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정리하자면 서약식에서 일어난 일들이 단순히 소피아 일라리아의 사심 때문이 아닐 수 있다는 거군. 아이작 달튼이 그 일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고.”
“주웠다고 했던 목걸이를 주고받았던 점, 그리고 소피아 님과 이미 아는 사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예.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다만, 달튼 자작님이 왜 그랬는지와 제가 본 게 사실인지의 논란이 남겠지만요.”
클로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줄리엔이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타당한 질문이었다. 아이작 달튼이 굳이 나디아 골드게이트를 해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럴 이유가 있었다면 미리 방법을 궁리했을 거다. 그는 아주 오랜 기간 골드게이트 가문에서 일했으니까. 게다가 그가 나디아 골드게이트를 좋아한다는 건 클로드가 가장 잘 알았다.
“각하. 제가 본 게 맞는다고 한다면, 달튼 자작님이 이 일로 얻으시는 건 무엇일까요?”
“그럼 소피아 일라리아가 나디아를 적대했을 때 그녀가 얻는 건 무엇이지? 명예? 그도 아니면 사랑이었나?”
상체를 당겨 앉은 클로드가 가만히 입매를 비틀며 줄리엔의 질문에 답했다.
“줄리엔, 사람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동기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건 너도 알 텐데.”
“그건… 그렇지만요.”
“네 기억이 온전하지 않을 가능성? 기묘한 찝찝함? 당연히 있겠지. 그를 위한 조사도 진행해야지.”
“…….”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가 이 일로 뭘 얻는지가 아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당장은 중한 일이 아니야. 중요한 건 그가 나디아의 ‘주치의’라는 점이지.”
그것도 골드게이트 가문의 사람들에게는 신임을 얻은 주치의.
클로드가 한 말의 무거움을 잘 알고 있는 줄리엔이 꾹 입술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클로드가 미간을 좁혔다.
“나디아의 상태가 부쩍 이상해졌다. 건강에는 별 이상이 없다고는 하지만 말이 안 돼.”
“그렇다기에는 아프신 정황이 너무 많이 드러나니까요.”
“그렇지만 만약 ‘주치의’가 작정하고 뭔가를 꾸몄다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특히나, 나디아의 증세가 서약식 이후 갑자기 나빠진 거라 더욱 의심할 만해.”
그 전까지는 나디아에게 따로 아프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그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고. 그러니 분명 일이 일어났다면 근래에 생긴 변화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그 영양제 같은 거.’
클로드가 눈썹을 까닥이며 노란색의 영양제를 떠올릴 때쯤, 줄리엔이 지극히 현실적인 말로 그의 상념을 깼다.
“그렇다면 단순히 나디아 님의 건강이 위험한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모든 정황을 파악하고 작은 것 하나까지 확인해 볼 의사가 필요하군요. 저희가 하는 말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래요. 가령…….”
“에이포드 짐머 같은.”
“에이포드 같은 의사가요.”
같은 결론을 내린 두 사람이 조용히 시선을 나눴다.
“그럼 저는 지금 이 순간부터 약차를 비롯해 달튼 자작에게서 받은 약을 전부 올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에이포드 짐머에게 상황을 전달하는 것도 부탁하지.”
“네,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걱정이네요. 나디아 님께 주치의 변경을 말씀드리기에는 상황이 적절치가 않은 것 같아서요. 골드게이트 공작 내외께서 수도로 돌아가신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줄리엔의 눈에 걱정이 서렸다.
아이작 달튼이 소피아 일라리아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의심은 불확실한 부분도, 모순점도 있었다. 연결 고리 또한 어딘가 비어있는 상태였고.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주치의로 세우라고 한다면 카르테인이 나디아의 손발을 자르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금껏 잘 지내오기도 하셨고 신뢰도 쌓이긴 했지만, 몸이 약할 때 느끼는 건 또 다르니까.’
어쩌면 감정적인 문제가 상태의 악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 수도 있다. 향수병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줄리엔이 여러 문제를 고려하던 찰나, 클로드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건은 내가 이야기하지. 나디아는 벌써 잠들었나?”
“아…….”
언제나처럼 담담한 클로드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긴, 카르테인 공작이 이런 문제를 모르고 있을 리가 있나.
마음을 가다듬은 줄리엔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아마 그러셨을 겁니다. 이르게 잠자리에 드셨으니까요. 내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말을 꺼내보시는 건 어떠실지요? 식사도 독려하실 겸.”
“그럼 그냥 얼굴만 보고 오는 거로 하지. 내일 식사는 알아서 준비해.”
“예, 각하.”
고개를 숙인 줄리엔을 뒤로한 채 클로드가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에는 그새 어둠이 깔려 있었다. 겨울이 빠르게 찾아오는 북부의 특성상 해가 짧아진 탓이었다.
군데군데 놓인 촛불들과 마법구를 본 그가 고요하기 짝이 없는 복도를 걸어갔다. 홀로 울리는 발소리 덕분에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나디아에게서 가장 쉽게 반응을 끌어낼 방법은 역시 사실을 말해주면서 감정을 덧붙이는 것이겠군. 질투나 불안 같은 것들을.’
그렇지 않아도 풍부한 표정이 이런 감정을 내비칠 때면 배는 풍부해지니 말이다. 물론, 좋은 결과만 기대하지는 않았다.
‘내 말이 질투에서 비롯된 망상으로 들릴 가능성? 충분히 있다. 시답잖은 집착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
하지만 여러 경험을 통해 그가 뼈저리게 알아낸 것은 모든 일에는 확실함보다 불확실함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확실함을 쫓다 무언가를 놓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불확실함의 위험 부담을 지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고.
‘후회의 대상이 나디아 골드게이트라면 더욱 그렇겠지.’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질투냐며 말을 가볍게 받아들인들 뭐가 문제지? 그냥 그렇다고 하면 된다. 아이작 달튼이 그의 눈에 거슬리는 것도 사실이니 말이지.
집착? 그것 또한 썩 틀린 말이 아니다.
누차 말하지만, 그는 나디아 골드게이트라는 유일무이한 이를 옭아매고 싶은 사람이니까.
대충 생각을 정리한 그가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는 익숙한 계단을 걸어 올라가던 때였다.
―콰당!
열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금색의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분명 이르게 잠자리에 들었다던 나디아였다.
“나디아?”
혼자 작게 중얼거린 그가 나디아를 다시 부를 새도 없이, 방에서 나온 그녀가 정신없이 복도를 내달렸다.
어둠에 가려진 탓인지, 아니면 그럴 정신이 없는 것인지 나디아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 그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목적지를 정한 사람처럼 빠르게 달리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클로드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맨발?’
슬리퍼조차 신지 않은 맨발로 달리던 나디아가 갈림길에서 잠시 멈칫했다. 한쪽은 그의 침실이 있는 곳이었고, 다른 한쪽은…….
클로드의 미간이 조금 더 짙게 찌푸려졌다. 침실이 있는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가 도로 돌아오는 그녀의 뒷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 탓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재촉하려던 순간, 나디아가 벼락에 맞은 것처럼 자리에 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침실의 반대편으로 뒷걸음질을 치다 다시 달음박질했다.
한밤중의 괴이한 현상에 당황하기도 잠시.
―쾅! 쾅쾅!
“아이작, 아이작!”
“…누구… 나디아 님?”
“아이작. 나, 나는… 그러니까, 난…….”
“나디아 님, 나디아. 쉬이, 쉬. 숨 쉬어요. 괜찮아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아이작에게 매달리는 나디아와 그런 그녀를 끌어안아 다독이는 아이작의 모습에 클로드의 주황색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더 정확하게는 복도에 서 있던 그와 우연히 눈을 마주친 달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옅게 눈웃음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디아를 안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는 게, 꼭 그는 끼어들 수 없을 거라고 단언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니야! 난, 나디아가… 그게 아니라, 너무 무서워서. 꿈이, 루핀이……. 나는, 이게… 나도 이런 걸…….”
“잘 알겠습니다. 내 아기 고양이, 진정해요. 전부 괜찮아요, 정말로. 저를 믿으세요.”
보란 듯이 아이작이 내뱉은 말에 불현듯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나를 아기 고양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내가 쓰러져 있는 사이에 머리맡에서 내 마음이 찢어진다, 나의 아기 고양이. 이런 말을 속삭인 거 공작님 아니었느냐고요.’
‘그 말을 한 게 아이작 달튼이었군.’
클로드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당연한 일이었다. 클로드를 바라보는 아이작의 녹색 눈이 이번에는 그가 멋대로 자신을 밀어낼 수 없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이 결국,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가장 힘들 때 돌아갈 곳은 클로드 카르테인이 아니라 아이작 달튼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이기도 했고.
‘꿈. 꿈이라…….’
나디아의 횡설수설을 들은 클로드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 하도 세게 쥔 탓에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찍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눈앞의 광경을 모조리 눈에 담았다.
작은 소리 하나, 몸짓 하나까지 전부 다. 기민한 감이 그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왔다.
‘나디아 골드게이트에게는 내가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 있어.’
아이작 달튼은 허락하지만, 클로드 카르테인은 들어갈 수 없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그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를 세게 악물었다. 줄리엔의 보고와 아이작 달튼, 그리고 나디아.
클로드는 본능적으로 이번 일을 피할 수 없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일이 진행되는 방향에 따라 그와 나디아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
그렇게 판단한 클로드가 두 사람에게서 몸을 돌렸다. 일전에 나디아가 쓰러졌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일종의 작전상 후퇴였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여유로운 척 웃을 수 있었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웃을 수 없다는 것. 클로드의 발걸음이 훈련장으로 향했다. 손이 검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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