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물론, 골드게이트 공작가에서도 나디아는 유독 자신과 아내를 어려워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딘가 조심스러워했다는 말이 더 맞았다.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는 쪽에 가까울 수도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이전의 부모 자식 관계로 회복이 되어가는 중이었는데…….
‘오늘 오랜만에 나디아를 보니 어째서인지 한참 불안했던 그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좀 들었어.’
다만, 그게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데릭의 표정이 심각해지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가 아내의 손을 꽉 쥐었다.
“데릭.”
“예, 부인. 괜찮습니다.”
표정이 좋지 않은 데릭의 이름을 부르며 프리지아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서로가 과거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알아챈 그가 아내를 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한 손으로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이고 있자니, 자신의 마음도 정리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우선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겠군.’
무거운 마음과 달리 온 제국을 굴리는 남자의 머리가 빠르게 주인이 필요로 하는 답을 내었다. 차갑게 내려진 결론이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로 돌아가는 것만큼은 안 된다. 목욕을 반대했던 가장 큰 이유도 그 아이가 또 쓰러질까, 또 정신을 잃고 아파서 그때와 같은 괴로움을 반복할까 두려워서였다.
그건 부모로서 데릭 골드게이트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 유의미한 생각이 아니군.’
데릭은 빠르게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했다. 어쨌거나 결론은 자명했다.
약혼이 되었든 요양이 되었든, 지금의 나디아 골드게이트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수도와 골드게이트 영지가 아니라 북부라는 것.
그리고 나디아가 북부에 머무는 그 짧은 사이, 카르테인 공작가에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했다는 점.
‘중요한 건 이걸 아내와 어떻게 공유하느냐인데…….’
고개를 저은 데릭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프리지아가 잠시 그런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침묵이 흐르던 두 사람 사이에서 프리지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남편이 어떤 부분을 말하기 어려워하는지 알아챈 그녀가 빠르게 마음을 접고 다음을 생각한 터였다.
프리지아 골드게이트는 때론 남편보다 더 냉정하게 현재 상황을 분석하고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데릭,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나도 아니까. 그럼 우리는 우선 상황을 지켜보죠.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죠?”
“…….”
다소 잠잠하게 입을 연 프리지아가 예리한 눈빛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해. 나디아가 어디에서 불안감을 느낀 건지, 신의 축복과 새로운 사업은 정확하게 어떤 사건으로 누가, 왜, 무엇을 어떻게 진행하게 된 건지 알아야겠어요. 지금이야 공작가에서 보이는 애정만이 눈에 들어오지만, 혹시 카르테인 공작가가 이면에 원하는 게 있는지까지도요.”
“…부인의 말이 맞습니다.”
“그때와는 달라요.”
단호하게 과거의 아픔과 현실을 자른 그녀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고요. 알고 있던 게 바뀌고 내가 모르는 게 생겼다면 알아 가면 돼요. 골드게이트의 지식이란 그런 것 아니었나요?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나디아의 모습도, 지금의 색다른 나디아의 모습도 다 이유가 있기에 나오는 모습들일 테니까.”
금안의 눈동자가 조금 전까지 마주했던 나디아의 모습을 회상했다. 하늘을 닮은 푸른 눈동자는 프리지아의 시선을 알아채자마자 온기를 띠었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나디아의 웃음은 그녀를 향한 애정이 엿보이면서도 희미하게 어색하고 모난 부분을 담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밟혔다. 그렇기에 프리지아는 이번에야말로 자세하게 이 모든 것을 파낼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르웬이 전하길, 나디아가 골드게이트를 자랑스러워한다고 했다지? 그녀의 자랑이자 큰 방패라고.’
그럼 그렇게 되어 줘야 한다. 당연히.
충성 서약은 카르테인 공작가와의 약혼을 공공연하게 드러낼 자리였다. 프리지아는 북부에 도착했던 때와 달리 마음을 확고하게 먹었다.
감정을 배제하고 살펴보니 무언가 미심쩍은 부분들이 곳곳에 아주 희미하게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게 보였다. 조용히 몸을 낮추고 침묵한 채,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있으면 분명 드러나게 되어 있어. 나디아를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든, 그 아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든 뭐든.’
게다가 이건 어쩐지 단순한 개개의 사건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쩐지 나디아와 굉장히 깊게 얽혀있을 것 같은, 어쩌면 나디아가 쓰러졌던 그때와도 연결점이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래서 그게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남편 모르게 입 안쪽을 깨문 프리지아의 금안이 깊게 일렁였다. 그게 뭐가 되었든 그녀는 제 딸에게 긴 아픔을 선사한 원인을 요절낼 생각이었다.
“프리지아,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데릭 골드게이트는 제 아내가 이 결론을 내리면서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 길게 말을 늘이기보다, 프리지아의 손을 잡고 그녀의 뜻을 전적으로 지지해 주기로 했다. 그게 두 사람이 함께 걸어온 신뢰의 방법이었다.
“그대의 말대로 모든 것을 세밀하게 지켜보지요.”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가슴 깊이 묻은 채, 두 사람은 자신이 할 일을 고요히 준비하기로 했다.
이번에야말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 제 딸아이를 지키고 받쳐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제각기 다양한 생각을 하며, 그렇게 충성 서약의 날이 밝았다.
* * *
‘사람이 많다,’
아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많다.
창문 너머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현관에는 마차가 늘어서 있었고, 공작가의 부지로는 귀족들과 사람들이 끝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높아진 공작가의 인구 밀도를 느끼며 클로드의 옆에서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공작님, 연회장 창문을 열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고민 중입니다.”
나는 덩달아 진지하게 답하는 그를 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연회장의 창문을 열면 찬 바람이 실내로 불어닥칠 테지만, 밀폐된 공간 안에서 숨을 참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지였다.
적어도 나와 클로드에게는. 아니, 생각해 봐라. 추운 북부의 특성상 사람들이 더 많이 옷을 껴입고 오게 되어 있는데, 그럼 자연스럽게 실내에서 서로 부대끼며 땀이 나겠지? 그럼…….
‘아냐. 여기까지 하자.’
더 생각했다가는 기껏 진정했던 속이 또 울렁거릴 판이다. 아마 부요의 축제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겠지.
생각만 해도 코끝에 끔찍했던 향이 맴도는 것 같다. 나는 진절머리가 나는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바르르 떨었다.
“아무리 서약식 때 공작가를 여는 게 관례라지만, 정식 약혼식이나 결혼식도 아니고 충성 서약에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이 와요?”
“음, 예상은 했습니다만…….”
“네? 예상했다고요?”
이게 뭔 소리래.
담담한 클로드의 표정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깨를 으쓱하는 그를 바라보며 내가 살짝 입술을 벌렸다.
“저는 예상 못 했는데요.”
애초에 주요 가신 가문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고 이곳의 사교계에 처음 얼굴을 비치는 정도이지 않나. 아무리 일반인들이 온다 해도 이렇게까지 몰릴 줄은 몰랐지.
이건 북부에 있는 사람을 싹 쓸어 오는 정도가 아닌가.
‘심지어 오늘은 날씨도 춥잖아!’
아냐, 좋게 생각하자. 사업 설명회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정말로 엄청난 기회이지 않나.
사람이 많을수록 사업에 대해 듣고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될 거고, 그러면 더 성공적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면서 나는 오늘 내 상태를 확인했다. 속? 괜찮음. 머리? 살짝 지끈거리기는 하지만, 어지럽지는 않음. 응,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아무래도 일전에 아이작이 준 약차가 더 효과가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클로드의 손을 꽉 쥐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무슨 일이냐는 듯 클로드가 나를 바라봤다. 그런 그를 보고 장난스럽게 씩 웃으며 대답했다.
“힘을 받으려고요.”
양손을 꼭 잡자 클로드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나를 보는 주홍빛 눈동자에 온기가 가득했다.
후,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곧 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 뿌듯함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 옆으로 나란히 섰던 클로드가 몸을 틀어 내 손을 잡았다. 더욱 가까워진 거리에 학습된 설렘이 가슴을 술렁이게 했다. 나를 가만히 내려다본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제 손을 잡으면 힘이 생깁니까?”
“네.”
나는 단호하게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클로드 카르테인은 싸움에서 진 적이 없다잖아.
지금 내게는 그만큼 든든한 아군이 없었다.
게다가 클로드 카르테인은 로맨스 판타지 세계관에서 최강자 중 하나 아닌가. 어쩐지 느낌이 상당히 좋았다. 내가 씩 웃음을 지으며 심호흡을 할 때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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