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55화 (155/155)

155화(完)

클로드의 손을 잡고 돌아간 공작가는 당연하게도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전개였다. 내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적이 한두 번이었어야지.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보러 지하 감옥에 가겠다고 하고는 사라졌으니.’

어쩌면 헤르잔이 직접 아이작 달튼과 소피아 일라리아를 찾아가 우리를 어떻게 했냐며 추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클로드의 말이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사람들이 우르르 저택에서 달려 나왔다.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용인과 네펠리 영애가 보이는 건 그러려니 했지만, 사람들 사이에는 보여서는 안 될 이들도 있었다.

슬슬 국경 쪽으로 나가봐야 한다며 부대를 이끌고 출타하셨던 이안 님과 에스텔 님, 그리고 루핀과 아르웬 언니가 그들이었다.

‘아니, 대체 언제 연락을 한 거야!’

도대체 어떻게 하루 만에 또 온 거고! 놀랍기 짝이 없는 상황에 당황하기도 전, 사람들이 우리 둘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각하! 나디아 님!”

“나디아!”

아르웬 언니보다도 먼저 뛰쳐나온 헤르잔과 줄리엔은 평소와 달리 잔뜩 흐트러진 모양새였다. 줄리엔은 눈에 눈물까지 머금은 채였다.

안도와 걱정이 잔뜩 섞인 표정으로 우리에게 달려온 두 사람이 잠시 멈칫했다. 말 위에 주렁주렁 매달린 온갖 물건들과 담요, 그리고 젖은 옷이 둘의 시야에 잡힌 탓이었다.

“…그건.”

“음…….”

단어 하나를 겨우 내뱉은 헤르잔을 보며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니, 호숫가에서 밤을 지새우며 썼던 용품들을 오두막에 놔뒀는데도 들고 올 게 산더미이지 뭔가.

‘생각보다 분위기를 너무 탔을지도.’

분명 예쁘다고 샀던 머리핀이었는데, 밝은 곳에서 찬찬히 보니 내가 가진 옷 중에 어울릴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전형적인 충동구매의 결과랄까.’

유일한 위안은 물건들의 값이 그리 비싸지 않다는 것 정도였다.

멀쩡해 보이는 나와 클로드, 그리고 잔뜩 쌓인 잡동사니들을 보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헤르잔이 분함을 가득 담아 벌컥 언성을 높였다.

“외출을 하실 거라면 하신다고 언질이라도 주고 가셔야……. 잠시만, 나디아 님의 손에 그거 뭡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언성을 높일 뻔했다. 왜냐하면, 그가 화를 내기 전에 내가 먼저 헤르잔에게 왼손을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미간을 찌푸린 채 유심히 내 손을 보던 헤르잔의 눈이 잔뜩 커졌다.

“설마, 각하. 나디아 님께…….”

“어머! 어머! 나디아 님! 세상에! 어쩌면 좋아요!”

헤르잔보다도 먼저 반지를 알아챈 줄리엔이 그녀답지 않게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꺅꺅 소리를 냈다. 줄리엔은 나에게 긍정의 답을 들은 클로드보다도 벅차 보이는 모습으로 잔뜩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는 이제 막 말에서 내려온 내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코를 훌쩍였다.

“언젠가는 정식으로 오실 거라 믿고 있었지만 카르테인 공작가로 와주시기로 해서 정말,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도 부족함 없이 잘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 그. 으응, 고마워…….”

“맞습니다. 저 역시 보좌관으로서 충실히 나디아 님을 모실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각하께서 조금 시간을 들이시는 것 같아 식과 관련한 예산은 내년 하반기로 편성했는데, 이렇게 됐으니 다시 조정해야겠군요.”

이날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두 사람 뒤로 묘한 표정의 다섯 사람이 걸어왔다.

전대 공작 내외인 이안 님과 에스텔 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만족스러움이 서린 표정이었고, 아르웬 언니와 네펠리 영애는 머리론 이해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루핀은…….

“아, 역시. 고대급 마도구를 그렇게 막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괜찮을 거라고 설명해도 막무가내로 끌고 오더니. 영혼은 이 이상 완전할 수 없지만 축하해, 누나. 이젠 정말 맘 놓고 연구만 해도 되겠다.”

“…어어, 그래. 고맙…다?”

“근데 잠깐, 자발적으로 사회적 체제에 편입하는 게 영혼의 안정성과 연관이 있나? 나중에 한 번 확인해 봐도 되지?”

루핀은 잘 모르겠다.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마법사들은 재능이 천재적이면 천재적일수록 인간으로서 어딘가 결여된 듯 보인단 말이야.’

저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들이 대단해 보이는 거다. 인간적인 면모가 부족한 저런 사람을 바꿔놓는 것 아닌가.

속으로 존경의 박수를 날리고 있을 때쯤, 아르웬 언니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당연히 네 짝이 카르테인 공작이 될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쉽게 당황스러움이 가시지를 않는구나. 생각보다 내가 널 보낼 준비가 덜 되어 있었나 보다.”

“언니.”

“하지만 축하는 해야겠지. 네가 드디어 네 행복을 찾았으니.”

아르웬 언니의 푸른 눈이 애정으로 따스하게 물들었다. 나는 본인의 황망한 마음조차 누르고 나를 먼저 생각해 주는 언니를 꼭 끌어안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고마워, 언니. 언니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진심이야. 용기를 낼 수 있던 것도, 북부로 올 수 있던 것도, 내가 마음을 놓고 이곳에서 멋대로 굴 수 있던 것도 전부 언니가 있어서였어.”

“…그래, 내가 북부로 가자고 널 설득한 그날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농담 섞인 목소리로 내게 답한 언니가 클로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클로드 카르테인, 토벌 때 우리가 나눴던 대화는 잘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당연히.”

“나디아의 눈에서 눈물이라도 나는 순간, 나 혼자서라도 친히 카르테인 공작가를 짓밟으러 올 테니 그 점도 명심하고.”

“그러도록.”

딱딱하다 못해 위협적인 목소리로 클로드와 대화를 끝낸 언니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했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 다정한 표정과 손길로 볼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니 조만간 집으로 오겠구나. 공작가 사이의 경사…이니 준비할 게 상당하지. 아무리 서둘러도 두 달은 족히 걸리겠어.”

“음, 그렇겠구나. 공작가 사이의 혼담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나디아 본인의 위치도 있으니 말이다. 북부와 이 근방은 내가 알아서 하지.”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에스텔 님.”

“아……. 그렇게나 오래 걸려?”

경사라는 단어에서 잠시 멈칫하던 언니와 일의 우선순위를 고려하던 에스텔 님이 다소 얼빠진 내 표정을 보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동생이라 신경 쓰는 것도 있다만 황궁과 신전, 마탑까지 참석할 결혼식이잖니.”

“제국의 행사에 가깝지.”

아니, 내가 뭐라고 내 결혼식이 제국의 행사까지 가!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을 굴렸으나 여기에서 놀란 건 나뿐이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클로드조차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당연하다는 듯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갈 겁니다.”

“그건, 그건 그런데…….”

왜 또 나만 안달이 난 것 같은 기분인데, 왜!

도대체 뭐 그렇게 정리할 게 많다고!

* * *

그렇게 생각했던 과거의 나는 정신을 덜 차렸던 게 분명하다.

클로드가 내게 입을 맞추며 했던 말처럼, 결혼식이 되기 전까지의 기간은 악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바빴다.

‘특히 내가 청혼받기 직전까지 사업을 벌여 놨었잖아?’

일은 일대로 진행해야지, 결혼 준비는 준비대로 해야지. 나는 사람이 이렇게 몸을 굴려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번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당장 식을 앞둔 신부가 이런 말을 해서 좀 그렇긴 한데, 클로드 카르테인이 인간이 맞기는 한 건지에 대한 의구심도 생겼었다.

‘대체 클로드는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 거야?’

나는 엄마랑 언니랑 줄리엔까지 손을 보태줬는데도 이렇게 죽을 것 같은데, 그는 혼자 모든 걸 다 처리하면서 어쩜 저렇게 기운이 넘쳐 보일까? 심지어 식 당일인 오늘은 신부인 나보다도 피부가 좋아 보였다.

‘운동? 역시 운동이 답이냐?’

눈을 가늘게 뜬 채 클로드를 바라보고 있자, 다시 한번 반할 정도로 멋지게 차려입은 그가 날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 그가 속삭였다.

“베일을 쓰고 있어도 표정이 다 드러납니다, 나디아.”

사람들이 바글거려 시끄러운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와닿았다. 어쩐지 이런 사소한 것에서 내가 얼마나 그를 신경 쓰는지를 알 것 같아 부끄러워질 때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슬슬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들어갈까요?”

“아, 그러네. 네, 가요!”

함께 입장하는 건 이곳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이렇게 하겠다고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의외로 모두가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식을 진행하는 곳이 신전도 황궁의 정원도 아닌, 우리가 늘 함께 걸어갔던 신의 영역인 탓이었다.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며 발을 디딘 신의 영역에는 신의 축복 때 간증을 들어주셨던 대신관님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으로 자리한 소중한 이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고 있자니, 대신관님이 작은 헛기침과 함께 식을 시작했다.

“신의 기운이 아주 충만한 이곳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던 두 분을 다시 맺어줄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진심이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연 대신관님은 더 시간을 끌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언약의 의식을 진행했다.

“클로드 카르테인. 형제님께서는 나디아 골드게이트를 평생의 반려로 맞이해, 신께서 숨을 거두어 가시는 날까지 반려를 사랑할 것을 맹세하십니까?”

“예.”

“나디아 골드게이트. 자매님 또한 클로드 카르테인을 평생의 반려로 맞이해, 신께서 숨을 거두어 가시는 날까지 반려를 사랑할 것을 맹세하십니까?”

“네, 아. 그런데요, 신관님. 신전에서 매일같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숨을 거두어 가 달라 기도드리면 신께서 들어주실까요?”

“그럼 신의 이름으로 두 사람이 정식 부……. 예?”

예상에 없던 내 물음에 신관님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니, 이번에 보니까 정말로 신이 있더구먼. 교황님이 나한테 신이 미안해하는 것 같다고도 했는데, 이 정도는 들어주지 않겠어?

“그, 인간의 수명은.”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는 대신관님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속으로 소원을 빌던 찰나였다. 우우웅, 하고 땅이 살짝 울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뒤쪽에 위치한 거대한 간헐천에서 물기둥이 크게 치솟기 시작했다.

우리가 계산했던 시간보다 훨씬 이른 분출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놀란 나와 클로드의 눈이 잠시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들어주실… 모양입니다?”

“아, 아핫! 그러네요? 아하하하!”

어딘가 얼이 빠진 듯한 대신관님의 답을 듣고 나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드레스 위로 잔뜩 흩뿌려지는 온천수도, 다 같이 터진 웃음도, 그리고 내 옆에서 자체적으로 맹세의 입맞춤을 하는 클로드도 모두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해요, 클로드.”

“사랑합니다, 나디아. 그리고…….”

“음?”

“고민해 보았는데, 하루에 두 번 목욕하는 것도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입니다.

못 말린다는 듯 웃는 나를 바라보며 클로드가 마주 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만족스러운, 내 행복한 목욕 라이프의 시작이었다.

<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 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