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누워있는 공간은 보라색과 은색의 마력으로 가득 찬 몽환적인 공간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루핀 골드게이트가 마탑주인 에카르트 키엘에게 요청해 함께 만든 장소였다.
‘그때는 분명 마탑주는 마탑 소속 마법사들의 요청에 충실히 협력해 주겠다는 조항 때문에 힘을 빌려준 것에 불과했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장소를 만드는 것에 일조했다는 이유로 루핀 골드게이트의 재요청을 거절하기엔 다소 껄끄러운 구석이 있었다.
나디아 골드게이트에 대한 에카르트 개인의 흥미가 높아진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마탑주에게 개입을 요청하는 마법사의 수가 늘어난 게 컸다. 더 정확하게는 마탑의 재정을 맡은 놈의 극성이 이루 말할 수 없던 거지만.
‘지금 마탑이 얼마나 풍족해졌는지 탑주님이 아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서약식 이후로 입소문이 나고 있어서 이제 날아오를 일만 남았는데! 우리 물주… 아니, 고객님이 쓰러지셔서 다 없던 일이 되어버리면 그땐 누가 돈 벌어다 줄래요! 누가!’
감히 마탑주의 공간에서 패악질을 부리던 놈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았다.
에카르트 키엘이 쓰러져 의식을 잃은 나디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깨진 루핀의 목걸이와 그을린 백금색 반지 쪽으로 시선을 던진 그가 작게 혀를 찼다.
“이래서야, 기껏 시간을 내 경고해 준 의미가 없잖나.”
맹한 얼굴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이렇게 직접 나서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루핀이나 카르테인 공작에게 대신 경고를 남길 것을.
눈썹을 밀어 올리며 불만족을 표하던 그가 반쯤 내리깐 눈으로 망가진 마도구 두 개를 바라보며 재차 중얼거렸다.
“뭐, 그래도 잘 가지고 있으라는 건 지켰네.”
루핀의 목걸이도, 자신이 준 반지도.
만약 그녀가 두 가지를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카르테인 공작에게 연락이 가거나 마탑으로 소환되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건 아주 높은 확률로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을 테고.
‘최악의 상황에는 기적처럼 붙었던 연결 고리가 끊어져 그대로 죽었겠지.’
공간을 떠도는 은색 마나의 주인을 떠올리며 에카르트가 다시금 나디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붉은빛이 가득한 적색 눈동자가 특유의 마나를 품고는 나디아의 상태를 꿰뚫었다.
‘최악의 상태는 아니야. 지금은 방어 차원에서 쓰러진 거라고 보는 게 더 맞겠어. 뭘 한 건지 연결 고리가 약해진 상태에서 외부의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대체 누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여 마나를 공중으로 흩어버린 그가 슬쩍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건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정신을 차린 이후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알겠지.’
영혼의 연결 고리를 계속 약하게 만들거나 충격을 주는 건 상당히 정순한 마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토록 정순한 마나는 동화가 빨라 고유의 출처를 찾는 것이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어렵다는 것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역대 마탑주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에카르트 키엘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다만 세계를 이루는 영혼과 차원, 이 두 가지와 관련된 일은 언제나 일정 수준의 시간이 필요했다. 때로는 운이라는 비논리적 변수가 필요하기도 하고.
‘클로드 카르테인과 같은 것 말이야.’
에카르트가 담담하게 루핀 골드게이트가 데리러 간 인물을 떠올리던 찰나였다. 에카르트의 마나와 루핀의 마나로 구성된 공간이 크게 일렁거리며 두 사람의 인영이 서서히 드러났다.
때마침 등장한 루핀 골드게이트와 클로드 카르테인을 본 에카르트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떠올랐다.
“탑주님, 카르테인 공작을 모시고 왔습니다.”
“그래, 잘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시작하는 게 좋겠군. 카르테인 공작, 루핀에게 설명은 들었나?”
“아니, 듣지 못했다.”
“그렇군. 그럼 지금 빠르게 설명할 테니 집중해서 들어.”
에카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클로드는 공간의 한가운데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나디아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디아의 곁으로 다가간 클로드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당장이라도 얼굴을 만질 듯 뻗은 손은 차마 나디아의 얼굴에 닿지도 못한 채 그 근처를 배회했다. 혹시라도 건드렸다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면 어쩌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두렵다, 라…….’
굉장히 어색하게 자신의 감정을 되뇐 클로드가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아득 씹었다.
그러니까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과 절로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이, 한순간 시야가 하얘지고 귀가 먹먹해지는 증상들이 바로 ‘두려움’이었다.
나디아 골드게이트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피어난 ‘두려움’. 그건 클로드에게 있어 아주 생경한 경험이었다. 특히 외부의 문제로 그녀를 잃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그에게는 더욱이.
가슴 한쪽에 저릿한 통증이 잘게 퍼져나갔다. 눈 한번 깜박이지 못한 채 나디아를 바라보던 그의 귓가로 에카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쓰러진 이유는 신체가 아니라 영혼과 관련이 있다. 이건 일전 영애에게도 말했던 건데, 영혼에 새겨진 흔적은 생각 외로 오랫동안 상흔을 남기거든. 그릇인 신체에도, 영혼에도. 그게 의도적인 움직임이라면 더더욱.”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내용에 클로드의 표정이 단번에 심각해졌다.
“의도적인 움직임이라고? 그 말은 누군가가 나디아를 노려 이 상태를 유도하고 있다는 말인가? 영혼과 신체의 연결 고리가 약해지도록?”
“그렇지. 이유가 무엇이고 시전자가 누구인지는 글쎄, 찾아봐야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찾을 수 있나?”
“더 쉬울 수도. 루핀이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안정적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약화된 거니까.”
“그렇군.”
간결한 클로드의 답변과 담담한 표정을 보며 에카르트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뭔가 짐작이 가는 곳이 있는 모양이군. 뭐, 그건 지금 당장 내 알 바가 아니고. 공작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나디아 골드게이트의 방어 기제를 깨트리고 의식을 수면 위로 올리기 위해서야.”
“그게 더 회복에 도움이 되나? 그리고 내가 뭘 해야 하지?”
강인하게 빛나는 주황색 눈동자가 클로드 카르테인의 각오를 보여주었다. 나디아 골드게이트를 회복시킬 수 있다면 시키는 게 무엇이든 전부 감당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클로드의 반응을 시큰둥하게 넘긴 에카르트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편이 회복에 도움이 되니 요청한 거다. 따로 할 건 없고, 골드게이트 영애의 손을 잡은 채 앉으면 된다. 그대에게 요청할 건 마나 수급이니까.”
영혼과 신체의 동기화는 개인이 익숙하고 안전하다 느끼는 장소가 많아질수록, 그리고 그 감정이 더 깊을수록 높아진다.
그러니 외부의 충격을 상쇄하려면,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가깝게 느낄 이의 마나를 최대한 풀어 환경이 안전함을 강조해야 했다.
‘현재 여기에 가장 알맞은 건 클로드 카르테인이고.’
나디아의 안정화 말고는 큰 관심사가 없는 루핀 골드게이트가 그녀의 약혼을 용인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연결 고리의 회복은 그 이후에야 가능한 일이지. 주 범인들을 잡아내면 따로 걱정할 필요도 없을 거고.’
어차피 영혼과 신체 사이의 문제는 일개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극도로 적었다.
이번에도 외부에서 흔드는 일만 아니었다면, 알아서 자연히 수복될 일이었다.
클로드가 나디아의 손을 잡은 채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에카르트가 손가락을 까닥여 두 사람의 마나를 묶었다.
“시작한다.”
“알겠… 윽!”
클로드의 입 사이에서 낮은 신음이 튀어나왔지만, 에카르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 정도의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명을 보존하는 방어 기제를 깨기 위해서는 상상하는 것 이상의 마나가 필요하니까.
애초에 마나를 수급하는 대상자가 전쟁 영웅인 클로드 카르테인이 아니었다면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못 버티면 어쩔 수 없고.’
그걸 위해 루핀이 버티고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기존에 공간을 채우고 있던 것과 다른 마나로 인해 공간이 어그러지지 않게 하는 게 먼저이긴 했지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잠잠하기 짝이 없던 나디아의 몸이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속이 진탕 꼬이는 것을 무시한 채 나디아의 모든 변화를 눈에 담았다.
차가웠던 손에 조금씩 온기가 도는 모습을, 뛰는지도 몰랐던 맥박이 조금씩 뛰는 모습을,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하늘처럼 청명한 푸른 눈이 드러나는 모습을.
“나디아.”
한 번, 두 번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초점을 잡던 그녀가 클로드의 목소리를 듣고는 그가 있는 쪽으로 눈을 굴렸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클로드의 소매를 붙잡았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잡는 나디아를 보고 클로드의 얼굴에 금이 갔다. 조심스럽게 손을 마주 잡은 순간, 나디아가 아주 작고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미안. 아까는 그냥… 목소리가 안 나왔어요…….”
겁이 났거든요.
나디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 속삭임을 들은 순간, 금이 갔던 클로드의 표정이 기어이 부서졌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