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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15화 (115/155)

115화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떨어져 있던 쪽지를 주웠다. 정갈하게 접힌 쪽지를 펼치자, 새하얀 종이 위로 익숙한 글씨가 보였다.

[마수의 달의 첫날, 정오. 나단 외곽에 있는 여관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일전, 신의 분노 때 ‘방해자’들이 모였던 그 여관입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혼자 나오시기를. 제가 공녀님에 관해 알고 있는 걸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쪽지에는 내용 외에 아무런 흔적도 남겨져 있지 않았지만, 발신인이 누구인지는 뚜렷했다. 나는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문 채 쪽지의 내용을 몇 차례 더 읽었다.

‘공녀님에 관해 알고 있는 걸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꾹꾹 눌러 쓴 것이 보이는 문구를 바라보고 있자니, 조금 전에 묻어두었던 의구심이 다시금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이작 달튼이 나와 나디아 골드게이트에 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의구심 말이다.

정확하게 자신의 패를 다 보여주지 않은 것이 도리어 신빙성을 높였다. 나는 쪽지를 쥔 채 잠시 숨을 골랐다. 두려워서는 아니고, 화가 치밀어 올라서였다.

“정면으로 맞서지도 못하는 게 사람 약점을 쥐고 이리저리 멋대로 흔들려고 하기는……!”

비열하기 짝이 없네. 나는 정갈한 글씨체로 적힌 쪽지를 갈기갈기 찢으려다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곱게 접어 품에 넣었다.

‘혹시 모르잖아. 지금 이 쪽지를 증거로 써먹게 될지.’

소중하게 쪽지를 보관하고 있자니, 문득 내가 평소의 여유를 되찾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마탑에서 눈을 뜬 이후부터 뭔가 달라진 것 같다고 느끼고는 있었는데 이제야 확신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불안과 우울, 예민함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다는 걸.

‘둘 중 하나일 것 같은데. 내 감정과 상태가 불안정해야만 연결 고리가 약해지거나, 연결 고리에 충격을 준 여파가 불안정한 감정 상태로 나타났거나.’

어느 쪽이든 이 짓을 벌였을 아이작 달튼에게는 유감이 컸다. 그때의 기분은 정말로 끔찍했으니까. 나는 눈썹을 밀어 올리며 가볍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아,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고. 누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아나.’

날 이런 협박 편지에 굴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사람을 있는 대로 긁어댔으면 타고난 성격이 어떻든 사람 눈에 독기가 흐를 거라는 건 예상해야 했던 거 아닌가?

아, 물론 쪽지가 시키는 대로 할 생각도 없다.

“누구 좋은 일 한다고 혼자 가, 거길.”

내가 무슨 소년 만화 속의 주인공도 아니고, 사람을 잔뜩 데리고 갈 거다. 헤르잔이랑도 당장 상의해야지.

하도 어이가 없어 작게 중얼거리고 있던 찰나, 뒤에서 살짝 잠긴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십니까.”

“공작님!”

“나디아.”

나는 빠르게 침대로 걸어가 카르테인 공작을 살폈다. 클로드는 평소보다 조금 창백한 낯빛이기는 했으나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잠깐이기는 했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면 좀 더 자는 편이 나았을 텐데. 몸은 좀 어때요?”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은 건 처음이라 썩 유쾌하진 않습니다만, 상태는 괜찮습니다. 눈이 저절로 떠진 걸 보면 마탑주의 말대로 알아서 몸이 회복하는 것 같군요.”

무슨 충전기 꽂은 거 같네. 방전된 배터리가 5%가 되어 저절로 켜지는 핸드폰 같아.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대강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았다. 가볍게 얼굴을 손을 쓸어내린 그가 여전히 나른함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피곤함 때문인지, 유난히 날카로워 보이는 턱선이 그의 나른함을 더 부각하는 느낌이었다.

약간의 야릇한 분위기까지 풍긴 탓에 절로 숨을 참고 있는데, 클로드가 내 손을 잡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직전의 중얼거림은 무엇입니까.”

“아, 별다른 건 아니고 아이작 달튼이 제게 쪽지를 남겨서요.”

“예?”

나는 반사적으로 찌푸려지는 그의 미간을 검지로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마수의 달의 첫날, 정오에 나단 외곽의 여관에서 보자는 말이에요. 다른 사람 달지 말고 혼자.”

“그럼 지금 혼잣말로 그곳에 가시겠다고 한 겁니까?”

“가긴 갈 건데, 혼자 가겠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안전제일, 선빵 필승!”

걱정하지 말라는 내 자신만만한 목소리에도 클로드의 표정은 여전했다. 짧게 숨을 내뱉은 그가 내 쪽으로 상체를 더 당기고는 말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쪽지를 무시하고 안전한 곳에 계시는 겁니다. 감히, 그대에게 이런 연락까지 할 정도라면 달튼 자작 역시 나름의 준비를 했을 테니 말입니다.”

“저도 지금껏 소설의 주인공들이 왜 남이 만든 함정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지 참 궁금했는데 말이에요. 이 상황이 되니까 좀 이해가 되더라고요.”

나는 곱게 접어 품에 넣었던 쪽지를 꺼내 클로드에게 건네며 마저 입을 열었다.

“아이작 달튼이 뭔가를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가 안다고 언급한 그 사안은 내가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그 일임이 틀림없어요.”

“…제가 숨기고 있는 게 없냐고 물었을 때 답하지 못하셨던 그 문제입니까.”

“네. 아, 그리고 아이작 달튼의 성격상 찾아가지 않으면 예상외의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담담한 내 대답을 들은 클로드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가슴이 답답할 만도 한데, 그 와중에도 내게 일전의 그 문제는 재차 묻지 않는 게 카르테인 공작다웠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클로드 카르테인을 불렀다.

“공작님. 제가 마탑에서 공작님을 보고 한 말, 기억해요?”

“…겁이 났다는 그 말 말입니까?”

“아뇨, 사랑한다고 했던 거요.”

대화의 흐름이 그의 예상과는 달랐던 걸까? 내 말을 들은 카르테인 공작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살짝 커진 주황색 눈에는 당황스러운 감정이 미약하게나마 담겨 있었다. 나는 흔치 않은 공작의 모습에 작게 키득거리며 입술을 오므렸다.

“이미 알고 있었잖아요. 내게 약혼을 청했던 그때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거. 새삼스럽게 놀라네.”

“그건…….”

“그렇지 않아도 소피아 일라리아가 눈에 지나치게 거슬릴 때부터 알고는 있었어요. 이제는 그냥 단순히 얼굴이나 목소리,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게 마음에 쏙 드는 것 이상의 감정이 되었다고.”

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틀자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워 귀 뒤로 꽂을 때쯤, 카르테인 공작이 그대로 내 볼을 감싼 채 얼굴을 잡아당겼다.

“어… 읍!”

자연스럽게 마주친 입술이 당황스러우면서도 기꺼웠다.

빈틈 하나 없이 맞물린 입술은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나른한 손길이 볼을 넘어 목 뒤로 옮겨 갔다. 고요한 방 안에 끈적이는 마찰음이 살짝 울려 퍼졌다.

조금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탓에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밀렸다.

날카로운 소리에 정신이 팔린 것도 잠시, 가까이에서 들리는 카르테인 공작의 숨소리와 낮은 신음이 모든 신경을 가로챘다.

한순간에 열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깊게 서로를 갈구하는 입맞춤과 쪽쪽 소리가 나는 가벼운 입맞춤을 번갈아 하던 클로드가 얼굴 곳곳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날 그대를 뒤로한 채 돌아가며 그런 음침한 생각을 했습니다.”

“네?”

“끝까지 말을 하지 않으니 산 채로 그대의 전부를 씹어 먹어야겠다고. 설령 우리의 관계가 깨어져도, 그래서 그대가 나를 기꺼워하지 않더라도 그대를 풀어주지 않겠노라고.”

아주 조금만 움직이면 다시 입술이 맞닿을 거리에서 그가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살도록 놔뒀으면 되었을 것을, 먼저 다가와 그대가 없는 세계는 생각도 못 하게 하고 거리를 두겠다니. 그건 지나치게 잔인한 처사가 아닙니까. 그러니 나 역시 욕심을 부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아시겠습니까? 그대를 영영 잃을 뻔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마음 한구석에서 두렵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나도 내가 그대에게 어떻게 나갔을지 모릅니다.”

신부에게 죄를 고해하듯, 그가 탁해진 목소리로 생각을 늘어놓았다. 무엇 하나 감추지 않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괜히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나쁘게 행동했을지 모른다는 가정은 의미가 없다.

나는 양손으로 클로드의 볼을 잡아 그를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과 보석 같은 주황색 눈, 곧은 코, 시원한 입매.

여전히 내 마음에 쏙 드는 얼굴을 응시하면서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공작님은 결코 내게 그러지 못했을 거예요.”

“…….”

“왜냐하면, 공작님도 나를 사랑하니까. 맞죠?”

클로드 카르테인의 손이 아주 조심스럽게 내 손등을 감쌌다. 미간을 좁힌 채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나디아.”

조이듯 나온 그의 고백을 들으며 나는 슬쩍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그에게 대답했다.

“거봐요, 제가 처음부터 그랬잖아요. 내가 공작님의 사랑일 수도 있으니 체류를 허락해 달라고. 내가 고집 안 부렸으면 어쩔 뻔했담?”

농담을 섞은 뒷말에 클로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지으며 눈가에 다시 입을 맞췄다. 항복의 표시였다.

나는 조금은 편해진 카르테인 공작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공작님에게 숨기고 있던 그거 말이에요. 클로드.”

“…….”

“굉장히 허황된 소리처럼 들려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거라 약속해 줄래요?”

그럼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혼자만의 비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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