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입을 다문 소피아가 반사적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가 흠칫 몸을 움츠렸다. 무감정한 클로드의 시선 때문인 것 같았다.
당황스러운 듯 잠시 가슴께를 꼭 쥔 그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아이작의 말에 반박했다.
“저는 아닙니다! 그것 또한 곡해예요! 저는 그저 구역을 나오는데 바로 앞에 자작님이 계셔서 당황했을 뿐이에요.”
“그토록 심하게요? 게다가 부인, 저는 아무런 증거 없이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아닙니다.”
“증거요?”
미간을 좁힌 소피아의 표정을 바라보며 아이작이 옷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줄이 끊어진, 큼직한 사파이어가 박힌 목걸이였다.
“노트를 주우려고 바닥을 보니 목걸이 하나가 떨어져 있더군요. 선반의 하단, 고정을 위해 박아 둔 갈고리에 걸려 줄이 끊어진 것으로 보이는 목걸이가요.”
“…….”
“그 목걸이에는 부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끊어져 떨어지는 소리가 컸을 텐데, 듣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목걸이의 뒷면, 고급스럽게 새겨진 이름을 보이자 소피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이작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다시금 강하게 그녀를 압박했다.
“무엇 때문입니까.”
“전, 저는…….”
“너무 무례하신 거 아닌가요? 사람들의 눈이 많아 누구든 당황할 상황에서 소피아 님을 몰아붙이시다니! 목걸이가 떨어진 게 뭐 어때서요?”
그때, 소피아의 뒤에서 낯익은 영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높이며 나선 이는 일전 백작가에서 봤던 어린 영애였다.
‘이름이 크리스틴이었나. 그때도 성질을 못 죽이고 경솔하게 입을 열더니, 이번에도 나설 자리를 파악하지 못하네.’
하지만 늘 그렇듯이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결과를 모르고.
그건 눈앞의 어린 영애도 똑같았다. 크리스틴은 주위의 시선이 꽂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작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선반 아래쪽에 있는 책을 꺼내다가 그랬을 수도 있잖아요. 수첩을 주워주려고 했던 걸 수도 있고요!”
“영애.”
“결론을 정해두고 끼워 맞추려는 것 같아서 저는 이 상황이 불쾌하군요!”
불쾌? 지금 내 앞에서 불쾌를 운운한 거야?
그렇지 않아도 저조했던 기분이 그 말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일전 백작가에서는 별거 아니라는 듯 넘겼던 상황을 그저 넘기지 못하는 걸 보면, 확실히 신경이 예민해지기는 했다.
‘아니, 예민은 무슨. 지금 쟤가 하는 행동은 날 무시하는 처사인데.’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 크리스틴을 쏘아보았다.
“불쾌? 이곳에 불쾌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영애가 아니라 나겠지. 내 안위가 걸린 문제가 영애의 입에서 이토록 가볍게 다뤄지는데.”
잔뜩 날이 선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나를 아는 사람들의 눈이 조금 커진 모습이 보였다.
연회장은 크리스틴이 나설 때와는 다른 의미로 다시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다. 내가 입으로 내뱉은 말의 무게 때문일 거다.
크리스틴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선 나는 그대로 어린 영애를 내려다보았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바르르 떠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오늘부로 나는 카르테인 공작과 더불어 북부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어. 그러니 내 안위는 카르테인 공작의 안위만큼이나 중요해.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영애는 뭔가를 착각하는 모양이야. 일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
“이 제국에서 나보다 높은 이는 황가와 골드게이트 공작가의 가주뿐이다. 감히 이 자리에서 누구를 몰아붙이느냐 했지? 같은 말로 돌려주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차가운 시선으로 크리스틴을 찍어 눌렀다. 아르웬 언니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린 영애 한 명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병약해서 북부에서 버티기가 어려워? 곱게만 자라 왔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따위 흠집은 내가 가진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지극히 사소한 것에 불과한데. 병약해서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면 버틸 수 있도록 막대한 돈과 마법을 들여 모든 환경을 재구성하면 된다.
곱게만 자라왔다고? 헌터물도 아니고, 로맨스 판타지 세계관에서 뭘 얼마나 열심히 굴러야 자격이 생기는데?
‘이게 다 날 만만하게 본 거지.’
그렇게 나를 보는 건, 뭐. 그래, 가능한 일이라고 치자. 북부에 와서 보여준 모습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나를 생각해 함부로 행동한 대가는 치러야 했다.
“영애는 대체 뭘 믿고 가벼이 입을 놀리지? 그것도 카르테인 전대 공작 내외와 골드게이트 공작가의 주인이 모두 자리한 곳에서 말이야. 소피아 일라리아나 그대의 가문이 내 분노에서 그대를 보호할 수 있을 줄 알았나?”
“…….”
“아니면, 그대들의 눈에는 골드게이트 가문이 그토록 우스워 보였어?”
한참 지끈거리던 머리는 이제 말을 할 때마다 둥둥 울릴 정도였다. 그러나 기어코 치밀어 오른 분노가 그 모든 것을 잊게 했다.
나는 크리스틴을 노려보다 소피아 쪽으로 휙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일라리아 백작 부인, 그간 북부 사교계를 어떻게 이끌었길래 어린 영애들이 이렇게 품위 없이 제멋대로 날뛰는 건가요?”
“공녀님, 저는…….”
“아니면, 이들의 말이 사실은 부인이 하고 싶었던 말입니까?”
파리하게 질린 소피아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으려다 살짝 휘청거렸다. 아직도 일의 심각성과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몇 영애들이 화들짝 놀라 소피아를 두둔하듯 입을 열었다.
“소피아 님은 그저 공작님이 걱정되셨을 뿐이에요!”
“맞아요. 그저 확인을 해보려고 조금……!”
“걱정? 확인?”
클로드를 걱정해서 뭘 확인해?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말에 절로 눈썹이 움찔했다.
누가 누구를 무슨 자격으로? 게다가 어린 영애들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제 사심을 흘리고 다닌 건가, 소피아 일라리아는.
한참 주제넘은 언행에 헛웃음이 나던 찰나, 크리스틴이 눈을 질끈 감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 실제로 이번 일 때문에 공녀님이 영양제를 드셔야 할 만큼 병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잖아요! 저희한테 겉으로 말씀하셨던 거랑 다르게요! 그리고!”
“크, 크리스틴 영애!”
소피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랫입술을 꼭 문 상태로 크리스틴이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리며 소피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입 사이로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
크리스틴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을까? 모르겠지. 그러니까 소피아가 내게 수를 썼다는 사실에 힘을 실어주는 말을 저렇게 막 내뱉은 거겠지.
이미 몇몇 사람들이 심각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 연루된 사건인 이상, 이건 덮을 만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절반 정도는 여전히 아닐 거라 믿는 것 같지만.’
그건 또 그들이 추후 치러야 할 업보가 될 거다.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피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분함과 짜증이 섞인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순간 스치듯 그녀의 눈에 담겼다 사라졌다.
새로운 가면을 쓰듯, 얼굴 위로 죄책감 어린 표정이 드러나는 광경은 실로 놀라웠다. 빠르게 표정을 바꾼 그녀가 질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떨궜다.
“공녀님, 제가 경솔했습니다. 그저 주인 되실 분이 병약하시다는 소문이 걱정…….”
만약 그녀가 거기에서 말을 다 잇고 제대로 내게 용서를 구했더라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 거다. 처분은 받았겠지만, 지금의 험악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건져낼 수는 있었겠지.
다만 불행하게도, 상황은 그렇게 돌아가지 못했다.
“누님의 잘못을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누님께서는 각하를 오래 흠모하셨으니 예민하게 반응하셨을 수도 있지요. 뭐, 소문도 소문이거니와.”
눈치가 없는 건지 그만한 머리가 안 되는 건지, 헤링본 자작이 그녀를 감싸듯 말을 던져버린 탓이다.
“로드릭!”
“흠모?”
헤링본 자작의 말에 소피아의 표정이 기어이 일그러졌다. 더는 여기에서 일을 키울 수 없다는 듯 그녀가 다급하게 동생의 이름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복잡한 목소리로 작게 혼잣말을 읊조린 일라리아 백작의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자작의 말을 받아버린 것이다.
“아, 소문이라면 혹시 그 황태자 전하…….”
“황태자 전하?”
“그게 그러니까 공녀님이 전하와…….”
또다시 연회장이 술렁거렸다. 내가 돌발 행동을 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대체 몇 번째지? 이제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지긋지긋했다.
그렇게 생기긴 했다만, 헤링본 자작은 정말 제정신일까?
혹시 몰라 대비하면서도 진짜로 황태자 전하가 엮인 일을 수면 위로 올릴 줄은 몰랐지. 새하얘진 소피아의 표정을 보니 합의가 된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근데 왜 저 자식은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으로 백작 부인을 보고 있냐?’
팀 분열이냐? 뭐 이리 조잡해. 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피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제는 정말로 정리하고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나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서두를 뗀 바로 그 순간,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궁금하네요? 무슨 소문인데 이렇게 목소리를 줄여 소곤소곤…….”
“딱히 궁금해할 거 없다. 나와 영애가 은밀하게 만나는 사이라는 소문이니까.”
내 마지막 패가 좋은 타이밍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호쾌한 말투와 자신 넘치는 목소리. 금발의 훤칠하게 잘생긴 남자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자신에게 쏠린 무수히 많은 시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남자의 뒤로, 뒤늦은 소개가 이어졌다.
“그……. 제국의 떠오르는 태양이신 카를루스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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