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 아빠의 말이 먼저 떨어졌다.
“기분이 묘하더구나. 잠시 예전 일이 생각나서 말이야.”
“아…….”
입에서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내 탄식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아빠가 주무르고 있던 손을 한 번 꼭 쥐고는 입을 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직접 보기까지 했으니까.”
“직접 봤다는 건…….”
“서약식 말이다.”
거기까지 말한 아빠가 잠시 말을 멈췄다. 작게 일렁이는 촛불이 그의 표정을 조금 더 부드럽게 전해 주었다. 진중하게 나와 눈을 마주하며 아빠가 말했다.
“서약식에서 사람들 앞에 선 너를 보고 있자니, 아르웬이나 네펠리 영애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더구나.”
“…….”
“어쩌면 우리가 너를 아끼는 마음이 앞서, 눈을 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래서 네가 잠든 사이 시녀장의 도움을 받아 네가 일궈 낸 것들을 직접 체험해 보기도 했지.”
급하게 마련한 거였다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면서 아빠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특히나 꽃향기가 나는 비누가 좋았다고 말을 덧붙이면서.
꿈에서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또다시 익숙하면서 낯선 기분이 몰려와, 나는 아빠가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만약 이게 게임이었다면 나는 여기에서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을 거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멈추고 더는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았을 테지.
“자신이 발견한 가치를 훌륭히 이끌어낸 모습이, 방해가 있어도 굴하지 않는 모습이 눈이 부실 지경이었어. 골드게이트의 자랑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이곳은 게임 속이 아니었고, 아빠, 아니, 데릭 골드게이트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 능력도 없는, 빙의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뿐이었다. 장황하게 딸에게 애정을 표현한 그가 손에 꼭 힘을 주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하긴, 네가 누구 딸인데. 그렇지?”
‘우리 누나는 어디 있어?’
양쪽 귀에서 들리는 전혀 다른 목소리에 나는 습관처럼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았다.
카르테인 공작이 보고 싶었다. 이전의 나디아 골드게이트를 알지 못하는 그가.
* * *
어떻게 대화를 나눴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뭐라고 웃으면서 말하긴 했는데 말이다.
고맙다는 말과 피곤하다는 말로 아빠와의 대화를 정리한 나는, 그 뒤로도 비슷한 방식으로 두 사람을 어떻게든 피해 다녔다.
노골적인 움직임이긴 했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라 어떻게든 이 모든 상황을 넘길 수는 있었다.
“줄리엔, 나 약차.”
“벌써 다 드셨어요? 약차를 새로 우려서 드린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냥, 몸이 무겁길래. 약도 아닌 차니까 편하게 마셔도 되지 않아?”
“으음, 네…….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어딘가 찜찜하다는 듯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녀가 찻잔을 들고 방을 나섰다. 나는 줄리엔이 방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다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진짜 피곤하다.’
점점 증상이 심해져서 에이포드에게 찾아갔더니, 서약식 때 갑작스럽게 일거리가 늘어난 탓에 시간이 아주 조금 더 걸릴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진료는 해 주었는데, 역시나 건강에는 별 이상이 없다는 말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 증상이 부모님과 네펠리 영애가 여기에 있어 내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인지, 아니면 내가 요새 한동안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아니. 결국, 잘 못 쉬는 것도 그 꿈 때문이니까 비슷한 건가.’
요즘은 꿈만 꾸면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듣는 것 같았다. 대상은 매번 바뀌었다. 때로는 아르웬 언니이기도 했고, 또 때로는 부모님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똑똑
“응, 들어와.”
“나디아 님.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네펠리 영애이기도 했다. 네펠리 영애도 양반은 못 되는구나. 우아하게 방으로 들어오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오히려 내가 미안하죠. 북부에 머물러 달라고까지 말해 놓고 막상 자주 만나지도 못했는걸요. 제가 챙겼어야 했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저는 괜찮답니다. 나디아 님의 건강이 제일 우선이에요. 게다가 저희는 오래 보아 왔던 사이잖아요. 어떤 마음으로 제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답니다.”
“……그렇죠.”
나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느릿느릿 그녀의 말에 답했다.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에 슬쩍 손으로 가슴께를 누르기도 했다.
그래도 네펠리 영애는 그간 교류한 게 있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녀에게 남아 달라고 부탁을 한 게 잘한 일이었을지 고민하던 와중, 네펠리 영애가 빙긋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시 말을 걸었다.
“오늘 이렇게 나디아 님을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내일 골드게이트 공작님께서 수도로 떠나실 때 저도 잠시 함께 수도로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려고요.”
“아, 당연히 다녀오셔야지요. 무턱대고 남아 달라고 부탁을 드린 건 제 쪽인걸요. 그리고 네펠리 영애, 만약 제 부탁 때문에 일이 너무 복잡해지면 편하게 부탁을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정말로.”
“아하하! 상냥하시긴.”
진지하게, 반쯤은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을 섞어 꺼낸 말에 네펠리 영애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빠가 내게 지어 보였던 것과 퍽 비슷한, 다정한 웃음을 지은 그녀가 머리카락의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부탁을 수락한 건 저니까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게다가 내일 수도로 돌아가는 건, 개인적인 용무를 처리하러 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제 사심이 들어있죠.”
“사심?”
“영애도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은 예술과 학문에 일가견이 있죠. 그래서 에스텔 님이 선물로 주신 비누를 가족들에게 선보이려고 올라가려는 거예요. 분명 반응이 좋을 것 같아서요.”
샐쭉 눈웃음을 지은 그녀가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반응이 좋다면, 제가 제 이름으로 나디아 님께 요청을 하나 드리려고 해요.”
“음, 요청이라면?”
“듣자 하니, 이번에 그렇게 무수히 많은 투자자가 몰려왔는데도 모조리 거절하셨다고요. 그 투자, 저한테만 살짝 열어 주실 수 있을까요? 북부에서 수도 쪽으로 진출할 때 제가 나디아 님의 사업권을 제일 먼저 따내고 싶거든요.”
“투자…….”
“아, 물론 나디아 님의 부탁을 이런 이유로 수락한 건 아닙니다. 그건 오랜 친구로서 순수한 제 마음이에요. 그러니 제안 역시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후보자 싸움에서 유리해지다 보니 욕심이 조금.
뒷말을 작게 속삭인 그녀가 도도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나중에 제 제안을 한 번은 검토해 주세요. 정말 좋은 조건으로 제안드릴게요.”
나는 네펠리 영애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수도로 진출할 때 누구를 연결책으로 쓸까 고민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나 역시 좋다.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좋죠. 저희 가문 이름으로 진행하는 것도 괜찮지만, 역시 이런 건 처음에 밀어주는 힘이 클수록 더 좋으니까요.”
“누구나 한 번씩은 탐낼걸요? 마탑과 신전도 개입이 되어 있고, 상품 자체도 정말 좋았거든요. 특히나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향이 퍼져서, 기분이 정말 좋았거든요.”
“네펠리 영애도 사용해 보셨나요?”
“네, 저는 명물이라던 레티시아도 방문했답니다. 직접 몸을 담근 온천은 레티시아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레티시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지요.”
익숙한 이야기가 나오자 불안감으로 두근거렸던 심장이 다시금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내일이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이들이 모두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게 나를 달랜 요소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다시 네펠리 영애가 돌아올 때면 지금보다는 상태가 나아져 있겠지 싶어서.
어느샌가 줄리엔이 마련해준 약차를 홀짝이며 나는 네펠리 영애의 말에 집중했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수도의 다른 영애들과 관련된 이야기나, 그동안 네펠리 영애가 후계자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노력했던 이야기는 정말 흥미로웠다.
한동안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던 그녀가 아, 하는 작은 탄성과 함께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자마자 물어본다는 게 또 깜빡했군요. 나디아 님, 혹시 각하나 공작부인께 ‘보물’에 관련된 이야기 들으셨나요?”
“보물이요?”
느슨해진 기분으로 그녀의 말을 따라 하던 찰나, 일전 부모님에게 들었던 말 하나가 떠올랐다.
‘아, 네펠리 영애가 조만간 연락을 달라고 하더구나. 다락에서 어릴 적 ‘보물’을 찾았다면서.’
맞다, 보물. 내가 왜 이걸 잊고 있었지?
일순 머릿속으로 찬물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금 팽팽하게 조여오는 긴장감을 느끼며 천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었어요. 연락을 달라고 하셨다고…….”
“들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들고 왔거든요. 물론 다시 돌아올 테지만, 수도로 가기 전에 드리고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어요.”
가볍게 웃음을 흘린 그녀가 품에서 꺼낸 것은 작은, 금색의 로켓 목걸이였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목걸이는 어릴 적 보물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내게 목걸이를 건넨 네펠리 영애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나는 모르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릴 적에 우정의 증표라고 서로 목걸이를 교환했었잖아요. 당시 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했던 떠돌이 마법사가 찾아왔다는 말에 몰래 손을 잡고 담을 넘기까지 했지요. 기억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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