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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52화 (152/155)

152화

지하 감옥에서 나왔을 무렵에는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정신없이 움직였으니 당연한 일이긴 하지.’

나는 지는 해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나디아.”

“…….”

뒤에서 클로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차마 손바닥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빨리 복수를 끝내고 청혼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추잡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을 끝까지 보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복잡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특히나, 한 손에 소피아의 피와 고름 등이 잔뜩 묻은 황금 열쇠를 쥔 상태로는 더더욱.

클로드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어떠한 말도 없이 조용히 나를 끌어당겼다.

그가 뒷머리를 꾹 눌러 자신의 품 깊숙이 내 얼굴을 숨겼다. 그게 꼭 울어도 상관없다는 말 같아서, 나는 우는 대신 웅얼거렸다.

“짜증 나…….”

“압니다.”

“밉고 화가 나요.”

“예.”

기분이 정말 더럽다. 왜지. 복수가 삶의 전부도 아니었는데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거야.

이유 모를 짜증이 치밀어 마냥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나를 품에서 떼어놓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클로드가 어깨를 붙잡은 채 진지하게 나를 불렀다.

“나디아.”

“…어, 네?”

“목욕하러 가실 생각 없으십니까?”

이렇게 갑자기?

뜬금없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저 눈을 깜박이고만 있을 때였다. 문득 예전에 내가 그를 붙들고 온천으로 목욕을 하러 가자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이거 클로드 나름대로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시도구나. 좋아하는 거로 기분 전환을 시켜주고 싶어서.

끝까지 마음을 살피려는 그의 마음이 고마워서 나는 옅게 웃음을 흘리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이렇게 생각이 복잡할 때는 목욕하는 게 딱 좋긴 하지. 온갖 감정들이 물과 함께 쓸려 나가는 기분이 드니까.’

긍정을 뜻을 확인한 클로드가 주저함 없이 내 손을 잡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한 점은 그의 발이 향하는 곳이 저택이 아닌 마구간 쪽이라는 것이었다.

“클로드? 목욕하러 가자면서요. 왜 마구간 쪽으로 가요?”

그가 고개를 돌려 의아해하는 나를 바라보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장난스러움이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 웃음을 보자, 설마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우리 지금 온천 가요? 지금? 곧 해가 지는데?”

“아닙니다.”

“그럼요? 지금 또 나가려는 거 아니에요?”

“나가는 건 맞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한 클로드의 입이 다시 다물렸다. 나는 의뭉스러움이 가득 담긴 그의 표정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눈빛을 모르는 척하며 말에 훌쩍 올라탄 클로드가 손을 내밀었다.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지고 있는 노을을 뒤로한 채 손을 내미는 그의 모습은 소설 속의 남주라기보다는 어릴 적 한 번쯤은 꿈꿨던 왕자님 같기도 했다.

일순, ‘오늘 외출을 두 번이나 하자고요? 그, 내일 일은 어쩌고…….’라고 말하려던 걸 삼키고 그에게 손을 뻗을 정도로.

꼭 나쁘지만 유쾌한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클로드는 정문이 아닌 공작가의 쪽문으로 말을 몰더니 산자락의 끄트머리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 앞에 익숙하게 말을 묶었다.

오두막이라기보다 창고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는 곳에 불을 켠 그가 선반 한쪽에 놓여 있던 옷 하나를 내게 건넸다. 도톰하지만 수수한 천은 귀족들이 입을 만한 재질은 아니었다.

“제 옷이라 조금 클 것도 같습니다만, 잠시 동여매 주시면 금방 새 옷을 사 드리겠습니다.”

“오…….”

나는 슬쩍 선반에 몸을 기대고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내 앞에서 윗옷을 훌러덩 벗어젖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반쯤 장난기가 담긴 눈으로 그에게 말했다.

“공작님, 이런 게 엄청 익숙하신 모양이네요?”

“음?”

“아니, 낮에 저를 데리고 갔던 곳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생각보다 내 남자에게 비밀이 많은 것 같아서.”

클로드는 웃음기가 담긴 내 농담을 들으며 나지막이 목을 울려 웃었다.

“그럴지도.”

“그럴지도? ‘그럴지도’라고요?”

바지를 갈아입는 대신 옆에 놓인 가방에 여분의 바지를 집어넣은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와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디아, 얼른 갈아입는 게 어떻겠습니까?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가 직접 시중을 들어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아니, 무슨 그런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말을 해요? 그렇게 말하면 직접 벗기고 입혀 준 것처럼 들리잖아요!”

나는 화드득 놀라며 빠르게 그의 등을 밀었다. 클로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순순히 오두막 밖으로 밀려났다. 작게 도리질을 치며 주섬주섬 갈아입은 옷은 생각 외로 따뜻하고 또 편안했다.

남자 옷을 입어서 그런가, 오두막 한편에 비치된 거울 속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사내로 변장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얼핏 보면 밀회라도 나가는 줄 알겠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는지, 내 모습을 확인한 클로드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말라며 휘두른 주먹을 가볍게 피한 그가 그대로 나를 안아 들고는 산길을 내려갔다.

내려달라는 말은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해가 짧은 북부의 특성상 밤의 산길은 다칠 위험이 있다는 게 이유였다.

클로드가 나를 안아 들고 도착한 곳은 내가 그간 봐왔던 것과는 또 사뭇 다른 풍경의 나단이었다.

“자자. 싸다, 싸! 속을 데워 줄 뜨끈한 와인 한 잔 사가쇼!”

“별의 힘을 담은 신비로운 수정 구슬로 당신의 미래를 봐 드립니다~!”

어두움이 내린 거리 위로 촛불들과 저급 마도구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낮만큼이나 활기로 가득 찬 거리를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조금 전처럼 내 손을 잡고 거리 속의 풍경으로 이끌었다.

“배는 고프지 않으십니까?”

“아…….”

나는 그제야 오늘 제대로 먹은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래라면 언덕에서 클로드와 함께 간식거리라도 먹었어야 했는데…….

배 위에 손을 얹는 것을 본 클로드가 근처에 있는 노점상으로 가 꼬치를 비롯한 먹거리를 샀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곁에 서 있는 나를 보며, 노점상의 주인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거 알고 보니 밤에 부모 몰래 나와서 만나는 연인이었구먼? 거, 아가씨 옷은 그래도 여성용으로 하나 사 주지 그래!”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저렇게 눈에 띄는 모습으로 다니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봐! 이런 건 사소한 곳에서 들키는 거라고! 기분이다! 꼬치 하나 더 가져가. 내 아내랑 연애할 때 생각이 나서 그래.”

“감사합니다.”

능청스럽게 주인장의 서비스까지 챙긴 클로드가 내게 꼬치 하나를 건넸다. 인심 좋게 칠한 양념이 떨어지지 않도록 손수건으로 아랫부분을 감싸주기까지 했다.

“나디아.”

“아, 고마워요.”

얼결에 그가 준 꼬치를 받아 들며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게 그 유명한 로판식 야시장 데이트와 꼬치…….”

“예?”

“아, 아뇨. 그, 제가 봤던 로맨스 소설에는 꼭 이런 밤의 데이트 장면들이 나왔었거든요. 밤이 주는 낭만 때문일까요? 공작님한테 꼬치를 받으니까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그렇습니까?”

한결 편하게 웃음을 짓는 그를 보며 나는 꼬치를 한껏 베어 물었다. 배가 고파서인지, 클로드랑 함께여서인지 꼬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야들야들한 고기를 씹어 삼킬 때면, 클로드가 때에 맞춰 다른 맛있는 것을 또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그가 주는 음식들을 받아먹으며 조금씩 주위의 상황에 익숙해졌다.

“클로드, 이건 어때요?”

“잘 어울립니다.”

“이건요? 이게 나아요, 방금 한 게 나아요?”

“둘 다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전부 사드릴까요?”

“에이, 뭘 또 다 산…….”

“아가씨! 무슨 그런 말을 해! 애인이 선물을 주겠다고 할 때는 거절 말고 다 받는 거야. 총각, 내가 값 좀 싸게 쳐줄 테니까 두 개 합쳐서 다 가져가.”

옷이며 장신구, 때로는 쓸모없어 보이는 예쁜 장식품과 주전자 같은 생활용품들까지.

공작가의 기준에서는 푼돈이나 다름없는 돈이었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돈을 펑펑 쓰고 다닌 우리는 서로에게 사 준 선물들을 품에 한가득 안은 채 잔뜩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의 울적함이 새카맣게 지워질 정도로 그와 함께 정신없이 거리를 누비던 중, 클로드가 하늘을 잠시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나디아, 이쪽으로.”

“클로드?”

아슬아슬하게 안은 선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손깍지를 낀 채 나는 또다시 미지의 곳으로 그를 따라갔다. 클로드가 나를 이끈 곳은 직전의 소란이 꿈이었을 정도로 고요한 숲길이었다.

극과 극을 달리는 기묘한 동선 탓일까. 의아함이 가득 담긴 내 표정을 본 그가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잊고 있던 말을 다시 상기시켰다.

“제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목욕할 생각 없으시냐고.”

아, 맞아. 그랬지?

나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며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줄리엔에게 말해 공작저에서 목욕을 했던 것도 맞습니다만, 처음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땐 저 역시도 제가 이상했거든요.”

“아.”

“그러다가 도무지 안 될 것 같을 때는 오늘처럼 밤늦게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딱 이 시간쯤이 가장 아름다워서…….”

말을 끝맺지 않아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거겠지.’

넓디넓은 호수 위로, 아주 큰 달이 내려앉아 있었다.

주위의 별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한 달빛이 요요히 흐르는 숲속의 호수는 온통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워서, 나는 품에 안고 있던 물건들을 와르르 쏟은 줄도 모르고 눈앞의 광경을 눈에 담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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