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나는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카르테인 공작을 바라봤다. 그와 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점점 흔들리는 내 눈과 달리, 클로드의 눈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 괜히 이야기했나?’
아니, 아직 본론에 들어가지도 않았잖아. 게다가 내가 뭐 엄청난 걸 부탁한 것도 아니다. 그냥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달라고 했을 뿐인데, 그 대답이 이렇게나 오래 걸릴 일인가?
‘게다가 이거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 아니냐.’
마치 발코니에서 공작에게 청혼한 직후의 느낌이랄까. 나는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가볍게 훑었다.
어색한 침묵을 도무지 참을 수 없어 그냥 주제를 바꿀까 하던 때, 클로드가 한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며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합니다. 내가 아직도 그대에게 그 정도의 신뢰도 주지 못했나 싶어서 잠시.”
“어…….”
예상했던 것과는 또 다른 대답이었다. 충격을 받았다는 듯 손으로 턱을 문지른 공작이 굉장한 선택지들을 담담하게 내어놓았다.
“제가 어떻게 증명하면 마음이 놓이시겠습니까? 마탑주나 대신관님에게 공증이라도 받을까요? 아니면 좀 더 확실하게 기사의 맹세라도…….”
“아니, 아니요! 기사의 맹세라면 검을 쓰는 팔을 걸고 하는 맹세잖아요!”
“예. 저는 양손을 전부 사용할 줄 아니, 팔 두 개를 전부 걸게 되겠군요.”
이 사람, 마탑에서 눈뜬 이후로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냐? 클로드 카르테인이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일어나 검을 뽑을 것 같아 나는 빠르게 그를 붙들었다.
“그냥! 그러겠다는 말 한마디면 됩니다, 예!”
“정말 그거면 되겠습니까?”
“네!”
결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들은 그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예, 약속하겠습니다.”
“좋아요.”
나는 클로드의 약속을 받고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막상 말을 꺼내려고 하니 풀을 붙인 것처럼 입술이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꼭 클로드에게 숨기는 게 없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흐름이었다. 단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공작이 단 한 번의 재촉 없이 나를 기다려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십 번 입술을 달싹이고 목을 가다듬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가 엄지로 손등 위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손등의 온기에 힘입어 나는 몸 깊숙한 곳 밑바닥에 있던 용기를 겨우 짜냈다.
“제가… 재미있게 읽던 소설들이 있어요. 주로 읽었던 건 연애 소설인데, 그중에 저 같은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아왔던 소재들이 있었거든요. 대표적인 것이 ‘빙의’였어요.”
“빙의라면?”
“말 그대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예요.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읽던 책 속 등장인물에 빙의하기도 하고 그래요. 공작 영애일 때도 있고, 황녀일 때도 있고, 가끔은 시한부거나 소설 속 악녀이기도 하죠.”
할머니가 머리맡에서 옛날이야기를 해주듯 나는 최대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카르테인 공작에게 말을 건넸다.
사실 어떻게 보면 한 편의 이야기와도 같은 내용이니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
“안 읽은 책이 드물었어요. 신작이 나오면 한 번씩은 다 건드려 봤을 정도로. 그런데 사람 일은 모른다고, 눈을 뜨니까 내가 전혀 모르는 곳인 거예요. 딱,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믿어져요?”
“…그 말은 이곳이 나디아 그대가 등장인물로 나오는 책이라는 말입니까?”
“아, 그건 아니에요. 저는 책을 읽고 생긴 일이 아니라서요. 정확하게는 그것과 비슷한 세계관이라고나 할까…….”
나는 검지로 귀 뒤를 살짝 긁으며 곤란한 듯이 웃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심장의 박동이 너무 세져서 이제는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분명 용기를 내어 시작했는데, 어쩐지 말이 이어질수록 카르테인 공작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불 쪽으로 살짝 시선을 내리고는 다소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엔 꿈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걸 알고 나니까 모든 게 무서워졌어요. 낯선 세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떨어졌다는 생각을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기적이라고 날 보며 우는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
“상황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정말 지옥이었답니다. 공작님도 그날 밤 제 상태 대충 보셨죠? 한동안은 계속 그 상태였다고 생각하시면 편할 것 같아요. 아이작이 절 보살펴 줬다고 했던 때도 이 시기고요.”
가만히 말만 하고 있기가 너무 어려웠다. 나는 손가락을 끊임없이 꼼지락거리며 연신 눈을 깜박였다.
“공작님이 숨기는 게 뭐냐고 물은 날, 제가 겁을 먹은 이유가 짐작되시나요?”
“…….”
“공작님이 내가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서예요. 원한 것도, 바란 것도 아니었지만 남의 몸을 꿰차고 앉은 나를 알게 되면 공작님이 보일 반응이 무서워서요.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것도 물론 아프겠지만, 공작님이 그러면 정말 죽을 만큼 아플 것 같았거든요. 단 한 사람에게만 이 사실을 숨길 수 있다면, 난 주저 없이 공작님을 골랐을 거예요.”
하지만 이래서 인생이 재밌는 거다. 가장 마지막까지 진실을 숨기고 싶었던 사람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나는 쓰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다시금 고요해진 방 안에서, 클로드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그렇다면 그대의 진짜 이름이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아니라는 뜻이 되는군요.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 그게… 이렇게 말하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요. 정말로 기억이 안 나요. 정확하게는 ‘나’와 관련된 건 전부.”
정말이다. 이름, 가족, 살던 곳, 다니던 회사명 등등 현대의 ‘나’와 관련된 건 어떠한 것도 생각나는 게 없다.
가끔 생활했던 장면이나 추억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가벼운 일상의 일이거나 내 존재를 특징짓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변명이라도 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 추가로 하나 더 말하자면 나디아 골드게이트의 영혼에 관해서도 아는 바가 없어요. 가족들에게도 아무 말 못 했고요.”
“그렇군요. 그럼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잠시 멈췄던 클로드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이어졌다.
“아직도 그대에게는 그곳이 더 그립습니까?”
“그건…….”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에는 당신도 있고, 이제는 소중해진 사람들도 있잖아요.”
이건 사랑에 미쳐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냥 듣기 좋은 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건 결국 ‘나’라는 존재와 함께 보금자리를 만드는 주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그곳에서의 내가 누구인지, 누구와 함께했는지 무엇 하나 기억할 수 없으니까. 돌아갔을 때 기억도 같이 되살아난다면 다행이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럼 또 같은 상황이 되는 거다. 낯선 곳에 혼자 덩그러니 놓일 때와 같은 상황이.
‘그건 싫어.’
단호하게 답을 내어놓자, 클로드의 손이 부드럽게 얼굴을 감싸고 그에게로 이끌었다.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한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주었다.
“그럼 되었습니다. 어렵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디아.”
“…….”
“이제 와 되돌아보니 골드게이트 가문의 사람을 만날 때면 계속 긴장을 했던 것 같은데, 혹 그들을 만나는 것이 힘드신 건 아닙니까? 만약 얼굴을 마주하는 게 고역이라면 언제든 제게 말해주십시오. 제가 막아드릴 테니.”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랬다가는 전쟁이다.
카르테인 공작의 이런 행보는 나를 인질로 삼아 골드게이트에 압력을 넣으려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로 비칠 테니까.
‘내가 가족들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내 부정을 확인한 카르테인 공작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주제를 입에 담았다.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를 받아넘긴 그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이런 질문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더 안 물어봐도 되나요?”
“음?”
“내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고, 또 솔직히 믿기 어려운 말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넘어가도 괜찮은 건가요?”
“괜찮습니다. 제게는 그 무엇도 변한 것이 없으니까.”
촛불과도 같은 그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일렁였다.
“그대가 가진 유일한 사람이 나라서, 그래서 말하기가 겁이 났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불쑥 내 일상에 들어와 모든 것을 휘저은 이가, 내게 둘은 외롭지 않다고 했던 이가 그대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아닙니까?”
“그건… 맞는데.”
“그렇다면 유일한 걱정은 그대가 이곳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였는데, 그건 영애가 해결해 주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제게는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디아 골드게이트는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강한 어조로 단언한 카르테인 공작이 재차 내게 강조했다.
“그러니 내게는 눈앞에 있는 그대만이 의미를 가집니다. 나디아, 내 세상의 중심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대입니다.”
클로드의 말이 다정하고도 선명하게 내 마음속에 박혔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한 말이 순식간에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서, 커다란 고목이 될 것 같다는 생각.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가 지금 내게 한 이 말을 잊을 수 없겠지.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는 길게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잠시만, 아주 잠깐만요.”
“괜찮습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엉켜 한참을 그러고 있던 내가 가장 먼저 카르테인 공작에게 꺼낸 말은 단 하나였다.
“공작님, 우리 목욕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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