻함과 애정이라는 꽃말도 무척 좋습니다. 그리고 아델린 그대의 손을 보니 더욱 아까워서 손수건을 쓰지 못할 것 같군요.”

꽃말 중에 감사는 어디 갔어?! 감사해서 주는 게 주된 목적인데! 말도 행동도 정말 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기게도 사교계로 나서고 싶지 않아 잠적하는 주제에 에스티안은 기가 막힐 만큼 여러 번 보고 있는데, 보면 볼수록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참 징하게 설정에 충실하다 싶어서, 또 어떤 면에서는 설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자꾸만 보여서였다.

에스티안은 바람둥이여야 한다고 소리쳤던 내가 잘못한 거지, 뭐.

“붕대를 다시 감아야 할 것 같습니다만.”

“네?”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놓아 버린 채 있던 차였다. 갑작스러운 에스티안의 말에 나는 눈이 커져 손을 내려다봤다.

아, 긴장해서 손에 땀이 잔뜩 난 데다 내가 하도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렸던 탓에 손가락 곳곳에 감긴 붕대 끝부분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어두운데 이런 건 대체 어떻게 본 거야.

“그, 그러네요. 어…….”

당신이 가면 내가 감을게, 하고 내가 말하는 것보다 그가 종을 들어 시녀를 부르는 게 더 빨랐다.

그는 마치 자기 집에서 시녀를 부르듯 자연스럽게 작은 가위, 소독액, 약초 연고, 붕대 같은 것들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찬바람 쌩쌩 부는 말투였지만 시녀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볼을 붉힌 채 물건들을 가져왔다. 아, 안나가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다.

“부디.”

치료 용품을 받아서 나보고 하라고 하려나 싶었는데, 에스티안은 짧게 말하고는 가위로 묶여 있던 붕대를 전부 잘라 냈다.

차가운 금속 감촉이 손가락에 닿아서 소름이 돋는 건지, 아까부터 그가 내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는 걸 문득 깨달아서 소름이 돋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소독액을 적신 천으로 상처 난 곳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아무리 작아도 다친 곳은 다친 곳인지라 살짝 따가웠지만, 더 이상의 추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도 절로 이로 물게 되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십시오.”

그는 언제 또 내가 참고 있는 얼굴을 봤는지 주사 맞기 싫어하는 아이를 달래 결국 주사를 맞게 하는 것처럼 치료하는 내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연고를 바르고 붕대까지 매는 데 기껏해야 15분 정도가 걸렸을 테지만, 체감상으로는 15시간 같았다.

내 손 위로 이리저리 오가는 그의 손은 찻잔을 잡고 있던 것도 아닌데 아주 따뜻했다.

“다 됐습니다.”

내 손에는 아까보다 훨씬 깔끔하게 붕대가 감겨 있었다. 에스티안은 손이 야무진 모양이다. 솜씨가 너무 좋은데? 이 정도라면 내 자수를 비웃을 만하구나…….

“감사합니다. 너무…… 잘 해 주셨는데요.”

“기사들은 다친 곳에 붕대를 감는 게 일상이니까요.”

아, 그렇구나. 사냥도 자주 나가고, 외부에서 침입자가 들어오면 모두 상대해야 할 테니까.

비단 그런 것뿐만 아니고 분명 수련하는 중에도 다치는 일이 잦을 것이었다.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멍청하게 입을 벌리는 내 모습에도 에스티안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더 이상 늦게까지 젊은 영애의 집에 있는 건 예의가 아니기에 그는 곧 일어났다.

정원을 빠져나와 그의 말을 마구간에서 꺼내서 끌고는 함께 대문까지 걸었다.

“제가 매번 에스티안 경께 신세만 지는 것 같아요.”

“계속 신세 지셔도 상관없습니다.”

“네?”

“그동안 아델린 영애께서는 계속 주위 사람들을 도우며 바쁘게 지내 오지 않았습니까.”

리아나 얘기를 하는 건가. 하긴, 그거 말고도 아델린은 사교계 전체를 종횡무진하며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모두에게 사랑받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아, 네…… 그렇죠.”

“그러니 신세만 지는 사람 하나쯤 있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앞만 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고 웃는 에스티안을 보니 얼굴이 다시 뜨끈해져 왔다.

아리사 꽃처럼 ‘따뜻함’과 ‘애정’이나 다름없는 저런 말이라니. 적응이 안 되네, 거참! 이런 데 넘어가면 안 되는데.

그가 누구에게나 이런 말이나 행동을 보일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를 보기만 하면 그런 생각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니 참 이상한 노릇이었다.

고개를 휘휘 저어 정신을 차리고는 말을 타기 직전인 에스티안에게 다시 인사를 건넸다.

“정말 감사합니다. 늦었는데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에스티안은 늘 그랬듯 정중하게 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입을 맞추는 위치가 좀 이상했다.

보통은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떼는 게 맞는데, 그는 자신이 붕대를 감은 손가락들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붕대 아래로까지 그의 뜨거운 입술이 느껴져 나는 속으로 숨을 삼켜야 했다.

“또 보고 싶어.”

“네…….” 

얼빠진 내 반응에 그는 낮게 소리 내서 웃고는 말을 타고 떠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 긴 저녁이었는데, 시간이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큰일임을 깨달았을 땐 이미 새까만 하늘 위로 별이 여러 개 뜬 뒤였다.

에스티안을 보내고 방으로 다시 돌아오고 나니 어느새 안나가 들어와 정원의 티 테이블을 정리하고 곧 자야 할 나를 위해 침대까지 매만져 주고 있었다.

하루 종일 바깥에 있던 나를 위해 시녀들은 이미 뜨거운 물과 비누, 향유 같은 것을 다 준비한 상태라 나는 그저 편하게 가만히 있으면 되었다.

“에스티안 황실기사단장님과는 말씀 잘 나누셨어요? 오래 있다 가셨네요.”

노곤노곤해져 이미 침대로 들어간 내게 안나는 슬쩍 물었다. 시선을 딱히 안 마주치고 내 위로 이불을 정리하면서 묻고 있었지만, 그녀가 되게 궁금해한다는 게 느껴졌다. 뭐, 얘기를 잘 나눈 건 맞으니까.

“네. 얘기가 길어졌어요.”

길어지긴, 나는 너무 말을 안 해서 문제였지. 하지만 에스티안이 떠난 뒤로 거의 정신이 나간 나는 멍하니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안나도 그런 내 상태를 보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중을 들었다. 

“저는 아가씨를 믿어요. 하지만 아가씨가 상처받는 건 보고 싶지 않거든요. 그 좋아하시던 사교계 활동도 최근 잘 안 하시는 걸 보고 나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건네는 안나의 말은 묵직했다.

아델린에게, 그러니까 나에게 안나는 이 정도 존재구나. 일 잘하는 만큼 항상 바쁜 메이스프릴 백작 부부보다도 더 가까운 사람인 그녀는 늘 내 걱정뿐이었다.

에스티안의 소문을 생각하면 그녀의 걱정도 기우가 아니지만…… 내가 요새 직접 마주하는 그를 떠올리면 기우로 치부해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아가씨께서 다른 영애나 영식분들과 많이 친하시니까, 제일 잘 파악하고 계시겠지요. 푹 쉬세요.”

아니, 나는 늘 혼자 구석에 틀어박혀 왔던 사람인걸…….

안나가 나간 뒤 내 생각은 더 깊어졌다.

내가 인간관계건 남자건 제대로 모르니 에스티안이 나를 대하는 것에 설레도 되는 건지, 아니면 일반적인 것이니 그냥 넘겨야 하는 건지도 모른 채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거다.

도움 받은 것에 대한 보답도 했고,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분간 내가 황궁을 가거나 사교계 활동을 할 일은 당연히 없으니 에스티안과 마주칠 일도 없겠지.

그러면 또 그냥 흘러갈 거라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에스티안과 좀 더 마주할 일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또 보고 싶어.’

그는 왜 그런 말을 해서는.

분명 그 말 때문에 괜히 나까지 그를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 테다. 그게 맞겠지.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곧 잠이 들었다.

*

근 일주일 넘게 내 일상은 평화롭고 무탈했다. 저택은커녕 방 바깥으로도 나가지 않은 채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즐겼다.

가만히 방에 앉아 제국 역사를 정리해 놓은 책만 읽어도 즐거웠고, 가져다주는 식사나 간식을 먹는 것도 즐거웠다. 매일 정원에 나가 차 마시고, 자연을 느끼고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내 이런 생활이 지속되자 익숙해진 안나와 다른 시녀들도 이상하다는 기색 하나 없었다.

그러면서 점점 나는 진짜 아델린이 되어 갔다.

더 이상 아델린으로서의 삶이 어색하지도, 이상하지도 않게 느껴졌다. 원래 아델린의 성향과 내 성향이 너무 다른 게 문제지만 나가서 누굴 만나지 않으니 그마저도 드러나지 않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평온하고 행복한 일상이 지속되는 와중에, 내심 마음에 걸리는 게 몇 개 있었다.

‘리아나에게서 온 편지는 없나요?’

‘네, 없네요.’

아무 데도 나가지 않는 내게 계속 다른 영애들로부터 초대장이 왔지만, 리아나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역시 그때 내가 써서 보낸 편지가 너무 날이 서 있었던 걸까. 해야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 다 적은 거였는데 또 뭐가 문제인 거지.

리아나는 그런 편지에 답장을 안 하는 애가 아니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 안 한다면 분명 안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서. 

‘오면 꼭 알려 주세요.’

나는 그냥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내가 또 편지로 ‘왜 답장이 없냐, 저번에 내가 말을 거칠게 써서 편지를 보내서 그러냐.’는 내용을 적기엔 스스로도 이건 아니다 싶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했으면 난 할 만큼 했다.

회사에서 일할 때도 이 정도로 정성을 쏟고 마음을 곤두세우며 상대를 대한 적이 없었는데.

이후에 혹시라도 리아나가 티타임이든 무도회든 어딜 가자고 말하면 한 번은 같이 가 주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대충 황태자와 붙여 두고 나는 나가면 되지 않을까? 으아, 모르겠다.

‘정원에 그때 왔던 아이는 아직 한 번도 다시 안 온 거죠?’

‘네, 매일 정원 곳곳을 정리하느라 둘러보지만 없었습니다.’

또 하나는 엘이 그때 딱 한 번 오고 나서는 더 이상 여길 안 온다는 거였다.

물론 엘에게는 그냥 그때 와서 자기가 좋아하는 꽃구경이나 하고, 웬 이상한 언니나 좀 도와주고, 먹을 것도 잔뜩 받아 가니 좋았네, 하고 잊어버릴 일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일이 나름 즐겁고 따뜻했기에 자꾸만 생각났다.

시녀들은 물론 정원사에게까지 늘 엘의 방문 여부를 물었고, 혹시라도 저번처럼 쥴이 엘을 거칠게 잡을까 봐 그런 것도 전부 신경 쓰고 있는데도 엘의 흔적은 없었다.

혹시 그때 내가 너무 엘을 귀찮게 굴었나……. 아니면 설마 계속 힘들게 지내느라고 오기가 어려운 건가. 대화했던 그때를 떠올려 보면 야무지고 똘똘한 것 같아서 크게 걱정되지는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니까.

마지막으로 마음에 걸리는 일은, 또다시 에스티안이었다.

그가 손수건 때의 방문 이후 하루 이틀 간격으로 계속 늦은 오후나 저녁마다 정원을, 아니 나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또 보고 싶다고 했던 자신의 말을 지키려고 오는 걸까. 괜히 나도 또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매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길게는 두세 시간, 짧게는 한 시간이라도 마치 정당한 절차를 밟는 듯 나를 만나 차를 마시고 갔다. 당연히 용건은 없었기에 눈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고 결국엔 침묵으로 가득 차는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살짝 의아한 눈길을 줄 뿐, ‘너는 워낙 교우 관계가 좋으니 너를 믿는다.’ 말하고는 그의 방문을 막지 않았고, 안나나 다른 시녀들도 하도 그가 찾아오니 이제는 그러려니 할 정도였다.

‘일 끝나고 늦게 여기까지 오시면 안 힘드세요?’

‘…….’

‘아니, 별로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요.’

‘…….’

한 두어 번 왔을 때 내가 물었지만 그는 나를 잠시 쳐다보고는 픽 웃을 뿐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내가 수놓아 준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는 게 아닌가?

그와 같은 기사가 차를 흘리면서 마실 리는 절대 없었다. 당연히 그냥 나 보라고 닦는 거지! 왜 저러나 싶었지만 그 말을 할 수는 없던 나는 손수건을 보며 그냥 미묘한 듯 웃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 지금. 그동안의 방문보다 훨씬 더 마음에 묵직한 돌이 하나 얹힌 듯 걸리게 될 줄이야.

에스티안은 평소보다 더 늦은 저녁 시간에 방문했는데, 기사단 제복이 아닌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항상 말끔하게 넘겼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눈도 살짝 충혈된 채였다.

늘 각 잡고 반듯하게 앉아 있었던 것에 비해 의자에도 기대듯 앉아 있었고, 차를 기다리면서 그저 깍지 낀 채 테이블 위에 올려 뒀던 손은 몇 번이나 움직여 미간이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니, 아무리 봐도 너무 피곤해 보이잖아! 대체 저런 상태로 여기까지 왜 온 거야? 나한테 뭐 시위라도 하는 건가? 손수건에 대한 반응을 이렇게 제대로 확인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거의 매일같이 얼굴을 봐서 괴상한 정이라도 들었는지, 에스티안이 저러고 있으니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았다. 저렇게 피곤한 와중에 여길 온 이상 나는 그가 조금이라도 편안해지도록 대접할 의무도 있었다. 그래서 시녀에게 살짝 귀띔해 좀 특별한 차를 가져다주게 했다.

그가 올 때마다 다른 차를 내긴 했지만, 오늘 우려내는 차는 기본적으로 독특한 열매와 뿌리 같은 게 들어가 살짝 특이한 맛을 내는 거였다.

“오늘 차는 평소와 다른 것 같군요.”

그리고 에스티안은 대번에 반응을 보였다. 귀신이네, 귀신이야. 딱 한 입 마시고 저렇게 말하다니. 꽤 쓴맛이 날 텐데 미간 한번 찌푸리지도 않고.

역시 황실기사단장을 하려면 저 정도로 피곤한 상태에서도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발달해 있고 참을 건 참을 수 있어야 하는 건가.

대단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약간의 걱정스러움이 담겨 살짝 타박하는 말투로 나는 얘기해 버렸다.

“정확하시네요, 정말. 아마 맛없어서 그러시는 거겠죠? 그 차는 마시는 사람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을수록 쓴맛을 내요. 그만큼 몸이 힘들다는 걸 보여 주는 거예요. 이거 한 포트 다 드세요. 그러면 좀 나아지실 거예요.”

“…….”

“어,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요. 아파 보이셔서.”

다다다 내뱉고는 금방 꼬리를 내려 버렸다.

그런데 에스티안이 찻잔을 내려놓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것 같아 슬며시 시선을 올렸다. 그는 차 향기를 맡으면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민망하게 왜 저래!

푸른 눈은 피곤이 그득한 와중에도 아름답고 강하게 반짝거리는데, 찻잔에 가려진 입은 웃고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설마 내가 마음대로 이상한 차 주고 다 마시라고 해서 화난 건…….

“걱정해 주신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아…… 네…… 그렇죠.”

멍하니 입을 벌린 나를 보며 그는 어느새 아주 따뜻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차 한 잔 마셨다고 얼굴색이 완전 좋아질 리가 없는데도 그는 마치 피로가 다 풀린 것처럼 웃었다.

어딘가 간질간질한 말까지 들은 나는 괜히 마음이 씁쓸하면서도 애틋해졌다.

심지어는 그가 피곤하다고 오늘 안 왔다면 꽤 서운할 뻔했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 턱 없는 그는 정말로 천천히 차를 전부 마셨다. 그리고 내 얼굴이 빨개지는 말을 내뱉고는 유유히 떠났다.

“이래서 계속 오는 겁니다.”

아무리 바람둥이라는 설정이지만 어떻게 에스티안은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까.

차갑기 짝이 없는 얼굴의 기사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것들을 나는 이미 여러 번 들었다. 솔직히 생각하면 너무나 설레고 좋다. 좋은데……. 

그런데, 문득 떠올랐다. 정복이 아닌 셔츠 차림이었을 때, 그는 저번에 술집들 쪽으로 지나오지 않았던가. 설마 오늘도…… 그렇게 피곤해하는 이유가 너무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와서?

순간적으로 화가 나 얼굴에 열이 몰려 뜨거워졌다.

원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더욱 이해가 안 가네. 그런 거면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아니, 그동안 그냥 쭉 왜 온 거야?

신경 써서 차 준 게 아까워질 지경이었다.

나는 그래도 매번 힘든 와중에 발걸음 하는 이유에 내가 들어 있다고 생각해 나름대로 책임감도 느끼고 있었는데 말이다.

부글부글 속이 괜히 끓는데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괜히 마음이 동해서 챙겨 준 것이니까.

그가 다녀가면 늘 몽롱하게 꿈꾸는 듯한 밤을 보냈는데, 오늘은 열을 식히며 누르는 밤이 되어 버렸다.

*

그 후 한 사흘 정도 에스티안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하지만 왜 안 오는 거지.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이 감정들이 번갈아 가며 나를 몰아쳤다.

하지만 그가 올 때마다 묘하게 긴장했기에, 모처럼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나는 계속 이 티타임 저 파티 거절하며 두문불출했다.

웃긴 건, 그렇게 쉬고 놀면서 자수를 안나와 다른 시녀들에게 제대로 배워서, 이제는 이전보다 나은 솜씨로 꽃이며 문장 같은 걸 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이것저것 연습하면서 한편으로는 ‘나 이제 자수 잘 놔요!’라고 말할 대화 소재가 생긴 것 같아 내심 뿌듯했는데. 뭐, 그가 오지를 않으니 말할 기회도 없는 셈이었다.

사실 이 세계로 들어오기 전 연애고 남자고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거래처 사람이 밥을 먹다가 휴지만 먼저 건네줘도 이게 무슨 일일까 고민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그게 호감이 아니고 업무를 위한 한 방식, 또는 그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도 이제 그런 건 다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다른 때보다 바람이 좀 더 차네요. 길이가 긴 로브를 걸치시는 게 좋겠습니다.”

“엇, 감사합니다.”

멍하니 차에 우유를 붓던 내 어깨 위로 스륵 옷이 얹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쥴이 어느새 로브를 가져와 둘러 준 거였다.

흠, 이런 것도 참 친절하고 설레는 행동이 맞는데 에스티안 같은 느낌은 전혀 안 난단 말이지.

이건 쥴이 내 호위 기사이기에 하는 행동이라 그런 것이고, 에스티안이 하는 행동은 그럼…….

“아가씨, 고민 있으세요?”

“어, 아. 아뇨, 없어요.”

“그런 얼굴로 그렇게 말씀하시면…….”

쥴은 우는 시늉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 편하게 있으려 해도 자꾸 에스티안 생각이 났다. 가만히 있기보다는 정원을 산책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저택 자체도 안전하고 정원을 지키는 기사 수도 늘렸기 때문에, 나는 그냥 혼자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오겠다고 하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후, 하.”

숨을 내쉬면서 팔도 크게 휘저었다. 머릿속을 비우고 싶어서 일부러 그리했는데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지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화단에 일렬로 피어난 꽃들까지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나았다. 바람 부는 대로 꽃향기가 은근하게 나서 기분도 좋고. 발에 채는 큰 돌 같은 건 주워서 한쪽으로 모아 놓으며 계속 걸었다.

그러다 문득 엘 생각이 났다.

벌써 까마득해졌지만 그때 참 즐거웠다는 건 분명하게 기억났다. 아직도 아리사 꽃의 꽃말은 머리를 맴맴 도는구나…….

아, 또 이쪽으로 생각이 흘러 버리는 것에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아리사 꽃을 심어 둔 꽃밭으로 갔다.

어? 그런데 꽃이 빽빽하게 핀 사이로 웬 더러운 천 같은 게…….

“엘?!”

꽃들 틈에 쭈그려 앉아 힘겨운 숨을 쌕쌕 내뱉고 있는 엘이 보였다. 머리도 잔뜩 헝클어져 있고, 얼굴에 흙먼지 같은 것도 가득 묻었지만 분명 엘이 맞았다. 내가 줬던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옷은 이미 넝마가 된 지 오래인 것 같았다. 원피스는 거의 다 찢어지고 시꺼메져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피가…….

피를 본 순간 내 이성은 마비되어 아무렇게나 말이 나갔다.

“이거 네 피야? 엘, 괜찮아? 나 그때 여기 정원에서 만났던 사람인데 기억나?”

“……아델린 아가씨. 그럼요, 기억나요. 그때 너무 잘해 주셨으니까…….”

말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모습으로 엘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힘없는 몸이 곧 앞으로 확 고꾸라졌다.

“엘!”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당장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엘을 감싸고는 그대로 들어 올렸다. 워낙 작고 마른 아이라 드는 데 무리도 없었다.

아이를 안고 나는 내 방 쪽으로 달렸다. 내 꼴을 본 쥴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이 아이는…….”

“다친 것 같아요. 치료사님을 불러 주세요. 얼른요.”

쥴은 달려 나갔고, 어느새 소란을 듣고 달려온 안나는 침대 위에 큰 시트와 푹신한 담요를 덧대 깔고는 엘을 받아 들어 눕혔다.

거칠게 숨을 쉬고는 있지만 엘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마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땀 때문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떨리는 손으로 넘겨 주었다. 그리고 이곳저곳 까져 상처가 난 아이의 작은 손을 꽉 잡았다.

“그때 아가씨와 잠시 시간을 보냈던 아이가 맞죠? 계속 왔는지 안 왔는지 확인하셨던.”

“네. 안 오길래 그냥 저는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아가씨부터 진정하셔야 할 것 같아요. 치료사분께서 금방 오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안나가 내 어깨를 감싸고 살살 두드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치료사가 왔다.

메이스프릴가 일원들만 쭉 치료해 온 그는 처음 보는 얼굴에 잠시 놀란 듯했지만, 나나 안나의 모습을 보고는 별말 하지 않고 곧장 엘의 상태를 살폈다.

의식이 없는 엘이 숨은 잘 쉬는지, 동공 반사는 일어나는지, 체온은 어떤지 등 꼼꼼히 확인한 뒤 나온 결론은 싱겁도록 평범한 감기였다. 

끙끙 앓으며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엘을 겨우 주치의가 일으켜 세워 급한 대로 약을 먹였다.

염증을 가라앉히고 몸 전체를 보하게 하는 약초들을 섞은 것으로, 엘은 인상을 찌푸린 채 그걸 먹고는 곧장 잠들었다.

주치의의 말에 따르면 엘이 영양실조 상태인 데다 체온도 낮은데, 등이나 팔다리 등 곳곳을 맞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몸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심하게 앓는다는 거였다.

다행히 피를 많이 흘린 것은 아니라 했고, 그저 살이 여려 몇 대 맞은 것으로도 피가 났을 것이라고…….

얘기를 들을수록 울컥하면서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엘이 어디서 일한다고 얘길 했던가? 일하는 데서 설마 맞았나? 아니면 그저 길에서 봉변을 당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때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먹을 걸 잔뜩 챙겨 줬어도 이런 일이 생기고 나니 그걸 엘이 다 먹었을지도 의문이었다.

여분의 약을 챙겨 준 치료사가 나가자 방에는 엘을 제외하고 나와 안나만 남았다.

“아가씨도 너무 놀라셨어요. 옆의 큰 방에서 주무실 수 있도록 해 놨으니 거기서 쉬고 계세요. 아이가 깨면 제가 아가씨께 가서 알려 드릴게요.”

“아…… 그래도 제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얼굴색이 안 좋으세요, 아가씨. 그러다 아가씨가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저는 물론 저 아이도 마음이 좋지 않을 거예요.”

“하……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저 아이 이름은 엘이에요. 엘이 처음 왔을 때 자고 가라고 했는데 거절하길래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제가 보내 버렸어요. 그때 잡아야 했어요. 그랬으면…….” 

“절대 아가씨 잘못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엘이 안전해졌으니 그것만 신경 쓰시고 안심하셔도 돼요.”

안나는 나를 아예 밀면서 큰 방으로 데려다주고는 눕혀서 이불까지 덮어 주고 나갔다. 나도 덩달아 긴장이 풀린 건지 곧장 잠이 들었고, 두어 시간이 지난 뒤 안나가 약속대로 날 깨우러 왔다.

대충 머리를 정리하고 나가겠다고 안나를 내보내곤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선잠을 자다 일어나서인지 정신이 멍했는데, 그 와중에도 씁쓸함이 밀려왔다.

아마 내가 정말로 엘을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으면 그 방에 계속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아무리 엘이라고 해도 일단은 새로운 사람과 얽히게 되는 거니까, 무의식중에 은둔하는 성향이 또 나와서 부담스럽고 피곤해질 수도 있다고 느끼며 순순히 밀려난 것일 테다.

그렇게 엘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만났는데도, 심지어 엘이 다쳐서 왔는데도 나는 이런 식으로 대처하는구나.

정말로 누굴 욕할 게 아니라는 생각과 엄청난 책임감이 동시에 들었다. 얼른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어! 아델린 아가씨!”

병색이 완연하고 자잘한 상처가 나 있는 얼굴로 엘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불렀다. 그 말간 미소를 보자 왈칵 눈물부터 나왔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아니, 다쳤고 아프니까 무사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 내가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가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고 아가씨가 또 저를 도와주셨는걸요. 말도 편하게 하셔도 돼요…….”

내가 눈물을 줄줄 흘리자 엘도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안나나 다른 시녀들은 갑자기 엉엉 우는 우리 둘을 보고는 안타까운 얼굴을 하며 가만히 있었다.

좀 진정된 다음 나는 엘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엘은 이 저택에서 나가 지내던 길로 돌아가자마자 왈패들과 마주쳤다고 했다.

엘을 포함해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구걸로 연명하는 그들은 갑자기 멀끔해진 엘을 보고 옷이며 먹을 것들이 다 어디서 났느냐 묻고는 다 빼앗고 때리며 괴롭혔다고. 그렇게 매일같이 때리다가 자기들에게도 돈과 먹을거리, 좋은 옷 같은 걸 가져다주면 더 이상 때리지 않겠다고 했단다.

이 이야기만으로도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올 지경인데 더 마음을 갑갑하게 만드는 건 엘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아가씨, 저는 아가씨한테 돈이나 먹을 것을 달라고 하러 온 게 아니에요. 그들한테 아가씨 얘기도 하지 않았고요. 그냥 저는 다시 그때 봤던 꽃밭이 너무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돈이랑 먹을 걸 달라고 하면 뭐 어때요. 우리는 그때 이미 친해졌잖아요. 다 줄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엘이 쓰고 먹는 것도 아니고, 그들한테 갖다주는 건 너무 화나네요.”

“아가씨…….”

“내가 그때 줬던 것도 엘이 이용하지 못했다니 너무 마음 아파요. 그때 내가 엘을 잡았어야 했어요. 엘은 아무 잘못 없으니까 걱정 말아요.”

나는 엘을 꼭 끌어안아 준 다음 시녀를 시켜 뜨거운 물로 씻게 했다. 그리고 온몸에 상처를 금방 아물게 하는 약초 연고를 바르게 하고 새 옷을 입혔다. 아주 묽은 수프와 약도 먹였다.

아까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진 엘은 자신을 위한 모든 게 일사천리로 끝나자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이걸로 끝이 아닌데. 사실 이제 시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