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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46화 (146/155)

146화

수도에서 대대적으로 치러진 처형식은 내 납치 사건만큼이나 제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렇지만 그게 내 생활에 큰 변화를 가지고 왔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나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며 하나씩 내가 정리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 참석하는 티 파티 역시 그것의 연장선이었다. 오늘의 티 파티는 네펠리 영애가 북부에서 주관하는 첫 티 파티였으니까.

“에스텔 님, 나디아 님!”

전대 공작 부인인 에스텔 님과 함께 카페에 발을 디디자마자 네펠리 영애가 호의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주관하는 이의 자택에서 치러지는 일반적인 티 파티와 다르게, 네펠리 영애가 선택한 곳은 나단에서 입소문이 난 카페였다.

북부에 그녀의 별장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아무리 빌리는 공간이라지만 카르테인 공작가에서 자신이 먼저 티 파티를 주최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역시 네펠리 영애야.’

네펠리 영애가 고른 카페는 여느 저택의 응접실만큼이나 우아한 멋을 가지고 있었다.

귀빈들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높게 트인 천장과 빼곡하게 벽면을 채우고 있는 책들이 지적인 분위기를 더한 탓이 큰 듯했다.

반갑게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온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교과서에 나와도 될 법한 인사를 건넸다.

“수고스럽게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북부에서 주관하는 첫 티 파티에 두 분을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네펠리 영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내게 다정하게 답한 영애를 보며, 에스텔 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티 파티는 제법 오래간만이야. 기대되는군, 영애.”

“네. 그간 도움을 주셨던 만큼, 절대 실망스럽지 않으실 겁니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네펠리 영애의 입가에 걸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자신감이 단순한 허언이 아닌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걱정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네펠리 영애는 연륜 있는 부인들이 탄탄하게 휘어잡고 있는 수도의 사교계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한 사람이었으니까.

‘서약식 때 네펠리 영애를 붙잡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어.’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네펠리 영애는 자신이 이곳에 와서 해야 할 일을 착착 해내고 있었다.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내게 무례를 저질렀던 어린 영애들의 기강을 잡았을뿐더러, 에스텔 님과 상의해 북부 사교계 교유의 색을 남기면서도 내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체계를 세워나갔다.

북부의 사교계가 소피아 일라리아의 의향대로 흔들렸던 근본적인 원인은 중심을 잡을 이의 부재였던 탓에, 두 사람의 움직임은 제법 빠른 안정을 불러왔다.

효과는 자리에 모인 영애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영애들은 나와 에스텔 님을 보자마자 아주 모범적인 자세로 치마를 잡고 인사를 올렸다.

“대부인, 그리고 공녀님. 인사드립니다. 로베르트 자작가의 소넷입니다.”

“이렇게 함께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영애들의 모습을 보며 네펠리 영애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인사하는 영애들 가운데에는 소피아 일라리아를 한껏 따르던 크리스틴도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콕 짚을까 싶어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네펠리 영애가 지정해 준 자리에 앉았다.

티 파티는 아주 호의적인 분위기에서 무난하게 흘러갔다. 네펠리 영애가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 준비한 차와 다과는 훌륭했고, 대화의 폭 역시도 제법 넓어졌다.

북부의 특성상 무예에도 제법 관심이 있는 영애들이 많아, 마수 토벌과 관련된 이야기가 오가던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녀님, 이번에 진행된 처형식을 직접 보셨다 들었습니다. 다소 조심스럽지만, 그 무도하고 뻔뻔한 이들이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심경은 괜찮으신 건가요?”

영애의 물음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시원한 향이 나는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가볍게 그녀에게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그들은 그만큼의 죗값을 치를 테니까요.”

“그건……. 소문을 들은 제국민들의 분노가 크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나는 영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그때 자결을 택했더라면 덜 괴로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있으나 모두가 자신을 죽은 이로 대한다는 건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요?”

“아…….”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니지. 당장은 목숨을 연명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테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느낄 것이다.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무엇도 할 수 없는 처지의 괴로움을.

동정심이 많은 누군가가 먹거리를 가져다주지도 않는다면, 분명 그들은 괴롭게 죽어갈 것이다. 죽은 자에게 음식을 파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내가 한 말을 이해한 영애들이 작게 탄식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눈치챈 네펠리 영애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능숙하게 자신을 향한 시선들을 받아낸 그녀가 다른 주제를 꺼냈다.

“북부에 새로운 자원을 찾아냈다는 소문이 있던데. 크리스틴 영애, 분명 영애의 가문이 아니었던가요?”

“아, 아. 네……!”

갑작스럽게 지명되어 놀란 듯한 그녀가 한참 눈을 흔들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하는 태도가 이전과 비교했을 때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치마를 그러쥔 그녀가 짧게 심호흡을 했다.

“저희 가문 소유의 산림에서 제법 좋은 나무가 자라고 있더군요. 이번 사태로 방어선에 문제가 없는지 재점검을 하다 발견했습니다. 그러니……. 전부 공녀님과 각하의 덕분이에요.”

“뭘요.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걸요. 그런데 새로운 자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무라니 궁금하네요. 어디에 쓰일 수 있나요?”

“아, 아직 여러 가지를 실험해보는 중이라 단정 지어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확인해 본 결과 여러 군데에 쓰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장 큰 장점은 나무 자체에서 나는 특유의 향 때문인지 해충의 피해가 거의 없고, 또 습기에 강해서 쉽게 썩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 그건 정말 귀하네요! 귀한 가구로 쓰기도 좋을 것 같고 건축 자재로도 훌륭하겠어요. 특히 호숫가나 바다 근처에 별장을 지을 때 말이에요.”

“네, 네. 맞아요!”

네펠리 영애를 비롯한 몇 명의 영애들이 맞장구를 쳐주자, 크리스틴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간 따르던 소피아 일라리아에 대한 배신감과 죄책감, 그리고 다시는 사교계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보이지 않게 그녀를 묶어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크리스틴은 궁금해하는 영애들을 위해 나무에 관한 설명을 조목조목 늘어놓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에스텔 님이 처음으로 유의미한 반응을 보였다.

“굉장히 좋은 소식이구나.”

“가, 감사합니다. 대부인!”

새로운 자원의 발견은 북부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에스텔 님의 입가에 서린 만족스러운 미소를 본 그녀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모처럼 들은 좋은 소식에 모두가 들떠 화기애애하게 입을 열었다. 나만 빼고. 당연했다.

‘습기에 강하고 건축에 쓰기 좋은 나무.’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가득 들어찼기 때문이다. 뒤늦게 온몸에 다시 짜릿함이 퍼졌다. 나는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네펠리 영애에게 물었다.

“영애, 혹시 제가 일전에 영애와 맺었던 비누 사업 계약 건 말입니다만.”

“아? 아, 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그게 아니라, 지금 거기에서 꽤 수익이 나고 있다고 말해주셨던 것 같은데…….”

내 물음을 들은 네펠리 영애는 갑작스럽게 나온 동떨어진 주제에도 당황한 내색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답했다.

“맞습니다. 따로 저희 가문의 인맥을 돌리거나 할 필요도 없이 막대하게 수익이 나고 있지요. 이유야 향기부터 피부 결이 좋아지는 것까지 다양하지만, 의사 협회에서 나디아 님께 호의를 보인 이후로는 정말 껑충 뛰었어요. 대체 언제 목욕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나 싶을 정도랍니다? 그런데 그건 왜…….”

“아, 아뇨. 그 수익이 난 거로 이번에는 다른 걸 좀 생각해 보려고 해요.”

“다른 것 말인가요?”

나는 네펠리 영애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헤르잔에게 운영에 관한 보고를 듣고 안심했는데, 지금 이 상황이면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특히 지금은 전보다 더 거리낄 게 없어지지 않았나.

‘구구절절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말할 필요도 없고, 한 번 성공한 전적이 있으니 교섭도 쉬워. 게다가 네펠리 영애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이번에는 골드게이트 가문의 힘도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온전히 내 힘으로 시작하고 만들 수 있는 거다. 내가 사랑하는, 온천이 있는데 빠지면 서운한 그걸!

물론, 내 기억 속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하기는 어려울 거다. 이곳과 그곳은 다르니까.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 사업의 성공에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북부의 영지민 사이에서 온천 사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레티시아가 사랑받을 수 있던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하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물론, 신의 축복 사건과 치유의 물이 큰 역할을 하긴 했지. 그러나 이게 관광 산업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이유는 또 있었다.

‘추운 북부의 날씨.’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걸 싫어할 사람은 없다. 특히 날이 추워지면 추워질수록 그 짜릿함은 더해지지.

마도구가 붙어 가격이 비쌈에도 귀족들이 온천수를 구매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 번 본 그 맛을 잊을 수 없으니까. 집에서도 간접적으로나마 또 느끼고 싶으니까!

‘그러니 분명 추운 북부에서 온기를 더해주고 심지어 노폐물까지 빼줄 수 있는 이건 히트를 칠 거야!’

목욕과 온천 다음으로 바라 마지않던, 사우나를 만들 수 있다고!

나는 세상의 온갖 상냥함을 다 끌어모은 사람처럼 맑게 웃으며 크리스틴 영애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틴 영애,”

“느, 아, 어, 네?”

“제가 영애와 손을 한번 잡아보고 싶은데, 혹시 저와 함께 사업할 생각 없으세요?”

아, 제발 있다고 해줘. 기왕 욕심낸 김에 조금만, 진짜 조금만 더 내자. 내 행복한 목욕 인생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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