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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40화 (140/155)

140화

나는 정말로 당황한 나머지 클로드에게서 고개를 돌려 줄리엔과 헤르잔을 바라보았다. 내가 없는 사이 그의 곁에 있었던 둘이라면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는데.

“나디아,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내 사랑스러운 약혼자가 하지 않던 말을 귓가에 속삭이지 뭔가!

말로만 하는 건 내키지 않았는지 클로드는 심지어 한 손으로 볼을 그러쥐어 직접 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도무지 경악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으로 그의 볼을 살살 두드리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공작님, 정신 차려요.”

“저는 제정신입니다.”

“아냐. 나랑 관련된 문제 때문인 거 같긴 한데 회까닥 돌아있잖아요, 지금.”

“괜찮습니다.”

“하나도 안 괜찮아요!”

나는 진지하게 그의 주황색 눈빛을 노려보았다. 짙은 감정들로 일렁이던 그의 눈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 느릿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렇다면 괜찮지 않은 채로도 좋습니다. 나디아, 그대만 내 시야 안에 있다면.”

“아니…….”

“그대를 존중했다가 또다시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질없는 신뢰 하나 때문에 그대가 위험 속으로 걸어가는 걸 놔두고 싶지도 않고, 그러다 그대를 잃게 되는 경험 따위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

“나디아.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대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이렇게 제 뜻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클로드의 말을 들으며 느릿하게 한숨을 쉬었다.

아이작 달튼 그 미친놈도 자긴 제정신이고 다 괜찮고 그냥 나에 대한 사랑이 깊을 뿐이라고 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그런 사랑, 역겹기만 할 뿐이라고 했고.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가증스럽지. 나에 대한 집착이 섞인 엇비슷한 내용인데도 말하는 상대방이 카르테인 공작이니까 또 그게, 참. 그래, 그렇다.

‘뭔가 분리 불안 온 강아지를 보는 것도 같고.’

하긴, 아무리 그래도 아이작 달튼과 클로드 카르테인을 비교할 수는 없었다.

방식이 좀 옳지 않다고 해도, 오로지 자기만족이 전부였던 아이작과 다르게 클로드는 날 잃었던 데 대한 두려움으로 이러는 것이니까.

“나한테 미움을 받아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의 눈이 괴로움으로 물들어 있으면 어떻게 해요, 공작님.”

“…괜찮습니다.”

이거야, 원. 나는 발꿈치를 들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듯 그의 얼굴 곳곳에 자잘하게 입을 맞췄다.

솔직히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는 신전에서 애정 표현을 하는 건 내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모르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이랑 친한 사람들까지 다 있잖아!

내게 호응하듯 목 뒤를 받치고 짙게 입을 맞춰오는 클로드 탓에 당장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어쩌겠나. 이건 내 업보인 것을.

“으음. 공, 공작님. 그만…….”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습니다.”

“클로드… 읍!”

미친놈아, 그만해!

나는 탄탄하기 짝이 없는 그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며 놔달라고 항의를 했다. 이게 무슨 남사스러운 일이야! 진심이 엿보이는 내 행동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런 행동에도 꼼짝 않고 애정 표현을 계속한 클로드 탓인지 누군가가 강제로 나와 클로드를 떼어놓았다.

다정하게 나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이는 클로드와 맞서도 밀리지 않을, 자랑스러운 내 언니였다.

“클로드 카르테인, 내가 그대에게 내 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했던 걸 그새 잊었나?”

“쓸데없는 간섭이다, 아르웬 골드게이트.”

“나는 그 누구도 나디아를 괴롭게 하는 이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다. 그게 설령 카르테인 공작, 그대라 해도 말이야.”

“내 약혼자다.”

“내 혈육이지.”

귓가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당장이라도 기세를 끌어올려 싸울 것 같은 분위기에 자리를 정리하던 신관들이 화들짝 놀라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각하! 그리고 아르웬 경! 여기는 신성한 신전입니다!”

“자중하세요!”

직접 손을 대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신관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머리가 아파 왔다. 나는 손바닥을 들어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다 진정해.”

“나디아.”

“하지만 나디아, 네가…….”

“클로드, 언니. 창피하니까 그만하자고.”

마지막에는 다소 이를 악물었던 것도 같다. 물론, 신전에서 소피아 일라리아의 뺨을 두 대나 내려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건 명분이라도 있지 않나.

‘애정 행각을 못 하게 해서 화내는 공작과 못 봐주겠다고 뜯어말리는 황실 기사단장의 모습이라니!’

수치스럽다.

나는 잔뜩 열이 올라 따끈따끈한 볼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이 모든 사태를 만든 두 원흉에 대한 복수심을 조금 더 키웠다. 두 사람 속을 제대로 뒤집어 놔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이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한 번 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두 사람을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뭐가 문제인지는 잘 알겠어요. 우선, 공작님. 그러니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잖아요, 지금. 이대로는 불안해 죽겠으니까 곁에 있어 달라고, 안심할 시간을 달라는 거잖아요?”

“…….”

나는 복잡한 심경이 드는지 입을 꾹 다무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아르웬 언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니, 그렇대. 그러니까 언니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이작 달튼이랑 소피아 일라리아 때문에 부득이하게 오해가 겹치고 그래서 상황이 더 나빠졌던 건 맞는데, 내가 공작님에게만 짐을 지웠던 것도 있어서.”

“나디아, 그렇다 해도 그게 네가 싫은 걸 참고 버텨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에이, 언니 동생이 그런 상황에서 참기만 할 사람이야?”

이래 봬도 대련에서 언니도 이겼었다고?

그걸 이긴 거로 쳐도 되는지에는 많은 이견이 있을 테지만, 언니가 인정하긴 했으니까. 게다가 이 말의 의미가 진짜 무력이 강하다는 것을 뜻하는 건 또 아니지 않나.

내 말의 요지를 알아챈 언니가 옅게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어미 새가 다 큰 아기 새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본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나디아.”

“응. 나만 믿어.”

나만 믿으라는 말을 들은 클로드가 미세하게 몸을 움찔거린 것 같은데, 착각인가?

나는 자연스럽게 공작의 손을 잡고는 구석에서 나와 사람들이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창피함을 무릅쓴 뽀뽀가 나름대로 효과가 있긴 했는지, 클로드가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다행이지 뭔가. 이번에도 자기만 봐야 한다며 피폐물의 집착 남주처럼 굴면 어쩌나 했는데.

‘장르 한번 다양하네.’

아, 여기가 로판 세계관은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깐 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조금 전에 다 하지 못한 인사를 나누었다.

불안하다는 클로드를 떼어놓았다가는 또 집착 남주처럼 굴 것 같길래, 인사하는 내내 클로드를 키 링처럼 내 옆에 붙여놓았다.

“엄마, 아빠.”

“나디아.”

“죄송해요. 속상하게 해드려서……. 나눌 말이 많을 것 같긴 한데, 음.”

“그래, 무슨 말인지 잘 안다. 나중에 집에 한 번 오련. 아직 마음을 추스를 집이 하나 더 남지 않았니.”

나는 두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년 시절부터 지금껏 살아왔던 골드게이트 공작가와 타운 하우스. 그곳도 이제 더는 겁을 낼 곳이 아니었으니까.

엄마와 아빠의 곁에 서 있던 네펠리 영애가 작게 웃으며 가볍게 말을 얹었다.

“다행이지요. 전 이미 카르테인 공작가에 짐을 다 풀어서 나디아 님과 오래 이야기를 할 수 있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떠돌이 마법사를 찾아서 따지든가 해야지, 안 되겠어요.”

“떠돌이 마법사는……. 아, 그 로켓 목걸이 때문에?”

“네. 목걸이가 주인을 찾아낼 거라더니, 아무리 노려봐도 나디아 님이 계신 곳을 알려주질 않잖아요.”

유쾌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간 그녀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보지 않아도 훤했다. 고작 떠돌이 마법사가 만든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모를 물건에까지 마음을 줄 정도였다면 말 다 한 거지, 뭐.

“그래요. 돌아가서 많이 이야기 나누는 거로 해요.”

“네, 좋아요.”

힐끗 클로드를 본 그녀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리며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북부의 어린 영애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들이 제법 있어서, 천천히 보는 것도 괜찮겠어요. 같은 공간에 있으니까요. 그렇지요?”

“음, 네.”

나는 네펠리 영애가 먼저 내민 배려를 감사히 받고는 헤르잔과 줄리엔, 그리고 내 사람들을 바라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

우리의 집으로.

여유롭게 평온을 즐기며 나태함을 만끽하려던 기존의 계획과 달리 옆에 분리 불안이 생긴 애인을 달게 됐지만, 괜찮다. 내 사랑은 내가 돌봐줘야지, 또.

‘삶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어디 한번 잘 돌봐줘 보자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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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했던 과거의 나는 틀렸다.

아니, 클로드가 통제 불능이 됐다는 말은 아니고.

“나디아, 무료하다면 책을 좀 읽어드릴까요?”

“목욕하고 나오면 머리를 빗겨드리겠습니다.”

잘 돌봐주자고 의욕에 넘쳤었는데 도리어 내가 클로드에게 잘 돌봐지고 있었다. 그것도 지극정성으로.

집착 속성이 아직 덜 가신 클로드는 줄리엔이 내 시중을 드는 것조차도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 원하는 대로 잠시 놔둬 보자고 한 것이 그만…….

‘아, 큰일이다.’

나는 클로드의 무릎에 앉아 자연스럽게 그가 입에 넣어주는 포도를 씹으며 생각했다.

‘이거… 너무 편한데?’

그. 이, 이대로도 괜찮은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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