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아가씨, 무도회 전날까지 이렇게 저택에만 계셔도 되는 거예요? 황실 무도회니까 그 전에 다른 영애분들이 여는 티파티에 참여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좀 나누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간단한 다과회 초대장이 몇 개 왔는데요.”
“괜찮아요. 어차피 황실 무도회 가서도 별말 안 하다 올 것 같아요. 순전히 예쁜 드레스를 맞춰서 가는 거나 다름없어요.”
“아가씨, 이제는 몸도 괜찮아지신 것 같은데, 아가씨가 이전만큼 사교계 활동을 많이 하시지 않는 거 같아 걱정돼요. 정말 괜찮은 건가요?”
“그냥 좀 지쳤나 봐요. 사람 많은 곳에 가서 너무 혼자 열 내고 돌아다니는 게 피곤하기도 하고요. 어차피 똑같이 차 마시고 얘기하는 건데 이렇게 집에서 좋아하는 차 마시고, 케이크 먹고, 안나랑 얘기하고 하면 더 좋잖아요.”
“아아, 아가씨…….”
뻔뻔하게 웃으며 건네는 내 말에 안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찻주전자에 뜨거운 차를 더 채워 주었다.
한숨을 쉬면서도 테이블 위의 먹을거리가 떨어지지 않게 계속 갖다주고 내가 혼자 생각할 수 있게 자리를 비워 주는 게 참 고마웠다.
지금은 해도 중천이라 쥴 경도 나오지 않은 상황이어서, 정말 나만의 평화로운 휴식 시간이었다.
정말 며칠을 해도 질리지 않는다. 할수록 짜릿해. 즐거워!
그렇게 생각하며 기지개를 쭉 켜고 허리와 목을 몇 번 옆으로 돌리는데, 순간적으로 정원 내 숲이 우거진 쪽에 무언가 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
크기가 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작은 짐승인가?
백작가쯤 되니 저택 안의 정원인데도 그런 동물이 있을 수 있는 건가.
사실 어딘가 의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면 곧바로 쥴 경을 불러 저쪽을 확인해 달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위험하다거나 이상한 느낌은 없는 듯해 나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티타임을 마친 뒤 나는 안나를 비롯한 여러 시녀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황실 무도회에 간다면 당연히 전날 이런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였다.
좋은 향기가 나는 물에 목욕을 하는 것은 물론, 그녀들은 부드러운 천으로 온몸을 마사지하듯 문질러 줬고 살결이 뻣뻣하지 않게 향유 같은 것도 발라 주었다.
약초를 으깨 만든 팩 같은 것도 얼굴에 얹어 주었고, 손톱과 발톱도 매끄럽고 반짝거리도록 관리해 주었다.
이게 무슨 호사냐…….
누가 보면 내일이 거의 세상에서 열리는 마지막 무도회 날이라서 혼을 다 바쳐 준비하는 줄 알겠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좋아서, 나는 그들에게 그저 몸을 맡긴 채 감사합니다만 연발했다.
모든 과정을 마치자 나는 평소보다 정말 뽀얗고 매끄러워졌다. 그렇게 노곤노곤한 상태로 푹 잘 수 있었다.
극진한 대접은 무도회 당일에도 이어졌다.
무도회는 저녁에 열리는데 왜 아침부터 다들 바쁜가 의아했다.
사실 내가 게을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게 더 맞았다. 저녁때 약속이 있는 셈이니까 그 전까진 뒹굴뒹굴해도 되잖아!
그러나 안나는 재빠른 손길로 나를 일으켰다.
“저녁때 입으실 드레스가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맞을 수 있도록, 얼굴에 분가루가 더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하는 거지요. 귀찮으셔도 참으셔야 해요.”
아침부터 이어진 준비에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황궁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쯤 모든 시녀들의 고생 덕에 나는 정말로 다시 태어나다시피 했다.
확실히 드레스의 코르셋도 더 아름답게 조였고, 눈가나 입술에 바른 것들도 겉돌지 않았다.
스스로가 이렇게 아름다운 꼴을 하고 외출하게 된 게 얼마 만인지.
늘 찌들어 지냈던 과거가 떠올랐다. 약간 주말에 클럽 가는 것 같은 느낌인가.
적당한 비유는 아닌 것 같았지만 어딘가 웃겨 킥킥 철없는 웃음이 나왔다.
이 생활, 은근히 좋네. 물론 무도회처럼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온 다음에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지겠지만.
“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세요.”
“감사합니다. 다 안나가 예쁘게 꾸며 주신 덕분이에요.”
가문의 마차를 타고 황궁까지 가던 중, 불현듯 리아나 생각이 났다.
사실 나는, 그러니까 아델린은 이런 무도회가 있을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리아나를 데리고 함께 출발하여 무도회장 안으로 입장도 같이했다.
리아나가 워낙 겁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아 아델린이 옆에서 이것저것 신경 써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서로가 각자 자기 가문의 마차를 타고 간다면, 둘이 따로 가게 되는 첫 무도회가 되는 셈이었다.
아…… 소문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늘 붙어 다니던 애들이 따로 왔다고 분명 뭐라고 할 텐데.
그리고 소문은 둘째 치고, 나도 내심 리아나가 걱정됐다.
감정 상한 채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는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기에 무도회장 안에서 마주쳐도 어색할 게 뻔했다.
하…… 벌써 피곤해졌다. 애초에 난 여기 간식이나 좀 먹고 괜찮은 술 있으면 좀 마시자는 생각으로 온 건데.
하지만 미약하게 남아 있던 죄책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무도회가 열리는 황궁의 홀 앞에서 리아나를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지금 꽤 빨리 도착한 상태고, 그녀가 일찍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앞에서 그녀를 마주치면 내가 요새 좀 상태가 별로여서 그랬다, 서운하게 했다면 이해 좀 해 줘라 하는 식으로 둘러대며 사과를 하면 될 것 같았다.
저 대화하는 모습을 듣고 보기 전까진 말이지.
“세상에, 정말이에요?”
“사실, 아델린의 마음은 잘 모르지만요. 그녀가 이전과 다르게 저를 대해서요.”
“어머…… 어쩜. 늘 영애를 데리고 다녔던 게 사실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그랬던 거 아니에요?”
특유의 콧소리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게 리아나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리아나는 의외로 일찍 와서는 무도회장 안에서 주위 몇몇 여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부채는 결국 샀구나. 저렇게 쓰려고.
몇 마디 대화만 들었지만 무슨 얘길 하는지도 다 알 수 있었다
그때 살롱에서 소리 질렀던 것의 연장이었는데, 사실이 아니라 리아나에 의해 각색된 채였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고 화도 좀 났지만 궁금함이 먼저였던지라 나는 조심스럽게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서 그녀들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선 채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내 얘기라 그런지 참 잘도 들렸다.
“드레스 골라 줄 때도 냉기가 철철 흘렀다면서요?”
“그렇긴 했지만, 아델린이 피곤하다고 했어요. 크게 다쳤다가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었기도 했고요.”
“리아나 영애가 황태자 전하랑 점점 가까워지니 배가 아파서 그런 거 아니에요?”
“에이, 아델린은 그럴 친구가 아니에요. 물론 그녀의 마음은 그녀 자신만이 알겠지만…….”
너무 교묘해서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다. 이거 뭐, 호박씨도 아니고! 내 편을 들어 주는 척하면서 은근히 나를 천하의 나쁜 년으로 만들고 있잖아!
이걸로 리아나가 숫기 없고 수줍음 많은 여린 캐릭터라는 사실은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여태까지 그런 척한 건가? 아니면 단순히 내 태도가 변해서?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한순간에 사람이 변하려고.
아, 역시 이렇게 사람 몰리는 곳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벌써 위축되고 피로가 쌓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사실 관계를 바로잡고는 싶고 어처구니도 없으니, 당장 쫓아가서 머리채 잡고 끌어내 버려?
하지만 이미 저쪽은 그들만의 생각에 푹 빠져 사실 관계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저 저 멍청한 부채를 흔들며 서로를 위로하기 바쁠 뿐…….
내가 지금 가서 너 뭐라고 했어! 왜 거짓말해! 하며 따져도 승산이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뭐, 어차피 사실상 이 무도회만 대충 끝나면 나는 혼자 저택에서 놀 테니까 한번 보고 말 애들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게 최선이려나.
약간 환멸이 난 나는 와인잔들과 가벼운 간식이 차려진 구석의 테라스로 나갔다.
다행히 테라스 자체도 큰 홀 내 사이드에 여러 개가 있어, 그중 조용히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시녀들도 무례를 저지르지 않는 선에서 테라스의 커튼을 조심스레 걷고선 이것저것 불편하지 않게 음식이며 숄이며 챙겨 주고 있어서 정말 가만히 쉴 수 있었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면서 황궁 홀 뒤편에 자리한 정원에서부터 풀 냄새가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나는 와인잔 하나를 집어 들고 마시며 사람이 많은 무도회임에도 모처럼 평온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시야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쳐진 커튼 사이로 춤곡 음악이 흘러 들어왔고, 틈새로는 빛나는 홀의 모습이 보였다.
친구의 소설을 볼 때마다 내심 꿈꾸던 장면이긴 했다.
시끄럽고 혼란스러울지라도 반짝거리고 아름다운 거대한 홀에서 열리는 무도회. 물론 보면서도 ‘아, 되게 피곤하겠다.’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 소설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기껏해야 마트에서 네 캔 묶어 세일하는 세계맥주 사다가 마시는 것이 휴식의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걸 얻은 듯 행복했다.
힘들게 일을 끝내고 오는 길에 홀린 듯 맥주와 이것저것을 사서는 집으로 들어와 음악을 틀고 눕는 거다. 참 소박하고 즐거웠지.
그랬던 내가 지금은 이런 휘황찬란한 곳에 앉아 몇 입만으로도 고급스러운 게 느껴지는 와인을 쌓아 놓고 마시고 있다니.
단지 그런 음주 생활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사실 이전에는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셔서 의지할 곳도 없었다. 그러나 여기선 아델린의 부모인 백작과 백작 부인이 나를 아껴 주고 있다.
내가 깨어난 날부터 그 바쁜 와중에도 나를 늘 챙기고 안나가 나를 살피도록 했다.
제정신을 못 차리고 내가 해 오던 대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해도 백작 부부는 이상하다 여기지 않고 그저 나를 지켜보며 다 괜찮다고 했다.
안나가 이전의 아델린과 달리 집 안에 틀어박힌 나를 걱정하는 것의 배는 더 걱정하고 전전긍긍했으니 말 다 했지. 그런 대접은 거의 처음이었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짧았던 이곳에서의 생활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지나갔고, 새삼 팔자 폈다는 생각이 들어 진심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국의 용맹하고 거대한 붉은 사자, 황제 폐하 드십니다.”
그때, 황제가 홀로 입장한다고 우렁차게 외치는 말과 큰 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차례로 황후, 황태자 유리엘까지 모두 들어옴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이때는 테라스는 물론 황궁 바깥으로 잠시 나갔던 귀족들까지 모두 홀에 모여야 했기에, 나도 슬그머니 테라스에서 홀로 들어갔다.
어느새 황실기사단과 각 귀족가에 속해 있는 사병 기사단이 정복 차림을 한 채 황제가 걸어 나올 길 양옆에 일렬로 서 있었다.
황실기사단장인 에스티안은 제일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시선 한번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고 오직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매섭고 차가워 보이는데 참 멋있네. 그렇지 않아도 그를 보고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를 내는 귀족 영애들이 몇몇 보였다.
이번 마물 퇴치에 우리 백작가 기사단은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가문 기사단 사람 중에서도 나를 호위해 주는 쥴 경 말고는 아무도 모르니, 여기 모인 사람들을 다 처음 보는 건 당연했다.
이 소설 속에 이렇게나 많은 기사단이 있었구나. 생각할수록 신기하네.
“알다시피 오늘은 북쪽 숲의 마물들을 성공적으로 퇴치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 큰 부상자 없이 훌륭히 토벌을 마친 황실기사단과 각 후작가, 백작가 기사단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네. 앞으로도 계속 잘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도 함께하겠소. 당분간은 한숨 돌려도 될 듯하니 오늘은 그간의 노고를 잊고 편히 즐기시게.”
사실 친구가 소설을 쓸 때는 황제나 황후 같은 사람들이 딱히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중요한 건 황태자 유리엘과 리아나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저 멀리 보이는 황제나 황후의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역시 황제는 황제인지 단순한 인사를 전하는 것에도 그 기운이 엄청났다.
나이가 꽤 들었음에도 그 눈빛이 형형하고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괜히 거대한 사자라고 한 게 아니구나.
“폐하께서는 아직도 정정하시네요.”
“그럼요. 대대로 내려오는 붉은 눈 중 가장 핏빛을 띤다고도 하잖아요.”
“그래서 붉은 사자 중 가장 강하신 분이라는 얘기도 있지요. 그래도 곧 황태자 전하께서 제위에 오를 날이 올 텐데요. 전하께서도 큰 사자의 기운을 떨치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오, 저는 몇 년 전 사냥하시는 모습을 본 적 있는데 분명 사자의 기운을 모아서 검에 두르셨어요. 검이 분명 붉게 빛났지요.”
“역시 황태자 전하시군요…….”
다시 테라스 쪽으로 가려던 나는 귀족들이 조곤조곤 나누는 대화를 은근슬쩍 듣고 사람이 별로 없는 그 부근에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의 소설에 남긴 나의 흔적이 이렇게 발견되고 있구나 싶었기 때문에.
‘남자 주인공들이 그냥 칼만 써서 싸우는 건 재미없으니까…… 뭘 추가하면 좋을까?’
‘뭐니뭐니 해도 동물의 기세 같은 거 아니겠어? 황태자는 무조건 사자나 호랑이로 해. 아, 용이 나으려나? 하여간 그런 강력한 기운을 싸울 때 뿜어내는 거지. 그 힘으로 싸우는 거고.’
‘용은 좀 너무 간 것 같아. 호랑이는 어딘가 동양스러운데. 사자가 좋겠다. 사자로 결정. 또 다른 남자 주인공은? 얘도 똑같이 사자로 해서 황태자랑 싸우게 해 버려?’
‘똑같으면 재미없지. 다른 하나는 그럼 용 하든가.’
‘용이 사자보다 센 거 아냐? 그럼 황태자가 너무 약해 보이잖아. 뭐로 하지…….’
용과 호랑이. 과연 용인가.
사실, 그렇게 생각을 던지듯 말하면 내 말을 대부분 들어주는 친구가 귀여우면서도 웃겨서 반은 농담으로 한 얘기였다.
이것저것 때려 넣어 봤자 어차피 이야기의 주된 흐름은 리아나가 사랑을 찾는 거였기 때문에, 그렇게 검술 능력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다짜고짜 동물의 힘을 빌려 싸운다니, 어처구니없을 법도 한데도 친구는 그걸 적용하겠다고 했더랬다.
하지만 나는 동물의 기운이 나오는 부분을 읽은 기억이 없다.
분명 그런 설정만 해 놓고 진짜로 소설에 표현된 적은 없을 텐데.
이래 봬도 친구의 글이라 열심히 읽어서 내가 기억하는 게 틀릴 리도 없는데 말이다.
여기선 이들 나름대로의 삶이 진행되니까 이렇게 나타나는 건가? 저 귀족들의 말을 들으면 동물의 기운을 이용한 검술 같은 게 제법 그럴싸하게 자리 잡고 있는 듯한데.
뭐, 황태자가 싸우는 것도 볼 일이 없고 하니 더 신경 쓸 필요는 없나. 나는 다시 테라스로 나가려고 몸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나를 붙잡는 천연덕스러운 리아나의 목소리가 그 앞을 막았다.
“저, 아델린.”
아까의 상황이 떠올라 별로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저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번엔 내가 너무 미안했어. 네가 아팠다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한 줄도 모르고 철없이 졸랐나 봐.”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리아나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해선 안 됐는데. 미안해. 용서해 줄 거지? 아, 그러고 보니까 저쪽에 황태자 전하가…….”
그 뒤는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나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가느다란 목소리와 나긋나긋한 말투, 더불어 발개진 볼이 그녀를 한층 더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게 만드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 지금 와서 말을 건네는 이유도 자길 황태자 앞에 데려다 달라는 거 아니겠는가.
난 이미 괘씸하게도 네가 나를 비난하는 얘기를 다 들었지.
그래서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아까 와인 몇 잔 마신 게 슬쩍 올라오는 건지, 나도 모르게 말을 던지다시피 했다.
그 와중에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아서 목소리를 낮춘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내 욕은 다 하고 온 거야? 마저 더 하지 않고.”
“어, 어? 그게 무슨…….”
“보니까 나 말고 너 데리고 다닐 친구들 많은 것 같던데. 왜, 걔네는 너를 데리고 다니진 않겠대?”
“아, 아델린, 그게 무슨…….”
“걔네야말로 너를 질투해서 그러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저번에 나한테 얘기한 것처럼 걔네한테도 한번 물어봐.”
“아델린, 그, 그거는…….”
“아까 보니까 말도 잘하던데. 설마 남 헐뜯는 말만 잘하고 다니는 건 아닐 거 아냐, 그렇지? 그래, 이제 혼자 움직이면서 너 좋아하는 사람한테 말도 걸고 해 봐야지. 난 좀 쉴게.”
천천히 말을 내뱉은 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울기 일보 직전인 된 리아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다음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방금 뭘까요? 두 영애, 항상 같이 다녀서 사이가 좋은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봅니다.”
“가만 보니 리아나 영애가 아델린 영애의 험담을 하고 다녔나 본데요?”
“원래 절친한 사이인 만큼 자주 다투기도 하는 게 아닙니까?”
“아니, 아델린 영애만큼 리아나 영애를 챙겨 준 사람이 어디 있다고. 험담할 게 뭐 있다고 그랬대요?”
목소리를 크지 않게 냈지만 사교계의 귀와 입은 언제 어디서나 열려 있는지라, 이미 주변의 다른 귀족들이 내 얘기를 듣고 리아나를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아델린이 리아나를 사교계 이곳저곳에, 특히 황태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데리고 다녔던 건 대부분의 귀족들이 알고 있었기에 그 반응들이 더 금방 오는 것도 같았다.
눈물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꾹 깨물던 리아나는 결국 그 자리를 떠나 홀의 복도 쪽으로 나갔다. 더불어 그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다른 영애들은 심지어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아델린 영애, 그동안 리아나 영애만 챙기느라 고생했잖아요.”
“그러게 말이에요. 리아나 영애가 수줍음이 많은 거라 생각했는데, 염치가 없는 건가요?”
리아나의 꼴을 본 다음, 그녀의 흉을 보는 주위 영애들의 말을 듣고 있으니 또 얄팍한 동정심이 일어났다.
이렇게까지 민망하게 만들려던 건 아닌데.
사실 리아나는 그냥 늘 같이 다니던 내가 계속 함께 있어 줬으면 했던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허튼 소문을 퍼뜨린 건 괘씸하긴 하니까 지금은 그냥 이대로 흘러가게 둬야겠다.
뜻밖의 에너지 소모에 지친 나는 겨우 테라스로 나갔다. 약간은 흥분했었는지 얼굴에 닿는 바람이 서늘한 게 기분이 좋았다.
들려오는 음악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그제야 좀 마음에 일던 동요가 잦아든 느낌이었다. 다시 평화가 찾아온 거다!
그런데 그 안정감에 와인잔을 좀 많이 비운 탓인지 점점 취기가 오르는 듯 눈앞이 어질어질해져 왔다.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귀가 후마다 맥주를 마셔 온 내 경험이 몇 년인데.
맥주도 도수 낮지 않은 것으로 몇 캔이나 마시는 게 익숙한 나인데!
속이 안 좋은 것도 아니며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도 없지만 누군가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돌리는 것처럼 현기증이 났다.
급한 대로 간이 소파에 몸을 기대려고 하는데 정신이 까마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숙취조차 한 번도 없던 내가 처음으로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취한 게 친구의 소설 속에서라니…….
한 손으로 빙빙 도는 눈을 가리고 다른 손을 뻗어 소파를 짚으려는 순간, 내 어깨와 허리를 강하게 붙드는 손길이 있었다.
“건강해져서 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목소리와 말만으로 당연히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에스티안.
맞닿은 그의 몸에서는 은은한 숲과 나무 향기 같은 게 났다.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의 그와 참 안 어울리는 향이라는 생각과, 그럼에도 왠지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미처 다 들지 못했던 고개를 들자 ‘쯧쯧’ 소리를 낼 것 같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에스티안과 눈이 바로 마주쳤다.
갑작스럽게 좋은 향기를 몰고 온 그의 얼굴까지 보니 당황해서, 내 대답은 너무나 쾌활하고 짧게 나갔다.
“어, 에스티안 경.”
“조심하십시오.”
보는 눈이 많은 황궁이라서 그는 격식 있는 말투를 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에스티안은 홀 안에 있지 않았나? 언제 온 건지 그는 나를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히고는 자기도 옆에 앉았다.
나를 붙잡은 손의 힘 자체는 강했지만 그럼에도 깃털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행동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듯이 기대니 눈앞이 돌던 것도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잠시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데 이마 위로 에스티안의 손이 얹혔다.
저번부터 느꼈지만 참 스킨십에 스스럼없어. 내가 나불댄 바람둥이 설정 때문인 것 같지만…….
“열이 나는 것 같군요.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은 겁니까?”
“아뇨, 아뇨. 그…… 술을 좀 마셔서 그런가 봐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핫.”
에스티안은 황당하다는 듯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움직여 흐트러져 있던 내 앞머리를 살짝 정리했다.
자기 딴에는 정리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어딘가 엉성한 느낌이 드는 걸로 봐선 그냥 만지작대고 있는 것 같았다.
에스티안의 얼굴이 약간 가까워져 있는 상태인지라 그의 옅은 숨결이 느껴졌다.
나한테서는 술냄새가 진동하겠구나…….
민망함에 이제 그만하라고 얘기를 하든가, 내가 직접 그의 손을 잡아서 내리든가 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술기운이 도는 건지 몸도 무겁고 귀찮기도 해서 그냥 두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네? 아뇨, 없는데요. 왜요? 얼굴이 좀 많이 그런가요? 술 때문에 그런 걸 텐데…….”
“얼굴은 조금 빨간 것 빼곤…… 문제없군요. 예쁩니다.”
“네에?
절로 눈이 커지며 높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말이었다.
심지어 그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기까지 했다.
예쁘다는 말이 지금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안 좋은 일 있냐고 물어본 건 에스티안 자신 아닌가? 문제가 없어? 예뻐?!
아, 설마 그가 이러는 것도 바람둥이 스킬 중 하나인가?
혼란스러운 나는 그를 한 번 쳐다봤다가 옆으로 눈을 굴렸다가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봤자, 이성으로부터 저렇게 간질간질한 말을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않은 나였기에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모솔이니 그게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알 턱이 없는 거지, 뭐.
다소 바보 같아 보였을 게 분명한 나를 보며 에스티안은 미소보다 조금 더 큰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당황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다만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아서 물어본 거였습니다. 보통 기분이 좋지 않으면 과음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그는 잠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깊은 바다가 떠오르는 눈동자였다. 푸른 불꽃 같기도 했다.
붉은 불꽃에 비해 서늘한 색이면서도 사실은 가장 높은 온도를 갖는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듯했다.
아름답구나……. 홀린 듯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때 리아나 영애와 다투셨다고도 해서.”
“아.”
에스티안이 건넨 뜻밖의 말에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결국 그는 리아나랑 다퉈서 기분이 좋지 않아 술을 퍼마신 게 아니냐고 아주 정중하게 묻고 있는 거였다.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단 말야? 섬세하네, 정말.
그가 나름대로의 걱정을 표하는 것 같아 나는 마음이 어쩐지 따뜻해졌다. 정말 푸른 불꽃 같은 사람이구나.
“에스티안 경이 그렇게 신경 써 주시다니, 너무 감사해요. 그런데 부끄럽게도 그냥 술만 많이 마셔서 그런 거예요. 자만했다고나 할까요. 잘 마실 줄 알았는데 마시다 보니 좀 그랬나 봐요.”
“아, 그냥 술을 많이 마셔서 그렇다…….”
에스티안은 내 대답이 어이없었는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넘어가나 했는데, 그가 예상외의 질문을 던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그런 걸 물어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그럼 리아나 영애와의 문제는 다 해결하신 겁니까?”
“어…… 아니요. 허허.”
그냥 대충 둘러댈 수도 있었지만, 왜인지 헛웃음과 함께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어차피 술 취했다는 것도 밝혔겠다,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내 얘길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내심 리아나에게 그렇게 쏴 대고 나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으니까 누구든 좀 들어 줬으면 하는 거지.
그런 마음이 왜 에스티안 앞에서 또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첫 번째 만났을 때도 나는 리아나가 나를 이렇게 버리고 갔어요, 하고 거의 투정 부린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설마 이런 것도 전부 바람둥이의 한 측면인가?! 은근히 속마음을 풀어 놓고 싶게 되는 것 말이다.
아주 냉정하게 따진다면 무도회장 내 테라스에 남녀가 함께 있는 것을 단순한 우정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에스티안은 내가 혼자 있던 테라스에 갑자기 들어오기까지 했지.
이렇게 이성과 오래 대화해 본 적도 없어서 이 상황을 어떻게, 어디까지 생각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고…….
그럼에도, 얼마든지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한없이 진하고 깊은 눈빛을 한 채 여전히 나를 보고 있는 에스티안을 마주하니 나는 이번에도 입이 저절로 열렸다.
“저는 저번에 다퉜던 게 저 때문인 것 같아서 리아나한테 사과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리아나는…… 뭐, 다른 영애들에게 저에 대해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더라고요. 사실 그냥 제가 리아나를 많이 서운하게 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이해할 수도 있었는데 괜히 저도 화가 나서 뭐라고 했더니 리아나가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나가 버렸어요.”
천천히 얘기하고 나니 또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 나는 민망해졌다. 이게 ‘걔가 내 욕해서 나도 걔 욕했어!’ 하는 것과 뭐가 다르냔 말이지.
황실기사단장이라면 그동안 귀족들이 이런저런 일로 싸우는 건 수도 없이 봤을 것이다.
특히 황실에서 이렇게 무도회가 열리는 경우 간간이 언성을 높이는 영애들이나 칼부림을 하려고 흥분한 영식들을 제지하는 건 대부분 황실 기사들과 영애들 각자 집안의 기사들 몫이니까.
영식들은 무력으로 단번에 제압할 수 있다지만, 영애들의 경우 대부분 아가씨가 좀 더 참으세요, 하는 식으로 마무리되기 십상이었다.
그러면 영애들은 더더욱 그 분을 못 이기고 못된 짓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까도 테라스로 오기 전 얼핏 그러고 있는 영애 몇몇을 봤다.
고의로 생크림이 가득한 케이크를 한 손에 들고 언제든 그걸 싫어하는 이에게 엎어 버리려고 준비하고 있는 영애 한 명과, 그걸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그녀의 친구들인 것 같은 이들의 모습을.
어쨌든 흔해 빠졌다면 흔해 빠진 일이기에 이렇게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을 필요가 없는 얘기인데, 에스티안은 내가 얘기하는 내내 나를 보고 있다가 말이 끝나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는 것만큼 번거로운 게 없지요.”
“…….”
“그러니 미리 그렇게 되지 않도록 바로잡은 거라면, 잘하셨습니다.”
잘했다고? 내가 잘했다고?
어지러워 소파에 푹 기대고 있던 나는 말을 잘못 들은 줄 알고 상반신을 확 일으켰다.
에스티안은 그 반동으로 휙 뒤로 넘어가려다 취기에 눈앞이 다시 돌아 숨까지 들이켠 나를 어느새 붙잡았다. 그러고는 작게 ‘조심해야지.’ 하고 속삭인 다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마음이 많이 안 좋으셨을 테지요. 이렇게 얘기하기까지 힘드셨을 거란 것도 압니다. 애쓰셨습니다. 물론 앞으로 술은 드시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만.”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에스티안을 바라보았다. 덤덤히 말하는 듯하나 어딘가 멋쩍으면서도 진심이 꾹꾹 담긴 느낌으로 그는 분명 내게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연인은커녕 사람도 많이 만나지 않는 내가 이런 위로를 받아 본 적이 있던가.
그 순간 나는 비단 나뿐만이 아니고 아델린 그 자체도 왠지 이런 위로를 받아야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구장창 리아나만을 쫓아다니며 하나라도 더 알려 주려 위하던 그녀에게도 누군가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말해 줘야 하지 않았을까?
그 얘길 내가, 아델린이 들었으니 이렇게 갑자기 마음이 북받쳐 오르는 거겠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라 눈앞이 뿌옇게 되었다.
이걸 흘린다면 정말 에스티안에게 못 볼 꼴 다 보이게 돼 부끄러워질 것이었으므로, 나는 눈을 위로 치뜬 채 부들부들 떨리는 입가에 힘을 주곤 입술을 이로 물었다.
그 순간 내 손에 무언가 닿았다.
“아! 죄송합니다.”
무의식중에 내가 그걸 확인하려 고개를 확 내리는 바람에, 내 손에 닿아 있는 에스티안의 손 위로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나는 그 흔적을 얼른 없애고 싶어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올려 재빠르게 눈물을 훑어 냈다.
찰나였는데 그 손이 너무 따뜻해 확 잡고 싶다는 충동까지 일었다.
그의 말대로 내가 정말 마음이 별로 안 좋아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맞겠지.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다시 보니 에스티안은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내 손이 그의 손에서 떨어지고 나서 잠시 아무 행동도 없던 그는 손수건을 쥐여 줬다.
“손이 차갑습니다. 좀 진정하신 다음 저택으로 돌아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민망해서 손수건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속수무책으로 흐르는 눈물을 그냥 놔둔 채 그걸 붙잡고만 있는 건 더 이상할 것 같아 나는 에스티안이 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테라스 바깥에서 춤곡이 크게 들리고 다들 춤을 추느라 정신없어 보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그 소음들에 내 소리가 묻히길 바라면서 조용히 끅끅거렸다.
에스티안 정도의 기사라면 소음과 관계없이 내가 흉하게 우는 소리를 아주 선명하게 잘 들을 수 있을 게 뻔하지만,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내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손수건에서도 침착한 에스티안의 향기가 나서인지 눈물도, 요동치던 마음도 곧 가라앉았다.
“에스티안 경,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 손수건은 제가 깨끗하게 해서 돌려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아델린 영애가 계속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오늘은 안은 채로 저택까지 모셔다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그는 어느새 살짝 장난기가 도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나도 묘하게 안심이 되어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술 마셔서 축 처지는 몸은 많이 무거우실 거예요. 아래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거기까지만 데려다주셔도 충분합니다.”
“오늘도 아델린 영애를 에스코트할 기회를 얻게 되는군요. 영광입니다.”
그는 나를 조심스레 일으킨 다음 다시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이 있는지, 계속 어지럽지는 않은지, 발을 디딜 수 있는지를 두어 번 확인하고는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살짝 감쌌다. 그렇게 우리는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조명이 밝지 않은 곳에 있다가 나와 곧장 마주한 커다란 샹들리에 때문에 눈이 부셨다.
기품이 넘치는 모습으로 끼리끼리 모여 춤을 추거나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또 누가 봐도 은밀한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은 남녀들이 모인 모습들은 어쩐지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마음 한편으로는 각종 여자관계에 대한 소문에 휩싸여 있는 에스티안과 내가 함께 있는 게 눈에 띄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을 것 같아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우리 쪽으로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홀을 잘 나와 넓은 계단을 한참 내려가고 황궁 바깥으로 가기 위해 메이스프릴가의 마차를 부르는 것까지 모든 것은 에스티안의 말과 행동으로 빠르게 이루어졌다.
신기한 건 황궁에 이런 곳이 어떻게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으로만 잘 골라 다녀 정말 시녀 하나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는 거였다.
물론 내가 지금 아델린이라 그런 것이겠지만 나는 아델린의 기억을 대부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간 리아나를 데리고 그렇게 황궁을 들락날락했음에도 이런 공간들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
아, 설마. 아니면 역시.
에스티안은 이곳저곳을 드나드는 것뿐만이 아니라 황궁으로도 여러 영애를 불러 은밀하게 그녀들과 노는 걸까……. 그래서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들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짧은 생각으로 내가 아무렇게나 말했던 설정이 참으로 충실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아델린 영애께서 와인을 마시고 몸이 안 좋아지셨으니, 되도록 요철이 적은 돌바닥 쪽으로 말을 몰도록.”
에스티안은 마부에게까지 신신당부하며 말을 건넸다.
내 얼굴색이 안 좋은 건 맞는지 마부는 ‘아이고, 아가씨, 어쩌다가 와인을.’ 하면서 에스티안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내가 그냥 발만 움직이면 되는 거였는데도 에스티안은 가뿐히 나를 안아 올려 마차에 태웠다. 황송한 대우에 나는 진심 반, 충동 반이 담긴 말을 꺼냈다.
“에스티안 경, 정말 감사합니다. 염치없지만 이 감사함을 이후에 표현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내 말에 에스티안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검은 머리와 푸른 눈을 슬며시 빛내고 있는 달빛보다도 더 반짝거리는 미소였다.
외양적인 취향이 반영된 건 둘째 치고, 이제는 매번 나를 배려해 주는 그가 그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델린 영애는 기사처럼 말을 하는군요.”
“네? 아, 그…….”
편안한 귀족 영애 생활이 완벽히 내 안에 자리 잡기에는 ‘네, 감사합니다. 부탁드립니다.’로 점철됐던 사회생활이 아직 안 지워져서인데 이걸 설명할 수도 없고!
입술만 달싹이는데 에스티안은 마차를 탄 내 쪽으로 훅 몸을 가까이했다.
그는 키도 커서 마차에 탄 나와 눈을 마주하는 게 그리 어렵지도 않아 보였다.
마차 문이 열린 상태였기에, 멀리서 본다면 마차를 타고 가려는 애인에게 키스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러면 안 돼……!
“다음엔 정말로 건강하게 웃는 걸 보여 줘.”
짧게 속삭인 에스티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몸을 떼고는 황실기사단의 정식 인사를 허리 숙여 하며 ‘조심히 들어가십시오.’라 말했다.
그는 마차 문을 직접 닫아 주며 씩 웃었고, 나는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도 못한 채 말이 달리는 대로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바로 그 사람 설레게 한다는 반존대야?
아니, 나는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 모든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나 설레도 되는 건가?
그냥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되나? 바람둥이인 걸 아는데도?
저런 행동을 에스티안은 정말 모든 여자에게 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여색을 밝힌다는 소문이 났어도 인기가 많은 게 이해가 갔다.
저렇게 멋지게 굴다니 정말 반칙 아닌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단 한 번의 덜컹거림도 없이 매끈하게 달리는 마차에 나는 헛웃음이 났다.
“아가씨! 술을 그렇게 많이 드시면 어떡해요! 어휴, 요 며칠 계속 술, 술 얘기하실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하하…… 죄송합니다.”
너무 피곤했던 나는 저택으로 들어와 별생각 없이 시녀들의 도움을 마다하지 않고 뜨거운 물로 목욕을 했다.
그런데 에스티안이 다 깨워 버린 줄로만 알았던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던 건지 현기증이 났다.
와인 딱 한 입 마신 게 전부라고 거짓말을 했기에 취기가 돈다고 말할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참으려고 했지만, 귀신같은 안나에게 바로 들켰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지르고는 금방 다른 시녀들을 불러내 온몸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대충 간추려 리아나 때문에 순간적으로 화가 나 와인을 좀 여러 잔 마셨다고 실토한 상태였다.
“아가씨, 늘 말씀드리지만 아가씨는 원래 체질상 술 드시면 안 된단 말이에요. 이전에도 그래서 쓰러지셨던 적 있잖아요. 그때 정말 얼마나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는지……. 그런데 오늘도! 이렇게!”
“아, 아, 아파요, 안나. 죄송합니다. 몰랐어요. 아델린은 술을 못하는 거 같은데 나는 잘 마시니까…… 앞으로는 조금만 마실게요.”
“취하셨네, 취하셨어. 그리고 조금? 아예 드시면 안 되지요!”
내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안나는 다른 시녀들을 물린 뒤 마지막으로 내 침대를 정리해 줬다.
“리아나 영애가 그런 생각을 하고, 심지어는 그렇게 얘기를 하고 다닐 줄은 몰랐네요. 아가씨가 그동안 리아나 영애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뭐, 그랬던 제가 요새는 안 잘해 줬으니 서운했을 법도 하다고 생각해요.”
“어휴, 아가씨도 참. 요새 정말 너무 침착해지신 것 같아서 오히려 걱정이에요.”
“안 침착해요. 그냥 만사가 귀찮고 부담스러워진 건데요, 뭐. 그리고 사실 저도 화나서. 리아나를 울려서 내쫓았으니 됐고요.”
“아, 그러셨어요? 정말 잘하셨어요. 이상한 얘기는 퍼지기 전에 빨리빨리 잡아야 해요.”
너무도 호쾌하게 나오는 안나의 말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괴상한 곳에 와서 저지르다시피 한 일에 두 번이나 잘했다는 얘길 듣고 나니 내내 막혀 있는 것 같던 마음이 어느새 녹아내렸다.
정말 공기처럼 혼자 살아왔던 이전엔 이렇게 가까운 데서 내 편을 들어 주는 사람들조차 없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가까이에 좋은 사람들이 생겼구나.
그렇다면 더더욱 이곳저곳 다니면서 발품을 팔 필요가 없는 거지.
그 가까운 사람에 에스티안이 있다는 건 좀 의아한 일이지만.
하여간 저택에서 반경 몇 미터 안 나가도 정말로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안나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는 혹시라도 몸이 또 안 좋으면 곧장 종을 울리라는 말을 하고는 방을 나갔다.
혼자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자려고 하니 오늘의 일이 사진을 한 장씩 넘기듯 천천히 떠올랐다.
와인과 맛있는 주전부리 먹겠다고 무도회에 간 거였는데, 내가 뭘 마시고 먹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에스티안이 위로하던 목소리만이 머리에 강하게 남아 윙윙 울리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사그라지고 튀어나온 감정은 여전히 아주 큰 물음표였다. 마차 안에서 혼자 생각하면서 이미 뚜렷하게 나타난 거였다.
이성과 이렇게 오래 대화한 것도 처음이고, 심지어 나는 그로부터 위로를 받기까지 했는데 이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이른바 그린라이트냐고!
근데 내 망언에 따르면 그는 여성 편력이 화려하기 짝이 없으니, 원.
활발해서 이곳저곳 다니며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낸 진짜 아델린이라면 알 수 있을까?
나로서는 화려했던 황궁도, 서늘한 바람이 살살 불던 테라스도, 갑자기 나타나 내 옆에 있어 주던 에스티안도 그저 꿈같았다.
하지만 그게 꿈이 아니었다고 확실히 보여 주는 듯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손수건에서는 계속해서 에스티안의 향기가 났다.
*
다음 날 나는 눈이 일찍 떠졌다.
생각은 많았을지언정 편안한 상태로 자서 이른 시간인데도 개운했다.
안나는 내가 일어난 걸 어떻게 금방 알고는 다른 시녀들과 함께 들어와 씻고 옷 입고 하는 준비를 도왔다.
저녁에 목욕하는 것보다는 간단했지만 온몸에 꼼꼼히 꽃향기가 나는 향유를 바르는 절차는 늘 있었다.
생각만으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름을 바르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라 너무 끈적이지는 않을까 했지만, 그런 게 전혀 없이 피부에 잘 스며들어 며칠 만에 익숙해진 참이었다.
드레스를 골라 입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대체로 화려한 것들이 많았지만 팔 부분은 어느 정도 활동을 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만 장식이 있었다.
그리고 입혀 주는 것도 모두 시녀들의 몫이니 나는 정말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됐다. 다만 코르셋을 조이는 건 매번 새로울 정도로 괴로웠다.
“아가씨, 조금 더 숨을 들이마셔 보세요. 조금 더요.”
“그만…… 그만하면 안 될까요?”
“네, 안 돼요. 조금만 더 참아 보세요. 더 심하게 조이는 영애들은 동물의 뼈를 쓴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조금 더 편안한 가죽 코르셋을 사용하고 있으니, 그만큼 더 조이셔야 해요.”
“으으…….”
“최근에 많이 마르셔서 이전보다 끈은 더 들어가는데 왜 이렇게 힘들어하실까? 자, 다시 할게요. 하나, 둘, 셋!”
그야 이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안나는 이런 면에선 자비가 없었다. 하지만 그 덕에 확실히 예뻐 보이게 되니 나도 군말하지 않고 해 주는 대로 기분 좋게 받았다.
원래의 세상에서 혼자 지낼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풍성한 드레스들을 입는데, 사실은 나도 이런 걸 은근히 좋아했던 모양인지 하나하나 다 마음에 들었다.
하긴, 그때는 내 취향에 대해 얘기할 사람도 딱히 없고, 그 취향을 마구 떨칠 상대도 없었으니 이제야 깨달은 게 당연한 건가.
숙취 하나 없이 멀쩡한 몸을 슬슬 움직여 방에서 내려간 나는 아델린의 부모, 즉 메이스프릴 백작 부부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그들은 잘 놀던 딸이 계속 저택에만 처박혀 있다가 무려 황실에서 연 무도회에 다녀왔다는 사실에 몹시 기뻐했다.
“아팠다가 겨우 깨어난 네가 한동안 저택에만 있지 않았느냐. 걱정이 컸는데 잘 즐기고 온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무리는 하지 말고.”
“그래, 어제는 특히 리아나를 데리고 가지 않고 아델린 너 혼자 다녀온 거라면서? 친구를 소중히 대하는 건 보기 좋았지만, 항상 너 자신보다도 리아나만을 위하는 게 이 어미로서는 안타까웠는데 정말 다행이야. 잘했구나.”
아, 아델린은 정말로 주변에서 사랑받고 있는 아이구나.
어제부터 계속 잘했다는 이야기만 들으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건 당연했다.
그들의 반응이 민망할 만큼 황송해서 절로 어머니, 아버지 소리가 나왔다.
그들은 백작가 업무를 함께 보는 듯했는데, 일이 많아 바쁜데도 이런 식으로 나를 꼭 챙겼다. 감사하다는 얘기를 몇 번 한 후 나는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외출을 한번 그렇게 거하게 했으면 당연히 당분간은 쉬어 줘야지. 게다가 황실 무도회 같은 큰 행사 아니었나.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 소모를 크게 했으니 쉬어야 하는 게 당연했다.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있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장족의 발전이었다.
우선 나는 정원과 연결된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받아들였다. 이 정도면 가볍게 입고 정원으로 아예 나가도 되겠는데?
“안나, 정원에 있어도 괜찮은 거죠?”
“그럼요. 오래 있으면 대신 바람이 찰 수 있으니 어깨에 숄은 꼭 두르셔야 해요. 정원에서 뭐 하시려고요, 아가씨?”
“뭘 하다뇨? 그냥 있으려고요. 편하게 쉬면 좋잖아요. 항상 그랬듯이 차 마시고, 뭐 그러려고요.”
“아아…… 무도회 다녀오시고 다시 이전처럼 여기저기 다니시는 건가 했는데.”
안나는 탄식하면서도 정원으로 나가는 내 손에 숄을 쥐여 주곤 다른 시녀를 시켜 뜨거운 홍차와 가벼운 쿠키를 가져오게 했다.
“항상 챙겨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가씨도 참, 당연한 건데요. 사실은 사교계 활동 같은 것도 아가씨가 싫으시면 안 해도 그만이에요. 그동안 워낙 활발하게 다니셨으니 쌓아 온 것도 있고, 지치셨을 수도 있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 말을 듣자 마음이 좀 더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어제 무도회에 오래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사교계 특유의 기 싸움을 실제로 목격하곤 몹시 놀란 데다 지쳐 버린 상태였다.
차라리 치고받고 싸운다면 눈에 보이는 모습에 그러려니 하겠건만, 그것도 아니고 은근하게 말을 돌리고 소문을 내는 모습들이라니. 오히려 더 무섭고 피하고 싶었다.
원래의 아델린은 대체 그런 데를 어떻게 그렇게 잘 다니면서 모든 이에게 인기를 얻은 걸까.
심지어 숫기 없다고 생각해 아델린이 늘 데리고 다녔던 리아나조차 그렇게 말할 줄 아는 애였는데. 천생 소시민인 나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무 힘드시면 얼마든지 편하게 지내셔도 되는 거예요, 아가씨.”
그 든든한 말에 나는 그저 감사하다고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안나는 따뜻하게 웃고는 바람이 부니 머리가 흐트러질 수 있다며 내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길게 풀어 놓기만 했던 머리 중 일부를 땋아 뒤로 고정해 정말로 귀족 같은 머리가 되었다.
봐도 봐도 적응 안 되고 튀어 보이는 붉은색의 머리로도 이렇게 차분한 느낌을 낼 수 있구나. 예뻐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이 예쁜 머리도 정말 고맙습니다.”
같이 차도 마시자는 제안을 했지만 그녀는 거절했고, 나는 쥴만 호위로 데리고 정원에 앉아 유유자적하게 되었다.
“어제 술을 드셨다면서요?”
“벌써 소문이 그렇게 났나요…….”
“늦은 시간도 아닌데 제가 호위로 아가씨 옆에 서 있는 이유가 바로 그거지요. 아가씨께 혹시 숙취가 남아 있어 문제가 생기면 제가 바로 안고 뛰는 겁니다.”
“말만 들어도 죄송하네요. 쥴 경이 옆에 앉아서 같이 차 드셔도 될 정도로 숙취는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쥴은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하고 소리 내서 웃고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걱정되는 일이 또 하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아, 리아나랑 싸운 거요?”
“리아나 아가씨와 싸우셨습니까? 그것도 걱정되네요.”
“그래서 이렇게 사과 편지 쓰고 있잖아요. 하하…….”
사실 테이블 위에는 차나 간식뿐 아니라 음각으로 문양이 새겨진 편지지와 잉크 펜도 놓여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간추리자면 내가 변한 것 같았다면 미안하다, 그런데 계속 이럴 예정이다, 너도 혼자 다녀 봐야지, 이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쓰면 정말 다시는 리아나의 얼굴을 볼 수 없겠지? 그래서 뭐라고 써야 할지 고민만 하고 펜대만 굴리던 중이었다.
“하도 제가 리아나랑 다퉜다고 떠들고 다녀서 다 아시는 줄 알았어요. 이게 아니면 뭐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아, 어젯밤 황궁에서 아가씨를 마차에 태운 사람이 에스티안 블라머프 황실기사단장이라고 들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이름이 쥴의 입에서 튀어나와 순간적으로 나는 당황했다.
황궁에서 지나친 사람도 없었고, 그 안에는 쥴도 없었는데 어떻게 안 거지? 대체로 저택 내에서 생활하는 기사인 쥴이 알 정도면 설마 이미 사교계 같은 데 다 퍼진 건가?!
“아가씨의 표정을 보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요. 마부가 아무리 봐도 아가씨를 아래로 모셔 온 사람이 황실기사단장 같았다고 하길래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아, 마부…… 마부분께서…… 그럼 혹시…….”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마부에게만 들었을 뿐이고 다른 그 어느 곳에도 이 이야기는 흘러들어 가지 않았습니다.”
“하……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아, 사실 뭐 그분의 도움을 받은 걸 숨기려던 건 아니고요. 그냥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예,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도 사교계 내 그의 소문이 결코 좋지 못하다는 건 아실 테니까요.”
‘제가 알 정도니까요. 그, 여성…….’ 하고 덧붙이며 쥴은 눈썹을 까딱 위로 올렸다.
나를 배려해 말을 다 내뱉지는 않았지만, 에스티안의 여성 편력, 바람둥이 성향, 술집 왕래 등을 말하는 거겠지.
내가 어제 밤새 생각했던 것도 이런 것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그의 그런 기질이 사교계에 퍼진 지는 오래됐고, 심지어 나는 그가 혼자 으슥한 골목 쪽을 지나쳐 오는 걸 목격하기까지 했다.
이미 이런 것들로 봐서는 내가 주장했던 ‘쓰레기 같은 남자’의 조건이 무서우리만치 적용된 터였다.
그러나 에스티안이 나를 대했던 걸 생각한다면, 그는 그 정도의 쓰레기는 절대 아닌데.
“오래 앓다가 겨우 일어나서 심신이 약해지신 아가씨의 빈틈을 노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됐습니다.”
내가 말이 없자 쥴은 어깨를 으쓱하며 마저 말했다.
가문의 기사가 이런 걱정을 해 주는 건 당연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에스티안이 그 정도의 파렴치한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에스티안과 같이 있던 게 소문날까 봐 두려워하는 이유도 그의 평판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에스티안을 그렇게 만든 데 대한 약간의 죄책감도 분명 있었기에 나는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단지 그가 너무 인기가 많아 내가 귀찮아질까 봐. 그것보다도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남자라고는 업무차 봤던 사람들 말고는 접해 본 적 없는 모태솔로인 내가 괜히 설레발치며 붕 뜰까 봐였다.
그리고 그에 대해 냉정하게 돌아올 것 같은 에스티안의 반응이 두렵기도 하고.
내 고민 그 어디에도 에스티안이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가정은 없었다.
“아가씨가 지금은 저택에서 쉬시는 걸 워낙 좋아하시니까 이후에 언제 또 바깥으로 나가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아가씨를 호위하는 기사의 노파심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아, 네. 네. 그럼요. 알지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스티안. 에스티안. 괜히 그 이름을 곱씹어 보는데 왠지 목이 타는 기분이 들어 나는 식어 버린 차 한 잔을 몽땅 입에 부었다.
그러고는 그 생각을 떨치려 몇 시간째 백지이던 편지지 위로 글을 적었다.
<황실 무도회 때는 내 말이 너무 심했던 것 같아. 알다시피 내가 아직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어서 말이 그렇게 나갔어. 그리고 아마 당분간 사교계 활동은 하지 않을 것 같아. 그래서 너와 함께 이전처럼 이곳저곳을 다니지는 못할 거야. 그래도 네가 어디 다니는 데 도움이 필요한 게 있다면 최대한 도울게.>
얼마나 천사표 답장인가. 너무 착해 빠지기만 한 것 같아서 마지막 줄을 더 썼다.
<근데 너랑 다른 영애들이랑 떠드는 걸 본 건 사실이야. 나는 황태자 전하에 대한 아무 생각도 없으니 제발 이것도 걔네한테 얘기해 주렴.>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나는 편지를 잘 접어 넣고 봉해 시녀를 통해 리아나에게 보냈다.
아, 하나의 큰 문제를 푼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이젠 진정한 휴식이구나.
다시 뜨거운 차를 다른 시녀에게 부탁하고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켰다. 그 순간 생각보다 강한 바람이 휙 불어 머리며 팔을 간지럽혔다.
“좀 쌀쌀한가…….”
“날은 맑은데 바람이 차네요. 두꺼운 숄을 가져다 드릴까요?”
“어떻게 경께 그런 부탁을 드리겠어요. 경은 저를 호위하기 위해 계속 서 계신데요. 일어난 김에 제가 가져오면 돼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쥴을 뒤로하고 나는 잠시 방에 들렀다. 두르고 있던 숄을 침대에 대충 놓고 그것보다 더 푹신푹신하고 두꺼운 숄을 찾아 꺼냈다.
그러고서 몸을 돌려 다시 정원으로 가려는데,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에스티안의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가뜩이나 아무 문양도 없이 새하얀 손수건이라, 눈물 닦은 자국이라도 남을까 봐 시녀에게 부탁해서 깨끗하게 빨아 놓은 상태이긴 했다.
흠…… 이걸 그냥 돌려줘, 덜렁? 반찬을 하나 받아 먹으면 그 빈 반찬통에 새로 먹을 걸 채워 주는 게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던가. 나는 손수건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렇게 호기롭게 나오긴 했는데, 손수건으로 대체 뭘 해서 줘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나는 여태까지 남자에게 선물을 준 적도 없었다. 아니, 뭐 남자를 만나 봤어야 선물도 줘 봤겠지.
남자들에게 보통 어떻게 어떤 선물을 주거나 보답하는지도 모르는데, 심지어 상대는 기사인 데다 줘야 할 게 손수건으로 딱 정해진 상태라니 막막한 것이다.
“쥴 경, 제가 손수건을 빌렸거든요. 그냥 돌려주자니 인정 없어 보여서, 여기다 뭘 어떻게 해 줘야 좋을까요?”
“손수건이면 자수를 놔 주는 게 보통이죠.”
수놓는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진짜 그게 보통의 답이구나.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자수…… 자수. 잘 못해도 괜찮으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