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은색의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 정말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
나는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그를 바라보며 슬쩍 입매를 당겨 웃었다. 그러고는 이동했다는 걸 감지하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는 아이작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나 찾아?”
“나디아 님.”
원목으로 만든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있는 나를 보며 아이작이 다정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듯한, 애정이 한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한달음에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온 그가 곧장 무릎을 꿇은 채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철저히 나에게 모든 행동을 맞추는 모습이었다.
그 상태로 잠시 의자와 나를 번갈아 바라본 그가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미세하게 미간을 좁혔다.
“음, 아무래도 의자를 방의 중앙 쪽으로 좀 당기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 난 이 자리가 딱인 것 같은데?”
“나디아 님이 잘 안 보이잖습니까. 방금도 일순 일이 잘못된 줄 알고 당황했습니다.”
야, 누가 보면 갓 결혼한 신혼부부인 줄 알겠다.
가증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내게 답한 그가 내 얼굴 쪽을 향해 살짝 손을 뻗었다. 마치 지금껏 나와 그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래서 친절히 우리 사이를 일깨워 주기로 했다. 나는 아이작의 손이 내 볼에 닿기 직전 손등으로 그의 손을 쳐낸 후, 그를 향해 작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꼬박꼬박 나디아 님이라고 불러 주는구나?”
“다른 호칭을 바라십니까?”
“응? 아니, 그냥 네가 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어.”
대놓고 드러내는 적의에도 아이작은 꿈쩍하지 않았다. 가시 돋친 말을 들은 그는 다만 고개를 기울이며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그건 어렵습니다. 호칭이 없이는 나디아 님을 부르는 게 어려워지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매번 다가가서 건드리면 놀라실 테고요.”
진짜 제대로 미쳤네, 얘도.
나는 아주 오래오래 살을 부대끼고 살아갈 것처럼 말하는 그를 보며 조금 더 짙게 미소를 지었다. 입가의 미소가 진해지는 것과 별개로 그를 보는 눈빛은 점점 차가워져만 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작은 반대편 손으로 내쳐진 손을 문지르며 다정하게 다른 주제를 꺼냈다.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부족하지만 나디아 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꾸며 보았습니다.”
“방이 마음에 들어서 뭐 하겠어. 같이 있는 사람이 넌데.”
“그건 괜찮습니다. 차차 익숙해지실 거예요. 불완전하지만 이제는 제가 나디아 님의 세상이 되어드릴 테니.”
“자의식이 넘치는 게 아닐까?”
내 빈정거림을 담담하게 넘긴 그는 화도 나지 않는지 여전히 상냥하게 답을 돌려주었다. 이번에는 충고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편이 나디아 님께도 좋습니다. 돌아간다 한들, 이미 나디아 님이 머물 곳은 없으니 말입니다.”
“머물 곳이 없다니?”
“혹시 마법이 실패할 때를 대비해 소피아 일라리아와 정한 것이 있거든요. 아마 계획대로 나디아 님인 척 잘 자리를 잡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퍽이나 잘 넘어가겠다.”
“예, 그럴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소피아 일라리아니까요.”
그가 단호하게 단정을 짓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입만 웃는 기괴한 표정을 유지한 채 그에게 재차 빈정댔다.
“왜? 소피아가 회귀자라서?”
“아, 바로 답을 알아내시는군요. 역시 나디아 님이십니다.”
진심 어린 표정으로 내 말에 감탄한 아이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근처에 놓인 작은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탁자에는 언제든 요기를 할 수 있도록 여러 간식거리가 놓여 있었다.
접시에 쿠키 몇 개를 놓으며 차를 우린 그가 내 쪽을 돌아보며 조금 더 설명을 이었다. 자신이 넘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나디아’ 한정 호구인 건지 아이작은 아주 협조적이었다.
“소피아 일라리아는 회귀 전부터 지금까지 나디아 님을 관찰해 왔습니다. 호불호부터 말투와 표정, 인간관계와 자잘한 습관까지 모든 것을요. 수단을 가리지 않고 공작가의 세세한 사정까지 알아낼 만큼 그녀는 줄곧 나디아 님을 탐냈습니다.”
소피아 일라리아도 제대로 정신을 놨네.
집착을 넘어 편집증적이기까지 한 그녀의 전적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니, 대체 왜…….”
“글쎄요. 저와 같지 않을까요?”
카르테인 공작을 사랑해서.
“저로서는 달갑지 않은 말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회귀하기 전의 나디아 님도 카르테인 공작님과 연을 맺은 모양이지 뭡니까.”
“…….”
“그 마음을 얼마나 짐작할 수 있겠냐마는, 마음을 아무리 접으려 노력해도 안 되었겠지요. 저처럼. 그래서 가보였던 마도구를 사용해 회귀라는 방법을 사용한 게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 한 자락을 받고 싶다는, 오로지 그 순수한 마음 하나로.”
순수 같은 소리 하네. 가해자들이 아주 합리화란 합리화는 다 하는 꼴이다.
“아, 사랑. 사랑 좋지. 그 잘난 사랑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았구나, 응. 근데 사랑하는 상대방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나 봐. 너도, 부인도.”
“설마요.”
아이작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달그락하는 소리와 함께 쿠키가 담긴 접시와 찻잔이 내 앞에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에서는 익히 알고 있는 약차의 향이 났다.
거들떠보기도 싫은 약차의 냄새에 슬쩍 인상을 찌푸릴 때쯤, 그가 천연덕스럽게 적당한 답을 건넸다.
“그저 순서를 조금 바꾼 것뿐입니다. 저도, 일라리아 부인도 나디아 님과 공작 각하께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아요. 어떻게 제가 감히 당신을.”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많은 일을 하지 않았나 싶은데. 일단 내 몸에서 강제적으로 영혼을 뜯어낸다는 발상부터가…….”
“아, 그건 조금 아쉽긴 했습니다. 만약 마법이 처음의 계획대로 발동되어 나디아 님이 백작 부인의 몸에 잘 자리를 잡았다면, 나디아 님의 세계가 조금은 더 넓어졌을 텐데 말입니다.”
적어도 이 방보다는요.
나는 아이작이 흐리듯이 내뱉은 뒷말을 알아듣고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말은 날 한평생 여기에 가두겠다는 뜻 아닌가. 밖을 볼 수 있는 창문 하나 없는 이 감옥과도 같은 공간에.
“아이작 달튼, 장담하는데 여기에 날 가둬두면 나는 얼마 있지 않아 망가져. 네가 기억하는 난 없어질 거란 말이야.”
“그게 무슨 문제가 되지요?”
아이작 달튼은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인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자세하게 제 마음을 표현했다.
“제 기억 속의 나디아 님도, 눈앞에 계신 나디아 님도 결국 당신이지 않습니까. 그 정도의 작은 흠이 제 사랑을 막을 수도 없을 거고요. 나디아 님은 언제나 제게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이실 겁니다.”
“……그게 너한테는 ‘작은 흠’이야?”
“음, 질문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나디아 님에 대한 제 사랑을 직접 시험하고 싶으신 걸까요?”
아이작의 고개가 슬쩍 옆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상식과 상당히 어긋난, 괴리감이 물씬 느껴지는 그의 말을 들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어리석었네. 미친놈하고는 말을 섞는 게 아닌데. 나도 참.’
열심히 굴렀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온실 속의 화초였나 보다. 뭐가 됐든 대화하다 보면 아주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자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떠오른, 반복 학습을 통해 각인된 탈출 방법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현대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는 묻지 마 납치, 감금 범죄! 더는 영화 속의 이야기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납치, 감금의 예방 방법과 대처 방안은 시민을 위한 필수 안전 교육입니다. 납치 감금이 되었을 때는 첫째, 납치범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납치 장소와 탈출로 등을 파악하며…….]
시민의 안전을 위해 공무원이 피와 땀을 흘리며 만든 공익 영상과…….
‘영애, 잘 알겠나? 상대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사람은 그대보다 완력이 강할 확률이 높다. 그러니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무게 중심과 거리를 염두에 두며 최대한 상대의 틈을 노리는 편이 확실해. 잘 배우면 아르웬 경에게도 통할 방법을 몇 가지 알려주도록 하지. 그러니 잊지 말도록.’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많이 어려운가요?’
‘난도를 따지기보다는 마음가짐을 명심해야지. 필살기가 있다는 안일함이나 상대가 다칠까 걱정하는 인간적인 감정은 금물이다. 검을 들고 사람을 상대할 때는 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마음을 가져야 해.’
아르웬 언니를 무찌를 만큼 강해지도록 날 열심히 굴렸던 카르테인 공작.
그래, 배워두면 다 언젠가 써먹을 때가 있다더니 딱 지금이 그 순간인 모양이다.
“나디아 님, 차가 식습니다. 약차가 싫으십니까?”
“……어. 누구 때문에 이 차는 하도 마셔서 질려.”
“저런, 제가 그 부분을 놓쳤군요. 다시 우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아이작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방 안을 눈으로 훑었다.
‘금과 보석으로 이루어진 것들은 제법 무게가 있잖아. 맨손이 아니니까 일단 시간을 들이면 문은 부술 수 있을 테고.’
중요한 건 아이작 달튼이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슬쩍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동안 수련을 하지 않아 거리를 재는 게 다소 낯설었지만, 그래도 몸에 각인된 기억이라는 게 있다.
크게 일곱 발자국.
내 걸음으로는 총 두 번의 도약이 필요한 거리에서, 나는 담담하게 아이작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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