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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34화 (134/155)

134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입니까! 각하! 대답이라도 해 주십시오! 신전의 확인은 무를 수 없다 해도, 제게는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백작, 진정하십시오. 신전의 확인이 내일이지 않습니까. 일이 정리된 후에, 다시 논의하시죠.”

“헤르잔, 눈이 있다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 각하의 모습과 작금의 사태가 보이지 않나? 일이 정리된 후라고? 언제? 내 아내가, 반역자로 몰려 처형이라도 된 후에 말인가?”

“백작! 반역자로 몰리다니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계신 겁니까?”

“몰라! 모른다고!”

일라리아 백작이 언성을 높였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그의 당황과 괴로움, 그리고 갈 곳을 잃은 분노를 보여주었다. 헤르잔은 초조한 표정으로 집무실 앞에서 서성이는 백작을 보며 깊게 탄식을 내뱉었다.

카르테인 공작이 ‘신전의 확인’을 요청했다. 그것도 모두가 있던 자리에서 합의했던 것을 깬 채 단독으로. 마수 토벌의 시기가 아직 채 지나기도 전인데,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상당했다.

‘물론, 이 정도도 감당하지 못할 카르테인이 아니지만…….’

중요한 건, 그의 주인이 평소와 너무나도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긴 시간 클로드를 보좌했던 헤르잔조차도 이토록 무모하고 독선적인 모습은 처음이었다. 주위를 살피지 않을 정도로 이성을 잃은 모습도 처음이었고.

헤르잔에게는 아직도 일전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극심한 고통 탓에 눈물로 엉망이 된 일라리아 백작 부인과 그런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던 카르테인 공작.

검을 배운 사람조차도 일순 숨이 막힐 정도로 거친 살기를 내뿜던 그의 눈은 탁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일라리아 백작 부인의 양어깨는 아직도 엉망이라지.’

듣기로는 백작 부인의 어깨가 푸른 멍으로 뒤덮여 본래의 색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라 했다. 통증 탓에 제대로 팔을 들지도 못한다고.

그런 와중에 공작이 신전의 확인을 요청한 것이다. 그것도 황실의 참석까지 필요로 하는 정식 재판의 형식으로. 명목은 나디아 골드게이트를 납치하고 북부에 위험을 초래한 반역집단과의 연관성이었다.

‘신전이 요청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대상자는 모든 사람과의 접촉이 금지되지. 아무리 본인이 나디아라고 주장하고 있다지만, 모습은 여전히 백작 부인이니……. 백작이 길길이 날뛰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 각하께서 반역집단과 연관을 지어서 더더욱.’

헤르잔의 시선이 굳게 닫힌 집무실을 향했다. 이토록 큰 폭풍을 불러놓고, 클로드 카르테인은 집무실에 칩거했다.

‘골드게이트 가문에서 우호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여 다행이야. 공작부인과 루핀 골드게이트가 목소리를 보태어 망정이지,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헤르잔은 상념을 미뤄둔 채 카르테인 공작의 보좌관으로서 자기 일을 수행하기로 했다.

“우선은 백작가로 돌아가시죠. 곧 또 토벌에 나서야 하지 않습니까. 준비하실 것이 산더미처럼 있으실 텐데요.”

“그런 말로 내 마음을 돌리려 하지 말게. 아무리 내가 정신없이 굴고 있다 해도 올해만큼 준비가 탄탄한 적이 없다는 것쯤은 아니까.”

맞는 말이었다.

대외적인 상황으로만 본다면 카르테인 공작가의 상황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아르웬의 지원으로 마무리 지은 1차 토벌은 말끔히 마무리되어 이미 방어선을 재구축했으며, 기사단 역시 전대 공작인 이안 카르테인의 지휘 아래 빈틈없이 다음 정기 토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뿐일까? 클로드가 주야장천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탓에 이미 헤르잔의 수중에는 내년 하반기까지의 서류가 완벽히 쥐어진 상태였다.

그 어느 해보다도 매끄럽게 준비된 상황임에도 카르테인 공작가의 분위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여러 이야기로 시끄러웠을 북부의 사교계조차 지금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단 한 가지, 나디아 골드게이트라는 준비가 부족한 결과였다.

‘나디아 님.’

부요의 시기와 함께 북부에 찾아온 공녀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완전히 북부의 새로운 주인이 된 모양이었다.

탄식을 섞어 속으로 나디아의 이름을 부른 헤르잔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일라리아 백작에게도 말했듯 신전의 확인이 내일이었다.

그는 부디 내일이면 이 혼란이 어느 정도는 가시기를 바랐다.

물론 나디아 골드게이트를 찾기 전까지 완전한 해결이라는 건 있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카르테인 공작이 ‘신전의 확인’을 밀어붙인 이유는 있을 테니까.

* * *

“게일!”

“타냐! 에이포드 님!”

매일 붙어 지내다 보니 이제는 가족과도 같은 두 사람을 보며, 게일이 빠르게 손을 흔들었다.

한달음에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 그가 복잡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성스러움이 물씬 느껴지는 새하얀 기둥 사이로, 신의 권능과 기적을 몸소 보여준 성인(聖人)들의 조각상이 자애롭고도 엄숙하게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정말 사람이 많네요.”

“당연한 말을.”

평소였다면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과 경건한 종소리로 채워졌을 공간이, 오늘만큼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거르고 걸러, 자격이 되는 이들만 입회를 허락했음에도 사람이 미어터지는 이유는 뻔했다.

“교황이 직접 신의 권능을 빌리는 걸 볼 기회는 정말 흔치 않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교황뿐 아니라 황실까지 참여하잖아.”

에이포드의 말에 게일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신전의 확인’이 아닌가.

신이 있었다면 응답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나디아의 불평과 별개로, 신과 차원의 연결고리는 존재했다. 마도구를 통한 마법의 대중화와 의학의 발전으로 신성력이 나설 자리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신의 가호는 줄곧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신전의 확인은 제국의 전 역사를 훑어보아도 손에 꼽을 정도로 희귀한 의식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신전의 확인은 신의 권능을 받은 자가 신을 대리해 인간의 영역에 개입하는 찰나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교황만이 이 의식을 치를 수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영혼과 차원, 심지어는 시간까지.오랜 시간 영혼의 그릇을 닦아, 신의 선택을 받은 자가 아니고서는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정말일까? 정말 나디아 님께서…….”

“게일, 신전이 요청을 받아들인 일이야.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다고 성사되는 의식이 아니라는 건 상식이잖아.”

“그건 나도 알지. 교황님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의식인데……!”

신전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핀잔을 주던 타냐 역시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근래의 북부는 정말…….’

흉흉하기 그지없던 기억에 타냐가 몸서리치던 찰나, 신전 특유의 맑은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와 교황 성하 입장하십니다. 모두 예를 표하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고개를 숙이면서, 게일이 힐끗 시선을 들어 두 사람을 눈에 담았다.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 교황은 인자한 인상을 풍기는 노년의 여성이었다. 흰 머리를 곱게 땋아 위로 틀어 올린 그녀에게서는 단정한 기품이 느껴졌다.

“내 생에 이 의식을 치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그것도 저와 함께 말입니다.”

황제의 가벼운 농담에 부드럽게 웃은 것도 잠시, 교황이 신전의 가장 높은 곳에서 꼿꼿하게 몸을 세웠다. 하얀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건네받은 그녀가 지팡이의 끝으로 바닥을 세 번 내리쳤다.

―댕, 댕, 댕

지팡이가 아니라 악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청아한 소리가 물결처럼 공간을 뒤덮었다.

“주여, 당신의 첫 번째 종이 청하나이다. 자비로 이곳에 있는 모두를 어여쁘게 여기사, 진실을 찾는 이들에게 길을 보여 주시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단죄하시며, 평온을 바라는 자에게 안식을 주시옵소서.”

교황이 부드럽게 기도를 읊은 순간, 자작나무의 지팡이에서부터 따뜻한 황금빛의 신성력이 물씩 피어났다. 신의 권능을 빌려 신전의 전체를 신성력으로 감싼 그녀가 여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의식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곳은 신역이 됩니다. 의식의 당사자들은 모두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교황은 의식을 요청한 클로드 카르테인과 의식의 대상이 될 소피아 일라리아를 확인하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당사자들이 모두 모였으니, 이 의식과 관계된 사람들 역시 모두 모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예.”

교황의 시선이 골드게이트와 카르테인 공작가, 일라리아 백작과 마탑주에게 향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마탑의 주인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언뜻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그녀가 이윽고 차분하게 자신의 지팡이를 황제에게 넘겼다.

“과연. 신께서 주시하실 만한 사안인 듯하군요. 의식을 요청한 카르테인 공작은 이 일이 제국의 안녕과 연관이 있다고 판단해, 재판의 형식으로 의식이 치러지길 원했습니다. 신전에서는 이를 받아들였으므로, 의식의 진행을 폐하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신께 영광을.”

가볍게 교황에게 예를 표한 황제가 날카로운 눈으로 재판의 대상자를 바라봤다. 소피아 일라리아는 그간 앓았던 탓인지 조금 수척해 보였다. 황제가 재판을 시작하기도 전,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그녀가 처연한 눈으로 교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성하, 부디 제 억울함을 풀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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