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부축하듯 나를 붙잡은 그녀의 표정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눈빛과 다르게 그녀의 시선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훑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두 분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요.”
“나디아 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신 모양이에요.”
“전부 회복하신 게 아니셨나요? 그런데 일라리아 백작 부인의 드레스는 어쩌다…….”
“공녀님이 샴페인을 건네시다가 휘청이셔서…….”
“아, 세상에!”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보고 나니 알겠다. 소피아 일라리아는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는 것에 능숙한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이 주위에 어떻게 비치고,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겠지. 어쨌거나 눈앞의 이 그림이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건 자명했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꼭 그러쥐었다.
‘아, 진짜. 별일 없이 잘 끝내나 했는데.’
이의 제기 때 입을 꼭 다물고 있던 이유가 이거구먼.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우선 소피아의 손등 위로 손을 올렸다.
지금은 이 분위기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 부인.”
“네? 오해라니요?”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휘청인 것처럼 말씀하시길래요. 저는 괜찮답니다. 잠시 균형을 잃은 것뿐이에요.”
“하지만…….”
자세를 바르게 하고 미소를 지어 보이자, 소피아는 굳이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눈꼬리를 내린 채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건 도무지 내 말을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을 거라는 자신감이 엿보이기도 했다.
분한 건 사실이지만, 그럴 만했다. 갑작스럽게 상태가 무너지면서 일순 손과 발이 차가워지기까지 했으니까.
‘분명 안색도 별로 안 좋겠지.’
나는 몰래 입 안의 살을 깨물며 당장이라도 힘이 빠질 듯한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여기에는 보는 눈이 많다. 귀족들만 있는 게 아니라 서약식을 보기 위해 모여든 영지민들도 있지.
지금 소피아 일라리아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수는 없다.
나와 반대편 쪽에서 가신들과 대화를 나누던 클로드가 소란을 보고 빠르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표정이 굳어있는 게 괜한 걱정을 끼친 듯싶었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다시금 소피아 일라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나와 같이 클로드에게 닿아 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머리가 맹렬하게 굴러갔다. 우선은 그녀를 내게서 떨어지게끔 하고 싶었다. 기분 나쁘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차라리 긴장한 탓을 할까?’
서약식 때 한껏 자신만만하게 굴어놓고 인제 와서 긴장했다고 하면 신뢰는 조금 깎일 거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소피아 일라리아를 치우는 게 훨씬 나았다. 내 안정을 위해서도, 그리고 이 연회장의 분위기를 위해서도.
‘핑계 삼을 드레스가 있어서 어려울 것 같지는 않네.’
머릿속으로 괜찮은 대사를 고르고 있을 때쯤, 뒤에서 누군가가 등을 받치며 내 옆으로 서는 것이 느껴졌다.
알싸하게 톡 쏘는 향.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곁에서 부드럽고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글쎄요, 부인. 나디아 님의 주치의로서 저는 부인이 무엇을 바라는지 궁금하군요.”
아이작?
이 사람이 왜 여기에서 갑자기 이런 말을? 머릿속에 의문이 들어차기도 전, 소피아가 먼저 의아함이 가득 담긴 질문을 던졌다.
“네? 제가 뭔가를 바라다니요?”
그녀의 분홍색 눈이 순진무구하게 나와 아이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확인한 아이작의 표정에서는 평소의 다정함이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서늘하고도 단호하게 소피아를 마주한 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지금의 상황을 만든 건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시지 않습니까.”
나디아 님이 정말 아프신 게 아니라.
갑자기 떨어진 폭탄 같은 발언에 사람들이 별안간 웅성거렸다. 당연했다. 소피아 일라리아도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고 사건의 당사자인 나도 헉했는데, 누군들 놀라지 않겠어.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이작을 보다가 반사적으로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클로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클로드 카르테인은 내게 걸어오던 것을 멈춘 채, 그 자리에서 고요히 의사 선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오묘해진 분위기를 깬 것은 클로드의 뒤에서 화난 목소리로 말하며 걸어 나온 일라리아 백작이었다.
“공녀님의 주치의라면 아이작 달튼 자작이군. 맞나? 지금 그대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는 알고 있나? 카르테인 공작가에서 감히, 공작을 받드는 가신인 일라리아 백작가의 안주인을 모함하다니.”
“여보, 진정해요! 분명 오해가 있을 거예요.”
소피아가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일라리아 백작과 아이작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샴페인이 쏟아진 드레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가 애써 꿋꿋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자작님께서 제게 이러시는 연유를 모르겠어요. 제가 무슨 상황을 꾸몄다는 말씀인가요? 또 그 말이 맞는다고 한들, 제가 얻는 게 무엇인지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는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그’ 일라리아 백작가의 안주인이니까. 게다가 지금의 상황도 사람들이 봤을 때는 고작 사고에 불과하지 않나.
물론 지금 이곳이 수도였다면 양상은 또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북부지. 아이작 달튼과 일라리아 백작 부인 중에 사람들이 누구에게 더 호의적으로 굴지는 뻔했다.
“그렇지요. 부인께서 공녀님을 이렇게 대해서 얻을 게 뭐가 있으시겠어요.”
“서약식에서 꺼내기에는 너무 경솔한 말이 아닐지. 게다가 부인께서는 방금까지도 공녀님을 두둔하셨는데요.”
“혹시 몰라요. 부인께서 그간 사교계의 중심이셨으니 이렇게…….”
특히나 이렇게 바람잡이가 있다면 더욱더.
레이나 바톤과 크리스틴 리베라. 일전에 일라리아 백작가에서 봤던 어린 영애들이 수군거리는 말들이 연회장을 채웠다.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은데.’
엄마와 아빠, 그리고 네펠리 영애의 표정이 좋지 않다. 만약 여기에서 판이 커져 약혼이 깨지기라도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이가 갈리는 상황에 꾹 주먹을 쥘 때쯤, 클로드의 단단하고 낮은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렸다.
“그만.”
힘이 담긴 목소리 탓일까, 연회장이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물 떨어지는 소리마저도 들릴 만큼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 그가 가만히 사람들을 훑었다.
서약식 때 보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눈빛이었다. 그의 눈빛을 마주한 이들이 입을 막고 시선을 돌리기에 급급할 정도로.
선명한 구두 소리를 내며 소란의 중심으로 걸어온 그가 아이작에게 사무적인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달튼 자작, 이런 말을 꺼냈을 때는 그만한 증거가 있겠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각하……!”
클로드가 반박하려는 일라리아 백작의 말을 한 손을 뻗어 일축했다. 미간을 찌푸린 일라리아 백작을 두고 그가 시작하라는 듯 아이작에게 턱을 까닥거렸다.
클로드의 허락을 받은 아이작이 천천히 몸을 숙여 땅에 떨어져 있던 초콜릿을 주웠다. 그거로 뭘 할 거냐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가 손가락으로 초콜릿을 뭉갰다.
아이작의 손 위로 노란빛의 끈적이는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숨을 죽일 때 그녀가 한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자작님, 그건 그저 꿀이에요. 사과 퓌레와 섞은 꿀이요. 설마 독이라도 넣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만약 그런 거라고 하신다면, 저도 지금 이 자리에서 같은 걸 입에 넣겠습니다.”
강경한 그녀의 반응에 아이작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건 평범한 사과 퓌레와 섞은 꿀이 맞으니까요.”
“그럼 왜…….”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게 ‘사과’ 퓌레와 섞은 ‘꿀’이라서요. 부인, 세상에는 완벽한 독도 완벽한 약도 없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부인께서 나디아 님에게 권한 이 초콜릿에는 나디아 님께 독처럼 작용할 재료가 두 개나 들어갔군요.”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소피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머리 장식에 눈길을 준 것이지만.
“부인께서 머리에 장식하신 별무리꽃. 그 꽃과 함께 복용하면 안 되는 음식 두 개가 말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내 아내가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달튼 자작, 그대야말로 원하는 게 뭐지? 우연을 의도로 곡해해서 지금 이렇게 상황을 조장하고 있는 건 그쪽 같은데.”
이번에는 클로드도 일라리아 백작의 말을 막지 않았다. 서늘하게 상황을 관조하는 그의 시선에 아이작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마음을 먹은 것처럼 고개를 든 그가 단호한 눈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백작 부인, 저희 일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었지요? 나단에 있는 도서관에서 말입니다.”
“그건…….”
“잠시 사담을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부인께서는 그때도 제게 나디아 님의 안부를 물으셨고, 저는 제 수첩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약재를 사러 나왔다고도 말씀드렸지요.”
소피아 일라리아가 아이작을 알고 있었다고?
그가 내 주치의라는 걸 숨기고 다닌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티를 낸 적도 없는데?
내가 생각을 더 깊게 할 새도 없이, 아이작의 입에서는 새로운 정보들이 계속 튀어나왔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만, 저는 그날 부인과 대화를 하면서 노트를 바닥에 떨어트린 채 도서관을 나와버렸습니다. 잊은 물건이 생각나 다시 발을 돌렸는데, 부인께서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구역에서 나오시더군요.”
“…….”
“그리고 그날 책 선반에 놓인 제 노트는 일부분이 찢어져 있었습니다. 찢긴 부분이 어디였는지 아십니까?”
“…설마.”
“제가 그날 구매하려는 약재의 목록. 그게 적힌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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