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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31화 (131/155)

131화

“아이작.”

“예, 공녀님.”

“나 옆에서 네가 차 우리는 거 지켜봐도 되지?”

내가 입술을 달싹인 것과 동시에 아이작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가 자리에서 벌써 일어나 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경계하는 눈은 아니었다. 그의 눈빛에서는 드러난 감정은 약간의 놀람과 아주 미약한 설렘이었다.

도리어 그가 내게 뭘 기대했는지가 적나라하게 보여, 나는 곧바로 표정을 굳히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런 눈빛은 치워줄래? 대체 어디가 얼마큼 망가져야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야, 나라고 네 곁이 좋아서 가려는 게 아니야. 네가 또 뭘 넣지는 않는지 감시 정도는 해야지. 내 안전을 위해서.”

“아…….”

“달튼 자작, 내가 순진하게 내게 약을 먹인 자작을 믿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지? 내가 아니라 자작이 기억을 잃었다 해도 믿겠어.”

애초에 기대를 하는 게 더 소름 돋는 거 아니야? 경멸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은 그가 잠시 멈칫하다 한 손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느릿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린 그의 얼굴에는 놀랍게도 미소가 서려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이것도 썩 나쁘지는 않다 싶어서 말입니다.”

“뭐?”

“식사를 준비할 때조차 제 곁에 계실 것 아닙니까. 저를 믿지 않아서라도.”

나는 일반인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까이에서 기습할 때를 노리려던 것도 잊고 자리에 서 있을 때였다. 아이작이 다정하게 눈웃음을 짓고는 자신의 옆자리를 비워 주었다.

“오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

“이렇게 된 거, 나디아 님이 찻잎부터 손수 고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제가 고른 것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싫어하실 것 같아 말입니다.”

“정답이야. 그래서, 무슨 차가 준비되어 있는데?”

아이작은 대답 대신 내게 찻잎이 담긴 통을 보여주었다. 얼그레이, 레몬밤, 페퍼민트, 로즈힙…….

꽤 많은 종류의 찻잎이 내 앞에 주르륵 늘어졌다. 그중 가장 먼저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찻잎이 든 통이 깨지기 쉬운 유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또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여긴 거겠지?

‘이런 데에서는 치밀하네.’

나는 신중하게 고민하는 사람처럼 찻잎 통을 들어 마개를 열어보기도, 향을 맡기도 했다.

내가 고르는 사이 아이작은 주전자에 물을 따르고 있었다. 아직 위협이 될 만한 불씨도, 끓은 물도 없는 상황.

‘노리려면 지금이야.’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이 소리가 그에게 들리기라도 할세라 입 안을 꼭 깨물었다.

그러면서 조금 더 깊게 향을 맡고 싶은 사람처럼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금색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흘러내렸다.

‘귀찮아도 이렇게 하고 나와서 다행이지 뭐야.’

똑같이 길게 풀어 내린 머리여도 다 같은 준비 과정을 거치지는 않는다.

때로는 더 좋은 모양새를 내기 위해 머리카락을 굳혀 고정하기도 하고, 핀으로 안쪽 머리카락을 고정한 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내리기도 하니까.

그리고 과거의 나는 거사를 치르러 가기 직전임에도 귀찮음을 무릅쓴 채 머리 모양을 가다듬었다. 대외적으로 나는 나들이를 나온 사람처럼 보여야 했으니까.

‘그런데 공교롭게도 머리핀을 사용했단 말이지. 지금의 내게 딱 맞게 말이야.’

부드럽게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 사이로 딱딱하고 뾰족한 핀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찻잎의 냄새를 즐기는 척을 계속하며 세 손가락으로 단단하게 핀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사히 무기를 손아귀에 넣은 직후 나는 조용히 호흡을 골랐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나디아 님, 레몬밤이 마음에 드십니까? 제법 오래 향을…….”

나는 아이작 달튼이 내 어깨를 잡은 것과 동시에 그를 향해 쥐고 있던 찻잎 통을 내던졌다.

―우당탕!

통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공에 우수수 흩날리는 찻잎을 맞으며 나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몸을 틀었다.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움직임을 떠올려 본 덕에 시야가 거슬리는 와중에도 손은 가야 할 길을 잃지 않았다.

날카로운 머리핀이 쇄골과 쇄골 사이, 목으로 이어지는 말랑말랑한 공간, 흔히 비중이라고 일컫는 부위를 꾹 누르고 있었다.

나는 팔을 쭉 뻗은 탓에 그와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확인하며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를 향한 경고였다.

“허투루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의사니까 네가 더 잘 알겠지? 내가 지금 겨눈 거기가 급소라는 것쯤은.”

“…이런.”

아이작이 소리를 낼 때마다 머리핀 너머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양손을 든 그가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나디아 님께 모르는 모습이 생겼다는 걸 제가 잠시 잊었군요. 용서하세요. 이제는 양쪽 모두 나디아 님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저도 사람인지라, 이렇게 잊어버린답니다.”

“쓸데없이 입 열지도 말고. 별로 궁금하지 않으니까.”

아이작은 내가 툭 내뱉은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잘게 일렁이며 내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나디아 님께서는 예전보다 한층 무모해지셨고 또 거침이 없어지셨지요. 원하는 것을 관철하고자 아르웬 경과 도박에 가까운 내기까지 하실 정도로.”

“…….”

“그런 모습도 나디아 님이기에 사랑스럽습니다.”

아, 제발 닥치자.

내가 ‘나디아 골드게이트’일 때는 아니꼽게 보던 사람이 인제 와서 이래 봐야 기만이지. 같잖은 소리 작작 하라는 듯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자 그가 작게 기침을 내뱉었다.

그렇게 기침하면서도 입꼬리를 당긴 그가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비중을 겨누고 있는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다만, 나디아 님. 사람에게서 피를 본다는 건 생각보다 큰 각오가 필요한 법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겨누는 것은 바람직합니다만…….”

정말 저를 찌르실 수 있겠습니까?

속삭임에 가까운 아이작 달튼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흩어졌다. 기특한 사람을 보는 듯한 그의 눈빛은 내가 절대 그러지 못할 거라고 단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도리어 포갠 손에 조금 더 힘을 준 채 자신의 급소를 누르고 있었다.

“필요하시다면… 쿨럭! 제가 도와드려도 괜찮습니다.”

“…….”

“그렇다면 나디아 님은 결코, 쿨럭! 저를 잊으실 수 없을 테니까요.”

기사도 자신의 첫 살인은 끝까지 기억하는 법이다. 눈앞에서 죽은 이보다 강한 것은 세상에 없는 법이니 말이다.

숨이 막혀 가늘어진 목소리로도 아이작은 잘만 말을 이었다.

“제가 나디아 님의 손을 물들일 첫 피가 되는 것도 기껍군요. 아, 그리고 이 방에 문의 열쇠는 없습니다. 그건 알고 계시는 거겠지요?”

“내가 조금 전부터 말하지 않았어? 입 좀 닥……. 다물라고.”

나는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비속어를 다시 삼키며 또렷하게 그의 초록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기분 나쁜 소름이 등허리를 타고 올랐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다지 겁이 나지 않았다.

이게 클로드가 날 굴리며 세뇌한 훈련의 덕인지, 아니면 거지 같은 상황 속에서 한계치를 넘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고요하기 짝이 없는 마음으로 그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맞아, 아이작. 나는 그럴 용기가 없지.”

애초에 아이작 달튼이라는 이의 피를 손에 묻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왜 살인자가 되어야 해?

나는 의아함으로 물들어 가는 그의 초록색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손에서 툭 머리핀을 떨궜다. 언니와의 대련에서 맞대고 있던 검을 떨궜던 때처럼.

“어제저녁 내게 했던 것처럼만 해.”

“…….”

“내 옷깃 대신 승리를 움켜쥘 수 있을 테니까.”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기억 속 그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맴돌았다.

‘빨리 보고 싶다.’

빈틈 하나 없이 나를 안아 줄 그의 단단한 팔도, 이제는 신뢰와 애정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도, 때때로 날 당황하게 만드는 묘한 미소도 전부 그리웠다.

예상외의 상황에 그도 많이 당황했을 텐데.

‘울고 있는 거 아니야?’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빈손이 된 오른손을 꺾어 손등을 감싼 그의 팔목을 쥐었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그를 당기며 짧은 기합을 내뱉었다.

“합!”

팔 하나의 거리를 둔 덕에 아이작의 몸이 나를 향해 일순 무너졌다.

그 찰나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장풍이라도 쏠 사람처럼 손바닥을 펴고는 반동을 주기 위해 당겼던 왼팔을 쭉 내뻗었다.

허리가 회전하는 것과 동시에 손바닥의 아랫부분이 사선으로 턱의 아랫부분부터 머리 전체를 가격했다.

‘영애, 손바닥으로 날린 충격이 머리의 전체를 흔들도록 해야 한다.’

‘턱을 아래에서 위로 가격하는 게 낫지 않아요?’

‘아니, 그 경우에는 턱이 부서질 뿐이야.’

‘그거면 된 거 아닌지……. 고통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사람이 독기를 품으면 마지막 기습을 날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격을 하면.’

―털썩

“…나…디아…….”

“사람의 의식이 바로 날아간다고.”

물론 그만큼 사망할 확률도 높지만.

나는 방심하다 꼴사납게 의식을 날려 먹은 아이작 달튼을 보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아이작 달튼을 구속할 방법과 여기서 나가는 방법만 알아내면 된다.

달튼 자작이 열쇠는 이 방에 없다 했지만. 뭐, 본인이 여기서 나갔다 들어올 다른 통로 정도는 마련해 뒀겠지. 찾아보자.

“나는야 혼자서도 잘하는 씩씩한 영애니까.”

그렇게 방을 뒤지던 내 시야에 순간 무게감이 좀 있어 보이는 장식품들이 보였다. 음, 일단 몸을 쓰고 머리를 써봐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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