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축하와 즐거움으로 끝났어야 할 서약식을 이렇게 마무리 짓게 되어 내가 다 창피하군. 나벳 님께도 면목이 없습니다.”
에스텔의 말에 대신관이 고개를 숙여 괜찮다는 걸 표했다.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받은 그녀가 대신관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사죄의 의미를 담아 한 달간 신전에서 사용하는 모든 성수의 비용은 카르테인이 대겠습니다.”
“모든 비용을 말입니까? 오늘 일 때문이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정 마음이 불편하시다면, 카르테인에서 신전에 드리는 헌금으로 생각해 주시지요.”
“음.”
대신관 쪽을 향하던 몸을 살짝 튼 그녀가 담담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아니, 이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선물을 드리는 게 좋겠어. 오늘 공개한 비누 정도면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 같은데. 아, 물론 대신관님과 황태자 전하께도 선물하겠습니다. 나디아, 그대의 생각은 어떻지?”
공작 부인이 허락을 구하듯 나를 바라봤다. 비누를 선물하는 건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오늘 선공개도 잘 끝났고 이후 홍보 효과를 생각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허락이 떨어진 이후로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옅게 미소를 지은 채 내 어깨를 손으로 문지른 그녀가 나와 클로드 대신 빠르게 서약식을 정리한 덕이다.
“놔! 놓으라고!”
나는 기사들에게 잡혀 발버둥 치는 헤링본 자작과 심각해 보이는 일라리아 백작 부부를 바라보다 그대로 몸을 돌렸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넘어질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붙들었다.
“나디아.”
“공작님.”
서약식의 주도권을 넘기자마자 달려온 듯한 클로드 카르테인이었다. 할 말이 많은 사람처럼 작게 입술을 달싹인 그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은 채 그저 강하게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힘들면 기대도 좋다는 표시였다.
나는 그의 호의를 한껏 받아들이며 클로드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작님, 저 잘했죠.”
“나디아.”
“빨리 잘했다고 해요.”
장난스러운 조름에 잠시 나를 지켜보던 그가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러고는 나를 따라 옅게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했습니다.”
엎드려 절받기에 성공한 내가 씩 미소를 짓고 있던 찰나, 헤르잔과 무언가를 상의하던 줄리엔이 나와 클로드를 보고는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딘가 심각한 표정으로 온 그녀가 입술을 앙다물고 클로드에게 입을 열었다.
“각하, 일전 신의 분노 사건 때 제가…….”
“줄리엔, 나중에.”
줄리엔의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였을까? 카르테인 공작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눈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우선은 나디아를 방으로 옮기고 싶군.”
“아.”
그의 말을 들은 줄리엔이 내 상태를 보고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걱정이 잔뜩 어린 표정으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 * *
‘누나.’
이상하게 눈앞이 흐렸다. 나는 선명한 목소리와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 슬쩍 미간을 좁혔다.
‘여긴 어디지? 나 분명 조금 전에 서약식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굉장히 낯선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몸이 흠칫 떨렸다. 아무리 눈을 깜박여도 흐린 시야는 변하지 않았다. 생생하게 들렸던 목소리조차 멀게 느껴질 때쯤, 다시금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누나.’
나는 보이는 게 없는데도 고개를 휙휙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아니, 누가 자꾸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건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해 한숨을 쉬는데, 눈앞에 희미하게 사람의 형태가 비쳤다. 사람이라고 짐작만 될 뿐 여전히 흐린 형상이었다.
‘누나.’
조금 더 선명하고, 또 익숙한 목소리였다. 누구인지 얼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흐릿한 형상에 한 발짝 다가갔다.
아무래도 맞는 거 같은데. 나는 흐린 눈을 마구 비비고는 조금 더 자세하게 그 사람을 살폈다. 이번에는 상대방 측에서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 루핀 맞는구나.’
큰 키와 마른 체형, 은발에 금안. 낯선 공간에 홀로 있어 긴장했던 몸이 조금 풀렸다. 내 몸을 구석구석 살피는 시선이 익숙했다. 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어 나를 불렀다.
‘누나.’
‘응, 왜?’
‘나디아 누나.’
아니, 얘가 왜 이래? 불렀으면 이유를 말해줘야지, 왜 계속 이름만 부르고 있어. 더는 참을 수 없어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순간, 루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누나는 어디 있어?’
‘뭐?’
일순 루핀의 얼굴이 가깝게 느껴졌다. 미동 없는 금색의 눈이 나를 내리누르듯 응시했다.
그가 한 말을 이해하기도 전, 그가 무감정한 말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누나는 진짜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아니잖아.’
‘……!’
루핀의 금안에 은색 빛이 물씬 맴돌기 시작했다. 나는 저 색이 뭘 뜻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마탑주가 내 영혼을 꿰뚫어 볼 때와 엇비슷한 그런 눈빛.
무감하던 루핀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일렁이는 걸 보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느낌만은 아니었다. 콱 조여오는 가슴을 절로 부여잡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차갑게 식어가는 손끝을 애써 문질렀다.
루핀의 시선은 눈 깜박임 없이 오롯이 내게 멈춰있었다. 그게 빙의자인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아서 나는 차마 그에게서 시선을 피할 수조차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선명하게 보였던 시야는 다시 흐릿해진 지 오래였다. 손가락이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몸도 잘게 떨고 있나 보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가운데, 나는 입술을 짓이기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
‘나, 난.’
그러니까.
“루핀, 나는……! 흐으, 헉!”
“나디아!”
상체를 벌떡 일으키자, 차가운 공기가 단숨에 폐를 가득 채웠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여러 번 깜박이면서 힘겹게 주위를 눈에 담았다. 어두운 방, 유일한 빛은 옆에서 빛나는 촛불뿐이었다.
“여기, 여기는 어디……. 나, 내가.”
“나디아.”
낯익으면서도 낯선 공간이 당황스러웠다. 뭐가 진짜인지 몰라 눈만 굴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따뜻한 손길과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날 다독였다.
“괜찮다. 다 괜찮아.”
“…클…로드?”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이름을 입에 담으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주황색이 아닌 진한 푸른색의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풀어지는 듯했던 심장이 다시금 벌렁거렸다.
“누……!”
“쉬이. 나디아, 아가. 괜찮다. 진정해.”
단박에 내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낀 이가 쉬이,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재차 불렀다. 나는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비명을 삼키고는 눈앞의 사람을 자세히 살폈다.
“아… 아빠?”
“그래. 이제 좀 정신이 드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어 봐라.”
아르웬 언니와 꼭 닮은 푸른색 눈동자가 걱정으로 넘실거렸다. 그제야 겨우 숨이 트였다.
나는 아빠의 말을 따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미친 듯이 널뛰었던 심장 박동이 겨우 잦아들었다.
아빠는 내가 진정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약차를 내게 건넸다.
“한 김 식혀 두었으니 괜찮을 거다.”
“…감사합니다.”
잔을 받는 손이 살짝 떨렸다. 따뜻한 약차가 날카로웠던 신경을 가라앉혔다. 나는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는 느릿하게 눈을 굴렸다. 낯설게 느껴졌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거 꿈이었구나.’
나는 끔찍했던 기분을 뒤로 미루고는 천천히 남아있는 기억을 더듬었다.
‘서약식…은 잘 끝났지.’
소피아 일라리아와의 일이나 헤링본 자작의 소란은 다 정리가 되었다. 비누와 성수의 선공개 또한 무탈하게 잘 마무리되었고.
‘모든 게 끝난 걸 보고 방으로 왔다가 짧게 인사를 나누고 잠들었지.’
그래, 그랬다. 익숙한 현실을 되짚고 나니 그제야 좀 안심이 되었다.
“후우.”
절로 긴 한숨이 나왔다.
정말로 끔찍한 꿈이었다. 아직도 꿈을 생각하면 기분 나쁜 끈적함이 온몸을 휘감는 기분이었다.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을 때였다.
“다행히 열이 나지는 않는구나.”
이마 위로 아빠의 커다란 손길이 느껴졌다.
“아…….”
“달튼 자작이 아픈 게 아니라 피로가 쌓여서 그런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나나 네 엄마나 마음이 영 놓여야 말이지.”
조용한 방 안에서 다정다감한 말이 울리자 나는 고장 난 인형처럼 그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엄격하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다정한 눈빛과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따뜻한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상했을 게 뻔한 내 상태에 대해서는 입 한번 벙긋하지 않는 아주 익숙한 배려에 다른 의미로 심장이 덜컥거렸다.
“나디아.”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부른 아빠가 반쯤 마신 찻잔을 치우고는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한 차 덕분에 데워진 손을 익숙하게 주무르면서 그가 가만히 나를 눈으로 훑었다.
혹시라도 아픈 곳이 없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눈을 뜬 이후, 틈이 날 때마다 가족들이 해주던 익숙한 행동을 보자 본능이 내게 말을 걸었다.
“잠을 자는 너를 옆에서 보며 느낀 건데 말이지.”
“…….”
지금 저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들으면 분명 후회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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