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나는 클로드가 끓인 차를 호호 불어 홀짝였다.
찻잎을 따로 거르지 않았기 때문에 우러난 차에는 마른 잎들이 동동 떠 있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차의 맛이 아니라 지금 그와 내가 있는 이 시간이었으니까.
잔잔하고 달콤한 노래가 없어도, 뭔가 대단한 게 없어도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마냥 좋았다. 나는 슬쩍 클로드의 어깨에 기댄 채 차를 마셨다. 그가 익숙하게 내 어깨를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물에 들어갔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피부가 찰 텐데, 괜찮으십니까?”
“아, 그래요? 음……. 괜찮은 거 같아요. 사실 말하기 전까지는 아예 생각도 못 했거든요.”
정말이다. 마시고 있는 차 때문인가? 나는 클로드에게 기대어 안겨 있는 지금도 여전히 그에게서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네. 왜요, 내가 따뜻하게 체온 좀 나눠줄까요?”
기대고 있던 고개를 살짝 틀어 그를 비스듬하게 바라보자, 클로드가 차를 마시다 말고 입가에 웃음을 매달았다. 장난스러움을 물씬 담아 말했으니 그도 분명 농을 섞어 답할 것이다.
‘조금 전에 가슴을 만져볼 거냐고 물었던 것처럼.’
반사적으로 클로드의 탄탄한 몸이 머릿속을 채웠다. 직접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괜히 촉감이 떠오르는 것 같아 빠르게 생각을 지울 때였다. 정신을 일깨우듯 클로드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그거 아십니까? 나디아, 그대는 얼굴에 모든 게 드러납니다.”
“네?”
“재미있을 때도, 즐거울 때도, 속상할 때도, 분할 때도 전부.”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절로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내 표정을 지켜보던 그가 살짝 손을 뻗어 흘러내린 잔머리를 매만졌다.
클로드는 애정이 담긴 손길로 볼과 이마를 간질이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가 하는 행동 중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을 찾는 게 더 어려울 테지만, 그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지금처럼 그대가 내게 장난을 칠 때 짓는 표정입니다.”
“…어, 제가 어떤 표정을 짓는데요?”
옅게 미간을 좁힌 채 잠시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단어가 부족한 느낌이라, 그냥 하나하나 묘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은 양쪽의 입꼬리가 그냥 웃을 때와는 다르게 말려 올라갑니다. 가끔은 코를 찡긋거리기도 해서 여기에 작게 주름이 지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콧대 쪽을 가볍게 누른 그가 움찔 눈을 감는 나를 보며 잘게 웃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살짝 가늘어지면서 지금처럼 이마가 움찔거리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대감에 들떠 평소보다 더 높아지는 그대의 목소리가 좋습니다.”
“그, 굉장히 구체적이네요.”
호기심이 사람을 죽인다고, 나는 내가 물어봐 놓고도 민망한 기분이 들어 눈을 굴렸다. 어쩐지 그의 손길이 닿은 부분이 화끈거리는 것도 같았다.
표정에 티가 다 난다더니 클로드는 내가 지금 민망해하는 것도 알아챈 모양이었다.
“여기까지만 말할까요?”
“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만약 그대가 허락해 줬다면 말하고자 했던 것보다 더 많이 말했을 것 같거든요. 내가 그대를 보며 생각하는 것들에 관해서.”
“아니, 그렇게 많은 생각이 든단 말이에요?”
슬쩍 고개를 기울인 그가 지그시 나와 눈을 맞췄다. 고요히 닿은 주황색 눈빛이 꼭 듣고 싶냐고 묻는 것 같아 나는 빠르게 손을 내저으며 비스듬히 틀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아냐, 아냐. 내가 실언했어요. 우리 다른 말이나 합시다.”
“그게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어차피 밤은 기니 말입니다.”
나는 태연하게 컵을 입에 가져다 대는 그를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저거 결국 돌고 돌아 사랑을 속삭이는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뜻 아니냐? 아니, 뭐 사랑하는 사람 둘이 있으면 나올 말이 그거 말고 뭐가 있나 싶긴 한데…….’
그래도 생각해 보면 정말 많은 게 달라졌다. 이 세계도, 내 상황도, 그리고 그와 나의 관계도.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기는 한데, 뭐라고 해야 할까?
‘지금에서야 제대로 실감이 나는 느낌?’
어쩌면 그의 말마따나 너무 바빴던 걸지도 모른다. 클로드의 품에 안겨서 울었을 때처럼, 흘려보냈던 시간을 반추하고 앞으로의 행복을 떠올릴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 말고는 침묵만이 가득한 공간 속에서 과거의 일들을 쭉 떠올리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처음에는 고백해도 거절할 거라고 그랬는데.”
“음?”
“공작님이요.”
“아…….”
그제야 내가 한 말을 이해한 클로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받아쳤다.
“집무실에서 당당하게 구애하게 해달라던 그대에게 부모님은 번개처럼 한 번에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도 했었죠.”
“아, 맞아. 그랬지.”
그 말을 들으니 불쑥 생각나는 게 있었다. 내가 그의 마음을 떠볼 수 있었던 그것, 내가 청혼하면서 줬던 그 꽃!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저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물어보십시오.”
“제가 청혼하면서 줬던 그 꽃, 그거 왜 가지고 계셨어요?”
내 물음을 들은 클로드가 엄지로 느릿하게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감정을 되짚어 보던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 꽃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모든 색 가운데 가장 선명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색?”
“그대가 내게 하나가 아닌 둘이니 괜찮지 않겠냐고 했던 그 순간, 그대와 그 꽃을 시작으로 무채색으로 물들어 있던 세상에 다시 색이 칠해졌습니다. 꼭 물에 물감이 퍼지는 것처럼.”
“아니, 그게 벼락 맞듯이 ‘이 사람이다!’ 하는 경험이랑 뭐가 달라요? 말만 들어보면 내가 공작님 세상의 중심이었는데?”
“당시의 제가 멍청했던 모양입니다.”
가차 없이 과거의 자신을 깎아내린 클로드가 슬쩍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 그만하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아, 진짜!”
그를 흘겨보며 주먹으로 가볍게 옆구리를 때리자 웃음과 함께 그의 몸이 들썩였다.
그렇게 그와 소소한 추억거리를 이야기하고, 야시장에서 사 왔던 음식을 모닥불에 데워 먹는 사이 점점 밤이 깊어졌다.
클로드의 배려로 누울 곳을 마련한 나는 그의 허벅지를 벤 채 느릿하게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수면의 바로 위에서 환하게 빛나던 달이 서서히 기울어 저무는 모습이 오묘했다.
내 머리카락을 살살 만져주며 그가 머리 위에서 물었다.
“졸리지는 않으십니까?”
“음, 그다지? 공작님은요? 안 졸려요?”
“며칠 정도는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 다리는 안 저리고요? 저 꽤 오래 베고 있었잖아요.”
“전혀.”
역시 제국에서 손꼽히는 영웅이라 이건가! 나는 단호하게 부정하는 클로드의 목소리를 듣고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담담하게 사라져 가는 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곧 있으면 날이 밝겠네요. 그러니까 오늘이 가기 전에 말해놔야겠다.”
“무엇을?”
“오늘 하루 고마웠어요, 정말로. 기억에서 절대 지우지 못할 만큼 좋은 날이었고, 오늘에서야 정말로 모든 과거를 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모든 시간을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 탓일까,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그의 손길이 멎었다.
그 상태 그대로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그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나디아.”
“네?”
속삭임에 가까운 크기로 소리를 낸 그가 옆으로 누워있던 내 몸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니 그가 지그시, 그러나 아주 다정하게 나와 눈을 마주쳤다.
밤의 기운이 여전히 가시지 않아서인지 클로드의 얼굴 위로 푸른 새벽빛이 맴돌았다. 그 오묘한 기운에 눈길을 빼앗기던 찰나, 그가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내일이 되면, 그때는 제 평생의 반려가 되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
“그대의 새로운 시작에 내가 곁에 있을 수 있도록.”
담담하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온 마음이 담긴 걸 알았기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그저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의 순간을 눈에 새기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클로드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이상하네.’
분명 그가 청혼을 하면 바로 그러겠다는 답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무수한 단어가 목에 탁 걸린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 일순 작게 탄성을 질렀다.
떠오르는 태양으로 인해 클로드의 주황색 눈이 보석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에서 나는 ‘내일’을 보았다. 그리고 예하가 축복했던 ‘행복’을 읽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목소리가 나왔다.
“해가 밝았어요.”
“예, 내일이 왔습니다.”
나는 약간의 초조함이 엿보이는 클로드를 바라보며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장난기 서린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 하루에 목욕 두 번씩 해도 되나요?”
“아…….”
작게 터져 나오는 그의 작은 탄성에서 나는 내 답이 무사히 그에게 전달되었음을 직감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벅차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클로드가 잠시 눈을 감았다. 손을 뻗어 이제는 완전히 마른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릴 때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역시 안 되겠군요. 낭비가 심해서.”
“뭐요?”
눈썹을 밀어 올리며 입을 벌린 순간, 그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삼켰다. 그러고는 행복이 물씬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피치 못한 상황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하루에 땀을 여러 번 흘렸다든지.”
“아니, 그건 너무 속 보이는…….”
나는 채 잇지 못한 말을 도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삼킨 단어들마저 달기는 매한가지라서, 나는 그냥 벅참을 표현하는 그의 몸짓을 기쁘게 받아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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