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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110화 (110/155)

110화

‘…아니, 그런데 뭔가 좀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는 하단 말이에요. 정말 날 좋아하는 건지 조금 헷갈린다고 할까…….’

그래, 이 기억이다.

분명 그의 눈빛과 손짓 하나하나가 전부 나를 좋아하는 걸 가리키고 있는데,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는 기분 말이다.

그 당시에도 어딘가 미묘했던 찝찝함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선명하게 빛나는 보석 같은 그의 눈을 보며 그와 살짝 거리를 벌렸다. 일종의 본능이었다. 가까이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본능.

뒷걸음질 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작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논란이 피곤하다는 듯 그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공녀님.”

“…….”

“제가 너무 흥분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유에 집중을 해 주십시오. 그만큼 공녀님의 상태가 심각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눈꼬리를 축 내린 그가 언성을 높였던 걸 후회하듯 지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사심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맞습니다. 공녀님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다고 해도, 건강만큼은 제 손으로 지키고 싶었으니까요. 공녀님이 각하를 사랑하는 방식이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는 방식이라면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녀님을 말릴 겁니다. 제가 더는 주치의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

“그러니 부디 그 말은 거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이작 달튼의 말은 정말로 그럴싸하게 들렸다.

공녀를 마음에 뒀지만 그녀의 마음을 존중해 주어진 소명 이상의 선을 넘지는 않겠다는, 전형적인 서브 남자 주인공이 할 법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달튼 자작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토로한 진심이 기억 속의 찝찝한 감정을 모조리 불식하지 못한 탓이었다.

“거절합니다. 미안해요, 달튼 자작님.”

“…….”

일견 매몰차게 느껴질 법도 한 내 거절에 아이작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꽉 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푼 그가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은색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선명했다.

약간의 착잡한 마음을 갈무리하며 내가 다시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천천히 눈을 뜬 그가 나를 바라보며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드린 부탁이 그렇게 어려운 부탁인 줄은 몰랐는데……. 유감입니다.”

“…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아이작 달튼이 한 말이 머릿속에서 의미 없이 맴돌았다. 귀로 듣기는 했으나 뇌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눈을 크게 키운 채 그저 그를 바라보고 있자, 아이작이 눈꼬리를 휘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자주 본, 그래서 익숙한 상냥하고 다정한 웃음이었다.

우리 집 돌팔이 의사 선생님이라고 말하고 다니던 딱 그때쯤의 사람 좋은 모습. 내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하던 순간, 다시금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그의 입에서 떨어졌다.

“아직은 조금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죠. 실은 저도 더는 버티기 힘들었던지라.”

버틴다고? 뭐를?

도무지 머릿속에 입력이 되지 않아 버벅거리고 있을 때쯤, 아이작의 얼굴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괜찮습니다. 한 번 해봤으니 두 번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대체 뭐가……!

“윽!”

집착을 넘어 스산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말과 함께 머릿속에서 댕, 하고 크게 종이 울렸다.

코끝으로 아이작에게서 은은하게 나던 매콤한 향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뒤집히는 속과 흐려지는 시야에 나는 으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아이작 달튼의 손이 얼굴 쪽을 향해 다가올 때, 가슴 쪽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파삭!

‘루핀이 준 목걸이!’

가운데에 크고 굵게 금이 간 부분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목걸이가 부서져 내렸다. 보석이 갈라진 틈 사이에서는 진한 은색의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몸을 휘감은 은색의 빛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어디선가 쿵,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반지를 낀 손가락이 타들어 갈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 * *

“윽.”

훈련장으로 걸어가던 클로드가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화상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손가락이 뜨거웠던 탓이다.

미간을 좁힌 채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확인한 그가 멈칫했다. 서약식 때 마탑주에게서 선물로 받았던 백금색의 반지가 검게 그을리고 있었다.

[위급한 상황이면 서로에게 신호가 가는 반지다.]

마탑주가 나디아에게 반지를 건네며 그와 그녀에게 보낸 전음이었다.

“위급한 상황…….”

짧게 그때의 말을 되뇐 그가 다급하게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보았다. 반지의 반응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챈 것이다.

“나디아.”

방금까지 입 안에서 몇 번이고 굴리던 이름이 힘없이 튀어나왔다. 작게 욕을 읊조린 그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빠르게 왔던 길을 다시 달려갔다.

조여오는 심장이 자꾸만 불길함을 토로했다. 그답지 않게 거듭 튀어나오는 욕설을 삼키며, 클로드는 조금 더 달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나디아!”

터질 듯한 허벅지를 무시하며 나디아의 방으로 달려간 그가 급하게 주위를 훑었다. 방과 복도, 안쪽에 마련된 작은 욕실까지. 하지만 그 어디에도 나디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빈 허공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아이작 달튼뿐이었다.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이를 악문 클로드가 단박에 아이작의 멱살을 잡았다. 거칠다 못해 살기까지 느껴지는 기세로 아이작을 벽에 몰아세운 그가 잔뜩 긁힌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작 달튼,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짓?”

“눈이 있다면 지금의 상황을 봐라. 나디아를 어디로 빼돌린 건가? 방금 나디아에게서 위험하다는 신호가 왔다. 만약 네가 그녀의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냈다면……!”

짧게 목이 졸린 신음을 냈을 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던 아이작이 일순 사납게 표정을 구겼다. 상대적으로 학자다운 손으로 클로드의 손등을 덮은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생채기? 누가, 제가 말입니까? 글쎄요, 상처는 각하께서 주시지 않으셨는지요?”

“뭐?”

“공녀님이 그 몸으로 새하얗게 질려 방에서 뛰어나온 게 누구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입매를 비튼 그가 손에 힘을 주고는 잡힌 멱살을 풀어냈다. 초록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제가 공녀님에게 생채기를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니까요.”

그래서는 안 된다? 어딘가 말이 이상하지 않나?

아이작 달튼이 하는 말이라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의심부터 하는 클로드가 서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절대로 나디아를 다치는 일이 없게 한다고……. 하, 재밌군. 그녀의 상태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은 것으로 보이는 이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겠지.”

“공녀님의 상태라 하셨습니까? 다른 의사들에게도 물어보시죠.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을 테니까.”

아이작 달튼이 입술을 비틀며 꺼낸 말에 클로드의 얼굴에서 단번에 표정이 지워졌다.

순간적으로 그를 지금 여기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댈 수 있는 명분은 많았다. 그가 이렇게 제게 방만하게 굴어서라고 해도 좋고, 사고사로 위장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

‘나디아만 아니었다면.’

클로드 카르테인은 후환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이작 달튼은 다양한 면에서 그에게 불합격을 받은 이였고.

그러니 나디아가 아니었다면 클로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를 치워버렸을 것이다.

물씬 치미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쯤, 두 사람의 곁으로 은색의 빛이 터졌다. 눈이 부실 정도의 밝기에 인상을 찌푸리던 것도 잠시, 빛과 함께 나타난 이를 확인한 클로드가 빠르게 표정을 바꿨다.

“루핀 골드게이트.”

“카르테인 공작님, 그리고 아이작 달튼이군.”

아이작의 이름을 부르며 지그시 그를 바라보던 루핀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법사 특유의 이질적인 눈으로 클로드를 마주한 루핀이 그에게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지금 잠깐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나디아의 일인가? 혹시 나디아가 루핀 그대에게…….”

루핀은 질문을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의 바닥을 힐끗 바라본 그가 조각난 목걸이의 일부를 회수하며 다시 클로드에게 말했다.

“누나는 지금 마탑으로 옮겨진 상태입니다.”

“마탑에 있는 게 아니라, ‘옮겨진’ 상태라고?”

“네. 짐작하신 대로 의식이 없어서요. 상태는 예전에 쓰러졌던 때와 비슷하군요.”

아주 잠시 아이작 달튼에게 시선을 주었던 루핀이 눈길을 거두고는 내밀었던 손을 재차 까닥였다.

“그러니 빨리 손을 주시죠.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니까.”

“알겠다.”

“그리고 아이작 그대는…….”

입을 다문 루핀과 다르게 두 사람을 지켜보던 아이작의 표정이 변했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굳힌 그가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전부였다. 어느샌가 다시 혼자가 된 공간 속에서 아이작이 눈을 감은 채 뒤로 고개를 젖혔다. 과격한 움직임에 흐트러진 코트 사이로 목걸이 하나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줄이 끊어진 사파이어 목걸이. 서약식 때 소피아 일라리아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 목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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