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결국, 오늘 문진에서도 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결론이 지어진 것 아닌가. 별무리꽃의 부작용도 아니라고 하고.
약을 먹을 생각을 하면 좀 아득한 기분이 들기는 하는데, 잘 챙겨 먹다 보면 아이작의 말처럼 괜찮아지겠지.
‘그러니 기억해 주세요. 저는 언제나 나디아 님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조금 전 아이작이 했던 말이 귓가에서 윙윙거렸지만, 나는 그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아니, 그냥 처음부터 듣지 않은 거로 하기로 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몸 상태를 이유로 다시 아이작을 만나지 않을 거라면, 그냥 어지럼증이나 이런 모든 원인도 여기에서 접고 없던 일로 하자고.
물론 이렇게 비밀을 만드는 게 연애 전선에 바람직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금 전 클로드 카르테인이 보인 모습을 떠올리면 입을 다무는 게 나을 것 같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감정을 내세워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한 사람인데, 여기서 내 몸 상태가 원인이었다고 하면? 카르테인 공작은 또 혼자 감정을 삭일 게 뻔했다.
어쨌거나 내 주치의는 줄곧 아이작 달튼이었고 제대로 된 원인도 모르는 지금, 날 가장 잘 진료할 수 있는 건 그일 테니까.
‘우선은 아이작의 처방대로 약을 먹고, 그래도 여전히 몸이 이러면 에이포드라도 찾아가자. 적어도 에이포드와 합이라도 맞춘 후에 말하는 게 낫겠어.’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을 정한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빠르게 분위기를 바꿨다.
“그래서, 오늘 나랑 나가는 것 때문에 이렇게 멋지게 옷을 빼입으신 거예요?”
은근슬쩍 건넨 말에 클로드의 입가에 마지못한 미소가 옅게 떠올랐다. 방금까지의 분위기가 있으니 여전히 어색함이 감돌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결 편한 기분이었다.
온기가 감도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 클로드가 의도를 알아챈 듯 눈썹을 까닥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둘만 있는 시간이 적었던 터라, 잘 보이고 싶었습니다.”
“하…….”
나는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반쯤은 분위기 쇄신을 위한 과장이었지만, 나머지 반은 진심이었다. 숨 쉬듯이 나오는 그의 말이 자연스럽게 가슴에 스민 탓이다.
부끄러워서 볼 수가 없다는 것처럼 눈을 가린 내가 그대로 손가락을 벌렸다. 손가락 사이로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공작님,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당연한 말을.”
“그런 말은 누구한테 배운 거예요? 이안 님? 에스텔 님? 그것도 아니면 독학, 아. 설마, 타고났다고 하지는 않겠죠.”
“글쎄요. 딱히 배운 기억은 없습니다만, 나디아 그대를 보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정이지 않겠습니까.”
호기심이 가득 담긴 내 물음에도 클로드의 표정은 태연해 보였다. 만약 그의 입가에서 미미한 장난기를 보지 못했더라면 깜박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능청스럽긴.’
저런 행동까지도 물 흐르듯 하니, 마음을 놓을 수가 있나. 자연스럽게 눈이 가늘어진 탓에 속눈썹이 손바닥 안쪽을 간지럽혔다.
사각거리는 느낌을 받고 있던 찰나, 더 편하게 몸을 푼 그가 담담하게 소식을 전했다.
“우선, 나가기 전에 전해 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음?”
“골드게이트 공작에게서 답변이 왔습니다.”
아버지에게서?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눈이 크게 떠졌다. 나는 눈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는 빠르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답변이라고 했으니 편지? 편지가 온 건가?’
눈을 굴려 클로드를 샅샅이 살폈으나, 그의 손 어디에도 편지는 보이지 않았다. 내 시선을 확인한 그가 양손을 든 채 가볍게 흔들었다. 편지가 없다는 뜻이었다.
손에 쥐어지는 게 없어 당황스럽기도 잠시, 손바닥의 안쪽이 괜히 축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답이 온 걸까.’
기묘하게 몸을 타고 흐르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자, 클로드가 팔을 뻗어 다시 내 얼굴을 감쌌다. 엄지로 깨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누른 그가 빠르게 답을 내어놓았다.
“충성 서약 때 참석하겠다고 하시더군요.”
“충성 서약 때요?”
그건 그거대로 또 놀라운데…….
“그때 참석하시겠다는 건 약혼에 대한 긍정의 의미에 가깝잖아요. 혹시 그, 충성 서약 전에 데리러 온다는 내용인데 잘못 보신 건 아니죠? 따로 덧붙인 말도 없으셨나요?”
자연스럽게 빨라지는 말을 들으며 클로드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하도 꽉 쥐고 있어 하얘진 손을 본 그가 내 손에서 힘을 빼주었다. 그러고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여 의심을 잠재웠다.
“예, 없었습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지.
아무리 우리 부모님이라 해도 초대받아 온 자리에서 어깃장을 놓지는 않을 테니, 정말로 수긍을 했다는 건데……. 어째서? 아니지, 어떻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고 있자, 카르테인 공작이 손에 온기를 나눠주며 본인의 생각을 전했다.
“아르웬 경과 루핀이 말을 잘 전달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일전, 마음을 바꾸고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으음, 네. 아무래도 그게 제일 가능성 있는 말이네요.”
그의 말처럼, 어쩌면 루핀이 전달한 ‘영혼의 안정화’가 마음을 돌리는 데 큰 기여를 했을 수도 있겠다. 언니의 안색이 변한 것도 그 말을 들은 이후였으니까.
‘그, 건강과 관련해서는 달튼 자작의 보증도 있었고.’
나는 입에 담기에 다소 껄끄러운 이름을 삼키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불현듯 이번 충성 서약에 많은 것들이 걸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천수 사업도, 비누도, 부모님의 안심과 나라는 존재의 인정도 전부 그날의 내게 달린 것 아닌가. 나는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재차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
“클로드, 귀족들 동태는 어떻던가요? 한 번씩 있던 식사 정도로는 파악하기가 좀 어려워서요. 로드릭 헤링본이나 일라리아 백작가 쪽에서 다른 움직임은 없고요?”
이렇게 된 이상 한 번 더 진행 상황을 확인해 봐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논의되었던 건 전부 제대로 준비가 되었는지, 어딘가 변수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등등. 전투적인 눈빛을 고스란히 받은 클로드가 가만히 눈을 굴려 기억을 더듬고는 곧장 입을 열었다.
“다른 움직임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초대하신다고 했던 사람들은 연락을 받았습니까?”
“아, 맞아. 전달하는 걸 잊고 있었네. 네! 다 받았어요. 대신관님이나 마탑주님은 물론이고, 혹시 몰라서 여쭤봤던 전하께서도 참석하시겠다고 하셨어요.”
“전하께서도 혹시 모를 소문에 마음이 쓰이셨나 보군요.”
카르테인 공작이 한 말이 맞을 거다. 전하도 몇 년 후에 있을 즉위를 준비하는 중이라 들었으니, 지금은 작은 소문 하나도 신경이 쓰이실 터였다.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다른 준비 사항들도 하나씩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몇 번이고 리스트를 확인해도 무엇 하나 트집 잡을 곳이 보이지 않았다.
‘만반의 준비를 했으니 당연한 걸지도. 총알도 방패도 다 만들어진 지 오래라고.’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에서도 순풍이 불고 있었다. 마탑에서 나온 마법사들도 심드렁했던 처음과 다르게 연구에 푹 빠져 있었다.
내가 요구하는 그림들을 이것저것 그려보더니 에이포드와 맞춰나가는 과정이 상당히 재밌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온 비누 종류만 해도 꽤 되지 않나?’
일단 내가 목욕을 하면서 써봤던 것만 한 다섯 개가량 되는 것 같다. 마법사들이랑 찍어낸 것뿐만 아니라 돈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진 타냐가 잔뜩 신이 난 터라…….
‘제가 직접 제조한 향수들로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세상에 하나뿐인 비누를 만드는 거죠! 생각만으로도 짜릿하네요. 예전에는 값비싼 공정 때문에 못 했던 걸 다 시도하면 분명 더 선명하고 풍부한 향을 뽑아낼 수 있을 거고. 그럼, 오……!’
나는 상기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타냐를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이 났다.
타냐가 알면 싫어하겠지만, 이럴 때 보면 에이포드와 정말 죽이 잘 맞는단 말이야. 절대 아니라고 펄쩍 뛰는 그녀의 모습이 절로 상상되는 걸 보면 나도 그 둘에게 익숙해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반응에 대한 것도 결과가 나왔었지.’
카르테인 공작가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도 여태껏 투자 문의가 들어오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덕분에 황금 열쇠를 사용했던 은행의 지점장은 근래 웃음이 끊이지 않는단 소식을 들었다.
나는 상당히 흡족한 경과를 떠올리며 이 내용을 나누기 위해 카르테인 공작과 다시 눈을 마주쳤다.
“줄리엔이 고용인들 대상으로 반응 확인해 본 거 아세요?”
“줄리엔이?”
“네. 신의 축복 이후로 레티시아를 찾는 사람들이 꽤 늘어서, 가는 김에 사용해 보라고 비누를 잘라서 나눠줬었나 봐요.”
“이렇게 말을 꺼내신 걸 보면 괜찮은 결과가 나온 모양이군요.”
괜찮다마다. 내 기대 이상이었는걸.
고용인들의 반응을 클로드가 직접 봤어야 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네. 직접 쓴 사용인들은 옷이 아니라 피부에 바르는 향수 비슷하게 받아들인 느낌이에요. 아무래도 비누로 씻고 나면 잔향이 남으니까요.”
나도 이번에야 안 건데, 고형 향수는 일반적인 향수보다 더 많은 기술을 사용해서 발전시켜야 하는 다음 단계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제조하는 방법에 차이를 둔 건데, 어쨌든 그 말은 이곳에서도 고형이나 반고형 상태의 향수들이 제법 쓰이고 있었다는 거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 엇비슷한 형태는 받아들이기가 더 쉬운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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