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어떻게…….”
혼잣말에 가까운 속삭임이 떨어졌다. 눈을 크게 뜬 그녀의 얼굴이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실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왔기는. 고생해서 왔지.”
그냥 고생도 아닌 개고생.
소피아의 분홍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내 탈출기가 절로 생각났다.
아이작 달튼을 구속하는 것부터가 고난의 시작이었다. 아이작 달튼이 깨기 전에 단단히 묶어놔야 하는데, 아무리 방을 뒤져봐도 묶을 만한 게 없지 뭔가.
‘감금 장소에 밧줄 하나 안 가져다 두는 납치범이 어디 있냐고, 진짜.’
그래서 창작물의 클리셰를 따라 치마라도 찢을까 했는데, 으응. 생각한 것과 다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더라고.
‘으,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턱이 얼얼한 것 같아.’
아무튼, 방의 장식품들을 바닥과 문에 내리쳐서 깨트리고 침대 캐노피를 찢는 등 별의별 고생 끝에 나는 구속된 아이작 달튼을 들쳐 메고 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럼 뭐 하나. 나단의 공작저까지 가는 방법을 모르는걸.
다행히 내가 갇혀 있던 곳이 산속 깊은 곳의 외딴집이 아니라 어느 작은 마을의 집이었던 터라, 돌아갈 수단을 마련할 수는 있었다.
‘그 수단이 감옥행일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눈부터 입, 손발까지 모두 꽁꽁 묶인 채 바닥에 질질 끌려가는 남자와 온 힘을 다 쓰느라 벌겋게 익은 얼굴로 여기가 어딘지를 묻고 다니는 여자. 누가 봐도 수상한 조합 아닌가.
가게에서 잠시 기다리면 도와주겠다던 아주머니는 투철한 신고 정신으로 경비대에 나를 신고했고, 나는 들이닥친 경비 대원들에게 앗 소리도 못 하고 연행되었다.
그래도 내 실종으로 제국이 떠들썩한 상황이니, 바로 신원을 확인받고 연락이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 이 여자가? 뭐 작은 근거라도 있어야 그쪽이 공작 영애인 걸 믿든가 말든가 할 거 아냐.’
‘……이 여자가? 할 거 아냐?’
‘어, 음, 아니……. 할 거 아닙니까요. 큼큼! 거, 금발에 파란 눈이 드문 것도 아니고, 아마 그쪽에도 이미 수십, 수백 명의 정보가 올라가서 바쁠 겁니다.’
그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어떤 상황 설명에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끝까지 숨겨두었던 마도구를 꺼낸 후에야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아, 그 녹음용 마도구에 재정 담당 마법사님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어서 바로 연결이 가더라고.’
나름대로 마법사들끼리 네트워크가 만들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연락을 받자마자 몸소 이쪽으로 찾아온 마법사는 날 보는 순간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내 손을 몇 번이고 부여잡았다.
‘나, 나디아 님? 나디아 님 맞으십니까?’
‘아! 마법사님.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정말 나디아 님이 맞으시군요! 내, 내 대고객님이 맞아……!’
얼마 동안 그러고 있었을까? 자기가 더 신경 쓸 테니, 우리 끝까지 손잡고 일하자며 본심을 잔뜩 드러내던 마법사가 천천히 감정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 재빠르게 나를 대신해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했다.
신원 확인과 아이작 달튼의 인도 절차까지, 당장 필요한 것을 정리한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입을 열었다.
‘빈말이 아니라 적절한 순간에 연락해 주셨습니다, 정말로. 당장 몇 시간 후면 신전에서 확인 의식이 시작되거든요.’
‘의식이요? 아, 잠시만요. 혹시 ‘그’ 신전의 확인인가요? 제국 역사상 몇 번 없었던 그 확인?’
‘예. 맞습니다. 소피아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 자신이 나디아 골드게이트라고 주장을 하는 바람에 마탑부터 공작가가 난리가 났었는데……. 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선 마탑으로 가시죠. 탑주님이나 루핀 둘 다 나디아 님의 건으로 부재중이시긴 합니다만, 제가 있으니까요!’
‘음, 네에…….’
‘간단한 준비만 마치면 제가 직접 신전으로 이동까지 다 해드리겠습니다. 저만 믿으세요, 저만! 다년간의 패악질을 버티며 탑주님을 모셔온 사람이 접니다! 제가 엄밀하게 모시겠습니다, 고객님!’
그래, 그렇게 겨우겨우 왔다. 미친 사람 둘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서.
나는 다사다난했던 과거를 뒤로 밀어둔 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별다른 의미 없는 눈 깜박임과 미소에도 그녀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만 갔다. 그녀의 표정은 꼭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분해 보이기도 했고, 억울해 보이기도 했다.
‘웃기네.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한 사람은 난데 왜 그쪽이 그런 표정을 짓는담?’
나는 백작 부인의 표정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물어봐 놓고 답이 없네. 왜, 내가 여기에 절대 오지 못할 줄 알았어?”
“…….”
치맛자락을 조금 더 강하게 그러쥔 그녀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억울함과 분함이 서려 있던 표정에 미약한 원망이라는 감정이 더해졌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분홍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내 ‘재등장’을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는 걸 확신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신기하네. 난 소피아 네가 좀 더 영악하고 계산적으로 굴 줄 알았거든. 치밀하게, 세상에 믿을 사람은 자기 자신 하나뿐인 사람처럼 말이야. 그도 그럴 것이 헤링본 자작도 쓰고 버렸잖아, 너.”
“…….”
“그런데 이토록 아이작 달튼을 믿고 있었을 줄이야.”
“…….”
“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하는 말인데, 소피아. 이 의식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내가 아이작 달튼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줄 알았니? 그랬다면 좀 아쉽다. 정말로 내가 되고 싶었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파악했어야지.”
칠칠찮게 이런 것도 놓치기는.
혼잣말처럼 이어진 작은 뒷말을 들은 소피아가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아랫입술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지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나는 소피아 일라리아와 아이작 달튼을 불쌍하게 여기고 싶은 생각도, 용서할 마음도 없었으니까.
“끝까지 내 말에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까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네. 내가 한 질문들에 답하면 그때는 나디아라고 주장할 수 없어서 그런 거겠지?”
“…아니야.”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나는 희미하게 새어 나온 소피아의 대답을 듣고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 쪽으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모두가 침묵하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내게만 들리지 않는 건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주위가 고요했다.
그렇게 조용한 공간 속에서 소피아 일라리아와 마주 본 나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짝!
살과 살이 맞붙는 파열음이 고요하기만 했던 공간을 찢었다. 감정을 잔뜩 실어서 때린 탓일까? 그리 세게 때리지 않은 것 같은데, 소피아 일라리아의 몸이 휘청거렸다.
누군가 기겁을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메아리처럼 멀리서 윙윙거렸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누가 감히 신전에서 폭력 사태를 일으키겠어.
하지만 나는 믿는다. 교황님을 통해 신이 이 광경을 모조리 지켜보고 계신다면, 그분도 소피아 일라리아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나를 응원했으리라고.
‘성좌물이었으면 좀 더 확실했을 텐데.’
아쉽게도 내가 이곳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 이제는 내가 사는 이곳이 어딘가의 세계관 속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다.
소피아가 손으로 뺨을 감싼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랑스러웠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것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나는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다.
―짝!
“아, 역시. 왼손은 익숙하지 않아서 힘이 잘 안 들어가네.”
“…지금, 지금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짓이냐고? 응, 화풀이. 네 같잖은 사랑 놀음 때문에 극한의 상황까지 몰려 괴로워했던 게 화가 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두 번이나 놓칠 뻔하고, 심지어는 가족들에게조차 상처를 입힌 게 화가 나서.”
“하……!”
목이 콱 막히는 느낌과 함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말로 내뱉고 나니 지금껏 나름대로 진정시키고 있던 감정이 동시에 울컥 치밀어 오른 모양이었다. 이대로라면 감정이 격해져 눈물까지 보일 것 같아, 내가 깊게 심호흡을 할 때였다.
“어떻게… 어떻게 나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굴에 손찌검을 당한 소피아 일라리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로 마주했다. 그녀의 분홍색 눈이 분노로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격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반응을 고스란히 눈에 담으며, 그간 몇 번이고 말하고 싶었던 것을 겨우 내뱉었다.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소피아 일라리아.”
“…….”
“너와 아이작 달튼이 말하는 사랑은 역겨운 냄새가 풍기는 쓰레기야.”
“너!”
“네 몰골을 봐. 뒤틀린 관심 한 조각 받겠다고 발광하는 널 보며, 누가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고 말하겠니. 그냥 미친 사람이라고 하겠지.”
그 말이 방아쇠가 된 모양이었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나를 노려보던 그녀가 정말로 모든 품위를 잃은 모습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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