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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우리 목욕합시다-88화 (88/155)

88화

‘위생이 아니라 생활적인 기능을 홍보로 삼는 게 정답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네.’

전염병 탓에 이 세계 사람들이 위생에 부정적이어서 그렇지,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건 다 같지 않나. 나였어도 자연스럽게 몸에서 향을 풍길 방법이 있다면 솔깃했을 거다.

나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재차 곱씹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카르테인 공작을 바라봤다.

“이 성공은 개인적으로 에스텔 님과 이안 님 덕택이 아닐까 싶어요.”

“부모님의?”

“두 분이 공작저를 돌아다니실 때마다 사용인들의 반응이 장난 아니었잖아요.”

나는 의아함이 담긴 그의 눈을 보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다. 심지어 두 분은 외모가 출중하지 않나.

탐스러운 적발의 긴 머리카락과 은회색 눈동자를 가진 공작 부인, 그리고 클로드와 꼭 닮은 공작. 가만히 있어도 눈길을 끄는 사람들이 걸을 때마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데, 어떻게 시선이 가지 않겠나.

‘자연스럽게 피부도 훨씬 맑아 보였을 테고.’

이 부분도 잘하면 써먹기 좋겠는데? 나는 더는 꼬질꼬질하지 않은 내 피부를 확인했다.

‘음, 그래. 이것도 홍보 그 이상으로 만족도가 높겠군.’

만족스러운 결론에 내가 홀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두 분의 덕이라는 내 말을 들으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조 없는 웃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입가에는 여전히 미미한 웃음이 서려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분은 전부 그대 덕분에 생긴 변화들이라고 기뻐하셔서 말입니다.”

나? 내가 뭘?

물론, 내가 이 북부에 목욕 혁명을 불러오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는 건 맞지만 아직 두드러진 변화는 없을 텐데.

혹시 레티시아인가 싶어 눈만 끔벅이고 있자니, 그가 웃음기 밴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대가 오기 전과 비교하면 카르테인 공작가가 제법 달라졌다고 하셨습니다.”

“음, 그렇…군요,”

일단 수긍하기는 했다만, 무슨 차이가 생긴 건지는 잘 모르겠다. 카르테인 공작가는 내가 처음 발을 디딜 때도 그다지 차갑고 적막하지 않았던 터라.

‘따지고 보면 로판에 흔히 나오는 전형적인 북부 공작 가문이라기에는 좀 더 온화한 느낌이잖아.’

왜, 적막에 휩싸이고 냉랭하고 다소 칙칙한 그런 느낌 말이다. 일단 전대 공작 내외와의 관계만 봐도…….

‘일단 살아계시잖아?’

아니, 이건 좀 심한 말이네. 나는 빠르게 생각을 지워내고는 재차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허리춤 위로 손을 얹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는 몰라도 대충 분위기가 밝아졌다는 뜻일 거다. 대략 98.9% 정도의 확신이 들었다.

“그래요. 당당하게 인정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라서.”

“예?”

본인이 말을 꺼내기는 했으나,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건지 클로드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그를 향해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자랑하듯 코끝을 검지로 쓱 문지른 건 덤이었다.

놀랄 필요 없습니다, 공작님. 밝은 분위기를 몰고 오는 건 여자 주인공의 특화 스킬이니까. 이제 나는 얼굴에 약간의 철판을 더 깔긴 했다만, 그건 뭐 개인 특성 아니겠어?

“오늘은 자기 전에 두 분을 찾아뵈어야겠네요. 인사도 드릴 겸 자랑도 하려고요. 아. 어떻게, 오늘 나가면 선물이라도 좀 살까요? 칭찬 감사하다고.”

“선물을 사는 건 상관없습니다만, 칭찬한 당사자에게 자랑하는 건 무슨 경우입니까?”

“별건 아니고, 그냥 유세하는 거죠. 믿어주신 만큼 앞으로도 밝고 활기찬, 그리고 뽀송뽀송한 공작가를 위해 한 몸 불사르겠다고.”

그래. ‘내 노력이 이만큼이니 앞으로도 나를 잘 봐달라!’, 뭐 이런 거.

주먹을 쥐고 당당하게 눈을 반짝이며 클로드를 바라봤다. 내 기세가 북부 정도는 씹어 먹을 듯 의욕 과다인 것을 보고 그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예전부터 생각한 겁니다만, 영애는 간혹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일전에 마음은 가지만 대신 죽어줄 수는 없다고 했던 것도 그렇고, 대체…….”

말을 흐리는 모습이 영 수상하다. 저거 내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돌려 말하고 있는 거 아니냐? 물론, 내가 선택적으로 다 쳐내고 돌진하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니, 그런데 나 같은 상황에 부닥치면 누군들 다 이랬을걸? 만날 씻다가 못 씻어봐.’

이래서 사람은 경험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다니까.

나는 콧김을 흥, 내뿜으며 슬쩍 눈썹을 밀어 올렸다. 그러고는 문장을 끝마치지 않은 클로드의 말을 받아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뭘요. 저의 이런 호기로운 면이 공작가에 다른 바람을 몰고 올 수 있었던 핵심입니다.”

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못 했다고. 아마 진짜 로판 여자 주인공들도 이렇게는 못 했을 거다. 그쪽은 절박함이 없잖아, 절박함이.

‘모든 결과는 뭔가에 대한 사랑의 광기에서 태어나는 법이지.’

정치인이 자신 넘치게 공약을 소개하듯 꺼낸 말 때문일까, 그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웃어서 미안하다는 듯 클로드가 손등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입은 왜 가리세요? 화사하게 웃는 게 잘생겨서 보기 좋은데.”

“아, 영애는 정말…….”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수긍했다.

“예, 아무래도 그대의 그런 모습 덕분에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변했다고 하니 생각하는 건데, 클로드 또한 많이 달라졌다.

아무리 냄새 때문이라지만, 카르테인 공작이 처음 만난 날 대하는 태도는 정말 재수 없었는데. 눈빛이며 가망 없으니 포기하라는 말이며…….

‘내가 공작이랑 이렇게 붙어서 다정하게 서로를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이래서 밀어붙일 땐 또 뻔뻔하게 나댈 필요도 있는 거다.

나는 씩 웃으며 그와 가만히 시선을 마주했다. 익숙한 애정이 서린 주황색 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몸이 근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고요한 방, 가까이에 있는 그와 나, 나름대로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아, 혹시 지금이 진도를 뺄 절호의 기회?’

왜인지 여기에서 딱 한 발만 더 나가면 그와의 관계가 급격히 진전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지금 갑자기 들이대면 좀 그러려나.’

잠시 갈등했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나는 뱃속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기분 좋게 넘기며, 그를 향해 은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사심이 가득 넘치는 그런 눈빛이었을 거다.

“그죠. 제가 또 분위기는 잘 바꿔서.”

나는 얼렁뚱땅 그의 말을 받아치며 조금 더 공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한 손으로 옷소매를 잡았다. 그러면서 초조해 보이지 않게 다른 손으로는 쿨한 척 손톱을 한 번 확인했다.

“나디아?”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 탓일까? 내 몸짓을 보며 반응한 클로드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느릿하게 눈을 굴려 올려다보니, 익숙한 주황색 눈동자가 보였다.

“공작님, 분위기라고 하니까 하는 말인데…….”

“음?”

“화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체 접촉이라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뽀뽀라도 한번 하실래요?”

“우리가 싸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쉿.”

나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검지로 그의 입술을 꾹 눌렀다. 바깥에서 보면 상당히 낯간지러운 행동일 테지만, 괜찮다.

여기는 상대가 이런 행동을 해도 유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둘만 있으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관능적인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몸을 바싹 붙였다. 그러고는 작게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그에게 속삭였다.

“그런 건 명분이죠. 혹시 싫어요?”

잠시 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공작의 입 사이로 기어이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느릿하게, 하지만 절도 있는 손짓으로 내 검지를 잡은 그가 천천히 내 손을 내렸다.

대신 그 상태에서 그대로 고개를 비틀며 툭, 시선을 떨궜다.

“약혼자가 명분까지 들어서 거리를 좁혔는데 밀어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역시 그렇죠?”

“다만 자신은 없군요.”

“음?”

자신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깜박이자, 내 쪽으로 상체를 숙인 그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카르테인 공작이 나와 거리를 좁힌 탓에 몸이 자연스럽게 뒤로 밀렸다. 소파 등받이의 폭신함을 느끼고 나서야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여기 나랑 클로드랑 처음 뽀뽀했던 그 소파잖아.’

오래되지 않아 생생한 기억 탓인지 빠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생각지도 않았던 우연의 일치가 짜릿한 불장난 같아서, 일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십니까?”

“음, 여기가 또 소파라는 점이? 그때의 기억과 경험을 다시 각인하는 기분이잖아요.”

작게 덧붙인 말을 들은 그가 느릿하게 숨을 내뱉었다. 연인이라면 알 수 있는 묘한 긴장감에 몸을 완전히 맡기기 직전, 나는 남아있는 일말의 이성을 끌어올려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요, 공작님. 우리 지금 나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시간이…….”

“예, 그래야지요. 그런데 나중에요.”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입을 열려는데, 손으로 내 등을 받친 채 나를 내려다본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쉿.”

그러고는 끝이었다. 말을 꺼낼 새도 없이 클로드의 입술이 내 입술 위를 덮었다.

부드럽게 입술이 포개지는 걸 마지막으로 나는 그냥 흘러가는 감정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이성은 뭐, 내일의 내가 챙겨주겠지.

‘잘 부탁한다, 내일의 나.’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내렸던 팔을 들어 클로드의 목에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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