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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89화 (89/155)

89화

‘아, 과거의 나. 그냥 나한테 다 맡기지…….’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클로드와 분홍빛으로 가득한 시간을 보낸 건, 그래. 괜찮았다. 거기에서 내가 다시 무리하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괜히 나가자고 해서는.’

열이 오르다 보니 괜히 들떠서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 카르테인 공작이랑 함께니 어둑해지는 하늘도 괜찮다고 했고, 또 뭐랬더라.

아, 밤의 거리를 활보해야 더 자세한 걸 알 수 있다고 했지.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나간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덥다면서 찬 바람을 만끽했던 게 컸던 거 같네.’

나가서 활보했던 그 시간에 피곤을 느꼈다거나 힘들지는 않았으니까. 도리어 몰래 데이트하는 것 같은 기분이, 마주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썩 기껍기까지 했었다.

나는 묵직하기 짝이 없는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하간 문제는 나다, 나.’

감기 기운이 살짝 도는 건지, 잠을 푹 잔 것과 별개로 몸이 피곤했다.

흐릿한 기억으로는 악몽을 꾼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쫓겨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 팔다리가 무겁고 머리가 지끈거린 탓이다.

작게 한숨을 쉬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던 찰나, 노크 소리와 함께 줄리엔이 방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나디아 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젯밤은 편안… 음, 아니군요.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혹시 불편하셨던 곳이라도 있으신지요?”

“아, 아니야. 그냥 내가 잠을 좀 설친 것 같아. 어제 나갔다 오면서 너무 몸이 피곤했나 봐. 찬 바람을 많이 쐤더니 좀 추웠던 것도 같고?”

“이런……. 그럼 오늘부터는 몸을 좀 따뜻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주무시기 전에 따뜻한 우유라도 올려야겠네요. 꿀을 타면 더 좋겠지만, 그건 약 때문에 안 된다 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요.”

“으응, 그렇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줄리엔의 도움을 받아 아침 준비를 마쳤다. 빗으로 머리카락을 빗겨주던 그녀가 전할 말이 있다는 듯 빙긋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영 좋지 않으실 때 이런 소식을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음?”

“나디아 님의 부모님이신 골드게이트 공작 내외께서 일정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하실 것 같다고 연락이 온 모양입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두 분이? 얼마나?”

“아무래도 일정이 있으시다 보니 빠르다고 해도 충성 서약 전날 정도일 듯합니다.”

부드러운 손길로 다시금 내 얼굴을 정면으로 돌린 그녀가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부모님을 이르게 뵈는 거니까 소식만으로도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으셨나요? 충성 서약에 대한 긴장감이나 이런 것도 좀 덜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음, 얼추 비슷해. 머리가 조금 맑아진 것도 같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꺼풀을 깜박이며 줄리엔의 말에 긍정했다. 충성 서약 때 두 분께 보여드릴 게 많아 그 부분이 걱정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부모님이시지 않나.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 둘이나 더해진다는 건 정말 큰 힘이 되는 일이었다. 특히나 나를 끌어내리려고 혈안이 되어있을 로드릭 헤링본과 소피아 일라리아를 앞두고서는.

침대에서 갓 일어났을 때보다 힘이 실린 내 목소리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그녀가 빗을 내려놓고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말씀드릴 사안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달튼 자작님께서 만남을 청하셨어요.”

“응? 또?”

그 일이 있었던 게 바로 어제인데, 분위기가 그렇게 치달은 걸 봤으면서도 만남을 청했다고?

“왜 보자고 하는데?”

“음, 우선 드시던 약 때문에 의견 차이가 있으셨다면서요? 나디아 님은 도무지 못 먹겠다고 하셨고, 달튼 님은…….”

“응, 더 말 안 해도 좋아. 약을 더 얹어 주셨잖아. 날 설득까지 하면서.”

“네, 그러셨죠. 그 문제로 상의할 내용이 있다고는 말해 주셨습니다만…….”

나는 다시금 손을 들어서 줄리엔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차피 그녀의 말을 듣는다 한들, 내가 낼 답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아니, 아무리 사람 마음은 갈대라지만 이제 막 하루가 지나간 이 시점은 너무 빠르지 않냐고.

거울에 비친 내 푸른 눈동자가 단호함으로 반짝이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아니야, 괜찮아.”

“네?”

“따로 만나 상의하기엔 내가 너무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충성 서약도 코앞이고 그렇잖아. 약은 뭐, 참고 먹으면 그만인 일이지. 힘들지만.”

“음…….”

“만약에 약을 새로 개발했다든가 그러면 그건 줄리엔, 네가 받아줘. 아니다. 당분간은 그냥 네가 연결책을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줄리엔은 내 말을 듣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하긴 그녀가 듣기에도 그럴듯해 보였을 거다. 건강에 적신호가 생긴 게 아닌 이상, 이런 논의는 줄리엔이 나를 대신해 진행해도 충분할 테니까.

나는 잘 알겠다는 듯이 대답하는 줄리엔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술을 오므렸다.

‘약 때문에 왔단 말은 핑계고, 아무래도 내 어지럼증 때문에 몸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 것 같은데.’

나는 의자의 팔걸이를 검지로 톡톡 건드리며 잠시 생각했다.

아무래도 에이포드를 만나러 가는 일정을 좀 앞당겨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몸 상태가 영 별로였는데, 잘되었지.

분명 에이포드를 만나 지금까지의 일을 차근차근 말하면 답이 나올 거다. 왜, 병원도 비교해서 다녀보고 결정하는 것 아닌가.

‘음, 그럼 그냥 오늘 갔다 올까?’

생각해 보니 괜찮은 생각이다. 사업도 확인하고 상의도 할 겸 겸사겸사 갔다 오지, 뭐.

나는 깔끔하게 결론을 짓고는 마저 아침 준비에 집중했다.

* * *

느지막이 밥을 먹고 찾아간 작업실은 오늘도 별다를 것 없이 북적거렸다.

작업실의 한쪽에서는 비누에 첨가할 향의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온천수를 담을 성수병의 디자인 수정이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에이포드가 있는 쪽은…….

“아, 그럼 여기에 힐의 효과를 넣을 순 없나? 어차피 지워내는 개념이라며. 그럼 병도…….”

“그걸 강조할 거면 저 온천수 쪽이 더 나은 거 아니야?”

“거긴 영역이 다르잖아. 그쪽은 신전, 여기는 마탑.”

마법사들이 잔뜩 모여 연구를 하는, 가장 우중충한 공간이었다. 뭐랬더라, 목욕용품에 마법적인 효과를 넣을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 중이라고 했던가?

“아, 나디아 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공을 좀 다르게 시도해 보았거든요. 한번 봐 보시겠어요?”

“나디아 님, 조심하세요! 거기 끓이고 있는 게 있어서……!”

나는 여기저기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전부 뒤로한 채 에이포드가 있는 쪽으로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다가간 곳에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에이포드가 앉아 뭔가를 쓰고 있었다. 에이포드는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지 피곤에 찌든 상태에서도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똑똑

“뭐야! 어……. 공녀님?”

“안녕.”

신경질을 잔뜩 내며 고개를 든 그가 나를 보고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놀라움은 잠시였다. 주위를 휘휘 둘러본 그가 이유를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태연하게 안경을 고쳐 잡았다. ‘그럼 그렇지’의 뜻이 담겨 있는 듯한 눈빛은 덤이었다.

“그, 타냐 찾으시는 거라면 안쪽에 휴게실 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피곤하다고 잠깐 잠이 들어서…….”

“아, 아니야. 오늘은 타냐가 아니라 에이포드, 너를 만나러 왔거든.”

“예?”

“널 보러 왔다고.”

단호한 내 말을 들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손에 잉크가 묻는데도 그러고 있는 모습이 도리어 당황스러웠다.

“아니, 내가 너를 찾아왔다는 게 이렇게까지 당황할 일이야?”

“어,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머리를 긁적거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을 엄지로 가리키며 물었다.

“여긴 공용 장소라 너무 북적거리니까 개인 연구실로 가실래요?”

“개인 연구실? 그런 게 있었나?”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마법사들이 임의로 방을 나눠서 개인실을 만들었거든요.”

아하, 그랬구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포드가 안내하는 대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에이포드의 개인 연구실은 여러 가지 책과 물약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성정 때문인지 지저분하지는 않은 그런 공간이었다.

제 앞자리로 나를 안내한 그가 대강 의자에 걸터앉고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저에게 볼일이 뭡니까? 매번 보는데 오늘따라 특별히 비누랑 관련된 연구 때문에 보자고 하시는 건 아닐 테고.”

“음, 의사인 네 식견이 필요해서. 요새 내 몸이 좀 안 좋은 기분이 들거든? 갑작스럽게 어지럼증이 온다든가.”

“의사? 아니, 공녀님은 따로 주치의가 있으신 거로 알고 있는데요? 그럼 그간 병의 이력이나 처방 같은 걸 고려할 수 있는 그쪽을 찾으시는 편이 낫습니다.”

“주치의는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데, 증상이 계속 있어서 온 거야. 본래 몸이 좀 약해서 이맘때쯤 먹었다던 영양제도 딱히 효과가 없어 보이고.”

“음…….”

나는 한 손으로 아래턱을 긁는 그에게 아이작과 했던 진료나 문진 등의 이야기를 자세히 꺼냈다. 에이포드는 간간이 이것저것 질문을 하더니 별다른 걸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딱히 문제가 될 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효과가 없단 말씀이죠?”

“응. 아주 미세하게 더 심해지는 것 같기도 해.”

“뭐, 그럼 달리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고요?”

마음에 걸리는 거라……. 나는 음, 하고 길게 입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그러는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이포드가 다시금 질문 하나를 던졌다.

“혹시 말입니다. 그 의사, 잘 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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