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잘 생각했어. 요새 주변에서 소설 진짜 많이 쓰더라. 그리고 내가 소설 완전 즐겨 보잖아. 네가 소설을 쓴다면 또 내가 안 도와줄 수가 없지. 가만 보니 이게 다 인기 있는 건 이유가 있어.”
“나 진짜 충동이야. 별로 생각한 것도 없어. 네 말 듣고 막 쓴다?”
“그러라니까. 진짜 나만 믿어. 일단 여자 주인공. 어디 보자, 백작가 영애? 백작이라는 작위 좋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은 무조건 금발이지. 가냘프고 여리여리하면서도 어딘가 강단 있는 느낌을 주는 게 좋으니까 백금발 같은 거로 하자.”
“그게 강단이 있어 보여?”
“있지, 그럼. 백금발이 허리까지 오게 하고, 회청색 눈이 좋겠다. 신비로우면서도 아련한 느낌을 주는 거야.”
“회청색? 눈병 걸린 것도 아니고 뭐야.”
“그런 걸 왜 신경 써! 그냥 상상했을 때 예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눈병 안 같아.”
“알았어. 생각해 보니 진짜 예쁠 것 같다. 남자 주인공은 황태자 하려는데 이게 보통이지?”
“너도 뭘 좀 아는구나. 남주는 역시 황태자로 해야지. 얘는 황금같이 좀 진하고 번쩍거리는 금발에 붉은 눈을 가졌다고 하자. 사람들이 그림 그린 거 보니까 붉은 눈이 멋있더라.”
“오, 뭔가 여자 주인공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벌써 느낌이 좋은데?”
“이미 나는 네가 성공해서 막 사인해 주고 다니는 게 보일 정도야.”
“크크, 네 말대로 쓰려고 하니까 왠지 엄청 잘될 것 같아. 나 진짜 이걸로 돈 많이 벌고 잘되면 한우 먹자. 두당 50만 원어치 먹는 거야.”
그런 대화를 한 게 한 달 정도 전이었다.
친구는 내 말을 철석같이 믿고 내가 지시하는 대로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썼다.
제목도 참으로 솔직하고 찬란했던 <백작 영애의 사랑 만들기>는 오직 나만 애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봤는지,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싸늘하게 외면당해 돈을 벌지 못했다.
당연히 우리의 한우 플랜도 날아갔다.
그리고 나는…… 친구가 썼던 소설 안의 한 인물이 되어 버렸다.
이게 소설로만 접했던 이른바 빙의?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심지어 친구의 소설은 빙의를 소재로 한 것도 아닌데.
분명 며칠 밤을 새우고 피곤해서 잠든 기억도 없이 거의 곯아떨어지다시피 했던 것 같은데, 깨고 보니 처음 보는 곳이었다.
알고 보니, 여기서 나는 정원 뒤쪽 언덕의 꼭대기에서 아래로 구른 뒤 머리와 팔다리 전부를 심하게 다쳐 2주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겨우 일어난 것이라 했다.
큰 호수와 정원을 앞에 둔 저택에 호화로운 방, 그리고 풍성하게 떨어지는 드레스처럼 이국적인 것들은 물론, 이질적인 내 모습에 나는 경기를 일으키고 기절도 몇 번 했다.
이게 꿈일 거라 생각하고 계속 자든가, 어디서 뛰어내려 보든가 하려고도 했다.
“아가씨, 눈 떠 보세요! 여기 치료사를 좀 불러와!”
“그때 너무 크게 다치셔서 후유증이 있는 건가? 아가씨, 정말 괜찮으세요?”
“아가씨! 그러다 큰일 나면 어쩌시려고! 당장 내려오세요!”
물론 그럴 때마다 번번이 나를 도와주는 시녀 안나에게 가로막혔다.
무슨 시도를 해도 변화가 없는 걸 의식이 든 뒤에 깨닫게 되자 그냥 지내기로 결심하긴 했다. 불편한 게 딱히 없기 때문도 있었다.
그러고 나니 닥친 문제는 ‘나는 지금 누구의 몸속에 있느냐’였다.
내가 빙의한 건 아델린 메이스프릴이라는 여자 조연으로, 아델린도 여자 주인공처럼 백작가의 영애이다.
웃기게도 소설의 다른 캐릭터는 다 내가 닦달해서 요구했던 대로 친구가 썼는데 딱 아델린만은 친구에게 ‘조연인데 뭐 어때, 네 마음대로 해!’ 하고는 맡겨 버렸었다.
물론 친구가 묘사했던 대로 아델린, 그러니까 이제 내가 된 아델린은 참 예뻤다.
와인색인가? 짙은 적색의 구불거리는 긴 머리에 5월의 나뭇잎처럼 맑은 녹색 눈.
눈도 크고, 피부도 하얗고, 피부에 뭐 난 것도 없고. 마른 편인 데다 웃는 것도 예뻤다.
청순하고 수수한 편인 여자 주인공과 달리 아델린은 세련되고 농염한 매력으로 주변의 시선을 끄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예쁜 데다 성격이 쾌활하고 쿨해서,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와 편하게 지내며 인기도 많은 여자 조연이었다.
숫기 없고 수줍음 많은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인 황태자에게 잘 다가갈 수 있도록 곁에서 이끌어 주는, 든든하고 상투적인 조연 역할.
<백작 영애의 사랑 만들기>의 내용은 대충 평범하고 순진한 여자 주인공 백작 영애가 그 순수함으로 자신도 모르는 새 수많은 남자 주인공들에게 인기를 끌다가 결국 황태자와 무사히 이어지게 된다는 거였다.
사실 별 내용도 없는데, 그 또한 나의 막말 때문이었다.
‘여자 주인공은 뭘 잘해야 할까?’
‘야, 여주가 뭘 하고 있으면 황태자를 어떻게 만나? 연적들을 우선 처리해야 해.’
‘뭘 하고 있어도 만날 수 있는 거 아냐? 연적은 왜 처리를……? 그래도 나 이대로 적는다. 여기서 이제 어떻게 해?’
‘음…… 사교계 활동? 그런 걸 해야지. 근데 여주가 여려서 혼자 그런 걸 못한다는 설정이니까 친구가 도와줘야지.’
그래서 아델린은 여자 주인공에게 네가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지, 그리고 당당함으로 사교계에서 입지를 굳히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주지시키며 그녀를 티파티와 가면무도회 등에 열심히 끌고 다녔다.
당연히 그녀를 예쁘게 꾸며 주고, 그녀가 황태자 앞에 가서 말을 한 마디라도 더 하도록 부추기는 것도 아델린의 역할이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내 성격이 아델린과는 정반대라는 것.
나는 이른바 모태솔로에 건어물녀로 30년을 살아왔다.
누굴 돕고 이끌기는커녕 사람 만나는 것도 귀찮아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뒤에서 음흉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그가 결국 다른 여자를 사귀는 것까지 눈물 어린 시선으로 지켜본 뒤 다시 건어물녀의 삶으로 복귀하는 거다.
게다가 근 몇 년간은 남자라곤 딱 두 명 있고 나머지가 다 여자인 회사에서 일하느라 더더욱 이성에 대한 마음조차 끊긴 상태였다.
이 소설 속으로 오기 전 나는 정말로 일하고, 일 끝나면 맥주랑 안주를 사 가지고 집에 들어가 먹은 뒤 애완견을 끌어안고 자는, 그런 생활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인기 있고 쾌활한 조연이 되어 여자 주인공이 황태자에게 다가갈 수 있게 열정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귀찮고 아찔했다.
“아가씨, 목욕물 준비해 놨어요.”
벌써 몇 년은 훌쩍 지난 것 같은 며칠을 곱씹으며 창밖을 보고 있으니 안나가 가까이 와서 나를 불렀다.
“네, 감사합니다.”
“어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왜 깨어나신 뒤부터 말을 높이고 그러세요. 그러실 필요 없대도요.”
왜냐면 장기간의 회사 생활로 인해 ‘넵병’이 아직 안 나아서 그렇다…….
뭐만 하면 ‘넵! 넵.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달하겠습니다! 확인했습니다!’만 반복하던 삶을 몇 년이나 살아왔는데 이게 어떻게 한순간에 바뀔까.
여기서의 나는 고작 18살이었고, 나를 떠받들어 주는 저 시녀는 최소 30살은 되어 보였다.
아무리 내가 원래 30살이고 백작 영애는 시녀에게 하대한다고 해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항상 도와주시니 감사해서 그러죠.”
“아가씨가 다시 건강을 되찾으신 것 같아 제가 더 감사하지요.”
안나에 의해 가운과 수건만 두른 채 욕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니 다시 현실성 없는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색은 하나도 없이 뿌리부터 짙은 적색인 머리카락과 이리저리 돌리는 대로 짙었다가 맑은 빛을 띠었다가 하는 녹색 눈동자.
“아가씨? 왜 머리는 갑자기 그렇게 헤집으시…… 아가씨?! 눈꺼풀을 그렇게 잡아당기시면 잘못하다 눈 다쳐요!”
“괜찮아요. 그냥 신기해서요. 진짜 완전 녹색이네요. 혹시 렌즈면 렌즈 테두리가 보일까 해서…….”
“네에? 어휴, 무슨 소리실까. 조심하셔야 하는데. 얼른 이리 오세요.”
안나는 이리저리 얼굴을 살펴보는 내 손을 잡아 내리고는 나를 뜨거운 욕조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래. 이렇게 평화롭고 좋은데 여자 주인공이고 나발이고 귀찮은 생각은 좀 접어 둬야겠다.
일단 나는 공식적으로 아직 회복이 덜 되어 아픈 것으로 되어 있으니, 좀 쉬면서 대충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가 한량처럼 지내야지.
크, 오랜만에 이렇게 물에 들어오니까 생각나는 게…….
“안나 님, 혹시 맥주 있나요?”
“그런 말도 안 되는 호칭은 둘째 치고 맥주라뇨?! 뜨거운 물에 계시면서 술을 드시면 쓰러지셔요!”
“아니, 지금은 아니고요. 씻고 나가서 한 잔만 딱…….”
“씻고 나오셔도 안 돼요!”
“네에, 알겠습니다.”
“어휴, 아가씨…….”
아직은 적응 중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
“아가씨, 그동안 편지가 정말 많이 왔어요.”
한 이틀을 편하게 누워 각종 관리와 마사지를 받으며 지냈더니 몸이 한껏 가뿐해졌다.
나는 안나와 함께 방과 연결된 정원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래요? 무슨 편지가 그렇게 왔어요?”
“아가씨를 걱정하는 편지들이지요. 모두 아가씨가 다시 사교계에 나오길 기다린답니다.”
“아…….”
“아가씨가 워낙 밝고 쾌활하셔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데, 오래 의식을 잃고 계셨으니 다들 마음 아파하는 게 당연하지요. 헤일리 영애, 비비안 영애…….”
단지 친구가 쓰는 소설의 주요 인물들에만 관심을 가졌던 나였기에, 이렇게 자세한 설정이 들어 있는 줄은 몰랐다.
여자 조연에게 편지를 써 줄 정도로 친한 친구들이 있다는 걸, 그 정도로 성격이 좋아 다들 그녀만 밖으로 나오길 기다렸다는 걸 내가 어찌 알까.
그리고 진짜 친한 친구인지, 쉽게 말해 사교계에서 서로를 이용하기만 하는 그런 관계에 불과한지도 잘 모르는 거였다.
물론 여기서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이것들이 전부 설정이 아니고 삶인 거겠지.
그런 미묘한 마음이 드는 한편,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이라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려도 되겠다 싶어, 나는 그냥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안나가 얘기하는 걸 들었다.
편지들의 골자는 ‘나 어느 귀족가의 어느 영애인데 얼른 나아서 티타임 갖자.’ 이거였다.
이름도 내용도 다 비슷비슷한 데다, 가만 보니 구체적으로 만남을 약속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올해 안에 밥 한번 먹자, 같은 내용이라고 해야 할까.
본래의 아델린이라면 이 모든 편지를 보고 만나는 약속을 잡았을까. 이미 찌든 사회생활을 해 온 나는 익숙하게 편지들을 그저 넘겼다. 그래도 별 상관이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이름에 나는 의아하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리엘 황태자 전하께서도 아가씨를 걱정하는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이건 일부러 마지막에 읽었는데 아가씨, 좀 놀라셨으려나요?”
“황태자가요?”
“헛, 아가씨……!”
“아, 너무 놀라서요.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께서요?”
황태자가 나를, 그러니까 아델린을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
여자 주인공을 줄기차게 끌고 다니며 그 앞을 알짱댔으니까.
숫기 없는 그녀를 대신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어 대며 분위기를 밝게 만들던 사람이 한순간에 크게 다쳤다고 잠적했으니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하긴 했지만, 친히 이렇게 편지를 보내다니 놀라웠다.
내가 만약 진짜 아델린이었다면 이걸 좋은 구실로 삼아 여자 주인공을 데리고 또 황궁을 방문해 황태자 앞으로 가서 ‘걱정해 주신 덕에 다 나아서 또 놀러 왔다’며 얼굴을 들이밀었을 테지만…….
“그렇군요. 답장은 보내는 게 예의에 맞겠죠? 편지지를 준비해 주시면 답장을 몇 통 쓰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너무나 귀찮은걸…….
그런 모임들에 참석하는 것도 일인데 심지어 도와줘야 하는 사람을 달고 다녀야 한다니. 어차피 여자 주인공은 가만히 놔둬도 주위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제없을 텐데, 뭐.
그냥 고급스러운 편지지에 감사 인사를 담은 뒤 모두에게 보내면 무례한 사람은 되지 않을 테니 딱 그 정도만 해도 될 것 같았다.
“저…… 아가씨. 다른 영애분들도 그렇고, 황태자 전하께서도 아가씨가 다 나으신 뒤 건강한 모습으로 한번 뵈었으면 한다고 쓰셨는데요.”
“음…… 그럼 아직 건강해지지 않아서 못 뵙겠다고 쓰면 되겠네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아, 아가씨…….”
안나는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나를 보며 한숨을 쉬고는 뜨거운 차가 담긴 주전자, 찻잔, 그리고 은실로 수를 놓은 뒤 향기를 입힌 편지지를 곧 가져왔다.
“편지지 정말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나는 정원에 핀 아름다운 꽃들을 바라보며 간략한 편지를 썼다. 신기하게도 언어적인 문제는 전혀 없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아 편지로 마음 전하는 것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쌀쌀한 바람으로 인해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수많은 클라이언트들을 상대하며 메일을 보냈던 짬밥이 이렇게 발휘되는구나.
만나겠다는 약속은 절대 잡지 않으면서도, 감사 인사를 공손하기 짝이 없게 표한 내 편지를 보며 안나는 다시 한번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흠잡을 데 없는 편지긴 한데요…….”
“안나 님이 그렇게 봐 주시니 다행이네요. 다들 그렇게 봐 주겠죠?”
“그럼 아가씨께서는 아무 티타임에도 참석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럼요.”
“그럼요라니요, 아가씨…….”
“티타임을 왜 꼭 다 같이 가져야 하나요? 굳이 마차 타고 남의 집 가서 불편하게 차 마시느니, 편하고 안락한 여기, 제 방 옆의 정원에서 혼자 차를 마시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은데요. 안나 님도 같이 차 한잔 들어요.”
“아뇨! 그럴 수는 없답니다, 아가씨. 말씀은 정말 감사해요. 곧 가벼운 티 푸드를 올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내 말에 안나는 편지지를 받아 들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원을 나섰다.
큰 산을 하나 넘은 것 같은 마음에 나는 기지개를 켰다.
사실 내가 깨어나고 몸이 정상 상태로 접어든 걸 확인한 순간부터 안나는 은근슬쩍 ‘아가씨를 찾는 편지가 많아요.’ 하는 얘기를 계속했었다.
나는 그때마다 머리가 아프다는 둥 어지럽다는 둥 핑계를 대고 무시하기 일쑤였고.
천성이 혼자 구석에서 놀고먹기 좋아하는 나에게 이런 삶을 사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렇게 소모할 수는 없었다.
이후 내 편지에 황태자를 비롯해 아무에게도 답장이 오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안나의 말에 따르면 사교계에는 내가 아직도 많이 아파 쉽게 바깥으로 나올 수 없어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했다. 음, 바람직하다.
나는 그 후로도 매일같이 나 혼자만의 티타임을 정원에서 가졌다.
그러면서 나는 안나와 더 친해져 불편한 마음을 완전히 없앤 채 그녀를 ‘안나’라고 그냥 부르기 시작했다.
또한 오후에 접어들면 정원에 나와 내 근처에서 나를 지키며 서 있는 호위 기사 쥴과도 친해졌다.
처음 겪는 설정들이라 적응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건만, 나는 너무나 평온하게 여기서 생활할 수 있었다. 차를 마시다가 너무 심심하면 안나에게 간단한 바느질거리를 달라고 해서 손을 놀렸다.
혼자 지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간단한 바느질 정도는 대충 어렵지 않게 하는 수준이었다.
오늘도 나는 어렵지 않은 모양으로 바느질을 하며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거 거의 다 되어 가는데, 이건 쥴 경 드릴게요.”
“그게 뭔가요?”
“쥴 경 드릴 부적이요.”
“저를요?”
“네.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황궁에서 마물 사냥 같은 걸 하게 되면 쥴 경도 차출되어 나간다고요.”
귀족가의 내로라하는 기사들은 보통 황궁에서 그렇게 큰 전력이 필요할 때 불려 나가는 듯했다. 겉으로는 도와주면 큰 상을 내리리라, 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냥 인력이 없어 끌고 가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 얘길 들으니 그런 데서 잘못 죽으면 개죽음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은 내 호위를 맡은 그에게 기분이라도 어떻게든 좋게 가질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안나에게도 이런 걸 만들어 줬거든요. 안나는 저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불도 많이 만져야 하고, 물 만질 일도 많고 해서. 다치지 말라는 의미로 부적을 만들어 줬어요. 안나는 그걸 앞치마 안쪽에 고정해 뒀더라고요.”
나는 마지막으로 매듭짓고 작은 쪽가위로 실을 잘라 마무리한 작은 비단 조각을 그에게 건넸다. 여기 와서 나를 가장 많이 챙겨 준 사람들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쥴 경도 항상 저를 지켜 주시느라 고생 많으시잖아요. 사실 이 정원은 저택 내에 있는 거라 위험하지도 않을 텐데, 항상 다리 아프게 서 계시고. 그러다 명 받으면 또 나가야 하고. 경도 다치지 말라는 의미로 만들었는데, 경은 이걸 어디다 달면 좋을까요?”
내 진지한 물음에 쥴은 크게 웃더니 입고 있는 철제 갑옷의 가슴께를 가볍게 쳤다.
“갑옷 안쪽은 가죽과 면으로 되어 있어 여기에 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가씨 덕에 앞으로는 아무런 걱정이 없겠군요.”
“그래도 조심하셔야죠. 사람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어딘가 초연한 듯한 내 말에 쥴은 또 크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지만 저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사람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지금 나처럼 이렇게 되어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래도 나는 이렇게 매일매일을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그 평화가 깨진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아직도 나는 사교계 전반에 몸이 좋지 않다고 소문나 있는 게 맞는데, 그걸 듣지 못한 건지, 무시하고 싶은 건지 이해가 안 가는 편지가 온 것이다.
그것도 익히 아는 이름으로부터.
“아가씨, 이번에는 정말로 만나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아가씨가 원래 늘 챙겨 주시던 분인데 안 뵌 지 정말 오래됐잖아요. 게다가 편지가 두 통이나 왔답니다.”
발신인은 리아나 엘리디트. 친구가 쓴 소설의 여자 주인공, 그러니까 그 숫기 없고 수줍음이 많아 내가, 아델린이 끌고 다녔던 그 애였다.
<아델린, 내 사랑스러운 친구 델. 네가 쓰러진 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나는 마음이 정말 아파. 아직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얘기에 걱정돼. 너랑 티타임을 가졌던 게 언제인지 벌써 까마득해. 그때 황태자 전하를 뵈러 갔을 때가 끝이었나? 늘 보던 너를 이렇게나 오래 안 보니까 정말 그리워. 많이 아픈 거니?>
<……이런 마음을 가져선 안 되지만, 나와 가벼운 티타임 한번 가지지 못할 정도로 아픈 건지 서운한 마음도 들어. 상처는 거의 다 나았다고 들었는데 말야. 혹시 내가 너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게 있나 싶어 두려울 정도야. 이런 내 마음은 다 너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라는 걸 이해해 주면 좋겠어.>
<……다음 주에 황실에서 마물 퇴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한 무도회가 열려. 나는 델 너와 꼭 같이 가고 싶은데 네 몸이 괜찮을지 모르겠어. 항상 황태자 전하의 앞에는 너와 함께 가서 나는 혼자 가는 게 상상이 안 되기도 하고. 너만 괜찮으면 나는 그날의 무도회로 네가 다시 사교계에 건강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괜찮을까? 너와 꼭 가고 싶어. 그렇게 되면 좋겠어.>
여태까지 받은 편지 중 내용은 제일 길지만, 간추리자면 너 안 아프지. 징징징. 나 황태자 보고 싶으니까 아파도 대충 참고 무도회 가자. 징징징. 이거 아닌가.
한껏 칭얼대는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해 편지를 읽는 내내 주름진 미간이 펴지지 않았다.
원래 리아나가 이 정도로 징징대는 인물이었던가?
내가 친구에게 강요 아닌 강요를 했던 주인공은 그저 수줍음 많고 조용히 미소 짓는 따뜻한 이미지였던 거로 기억하는데.
이건 거의 집착증 징징이 아닌가?
끄응.
“아가씨, 편지에 뭐 안 좋은 내용이라도 쓰여 있나요?”
“다음 주에 황실에서 무도회가 열린다고, 리아나가 같이 가자고 하네요…….”
“아, 항상 황태자 전하께서 오시는 곳엔 아가씨가 리아나 아가씨를 데리고 함께 가 주셨죠. 그 우애가 어찌나 보기 좋던지요.”
그랬구나……. 나는 벌써 귀찮아서 울고 싶을 지경인데.
징징이 리아나를 케어하며 무도회까지 같이 가는 상상을 하니 땀난다.
근데 장문의 편지 두 통을 읽고 나니 이걸 무시하면 리아나가 더 귀찮게 굴 것 같았다. 꽉꽉 눌러쓴 듯한 필체가 그녀의 집요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여자 주인공이라 그런가, 요주 인물이구나. 대충 대하고 얼른 치워 버려야겠다.
오래 챙겨 줬으면 이제 스스로 황태자한테 다가가도 되지 않을까? 원래도 예쁘고 매력적인 애라 충분히 그래도 될 것 같은데.
이번 만남을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으로 생각하고 자립심을 좀 키워 주면 될까.
“안나, 보통 무도회를 위한 드레스가 일주일이면 만들어지던가요? 일주일 전에 무도회 가자고 통보하는 건 무슨 심보래요.”
“어휴, 아가씨. 그런 말씀 마세요! 아가씨 건강만 괜찮으시면 당연히 무도회에 가셔야지요. 황실 무도회는 웬만하면 가시는 게 좋잖아요. 그리고 당연히 황실 무도회라 하면 재단사들도 드레스를 재빠르게 만들어 줄 거고요. 게다가 리아나 아가씨도 함께니 외롭지 않아서 좋겠어요.”
바글바글한 사람들 틈에서 가식적인 말을 하고 속마음은 티 내지 말아야 하고. 거의 회식 아닌가?
차라리 외롭고 싶다. 아, 그래도 가서 술이나 주전부리는 좀 먹을 수 있겠구나. 그거 하나 믿고 가도록 해야겠다.
*
내가 긍정의 답장을 보내자마자 리아나는 득달같이 함께 드레스와 장신구 등을 사러 가자고 마차를 보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자기가 그 마차를 타고 왔다.
“세상에, 아델린! 마른 것 좀 봐. 진짜 아팠구나. 지금은 정말 괜찮은 거야? 얼굴이 좀 창백한 건가?”
“그럼 가짜로 아프겠니……. 안 괜찮아도 넌 날 데려가려고 하겠지?”
“어, 어?”
“아냐, 농담이야. 아주 건강해. 가자.”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리아나가 너무 사색이 되어 나는 말을 잽싸게 돌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행히 리아나는 ‘바깥에 나갈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져서 다행이야.’라며 웃었다.
에라이. 자기랑 같이 황태자 앞까지 갈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마차는 금방 달려 시내의 가장 큰 드레스 살롱 앞에서 멈췄다.
사람이 많아 정신 사나운 상태로 드레스며 장신구를 고르게 될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손님은 몇 없었다.
주인 말로는 이미 다음 주의 무도회를 위한 드레스는 다들 일찌감치 맞춰 간 상태라고. 빠르다, 빨라.
“어쩌면 이렇게 한가하게 보실 수 있는 게 더 행운일지도 몰라요, 영애분들. 천천히 둘러보세요. 다음 주 무도회 전까지 저택으로 무사히 보내 드리니 걱정 마시고요.”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동으로 뱉은 내 인사에 살롱 주인은 물론 리아나까지 날 쳐다봤다.
아, 또 넵병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와서 그런가. 저런 말은 사실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일종의 패시브로 다들 생각하지 않나? 아니, 그리고 그렇게 인사하는 게 뭐가 어때서!
“영애께서 그렇게 인사해 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영애께는 개인적으로 걸작이라고 생각하고 아껴 뒀던 머리 장신구를 선물로 드릴게요.”
이게 그런 정도의 일인가? 어안이 벙벙해서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입을 떼려는데, 살롱 주인과 나를 바라보는 리아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뭐야, 자기도 갖고 싶다 이건가?
“괜찮으시면 제 친구인 리아나의 것도 부탁드려요. 저 친구야 워낙 예쁘지만, 더 예쁘면 좋으니까요.”
“아가씨도 충분히 예쁘신걸요. 네, 두 분 다 준비해 드릴게요.”
내 말을 듣더니 리아나가 배시시 웃으며 드레스를 보다 말고 쪼르르 내 옆으로 달려왔다.
“그렇게 안 해 줘도 되는데. 역시 아델린이랑 같이 있어야 좋다니까. 나는 혼자서는 그런 말을 잘 못하겠어.”
“감사 인사가 뭐 어렵다고. 너도 해 버릇해야지. 다 뼈가 되고 살이 될 거야, 지금처럼.”
어깨가 결리는 듯해 목을 좌우로 휘휘 꺾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니 리아나는 당황한 얼굴로 잠시 웃다가 다시 드레스를 보러 갔다.
하, 아무리 봐도 친구 소설로 보면서 상상했던 리아나와는 이미지가 어딘가 오묘하게 다른데?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지만 지금은 드레스를 빨리 고르고 나가고 싶었기에 나도 드레스가 잔뜩 걸려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나는 이렇게 옷을 하나하나 대 보며 고르는 것 자체가 딱히 익숙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인터넷으로 그저 자주 입는 스타일로만 몰아서 구매하기 일쑤였으니까.
굳이 명칭을 떠올려 보자면 프렌치 시크 같은 느낌이었다. 편안하고, 무늬도 거의 없고, 그저 몸에 지나치게 달라붙지 않는 정도로 딱 떨어지는 옷들.
그런 내게 이렇게 화려하게 부풀어 오른 드레스들 중 하나를 고르라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입을 드레스는 진작에 살롱 주인의 손에 완전히 맡겨 버린 참이었다.
살롱 주인은 알아서 척척 내 눈 색과 머리 색, 어깨 라인과 허리부터 손목과 발목까지 꼼꼼히 살핀 뒤 딱 어울릴 것 같은 드레스를 꺼내서 보여 줬다.
“아가씨께서는 머리의 적색이 워낙 강렬하시니 드레스는 눈에 맞추는 게 은은할 것 같아요. 목덜미와 어깨선부터 허리까지가 가느다라니, 이 부분을 강조하고 드레스의 아랫부분만 크게 부풀리는 형태가 좋을 거 같은데, 어떠세요?”
가슴 부분에는 과하지 않은 리본과 프릴 장식이 있고, 주인의 말대로 허리 전까지는 날렵하게 붙다가 이후부터 풍성하게 떨어지는 드레스였다.
채도도 낮아 차분한 녹색 빛을 띠면서도 사용된 원단의 무늬는 고급스러웠다.
정말 예쁘잖아! 쇼핑하는 즐거움이 이런 거였나 보다.
“너무 예뻐요. 이거 그대로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더 이상의 요구 사항 없이 한 번에 오케이 해 버리자 주인도 흡족한 모양이었다.
그래, 저 마음도 내가 잘 알지. 수정, 재수정, 재재수정, 재재재수정 파일을 거듭해 만들던 지난날의 내가 잠시 떠올랐다.
피드백 없는 과제가 얼마나 즐거운지 나는 이미 잘 알지.
주인은 어느새 드레스와 어울리는 같은 색채의 구두와 머리 장식, 그리고 작은 보석이 알알이 박혀 반짝이는 귀걸이와 목걸이도 준비해 왔다.
“아가씨 사이즈에 맞춰서 댁으로 잘 보내 드릴게요.”
“아델린! 잠깐만 나 좀 봐 줘!”
주인에게 꾸벅 인사를 하기가 무섭게 리아나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어쩐지 잠잠하니 왜 날 안 부르나 했다.
“이거 어때? 내가 머리가 좀 허예서, 베이지색 드레스는 좀 생기 없어 보이려나?”
“아냐, 예쁜데. 베이지색이어도 프릴이 많은 편이잖아.”
“흐응…… 그런가. 근데 또 이 루비색 드레스는 너무 튀겠지?”
“그것도 예쁘긴 하다. 오히려 눈에 확 들어올 거 아냐.”
“차라리 새하얀 것으로 할까?”
“그것도 예쁘겠다.”
“아델린, 내가 보여 주는 거 제대로 보고는 있는 거야?”
“그럼.”
내 것도 하나 선택하기가 어려워 주인에게 모든 걸 일임했던 내가, 남이 입을 것을 봐 준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진짜 다 예쁜데?
“리아나, 너 자체가 워낙 예뻐서 사실 드레스는 뭘 입어도 예쁠 거야.”
진심을 담아 말했더니 리아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델린도 참, 하고는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잠자코 드레스를 뒤적거리는 걸 보니 영락없는 애로구나.
오래 서 있어 슬슬 뻐근해지는 목과 허리를 휘휘 돌리며 나는 그녀가 얼른 드레스와 장신구를 고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의 쇼핑 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매번 뭘 볼 때마다 내게 물었기에 나는 당연히 대답이 점점 심드렁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델린, 자세히 좀 봐 줘. 여기에 부채를 드는 건 너무 과한가 싶어서 그래.”
“근데 부채를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황실인데 더울까?”
“글쎄. 그냥 얼굴을 가려야 할 수도 있고.”
“가면무도회도 아닌데 얼굴을 왜 가려?”
“그러면 부채는 필요 없는 거네.”
“근데, 이 드레스를 입고 빈손으로 서 있는 걸 상상하면 뭔가 이상하지 않아?”
“모르겠다. 드레스도 예쁘고 너 자체도 예쁜데 부채가 중요한가?”
“아델린, 아깐 기분 좋았는데 자꾸 똑같은 얘기만 하니까 나 좀 서운하려고 해.”
“서운할 게 뭐 있어, 사실이라서 얘기해 주는 거야. 진짜 예쁘다니까, 전부.”
피곤해서 말을 막 던지고는 있었지만 리아나가 예쁘고 그런 리아나에게 이것저것 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 진심이었기에 나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얘기했다.
그러나 그녀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 왜 저러실까? 정말 징징이 맞구나.
“아델린, 그동안 우리가 너무 오래 못 만났던 걸까?”
“무슨 얘기야.”
“아델린이 변한 것 같아서 그래. 이전엔 내가 이렇게 물어보지 않아도 전부 꼼꼼하게 먼저 봐 주곤 했잖아.”
아, 그건 내가 빙의해서 그래. 혀끝에서 나가지 못할 말이 맴돌았다.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봐. 미안해, 리아나.”
“나는 늘 아델린을 믿고 있었는데.”
“응, 알지, 알지.”
“혹시 아델린, 내가 점점 황태자 전하랑 가까워지는 것에 질투 나서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뭐?”
“아니, 그렇잖아. 항상 황태자 전하께 잘 보이라며 나를 예쁘게 꾸며 주고 신경 써 줬는데 갑자기 이렇게 나한테 매정하게 대하니까……. 정작 내가 전하와 점점 친해지는 것 같으니까 배가 아파서 그러는 건가 싶잖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너무나 애 같은 발상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아직 여기 와서 황태자 얼굴도 본 적이 없건만!
하지만 이건 사실 갑자기 태도가 바뀐 내 탓이 큰 게 맞았다. 리아나 말마따나 그녀 입장에선 뭐, 이상하게 느낄 만도 하고. 그러니 얼른 해명해 줘야겠지.
“리아나, 오해가 너무 심해. 그런 거 절대 아니야.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누가 그 말 들을까 무섭다. 그냥 내가 좀 피곤해서 그래, 미안해.”
“흐응.”
“그리고 내가 아무리 조언해도 너는 결국 네가 원하는 걸 고르잖아? 그럴 바엔 그냥 네가 선택한 걸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런 거야. 또 매번 내가 함께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 너 혼자 이것저것 고르는 것도 좀 필요할 것 같았고.”
왜냐면 나는 오늘의 쇼핑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지. 리아나 너와 또 바깥을 나온다면 정말 피곤하겠구나…… 하고.
“매번 함께하기 어렵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나 리아나는 또 어딘가 이상한 데 꽂힌 것 같았다.
“역시 내가 전하와 가까워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 아니야?”
왜 또 생각이 거기로 가! 애써 돌려 놨나 싶었더니.
이 정도면 갑자기 변한 아델린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애초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 아냐?
“아니라니까! 너 혼자 나돌아 다닐 때도 된 거 같아서 하는 말이라고! 황태자 전하랑 너, 계속 친하게 지내. 난 아무 상관 없으니까.”
잘 참고 있다고, 저 징징이를 잘 어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에 나는 막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평생 아델린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리 없는 리아나는 곧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델린, 정말 변했어. 나빴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살롱을 뛰쳐나갔다.
그 와중에 자기가 고른 드레스와 장신구를 제 날짜에 보내 달라고 말하는 걸 잊지 않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요주 인물 리아나, 경보가 몇 번이나 울리는 건지 모르겠다.
놀란 얼굴로 리아나가 뛰어나간 방향과 마른세수를 하며 서 있는 나를 번갈아 보던 살롱 주인은 겨우 입을 뗐다.
“어, 아가씨가 주문하신 옷과 장신구도 빠짐없이 잘 보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끄럽게 굴어서 죄송해요.”
“어머, 아니에요. 이것보다 더 크게 얘기하다 가시는 영애분들도 있는걸요? 호호. 이 정도 대화는 영애분들 사이에서 흔한 거라 저도 자주 봤답니다. 아가씨가 좀 더 침착하시다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
“그 말씀도 감사해요. 옷도 잘 부탁드려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얘기하는 그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에 더 깊은 각도로 허리 숙여 인사한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살롱을 빠져나왔다.
“하아…….”
그러나 눈앞의 텅 빈 풍경에 한숨이 자연스럽게 새어 나왔다.
그래도 마차를 같이 타고 돌아가게 될 테니, 마차 안에서 철없는 그녀를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살롱 앞 세워져 있던 마차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자리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만든 아름다운 노을이 채우고 있었다.
“하하…… 설마 그냥 갔나, 이 정신 나간 리아나.”
아무리 그래도 혹시나, 설마 싶어 바로 옆 꽃가게 주인에게 이 앞에 세워져 있던 마차를 못 봤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일행분은 따로 오겠다고 했다고, 마차를 그냥 출발해도 된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는걸요.”
자기가 오자고 해 놓고 자기 혼자 멋대로 생각하고 화를 낸 다음 그냥 가 버렸다, 이거지.
수줍고 마음이 여려서 혼자서는 뭐든 잘 못하는 여자 주인공 리아나가 맞는 거야?
한숨이 계속해서 나왔다. 자기가 마차를 가져왔으니 시녀도 기사도 필요 없을 거라며 큰소리쳐서 나는 정말 몸만 왔는데 말이다.
살롱에서 저택까지 멀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귀족 영애가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터덜터덜 걸어가는 꼴 자체가 문제였다.
아무리 내가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큰 신경을 안 쓴다고는 해도, 이미 덜렁 살롱 앞에 혼자 남은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시선들이 쏠린 이상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주목받고 싶지 않아…….
아, 살롱 측에 저택으로 연락을 넣어 달라고 해야겠다.
그게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일 것 같아 다시 몸을 돌려 살롱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스프릴 영애.”
내 성이 단번에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잠시 멈칫했다가 그게 나를 부르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나를 부를 남자가 여기에는 아무도 없잖아. 나는 그냥 뒤돌아선 채로 가만히 있었다. 뭐야, 누구지?
“……아델린, 아닌가?”
맞잖아! 진짜 나를 아는 사람인가 본데, 누구지?
가뜩이나 혼자 서 있느라 이상한 눈길을 받았는데, 그냥 가면 지인도 무시한다는 소문까지 덤으로 돌겠지.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
나는 잠시 멍청하게 입을 작게 벌린 채 마주한 사람을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부른 사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느냐면, 역시 친구를 닦달해 얻어 낸 결과물이라 해야 할까. 심지어 아주 열정적으로 만들어 냈던 결과물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에스티안 블라머프.
잊히지도 않는 이름이다. 그는 친구의 소설에서 황태자와 함께 또 다른 남자 주인공이었던 캐릭터다.
차분한 듯 자연스럽게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바다처럼 푸르면서도 힘 있는 눈을 보자마자, 이렇게 내가 겪게 될 줄도 모르고 신나서 떠들었던 과거의 스스로가 떠올랐다.
‘야, 왜 남주들 머리를 은색, 흰색 같은 거로 설정하냐? 어차피 잘생기고 키 크고 몸 좋다는 설정으로 할 거면서 왜 그렇게 튀는 머리를 하냐고. 그냥 검은 머리로 해도 충분히 멋있는 거 어필되잖아. 황태자가 금발이니까, 다른 남자 주인공은 검은 머리로 해.’
‘검은 머리는 생각 안 해 봤는데……. 너무 무난한 거 아냐?’
‘그럼 눈을 튀게 하면 되겠네. 황태자가 붉은 눈이니까 얘는 푸른 눈으로 하자. 뭐랄까, 심해 같은 그런 푸른 눈. 크, 벌써 잘생겼어, 벌써.’
그렇게 내 욕망을 녹여 탄생한 에스티안은 황실기사단장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아델린이 리아나를 데리고 황태자를 보러 황궁에 가면 보게 되는 사람인 것이다.
물론 원작에서의 그는 리아나의 여리고 따뜻한 매력에 푹 빠졌고, 황태자도 리아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뒤, 그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러다 좋아하는 마음을 접고 황태자에게 충성하길 선택한다.
그가 한 5분만 더 빨리 나타났다면 리아나와 마주쳤겠구나.
아니, 그 전에 내가 리아나의 성질을 긁지만 않았어도, 아니 더 이전에 리아나가 내 성질을 긁지만 않았어도 셋이서 마주쳤겠지.
뜻밖의 만남에 헛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그를 앞에 두고 웃을 순 없었다.
게다가 수녀 같은 생활에 너무 오래 익숙해져 있던 탓인지, 이렇게 남자를, 그것도 잘생기고 근사한 남자를 가까이서 보는 게 너무나 혼란스러우면서도 얼떨떨했다. 일단은 초면이잖아.
키가 이렇게 컸구나. 어깨도 떡 벌어져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제압하는 느낌이 들었다.
멀찌감치 서서 가만히 보고만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에스티안은 내 앞으로 좀 더 다가왔다.
“아델린.”
그래, 목소리가 아주 낮다는 설정도 내가 박박 우겨 넣은 거였다. 이렇게 눈앞에서 그 실체를 마주하니 기분이 묘하구나.
말을 안 할 수는 없기에,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블라머프 경.”
어색하게 웃으며 꺼낸 인사말에 그는 살짝 당황한 얼굴을 했다.
“……말을, 편하게 하기로 하지 않았었나.”
그랬어?! 난 모르지!
에스티안은 공작가 자제에 내로라하는 검술 실력으로 꽤 어린 나이에 황실기사단장까지 오른 자였다.
스물둘이던가, 셋이던가. 제국 제일의 검, 황실의 검, 곧 성장해 진정한 제국의 붉은 사자가 될 황태자의 검. 뭐 이런 설정이었으니까.
그래서 절대 그에게 반말을 하는 인물은 없었다.
귀족 작위에 실력까지 갖춰졌으니 누가 그에게 가벼운 말을 던질까.
그런데 아델린은 워낙 쾌활한 성격이라 그런지 그와 이미 친구를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아닌걸…….
“아, 제가, 아팠다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정신이 좀, 오락가락해서요. 경께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그냥 앞으로는 에스티안 경이라고 부를게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 채 내뱉은 말은 머리통을 거치지 않고 나갔다.
다짜고짜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말하고, 이름을 부르겠다 말하다니…….
수치심이 마구 밀려들었다. 내가 그동안 이성과 대화할 일이 정말 없긴 했구나.
계속 작게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고 있으려니 큰 한숨이 바로 앞에서 새어 나왔다. 에스티안이 내뱉은 숨이었다.
“몸은.”
“네?”
“크게 다쳤던 건 다 회복한 건가?”
“아, 네. 네. 괜찮아졌어요.”
애초에 아픈 게 아니었으니 안 괜찮을 리 없지. 입꼬리를 겨우 당겨 웃곤 팔을 들어 보이며 건강함을 보여 주려 했다.
“그래도 이렇게 혼자 저녁의 거리를 다닐 정도는 아닐 텐데.”
그러게 말이다……. 그가 곤란하다는 듯, 걱정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자 나도 모르게 리아나만큼이나 징징대는 두서없는 말이 나가 버렸다.
“아…… 사정이 좀 생겨서요. 리아나 아시죠? 항상 같이 황궁에 찾아가면 에스티안 경도 옆에 계셨으니까. 리아나와 같이 살롱에 왔다가 말다툼을 하는 바람에 리아나가 저를 놓고 갔네요. 하하…….”
그는 내 말에 작게 웃었다. 웃을 만한 일이지.
그러나 그는 리아나의 그런 순수한 것 같은 면을 좋아한다는 설정이었으니 어쩌면 내 말을 듣고 그녀에 대한 호감도가 더 올라갔을지도 모르겠다.
옅은 미소를 지어도 아름다운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마저 말을 이었다.
“근데 보시다시피 별생각 없이 나오느라 시녀분이나 기사분을 대동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살롱 측에 부탁을 드리려던 차였어요.”
시녀분, 기사분이라는 호칭에 그는 바람 빠지듯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오늘은 개인적인 일이 있어 말이나 마차를 가져오지 않았어. 괜찮다면 그대의 저택까지 함께 걷고 싶은데.”
그러고 보니 에스티안은 황실기사단장 정복이 아니라 가벼운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물론 그런 간단한 차림에도 빛이 났지만.
아무리 기사단장이라지만 저렇게 무방비하게 다녀도 되는 건가?
나는 살롱에 왔던 거라 치고, 에스티안은 어딜 갔다 온 거지?
그렇게 의문이 떠올라 무의식중에 에스티안이 지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길 쪽을 바라보았다.
아, 등이 달린 가게들이 모인 골목.
그랬구나. 내 입으로 뱉었던 괴상한 설정으로 생각은 금방 흘러갔다.
‘다른 남자 주인공은 무조건 못된 남자여야 해. 여성 편력 있어서 옆에 있는 여자 매번 갈아치우고 하는 그런 나쁜 남자로. 그런 남자가 또 은근히 인기가 있단 말야.’
‘진짜 인기 있어? 그건 그냥 쓰레기 아니야? 넌 항상 이상한 얘길…….’
‘아니, 그러니까 서브 남주인 거지, 주인공은 안 되고. 대신 그렇게 쓰레기 같은 생활을 하던 끝에 겨우 여자 주인공에 대한 진정한 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해야지.’
‘오, 철이 드는 거라면 뭐. 적는다, 바로.’
지금 생각하니 친구가 무슨 생각으로 내 얘길 다 받아들인 건지 의아하기까지 했다.
아무 근거 없는 내 이상한 생각을 이토록 충실히 반영했을 줄이야.
에스티안은 술집과 등 달린 가게, 즉 업소들을 밥 먹듯 드나드는 망나니라는 설정의 캐릭터였다.
대체 내가 왜 이런 인물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강하게 주장을 했던 걸까……. 심지어 외모까지 내 취향에 저토록 맞춰 놓고는. 에스티안에게는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다.
그런 생각을 거친 결과 말도 마차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은밀하게 시내에, 그것도 저쪽 골목을 지나쳐 나온 거라면 그가 뭘 하고 가는 건지도 대충 추측이 되었다.
생각보다 이른 저녁 시간에 저길 빠져나온 것에 신기해해야 하는 건가?
잠시 내가 말을 멈추자 에스티안은 다시 내 앞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내 이마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손이 심지어 크기까지 해서, 눈까지 다 덮어 버려 나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보지 못한 채 그저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만 들었다.
“좀 창백한 것 같은데. 뜨거운 걸로 봐서 열이 나는 건가? 설마 이렇게 바깥으로 나오면 안 되는 상태인데 몰래 나온 건 아니겠지.”
얼굴에 곧바로 손을 댔어!
아, 원래 이 정도로 친한 사이였나? 아니면 역시 바람둥이에 나쁜 남자란 이런 건가.
나쁜 남자는커녕 그냥 남자조차 접할 일이 없던 나로선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상황에 왠지 마음이 간질간질하면서도 못 견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로봇처럼 뻣뻣하게 팔을 들어 올려 내 이마와 눈을 덮고 있던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에스티안 경의 손이 너무 차가운 거예요. 완전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면, 그대를 안은 채로 저택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
“아뇨! 그건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같이 가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요.”
펄쩍 뛰는 내 대답에 에스티안은 픽 웃었다. 그는 부드럽게 내 양어깨를 잡고는 안쪽 길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함께 저택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남자와 집 같이 가는 건 처음인데. 그 상대가 에스티안이라니…….
괜히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듯해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입을 열지 않고 그저 내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걸을 뿐이었다.
아, 누군가랑 같이 있으면 이렇게 어색하게 정적이 오는 순간이 싫어서 늘 혼자 구석으로 다니곤 했던 건데.
무슨 말이라도 걸고 싶은 마음에, 내내 궁금했던 생각들이 갑자기 입 밖으로 튀어 나가 버렸다.
“에스티안 경은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 제복도 안 입으셨네요.”
사실 묻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어차피 대충 아니까.
그리고 이미 제국 사교계 내에도 에스티안의 여성 편력이나 깨끗하지 못한 생활 모습은 많이 알려진 터였다.
그냥 오랫동안 집에 처박혀 있던 내가 잘 몰라 물어본 것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 버리면 좋겠네.
“볼일이 있었어.”
“아아…… 아무리 에스티안 경의 검술 실력이 강하다고 해도, 그렇게 가벼운 차림으로 다니셔도 돼요?”
“괜찮아. 이렇게 자주 나오니까.”
말을 돌리려고 한 건데 자주 나온다는 대답을 들으면 나는 또 할 말이 없잖아…….
어딜 자주 가느냐고 묻는 것도 웃기고, 오히려 속 보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아아, 하고 알았다는 듯 대답하고는 말을 돌렸다.
“제복 아닌 차림도 무척 멋있으셔서 여쭤본 거예요.”
칭찬인 데다 나는 살롱 갔다 오는 길이기도 했으니 얼마나 연관성도 있고 좋아.
그러나 겨우 다른 소재로 대화를 바꿔 놨더니만 들리는 에스티안의 말은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아델린, 그대도 오늘 아주 예뻐.”
이 사람이 놀다 오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에스티안은 바람둥이인 와중에도 냉정하고 매서운 성격을 지닌 걸로 설정했는데.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던 것도 기억나는데.
저게 대체 어디가 차가운 성격이란 말인가. 초승달처럼 슬며시 웃는 얼굴은 따뜻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그런 옆모습에 나는 절로 멍청한 반응을 하고 말았다.
“어, 하하. 아이고, 감사합니다. 에스티안 경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좋네요.”
좋기는 뭐가 좋아…….
내 사심이 뜬금없이 불쑥 나온 것 같아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 들어가고 싶었다.
취향인 사람이 있어도 뒤에서 바라만 보던 나였는데, 직접 내 취향을 반영해 놓은 사람 바로 옆에서 생전 처음 듣는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말들을 듣고 있자니 거의 뭐, 생각과 입이 따로 놀고 있었다.
마차로는 얼마 안 된다고 생각했던 저택이 걸어서는 이토록 오래 걸리는 것이었던가.
가는 내내 에스티안이 뭔가 내게 말하면 나는 대체로 짧게 대답하고 습관처럼 감사하다는 말을 붙이는 이상한 대화가 이뤄졌다.
정말 이제는 더 못 말하겠다 싶을 때쯤, 다행히 저택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살롱에는 다음 주 황실 무도회 때 입을 드레스를 보러 갔던 거였나?”
“네, 네. 그렇죠. 아, 에스티안 경께서도 가시나요?”
“북쪽 숲에서 마물을 가장 많이 없앤 게 난데 나도 가냐고 묻는다니…….”
그래, 미안하다……. 좀 몰랐다. 생각이 그렇게 안 굴러갈 수도 있는 거지.
어처구니없는 내 물음에 에스티안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낮게 웃었다. 너무 웃기다는 듯 목 안쪽으로 끅끅대며 웃는 그의 모습이 사실은 더 웃겼다.
아무리 나쁜 남자여도 진심은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맑은 그 웃음에, 잠시 호수 같은 마음에 돌을 던진 듯 물결이 일었다. 그래서 나도 그냥 따라서 허허 웃고 말았다.
둘 다 웃음이 좀 잦아들어 이제 인사를 하려는데, 문지기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댁까지 모셔다 드릴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아델린 영애. 부디 조심히 들어가시길.”
에스티안은 문지기가 나타나자마자 갑자기 내 손등 위에 입을 맞추며 영락없는 황실기사단장의 모습을 보였다.
사회적 자아, 뭐 그런 건가. 여기서 ‘너 갑자기 왜 그러니?’ 하면 난감하겠지. 나도 대충 장단을 맞춰 주었다.
“에스티안 경처럼 훌륭한 분이 에스코트해 주신 덕에 저야말로 위험하지 않게 올 수 있어 다행이었는걸요.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주 무도회에서 뵙지요.”
“네, 황실에서 뵙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뒤 에스티안이 가는 모습을 잠시 보고 서 있으려는데, 그가 내 쪽으로 슬쩍 다가와 문지기는 모를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굴색이 아직 안 좋으니까 푹 쉬도록 해. 그땐 좀 더 건강해진 모습으로 보면 좋겠어.”
영애라고 할 땐 언제고 갑자기…….
그 천연덕스러움에 풋 하고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설사 그가 바람둥이라 누구에게나 하는 말을, 놀림을 담아 했을지라도 누군가 나를 걱정해 준다는 것에 기분이 정말 좋았다.
“네, 지금도 사실 건강하지만 더 건강해져서 갈게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저런 말을 내뱉어 버렸으니.
혹시 무도회에 가기 귀찮아져도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가야만 하게 되었지만, 뭐 이번 한 번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안나가 놀라서 달려 나왔다.
“아가씨, 리아나 아가씨와 함께 나가셨기에 같이 오시는 줄 알았는데요. 리아나 아가씨로부터 아가씨는 살롱에서 드레스를 좀 더 보고 올 거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살롱에 계속 계셨던 건가요?”
마차 혼자 타고 가면서 언제 또 여기다 말을 전했대? 그 치밀함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뇨. 리아나가 저를 버리고 갔거든요. 하하.”
“네에?”
“저보고 뭐 변했네 어쩌네 떠들고는 마차를 타고 혼자 가 버렸어요. 그래서 저는 저택까지 걸어왔어요.”
가만히 생각할수록 웃기기까지 했다. 아델린은 리아나한테 항상 이 정도의 취급을 받았던 걸까?
이전에 잘해 줬다가 갑자기 내가 삐딱하게 군다는 생각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라고는 해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행동하는 게 정말 맞는 걸까? 어휴, 모르겠다.
“걸어오셨다고요? 거리가 꽤 멀잖아요! 살롱을 통해 연락하시면 바로 마차를 보냈을 텐데요.”
그러네. 생각해 보니 에스티안이 데려다주는 것을 거절하고 그냥 살롱 측에 부탁을 했어도 되는 일이긴 했다.
나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의 말에 순순히 따랐을까.
리아나 때문에 열 받은 머리를 식히고 싶었던 것도 맞지만, 한편으로는 내 생각에 따라 만들어졌대도 과언이 아닌 에스티안을 옆에서 좀 더 보고 싶어서였던 것도 있었다.
가만히 떠올려 보면 여기서 지내는 모든 이들에게는 이 세상이 곧 그들의 삶이고 전부인데, 설정이랍시고 생각 없이 지껄였던 내 얘기대로 이루어진 거라니…….
어느 순간부터,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에스티안을 본 순간부터 나는 기묘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집어넣은 괴상한 설정만 아니라면 지극히 정상적인 멋진 사람임이 분명하니까.
단순히 외모를 내 취향에 맞췄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보였던 뜻밖의 면모가 그런 생각이 들게 했다.
나를 위해 베푼 호의나, 얼떨결에 보았던 웃음 같은 것들.
뭐, 원래 아델린과 친해서 그런 거라면 또 모르겠구나. 어휴, 이것도 생각할수록 복잡했다.
“시내에서 우연히 에스티안 경을 만났거든요. 그분이 다행히 저택까지 데려다주셨어요.”
“아아, 그러셨군요. 그분이라면 다행이에요. 정말 안전한 귀가였을 테니까요.”
안나는 의도적으로 에스티안이 여색을 밝힌다는 소문 얘기는 피하며 그의 검술이 제국 내에서 얼마나 뛰어난지 잠시 얘기하고는 금방 목욕물을 준비해 주었다.
달콤한 과일 향기가 나는 비누 거품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있었더니 오래 걸어오느라 굳은 다리도 풀리는 것 같고, 기분도 좋아졌다.
그 덕분에 나는 드레스 한 벌 보러 갔다가 줄줄이 겪은 어안이 벙벙한 일들을 잠시 따뜻한 물속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리아나는 나에게 편지도 쓰지 않았고, 시녀를 통한 그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야, 너 정말 괘씸한 거 아니냐!’ 하면서 먼저 편지를 쓰거나 방문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내가 바라던 건 그거였으니까.
사실 또 모종의 죄책감이 들어서 마음이 움찔거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 게으름과 귀찮음이 그 마음들을 모두 이겨 버렸다.
드레스와 장신구는 생각보다 금방 저택으로 도착했고, 나는 또 며칠 내내 방에 딸린 정원 안에 처박혀 혼자만의 티타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