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그럼요.”
반사적으로 지은 웃음이 무거웠다. 점점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해 애써 노력했다. 다행스럽게도 네펠리 영애는 이런 내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역시 기억하시는군요. 하긴, 그때 저희가 좀 혼났어야지요.”
살짝 입을 가리며 웃는 영애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몰래 담을 넘은 것도 그렇고, 그 뒤로 떠돌이 마법사에게 거액의 돈을 주며 정체 모를 마법을 건 것도 그렇고요.”
“…….”
“덕분에 당시 마탑주까지 초청해서 목걸이에 다른 문제가 없는지, 안전한 마법이 맞는지 확인까지 했었죠. 너무 어렸을 적의 이야기라 목걸이는 잃어버렸다고만 생각했는데, 우연처럼 발견했지 뭔가요.”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떠돌이 마법사가 건 마법 덕분일지도 모르겠어요. 왜, 그때 그 사람이 그랬잖아요. 이 목걸이에 건 마법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도 목걸이가 주인을 찾아낼 거라고.”
“아…….”
나는 나도 모르게 손에 놓인 로켓 목걸이를 문질렀다. 오기 전에 열심히 닦아낸 것인지, 목걸이가 가진 금색이 깔끔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스치듯이 건드린 로켓 목걸이 뚜껑이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로켓의 안에는 어린 나디아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렇게 보는 것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또렷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펠리 영애는 작게 탄성을 지르며 예전의 내 모습을 구경했다. 오랜만에 보는 옛 사진이라며 가까이 머리를 맞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손끝이 약하게 떨렸다.
“…하나도 몰랐네.”
이런 일들이 있었는지.
희미하게 툭 내뱉은 혼잣말 때문인지, 네펠리 영애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네? 방금 뭔가 말하지 않으셨나요?”
나는 빠르게 감정들을 삼키며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너무 오랜만의 추억들이라 저도 모르게.”
“그렇죠! 저도 다락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는 한참 여운에 젖어 있었답니다. 나디아 님과 교환했던 제 로켓 목걸이도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분명 골드게이트 공작가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나중에 저도 한번 찾아볼게요.”
나는 지킬 수 없을 확률이 높은, 말뿐인 약속을 건네며 약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신물이 올라와 목 주위가 홧홧했다. 도무지 안 되겠다. 나는 작게 목을 가다듬고 네펠리 영애에게 양해를 구했다.
“네펠리 영애, 정말 미안한데 제가 아직 몸 상태가 온전하지가 못해서…….”
“아! 혹시 어지러우세요? 시녀장이나 자작님을 불러드릴까요?”
“아뇨, 아뇨. 괜찮아요. 그저 한숨 자고 일어날까 싶어서요. 기껏 찾아와 줬는데 티타임이 너무 짧아서 미안해요. 저녁에 다시 말할까요?”
“뭘요. 저녁에는 공작 각하와 프리지아 님, 두 분과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실 것 같으니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저희한테는 앞으로 이야기 나눌 시간이 잔뜩 있잖아요.”
장난스러운 말투로 인사하는 그녀를 향해 나는 가볍게 긍정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애 앞에서 내 모습을 모조리 보여줄 만큼 고삐가 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방 밖으로 나서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다 질끈 눈을 감았다.
네펠리 영애의 몸에서는 비누 향이 났다. 코끝이 시큰해질 정도로 좋은 향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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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이상하다.’
서약식을 마치고 며칠 후, 그게 눈을 뜬 나디아를 보며 클로드 카르테인이 내린 결론이었다.
클로드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총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단연 나디아의 행보였다.
나디아는 서약식을 치른 이후, 단 한 번도 본인의 의지로 방 밖을 나온 적이 없었다.
에이포드와 타냐를 찾아가 사업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는 일도, 레티시아를 찾아가는 일도, 또 헤르잔과 온천수를 파는 문제를 논의하는 일도 없었다.
‘나디아는 그냥 서약식 이후로 조금 피곤해서라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바깥으로 펑펑 돈을 쓰고 다니느라 지쳐서 집에서는 쉴 거라고 공언했을 때조차도 공작가에서는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던 그녀가 아닌가.
‘오죽했으면 헤르잔이 나디아의 상태를 물어봤을까.’
처음에는 정말로 몸이 안 좋은 줄 알았다. 서약식에서 직접 눈으로 봤던 모습도 그랬고, 아이작 달튼의 말마따나 함께 복용하면 안 좋은 음식을 먹은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나디아의 몸에는 정말로 아무런 이상이 없었어.’
그게 두 번째로 이상한 부분이었다. 아이작 달튼의 진찰을 믿을 수 없어 다른 의사에게 재차 확인해도 돌아오는 답은 하나였다.
‘나디아 골드게이트의 몸은 다소 연약할지언정 아픈 곳은 없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나디아는 클로드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으나, 그의 눈썰미를 속일 수는 없었다.
나디아는 때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구역질을 하기도 했고, 자주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리가 자주 아프다는 뜻이었다.
창백한 얼굴과 그늘진 눈, 그리고 버석한 입술은 이 모든 게 그녀의 일상을 좀먹고 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가장 이상한 건 걱정을 하면서도 이 상황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골드게이트 공작가와 나디아의 태도다.’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린 클로드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나디아가 눈에 보이지 않자 이상함을 느낀 카르테인의 사람들과 달리, 골드게이트 가문의 사람들은 이 상황이 익숙해 보였다.
그러니까,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첫 번째 이유를 그들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상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디아는 명백하게, 그리고 점점 더 노골적으로 골드게이트 가문의 사람들을 피하고 있고.’
무엇 때문에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 근래 들어서는 자신에게도 벽을 세우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건 클로드에게 있어 절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클로드 카르테인은 나디아 골드게이트라는 인생의 기적을 놓아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미 그는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그녀가 자신의 유일한 답이자 길이라는 걸 확인했다. 이 감정이 점점 더 깊어지면 깊어졌지, 희미해질 리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답지 않게 질투 같은 같잖은 감정까지 모조리 내어놓았는데, 이토록 자신을 헤집어 두고는 멋대로 떠나가겠다고?
‘그건 안 되지.’
나디아의 이유 모를 거리 두기 속에서도 클로드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디아를 볼 때처럼 그녀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이를 보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는 건 아니지만, 클로드에게는 결국 나디아가 그녀의 모든 걸 보여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자신이 그랬듯이.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클로드의 예리한 신경이 집무실 앞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발걸음이나 기운 등을 생각하면 줄리엔인가.’
―똑똑
“각하, 줄리엔입니다.”
“들어와.”
의자에 몸을 기댄 상태 그대로 허락의 말을 떨군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줄리엔을 바라보았다.
익숙하게 클로드의 앞에 선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디아 님에 관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요.”
“나디아에 관해?”
“네.”
나디아에게 말을 걸 때와는 다르게 바로 본론부터 꺼낸 그녀가 기억을 더듬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음, 아니군요. 나디아 님과 관련된 사항은 맞지만 정확하게는 달튼 자작님과 관련해서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는 겁니다.”
“말해 봐.”
“그 목걸이 말입니다. 소피아 님이 자작님의 수첩 일부를 훔칠 때 떨궜다는 목걸이. 서약식에서 봤을 때부터 낯이 익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거기까지 말한 줄리엔이 잠시 말을 멈췄다. 어디에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이 이야기를 말씀드리려면 신의 분노 사건 때로 시간을 조금 돌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신의 영역에서 약혼을 발표하기로 한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터라 나디아 님께 보고를 드리려다가 나중으로 미뤄두었습니다만… 달튼 자작님과 소피아 님이 만나는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봤다고? 그럼 서약식에서 말한 것과 다르게 두 사람이 만난 장소가 나단의 도서관이 아니라는 건가?”
“아뇨, 도서관이 맞습니다. 제가 그날 빌릴 책이 있어 도서관을 들렀다가 본 거라서요. 수첩을 두고 이야기를 한 것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두 가지가 있죠.”
클로드의 눈을 또렷하게 마주한 줄리엔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나는 신의 분노가 있을 당시에는 나디아 님과 소피아 님의 접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약식에서 말한 ‘그때도 나디아 님의 안부를 물었다.’라는 말은 시간상으로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끊어진 목걸이를 주웠다는 말과 다르게 제 기억 속의 두 사람은 목걸이를 주고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나디아 님께 여쭤보려고 했었거든요. 혹시 달튼 자작님이 북부에 아는 사람이 있으신지요.”
그때는 이게 이렇게 큰 문제일 거라 생각도 못 했지만요.
줄리엔의 말을 들은 클로드가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그의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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