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왜, 왜! 대체 왜!”
우악스럽게 내 멱살을 잡은 소피아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위에서도 큰 소란이 일었다.
“나디아!”
“소피아, 안 돼!”
걱정이 물씬 담긴 아르웬 언니의 외침부터 일라리아 백작의 절실한 목소리까지, 자리에서 벗어난 이들이 단번에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상황이 이렇게 흐른 이상, 소피아 또한 이게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백작 부인은 절박한 손길로 내 목을 조르려 들었다.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왜, 왜 넌, 왜……!”
“…윽!”
미리 그녀의 손목을 잡아챈 탓에 그저 헛손질만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소피아는 멈추지 않았다. 처절함에 가까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그녀가 손톱을 날카롭게 세웠다.
“소피아 일라리아!”
“아냐! 나는, 나는 소피아 일라리아가 아니라고!”
“부인, 제발 그만!”
우리 쪽으로 다가온 사람들이 그녀를 낚아채며 내게서 떨어트리려 했다.
소피아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기회를 쉽게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소매며 옷깃, 하물며 내 손가락 하나까지도 끈질기게 붙잡았다.
사람들의 방해 속에서도 소피아가 재차 내 멱살을 잡으려던 찰나, 지팡이로 바닥을 찧는 소리가 맑게 신전을 울렸다.
―탕!
아름답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소리가 퍼짐과 함께, 바닥 위에 은은하게 깔려 있던 금색의 빛이 물씬 요동쳤다.
파도처럼 일렁거리던 금색의 빛은 이윽고 소피아와 나를 온화하게 감싸 그녀와 나를 떨어트렸다. 정확하게는 그녀를 포함한 모든 이들을 내 근처에서 물렸다.
강제적으로 내게서 떨어진 소피아는 포기하지 않은 채 손을 움직였으나, 금색의 빛은 그저 나와 소피아를 떨어트리기만 한 것은 아닌 듯했다.
“흣!”
몸이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소피아가 당황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애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교황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겠습니다. 신성한 성역에서 더한 소란이 일어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군요.”
“…윽! 성하.”
“그리고 나디아 골드게이트 영애.”
소피아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녀가 안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탑주의 눈빛이 영혼까지 꿰뚫어 볼 것 같은, 그래서 내 모든 걸 들킬 것 같은 시선이었다면 그녀의 눈빛은 깊은 바다와도 같았다. 한없이 깊은 곳까지 나를 받아들여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눈.
자작나무 지팡이로 바닥을 짚은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어 내게 말했다.
“이곳에 들어오며 신의 확인을 함께 받고 싶다 했지요?”
“네, 맞습니다.”
“소피아 일라리아는 본인이 나디아 골드게이트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했습니다. 클로드 카르테인이 바랐던 것 역시 그 진실의 여부였지요. 그대가 신께 확인받고 싶은 것도 같은 것인가요?”
교황의 질문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나는 좋은 기회를 준 그녀에게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요. 신에게 확인을 청하지 않아도 제가 나디아 골드게이트라는 건 그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제가 그분께 확인하고 싶은 건 왜 제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빙의자라고 여길 만큼 다른 기억과 시간이 있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건 조금 전 카르테인 공작과 백작 부인이 했던 말과 같군. 나디아 골드게이트도 소피아 일라리아도 아닌 다른 영혼이라고 했던가?”
혼잡하게 굴러가던 상황을 지켜보던 황제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질문이기는 했으나 핵심을 짚은 그를 향해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마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라면?”
“음, 정확하게는 아이작 달튼에게 납치되어 그가 헤링본 가문의 가보를 쓰기 전까지요. 그 사람이 눈을 가리고 뭔가를 외운 이후, 엄청난 고통과 함께 모든 기억이 제대로 돌아왔거든요. 영혼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제야 온전해진 기분이 들었고요.”
“폐하, 조사관으로서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허락하지.”
짧게 긍정한 황제의 곁에서 조사관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전체적으로 나디아 골드게이트의 진술과 일라리아 백작 부인의 진술이 같습니다만, 세부적으로 다른 부분이 보입니다.”
“그게 무엇이지?”
“소피아 일라리아는 분명 공작가 내부에서 진행했던 청문회에서 아이작 달튼이 목걸이를 쥔 채 소원을 빌었다고 했습니다. 그 뒤로 번쩍거리는 빛이 공간을 채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방금 나디아 골드게이트는 아이작 달튼이 ‘눈을 가렸다’고 표현했지요. 사용한 물건 역시 목걸이가 아니라 ‘헤링본 가문의 가보’입니다.”
“확실히 그렇군.”
황제의 시선이 내게서 소피아에게로 다시 향했다.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금색의 빛으로 휘감겨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거짓말입니다. 아이작 달튼이 눈을 가릴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백작 부인은 이 상황이 되어서도 여전히 자신이 나디아 골드게이트라 주장할 생각인 것 같군.”
“주장이 아니라 저는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맞습니다. 성하께서 확인해 주시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에요.”
누가 보아도 억지를 쓰는 것에 가까운 말이었기에 황제의 눈에 옅은 안타까움이 서렸다. 작게 혀를 찬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교황에게 진행을 넘겼다.
“아무래도 정말 성하께서 권능을 사용해 주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골드게이트 영애의 요청 또한 받아들입니다. 두 사람이 신께 여쭌 대로 권능의 눈으로 둘을 살피지요.”
내 등장으로 잠시 멈췄던 의식이 재개되었다. 자작나무를 하늘 쪽으로 높게 들어 올린 그녀가 길게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소피아를 휘감고 있는 금색의 빛과 함께 신전을 감싸고 있던 모든 신성력이 요동쳤다.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빠르고 감미롭게 주위를 울렸다. 언뜻 들으면 찬트와도 같은 속삭임이 공간을 가득 채우자 묘하게 눈이 감겼다.
바다의 깊은 곳에 빠져 물길에 따라 흔들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쯤, 자작나무 지팡이가 맑은 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바닥을 두드렸다.
맑게 정신이 깨는 듯한 느낌과 함께 교황이 지그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이 내 안의 깊은 곳을 면밀하게 훑어 내렸다. 깊게 나를 보던 그녀가 살포시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건… 신기하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황제의 물음에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은 그녀가 주름진 눈으로 몇 번이고 나와 소피아 일라리아를 살폈다. 어딘가 실마리가 잡힌다는 듯이 입소리를 낸 그녀가 담담하게 결론을 내렸다.
“우선 단순히 영혼만을 살피자면, 두 사람이 가진 영혼의 색은 하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비슷합니다. 하지만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 가진 영혼의 색은 비교적 탁하군요. 영혼 자체도 불완전한 느낌이 듭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제 귀에는 두 사람이 다 나디아 골드게이트라는 말로 들려서 말입니다.”
“영혼의 색으로만 따지자면 그 말이 맞습니다. 일라리아 백작 부인의 주장처럼, 그녀의 영혼도 나디아 골드게이트로 보여요.”
교황이 내뱉은 말에 신전의 안이 작게 술렁거렸다. 옆에서 살길을 찾았다는 듯 웃음을 짓고 있는 소피아를 보니 단번에 기분이 나빠졌다.
‘이거야 원, 손톱 먹은 쥐도 아니고.’
내가 나를 대변하기 위해 입을 열기도 전, 교황이 손을 들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가로막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 골드게이트 영애가 요청했던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았습니다. 왜 자기 자신을 다른 영혼으로 여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 말입니다. 이건 두 사람의 시간선을 좀 더 깊게 살펴 엉켜 있는 인과율을 따져야 합니다. 일라리아 백작 부인과 골드게이트 영애 모두, 영혼의 시간이 그릇에 비해 길거든요. 그렇지만 이렇게만 말해서는 다소 이해를 시키기에 어려울 듯하고…….”
아주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시선을 돌려 관계인들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그중에서 오만하게 턱을 든 채 상황을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마탑주, 그대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아닌가요?”
“신전과 이런 곳에서 죽이 맞는다니, 상당히 신선해.”
외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그답게 거침없는 말투로 답한 마탑주가 소피아 일라리가 있는 쪽으로 적색 눈동자를 굴렸다.
무생물을 보는 듯한 이질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확인한 그가 딱 소리가 나게끔 손가락을 튕겼다. 금색의 신성력과는 다른 붉은색 마력이 가볍게 스파크를 일으키며 허공에 물건 하나를 띄웠다. 다 부서진, 그래서 이제 더는 쓸 수 없을 듯 보이는 물건은 다름 아닌 소피아 일라리아의 목걸이였다.
“저건…….”
“헤링본 가문의 가보이자, 고대 마도구인 ‘티타니아’다.”
여상한 목소리로 목걸이를 소개한 그가 자리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작은 움직임과 시선에서 마탑주 특유의 퇴폐적인 분위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흠, 그럼 티타니아가 뭔지도 모르는 멍청이들에게 일일이 설명해 줄 일만 남았나.”
신전을 가득 채운 신성력과는 완연히 다른 분위기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그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가볍게 혀를 찼다.
“생각보다 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얻은 데다, 이 자리에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꺼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내용이니 이번 한 번만큼은 친히 설명해 주지.”
마탑주가 재차 손가락을 까닥이자, 문자로 둘러싸여 있던 목걸이 위로 흐릿한 그림이 펼쳐졌다.
“티타니아는 쉽게 말하면 소원을 들어주는 소원석이다. 무릇 모든 고대급의 마도구가 그렇듯 티타니아도 방대한 양의 마력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을 부수고 재구성해 내지. 마도구에 담긴 마력이 고갈되지 않는 한에서.”
“…….”
“모든 고대급 마도구들은 연동이 되어서, 하나의 마도구가 사용되면 그 흔적이 다른 고대급 마도구에 희미하게 새겨지지. 그래서 나와 루핀은 티타니아가 사용한 마력의 흔적을 추적했다. 백작 부인의 소원대로 영혼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면 제법 흥미로운 주제거든. 비록 그게 대륙에 몇 남지 않은 고대급 마도구만이 가능한 일이라 해도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마탑주가 슬쩍 입꼬리를 당겨 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소피아 일라리아. 그대가 바랐던 소원은 전부 이루어졌어. 단 한 개의 실패도 없이, 완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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