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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48화 (148/155)

148화

“나디아, 눈 떠도 됩니다.”

“아, 못 떠요!”

이렇게 바람 소리가 쌩쌩 들리고 몸이 마구 흔들리는데 대체 어떻게 눈을 뜨란 말이야! 그랬다가는 분명 심장이 먼저 굳을 거다.

잔뜩 목소리를 높이며 고개를 내젓자, 머리 위에서 클로드가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유롭다 못해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정말 떠도 괜찮습니다. 이미 땅에 착지한 지는 오래니까.”

“아니, 못 뜬다니…느에……?”

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클로드의 말을 따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여전히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시선을 돌리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거리가 보였다.

“여긴, 나단?”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다 살짝 눈을 굴린 나는 그제야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몸이 흔들린다 생각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짙은 검은색 갈기와 윤기가 흐르는 갈색 털. 언제 어떻게 탄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클로드와 함께 말을 타고 있었다.

비명을 지른 게 무색할 정도로 안전한 상황을 확인하고 나니 왈칵 민망함이 몰려왔다. 순식간에 빨개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클로드가 재차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제가 괜찮다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 언제…….”

“나디아, 그대가 제 품에서 바르작거릴 때.”

거침없이 내 웅얼거림에 답을 한 그가 조금 더 속도를 내 말을 몰았다. 허공 위에 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나는 탄탄한 클로드의 품에 안정적으로 안긴 채 잠시 상쾌한 북부 특유의 공기를 즐겼다. 차가운 바람 탓에 코끝과 볼이 빨개졌지만, 그마저도 지금은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나단을 빠져나온 클로드는 레티시아도, 신의 영역도 아닌 처음 보는 길로 말을 몰았다.

‘쉰다고 하길래 당연히 함께 온천을 즐기러 갈 줄 알았더니.’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클로드를 향해 물었다.

“이쪽으로 가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음…….”

클로드는 그답지 않게 잠시 고민하더니 슬쩍 고개를 내려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다정하게 안은 나를 추스른 그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뤘다.

“도착하고 나서 말해드리겠습니다.”

“아하. 음, 네!”

나는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에게 답하고는 조금 더 깊게 그의 품에 등을 기댔다.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인지 좁게 난 길에는 움푹 파인 곳마저 보였지만, 별다른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클로드가 나를 이상한 곳으로 데리고 갈 일은 없을 테니까.

‘심지어 클로드는 이 길이 아주 익숙해 보인단 말이지.’

클로드는 거기가 거기 같아 보이는 길 위에서도 능숙하게 방향을 잡으며 말을 몰았다. 심지어는 어떻게 이런 곳에서 장사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작은 점포를 찾아내 간식으로 먹을 음식까지 샀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노란색 꽃이 잔뜩 핀 야트막한 동산이었다. 추운 북부의 환경 탓인지 다소 키가 작은 노란 꽃들 사이로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클로드가 말에서 내려주자마자 나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 나는 동산 아래로 펼쳐진 넓은 평원을 보고 절로 탄성을 질렀다.

“와아!”

발치에 흐드러진 노란 꽃은 갈색으로 물든 평원 사이사이에도 피어 있었다. 넓은 평원의 뒤쪽으로는 흐릿하게 산이 보였다. 나는 등산이라도 한 것처럼 팔을 쫙 펴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하아…….”

잠시 눈을 감은 채 시원한 공기를 만끽하고 있자니, 문득 처음 북부에 발을 들였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아주 오래간만에 숨을 양껏 쉴 수 있어서 좋았는데.

‘심지어 미친 돌풍이 들이닥쳐서 마차가 흔들릴 때도 괜찮았지.’

나는 간만에 추억에 젖어 클로드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에 말을 묶은 그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또렷하게 나를 담은 그의 주황색 눈이 일순 가슴 벅찬 애정을 머금었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좋아서, 나는 절로 그를 향해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나와 같은 곳을 보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노란색 꽃의 이름을 혹시 아십니까?”

“잔뜩 피어 있는 이 꽃 말하는 거죠? 음, 아니요. 몰라요.”

“얼음새꽃이라고 합니다. 눈 사이에서도 피어날 만큼 강한 생명력을 지닌 게 특징입니다. 재밌는 점은 상반된 두 개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공작님, 꽃말에도 관심이 있으세요?”

놀리듯이 질문하자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답했다.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데, 유난히 눈에 밟히던 꽃이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꽃말이 어떻게 되는데요?”

“영원한 행복. 슬픈 추억.”

나지막하게 떨어진 그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진짜 신기하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렇게 특이한 경우라면 충분히 기억에 남을 만했다.

클로드는 눈을 동그랗게 뜬 내 표정을 확인하고는 다시 넓은 평원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한 평원 위로 마른 풀과 얼음새꽃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언젠가 나디아 그대와 이곳을 다시 와보고 싶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가끔 답답해 못 견딜 때면 기억을 곱씹으러 오는 곳이었던 터라.”

여분으로 들고 온 모포를 바닥에 깐 그가 내 손을 잡고 풀 위에 앉았다. 바람 탓에 흐트러진 머리를 한쪽으로 넘겨주며 클로드가 수수께끼 같던 말을 풀어주었다.

“저 평원에서 ‘그 사고’가 일어난 전투가 있었습니다.”

“아…….”

“마수의 피를 뒤집어쓴 채 땅에 나뒹굴던 그때 저 꽃이 제 눈앞에 있었습니다. 저와 비슷하게 피로 더럽혀진 노란색 꽃이. 그런데 그 꽃의 꽃말이 공교롭게도 슬픈 추억이지 뭡니까.”

그날 이후, 홀로 이상한 사람이 된 저를 가리키듯이.

담담하게 떨어진 그의 뒷말이 가슴을 울렁거리게끔 했다. 분명 답답해서 이곳을 찾았을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런 것이겠지.

“죽는 날까지 짊어져야 할 상실이라 생각했습니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이 있듯, 이 역시 그러한 거라고. 하필 내 눈에 띈 꽃의 꽃말이 두 가지인 이유는 그걸 유념하라는 뜻인가 했습니다.”

“…….”

“나디아, 그대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여전히 평원을 바라보고 있는 클로드의 옆모습이 지나치게 편안해 보여서 나는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눈앞의 광경이 사진처럼 뇌리에 남는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나는 지금 보고 있는 클로드의 옆모습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살짝 당겨진 입꼬리도, 맞닿은 손의 온기도, 따스함을 담은 채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도 전부.

그가 얼음새꽃을 볼 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듯, 나 역시 얼음새꽃을 볼 때면 반사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나디아.”

“네?”

“제가 그대에게 나타나 줘서 고맙다고, 쉽게 포기하지 않아 고마웠다고 그리 말했던 적이 있었던가요?”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워낙 많은 일이 있었고 너무 많은 밀어를 속삭여댄 탓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듯한 나를 보며 클로드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했어도 좋습니다. 몇 번을 전해도 부족하니까.”

“어…….”

손을 잡은 채 나를 마주한 그가 다정하지만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바람에 휩쓸려 내게 날아온 이가 그대라서, 청혼을 거절했음에도 아르웬 경에게 대련을 요청할 정도로 나를 붙잡아 줘서, 그렇게 내 구원이 되어줘서 고맙습니다.”

“…….”

“나디아 그대가 내 곁에 있는 한, 나는 더는 얼음새꽃을 보며 슬픈 추억을 떠올리지 않을 테지요. 이제야 겨우, 영원한 행복이라는 꽃말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곁에 있다면 영원히 행복할 거라는 그의 말이 달았다.

분명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법하게 꿀을 잔뜩 뿌린 대사였음에도 마음에 이리도 크게 와닿는 이유는 그의 말 하나하나가 전부 진심이라는 걸 알아서겠지. 그리고 나 역시 그를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마찬가지예요. 이곳에 데리고 와줘서 고마워요.”

나는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그에게 입을 맞췄다. 손을 잡고 있던 그가 팔을 쓸어 올리다 허리를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로 나를 끌어당겨 허벅지 위에 앉힌 클로드가 조금 더 깊숙이 입술을 포갰다. 몇 번이고 겹쳐 익숙한 입맞춤이었음에도 여전히 클로드와 키스할 때면 심장이 떨렸다.

개미가 기어가는 듯 간질간질한 기분을 만끽하며 그와 몇 번이고 입술을 겹치던 순간, 살짝 입술을 뗀 그가 열기가 서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디아.”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 순간 등허리가 오싹해졌다. 관능적이기 짝이 없는 목소리와 눈빛이, 지금의 분위기가 묘한 기분을 자아낸 탓이었다.

“…네?”

“그대에게 전할 말이 있습니다.”

그 순간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잠깐, 이거 청혼이야? 응? 그런 거야?’

우리와 인연이 깊은 외딴곳, 애정이 담긴 진심 어린 고백, 진한 입맞춤, 달뜬 분위기!

지금 이 상황에서 전할 말이라면 딱 그거밖에 없는 거 아니냐?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차마 그에게 전할 말이 뭐냐고 묻지도 못한 채 그의 옷깃을 꼭 쥐고 있자,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작게 말을 흐렸다.

“실은 이런 곳에서 전할 예정은 아니었습니다만…….”

나는 눈 한번 깜박이지 못하고 꼴깍 침을 삼켰다.

‘예정이고 자시고, 숨넘어가니까 빨리 말해!’

클로드, 당신이라면 난 보석 사탕 반지로 하는 청혼이라도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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