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을 느끼며 나는 나도 모르게 내 팔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나선 여섯 수장의 눈이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어렵지 않을 정도로 매서웠기 때문이다.
‘와…….’
속에서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카르테인 공작가와 여섯 가신 사이의 끈이 무엇에서 비롯했는지, 그렇기에 북부에서 이 ‘충성 서약’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비록 일라리아 백작가에서 불유쾌한 경험을 했다지만, 이 자리에 나온 여섯 가문의 사람들과 식사 자리를 가지면서 새로이 이해하게 된 것도 있었다.
‘생존과 전쟁에서 시작된 인연이라 그런지 카르테인 공작가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남달랐지.’
북부가 폐쇄적이라는 평을 받는 이유도, 강함에 대한 선망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 것이 이렇게 피부로 직접 와닿는 것은 생각보다 더 엄청난 일이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내뿜는 기백 탓에 손끝이 저릿저릿해.’
더군다나 이 기백을 오롯하게 받는 이가 나라는 점 또한 긴장되는 요소 중 하나였다. 나는 차가워지는 손끝을 애써 문지르며 꾹 입을 앙다물었다.
나는 태연하게 보일 수 있도록 턱을 당기고는 지그시 한쪽 무릎을 꿇은 여섯 명의 수장들을 바라보았다.
치고 있지도 않은 북이 귓가에서 둥둥 울리는 기분을 느낄 때쯤, 적막으로 휩싸인 공간을 깨고 클로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헤르잔에게 숱하게 들었던 서약식의 첫 질문이었다.
“그대들은 나를 북부의 주인이자 그대들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인정하나?”
“인정합니다. 각하께서는 저희의 주인이십니다.”
“그대들은 내 눈과 내 생각, 그리고 내 판단을 신뢰하나?”
“신뢰합니다. 명하시는 곳이 사지라 해도 뜻하신 바를 믿고 달려 나갈 것입니다.”
질문과 대답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이어졌다.
그건 정말로 기묘한 경험이었다. 별다른 음악이 있는 것도, 질문이 대단히 격정적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이곳의 분위기가 고요하게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로지 이 서약식을 이끄는 클로드 카르테인과 여섯 사람의 기백만으로.
합창과도 같은 우렁찬 소리가 뚝 멈춘 것은 카르테인 공작의 입에서 이번 서약식의 핵심 질문이 나온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내가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내가 직접 청한 이를 또 다른 주인으로 인정하겠나?”
연회장이 보이지 않는 묘한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질 즈음, 클로드가 문득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자, 그가 나를 부드럽게 대중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내 뒤로 클로드가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여섯 사람 중 가장 건장한 체구를 가진 트론델 백작이 눈을 부릅뜬 채 내게 물었다. 드디어 내가 서약식의 전면에 서는 순간이었다.
“각하께서 청한 이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나디아 골드게이트입니다.”
“나디아 님께서는 이 광활한 북부의 바람을 뚫고 우리를 이끌 준비가 되셨습니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전쟁을 치른다면 최전선에서 활약할 것 같은 이가 물러서자 이번에는 그와 반대되는 사람이 내게 다시 질문했다. 마른 몸매에 날카로운 눈, 그리고 정갈한 몸짓을 하는 그는 첸드릭 자작이었다.
“나디아 님께서는 어떠한 위험이 닥치더라도 북부를 위해 그 두 다리로 버텨 서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되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또 한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각자를 대표하는 질문이 여러 번 오간 가운데, 드디어 마지막으로 일라리아 백작이 나를 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나디아 님은 그간의 자신을 버리고, 북부의 또 다른 주인으로 새로이 서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건…….”
정해져 있는 답은 당연하게도 ‘그렇다’였다. 그가 내게 한 말은 굉장히 의례적이고 관용적인 질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왜일까. 준비할 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긍정을 표하던 입이 오늘따라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괜한 생각이 드는 거다. 그간의 나를 버리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
“…나디아 님.”
점점 침묵이 길어지자 헤르잔이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지 살피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답을 하려던 순간, 헤르잔이 있는 방향 쪽에서 나를 보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가늘게 인상을 쓰고 나를 보는 두 사람을 보자, 괜히 속에서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탓에 반동처럼 생긴 일이었다.
“북부의 주인이 될 준비는 되었는데, 그간의 자신을 버려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 그게…….”
어디선가 물건을 떨어트린 듯한 소리가 났다. 무겁고 진지하게 흐르던 분위기가 내 대답으로 인해 뚝, 끊겼다.
갑작스럽고 또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연회장 안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이들의 눈마저 휘둥그레졌다.
“…….”
단 한 사람, 그들과 다르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건 클로드밖에 없었다. 언제나처럼 묵묵히 나를 응시하는 주황색 눈동자가 선명했다.
나는 마주 잡은 손에 가볍게 힘을 주고는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카르테인 공작의 눈과 판단을 믿는다고 하시길래, 그럼 왜 ‘새로운’ 사람을 찾으시는 건가 해서.”
아니, 그렇잖아. 내가 그 정도의 역량이 되는 사람인지는 둘째 치고, 이미 준비된 사람이니까 같이 북부의 주인이 되자고 청하는 거 아니야?
게다가 그간의 자신을 버리라니, 그게 해당 서약자의 부모님을 앞에 두고 할 말이냐? 아무리 내가 효녀라기엔 많이 부족하다 해도 키워 준 두 분의 앞에서 냉큼 그러겠다고 하기는 싫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는 더 그래서는 안 돼.’
내 말에 놀라다 못해 당황하는 사람들의 기색이 전해졌다. 기겁하는 사람도 군데군데 보였다.
나도 안다. 그냥 의례적으로 넘어가면 되는 질문인데 내가 괜히 일을 키웠다는 걸. 그런데 어쩌겠어.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는데.
‘뭐, 내게도 빙의 여주의 어쩔 수 없는 피가 흐르나 보지.’
일을 저지르고 나니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반대로 묻고 싶은데, 그러는 그대들은 그간의 저를 감당할 자신이 있으신지요?”
“…….”
“제법 벅찰 텐데. 나라는 사람.”
읊조림에 가까운 뒷말에 옆에서 클로드가 작게 몸을 떨었다. 고개를 살짝 숙였던 그가 곧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헤르잔이 짧게 클로드를 불렀다.
“각하?”
조금 전까지 보이던 위압감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그가 맑게 웃음을 흘리며 내 손을 마주 그러쥐었다. 여유롭게 나와 눈을 마주친 그가 짧게 말을 흐렸다.
“영애, 그대는…….”
듣지 않아도 뭐라고 하려 했는지 알 것 같은 말에 내가 입술을 달싹이던 찰나, 클로드가 내 쪽으로 살짝 고개를 내렸다. 유쾌함을 담은 눈으로 나를 본 그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서약을 받아야 할 그대가 도리어 물음을 던지시면 어쩌십니까. 저들이 나디아 그대를 감당하지 못하겠다 하면 어쩌시려고.”
“아, 역시 흐름에 문제가 생겼겠죠? 미안해요. 고의는 아니었는데…….”
“아니,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말에 담담히 대답을 늘어놓자,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내 말을 부정했다. 클로드는 그 대신 잡은 손을 들어 가볍게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경애의 뜻이 담긴 듯, 담백한 입맞춤을 마친 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답입니다. 그저 그대를 감당하라 명령을 내리십시오. 북부의 주인답게. 그거면 충분합니다.”
“아.”
혹시 이것도 좀 더 제멋대로 구는 축에 속하는 걸까?
나는 가만히 눈을 굴려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일전에 내게 그런 조언을 했던 전대 공작 부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 흥미로운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본 순간 깨달았다.
‘어……. 정말 내가 생각한 대로 굴어도 괜찮을지도?’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여섯 명의 수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누구에게 홀린 것처럼 자연스러운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를 믿고 제게 충성을 주세요. 그럼 그대들이 사랑하는 이 북부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신의 축복이 이곳에 임했던 것처럼.”
왜 그러는지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달아오른 열에 발갛게 상기된 뺨이 느껴졌다. 나는 한쪽 손을 꽉 쥐고는 가슴을 꾹 눌렀다. 빠르게 도는 피 탓인지 머리가 일순 쨍하고 울렸지만,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내 말을 들은 여섯 수장이 아연하게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내 곁에서 그런 그들을 훑어본 클로드가 슬쩍 입꼬리를 당기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다시 묻지. 그대들은 내가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내가 직접 청한 이를 또 다른 주인으로 인정하겠나?”
같은 물음이 다시금 공간 속에 울렸다. 그러나 한번 갈라진 물길은 같은 곳을 향하지 않듯, 클로드가 되물은 질문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받은 이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와 클로드를 가만히 눈에 담고 있던 이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인정합니다.”
나는 언젠가 그들이 지금의 순간을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랐다. 그때 ‘나디아 골드게이트’를 선택해서, 북부가 새로움을 선도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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