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아, 아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정신 차려라, 나디아 골드게이트!’
나는 아주 잠시 전두엽을 스쳤던 생각을 재빨리 부정했다. 아니, 안락한 황제 감금이라고 감금이 아닌 건 아니지 않나.
물론, 비타민D의 중요성 따위는 개나 준 아이작 달튼처럼 방에만 가두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 자유가 일부분 사라진 건 사실이었다.
헤르잔 역시 그의 부재가 점점 길어지는 게 곤란한 듯했고.
“공작님.”
“포도는 입에 맞으십니까?”
“네, 전에 먹었던 것보다 더 단 거 같은데. 아니, 이게 아니지.”
나는 또다시 홀라당 넘어갈 뻔한 정신을 다잡고는 고개를 들어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어, 아니, 난…….”
베어 물린 입술과 함께 단어가 목구멍 너머로 도로 들어갔다. 하도 자주 입을 맞췄더니 이제는 입술이 닿기만 하면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두르게 되었다.
익숙하게 등을 받친 그가 조금 더 짙게 입술을 포개며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집요한 탐닉 탓에 둘만 있는 공간이 물기 어린 소리와 나지막하게 억눌린 목소리로 가득 찼다.
클로드에게 안겨 그를 받아내는 동안, 머릿속에서 자꾸만 붉은색 경고가 울렸다.
‘진짜 미치겠네.’
공작가에 와서 그에게 처음으로 흔들리던 그때, 분명 그런 생각을 했었다. 카르테인 공작 배를 갈라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저 사람 본체가 사실 여우 아니냐고.
‘내가 같은 생각을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카르테인 공작은 칼로 마수를 써는 것만 잘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홀리는 것에도 재주가 있었다. 사람이 똑똑해서 그런가? 클로드는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내 신경을 돌릴 수 있는지를 알아낸 모양이었다.
‘공작님, 있잖아요. 그때…….’
‘줄리엔에게 말해 목욕물을 데워놨습니다. 함께 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저 이제 어디 안 가요. 그러니까 저는 그만 안고 다니는 게.’
‘내측 정원에 식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소스는 크림이 좋습니까, 토마토가 좋습니까?’
목욕부터 음식, 신기한 물건과 내가 흥미로워할 그의 옛 사진 등등. 클로드는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사용해 한시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뿐이야?
‘또 아주 가끔은 그, 본인을 내세워서…….’
아니, 아니지. 가끔이 아닌가?
클로드에게 넘어가 즉흥적으로 방에서 두 사람만의 무도회를 가지다 홀라당 그에게 붙잡혔던 밤이 불쑥 떠올랐다.
본능적으로 열이 오르고 숨이 차는 기분이 들어 몸을 살짝 바르작거리고 있을 때쯤이었다.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나에게 몰두하던 그가 아슬아슬하게 입술을 떼고는 속삭였다.
“나디아, 다른 생각은 말고 제게 집중하십시오.”
클로드는 내게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입술을 포개고는 뭉개진 신음을 모조리 먹어 치웠다. 나는 또다시 몽롱해질 것 같은 기분을 최대한 억누르고는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내 손길에 따라 순순히 밀려난 그가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말짱해 보이는 표정과 다르게 더운 숨결이 옅게 남아있는 열감을 드러냈다.
나는 모자랐던 숨을 고르며 단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더는 안 된다는 듯이, 그를 향해 살짝 손바닥을 내밀기까지 했다.
“공작님. 아니다, 클로드 카르테인. 잠시만, 떨어져 봐요.”
“…….”
클로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른 그 순간, 때가 왔음을 짐작한 것 같았다. 입을 다문 그가 턱에 살짝 힘을 주고는 내게서 떨어져 앉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애처로워 보여서 일순 마음이 흔들렸지만, 나는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대화가 필요해요.”
“하십시오.”
“그…….”
이번에도 말을 돌리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클로드가 의외로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냐고 물어봐야 하나?’
아니. 그건 돌아올 답이 뻔한 질문이었다. 나를 잃는 것.
‘그럼 내가 곁에 있으면 불안감이 해소되느냐고 물을까?’
그것도 아니다. 당연히 그렇다고 할 테니까.
생각보다 좋은 질문을 찾아내는 것이 어려워 고민을 하던 때였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그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정확하게는 치마가 말려 올라가 훤히 드러난 다리를 향했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내 다리를 본 그가 발꿈치를 받친 채 발목을 그러쥐었다.
‘아앗, 설마 또!’
설마 또 그 환상적인 몸으로 날 꾀려는 건 아니겠지!
화들짝 놀라 그의 손에서 발을 빼려는데, 그가 먼저 잡고 있던 발목을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평소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말할 게 없다면 가서 따뜻한 물을 받아 오겠습니다. 그대의 발이 찬 게 거슬리는군요.”
“자, 자, 잠깐만요! 말할 거 있어요!”
지금을 놓치면 또다시 기회를 잡기가 어려울 것 같아, 나는 다급하게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클로드가 자신의 소매를 붙잡은 나를 잠시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 저런 눈 뭔지 알아.’
저거 집착 남주 전매특허 눈빛이잖아.
내가 먼저 자신을 붙잡은 것이 만족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내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그런 눈.
아찔한 기분이 들어 잠시 눈을 굴리고 있자, 그가 자신의 소매를 잡은 내 손을 떼며 내게 답했다. 나를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한 다정한 말투였다.
“그럼 물을 받아 와서 듣겠습니다.”
“아, 으음, 네…….”
클로드가 따뜻한 물을 가지고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다른 물도 아닌, 마도구가 붙어 있던 성수 통을 들고 와서였다. 뭐, 실상은 온천수지만.
통에 담겨있던 온천수를 대야에 담은 그가 손을 뻗어 내 두 다리를 물에 담갔다. 오랜 연구 끝 딱 알맞게 책정된 온도가 짜릿하게 발과 종아리를 타고 올랐다.
절로 오그라드는 발가락을 잠시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쯤, 그가 손수 무릎을 꿇고는 내 발을 받쳤다.
“크, 클로드?”
“가만히.”
짧게 한 마디를 내뱉은 그가 물에 적신 수건으로 내 발을 꼼꼼하게 감싸 닦았다.
아주 당연하게 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조금 전에는 죽어도 생각나지 않던 질문이 불쑥 떠올랐다.
“소피아와 아이작이 당신에게 무슨 불안을 심어줬어요?”
클로드의 손이 아주 잠시 멈췄다. 나는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했나요? 영원히 없어질 거라고? 엇갈린 바람에 내가 ‘나디아’라는 걸 전할 수 없었을 때라, 그래서 나를 잃었다고 생각했나요? 혹시, 그게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
나는 클로드의 침묵에서 답을 얻어버리고야 말았다. 다물린 입술이, 내 발에 고정된 채 희미하게 잠긴 눈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며 나는 나지막하게 그에게 물었다. 불현듯 신전에서 봤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클로드, 믿어달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사라졌던 나를 원망해요?”
“원망?”
그간 자주 입을 열지 않았던 그가 대뜸 말했다. 불쑥 마주친 주황색 눈이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나디아 그대를 원망하지?”
혼잣말처럼 말을 던진 그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예. 소피아 일라리아와 아이작 달튼이 제게 그랬습니다. 영혼은 소멸하기가 쉽고, 나디아가 아닌 그대는 곧 사라질 거라고. 인사조차 할 수 없었던 작별이었습니다. 눈앞에서 놓쳤던 상실이었습니다.”
클로드의 주황색 눈동자가 거멓게 가라앉았다.
“나디아, 나는 그런 상실을 여러 번 겪은 사람입니다. 전쟁이란 무릇 그런 것이니까. 그런데 그들과 그대가 다른 게 뭔지 아십니까?”
“…….”
“그들과 다르게 그대는, 오로지 나만 그대를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클로드의 목소리는 처절하지도 않았고, 괴로움을 담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담담하게 고해 성사를 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이 세상에서 그대만이 내게 당연하다 말해주었습니다. 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손가락질하던 손을 치워준 것도 그대이고, 어설픈 욕망으로 내민 손을 잡아 감정을 일깨운 것도 그대입니다.”
“…….”
“모르시겠습니까? 나디아, 그대가 아무런 의미도 없던 내 세상에 색을 입혔습니다. 그대가 나의 구원입니다.”
눈 한번 깜박이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며 말을 잇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도 같았다.
가슴이 조여서 일순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던 내가 그를 향해 손을 뻗던 그때, 클로드가 내 발등 위로 입술을 묻었다.
성적인 의도 따위는 하나도 없이, 담백하게 입을 맞춘 그가 그대로 속삭였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대를 원망합니까.”
“…….”
“내 유일한 이가 다시 내게 돌아왔는데.”
뭉개지듯 떨어진 말은 그 무엇보다도 애틋한 고백이었다. 꾸밈 하나 없는, 진솔한 날것 그대로의 마음.
그의 말을 듣는 내내 감정이 넘쳐서 절로 쥐어진 주먹을 푼 나는 그대로 양손을 뻗어 클로드의 얼굴을 감쌌다.
“클로드, 나를 봐요.”
“…나디아.”
한껏 일그러졌던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든 그가 당황이 담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눈을 한껏 키우며 다급하게 일어난 그가 엄지로 내 뺨을 문질렀다.
그제야 알아챘다. 내가 울고 있었다는 걸.
나는 경황이 없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마른 수건 대신 자신의 소매로 내 눈물을 닦는 클로드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 채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의 구원자라고 했지만, 아니요. 아뇨, 공작님.”
“…….”
“당신이야말로 내 구원자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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