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22화 (122/155)

122화

내 말을 들은 클로드가 멈칫했다. 도움을 요청한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모양이다. 미간을 좁힌 채 나를 바라보던 그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많은 게 내포된 그의 말에 나는 슬쩍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네. 음,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이작 달튼을 물리치고 나면 가족들에게도 빙의에 대한 사실을 알려야만 하겠지.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웃는다고 웃었는데, 제대로 웃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클로드의 미간이 미세하게 더 찌푸려진 것으로 봐서는 아닌 것도 같다.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 눈치를 보는 헤르잔과 줄리엔를 확인하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공작님, 공작님은 내 곁에 남을 거잖아요.”

“당연한 말을.”

“그럼 됐어요. 그거면 충분해요.”

“…나디아.”

카르테인 공작이 걱정을 섞어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사랑이라는 알량한 감정 하나에만 기대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때로는, 정말 모든 것을 잃어야 할 수도 있는 그 순간에는 사람 한 명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도와주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번만큼은 그걸 믿어보기로 했다. 훗날 일이 잘못된다 해도 지금의 선택에 후회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이건 믿으나 마나지만…….

‘일단은 나디아 골드게이트도 골드게이트 가문 사람이잖아. 그럼 그 가치를 보는 눈, 나도 조금은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속 한편에 핀 쓸데없는 생각을 밀어둔 채 나는 클로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그의 주황색 눈을 바라보며 슬쩍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나를 믿어달라는 표현이었다.

그런 나를 지그시 마주하던 공작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디아, 그대의 뜻이 그러하다면.”

“고마워요, 클로드.”

나는 짧게 공작에게 감사를 표하고 바로 펜과 종이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곳이 집무실이라 일 처리가 수월했다.

마탑으로 하나, 골드게이트 공작가로 하나.

“됐어요.”

카르테인 공작가의 인장과 내 사인을 모두 썼으니 분명 빠르게 전달이 될 거다.

나는 만족스럽게 편지를 보내고는 클로드를 향해 결연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도 준비할까요?”

당신은 출정을, 그리고 나는 안전을 위한 나름의 대비를.

* * *

아름답게 장식된 정원의 입구. 몸소 나서서 초대한 사람들을 맞이하던 백작 부인의 표정이 익숙한 이의 등장에 활짝 피었다.

“프리지아 님!”

친근함을 숨기지 않은 채 공작 부인의 이름을 부른 그녀가 걸음을 재촉해 프리지아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두 손을 꼭 마주 잡으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은 아닌지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을. 보육원 기부 행사같이 귀한 행사에 골드게이트가 빠져서야 되겠어요? 게다가 이 행사, 네펠리 영애가 주관한 행사잖아요.”

“그렇기야 합니다만…….”

“매번 감탄하기는 하지만, 영애가 정말 생각이 깊어요.”

딸아이의 칭찬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백작 부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움이 옅게 서렸다. 고고한 자태로 행사를 이끄는 네펠리를 슬쩍 바라본 그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부인. 하지만 대단한 것은 제 딸아이가 아니라 나디아 영애이지요. 네펠리가 이번 행사의 주제를 정할 수 있었던 것도 나디아 영애 덕분이니까요.”

“저런, 테이아. 이렇게 금칠을 해도 나오는 건 없답니다?”

“아이, 금칠이라니요! 진심입니다. 영애의 곁에 있겠다며 북부까지 간 아이가 왜 이토록 빠르게 수도로 올라왔는지 아주 잘 알겠더군요. 학문과 예술은 언제나 새로움에 배고픈 자들이 모이는 곳이니까요. 개중에는 잠시 반짝이고 사라지는 것들도 있습니다만,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들도 있지요.”

푸근하기만 했던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공작 부인, 저는 영애의 이번 발명이 후자일 거라고 확신한답니다. 이미 사람들이 먼저 반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녀가 북부에 차려진 가게까지 언급할 때쯤이었다. 정원의 입구에 선 채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 사이로 훤칠한 남자 한 명이 불쑥 끼어들었다.

“정말입니다. 직접 써 보니 더 좋더군요.”

“카를루스 전하!”

“오랜만입니다, 부인.”

“그건 그렇습니다만, 전하께서 참석해주실 줄이야……. 정말 기분 좋은 놀라움이네요!”

“유독 날이 화창하길래 제가 어머님께 대신 참석해도 되겠느냐고 떼를 좀 부렸습니다.”

가벼운 농담으로 백작 부인의 말을 받은 황태자가 시원한 미소를 머금은 채 주제를 환기했다.

“듣자 하니 네펠리 영애가 보육원에 비누도 기부할 예정이라던데, 저도 한 손 거드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나디아 영애에게는 받은 게 많아서 말입니다. 소문도, 비누도.”

“아, 그러고 보니 전하. 말이 나온 김에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묻고 싶은 거라면?”

익숙하게 부채를 펼쳐 다른 사람들이 표정을 읽지 못하도록 얼굴을 가린 그녀가 나지막하게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헤링본 자작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혹시 소피아 일라리아를 언급하지는 않았는지요?”

“헤링본 자작과 소피아 일라리아라…….”

프리지아는 황태자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사실 공작 부인이 이런 질문을 던진 건 정말로 ‘말이 나와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 이 자리에 황후가 아니라 황태자가 나올 거라는 것도, 어제쯤 헤링본 자작에 대한 조사가 대략 끝났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프리지아는 잠시 어젯밤 공작가에 도착했던 딸의 서신을 떠올렸다.

[아이작 달튼과 관련해 도움이 필요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의아한 말로 시작된 나디아의 도움 요청은 간결하고 또 건조했다. 의심이 가는 정황이나 일어났던 사건들을 그저 나열하는 정도에 그칠 정도로.

하지만 프리지아는 그런 딸의 편지에서 자신들을 향한 배려를 느꼈다. 나디아는 이 편지를 읽을 가족을 걱정하고 있었다. 가까이에 적으로 의심이 되는 자들 두고도 몰랐던, 그래서 충격을 받을 제 가족을.

‘공교롭기도 하지.’

프리지아는 서약식 전날부터 나디아를 유심히 보겠노라 제 남편과 말했었다. 딸의 행동이 너무나도 불안해 보였기에.

그러니 나디아에게 모든 신경을 쏟고 있던 그녀가 소피아 일라리아의 묘한 행동을 눈치챈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작 달튼에게 몰리는 순간, 소피아는 분명 목소리를 높여 그의 말을 부정했으나 절박하지는 않았다. 잘못을 낱낱이 고하는 순간에도 모든 게 들통난 자 특유의 체념과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소피아 일라리아는 아주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어.’

마치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순리인 것처럼.

프리지아 골드게이트의 기민한 감은 방금 얻은 이 정보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렸다. 그래서 그녀는 그날부터 조용히 소피아 일라리아의 정보를 긁어모았다.

그렇게 모은 정보들 가운데에는 유난히 이상한 행적이 있었다. 소피아 일라리아가 수도에 단신으로 올라와 머물렀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나디아가 쓰러지기 얼마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건지 의원을 부르기는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움직임이 너무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나 숙소에서조차 나오지 않았다는 게.

‘몸이 그리 좋지 않으면 보통은 일정을 정리하고 돌아가는데, 소피아는 그러지도 않았지. 백작 부인이 움직인 건 나디아가 쓰러지고 수일이 지난 후야.’

수상하리만치 적은 움직임과 공교로운 수도 방문의 시기. 그러나 이것만으로 뭔가를 떠올리기엔 큰 조각 하나가 부족했었다.

[소피아 일라리아와 아이작 달튼이 손을 잡은 모양입니다. 목걸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었어요.]

나디아에게서 그 서신이 오기 전까지는.

프리지아가 부채 안쪽에서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서신을 본 순간 떠올랐던 분노가 여전히 그녀의 속을 태웠다.

은근하게 말꼬리를 늘였던 카를루스 황태자의 목소리가 분노를 곱씹던 프리지아를 일깨웠다.

“공작 부인과 백작 부인이니 말하는 겁니다만, 헤링본 자작의 수사는 큰 쓸모가 없었습니다.”

“아…….”

“그가 직접 질 낮은 이들을 끌어들여 이 일에 파벌을 만들고 소문을 주도해 퍼트린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헤링본 자작이 이 모든 일의 머리는 아닙니다. 부인, 소피아 일라리아라고 하셨습니까?”

“…….”

“공교롭게도 그가 조사 내내 앵무새처럼 외쳤던 건 소피아 일라리아의 이름이었습니다. 사건과 관계가 없는 일에서마저도 제 누나 탓을 해 전부 변명으로 취급되었지만요.”

“그건 흥미롭네요.”

그건 마치 쓰고 버릴 패로 헤링본 자작을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 않나.

아무리 못 미덥다 해도 소피아 그 자신이 가장 무력할 때 뒷배가 되어줄 수 있는 가족인데도.

‘나디아의 말이 맞아. 이건 뭔가 숨겨진 게 더 있어.’

프리지아는 위험한 제안으로 들릴 테지만 아이작 달튼의 말에 따라 쪽지의 장소로 나가야 한다는 나디아의 말을 이해했다. 그 정보를 얻기 위한 판을 깔기 위해 딸이 제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도.

자신이 할 일을 아주 명확하게 알아챈 프리지아가 바로 표정을 바꾸며 살랑살랑 부채를 흔들었다.

“말씀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사람을 특정 지어 물으시다니 무언가 짚이시는 점이라도 있으신지 궁금하군요.”

“그렇지는 않답니다. 그저 그 남매가 제 딸에게 큰 해를 끼쳤기에 궁금했을 뿐입니다. 혹시나, 골드게이트 가문의 힘이 필요하지는 않을지.”

은근하게 속내를 내비치니 황태자가 알 만하다는 듯이 프리지아의 말을 받아들였다.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공작가에서 어떤 의미인지 모를 그가 아니었기에.

그래서 제국의 주인이 될 카를루스 황태자는 황가에 오랜 시간 충성한 골드게이트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했다.

헤링본 자작을 결코 곱게 보내지는 않겠다고.

프리지아는 나디아의 요청과 별개로 그런 황태자의 성의를 기껍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