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문 열도록 하지.”
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전대 카르테인 공작 내외였다. 자리에 걸맞게 쫙 빼입은 두 사람이 손으로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확인차 들르기라도 한 것인지 방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제 사람들을 맞이할 때가 되었는데 시간이 되어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길래 혹시나 해서 찾아왔다.”
“아,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아직 바쁘니? 시간이 더 필요해?”
나는 흘깃 클로드에게 시선을 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연회장의 창문을 열지 말지 정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다른 내용은 얼추 정리되지 않았나. 방금도 서로 달곰하게 응원을 주고받고 있었고.
“아닙니다. 금방 내려가도록 할게요. 오는 사람들을 맞이해야죠.”
특히나, 클로드는 공작가의 주인이기까지 했다. 내 모습을 본 두 사람이 알겠다는 듯 긍정을 표하며 다시 몸을 돌렸다.
“잘 생각했다. 그럼 우리는 먼저 가 있겠다. 전 주인이라도 얼굴을 보이는 편이 낫거든. 금방 연회장에서 보는 거로 하지.”
“네!”
내 대답을 들으며 담담하게 몸을 돌리던 공작 부인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짧게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련히 잘하겠지만, 순서나 중요한 사건들을 잘 기억해 두고. 시작하기 전에 중요한 사람은 따로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배치하는 것도 좋아. 서약식에 들어가 버리면 다소 정신이 없어서.”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꼭 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경험자가 하는 말은 새겨들어야지. 옅게 미소를 지은 부인이 다시 방의 문을 닫았다. 나는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짧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번 충성 서약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부분은 크게 두 가지 파트로 나뉘었다. 하나는 가문들과 함께 나서는 서약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업의 공개식이다.
서약식을 마무리하는 시점, 대신관님이 우리를 축복해 주며 자연스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축복의 매개체는 성수, 그러니까 신의 영역에서 직접 떠 온 온천수로 할 예정인데…….
‘또 모르지. 그 직전에 어떤 소동이 벌어질지.’
나와 클로드는 만약 헤링본 자작과 소피아 일라리아가 수를 쓴다면, 서약식에 이의를 받는 그 순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냥 이의 제기를 받는 순서를 없애버릴까도 고민했는데, 순서가 없다고 깽판을 안 칠 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 귀중한 사업 공개식을 어그러트리는 걸 두고 보지는 않을 테지만.’
타냐와 에이포드가 개발한 비누는 물론이고, 게일이 심혈을 기울여 세공한 성수병은 그 자체로 이미 예술품이었다. 나는 자연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을 내는 병에서 떨어지는 물이 얼마나 성스럽고 아름다울지를 떠올리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공작님, 연회장의 창문을 여는 건 좀 참을까요?”
“음?”
갑작스럽게 왜 그러느냐는 그의 시선에 내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무 추워서 사람들이 우리가 준비한 행사에 집중도 못 하면 어떻게 해요.”
엄청 심혈을 기울였는데.
아, 물론 추위마저도 깜박할 만큼 아름답고 또 신기한 경험일 테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기왕 공개하는 거 최대한 잘 꾸려진, 어느 방해도 없는 환경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진지함 반, 농담 반이 섞인 대답에 클로드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가 바라는 게 그거라면 내 코 정도는 희생하는 거로 하죠. 전쟁 영웅이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게 잘 버텨 보겠습니다.”
“대신 저희 자리를 조금 더 창가 쪽이랑 가깝게 배치해요. 그, 타냐가 만들어 준 향수도 항시 들고 다니고.”
힘들 때마다 옷에 향수를 뿌려대면 조금은 더 낫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덧붙인 말에 재차 웃음을 터트린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만 가보자는 의미였다.
단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중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나도 덩달아 과장되게 그의 손을 잡고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가실까요, 공작님?”
“예, 좋습니다. 나디아, 그대야말로 준비는 되셨습니까?”
“아, 언제나요.”
그의 말에 작게 키득거리며 연회장으로 가는 길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대충 이유는 알 것도 같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 집의 주인으로서 보는 것과 손님으로서 보는 게 다른 느낌?
단순히 내 감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용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도 한몫했다.
“수고가 많군.”
“각하, 그리고 나디아 님.”
연회장의 앞, 깍듯하게 나와 클로드의 이름을 부른 사용인이 입가에 씩 미소를 그렸다. 가끔 공작가의 현관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나디아 님을 저희 주인님이라 부르는 건 아직 이른 일이겠지요?”
대답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는 듯 가볍게 코를 찡긋거린 그가 이윽고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깊게 고개를 숙였다. 손을 뻗어 연회장의 안쪽을 안내한 사용인이 우렁차게 나와 클로드의 도착을 알렸다.
“클로드 카르테인 공작님과 나디아 골드게이트 공작 영애이십니다!”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북적거리던 연회장의 안이 조용해졌다. 부요의 축제와 엇비슷한 분위기이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전부 착각이었다.
사실 사람이 모인 규모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약식에는 공작가를 여는 게 관례이기 때문에 일반 영지민들 또한 서약식을 볼 수 있었으나, 그게 연회장 안의 인수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보안 등의 여러 문제로 연회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건 초대를 받은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부요의 축제 때와 이번 서약식의 가장 큰 차이는, 당연하게도 그때에 비해 우리를 보는 사람들의 주목도가 훨씬 높아졌다는 것이었다.
“저분이시군요?”
“일전에 부요의 축제에서 뵈었을 때와는 또 느낌이 다른…….”
고요해진 공간 속에서 아주 작게 속삭이는 말들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는 최대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는 여기저기에서 속닥거리는 말들과 나를 향한 흥미 넘치는 시선들을 넘겼다.
여전히 이토록 많은 이들의 관심은 부담이 되었지만, 몇 번 했다고 이제는 좀 넘기는 방법들을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나디아.”
“네?”
“깊게 심호흡을 하고 앞을 보세요. 아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손 너머로 긴장이 전해진 건지, 카르테인 공작이 작게 귓속말로 나를 달랬다. 그의 말을 따라 숨을 내쉬며 살펴본 공간에는 정말로 익숙한 얼굴들이 꽤 보였다.
나와 클로드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대신관님과 마탑주, 그리고 서신을 보냈던 네펠리 영애까지 자리를 지켜준 덕이다. 와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이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내 표정을 본 네펠리 영애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작게 손을 흔들었다.
내 시선을 따라 연회장을 훑어보고 있던 클로드가 낮게 목소리를 깔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딱 우리만 들을 수 있을 크기의 목소리였다.
“황태자 전하는 안 보이시는군요.”
“아, 그래요? 아직 오지 않으셨을 수도 있고, 또…….”
“오는 게 여의치 않으실 수도 있지요. 전하의 일정상 그럴 수도 있다고 예상하지 않았습니까.”
전하는 나름의 대비책 정도이긴 했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연회장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주로 서 있을 연회장의 중심부는 화사한 꽃들로 한가득 장식이 되어 있었다.
북부에서 자주 나는 하얀 네이바꽃부터 계절이 달라 지금은 보기 어려운 꽃들까지, 다양하게 마련된 꽃의 종류는 공작가가 가지고 있는 힘과 재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꽃 장식이 내포하는 의미가 무엇이건, 우선 내게는 냄새로 괴로워할 일이 다분히 줄어든 게 가장 중요하긴 했지만 말이다.
‘아니, 누구야?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한 사람이?’
분명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꽃 장식이 많지는 않았었는데.
누가 되었든 아주 칭찬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나와 함께 걸어온 카르테인 공작이 내 손을 풀고는 가볍게 손을 들었다.
―뿌우우우
그가 손을 든 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주위에서 장엄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은 속삭임조차 없이 적막함으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클로드가 선명한 주황색 눈동자로 지그시 사람들을 마주했다.
서약식이라는 경사스러운 날 완전히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헤르잔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깔끔하게 식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 이렇게 카르테인 공작가의 서약식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을 환영합니다. 서약을 받을 이와 서약을 할 가문, 그리고 증인이 될 눈이 모두 한자리에 있으므로 서약식의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이에 지금부터 서약식을 시작합니다.”
말을 마친 헤르잔이 클로드를 바라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헤르잔이 보인 경의를 확인한 그가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자세 그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북부의 주인다운 꼿꼿하고 위엄 넘치는 분위기가 주위를 오롯하게 감쌌다.
누구를 부른 것인지, 무엇을 뜻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짧은 명령 속에서도 그의 말을 들은 여섯 명의 사람이 칼같이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카르테인 공작가를 지탱해 왔다는 가신들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 여섯이 단단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나와 클로드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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