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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25화 (125/155)

125화

나는 무의식적으로 벌어지려는 입술을 애써 꼭 다물었다.

‘막상 귀로 이 내용을 들으니까 감당하는 게 쉽지 않네.’

당연했다. 내가 살면서 이런 걸 보기라도 했어야지. 봤다 하더라도 종편 예능에서 나오는 사연의 주인공이나 소설 속의 종이 사람뿐이었다.

이렇게 날것 그대로의 미친놈이 아니라 누군가의 노고로 한 번쯤 다듬어진 존재들이었다고.

범죄자를 마주한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사랑?”

“네, 사랑.”

나는 점점 뻣뻣해지는 손을 애써 들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아무렇지 않다는 걸 과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투철한 시민 교육의 힘이었다.

‘녹음. 이런 건 녹음을 해야 해.’

솜사탕보다도 달아 보이는 표정으로 사랑을 언급한 아이작 달튼이 내 얼굴 곳곳을 눈으로 훑었다. 물론, ‘나’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제가 어떻게 나디아 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청명한 하늘을 닮은 눈동자도, 화사한 꽃을 보는 것 같은 맑은 웃음도 상냥한 손짓도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는데.”

“…….”

“전부 나디아 님이 잘못하신 겁니다. 내가 당신을 마음에 품는 게 싫었더라면, 내게 그토록 예쁘게 웃어 주지 말았어야 했어요. 다정하게 일상을 물어보고, 발걸음을 맞춰 주고, 챙겨 주지 말았어야 했다고요.”

나는 아이작 달튼이 한 말을 들으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사람은 시각에 약한 동물이라고,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서였다.

‘아니, 생김새만큼은 완벽한 로맨스판타지 서브 남주처럼 생긴 게, 내뱉는 말은 왜 전부…….’

오래전, 멋모르고 만난 첫 번째 구썸남을 떠오르게 하는 말의 향연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이건 내가 아이작 달튼에게 정신적 손해 배상을 요청해도 될 수준 아니냐.

“나디아 님에게 손을 쓴 건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어쩌겠어요, 나디아 님에 대한 사랑이 도무지 식지를 않는데. 유일한 세상이 저를 받아 주지 않으니, 그냥 제가 나디아 님의 세상이 되어 주기로 생각을 바꿔본 것뿐이에요. 제게 손길 한 번이라도 허락해 주셨더라면, 저를 찾아오시기라도 했다면 마음을 바꾸실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렸을 텐데.”

“……뭐?”

나는 아이작이 내뱉은 말 가운데서 이상함을 느꼈다.

‘왜 마치 나디아와 사적으로 그리 친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을 하지?’

분명 먼저 찾아온 게 나디아라고 했잖아. 먼저 손을 내민 게 그녀였다고. 알고 지낸 시간이 길어, 소원권을 줄 만큼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고…….

“아이작 달튼, 너 나를 떠봤구나.”

불현듯 머리를 치고 간 진실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나는 마저 입술을 달싹였다.

“소원권은 애초에 없는 거였어.”

“아, 그걸 지금 깨달으셨겠군요. 예, 맞습니다. 그래서 소원권을 기억한다는 공녀님의 대답을 들은 후에 생각한 겁니다. 나디아 님을 돌려받아야겠다고.”

지척에서 아이작 달튼의 나지막한 웃음이 들렸다. 나는 꽉 이를 깨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작의 초록색 눈동자에 미미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궁금하다면 좀 더 자세히 말해드릴까요? 영혼 자체가 바뀌었다고 의심하게 된 시점은 공녀님이 신전에서 쓰러진 때였지만, 나디아 님께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건 손을 쓴 직후부터 알았습니다. 소피아 일라리아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니까요.”

“소피아 일라리아에게 변화라고……?”

“그건…….”

“아무리 눈앞에 있는 게 나디아 골드게이트의 몸이라도 그렇지, 너무 마음이 약해지시는 거 아닌가요, 달튼 자작?”

아이작이 내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순간, 문 쪽에서 톡 쏘는 낭랑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툭, 잘랐다.

은발에 분홍 눈, 그리고 앙증맞게 찍힌 매력점. 이 자리에 없는 게 이상했던 소피아 일라리아였다.

평소 봤던 가녀린 모습과 달리 당당하게 걸어온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고는 다시 달튼 자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게는 인사조차 건넬 마음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왔다면 시작하지, 왜 거기 앉아서 주절주절 쓸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들어 봤자 곧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라질 존재한테.”

사라질 존재?

소피아 일라리아의 말을 듣고 나니 불현듯 생각나는 게 있었다. 쏟아지는 정보를 처리하느라 평소보다 빠르게 회전하던 뇌가 그간 읽었던 로판의 사건 사고들을 주르륵 늘어놓은 탓이다.

‘쓰러진 나디아 골드게이트. 빙의된 나. 변화하지 않은 소피아. 그리고 빙의의 원인인 두 사람.’

이러면 답은 하나 아닌가?

언제 어떻게 만난 건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해냈는지는 몰라도, 소피아와 아이작은 영혼을 바꾸는 걸 시도한 거다. 나디아 골드게이트와 소피아 일라리아의 영혼을.

나는 슬쩍 눈을 굴려 아이작 달튼을 힐끗 바라봤다. 나디아에 대한 제 마음을 고백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소름 돋네, 진짜.”

‘나는 네 얼굴이 아니라 너라는 사람 자체, 그러니까 네 영혼을 사랑해’를 직접 실천하는 아이작 달튼이나, ‘어떤 모습으로든 당신 곁에 있고 싶어. 그 자리는 내 자리야’를 또 실행하는 소피아 일라리아나. 둘 다 제정신이 아니다.

절로 돋는 소름에 살짝 몸을 떨고 있을 때쯤, 귓가에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음? 소름이 돋는다니?”

아, 미친. 나 방금 입으로 내뱉었냐?

순식간에 나를 바라보는 두 쌍의 눈을 마주하며 나는 속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아냐, 차라리 잘됐어.’

드라마에서 보면 일부러 운을 떼서 증거를 확보하기도 하지 않나.

지금도 녹음은 잘되고 있으니 이참에 아이작 달튼뿐 아니라, 소피아 일라리아의 시인을 받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작게 입술을 달싹이며 내 생각을 두 사람 앞에서 일부러 짧게 요약해 털어놓았다.

“둘이 나디아와 소피아의 영혼 바꾸기를 실천했다는 거잖아.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루려고.”

“아…….”

소피아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분홍색 눈으로 신기한 걸 보듯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슬쩍 입꼬리를 당겨 옅게 웃었다.

“정말 머리가 좋네. 지금 북부를 뒤집어 놓을 만해. 방법이 있었더라면 따로 영혼을 빼서 내 사람으로 쓰고 싶을 정도로.”

아니, 그래도 그건 좀. 진짜 내 머리만으로 낸 결과들도 아닌데.

양심에 찔려 혼자 그녀의 말을 부정하고 있던 순간, 소피아 일라리아가 다가와 손으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잔뜩 설레는 듯한 눈빛으로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게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랬잖아요, 공녀님. 공녀님이 이기셨다고. 백작 부인을 이겨서 축하드린다고.”

“…….”

“그거 아직도 유효해요. 승리자는 나디아 골드게이트일 거예요. 업적에 관한 모든 찬사도, 사교계에서의 위치도, 그리고 카르테인 공작의 올곧은 사랑도.”

어째서인지, 그녀가 입에 담지 않은 뒷말이 귓가에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 모든 게 나의 것이 될 테니까.’

소피아 일라리아는 벌써 자신과 나디아가 된 자신을 구분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을 쟁취한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멋대로 속에 있던 말이 튀어나왔다.

“너, 빙의를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니야?”

나는 그녀의 분홍색 눈을 가만히 마주한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해 봐서 알아. 아무것도 모르는 누군가로 대신 사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거든.”

“공녀님 눈에는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떠만 있는 멍청이로 보이나 봐요?”

“뭘 얼마나 준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글쎄. 직접 낳은 부모도 자식을 전부 알지 못하는데, 타인인 네가? 야, 빙의 그거 쉽지 않아.”

“…….”

“특히나 본인 인생도 원하는 대로 이끌지 못해서 나디아 골드게이트의 인생을 넘보는 네가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네.”

말이 이어질수록 턱에 얼얼한 고통이 퍼졌다. 내 턱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간 탓이다. 먼저 빙의를 경험해 본 선배로서 나름대로 진심을 담은 건데, 듣기 영 싫었나 보지.

아랫입술을 깨문 채 위협과 짜증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보던 그녀가 아이작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자작,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죠? 이러다 영혼이 바뀌기 전에 누가 방해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렇게 굼떠요?”

“이제 공녀가 차고 있는 장신구만 벗기면 끝납니다. 향이 방에 퍼졌으니까요. 양초도 이미 켜져 있습니다.”

“내 말은 왜 아직도 공녀가 눈을 뜨고 있냐는 거예요. 일전에는 영혼이 육체에 잘 자리 잡을 수 있게 아예 혼수상태로 만들었던 것 같은데? 연결고리에 충격을 주기로 한 건 잘된 건가요?”

“아니,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과거의 실패에서 배워야지요, 부인. 이번에도 그랬다가 다른 영혼이 들어오면, 그때는 어쩌시려고요.”

재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아이작 달튼을 노려본 소피아가 내 옆의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이작 달튼이 내 어깨를 잡아 몸에 달고 있던 장신구를 풀기 시작했다. 목과 귀, 그리고 손에 닿는 거침없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그가 평소의 상냥한 의사처럼 내게 말을 걸었다.

“이건 다시 돌려드릴 겁니다. 다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공녀님께서 마도구를 준비해 왔을지. 의식에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요.”

정답이다. 혹시나 이렇게 빼앗길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해, 내가 ‘먹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만 빼면.

나는 분한 척 몸을 바르르 떨면서 속으로 마탑의 판매 담당 마법사님을 찬양했다.

[걱정 마세요, 고객, 아니, 공녀님! 제가 마탑주님을 닦달해, 외부의 마법으로부터 영혼을 보호하는 실드를 안전한 포션의 형태로 준비했습니다! 고대급의 마법이 아닌 이상 최대 세 번! 그게 뭐가 됐든 다 막아드립니다!]

그래, 고대급이 아닌 이상 다 괜찮다 그랬어. 그러니까 뭔 짓을 해도 난 괜찮을 거다.

다정하게 나를 바라본 아이작이 한 손으로 내 눈을 가려주며 작게 속삭였다.

“이렇게까지 떨면 아무리 나라도 마음이 약해지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헤링본 가문의 가보를 이용하는 거라 금방 끝날 겁니다.”

…어?

“어떤 고통도 없을 테니 안심하세요.”

잠, 잠깐, 잠깐만! 이거 괜찮은 거 맞지?

그런 거죠, 마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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