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은 크게 네 가지였다.
1. 아이작 달튼과 소피아 일라리아의 음모에 가담했던 의사 또는 그 무리에 대한 응징
2. 일의 원흉인 소피아와 아이작 정리
3, 네펠리 영애가 잘 다지고 있을 북부 사교계 재확인
4. 그간 신경 쓰지 못했던 사업을 확인하고 확장하기
글 자체만 보면 무엇 하나 녹록한 일이 없었으나 괜찮았다.
내가 응징해야 하는 범죄자들은 두 주범을 포함해 모두가 곱게 잡혀서 포장되어 있었고, 사교계는 네펠리 영애를 비롯해 에스텔 님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사업은 북부의 수익과도 관련되어 있으니 헤르잔이 잘 운영하고 있었으리라 믿는다.
‘그, 마탑의 재정 담당 마법사님도 마찬가지고.’
나는 나를 신전에 보내는 그 순간까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처럼 나를 대했던 마법사를 기억했다.
당신이야말로 다음 세대의 마법사들을 위한 등불이다 뭐다, 사람 얼굴에 얼마나 금칠을 해대는지 한 일주일만 더 있었으면 황금상이 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때 확신이 들긴 했다. 헤르잔이 없었어도 이 사람이 어떻게든 온천수 사업에서 돈을 뽑아냈으리라는 확신. 특히나…….
‘신전에서 의식을 부디 잘 해결하셔서 꼭, 저희의 온천수 사업이 앞으로도 배부른 귀족 놈들의 돈을 왕창 뽑아낼 수 있게. 아, 아차! 영애님 앞에서 제가 무슨 경솔한 말을!’
‘으음, 아뇨. 괜찮습니다. 사업이 다 그렇죠, 뭐.’
‘앗, 이해해 주시는 겁니까? 역시 탁월한 안목을 가지신 골드게이트 영애님답습니다! 하하하! 이 기세를 몰아서 타국 귀족들의 돈도…….’
마지막에 내 손을 부여잡으며 했던 그 말은 정말 한 치의 거짓도 담기지 않은 진실처럼 보였다.
어찌 되었거나 다행인 건, 내게는 저 녹록지 않은 일들을 함께 처리해 줄 사람이 있다는 점과 내가 명실상부 ‘나디아 골드게이트’라는 점이었다.
‘황금 열쇠와 같이 그전까지도 북부에서 조금씩 써먹긴 했지만, 이제는 몸 사릴 필요 없이 대놓고 써먹어도 되니까!’
혹시나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모르는 사람이 아닐지 걱정하며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었다. 이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는 게 사람에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내가 나로 살 수 있다는 거 만만세야, 정말!’
그래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황실과 신전에 보증을 해달라 요청했다. 요청한 내용은 간단했다.
‘아이작 달튼과 소피아 일라리아의 횡포로 인해 내게 다른 차원에서 지냈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보증을 해주세요.’
이미 신전의 의식을 거쳐 거짓말 하나 섞인 것 없는 진실임이 밝혀졌어도, 사실 이런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꽤 복잡한 절차와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다.
보증을 받은 사람이 사사로운 자기 일에 황실과 신전을 이용할 수도 있고, 또 이 일로 문제가 생겼을 때 보증을 해주었던 황실과 신전 역시 사고에 함께 휘말리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가족에게도 보증을 서주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거 아니겠나.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상황을 말하는 거고, 나는 아니지.’
나는 연락을 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테인 공작가로 날아온 보증서를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심지어 대신관님은 언제고 증인이 필요하면 달려와 주겠다는 사적인 편지까지 써주셨다.
아니, 내가 이 제국에서 황후 폐하와 우리 가족, 그리고 에스텔 님에 다음가는 공작 영애인데 이 정도 요청쯤은 해도 되는 거 아니냐?
인맥을 이럴 때 아니고 언제 써먹어. 내가 이 보증서를 나쁜 곳에 쓰겠다는 것도 아닌데.
아무튼, 나는 곱게 받아낸 인증서를 들고는 우선 헤르잔을 찾아갔다.
“지금 장난하나? 카르테인 공작가에서 이러라고 그대를 고용한 줄 알아? 자잘한 문제도 아니고 지금 이게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지 감이 안 오나?”
“그, 죄송합니다. 하지만 분명 상반기에는.”
“헤르잔!”
“자네는 눈이 없어? 아직 흐름조차도 읽지 못하나? 내가 분명 내년의 예산 편성에 공작 부……. 아, 나디아 님!”
음, 집무실의 분위기가 싸늘하기 그지없군. 나는 덩달아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에 손으로 목을 문지르며 고개를 기울였다.
“으음, 지금 바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쪽으로 오시죠.”
짜증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하급 보좌관 한 명을 혼내던 그가 나를 보자마자 상냥하게 웃음을 지었다. 안경을 추켜세우는 헤르잔의 표정에서는 단 한 점의 짜증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그의 뒤에서 허여멀겋게 질린 하급 보좌관을 보지 못했더라면 내가 착각을 했나 싶을 정도였다.
얼마 전, 나를 위해 집무실에 마련된 폭신폭신한 소파 자리로 나를 안내한 헤르잔이 다정하게 입꼬리만 올린 채 하급 보좌관을 쏘아봤다.
“자네는 거기 서서 뭘 하고 있나? 가서 다과상 안 내오고?”
“아, 아. 네! 그, 그, 그럼 이 상세 예산 기획안은 다시 수정해서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수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하급 보좌관이 재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저 모습을 보아 하니 아무래도 다과상을 기대할 수는 없을 듯했다. 새카맣게 까먹었을 것 같거든.
“그래서, 이렇게 이른 오전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각하께서는 아직 훈련장에 계십니다만.”
“아! 다른 게 아니고, 우리 사업을 내가 한동안 못 챙긴 것 같아서 관련된 내용을 물어보러 왔어.”
나는 황실과 신전에서 온 보증서를 허공에서 흔들어 보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황실이랑 신전에 요청했던 보증서가 왔어. 이거 들고 의사 협회로 쳐들어갈 건데 그 전에 알아두면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납치 사건과 마수 침략 사건에 가담한 몇 의사가 잡히고 신전의 의식이 끝난 사이에 무슨 변화 없었어?”
“아, 물론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 외람된 질문을 먼저 하나 해도 괜찮겠습니까?”
“음?”
“혹시 의사 협회로 가시는 건…….”
말끝을 흐리는 헤르잔의 표정에 약간의 그늘이 생겼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보여서였다.
“아, 아아! 아냐. 공작님과 네펠리 영애도 같이 갈 거야. 지금 생각으로는 에이포드도 데리고 갈까 싶은데, 에이포드가 과거에 꽤 수모를 당했잖아. 내 사람인데 그 정도는 챙겨줘도 좋을 것 같아서. 그, 물론 싸우자고 가는 건 아닌데……. 그래도 자신의 주장을 반대하던 이들이 수긍하는 모습을 보는 건 남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생각하신 바가 있으실 텐데 제가 괜한 걱정을.”
“으응, 아니야.”
이게 다 내 업보지, 뭐.
분리 불안까지 왔던 클로드가 가장 예민하게 굴었던 건 사실이지만, 사실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하도 사람들이 과보호해 댄 탓일까? 보다 못한 루핀이 일국의 황녀도 이렇게 보호받지는 않을 거라고 나를 놀렸다가 아르웬 언니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기까지 했었지.
물론, 그렇게 놀려대던 루핀도 진즉 클로드와 마음이 통해 내게 위치 추적 마도구를 왕창 가져다준 전적이 있었다.
내가 쓸데없는 일들을 떠올릴 때쯤 표정에 안도감을 잔뜩 내비친 헤르잔이 집무실 책장의 한곳에서 잘 정리된 보고서를 하나 가지고 왔다. 지금까지의 매출 전표와 사업 동향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의사 협회의 수장이 바뀌었다는 것과 레티시아 일대의 안정화, 그리고 수도는 물론이고 타국 귀족들의 관심이 커졌다는 겁니다.”
“아, 생각했던 것보다도 굵직한 변화가 많네? 신전의 의식이 큰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변화가 생길 줄은 몰랐는데.”
“나디아 님.”
“응?”
“나디아 님께서는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쪼록 그 부분도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안경알 너머로 진지하게 눈을 빛내며 말한 헤르잔이 작게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러한 대화를 어색해한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던 탓이다.
“우선 의사 협회로 일을 보러 가신다니 그 부분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의사 협회는 그간 두 부류로 나뉘었었습니다. 나디아 님께서 만든 변화에 반대하는 이들과 수긍하는 쪽이었죠. 당시 협회의 수장 역시 반대파에 속한 이였습니다.”
“아, 그런데 바뀌었다고 했으니 이제는 아니겠구나.”
“예, 당연한 일입니다. 그 수장 역시 두 사람 일에 가담했다가 잡혔으니까요.”
“아하.”
“혹시 의사 협회로 가시려는 목적이 연루자들을 나디아 님의 손으로 직접 처벌하시기 위함입니까?”
나는 헤르잔의 말을 듣고는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말하는 처벌이라는 게 목을 댕강 자르는 거라면, 아니. 그렇다면 굳이 의사 협회로 갈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가담이라고 하기는 했다만, 그 사람들 소피아 일라리아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졌을 확률이 더 높을걸?”
“그럼 설마 용서하실 생각입니까?”
“어, 그것도 아니.”
사실 잘못을 용서하는 이가 진정한 승리자라지만 내 그릇이 아직 그렇게 크지는 못해서. 나는 그럼 무엇을 바라는 거냐고 묻는 듯한 헤르잔의 눈빛에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협회 차원에서 일단 사과는 받아야지. 나 아직 못 받았거든. 그 어떤 사과도. 그리고 가담한 자들에겐 사형 선고를 내려야지.”
“사형 선고요? 하지만 조금 전에…….”
헤르잔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나는 그런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조금 더 짙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 준비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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