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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35화 (135/155)

135화

교황은 소피아의 호소에도 아무런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때가 아니라는 듯 그저 관조자의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 저는 정말…….”

“우선은.”

소피아 일라리아의 말을 끊은 황제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듯이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재판의 증인으로 와 있는 조사관에게 가볍게 말했다.

“전체 사건의 경위를 듣도록 하지. 정리를 좀 해주겠나?”

“예, 폐하. 우선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아이작 달튼에게 변을 당했던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납치 시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만, 루핀 골드게이트와 마탑주의 도움으로 큰 위험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모습을 감춘 아이작 달튼이 협박 편지를 보내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편지에 적힌 장소에 나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도움을 받아 대비는 했다더군요.”

“협박 편지라……. 그건 좀 이상하군. 공작 영애가 주치의인 달튼 자작에게 협박을 받을 일이 뭐가 있지? 이 부분에 관해 아는 관계자가 있나?”

황제의 시선이 가볍게 좌중을 훑었다. 침묵만이 가득한 공간 속에서 아르웬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일이 정리되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었는데.’

황제를 의중을 읽고 사람들을 한 번씩 확인한 조사관이 고개를 내저을 때쯤이었다. 부쩍 날카로워진 기세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클로드 카르테인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압니다.”

소피아 일라리아의 분홍색 눈동자에 옅은 동요가 뒤섞이는 것을 클로드는 놓치지 않았다.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그녀와 눈을 마주친 그가 말을 이었다. 잔뜩 갈라져 북부 특유의 한기가 서린 듯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그러더군요. 아이작 달튼은 자신이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영애는 일전에도 영혼과 신체의 결속이 깨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다시 눈을 떴죠. 모두가 신의 축복이자 기적이라며 기뻐했습니다. 단 한 명, 낯선 이의 몸에서 깨어난 나디아만 제외하고.”

“그런……!”

아르웬은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넘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눈을 부릅떴다. 공작이 한 말은 동생의 영혼이 소피아 일라리아의 몸에 들어갔다는 것보다도 믿기 힘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디아 본인이 직접 한 말입니다.”

“루핀?”

무슨 말이라도 하라는 듯이 아르웬이 자신의 남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무감정한 목소리로 반박을 할 것 같던 루핀 골드게이트는 그저 눈을 가늘게 뜬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꼭 새로운 정보를 들었다는 듯이.

기묘하게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검지로 턱수염을 문지르며 상황을 지켜보던 황제가 턱으로 소피아를 가리켰다.

“소피아 일라리아, 그대는 자신을 나디아 골드게이트라 주장한다지? 그러니 그대가 말해봐. 공작의 말이 사실인가? 그리고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대는 누구지?”

“…….”

사람들의 시선이 단숨에 소피아에게 닿았다. 이런 식으로 밝히고 싶지 않았다는 듯, 그녀가 살짝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사실이에요.”

“부인…….”

“그렇지만 저도 혼란스러웠어요. 분명 아이작 달튼에 의해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제 몸이 아니질 않나, 약혼자가 생기지 않았나……. 가족들이 눈앞에 있지 않았더라면 전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여겼을지도 몰라요.”

“잠깐, 그 말은 그대가 ‘진짜’ 나디아 골드게이트라는 말처럼 들린다만.”

잠시 말을 멈춘 황제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썹을 밀어 올렸다.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조사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사건 이후로도 자네는 클로드 카르테인을 약혼자로서 스스럼없이 따른 모양이던데. 북부에도 제법 익숙해 보이고.”

“제 안에, 또 다른 나디아의 영혼이 같이 있는 것 같거든요. 그녀의 영혼과 기억이 저와 점점 합쳐지는 느낌이 들어요. 성하, 성하의 눈이라면 저를 증명해 주실 수 있지 않으신가요?”

진심이 물씬 느껴지는 소피아의 목소리에 상황을 지켜보던 교황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게 신이 저를 이 자리에 이끄신 이유니까요. 하지만 아직 들어야 할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네?”

교황은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하기보다 눈을 굴려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단켈 일라리아 백작이었다.

완전히 타버린 불꽃처럼 버석한 시선으로 소피아를 본 그가 꾹꾹 눌러 담고 있던 감정을 울컥 토해냈다.

“그렇다면 제 아내의 영혼은 골드게이트 영애의 몸에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달튼 자작은 그때 분명 나디아 님을 되찾았다고……. 아니, 그걸 말하기 전에 대체 왜 이 모든 사건에 제 아내가 말려든 겁니까. 대체 그녀가 뭘 잘못해서!”

“원했거든요.”

“…….”

“소피아 일라리아는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되기를 바랐어요. 그녀는 클로드 카르테인을 사랑하니까.”

백작의 표정이 무너지는 모습을 전부 눈에 담으면서도, 소피아는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작 달튼과 손을 잡았던 거예요. 그 몸을 가질 수 있다는 말에. 하지만 분명 아이작 달튼은 소피아의 영혼을 무사히 놔두지 않았을 거예요. 그 사람의 목적은 제 몸이었거든요.”

“…저거 비어있는 사람 인형 이야기 아니야?”

“아, 그 괴담은 나도 들었는데. 에이, 설마.”

소피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추측을 나누었다. 아이들에게서 혼만을 빼내 살아있는 인형을 만든다는 괴담은 제법 많은 제국민들이 어릴 적부터 들어와서 익숙한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말보다 받아들이기 쉬운 설명이었기에 일순 분위기가 소피아 쪽으로 기울었다.

“거기까지. 그만 조용히 하세요, 조용! 아직 의식이 진행되는 중입니다!”

조서관이 황제를 대신해 신전을 조용하게 할 때였다. 소피아가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클로드가 서늘한 눈빛으로 낮게 목을 울렸다.

“사람과 격리된 사이 제법 머리를 굴렸나 보군. 이럴 줄 알았다면 어깨가 아니라 목을 비틀 걸 그랬나, 소피아 일라리아?”

“…클로드, 지금의 말은 무례하군요.”

“무례?”

클로드의 입꼬리가 제법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비틀렸다. 인상을 쓰고 있는 소피아 일라리아를 바라보며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착각하지 말도록. 내가 지금껏 그대를 살려두고 있는 건 의식을 통해 그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서다. 골드게이트 영애의 수색이 끝나기 전 의식을 추진한 건,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존재가 희미해질 수 있다는 말 때문이었고. 그런데 지금 와서는 그 말도 거짓이 아니었나 싶군.”

“…….”

“실은 바랐던 거 아닌가? 나디아 골드게이트의 실종을.”

그럼 영원히 ‘소피아’를 지울 수 있을 거라는 헛된 기대를 하면서.

클로드의 말을 들은 소피아가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일순 파르르 타올랐던 분홍색 눈동자가 이윽고 또렷해졌다.

“두고 보면 알겠죠. 성하! 부디 신의 권능을!”

“신의 권능을.”

“이런.”

두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받은 교황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안타까움이 서린 눈빛으로 잠시 클로드와 소피아를 바라본 그녀가 고개를 돌려 황제에게 말했다.

“재판의 경위조차 다 듣지 못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흘러 난처하네요. 하지만 이 증명이 빙빙 도는 사안을 끊을 방법으로 보입니다. 하여, 두 사람의 청대로 권능을 사용할까 하는데 어떠신지요?”

“저도 동의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바로 신의 권능을 사용하도록 하지요.”

교황이 신의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 다시금 자작나무를 건네받는 모습을 보며, 소피아가 남몰래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아직 마법약의 기운이 돌고 있어. 내 마력이 여전히 나디아 골드게이트와 같은 마력으로 변조된 상태인 거야. 혹시나 변조가 풀린 후에 의식이 이뤄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나디아를 미끼로 클로드를 부추긴 게 다행스럽게도 먹혔다.

‘마력의 색은 영혼 고유의 색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성하께서 보실 것도 이 두 가지의 연결점이고.’

그럼 분명 지금의 교황은 신체와 상관없이 자신의 영혼이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맞노라 인정해 줄 것이다.

‘마력을 변조하면 생존을 위해 영혼이 변조된 마력과 같은 색으로 바뀌는데, 이 사실은 몇 년 후에나 밝혀지는 일이니까!’

물론,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억지로 뒤트는 일이기에 바뀐 영혼은 완전하지도, 또 영구적이지도 않았다. 변조가 풀린 뒤 마력과 영혼에 손상도 입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소피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영혼이 하나 더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해놨으니 불완전한 부분도 참작이 될 테지.’

정말 곧이다. 드디어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될 수 있어.

비록 불완전한 그림이고 카르테인 공작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 그림을 짜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소피아는 교황이 준비하는 모습을 모조리 눈에 담으며 승리를 앞둔 기쁨을 만끽했다. 그리고 드디어 준비를 마친 그녀가 권능을 사용하려던 찰나.

“잠시만요! 사건의 당사자가 한 명 부족한 것 같은데요. 저도 그 권능, 같이 체험해도 될까요?”

분위기에 맞지 않는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나타난 여자가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했다.

살랑이는 금색 머리카락 아래로 청량함이 물씬 느껴지는 푸른 눈동자가 곱게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주 낯이 익은, 그러나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의 모습에 소피아의 심장이 일순 멈췄다.

“…나디아?”

“미안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나디아 골드게이트.

아이작 달튼에게 잡혀있어야 할 이가 신전의 중심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안녕, 소피아. 얼굴 좋아 보이네? 건강하게 지낸 모양이야.”

하필 지금, 여기가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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