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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13화 (113/155)

113화

“한 번 해봤다고?”

“응, 이상하지. 루핀, 넌 아이작이랑 내가 뭘 했는지 혹시 알고 있어?”

“아니.”

단호하게 답한 루핀이 드물게 얼굴을 찌푸렸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그가 가늘게 눈을 뜬 채 허공을 노려보았다.

클로드의 주황색 눈이 루핀의 이상 행동을 가볍게 훑고는 다시 내게로 향했다. 루핀이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입을 열기로 한 모양이었다.

“달튼 자작에 관해 전할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줄리엔이 제게 따로 보고를 올려 조사에 들어간 내용입니다.”

“줄리엔이요?”

“예. 서약식 때 달튼 자작이 소피아 일라리아의 증거로 내놓았던 그 목걸이, 그게 그때 주장했던 것처럼 우연히 발견한 게 아니라는 보고입니다. 줄리엔 본인이 당시에 교환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럼, 그 말은…….”

나는 할 말을 잃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저 말은, 아이작이 대놓고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서는 내게 검은 손길을 내민 게 맞는다는 뜻이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당황스러운 상황이라 두 눈이 흔들렸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곁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마탑주가 내게 물었다.

“영애, 아이작 달튼에게서 특이점 같은 것을 찾은 게 없나? 당시의 상황에서 찾은 것도 좋고, 달튼 본인에게서 찾은 것도 좋아.”

“음, 으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아이작 달튼은 지나치게 온순한 서브 남주 상인 거 말고는 큰 특이 사항이 없는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거라고 한다면…….

“매운 향?”

“뭐?”

“어느 순간부터인가? 코끝을 톡 쏘는 것 같은 매운 향이 났어요.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던 마탑주가 루핀과 눈길을 주고받았다.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강의 눈치로 알아들을 것 같기는 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내 영혼이 불안정해진 주범으로 아이작 달튼을 꼽고 있는 거다. 지금 이번 상황뿐 아니라 과거의 범인으로도.

‘만약 정말로 아이작 달튼 때문이라면 부모님과 언니가 많이 속상해할 텐데.’

특히나 아르웬 언니는 미리 알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아이작 달튼을 끊임없이 신뢰했던 자신을 크게 탓할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내 안전에 예민했던 사람이니 그만큼 충격도 크겠지.

예상보다 문제가 더 커져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자, 클로드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나디아, 이건 그대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네? 그렇지만…….”

“지금 그대가 신경 써야 하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그대의 건강과 안전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큰 문제 없이 정신을 차리기는 하셨습니다만, 영혼과 신체의 연결 고리가 또다시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

“그 탓에 상당히 오래 힘들어하기도 했고요.”

카르테인 공작은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를 만지는 것처럼 나를 대했다. 여러 일이 겹쳐 당황한 것은 알겠으나, 생각보다 과한 손길이 다소 간지러웠다.

나는 바람 빠진 미소를 지으며 클로드에게 손을 뻗었다.

아팠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말짱하다고,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대할 필요는 없다고 그를 만류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볼을 감싼 나는 손가락 끝에 닿는 불덩이 같은 체온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클로드 카르테인 왜 이렇게 뜨거워.’

나는 불에 덴 것처럼 손을 거뒀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그의 이마를 짚었다.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카르테인 공작은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 그럼 지금 이 상태로 계속 자리를 지켰단 말이야?’

얼굴을 단단하게 굳힌 채 카르테인 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내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그렇게 마주한 공작은 겉으로는 정말 단 한 군데도 아파 보이지 않았다.

“공작님, 그.”

“나디아, 괜찮습니다.”

“…….”

괜찮을 리가 있나. 나는 차분하게 본인의 건강 따위는 내팽개치는 카르테인 공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공작의 눈에는 이제 옅게 열감까지 서려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음, 아니요. 하나도 안 괜찮은 것 같아요. 제 방에서 마주했을 때는 이러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열이 난 거예요? 제가 쓰러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별일 없었습니다.”

“내가 공작에게서 마나를 뽑아내서 그렇다. 네 정신을 깨우기 위해서는 클로드 카르테인의 마나가 꽤 많이 필요했거든.”

전혀 다른 곳에서 대답을 얻은 나는 클로드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계속 자기는 괜찮다고 말하는 클로드 카르테인보다는 마탑주 쪽이 훨씬 빠르게 대화가 될 것 같아서였다.

“마탑주님 입에서 ‘많이’ 필요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닌가요? 지금 이렇게 있어도 괜찮아요?”

“클로드 카르테인이 일반인이었다면 심각했겠지. 근데 카르테인 공작은 일반인이 아니지 않나.”

아니, 왜 남의 약혼자를 한순간에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대?

불만족스럽게 입술을 내밀고 눈을 가늘게 뜨자, 마탑주가 고개를 내저으며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카르테인 공작은 자기 뜻대로 검기를 다루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사다. 일반인의 평균을 대충 영애라고 치면, 그래……. 마나의 밀도나 응집력 등이 못해도 120배는 차이가 나겠군.”

“아하.”

“그래도 열이 심하다면 의사에게 보이는 게 좋긴 할 거다. 어쨌거나 신체에 무리가 갔다는 뜻이니까.”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역시 그렇죠?”

나는 클로드의 반박을 뚝 자른 채,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마탑주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저도 그럼 가 봐도 될까요? 꼭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면 공작님의 손을 잡고 의사를 찾아가고 싶은데요.”

“그럼 내가 데리고 갈게, 누나. 마탑주님은 이 공간을 맡으셔야 하기도 하고, 나도 가문에 잠시 들러야 할 것 같으니까.”

“가문에?”

“응. 아무래도 아이작…….”

마탑주의 허락보다도 먼저 나선 루핀이 평소답지 않게 턱에 힘을 주었다. 흉흉하게 일렁이는 눈동자 속에서 아주 잠시 불길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아이작 달튼에 관한 이야기를 부모님과 누나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누나의 지금 상태에 관한 것도 그렇고.”

“아.”

“이번만큼은 카르테인 공작의 말이 맞아. 누나가 그런 표정 할 거 없어. 이번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금방 알아챘을 거야. 서약식 이후 어머니가 뭔가를 찾는 모양이었거든.”

엄마가?

내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고 있자, 루핀이 손을 내밀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만 움직이자는 뜻이었다. 나는 루핀의 몸짓을 빠르게 알아채고는 마탑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식 인사는 다음에 다시 하겠습니다. 이번에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마탑주는 대답하는 것도 귀찮다는 듯 무심하게 고개만 까닥거렸다.

“이동할게.”

루핀의 짤막한 통보와 함께 주위가 익숙한 모양새로 일렁거렸다. 마주 잡은 클로드 카르테인의 손은 여전히 뜨거웠다.

* * *

마탑에서 돌아왔더니 카르테인 공작가가 왈칵 뒤집혀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나디아 님!”

“각하! 괜찮으십니까?”

“공작님!”

카르테인 공작가에 도착한 직후, 클로드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탓이 컸다. 그렇게 별일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더니,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다는 이유로 급하게 소환된 에이포드가 클로드의 높은 체온을 확인하고 외마디 신경질을 부렸다.

“차가운 수건 좀 빨리 가져다주세요! 그, 내 가방이랑!”

에이포드는 근처에 있는 아무나 붙잡고 소리를 치고는 빠르게 클로드를 살폈다. 눈과 입, 그리고 심장 박동까지 세세하게 살핀 그의 표정이 조금 미묘해졌다.

당장이라도 큰일이 일어날 것처럼 굴었던 게 머쓱한 듯 눈을 끔벅인 에이포드가 슬그머니 자신의 안경알을 닦았다.

“어떻지? 공작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어…….”

“심각한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는 헤르잔의 앞에서 에이포드가 짧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 대답했다.

“그, 괜찮으십니다. 열이 나는 것만 빼고는 그냥 피로 때문이신 것 같습니다. 기운만 보충해 주시면 별 탈 없이 일어나실 겁니다.”

“잘못 파악한 건 아닌가? 각하가 일반적인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쉽게 쓰러지실 분이 아닌데.”

“어…….”

작게 입소리를 낸 에이포드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에이포드를 대신해 헤르잔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에이포드가 괜찮다고 한 거면 괜찮을 거야.”

“나디아 님, 그래도…….”

“마탑주님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했었어. 공작님이 쓰러진 건 나와 관련이 있는 일이라서.”

나는 헤르잔을 가볍게 진정시키고는 살짝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나 누군가가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된 탓이었다. 내 행동에서 뭔가를 알아챈 헤르잔이 먼저 한발 물러섰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여기에 있는 이들은 제가 확실히 입단속을 시킬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우선 각하를 침실로 옮기도록 하지요. 나디아 님도 함께하시겠습니까?”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의 상황을 헤르잔과 줄리엔에게 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 또한 들을 게 있고.

담담한 표정으로 클로드의 침실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뒤에서 에이포드가 나를 잡았다.

“아, 나디아 님! 마침 잘됐습니다.”

“응?”

“일전에 말했던 영양제가 완성되어서요. 자, 우선 한 병 가지고 가세요.”

에이포드가 내민 영양제를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만든 영양제가 노란색이 아닌 선명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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