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짐작 가는 데라.”
가볍게 고개를 기울인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런 생각 없이 공작의 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그가 입꼬리를 당겨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제게도 아직 숨기고 있는 터라 짐작 가는 데는 없지만, 어떻습니까. 헤르잔 몰래 갔다 오는 건.”
언제 젖어도 이상하지 않을 편안한 셔츠와 걷어붙인 소매, 그리고 조각 같은 얼굴.
절로 시선이 가는 그의 모습 탓일까, 카르테인 공작이 한 말이 한 귀로 들어가 다른 한 귀로 새어 나갔다.
나는 급하게 와인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와인을 입 안에 들이부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 듯싶다.
“나디아?”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금 레티시아에 가자고 했지요? 네, 가요. 갑시다.”
암, 그래야지. 누가 가자는 건데.
한 손으로 입가에 묻은 와인을 쓱 닦으며 나는 빠르게 다리 하나를 온천에서 뺐다.
발을 담그고 있어서 그런가, 와인 한 잔에도 취기가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결연한 눈빛으로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나디아, 잠시만. 어차피 공작저로 돌아가려면 레티시아를 지나야 하니 조금 더 같이…….”
“아.”
클로드의 큰 손이 부드럽게 팔을 잡았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마주한 그의 눈이 오늘따라 유난히 특별하게 보여서일까.
―풍덩!
나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온천에 빠지고야 말았다. 다급하게 이름을 부르는 그에게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주었으나 소용없었다.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 온천 안의 물이 한 번 더 요동쳤다. 이름을 부른 즉시 클로드가 나를 따라 온천으로 들어오며 생긴 일이었다.
또다시 넘어질까 걱정이 되었는지 손으로 허리를 받친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디아, 괜찮습니까?”
“어, 네…….”
“어지러움이 있다든가 힘이 빠진 건 아니고?”
심각한 클로드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쥐구멍에 기어들어 갈 법한 크기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다리에 힘이 풀린 건 맞는데 그런 게 아니고. 공작님을 보고 있자니 그, 외모 때문에…….”
“예?”
“오랜만에 자세히 마주 보고 있자니 심장에 무리가 갈 정도로 잘생겼네요.”
홀린 듯 말을 내뱉자 클로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허리를 받친 손에 조금 더 힘을 준 그가 자신의 품 안으로 나를 더 당겼다. 눈을 내리깐 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은근했다.
“부인께서는 똑똑하시군요.”
“…네?”
“옷이 젖었잖습니까. 이대로 공작저까지 갈 수는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레티시아를 들러야겠습니다. 그 근방에 옷 가게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 공작님. 방금 뭐라고…….”
“레티시아의 옷 가게를 들르자 했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요. 그 전에.”
나는 친절하게 설명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반문한 건 똑똑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 앞의 단어 때문이었다. 나를 부를 때 썼던 그 단어.
내 질문을 알아들은 그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당긴 채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온천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와 함께 클로드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 그러고 보니 영애를 ‘부인’이라고 불렀군.”
“…….”
“마음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그만 티를 내버렸던 모양입니다.”
“하.”
부인? 부인이란 말이지? 우리 약혼식에서 서로 반지를 나눠 끼는 것도 아직인데, 벌써 부인까지 꿈꾸고 있다고!
‘와, 지금 이거 나한테 작업 거는 거냐? 그런 거야?’
방금 원샷으로 들이켰던 와인 탓에 머리가 정상적으로 굴러가지를 않았다. 같은 단어만을 열심히 입으로 되뇌던 찰나, 그가 내 쪽으로 부드럽게 고개를 내렸다.
그게 꼭 입맞춤에 대한 허락을 구하는 것 같아서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안 돼!”
아니, 이 사람이 요새 기회만 생기면 남사스럽게 입을 쪽쪽! 씁, 아무리 둘만 있는 곳이라도 야외는 아직 이른……!
“…안 됩니까?”
“아, 아니.”
뭐 저런 표정을 짓는대.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주먹을 꽉 쥐고는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돼요… 됩니다……. 그래도 레티시아에는 가야 하니까 우리 시간은… 흡!”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주먹을 쥐었던 손의 힘 역시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 * *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몸이 으슬으슬 추워질 때쯤 서로에게 몰두하는 걸 멈춘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레티시아에 도착했다.
처음 사람들이 몰렸을 때도 예상했지만, 레티시아는 이제 정말 하나의 관광 단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번화한 모습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간편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잔뜩 있습니다!”
“옷 사세요! 집에 돌아갈 때 위에 두를 숄부터 바지, 치마, 아이들 옷까지 없는 게 없습니다!”
먹거리와 놀거리, 그리고 옷 같은 것을 파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익숙한 단어가 귀에 꽂혔다.
“저쪽에 있는 숍 가봤어? 비누 파는 그곳 말이야.”
“아니? 귀족들만 가는 가게가 아니란 말이야?”
“귀족분들이 사는 건 또 따로 고급품이 준비되어 있나 보더라고. 한 번쯤 보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요즘 레티시아에서 유행하는 물건이기도 하고, 일단 향이 굉장히 좋거든.”
비누?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은 나는 목을 빼 그들이 지나온 곳을 살펴보았다. 그새 잘 다져진 길의 한쪽에는 깔끔하게 장식된 가게가 하나 있었다.
“아, 아예 가게를 차렸구나.”
일전 귀족들에게 팔 비누와 아닌 것을 구분하고 싶다고 했던 걸 그새 적용한 모양이었다.
가게 앞에서 활발하게 사용을 권하는 직원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다. 딱, 내가 공작 부인께 해드렸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잖아.
‘이해가 안 되네. 이렇게 잘해나가고 있으면서 왜 보지 말라고 한 거지?’
나중에 깜짝 선물로 보여주려고 그런 건가. 나는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클로드에게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저기 좀 보러 갔다 올까요? 지금 입고 있는 옷이면 나도 클로드도 의심을 사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나는 눈으로 방금 레티시아의 근처에서 적당히 산 옷을 가리키며 작게 웃었다. 나를 따라 옷을 확인한 클로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의 아닌 시찰이군요. 좋습니다.”
“그러게요. 그럼 갈까요?”
클로드와 함께 가게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자, 밖에 나와 있던 직원들이 우리를 크게 반겼다.
나와 클로드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냥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하라고 교육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어서 오세요! 비누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아, 네에. 구경을 좀 하려고 하는데요.”
“얼마든지요!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몇 개는 시험 삼아 사용해 보실 수도 있으니 놓치지 마세요! 향이 정말 좋거든요!”
나는 생기가 넘치는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의 안에는 연구실에서 봤던 여러 종류의 비누들이 가득 차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은 가짓수에 절로 눈이 동그래졌다.
‘타냐와 몇 조향사들이 이런저런 실험에 열을 올리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많이 만들었단 말이야? 가격은? 가격도 괜찮은 건가?’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근처에 진열된 비누 하나를 확인했다. 말린 세이지 잎이라…….
“앗, 그 제품이 마음에 드시나요? 괜찮다면 제가 설명해 드릴 수 있는데!”
“아, 그럼 그래 주시겠어요?”
“네! 이건 말린 세이지 잎을 이용해 만든 제품으로, 언제든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에요. 잎이나 풀을 이용한 제품들은 다른 고급 재료보다는 향이 조금 떨어지지만, 사용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답니다!”
발랄한 점원의 안내를 들으며 나는 다양한 제품들을 덩달아 확인했다.
보아하니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단가를 낮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같은 재료를 쓰더라도 들어간 함량을 달리한 모양이고. 내가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장미 비누가 대표적인 예였다.
“흥미롭군요.”
“그러게요. 헤르잔이 방문을 막은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제품의 품질도, 점원의 태도도, 그리고 물건을 사러 오는 고객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뛰어난 편에 속한다고 봐야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모습에 의아함이 더욱 강해질 때였다.
콰당,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가게의 입구 쪽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이 사람을 봐라!”
“꺅!”
“아, 또 시작이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돈에 눈이 먼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 사람을 봐!”
돈에 눈이 멀어? 뭘 보라는 거지? 게다가 또 시작이라고?
그냥 작은 소동으로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지나치게 신경 쓰이는 말들이었다.
나는 가볍게 클로드와 눈짓을 주고받고는 빠르게 가게의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아주 상반된 상태의 사내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남자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학자 같은 모양새였고, 다른 한 명은 누가 봐도 상태가 지독히 나쁜 환자 같았다.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워 보이는 남자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으, 으으…….”
짧게 신음을 흘리며 그가 바닥을 손으로 긁었다. 아무래도 고통이 좀 심한 모양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상태가 심각해 보여 나서려던 찰나, 학자같이 생겼던 남자가 왈칵 화를 내며 입을 열었다.
“부패한 신관과 돈에 눈이 먼 마법사 놈들 때문에 독극물을 팔다니, 제정신인가?! 온천이 터졌을 때까지만 해도 정말 신의 선물인가 싶어 가만히 있었는데 더는 못 참겠군! 이 사람을 좀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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